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병원에 계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시간 나실 때 아무 때나 오시면 됩니다. 아니면 병원에 치료하기 어려운 환자가 있을 때 제가 연락드릴 테니 그때 오셔도 됩니다. 월급은 원하시는 금액을 말씀해 보세요. 제가 최대한 맞추려고 노력하겠습니다!”우성환이 내건 조건을 들은 사람들은 부러워했다.그러나 그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진서준의 의술은 정말 굉장했기 때문이다.진서준 같은 사람은 어느 병원이든 서로 빼앗으려고 할 것이다.진서준은 잠깐 고민해 보더니 물었다.“제가 특별 초빙 의사가 된다면 여기 병원의 교수보다 권력이 클까요?”우성환은 흠칫했다가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고, 곧바로 진서준이 이런 질문을 한 의도를 눈치챘다.“진서준 씨가 저희 병원의 특별 초빙 의사가 된다면, 자르고 싶은 사람이 있을 때 제게 말 한 마디 해주시면 됩니다! 그럼 그 교수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다른 사람들은 영문을 몰랐기에 진서준과 우성환의 대화에 어리둥절해졌다.병원에 외과 교수, 내과 교수 등 교수는 많았다.설마 병원의 어느 교수가 진서준의 심기를 거스른 걸까?“그래요? 그 사람이 말하길 자기 아버지 직권을 이용해서 자기 여자 친구를 병원에 꽂아주겠다고 하던데.”진서준의 말에 우성환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한 중년 남자에게 물었다.“오늘 병원에 채용 면접이 있나요?”중년 남자는 움찔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오늘 채용 면접은 윤 교수님께서 책임지셨습니다.”어떻게 된 일인지 알지 못하던 사람들은 윤 교수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진서준을 건드린 사람은 병원의 외과 교수 윤도석이었다.“면접이 몇 시부터죠?”우성환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9시 30분부터 시작입니다. 10분쯤 남았습니다.”“다들 각자 볼 일 보세요. 집으로 돌아가 쉴 분들은 쉬세요.”일부는 떠났고 일부는 윤도석이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궁금하여 그곳에서 기다렸다.“진서준 씨, 진서준 씨와 부영권 선생님께서 계셔서 다행입니다. 이번 면접에서 진서준
윤도석은 밖으로 나온 뒤 그를 찾은 의사를 따라 복도 제일 안쪽에 있는 사무실로 왔다.사무실 안에 들어서자마자 윤도석은 깜짝 놀랐다.사무실 안에는 십여 명의 의사가 있었는데 그중에는 원장 우성환과 부영권도 있었다.“원장님, 부영권 선생님.”두 사람을 본 윤도석은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윤도석 교수님, 소개하겠습니다. 이분은 진서준 선생님이라고 우리 병원의 특별 초빙 의사입니다.”우성환은 굳어진 표정으로 엄숙하게 진서준의 신분을 소개했다.윤도석은 그 말을 듣더니 곧바로 고개를 돌려 진서준을 바라보았다.진서준은 20대 청년이었기에 그는 우성환이 자기를 놀리는 건가 싶었다.특별 초빙 의사는 교수인 그보다 권력이 더 컸다.그리고 원장의 권력이 이곳에서 가장 컸기에 윤도석은 우성환의 말에 따라야 했다.“진서준 씨, 안녕하세요.”윤도석은 곧바로 진서준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인사를 건네는 윤도석을 향해 진서준은 냉담하게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진서준의 태도에 윤도석은 조금 불쾌했다.병원 교수인 데다가 그보다 스무 살은 더 많은데 이런 태도를 보이니 말이다.윤도석은 매우 화가 났지만 원장이 자리에 있었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이번 면접은 진서준 씨와 부영권 선생님이 함께 들어갈 겁니다. 면접 책임자는 진서준 씨가 될 거고요.”우성환의 말을 들은 윤도석은 넋이 나갔다.이번 면접에서 그는 아들의 여자 친구뿐만 아니라 꽤 예쁘장한 여대생 두 명을 합격시키기로 했다.그는 상대방의 돈을 받았고 두 여대생은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 했다.그런데 지금 이제 와서 갑자기 책임자를 바꾼다면 분명 구설에 오를 것이다.“그... 면접 같은 사소한 일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어떻게 진서준 씨와 부영권 선생님을 귀찮게 하겠어요?”윤도석은 포기하지 않았다.그러나 우성환은 그에게 기회를 줄 생각 따위 없었다.“이 두 분께서는 지금 한가하세요. 그리고 이 기회를 통해 우리 서울 병원이 어떤 수준인지도 보고 싶어 하시고요. 