유기태가 움찔하더니 물었다.“무슨 뜻이에요? 그럼 방금 일부러 나를 시험해 본 거였어요?”“맞아요. 아니면 제가 당신이 적인지 동지인지 알 수 없잖아요?”진서준이 옅은 미소를 짓더니 유기태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성약당의 세력이 얼마나 강대한지 진서준은 어제 변희영을 통해 대충 요해했다.당주가 계실 때까지만 해도 성약당은 확실히 국내 제일 한의 조직이었다.하지만 당주가 여행을 떠나서부터 성약당은 변질해 재물만 끌어모으는 더러운 조직으로 변했다.“진서준 씨 진짜 20대 맞아요?”유기태가 놀란 얼굴로 진서준을 바라보며 물었다.이 자식의 심지는 절대 20대 청년의 심지가 아니었다.계략이 너무 깊었다.“당연하죠. 올해 갓 25살이 되었습니다. 신분증 보여드릴까요?”진서준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이 세상에서 생존하려면 식견이 있어야 하겠더라고요. 아니면 제가 벌써 죽었을 거예요.”유기태가 찬성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었다.“확실히 그래요.”“그럼 이제부터 성약당이 이 몇 해 동안 있은 일에 대해 상세하게 말씀해줄 수 있어요?”진서준이 물었다.유기태가 잠깐 머뭇거리더니 눈빛이 갑자기 강인해졌다.“잠깐만 기다려 봐요.”유기태가 말하면서 몸을 일으키더니 2층으로 올라갔다.얼마 안 돼 유기태가 상자 하나를 안고 내렸다.상자를 열어보니 안에 여러 가지 사진과 문서자료가 들어있었다.진서준이 꺼내서 몇 장 읽어보더니 낯빛이 삽시간에 변해버렸다.“이 망할 놈의 자식들.”자료와 사진은 전부 성약당의 다섯 장로가 몇 년 동안 저지른 악행이었다.사람을 구타하고 여자를 강간하고 회사를 강제로 빼앗고 살인, 방화 등 못된 짓이란 못된 짓은 빠짐없이 다 했다.저지른 죄악이 하늘을 찌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진서준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이 몇 해 동안 내가 적지 않은 증거를 수집했어요. 진서준 씨가 이 증거를 가지고 성약당을 처단해 주길 바라요.”유기태가 계속해서 말했다.“하지만 유씨 가문은 진서준 씨를 못 도와줘요. 유일하게 도울
유기태의 큰형은 유기명이고 현재 유씨 가문의 가주이다.평소 건강하던 유기명이 며칠전 갑자기 바닥에 쓰러져 유명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 보였지만 유기명의 발병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곧 운명할 것 같아 유씨 가문에서 하는 수 없이 유기철을 시켜 성약당의 장로를 모셔 오라고 한 것이다.유기태의 말을 듣고 난 진서준이 눈빛이 굳어지면서 음해가 아닌지 의심되었다.“제가 한번 가볼게요. 제가 큰형님의 병을 고칠 수도 있어요.”진서준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네? 진 대사님이 병도 볼 줄 알아요?”유기태가 놀란 얼굴로 진서준을 바라보았다.무술과 의술가 분리된지 천년이 넘었고 무술을 익힌 사람 중 99%는 의술에 대해서는 까막눈이다.때문에 진서준이 의술을 안다고 하니 유기태가 놀랄 게 뻔하다.“알아요. 빨리 큰형한테 가봅시다. 늦으면 위험할 수 있어요.”진서준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유기태가 바보가 아닌 이상 진서준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유기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면서 물었다.“진 대가님, 그렇다면 성약당의 사람이 독이라도 내렸단 말인가요?”“그저 추측일 뿐입니다.”진서준이 말했다.“하지만 이 몇 년 동안 성약당의 장로가 집에 들어온 적이 없어요.”유기태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성약당의 당주가 떠나고 나서 유씨 가문과 성약당의 사이가 점점 멀어졌다.만일 유기명의 병이 중해지지 않으면 그들은 절대 성약당의 장로한테 병을 봐달라고 부탁하지 않을 것이다.“성약당의 장로가 직접 독을 내리지 않아도 가능해요. 집에 있는 가족이 했을 수도 있어요.”진서준이 귀띔했다.이 말을 듣자마자 유기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가문에 첩자가 있다면 이건 큰일이 아닐 수가 없다.“대가님 말을 들으니 진짜 그럴 수도 있겠어요.”“빨리 가요.”두 사람은 유씨 가문의 개인 병원으로 급히 달려갔다.“누가 큰형한테 독을 내릴 것 같아요?”가면서 진서준이 물었다.유기태의 얼굴이 어두워지면서 말했다.“제일 의심 가는 사람은 큰형이 얼마
