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영권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진서준을 바라봤다.허윤진의 말대로라면 바로 눈앞의 이 스무 살 남짓한 청년이 허성태에게 청하13침을 놓은 건데 문제는 진서준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 청하13침은 체내에 충분한 내력이 없으면 아예 끌어올릴 수 없고 치료는 더 말할 것도 없다!부영권은 문득 귀신을 쳐다보듯 두 눈을 크게 떴다.그는 앞으로 다가가 진서준의 허리춤에 찬 옥패를 잡고 황급히 물었다.“이 옥패는 어디서 났죠?”부영권의 행동에 장내에 있던 뭇사람들은 화들짝 놀랐다.진서준은 ‘천기각’석 자가 새겨진 옥패를 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구창욱 어르신께서 주셨습니다.”“구창욱 어르신이요? 아니 어떻게... 창욱 어르신을 만나다니, 게다가 이 옥패도 드렸다고요?”부영권은 감격에 겨워 목소리까지 떨렸다.진서준은 눈썹을 살짝 치키며 물었다.“어르신을 아세요?”“당연하죠. 알다마다요. 이 청하13침을 바로 창욱 어르신께 배운 겁니다!”부영권은 황급히 손에 쥔 옥패를 내려놓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서더니 진서준에게 심심한 경례를 올렸다.“천기각 주인님께 인사 올립니다!”천기각 주인이라니? 대체 무슨 뜻이지?부영권 신의가 왜 한참 어린 청년에게 이토록 예를 갖추며 경례를 하는 거지?모두가 이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바닥에 무릎 꿇고 있던 허윤진도 입이 쩍 벌어져 사과 두 알이라도 통째로 입에 들어갈 것 같았다.진서준은 얼른 부영권을 부축했다.“일어나세요, 어르신. 저는 천기각 주인 같은 거 아닙니다.”“아니요. 구창욱 어르신께서 이 옥패까지 전해준 걸 보면 진서준 씨가 바로 차기 천기각 주인입니다!”부영권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그는 말하면서 그제야 마음속의 의혹이 다 풀렸다. 이 젊은이가 어떻게 청하13침을 알고 있는지 드디어 이해됐다.“서준 씨, 제발 우리 아빠 살려주세요!”허윤진이 말했다.“서준 씨, 제발 부탁드릴게요. 살려만 주신다면 평생 서준 씨의 노예로 살겠습니다!”허사연도 애원했다.진서준은 허사연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
허사연은 재빨리 다가와 아빠가 깨신 걸 보더니 마음이 훨씬 놓였다.“아빠, 좀 어때요?”그녀가 물었다.“많이 좋아졌어.”허성태는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그는 부영권을 보더니 그가 구해준 줄 알고 두 손을 맞잡으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신의님, 구해주신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부영권은 연신 고개를 내저었다.“제가 아니라 우리 천기각 주인님께서 구해주셨어요!”허사연은 난감한 표정으로 아빠에게 해명했다.“아빠, 서준 씨가 구해드렸어요.”“진서준 씨가?”허성태는 의자에 앉아있는 진서준을 바라보며 감격과 흥분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오늘 그는 진서준에게 두 번이나 구원받았다.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있을까?“살려줘서 고맙네. 자네는 앞으로 우리 가문의 귀빈이야!”진서준이 허씨 일가의 귀빈으로 거듭나자 병실 안에 있는 의사들은 복잡미묘한 기분이 들었다.허씨 일가는 서울시를 휘어잡는 존재이다!그런 가문의 귀빈으로 된다는 것은 앞으로 평생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뜻이다!게다가 진서준은 나이가 젊고 허성태의 두 딸도 아직 미혼이다.어쩌면 허씨 일가의 따님과 좋은 인연을 맺을 수도 있다.“다들 이만 물러가거라. 어르신 편히 쉬게 해드려.”부영권이 병실의 의사들에게 손을 흔들었다.그들은 감히 더는 머무르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인파로 붐볐던 병실이 한순간 텅 비어버렸다.“서준 씨, 저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저한테 연락 주세요.”부영권은 개인 번호를 그에게 남겨주었다.강남 명수 부영권의 개인 전화번호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10명을 초과하지 않는다.허씨 일가라 해도 부영권 조수의 번호만 갖고 있다.허성태는 부영권이 진서준에게 이토록 깍듯이 대하자 놀랍기도 하고 이해되지도 않았다.번호를 받은 후 진서준도 몸이 거의 회복한 것 같아 자리를 떠나려 했다.“저도 이만 가볼게요. 약재를 다 구하시거든 다시 연락 주세요.”진서준이 말했다.“잠깐만요, 서준 씨!”허사연이 재빨리 그를 불러세웠다.진서준은 눈썹을 살