이 일은 이렇게 정해졌으니 윤 교수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진서준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휴대전화를 살 수 없었기에 많은 사람과 연락이 끊겼다.“난 면접 보러 왔어.”진서준이 웃으며 말했다.“어? 너도 면접 보러 왔다고?”가태윤은 깜짝 놀랐다.“너 설마 의대 나온 거야?”“아니.”진서준은 고개를 저었다.“서준아, 내가 일부러 너 상처 주려고 그러는 건 아닌데 의대 출신이 아니거나, 명문대 출신이 아니면 이 병원에 들어가기는 힘들어.”가태윤은 진서준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진서준은 그 말을 듣고 웃었다.“난 상관없어. 중요한 건 네가 이 병원에 들어올 수 있는지 없는지야.”가태윤은 한숨을 푹 쉬었다.“나도 아마 들어가긴 힘들 거야. 내가 알아봤는데 이미 세 명이 편법을 썼대. 이제 자리가 두 개만 남았으니 난 가망이 없을 거야.”가태윤은 진작 사회에 발을 들였기에 학교와 사회가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이 사회에서 발을 붙이려면 뒷배와 인맥이 없으면 안 됐다.“내가 장담하는데 실력만 있다면 반드시 이 병원에 들어올 수 있을 거야.”진서준이 웃으며 말했다.진서준의 진지한 모습에 가태윤은 장난스레 말했다.“설마 네가 이번 면접 책임자야?”“잠시 뒤면 알게 될 거야.”진서준이 싱긋 웃었다.“허풍 떨지 마. 이제 곧 면접 시작이니까 우리 빨리 가자!”가태윤은 진서준을 끌고 면접실로 향했다.면접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진서준은 걸음을 멈추었다.가태윤은 안에 사람들이 꽤 많이 있는 걸 보았다. 심지어 면접관도 이미 도착한 상태인 걸 본 그가 말했다.“우리 앞문 말고 뒷문으로 들어가자.”진서준은 부영권에게 앞문으로 가라고 눈치를 준 뒤 가태윤과 함께 뒷문으로 면접실 안에 들어갔다.“부영권 선생님!”부영권이 들어오자 윤도석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를 맞이했다.“진서준 씨는요?”“면접 시작하면 올 겁니다.”부영권이 덤덤히 말했다.윤도석은 그 말을 듣자 진서준을 향한 불만이 더욱 커졌다.부영권도 미리 도착했는데 진서준은 시간 맞춰
윤서호는 말을 마친 뒤 진서준의 곁에 있는 가태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이 사람 당신 친구야?”윤서호는 거만한 얼굴로 가태윤을 바라보았다.가태윤은 조금 전 윤서호가 한 말을 들었다. 윤서호는 병원 교수의 아들이었고 그의 아버지가 바로 이번 면접 책임자였다.만약 진서준과 선을 긋지 않는다면 그는 절대 합격하지 못할 것이다.진서준도 고등학교 때 친구인 가태윤이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했다.가태윤은 잠깐 망설이더니 진서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맞아. 난 진서준 친구야.”윤서호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그는 가태윤이 자신을 두려워해서라도 곧바로 진서준과 선을 그을 줄 알았다.그러나 가태윤은 오히려 그를 도발했다“친구라고? 그러면 오늘 둘 다 합격하지 못할 줄 알아!”윤서호가 냉소하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네 아버지는 외과 교수일 뿐이야. 이 병원이 네 집안 거라도 되는 줄 알아?”진서준이 팔짱을 끼고 평온한 눈빛으로 윤서호를 바라보았다.“내가 합격 못 한다고 하면 합격 못 하는 거야!”윤서호는 책상을 내리치면서 진서준을 향해 소리쳤다.그 소리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집중되었다.앞에 앉아있던 부영권과 윤도석도 소리를 듣고 그곳을 바라보았다.윤서호가 소리를 지르는 대상이 진서준임을 확인한 부영권은 안색이 흐려졌다.“저 사람은 누구죠?”부영권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윤도석은 화가 나서 이가 갈렸다. 그는 윤서호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원장이 직접 임명한 특별 초빙 의사인 데다가 이번 면접 책임자인데 그런 진서준을 건드리다니!“그게... 제 아들입니다.”윤도석이 울며 겨자 먹기로 말했다.“오늘 윤 교수님 아들도 면접을 봅니까?”부영권이 차가운 눈빛으로 윤도석을 바라보았다.“여자 친구랑 같이 온 겁니다. 저도 방금 알았습니다.”윤도석이 설명했다.그러나 부영권은 절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진서준은 건방진 윤서호를 바라보며 냉소했다.“잠시 뒤에도 지금처럼 건방지길 바라.”말을 마친 뒤 진서준은 앞으로 나갔다