여태 결혼하지 않았던 유기명은 편지를 보고 감격하더니 바로 남주로 딸을 찾으러 갔다.그 뒤 유기명은 딸을 찾아 집으로 데려왔다.하지만 유씨 가족들은 갑자기 나타난 여자에 대해 악의가 심했고 심지어 적의를 보였다.결국 이 여자가 유씨 가문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아 유기명이 갑자기 쓰러졌다.하여 유기태는 이 여자가 한 짓일 것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유기명의 이야기를 듣고 난 진서준이 감탄하며 말했다.“큰형님 이야기가 아주 흥미롭네요. 직접 들은 게 아니면 소설인 줄 알겠어요.”유기태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소설은 논리가 필요하지만 현실은 필요 없어요.”“그렇긴 하죠.”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이었다.두 사람은 이내 유씨 가문의 개인병원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유기태를 따라 도착한 곳은 백 평 가까이 되는 개인 병실이었고 병실에는 사람이 잔뜩 서 있었다.얼굴이 창백한 유기명은 병상에 누워있었고 성약당의 사장로가 유기명의 팔목을 잡고 맥을 짚고 있었다.“한발 늦었어요.”성약당의 사장로를 보자 유기태의 낯빛이 삽시에 변했다.만일 진서준의 말이 진짜라면 유씨 가문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이다.진서준은 체내의 영기를 모아 눈으로 집중시키니 옅은 파란색 빛이 진서준의 눈 주위에서 맴돌았다.자세히 유기명을 바라보던 진서준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호국사님 말이 맞았어요. 성약당과 묘족 마을이 확실히 연관이 있어요.”진서준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뭐라고요?”유기태가 화들짝 놀라면서 다시 물었다.“진 대가님의 뜻은 우리 큰형이 고충의 독에 중독되었단 말이죠?”“네.”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진 대가님 혹시 우리 형을 살릴 방법이 있나요?”유기태가 다급하게 물었다.유기명이 이대로 죽는다면 유씨 가문에 대란이 일어날 것이다.“있긴 한데 손 쓸 기회를 찾아야 해요.”진서준이 말했다.“제게 맡기세요.”말하면서 유기태가 바로 앞으로 걸어갔다.“둘째 형이 무슨 일로 왔어?”유기태를 보고 유기철이 놀란 얼굴
“서준 오빠 오랜만이에요.”한 달이 지나 다시 진서준을 보게 되어 유정은 매우 기뻤다.하지만 유정의 신분은 이미 천지개벽의 변화가 생겼다.아빠가 없는 아이로부터 서남 제일 세가 유기명의 외동딸이 되었다.이제부터 그녀는 엄청난 부귀영화와 존경을 누릴 수 있다.유정을 바라보는 진서준의 눈빛은 복잡했다.유정이 바로 유기명이 그때 낳은 딸이라는 사실을 진서준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유정아...오랜만이야. 한 달 못 봤는데 많이 야위었어.”진서준이 다가가면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누가 널 괴롭힌 거 아니지? 있으면 오빠한테 말해. 오빠가 가서 때려줄게.”유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그저 여기 생활이 적응이 안 돼요.”20여 년 동안 엄마와 단둘이서 힘겹게 살아오다가 갑자기 재벌 집 자식이 되니 습관 되지 않을 법도 했다.“서준 씨...”고한영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진서준을 향해 걸어왔다.전에 고한영이 서남에 대단한 가문이 있는데 유정에게 무예를 가르쳐줄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그때 유기명은 이미 유정이 딸인 걸 알았지만 직접 말하지 않고 먼저 고한영에게 아무 이유나 대고 유정을 속여서 서남으로 데려오라고 했다.유정이 서남에 도착해서야 두 부녀는 서로 신분을 확인했고 유정의 어머니까지 가문으로 데려와 지금 장원 내의 별장에서 함께 살고 있다.“유정이가 유기명의 딸인 거 일찍부터 알고 있었어요?”진서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아니에요. 저도 한 달 전에야 알았어요.”고한영이 연신 고개를 저었다.고한영이 유정을 서남으로 데려오라는 유기명의 부탁을 들어준 것도 사실 진서준을 돕기 위해서였다.고한영은 진서준에 대한 유정의 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유씨 가문으로 돌아가 유정이 외동딸의 신분으로 유기명에게 진서준을 도와주라고 부탁한다면 절대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서준 씨 미안해요. 그때 사실을 말하지 못했어요...”고한영이 미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지나간 건 더 말하지 말아요.”진서준이 손을 흔들며 더
“곁에서 잘 지켜보고 있어요.”사장로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같이 어린놈이 의술이 있다면 얼마나 있겠어?”진서준이 사장로를 힐끗 보면서 말했다.“조금 전 대결하기 전에도 그렇게 말했는데 결과는요?”진서준이 조롱하자 사장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그건 네가 무인으로서 수련 재능이 있을 뿐이지 의술과 무술은 확연히 다른 거야.”사장로가 얼굴이 뻘게지면서 반박했다.“그건 당신 같은 바보에게 적용되는 말이에요.”진서준이 조용히 말했다.“나에게는 둘 다 똑같아요.”말하고 나서 진서준은 더는 사장로와 입씨름하지 않고 옆 테이블에서 은침 한 통을 가져왔다.은침은 이미 소독했기에 진서준은 그 중에서 10개를 꺼내 유기명의 머리에 천천히 꽂았다.“미련한 놈, 가주님이 무슨 병인지도 모르고 감히 침부터 꽂아?”사장로가 기회다 싶어 옆에서 비웃었다.“4진 중의 2진만 해도 무슨 병인지 알 수 있어요.”진서준이 담담하게 답하자 사장로의 얼굴색이 더 무섭게 변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장로는 유기명의 맥을 짚으며 허세를 잔뜩 피웠는데 이 말 한마디로 자기 의술이 사장로보다 높다는 것을 과시했다.‘이 자식이! 