오늘 연회에 참석한 하객들은 전부 상류층의 유명 인사들이라 진서준처럼 평범한 옷차림의 일반인은 제지당하기 마련이다. 문 앞의 경호원은 이런 옷차림의 하객을 처음 본지라 바로 차단했다.“손님, 초대장 보여주시죠!”경호원이 진서준을 가로막으며 말했다.진서준은 차분하게 대답했다.“초대장 없어요.”“초대장 없으면 입장하실 수 없습니다!”경호원이 야유 조로 말을 이었다.“밥 한 끼 얻어먹을 생각이라면 밖에 나가 우회전하시면 작은 식당이 하나 있거든요.”진서준이 싸늘한 눈빛으로 경호원을 노려봤다.“나 이지성 찾으러 왔어. 들어가서 진서준 왔다고 전해. 바로 알아들을 거야!”경호원은 여전히 듣는 척도 않고 진서준을 내쫓으려 했는데 칼날같이 예리한 그의 눈빛과 마주한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알았어요... 지금 바로 가서 전할게요!”경호원은 종종걸음으로 이지성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이고 나지막이 말했다.“도련님, 진서준이라는 분이 도련님 찾으러 왔습니다.”경호원의 말을 들은 이지성은 눈을 가늘게 떴다.백일잔치가 끝나거든 그를 찾아가려 했는데 집 앞까지 먼저 찾아올 줄이야.연회장의 뭇사람들을 보며 이지성이 변우재에게 손짓했다.“도련님, 무슨 일이십니까?”“진서준 이 새끼가 지금 왔대. 이따가 들어오거든 너 애들 거느리고 그 자식 잘 감시해!”이지성의 눈가에 야유가 가득 찼다.“내가 오늘 이 새끼 서울시에서 이름 날리게 해 주겠어!”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든 분야를 섭렵하고 있다.진서준이 만약 여기서 창피를 당한다면 앞으로 서울시에서 취직하기도 어려울 것이다.가장 중요한 건 연회가 끝난 후 이지성은 진서준도 제 엄마처럼 똑같이 장애인으로 만들어 종일 모욕을 당하게 할 생각이다!“네, 도련님!”변우재가 흥분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마치 진서준이 겪을 처참한 결말을 미리 보는 것만 같았다.문밖에서 진서준이 5분 정도 기다린 후 대문이 벌컥 열리고 변우재가 열댓 명의 건달들을 거느리고 그를 싸늘하게 쳐다봤다.“야 이 새끼야, 네가
그의 명령에 열댓 명의 경호원이 진서준을 둘러쌌다.덩치 큰 체구의 경호원들이 왜소한 체구의 진서준을 제압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주위를 둘러싼 하객들은 차가운 시선으로 지켜볼 뿐 경찰에 신고하거나 앞장서서 말리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다들 진서준이란 젊은이가 조만간 죽을 거라고 여겼으니까.진서준이 한 걸음 내딛자 더킹 룸 전체가 뒤흔들렸다.그는 곧이어 경호원들에게 몸을 돌리고 가차 없이 돌진했다.퍼퍼퍽...고작 몇 개의 동작에 열댓 명의 덩치 큰 사나이들이 죽은 개처럼 바닥에 축 처졌다.이 광경을 본 모든 이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다들 못 믿겠다는 눈길로 진서준을 쳐다봤다.바닥에 쓰러진 변우재는 발밑에 한기가 차오르고 떨리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이 자식 사람 맞아?’메인 석에 앉아있던 한 중년 남성이 이 장면을 지켜보더니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그가 바로 이지성의 아버지인 이혁진이자 이씨 일가의 세대주이다.그는 무인이라 진서준의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적어도 그조차도 진서준의 상대가 될 수 없다.긴 단상 위에서 이지성은 부하들이 일격을 견디지 못하는 모습에 욕설을 퍼부었다.“이런 쓰레기 같은 것들, 감방 다녀온 새끼 하나 못 제압해?!”진서준은 이지성을 쳐다보며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뭐... 뭐 하려는 거야?”이지성은 발끝에서부터 한기가 차올랐고 두 눈에 공포가 휩싸였다.“네가 우리 엄마 두 다리를 부러뜨렸지? 오늘 너도 똑같이 해준다!”엄마의 처참한 모습을 떠올리니 진서준의 눈가에 스친 살의가 더 짙어졌다.그는 한걸음에 이지성의 앞으로 돌진해왔다.이지성이 미처 정신 차리기도 전에 진서준이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이혁진이 말리려고 했으나 진서준의 속도가 너무 빨라 두 눈 뜨고 아들이 두 다리가 잘리는 걸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철컥철컥!”뼈가 부러지는 청아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이지성이 순간 바닥에 주저앉았다. 두 다리는 마치 꼭두각시처럼 전혀 통제되지 않았다.“으악...”처참한
이혁진은 허사연을 보자 활짝 웃으며 재빨리 그녀를 마중 갔다.“허사연 씨,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허사연이 차가운 표정으로 대답했다.“누군가가 여기서 소란을 피운다고 들어 직접 확인하려고 찾아왔어요.”“일개 건달일 뿐이에요. 저희가 알아서 해결할 수 있으니 사연 씨까지 신경 쓸 필요 없어요.”이혁진이 손을 비비며 웃었다.“오늘 밤 호텔 내의 모든 손실은 전부 저희 가문에서 배상하겠습니다.”이혁재가 이토록 겸손하게 말하니 허사연은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배상은 필요 없고 우리 호텔에서 허술하게 관리한 탓에 이 같은 일이 벌어졌으니 다 우리 쪽 책임입니다. 소란을 피운 자가 누구인지 얼른 확인해야겠네요.”이혁진이 앞에서 길을 안내했다.“네, 그럼 이쪽으로 오세요.”주변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고 또다시 쉬쉬거렸다. 진서준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에 연민과 야유가 가득 담겨 있었다.