진서준은 단상에 올라간 뒤 마이크를 쓰지는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사람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더니 고개를 돌려 윤서호를 바라보았다.조금 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가 교수의 아들이라는 걸 들었다.윤서호는 똥이라도 씹은 얼굴이었다.“전 면접 보러 온 게 아니...”“왜 들어온 거죠? 여기가 면접 보는 곳이란 걸 몰랐던 겁니까?”진서준이 차가운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윤서호는 아버지가 편을 들어주길 바라서 그를 힐끔 보았다.멍청한 윤서호와 달리 윤도석은 능글맞은 인간이었다.그는 진서준이 일부러 윤서호에게 시비를 건다는 걸 알았다.“면접 보러 온 분이 아니시면 지금 당장 나가주세요!”윤도석이 뒷문을 가리키며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네...”윤서호는 내키지 않았지만 차마 반박할 수 없어서 처량하게 떠났다.윤서호가 내쫓기자 왕나연은 당황했다.그녀는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다.이번에 윤서호를 꼬시게 되면서 그의 아버지가 병원 교수란 걸 알고는 책조차 보지 않았다.진서준이 일부러 그녀를 난처하게 하지 않는다고 해도 왕나연은 틀림없이 떨어질 것이다.“면접 보러 온 게 아닌 분들도 다 나갔으니 지금부터 면접 시작하겠습니다.”진서준이 덤덤히 말했다.윤도석은 명단을 본 뒤 사람들에게 말했다.“왕나연 씨, 단상 위로 올라와 주세요.”이번에 병원에서는 다섯 명을 뽑을 생각이었다. 윤서호는 왕나연을 1번으로 내보내서 먼저 한 자리 차지하게 할 생각이었다.면접을 볼 사람이 무려 백여 명이었고 그중에는 명문대 졸업생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왕나연은 덜덜 떨면서 일어나 면접관들에게 다가갔다.진서준은 왕나연을 힐끔 본 뒤 먼저 입을 열었다.“오장육부와 그것들의 기능에 관해 얘기해보세요.”그 말에 사람들은 당황했다.오장육부와 그것들의 기능은 의학을 배운 사람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게다가 그저 외우기만 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문제였다.그러나 왕나연은 당황했다.그녀는 오장육부와 그것들의 기능에 대
진서준은 왕나연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가장 간단한 것만 물었다.이런 간단한 문제조차 대답하지 못하니 윤도석이 왕나연을 합격시키고 싶다고 해도 절대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게다가 면접 책임자는 진서준이었다.“조용히 하세요!”윤도석은 어두워진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사람들은 억지로 웃음을 참으면서 조롱기 가득한 표정으로 왕나연을 바라보았다.진서준은 무안한 표정의 왕나연을 바라보며 계속해 물었다.“색깔을 제외하고 다른 구별점을 얘기할 수 있나요?”진서준이 조롱의 의미 없이 진지하게 묻자 사람들도 진지해졌다.그러나 왕나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진서준이 자신을 난처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으로 생각했다.“몰라요. 전 서양의학 전공이지 한의학 전공이 아니니까요.”왕나연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진서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화가 가득했다.“서양의학이요? 그러면 그에 관한 질문을 하죠.”진서준은 개의치 않고 덤덤히 웃으며 말했다.“경동맥 검사할 때 왜 양쪽을 동시에 측정하면 안 될까요?”왕나연은 다시 넋이 나갔다. 경동맥이 뭔지는 알지만 왜 양쪽을 동시에 측정해서는 안 되는지는 알지 못했다.왕나연이 대답하지 못하자 윤도석은 어쩔 수 없이 말했다.“진서준 씨, 일단 병원에서 잠깐 근무하게 하는 건 어떤가요? 도저히 안 되면 그때 돌려보내는 겁니다.”진서준은 그 말을 듣더니 웃는 얼굴로 윤도석을 바라보았다.“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병원에서 근무하게 했다가 무슨 사고라도 치면 윤도석 교수님이 책임지실 건가요?”왕나연이 성질을 부렸다.“내가 무슨 사고를 친다고 그래요? 환자 돌보는 것쯤은 문제없다고요!”부영권이 미간을 구기며 강한 기운을 내뿜었다.“윤 교수님, 이 학생의 편을 드시는 걸 보니 혹시 윤 교수님 친척인가요?”부영권이 입을 열자 윤도석은 곧바로 겁이 났다.진서준은 두렵지 않았지만 부영권은 두려웠다. 부영권의 한 마디에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아뇨.