유기명을 못 구해내면 내가 널 어떻게 처리할지 두고 봐.’사장로가 화가 잔뜩 나서 생각했다.은침 10대를 유기명의 머리에 꽂고 나서 진서준은 체내의 장청결을 움직이자 영기가 은침을 따라 서서히 유기명의 체내로 수송되었다.바로 이때 침대 곁에 놓인 각종 기기에서 경고음이 들려왔다.띠띠띠...그러자 유기철과 사장로는 미친 듯이 기뻤다.“이 자식이 대체 뭐 하는 거야?”하지만 유기철은 화 난 듯 진서준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큰형을 죽였어?”‘하늘이 나를 돕는구려.’사장로는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참느라 이를 악물었다.유기태와 유씨 가족들도 표정이 변했다.“진 대가님, 이게 무슨 일인가요?”유기태가 급히 다가가며 물었다.“무슨 일이겠어? 이 자식이 큰형을 죽였어.”유기명이 고래고래 악을 썼다.“당황할 거 없어
유씨 가족들이 경악을 지르더니 눈빛에는 공포감으로 가득했다.그들은 10센티미터나 되는 지네가 인류의 콧구멍에서 기어 나오는 것을 처음 봤다.만일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니라면 유씨 가족들은 누구도 믿기 어려웠다.사장로와 유기철 두 사람의 얼굴색도 삽시에 변하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진서준은 줄곧 유기철과 사장로의 표정을 지켜보고 있었다.두 사람의 표정 변화를 본 진서준은 유기명 체내의 고충은 이 두 사람이 한 짓이라고 단정했다.유기철이 사장로를 노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에 질문이 가득 차 있었다.마치 “방금 이 자식이 못 구한다고 확신했잖아?”라고 묻는듯 싶었다.사장로도 침울하기 마찬가지였다.홍갈 지네가 스스로 기어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주인이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스스로 기어 나왔지? 유기명이 진짜로 죽은 걸까?’인체에 기생하는 고충은 생체 징후가 없으면 죽었다고 판단하고 스스로 먹이를 찾아 기어 나온다. 안 기어 나오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가주님이 갑자기 쓰러진 게 바로 이것 때문이에요.”진서준이 말하면서 다가가더니 기를 불어 넣은 손가락으로 홍갈 지네를 눌러 죽였다.이런 물건은 절대 살아남게 해서는 안 된다.큰 사형이 오랫동안 키운 고충이 죽어버리자 사장로는 안타까워 가슴이 아팠다.말 잘 듣는 고충 한 마리를 양성하기가 종사 한 명 양성하기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서준 오빠, 이게 뭐예요?”유정이 다가오면서 물었다.“고충이야.”진서준이 말하면서 유기명의 머리에 꽂은 은침에 손을 갖다 댔다.아직 치료가 끝나지 않았기에 다시 유기명을 깨워야 했다.유정은 고충을 모르지만 다른 유씨 가족들은 이 독물을 알고 있었다.“고충이라고요? 묘족 그쪽에서 키우는 거 아닌가요? 그게 왜 여기에 나타나요?”“너무 징그러워. 그렇다면 유씨 가문이 그들의 표적이 됐단 말인가요?”유기철이 이때 나서면서 말했다.“당황하지 마요. 묘족 마을의 고충이 비록 대단하기는
유기태의 얼굴색이 차가워지면서 대충 누가 한 짓인지 짐작이 갔다.유정이가 비록 유기명을 미워한다고 해도 죽일 마음까지는 없을 것이다.그리고 몇 해 동안 줄곧 남주에서 생활한 유정이 묘족 마을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없다.하여 유일하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유기철뿐이다.“기억이 안 나요.”시간이 많이 흘렀기에 유기명이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날 리가 없었다.“그럼 엄마 모시고 와.”유기철이 말했다.“무슨 뜻이에요? 내가 독을 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유정은 화가 나면서도 억울했다.“비록 미워한다고는 하지만 친아버지를 살해할 정도는 아니에요.”유기철이 그 말을 듣고 냉랭하게 웃으면서 말했다.“사람 마음은 아무도 몰라. 네가 오기 전에는 큰형이 건강했는데 네가 오고 얼마 안 돼서 누가 고충을 심어놨잖아.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지 않아?”다른 유씨 가족들도 고개를 끄덕였다.“기철이 말이 맞아. 네가 와서 가주가 앓아누웠어. 세상에 이런 우연이 있겠어?”“결백하면 엄마 데려와서 얼굴 보면서 얘기하자고 해.”“사람은 겉만 봐서는 몰라. 이렇게 예쁜 여자가 어떻게 이런 악랄한 짓을 할 수 있어?”병실에 있는 유씨 가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한마디씩 했다.이때 진서준이 유기명의 머리에 꽂은 은침을 뽑아내고는 고개를 돌려 유씨 가족을 냉랭하게 쏘아보았다.우르릉하는 소리와 함께 진서준이 한 가닥의 굵은 기세를 뿜어내니 유씨 가문은 압력에 눌려 숨을 쉴 수가 없어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진서준을 바라봤다.“이 자식이 감히 여기서 손을 써?”유기철의 눈 밑으로 음흉한 웃음이 한 가닥 스쳐 지나갔다.진서준을 없애기 위해 유기철은 그가 이곳에서 한바탕 난동이라도 부리기를 간절히 바라던 바이다.진서준만 해결하면 다음에 또 고충을 심어도 누구도 살려내지 못할 것이다.“젊은이. 여긴 네가 함부로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백발노인이 병실로 걸어들어오면서 말했다.순간 진서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기세가 가뭇없이 사라졌다.진서준이 눈빛을 모아