이씨 일가와 허씨 일가는 아예 같은 레벨이 아니다. 허씨 일가에서 손을 한 번 휘두르면 서울시 전체에 감당할 자가 몇 가문이 안 된다.이지성은 이리로 걸어오는 허사연을 보자 냉큼 눈물로 호소했다.“사연 씨, 저 새끼가 제 다리를 분질렀어요!”허사연은 그의 말을 듣더니 미간을 확 찌푸렸다.그녀가 오늘 이 일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허씨 일가는 서울시에서 명예가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다.“걱정 마세요. 우리 가문에서 오늘 반드시 지성 씨 일을 원만하게 해결해드리겠습니다!”허사연이 엄숙하게 말했다.이 말을 들은 이지성은 기분이 째질 것만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시선을 돌려 한 무리 사람들을 훑어봤다.“대체 누가 감히 여기서 소란을 피운 건지 똑똑히 지켜봐야겠어요...”그녀는 말을 채 잇지도 못한 채 문득 입을 다물었다. 마치 누군가가 손으로 자신의 목을 꽉 잡는 것만 같았다.허사연은 진서준에게 시선이 꽂히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이지성은 그녀의 표정을 관찰하지 못하고 허리를 곧게 펴며 진서준에게 욕설을 퍼부었다.“진서준, 이 세상 물정도 모르는 건
강성철의 명성은 너무 큰지라 허씨 집안마저 그를 건드리지 못했다.진서준은 사연의 고려를 눈치챈 후 말했다.“허사연 씨, 사람을 데리고 돌아가세요. 이 일은 제가 처리하면 됩니다.”“당신이 직접 처리한다고?”이혁진은 비웃었다.“강성철 어르신께서 오시기만 하면 그쪽은 죽은 거나 다름없어!”사연은 어금니를 꼭 깨물고는 서준을 보며 말했는데 그녀의 시선은 아주 굳건했다.“진서준 씨, 당신은 저희 허씨 집안의 은인이세요. 그러니 저희는 절대 서준 씨를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사연의 이런 단호한 태도는 서준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그래. 당신이 정 허씨 집안을 이 구렁텅이에 빠뜨리게 하고 싶다면 내가 힘을 보태주지!”혁진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이를 갈았다. 그는 직접 성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래 성철이 그에게 진 신세를 써버리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소중한 기횐데 이런 작은 일에 사용하기엔 너무 아까웠다.그런데 만약 이씨 집안이 사연이 서준을 데려가는 것을 눈 뜨고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 분명 상류사회의 비웃음을 자아낼 것이다.이후, 또 누가 이 씨네 와 비즈니스 합작을 하려 할 것인가!전화를 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호텔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려오면서 뒤이어 소란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사람들은 호기심에 유리창 너머로 밖을 보았는데 그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아래에는 사람들로 뒤덮여 있었고 그들의 손에는 칼을 들었다. 호텔은 삽시에 이들에 의해 막혔다. 대략 세어보니 적어서 백 명이나 되었다.사연은 이 장면을 보자 간신히 갖고 있던 희망이 재가 되는 것을 느꼈다.그녀도 비록 경호원을 데리고 오긴 했지만 이십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십 명이 백명과 싸운다면 질 게 뻔했다. 더욱이 상대방은 무기도 들고 있었다.비록 강성철이 그녀를 어떻게 하진 못하지만 진서준은 분명 죽을 것이다.끼익...연회장의 문이 열리면서 스무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두 줄로 들어와서 일자로 늘어섰다. 그들은 전부 키가 백구십 정도였고 검은색 양복을 입고
성철의 부하가 움직인 것을 보자 겁이 많은 사람들은 눈을 막으면서 이 피비린내 나는 장면을 감히 보지 못했다.성철은 부하를 막지 않았다. 자신이 죽을 거라고 계속 말하던 사람이 어떻게 죽는지 보고 싶었다.하지만 시퍼런 칼이 서준의 팔에 닿으려 할 때 그는 움직였다.서준은 손을 내밀어 두 손가락으로 칼을 잡았는데 아주 안정적이었다.성철의 부하는 덩치도 컸고 키도 190이 넘었다. 몸엔 근육이 단단히 잡혀있었는데 마치 큰 돌덩이 같았다. 그러니 그의 힘은 비리비리한 서준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었다.하지만 지금 서준은 두 손가락으로 그의 목숨을 앗아갈 뻔한 칼을 허공에 멈추게 했다.다들 입을 크게 벌렸고 성철도 제법 놀란 듯했다.젊었을 적 성철이라 해도 두 손가락으로 칼을 잡지는 못했을 것이다.“감히 나한테 칼을 휘두르다니, 죽지 못해서 안달이네요.”서준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가락을 세게 튕겼다.펑!큰 소리 후 칼은 절반으로 갈라졌다.성철의 그 부하는 연이어 뒤로 물러서면서 탁자에 부딪혔다. 그때야 간신히 힘을 빼고 제대로 섰다.그때 그는 자신의 손이 찢기면서 선홍색 피가 용솟는 것을 발견했다.성철의 눈동자는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서늘하게 말했다.