왕나연뿐만 아니라 면접을 보러온 사람들 모두 진서준의 신분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진서준은 그들과 또래처럼 보였고 아무리 뒷배가 있고 뛰어나다고 해도 부영권만큼 대단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누군가 진서준의 신분에 의문을 품자 부영권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진서준 씨는 저보다 의술이 뛰어납니다. 그리고 서울 병원 특별 초빙 의사죠. 진서준 씨가 이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다면 우리 모두 자격이 없습니다.”왕나연은 멍청하긴 했지만 특별 초빙 의사가 뭘 의미하는지는 알았기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리고 다른 학생들은 의논이 분분했다.“세상에, 저 사람 부영권 선생님보다 실력이 더 뛰어나다는데?”“아마 진짜일 거야. 부영권 선생님께서 직접 인정하셨잖아.”“저 사람의 눈에 든다면 평생 걱정할 필요 없겠어.”가태윤은 남다른 신분의 진서준을 바라보면서 중얼댔다.“서준아, 지난 몇 년간 대체 무슨 일을 겪었던 거야?”왕나연은 계속 여기 있어봤자 나아질 건 없다는 생각에 진서준을 노려본 뒤 빠르게 떠났다.진서준을 비웃던 두 사람은 목적도 달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많은 사람 앞에서 창피를 당했다.왕나연이 처음부터 웃음거리가 되었기에 다른 학생들은 그리 긴장하지 않았다.이어진 면접은 아주 빨랐다. 인맥을 이용하거나 실력이 없는 사람들은 전부 불합격이었다.가태윤은 비록 명문대 출신은 아니지만 기초가 탄탄했고 진서준도 기꺼이 그를 도울 생각이었기에 순조롭게 합격할 수 있었다.면접이 끝난 뒤 부영권은 진서준에게 말했다.“신의님, 점심시간이 됐으니 같이 식사나 하시죠.”진서준은 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가태윤을 보고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죄송합니다, 부영권 씨. 제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서요. 다음에 제가 살게요.”“네, 그러면 그렇게 합시다.”부영권이 웃으며 말했다.진서준과 가태윤은 서울 병원 근처에 있는 가게로 들어갔다.가태윤은 두 사람의 잔을 채운 뒤 존경스러운 얼굴로 진서준을 바라보았다.“개천에서 용 난다더니 너한테 딱 맞는 말 같아.”가
술을 반병쯤 마시자 가태윤은 조금 전처럼 바짝 얼어있지 않고 한 손을 진서준의 어깨에 올려두며 친근하게 굴었다.“서준아, 나 곧 있으면 결혼한다.”가태윤은 얼굴이 붉어졌다. 그의 눈동자에서 감출 수 없는 희열이 느껴졌다.진서준은 그 말을 듣더니 웃으며 말했다.“축하해. 일자리도 얻었고 네 반쪽도 찾았네.”진서준은 허사연을 떠올렸다.그는 내년에 신농산에 갔다가 돌아온 뒤 허사연에게 프러포즈할 생각이었다.“신부는 너도 아는 사람이야.”가태윤이 웃으며 말했다.“그래? 우리 반이었나 보네.”진서준은 곧바로 흥미가 생겼다.고등학교 때 진서준의 반에는 미인이 꽤 많았다.그리고 여자는 원래 크면서 점점 더 예뻐지는 법이었다.지금 생각해 보면 그 친구들 모두 지금은 엄청난 미인이 돼 있을 것 같았다.“마연정이라고 기억해?”그 이름에 진서준의 표정이 굳으며 눈동자에 망설임이 스쳤다.진서준은 그녀의 이름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녀가 했던 짓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학교 폭력 같은 건 학교마다 있는 일이었다.고등학교 때 진서준은 학교 폭력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가태윤의 약혼녀 마연정은 다른 남학생들과 함께 진서준을 괴롭힌 적이 있었다.그리고 진서준이 전해 듣기로 마연정은 고등학교 때 남자 친구를 많이 사귀어 봤었고 그중 잘생긴 선배들과는 잠자리까지 가졌다고 한다.물론 그것도 전해 들은 소문이라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알 수 없었다.하지만 마연정이 다른 남학생들과 함께 다른 학생들을 괴롭힌 건 사실이었다.“기억하지. 마연정이 네 약혼녀야?”진서준이 의아한 얼굴로 가태윤을 바라보았다.“너 고등학교 때 마연정이랑 대화도 몇 번 못 해봤잖아?”“맞아. 내가 그때 쑥스러움이 많아서 여자애들이랑은 말도 잘 섞지 못했어.”가태윤이 추억을 떠올리며 말했다.“고등학교 때 마연정과 말을 본 적은 열 번도 안 될 거야.”“그런데 어떻게...”진서준은 궁금해했다.고등학교 때 말도 몇 번 못 해봤는데 어떻게 결혼까지 하게 된 걸까?“그러고 보면