유기명 부녀의 가슴 따뜻한 모습에 진서준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만일 김형섭도 유기명과 같이 잘못을 뉘우쳤다면 진서준이 결혼식에서 신부를 빼앗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비록 서씨 가문이 압력을 가한다고 해도 김형섭이 강경하게 거절하면 서씨 가문도 김씨 가문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다.하지만 김형섭의 마음속에 가족은 이익보다 중요하지 않았다.유씨 가족들이 낮은 소리로 속삭이며 말했다.“능청스러운 것 좀 봐. 전에는 왜 저런 모습을 못 봤지?”“셋째가 한 말에 찔려서 연기를 하는 거지 뭐.”“시간 있을 때 꼭 가주님한테 말해야겠어. 절대 저 모녀들한테 속지 말라고.”비록 소곤거리는 소리가 낮았지만 병실에 있는 사람들이 거의 무인이라 그대로 귀속으로 전해왔다.유기태가 듣더니 화를 버럭 내면서 말했다.“여기 있지 말고 가서 할 일이나 해.”유기태가 화를 내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뿔뿔히 흩어졌다.“잠깐만.”진서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다른 일이 또 있어?”사장로가 진서준을 매섭게 노려봤다.이 자식이 오늘 그들의 계획을 다 망쳐버렸다.“성약당에 소식을 전해요. 며칠 뒤에 내가 성약당에 찾아갈 거예요. 몇몇 장로보고 목을 깨끗이 씻고 기다리라고 해요.”진서준이 차갑게 말했다.사장로가 흠칫하더니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좋아. 용기가 있으면 얼마든지 와. 오는 건 네 마음이지만 가는 건 그렇지 않을 거야.”사장로가 웃음을 거두더니 음흉한 눈빛으로 진서준을 매섭게 노려보고는 유기철과 함께 떠났다.유기명이 진서준의 말을 듣고 호기심에 찬 얼굴로 유정에게 물었다.“정아, 이 사람은 누구야? 전에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진서준이에요. 저의 양어머니의 아들이에요. 몸에 심어놓은 고충도 서준 오빠가 기어 나오게 했어요.”그러더니 유정이 이내 이어서 말했다.“서준 오빠를 만났을 망정이지 아니면 저와 엄마를 다시는 볼 수 없을뻔했어요.”이 기회에 유정은 진서준을 한바탕 추켜세웠다.그래야만 진서준에 대한 인상을 깊게 남길 수 있다.서남
“저년 운이 정말 좋네. 열 명이 넘는 총잡이가 덤벼도 못 죽이다니.”임동식의 눈에는 깊은 원한이 서려 있었다.“동식 형님, 이번에 저 여자를 못 처리했으니 다음엔 더 어려워질 겁니다...”“저 여자가 데려온 그 경호원은 보통 인물이 아니던데요. 박진강조차 그 경호원 상대가 되지 않았잖아요.”“그래서 이번엔 철저히 준비했어. 어제 이미 동남아 킬러 업계에서 유명한 킬러인 독룡에게 연락했어. 이틀 후면 명주에 도착할 거야.”임동식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독룡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자리에 있던 이들의 표정이 변했다.“혹시 그 국제적으로 돈 많은 부자 열댓 명을 죽인 적 있는 부자 킬러 말씀입니까?”“맞아.”임동식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그 킬러를 고용하는 건 호랑이와 함께 음식을 나누는 꼴 아닙니까? 제가 듣기로는 과거 그 킬러가 단지 고용주가 심기를 건드린 말을 했다는 이유로 자기 고용주까지 죽인 적도 있다던데요?”자리에 있던 한 노인이 겁먹은 얼굴로 말했다.이런 살인마와 협력하는 건 사실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임동식도 그런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지만 이내 침착하게 말했다.“큰 파도를 헤쳐야 큰 물고기를 얻는 법이야. 위험이 없다면 내가 굳이 그 킬러를 부를 이유도 없었겠지.”임동식의 말에 사람들은 저마다 혀를 끌끌 찼지만 속으로는 두려움도 컸다.독룡이 폭주해 임동식까지 죽여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었다.물론, 임동식이 죽는다면 그들에겐 대표이사 자리를 노릴 기회가 생길 수도 있었다.그러나 다들 방금 나눈 대화가 이미 황예은의 사무실에서 황예은이 전부 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리 없었다.황예은은 회의실에 미리 설치해 둔 감시 장비 덕분에 대화를 전부 녹음하고 있었다.“젠장! 어젯밤 총잡이들이 이놈들 짓이었다니!”황현호는 분통을 터뜨리며 말했다.“누님, 지금 당장 가서 이놈들 전부 죽여버릴게요.”“앉아.”황예은이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지금 만약 임동식 일당을 죽이려 했다면 굳이 황현호가 나설 필요도 없이 황예은