“좀 배운 놈이구나. 그러니까 이렇게 날뛰는군.”“하지만 넌 상대를 잘 못 골랐어!”성철이 손을 쓸 거라고 생각한 찰나, 그의 머리 위에 달려 있던 샹들리에가 예고 없이 떨어졌다.이 위기의 순간에 성철의 부하 한 명이 힘껏 그를 밀어냈다.결국 이 부하는 성철 대신 떨어지는 샹들리에에 맞아 핏덩이로 되었다.서준도 샹들리에가 떨어지는 순간 아직 경악 속에서 헤매고 있던 사연을 안고 새처럼 뒤로 몸을 날렸다.성철은 이 장면을 보자 심장이 미세하게 떨렸고 눈동자엔 두려움으로 가득했다.만약 부하가 목숨으로 그를 구하지 않는다면 죽는 건 아마 그였을 거다.원래 성철은 이게 단순히 우연일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조금 있다가 벌어지는 일은 그로 하여금 아까 서준이 했던 말을 믿게 하였다.
성철은 강인한 남자였다. 스스로 팔을 부러뜨리면서 아픈 신음 하나 내지 않았다.손에 들고 있던 막대기를 버린 후 성철은 몸을 돌려 서준을 보았다.“선생님, 마음에 드십니까?”“음, 나쁘지 않군요.”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당신의 부하더러 붓, 주사 그리고 노란 종이를 가져오라고 해요.”곧 성철은 서준이 원하는 모든 물건들을 가져오게 했다.그는 종이를 탁자에 놓고 붓을 들어 주사를 먹으로 삼고 손을 휘저으며 재난을 막는 부적을 그렸다.“이걸 갖고 다니면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서준은 담담하게 말했다.“감사합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성철은 마치 소중한 보물이라도 얻는 것처럼 부적을 옷 주머니에 넣었다.예전엔 성철은 이런 풍수지리를 믿지 않았다. 미신적이라 여겼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 그는 서준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서준은 성철이 이 부적을 손에 넣은 후 그에게 해를 가하는 게 두렵지 않았다. 상대방을 살릴 수 있으면 당연히 그를 다시 끝이 보이지 않는 재난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선생님, 제가 뭘 도와드릴 수 있을까요? 말만 하시면 오늘 이씨 부자의 목숨을 끊을 수 있습니다.”이 말이 끝나자마자 이씨 부자의 안색은 순간 창백해지면서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연회에 참석한 사람들도 놀란 얼굴을 했다.“이렇게 죽이기엔 너무 아까워요. 가끔은 빈털터리로 사는 것도 죽음보다 잔인할 때가 있거든요.”홀의 기온은 서준이 이 말을 한 후 물이 얼어붙을 정도로 차갑게 변했다.지수는 눈앞의 서준을 보았다. 정말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자신이 마음대로 괴롭히던 서준이 이렇게 변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녀는 서준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사람을 구하면서 세상을 어진 마음으로 대하는 의사,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악마.도대체 뭐가 진정한 너야?’“이지성, 얼마 남지 않은 즐거운 시간을 잘 보내길 바라.”말을 마친 후, 서준은 몸을 돌려 호텔 밖으로 나갔다.서준이 간 후, 성철은 혁진을 차갑게 쏘
변철주는 그 말을 듣고 조태희를 바라보며 물었다.“이 아이가 한 말이 사실인가?”“사실입니다.”조태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인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이번 일은 너희 조씨 가문 잘못이 맞아. 하지만 혼약을 파기한 것도 나쁜 일만은 아니야.”변철주는 갑자기 화제를 돌리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연회에 참석한 다른 세가 권력자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선언했다.“여러분, 오늘 우리 변씨 가문이 연회를 개최한 이유는 여러분께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드디어 오늘 연회의 진짜 목적이 나왔다.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변철주의 다음 발언을 기다렸다.“우리 변씨 가문은 심씨 가문과 혼인 동맹을 맺을 겁니다.”이 한마디는 거대한 폭탄처럼 연회장을 순식간에 뒤흔들었다.“진짜였구나. 난 단순한 소문인 줄 알았어.”“조씨 가문은 이제 끝났군. 앞으로 동북에선 조씨 가문이 사라지겠어.”“앞으로가 아니라 오늘 밤이라고 봐야지. 흑권왕 같은 살인마가 나서면 조태희 일행은 오늘 살아서 나가기 어려울걸.”사람들은 조태희 일행을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처음엔 조씨 가문과 심씨 가문이 손잡고 변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조씨 가문이 함정에 빠진 꼴이었다.조태희와 조기강의 얼굴은 이미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역시나 예상이 틀리지 않았어...’