진서준의 말에 박진강은 자기가 죽을 것이라고 오해했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날 죽이지 마. 죽이지 말라고! 우리 아버지는 박서명이란 말이야!”지금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박진강은 자기 아버지를 들먹이며 진서준을 겁주려 했다.진서준은 냉랭하게 박진강을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언제 널 죽인다고 했어?”“그럼 무슨 뜻이야?”박진강은 가슴을 쓸어내렸다.“그야 당연히 말 그대로 네가 다시는 말을 못 하게 하겠다는 뜻이지.”말이 끝나자마자 진서준은 손가락을 뻗어 박진강의 목을 가볍게 찔렀다.그 순간, 공포스러운 기운이 허공을 가르며 박진강의 목을 꿰뚫었다.진서준의 이 손짓은 어떤 실수도 없이 정확히 박진강의 성대를 끊어버렸다.피가 상처에서 조금씩 흘러나왔고 극심한 고통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박진강의 뇌를 맹렬히 뒤흔들었다.박진강은 고통에 찬 표정으로 바닥에 쓰러졌고 입을 크게 벌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으며 그 모습은 심각하게 다친 벙어리 같았다.이 광경에 임동식을 비롯한 이사회 구성원들의 동공이 심하게 떨렸다.이 남자는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박서명에게 아들이 많긴 하지만 박진강은 어쨌든 그의 아들 중 하나였다.그런데 진서준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박진강의 성대를 잘라버렸다.이런 치욕을 박씨 가문이 어떻게 그냥 참아 넘기겠는가?“꺼져.”황예은이 차갑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황예은의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에 박진강은 아픔을 참고 비틀거리며 회의실을 빠져나갔다.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박진강은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 아버지 박서명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연결되었지만 박진강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고 전화 너머에서는 박서명의 목소리만 들려왔다.“진강아, 이른 아침에 전화하다니, 좋은 소식이라도 전하려는 거야?”그러나 박진강은 아무리 입을 열어도 소리를 낼 수 없었다.박서명은 한참 동안 기다렸지만 여전히 아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의아해했다.“진강아, 말하지 않고 뭐 해? 지금 뭐 하는 거야? 너 이 녀석. 계속 장난치면
박진강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황예은이 갑자기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누님, 어젯밤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예요? 내가 명주시 전역을 샅샅이 뒤지게 했는데도 찾을 수 없었어요.”황현호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황예은이 멍청한 남동생을 보는 시선은 어느 때보다 더 부드러웠다.“어젯밤 일은 더 이상 묻지 마. 넌 먼저 내 사무실로 가서 기다려. 할 말이 있어.”“알았어요.”황현호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고 진서준 옆을 지날 때 황예은에게 물었다.“누님, 이 사람은 누구예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요?”다른 사람들도 모두 시선을 돌려 진서준을 바라보며 호기심을 드러냈다.박진강 역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청년의 정체를 탐색했다.“새로 고용한 경호원이야.”황예은이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이 사람이 경호원이라고요? 농담하지 마세요.”황현호는 충격을 받은 듯 멍해졌다.겉모습만 봐도 이 청년은 경호원으로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것 같은 허약한 모습이었다.“누님, 이 녀석은 나보다도 더 약한 것 같은데요? 누님이 경호원을 원한다면 내가 직접 찾아줄게요.”황현호가 급히 말했다.“내 말을 못 알아듣겠어?”황예은이 얼굴을 굳히며 화내자 황현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황급히 회의실에서 달아났다.박진강은 앞으로 다가와 황예은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예은 누님이 무사히 돌아오셨으니 저는 이제 돌아가겠습니다.”말을 마친 박진강은 발걸음을 옮겨 회의실에서 나가려고 했다.“내가 가도 된다고 했어?”황예은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무슨 뜻이죠?”박진강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되물었다.“내 멍청한 남동생을 이용해 내게 독을 탄 짓, 내가 모를 줄 알았어?”그 말에 박진강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지만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예은 누님, 무슨 말씀인지 도무지 모르겠네요.”박진강은 시치미를 떼기로 했다.“저 녀석 잡아!”황예은도 더 이상 쓸데없는 한담을 하지 않고 간단하게 명령을 내렸다.