심민경은 상황이 뜻대로 돌아가자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말했다.“조 가주, 당신 딸이 우리 동생에게 무릎 꿇고 빌면 우리가 당신 가문을 살려줄 수도 있어요.”조민영은 그 말을 듣고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정말입니까?”조민영의 말에 심민경은 더욱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맞아요, 사실입니다.”물론 사실일 리 없었다.심씨 가문과 변씨 가문은 오늘 밤 조씨 가문을 절대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오늘 밤 이 세 사람은 절대 살아서 변씨 가문의 장원을 나가지 못할 것이다.“민영아, 저 개수작에 속지 마!”조태희는 서둘러 조민영을 뒤로 끌어들이며 변철주를 향해 분노를 터뜨렸다.“변 어르
심민경이 내놓은 6조 원 배상금과 조민영에게 무릎 꿇고 사과하라는 요구는 누가 봐도 도를 넘은 요구였다.조태희는 물론, 구경하던 사람들도 심민경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게 분명했다.하지만 사람들은 심민경이 이렇게 뻔뻔하게 요구한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속으로 곰곰이 생각했다.무언가 깨달은 몇몇 사람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고 그들의 시선은 변씨 가문의 저택으로 향했다.심씨 가문이 조씨 가문과 이렇게 공개적으로 맞설 수 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바로 변씨 가문과 손을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조씨 가문의 상황은 정말 암울해질 수밖에 없었다.심민경의 터무니없는 요구에 조태희는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거절했다.“그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그러자 심민경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그럼 우리 가문에 어떤 배상을 하시겠다는 겁니까?”조태희는 얼굴을 굳히며 강경한 태도로 대응했다.“배상 같은 건 없습니다. 혼약은 이미 끝났고 사과도 없을 겁니다. 심씨 가문이 받아들일 수 없다면 정면으로 대결해 보죠.”결단을 내려야 하는 밤인 만큼, 조태희도 물러서지 않고 단호한 태도로 맞섰다.조태희가 갑작스럽게 강단을 보이자 심씨 가문의 세 사람은 모두 놀란 기색을 보였다.‘무슨 상황이지? 설마 조씨 가문이 외부 지원을 받은 건가?’놀라움도 잠시일 뿐, 심국강의 얼굴엔 맨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분노가 스쳤다.“조태희,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어?”“당연하지. 혼약은 우리가 이미 파기했고 절대 사과하지 않을 거야. 너희 가문이 불만이라면 지금이라도 한번 손대봐.”조태희는 거침없이 선언했다.그 얘기를 들은 주변에 모인 유명 인사들은 재빨리 물러났다. 혹시라도 싸움에 휘말리기라도 할까 봐 우려했기 때문이다.심국강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 아주 좋아. 조씨 가문 태도가 정 그렇다면 우리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두 가문이 곧 서로에게 달려들 태세로 긴장을 끌어올릴 무렵, 위엄 넘치는
심국강은 전형적으로 각진 네모난 얼굴에 표정만으로도 압도적인 위엄을 뿜어내는 사람이었다.심국강은 군 출신으로,20년간 군대에서 복무하며 강인한 카리스마를 길러왔다.조태희가 주동적으로 말문을 열었다.“심 가주!”심국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조 가주, 제가 드릴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그래요? 공교롭게도 저도 드릴 말씀이 있네요.”조태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먼저 말씀하시죠.”심국강은 여유로운 태도로 응답했다.“제 딸이 심도준과 결혼하는 건 없던 일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조태희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요즘은 자유 결혼이 유행이라고 하더라고요. 제 딸에게 조씨 가문의 운명을 맡기자니 저도 내키지 않더군요. 제 딸만 믿으면 우리 조씨 가문 남자들이 너무 무능해 보일 테니까요.”조태희의 말에 심국강 옆에 있던 젊은 여자가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다.“그게 무슨 말이죠? 조씨 가문에서 파혼하겠다는 말씀인가요? 파혼하려면 우리 심씨 가문에서 먼저 해야지 당신들 조씨 가문이 뭔데 그렇게 굴어요?”심민경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꾸짖으며 조태희의 체면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심민경의 언성이 너무 높아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자연스레 이쪽으로 집중되었다.“민경아, 조 가주와 그런 말투로 말하면 돼? 얼른 사과드려.”심국강이 훈계하듯 말했지만 말투는 한없이 가벼웠고 전혀 진심으로 나무라는 기색이 없었다.조태희는 조씨 가문 가주로서 심민경 같은 후배에게 공개적으로 비난을 당하자 얼굴에 불쾌함이 스쳤다.“신 가주, 따님을 그렇게 가르치셨습니까?”조태희는 굳은 얼굴로 차갑게 물었다.“제 딸 교육 문제는 조 가주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심국강은 조태희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우리 심씨 가문과의 혼인은 조 가주가 제안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파혼을 먼저 꺼내는 것도 조 가주님이네요. 조 가주 눈에 우리 심씨 가문은 그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인가 봅니다?”심국강이 내뿜는 강렬한 기세는 주변 공기를 압
변지오는 허윤진과 허사연이 이미 자기와 심도준의 노리개나 다름없다고 확신했다.여기는 동북지역 변씨 가문 세력 범위 내에 있는 수은 장원이었다.허사연 자매가 아무리 하늘을 찌르는 능력이 있다 한들, 변지오의 손바닥 안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동북의 3대 가문은 2대 가문으로 축소될 터였다.변씨 가문이라는 배경이 있었기에 변지오는 오만방자하게 행동하며 누구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변지오가 거만하게 웃는 꼴을 본 허사연 자매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다.그때, 얼음처럼 차가운 한마디가 터져 나왔다.“네 유언은 그걸로 끝이야?”변지오가 그 말에 멈칫하더니 눈에서 섬뜩한 빛이 번뜩였다.“너 따위가 뭔데 감히 내 앞에서 짖어대? 아까 낮에 허씨 집안에서 널 때리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까 내가 가마니로 보이지?”말이 끝나자 변지오의 몸에서 강력한 무인의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이 기세를 보니 내공 절정이 틀림없었다.스물 남짓한 나이에 내공 절정까지 수련했다면 확실히 탁월한 천재라고 할 만했다.대도시는 몰라도 적어도 지방에서는 변지오가 큰소리를 떵떵 치며 다닐 수 있었다.비록 종사 아래는 전부 개미와 같은 수준이라는 말이 있긴 했지만, 대한민국 전체를 놓고 봐도 종사급 무인은 손꼽힐 정도로 적었다.더구나 최근 대한민국 무도계는 큰 재난을 겪어 해외의 이족들과 맞서 싸우다 수많은 종사급과 대종사급 강자가 전사해 호국사들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었다.충성을 다해 국가를 지킬 종사급 강자를 다시 육성하려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이런 큰 배경 때문에 변지오는 진서준을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내공 절정인 자기와 맞서 싸우려면 종사급 무인이 나타나지 않는 한 대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그런데 보잘것없는 평범한 인간이 감히 무인인 자기를 도발하다니, 변지오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됐어, 그만하자. 연회 중에 변씨 가문 도련님이 평범한 인간이랑 시비 붙는 모습을 사람들이 보면 체면이 구겨지지 않겠어?”
그리고 조민영을 데려가지 않은 이유는 딸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으려는 의도였다.“민영 씨,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진서준도 조태희를 거들었다.“아니요, 저도 같이 가요.”하지만 조민영의 태도는 단호했다.“그럴 건가요? 그럼 아빠랑 함께 가요.”진서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알겠습니다.”진서준의 말이 떨어지자 조태희는 더 이상 실랑이하지 않고 조민영을 데리고 심씨 가문 사람들 쪽으로 향했다.조태희 부녀가 떠난 후, 허사연이 말문을 열었다.“서준아, 정말 민영 씨를 심씨 가문에 시집보낼 생각이야?”“모든 건 조민영이 스스로 결정할 일이야. 조민영이 원하면 시집보내는 거지.” 진서준은 차분하게 대답했다.조민영이든, 진서라든, 다들 스스로 결혼을 원하는 결정을 내린다면 진서준은 절대로 방해하지 않으려고 결심했다.결혼하든, 하지 않든, 모든 건 그녀들이 선택한 삶일 뿐, 다른 누군가가 대신 결정을 내릴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 진서준의 생각이었다.“조민영은 심씨 가문에 시집가는 걸 원하지 않는 것 같아.”허윤진은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단지 자기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결혼을 선택하려는 거야.”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 청년이 진서준 일행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응? 저 세 명은 어떻게 들어왔지?”멋진 옷차림을 한 변지오는 차가운 눈빛으로 진서준 일행을 바라보았다.“지오야, 저 사람들 네가 아는 사람이야?”변지오와 비슷한 나이대의 또 다른 청년이 물었다.“알지. 오후에 허씨 가문 집안 어르신이 내게 존예를 소개한다고 했잖아. 바로 저 여자야.”변지오는 허윤진을 가리키며 말했다.“대박, 저렇게 예쁜 자매는 처음 봐.”그 청년은 부러워 입을 쩝쩝 다시며 말했다.“나도 아쉽긴 해. 내가 네 여동생과 결혼하지 않으면 저 두 여자를 너랑 나랑 하나씩 나눠 가졌을 텐데.”그 말을 듣자 변지오는 웃음을 터뜨렸다.“도준아, 네가 내 동생과 결혼한 게 대수야? 어차피 결혼해도 넌 따먹을 여자 다 따먹잖아.”“좋아, 나중에