이사회 구성원은 많지 않았고 황씨 가문을 제외하면 총 여덟 명이었다.인원은 많지 않았지만 이 여덟 명은 모두 노련한 여우였다.황예은이 처음 자리에 올랐을 때도 이 여우들에게 꽤나 당했었지만 나중에 배로 되갚아주었다.다들 황예은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더는 섣불리 황예은과 정면으로 충돌하려 하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황예은이 사라지고 남은 건 황경영의 어리석고 멍청한 아들 황현호뿐이었다.그러니 이 노련한 여우들은 당연히 이런 멍청이가 자기 머리 위에 올라서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황현호는 한눈에 이사들의 얼굴이 굳어 있는 것을 보고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을 직감했다.“동식 삼촌, 이렇게 급하게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가요?”황현호는 의장석으로 걸어가 왼쪽에 앉아 있는 중년 남성에게 공손하게 물었다.임동식은 황씨 그룹의 두 번째 주주이자 회사의 원로였다.“현호야, 너희 아버지는 아직도 행방이 묘연하고 너희 누나도 어젯밤 큰 일을 당해 생사가 불분명하구나.”임동식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말했다.“우리 그룹은 작은 회사가 아니야. 하루도 주인이 없을 수 없어.”이 말을 듣자 황현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이건 아무래도 처음부터 자기를 몰아붙이려는 것 같았다.사실 임동식은 황현호 같은 멍청이와 쓸데없이 말싸움하고 싶지도 않았다.긴말은 필요 없고, 어차피 말해봐야 황현호가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그러니 차라리 명확하고 간결하게 하는 편이 나았다.“동식 삼촌, 제가 아직 여기 있잖아요?”황현호가 모르는 척하며 말하자 임동식은 미소를 지었다.“현호야, 네가 이렇게 어엿한 성인이 되는 걸 동식 삼촌은 다 지켜봤어. 네 사업 감각은 솔직히 평범하잖아.”“그럼 동식 삼촌의 의도는 무엇인가요?”“넌 우선 전력을 다해 너희 누나를 찾아. 회사는 일단 내가 관리하고 네 누나를 찾으면 다시 네 누나에게 대표이사 자리를 내줄게.”황현호는 어리석긴 하지만 바보는 아니었다.만약 이 자리를 지금 넘겨주기만 하면 임동식은 즉시
이제 황씨 가문엔 황현호 같은 멍청이만 남았으니 황씨 가문을 손에 넣는 건 시간문제인 것 같았다.박씨 가문과 황씨 가문은 오래전부터 경쟁 관계였고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는 사이였다.그런데도 머리가 비어 있는 황현호는 자기가 박진강과 진정한 친구가 되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박진강은 황현호의 곁에 앉아 위로하기 시작했다.“너무 초조해하지 마. 너희 누나가 누군가에게 구조되었다고 했잖아? 그렇다면 그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야.”“그런데 왜 전화를 받지 않지? 밤새도록 전화를 걸었는데도 말이야.”황현호는 초조하게 말을 이어갔다.“황씨 가문의 모든 직원이 우리 누나를 찾으러 나갔지만 밤새도록 아무런 소식도 없었어.”황현호가 아무리 생각해도 누나는 죽었거나 누군가에게 잡혀 감금당했을 가능성이 큰 것 같았다.어느 쪽이든 황현호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지금 황씨 가문의 회사는 뱃사공이 없어 산으로 가는 중이었다. 황예은이 빨리 나타나지 않는다면 회사는 큰 혼란에 빠질 것이 뻔했다.“너무 초조해하지 마. 산에 이르면 길이 있는 법이잖아.”박진강이 또 황현호를 달랬다.그때 황현호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황현호는 누나가 전화한 줄 알고 급히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하지만 발신자를 확인한 순간 황현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전화 건 사람은 회사 이사회 멤버 중 한 명인 동식 삼촌이었다.“동식 삼촌, 무슨 일이시죠?”“네 누나는 찾았어?”“아직 못 찾았습니다.”황현호가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럼 일단 회사로 와.”전화 너머에서 동식 삼촌이 말했다.동식 삼촌은 황경영과 오랜 친구였고 회사 설립 초기부터 몸담아 온 원로급 인물이었다.일부 사람들은 황씨 가문에 유능한 사람이 없다면 황씨 가문의 회사는 동식 삼촌의 손에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지금 황씨 가문의 유능한 사람인 황예은이 갑자기 생사가 불투명해진 상황에서 남은 건 황현호라는 무능한 인물뿐이었다.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사회 사람들은 슬슬 견디기 힘들어지고 있었다.“누
“진서준을 경호원으로 쓰겠다고요?”서지은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이번에 진서준이 명주시에 온 건 아주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이런 상황에서 진서준이 황예은의 경호원을 맡을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였다.“언니 곁에는 항상 죽청 어르신 두 분이 계셨잖아요. 근데 오늘 밤엔 그분들이 왜 따라오지 않았어요?”서지은이 문득 황예은 곁을 지키던 육급 정점 대종사 두 명을 떠올리며 물었다.“그 두 분은 요즘 칠급 대종사 경지에 오르려고 폐관 수련 중이야.”황예은이 답했다.신농산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청 어르신은 황예은을 찾아와 폐관 수련에 들어가겠다고 알렸다.이 두 사람이 동시에 칠급 대종사로 올라선다면 황예은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은 자기 실력을 몇 번이나 재고 또 재야 할 것이다.그러나 뜻밖에도 누군가가 이 두 사람의 폐관 시기를 노리고 황예은을 공격한 것이다.황씨 가문에는 죽청 어르신 외에도 팔급 대종사 한 마스터가 있었다.하지만 한 마스터는 황경영을 따라 해외에 나가 있어 지금 명주시에 없었다.그 외의 대종사들은 실력이 평범했고 진서준처럼 압도적인 실력을 갖춘 사람은 없었다.게다가 진서준은 의술까지 겸비하고 있어 설령 독에 걸린다 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내일 아침 일어나면 진서준한테 직접 물어봐요.”서지은은 진서준을 대신해 결정을 내릴 권리가 없었다.사실 서지은은 마음속으로 이 제안을 반대했다.겨우 진서준과 단둘이 있을 기회가 생겼는데 황예은 때문에 깨져버린 것도 모자라 이젠 경호원까지 맡으라고 한다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황예은은 명주시에서 외모와 몸매가 모두 최상급으로 평가받는 인물이었다.서지은은 언젠가 진서준이 황예은의 유혹에 넘어가 버릴까 봐 내심 걱정되었다.허사연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당장이라도 서울시에서 급히 달려올 게 뻔했다.“일단 오늘 밤은 여기서 묵고 가세요.”서지은이 대화를 마무리했다.그날 밤, 황예은은 아주 달콤하게 잠들었지만 그녀의 동생 황현호는 급한 마음에 미칠 뻔했다.시장은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누구나 범인일 수 있었다.박씨 가문과 마찬가지로 황씨 가문의 적도 수없이 많았다.“그럼 오늘 저녁은 누구랑 먹었어요?”서지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우리 동생이랑 먹었어.”서지은은 그 대답을 듣자마자 순식간에 동공이 흔들리며 무서운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명문대가에서는 혈육 사이에 관계가 틀어져서 원수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황씨 가문이 대한민국 최고 재벌 가문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황현호가 자기 누나를 질투해 이런 일을 벌일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황예은은 서지은의 생각을 꿰뚫어 본 듯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우리 동생은 권력이나 돈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야. 동생이 그런 것에 환장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황씨 가문을 이끌 기회는 없었을 거야. 다만 내가 가장 우려하는 건 우리 동생이 멍청하게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할 수도 있다는 거야. 내 부하들이 말하길, 요즘 들어 황현호가 박서명 아들과 친하게 지낸다고 하더라.”황예은과 황현호 남매는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황현호에게 있어서 황예은은 누나인 동시에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황경영이 황현호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황예은은 그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었다.황현호가 황예은을 해치려고 한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단, 황현호가 누군가에게 이용당하지 않았다면 말이다.“현호 씨 바보 아니에요? 황씨 가문이랑 박씨 가문 사이가 어떤지 뻔히 알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죠?”서지은이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강남 서씨 가문 아가씨인 서지은조차도 황씨 가문과 박씨 가문 사이의 악연을 알고 있을 정도였으니 황씨 가문의 직계인 황현호는 더더욱 이를 모를 리 없었다.“지난번에 내가 현호를 신농산에서 데리고 온 후로 그 애는 무도에 심취해서 그 김평안이라는 남자를 직접 쓰러뜨리고 싶다고 했어. 그 뒤로 현호는 무도 수련에 미쳐버린 것처럼 보였어. 마치 무엇에 홀린 사람 같았지. 박서명 아들 중 한 명이 엄청난 수련법을 얻었다고 하더라고. 우리 그 멍청한 동생은 그