조민영은 심씨 가문에 시집가기 전에 꼭 다시 한번 김평안과 만나고 싶었다.조민영은 김평안에게 제대로 작별 인사를 하고 이후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김평안에게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김평안에 대한 감정이 단순히 남녀 사이의 호감인지, 아니면 오빠에게 기대고 싶은 감정인지 심지어 조민영 자신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그저 김평안이 옆에 있으면 조민영은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는 것만 확신할 수 있었다.진서준은 순수한 얼굴을 한 조민영을 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 사람은 지금 수련 중이에요. 어디서 수련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 이번에 봉천시에 온 것도 김평안이 부탁해서 온 거예요.”자신의 소원이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만 조민영은 그 말을 듣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실망감에 빠져 고개를 푹 숙인 조민영을 보며 진서준은 격려의 말을 건넸다.“괜찮아요, 나중에 또 만날 기회가 있을 거예요.”“아니에요... 더 이상 기회는 없을 거예요.”조민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조태희는 그제야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진서준이 멀리서까지 와서 조민영의 병을 치료해 준 건 전부 김평안 덕분이었다.조태희는 김평안에 대해 좋지 않았던 인상이 지금 완전히 사라졌다.“민영아, 걱정 마. 이 진 마스터님이 우리가 지금 겪는 모든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해 줄 거야.”조태희가 조민영을 안심시키며 말했다.“아니요, 저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이 저 때문에 피를 흘리게 하고 싶지 않아요.” 조민영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아빠, 저 한 사람으로 우리 조씨 가문 장래가 밝아지게 할 수 있다면 저는 절대 후회하지 않아요.”조민영의 결연한 태도를 본 허사연과 허윤진은 즉시 그녀에 대한 편견을 버렸다.진서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이 아이는 진서라와 정말 닮아 있었다.진서준은 여전히 차분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었고 조민영의 결정을 두고 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민영아, 이제 심씨 가문 도련님과 결혼하지 않아도 돼. 오늘 연회에 참석하는 것도 심씨 가문과 변씨 가문 앞에서 우리 조씨 가문 미래는 네가 짊어질 필요가 없다고 선언하기 위해서 가는 거야.”“네?”조민영은 그 말에 그대로 얼어붙었다.이전에 조민영이 심씨 가문 도련님과 결혼해야 할지 망설이던 그때, 조태희가 얼마나 입이 아프게 자기를 설득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런데 조민영이 병으로 쓰러지자마자 아버지가 이렇게 태도를 180도로 바꿀 줄은 몰랐다.조민영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의아한 눈빛으로 조태희를 바라봤다.“아빠, 저한테 장난치는 거 아니죠?”“당연히 아니지. 아빠가 이제 결혼 안 해도 된다고 했으면 정말 안 해도 되는 거야.”“그래도...”조민영은 그 말에 오히려 더 초조해졌다.조민영은 이 사회의 더러운 풍파 속에서도 순진무구함을 유지해 온 사람이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민영이 세상의 이치를 모르는 순진한 바보는 아니었다.조씨 가문과 심씨 가문이 혼인이란 특별한 관계로 손을 잡지 않으면 심씨 가문이 변씨 가문과 동맹을 맺을 게 뻔했다.그렇게 되면 조씨 가문은 동북 지역에서 떠나든가 아니면 완전히 사라지는 길만 남을 것이다.“민영아, 사실 아빠가 이런 결정을 내린 건 우리 조씨 가문에 귀인이 찾아왔기 때문이야.”조태희가 웃으며 설명했다.“귀인이라고요? 어떤 귀인이죠?”조민영은 여전히 의문투성이였다.“이건 내가 너한테 묻고 싶은 말인데?”조태희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너 대체 언제부터 진 마스터랑 친구가 된 거야?”이 질문을 들은 조민영은 어안이 벙벙했다.진 마스터라니, 조민영이 아는 사람 중에 진씨 성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아빠,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저 진씨 성을 가진 사람은 모르는데요?”조민영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되물었다.“그럴 리가 있겠어? 네 병을 고쳐준 사람이 바로 진 마스터야.”조태희는 딸이 부끄러워서 그러는 줄 알고 웃으며 말했다.“민영아, 너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 남자친구를 사