“황예은 씨가 몸에 흉터를 남기고 싶으면 다른 사람한테 맡기세요.”진서준이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황예은의 몸에는 몇 군데나 총상이 남아 있었고 그 흔적은 꽤나 눈에 띄었다.완벽주의자인 황예은에게 있어서 가장 참기 힘든 것은 몸에 흉터가 남는 것이었다.만약 흉터를 없애지 못한다면 황예은은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며 잠에서 깨어날 게 분명했다.잠시 고민하던 황예은은 이를 악물고 결정을 내렸다.“좋아요, 이번에도 진서준 씨가 마음대로 해보세요.”어차피 이 남자는 이미 볼 것도 다 봤고 만질 것도 다 만진 남자였다.이런 사소한 것에 연연해 몸에 흉터가 남는다면 평생 후회할 게 뻔했다.진서준은 황예은의 말을 듣고 살짝 눈썹을 치켜올리며 불만스럽게 말했다.“황예은 씨 몸에 있는 흉터를 없애주는 게 어떻게 내가 제멋대로 하는 겁니까? 제가 뭐 황예은 씨 몸을 좀 본다고 해서 황예은 씨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도 아니잖아요.”“하지만 진서준 씨는 본 것만이 아니라 만지기까지 했잖아요.”황예은이 억울하다는 듯 반박했다.“그건 다 황예은 씨를 살리려고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진서준은 진심으로 화나기 시작했다.“황예은 씨가 이런 사람인 줄 알았다면 그때 구하지 말 걸 그랬네요.”지금까지 진서준이 구해준 사람들은 전부 감사의 인사를 연발했는데 황예은처럼 은혜를 원망으로 갚는 사람은 처음이었다.황예은도 사실 진서준이 자기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황예은은 자기가 지금까지 지켜온 순결이 훼손된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됐어, 서준아. 너 어젯밤 내내 고생했으니까 이제 가서 좀 쉬어.”서지은이 진서준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예은 언니, 잠시만 기다려요. 먼저 서준을 방으로 데려다줄게요.”진서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지은을 따라 방으로 갔다.방으로 돌아오자 서지은이 조용히 말했다.“서준아, 예은 언니한테 조금만 양보해 줘. 언니는 성격이 워낙 강해서 그래. 그래도 내가 보기엔 네게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어.”서지은
황예은이 옷을 다 갈아입자 서지은이 자리에서 일어나 진서준을 찾으러 갔다.“서준아, 예은 언니가 좀 화난 것 같으니까 이따가 해명할 때 되도록 조심해.”서지은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알았어.”진서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서준은 조심하라는 말을 다시 되새겼다.만약 상대가 너무 무례하게 굴면 진서준도 결코 양보하며 자세를 낮추지 않을 예정이었다.문제는 자기가 일부러 실수한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진서준은 황예은이 안에서 옷을 갈아입는 걸 번연히 알면서도 들어간 게 아니었다.게다가 진서준은 황예은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진서준 씨, 아까 지은한테서 들었는데, 진서준 씨가 저를 구했다고 하던데요.”황예은은 소파에 앉아 고개를 들어 진서준을 바라보았다.그 눈빛과 태도는 마치 왕좌에 앉은 여왕처럼 고압적이었다.이는 오랫동안 높은 자리를 지키며 형성된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황경영이 대한민국을 떠나기 전에 이미 황예은은 회사 업무의 일부를 맡아 처리하고 있었다.회사의 지도자, 그것도 여성이 지도자가 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그러니 황예은의 성격도 강인하고 단호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회사 사람들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었다.황예은이 이사장으로 올라간 후, 회사 내에서 황예은의 이름만 들어도 직원들이 벌벌 떨곤 했다.“맞아요. 제가 구했습니다.”진서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황예은 맞은편에 앉았다.그런데 앉고 나서야 진서준은 후회했다.황예은이 입은 옷은 목선이 매우 낮았다.비록 황예은이 자세를 바르게 고치고 앉아 있었지만 풍만한 가슴이 살짝 드러나 있었고 그 모습이 진서준의 시야에 그대로 들어왔다.당혹한 모습을 감추려고 진서준은 뒤로 기대어 눈을 감았다.하지만 이 자세는 상대방에게 매우 무례하다는 인상을 주었다.황예은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녀와 대화할 때 이런 태도로 임하는 것은 큰 실례였다.진서준이 소파에 기대 누운 모습을 보자 황예은의 마음속에서 잠잠했던 분노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진서준 씨는 다른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