허씨 가문을 떠날 때야 허윤진은 진서준과 함께 온 하얀이를 알아챘다.“진서준, 이 원숭이는 어디서 샀어?”허윤진은 하얀이를 원숭이로 착각하며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봤다.하얀이는 그 말에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왜 다들 날 원숭이 취급하는 거지? 정말 원숭이처럼 생긴 건가?’진서준은 피식 웃으며 설명했다.“이건 원숭이가 아니라 천산의 괴물 설괴야.”“설괴라고?”허윤진은 생전 처음 듣는 단어에 눈을 반짝였다.“그래. 내가 천산에서 약초를 캐다가 만난 녀석이야. 쉽게 말하면 누렁이 친구라고 생각하면 돼.”진서준의 말에 허윤진은 금세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누렁이한테 친구 만들어주려는 거야?”허윤진이 웃으며 물었다.“그런 셈이지. 게다가 하얀이는 누렁이보다 훨씬 강해. 집에서 누렁이랑 함께 있으면 어머니랑 서라 걱정을 덜어도 될 거야.”그때 허사연이 뜬금없이 물었다.“서준아, 그럼 변씨 가문 문제는 어떻게 처리할 거야?”아까 허순재가 말했던 것처럼 변지오는 변씨 가문 가주의 장남이었다.게다가 변씨 가문은 동북 지역에서 손꼽히는 명문대가였으니 잘못 건드렸다가는 세 사람이 곤란해질 게 뻔했다.진서준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오늘 저녁에 열리는 변씨 가문 연회에 같이 가자.”“응? 근데 우린 초대도 안 받았잖아?”허윤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설마 우리가 강제로 들어가겠다는 건 아니겠지?”“변씨 가문이 우리를 초대하진 않았지만 조씨 가문은 초대받았잖아.”진서준이 조씨 가문을 언급하자 허윤진은 질투 어린 눈길로 진서준을 바라봤다.“아차, 깜빡했네. 네 귀여운 애인이 조씨 가문의 금지옥엽이었구나.”진서준은 그 말에 난감한 표정으로 웃었다.“무슨 소리야? 민영이는 내 마음속에서 그냥 여동생 같은 존재야.”조민영은 진서준의 마음속에서 아무런 연애 감정도 없는 단순한 가족 같은 존재였다.조민영은 진서라처럼 진서준이 보호해 주고 싶은 대상일 뿐이었다.“흥, 너희 남자들 속은 뻔히 보인다고.”허윤진은
지금 허순재가 진서준과 말다툼을 벌이는 상황에서 허사연이 진서준을 편들지 않을 리 없었다.“작은할아버지, 제 남자 친구 문제는 이제 그만 신경 쓰세요. 그리고 윤진 남자친구 문제도요. 이런 건 작은할아버지와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에요.”허순재의 동공이 흔들리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이를 꽉 악물었다.불효녀들이 오늘 여기서 대역죄를 저지르는 판이었다.옆에 있던 변지오는 상황을 대충 이해하고 냉랭하게 웃으며 말했다.“허 어르신, 보아하니 허씨 가문 젊은이들이 당신 말을 전혀 듣지 않는 것 같군요. 사실 오늘 밤 우리 범씨 가문 저택에서 여는 연회에 허씨 가문을 초대하려 했는데, 이제 보니 그럴 필요가 없겠네요.”변지오는 허순재가 만류하려는 것도 무시하고 곧장 허씨 가문 저택을 떠났다.허순재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허사연과 허윤진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외쳤다.“너희 둘, 정말 날 화병으로 죽이려는 거야?”진서준의 눈빛은 싸늘했다.“당신이 사연과 조금이라도 혈연이 있었기에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당신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겁니다.”이 말은 허순재에게 겁주려고 위협하는 말이 아니었다.진서준은 이미 조씨 가문에서 조민영이 가문 사이 결혼을 강요당한 일을 듣고 내심 불쾌한 상태였다.그런데 허순재가 이번에는 허씨 가문을 위해 허윤진을 변지오에게 넘기려 하다니, 이건 진서준의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진서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몹쓸 짓을 하려는 자는 죽어 마땅했다.그런데 뜻밖에도 허순재는 피식 웃으며 진서준을 비꼬았다.“나도 한때 너처럼 젊고 겁 없던 시절이 있었지. 하지만 곧 너희가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거야. 변씨 가문의 압도적인 실력은 너희처럼 세상 물정을 모르는 자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야.”허순재의 뻔뻔한 모습에 허사연은 역겨워 구역질이 났다.왜 지금까지 이 노인이 온순한 양의 가면을 쓴 늑대라는 걸 몰랐을까?“가자, 서준아. 여기 더 있을 필요 없어.”허사연은 더 이상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너희가 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