황예은이 옷을 다 갈아입자 서지은이 자리에서 일어나 진서준을 찾으러 갔다.“서준아, 예은 언니가 좀 화난 것 같으니까 이따가 해명할 때 되도록 조심해.”서지은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알았어.”진서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서준은 조심하라는 말을 다시 되새겼다.만약 상대가 너무 무례하게 굴면 진서준도 결코 양보하며 자세를 낮추지 않을 예정이었다.문제는 자기가 일부러 실수한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진서준은 황예은이 안에서 옷을 갈아입는 걸 번연히 알면서도 들어간 게 아니었다.게다가 진서준은 황예은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진서준 씨, 아까 지은한테서 들었는데, 진서준 씨가 저를 구했다고 하던데요.”황예은은 소파에 앉아 고개를 들어 진서준을 바라보았다.그 눈빛과 태도는 마치 왕좌에 앉은 여왕처럼 고압적이었다.이는 오랫동안 높은 자리를 지키며 형성된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황경영이 대한민국을 떠나기 전에 이미 황예은은 회사 업무의 일부를 맡아 처리하고 있었다.회사의 지도자, 그것도 여성이 지도자가 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그러니 황예은의 성격도 강인하고 단호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회사 사람들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었다.황예은이 이사장으로 올라간 후, 회사 내에서 황예은의 이름만 들어도 직원들이 벌벌 떨곤 했다.“맞아요. 제가 구했습니다.”진서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황예은 맞은편에 앉았다.그런데 앉고 나서야 진서준은 후회했다.황예은이 입은 옷은 목선이 매우 낮았다.비록 황예은이 자세를 바르게 고치고 앉아 있었지만 풍만한 가슴이 살짝 드러나 있었고 그 모습이 진서준의 시야에 그대로 들어왔다.당혹한 모습을 감추려고 진서준은 뒤로 기대어 눈을 감았다.하지만 이 자세는 상대방에게 매우 무례하다는 인상을 주었다.황예은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녀와 대화할 때 이런 태도로 임하는 것은 큰 실례였다.진서준이 소파에 기대 누운 모습을 보자 황예은의 마음속에서 잠잠했던 분노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진서준 씨는 다른 사람
별장에서 황예은은 이미 깨어난 상태였다.다만 지금 황예은의 몸에는 옷이 거의 없었다.정확히 말하면 상반신에는 레이스가 달린 검은 속옷 하나만 걸쳐져 있었다.이 속옷은 서지은이 가져온 속옷이었고 아직 한 번도 입지 않은 새것이었다.그리고 하반신에는 아까 진서준이 마사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없었다.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두 여자는 동시에 문 쪽을 바라보았다.황예은은 문을 열고 들어온 낯선 남자를 보고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황예은의 차가운 눈빛만으로도 지금 심정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었다.황예은은 자기 알몸을 보고 있는 이 남자를 죽여버리고 싶었다.하지만 황예은은 사실 이번이 진서준에게 두 번째로 알몸을 고스란히 드러낸 순간이란 걸 몰랐다.“서준아, 왜 노크하지 않고 그냥 들어왔어...”서지은이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서지은은 진서준이 약왕 이용진과 저녁 식사를 오래 하고 밤늦게나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예상과 달리 진서준이 너무 일찍 돌아온 것이다.“언제까지 더 볼 생각이야?”황예은이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진서준은 정신을 차리고 코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돌린 뒤 말했다.“먼저 나가 있을게. 옷을 다 갈아입었으면 날 불러.”진서준이 나간 뒤, 황예은은 서지은을 바라보며 물었다.“저 사람 누구야?”“진서준이에요. 제 남자친구거든요.”서지은이 솔직하게 대답하며 한마디 보탰다.“예은 언니, 사실 언니 목숨도 진서준이 구한 거예요.”그 말을 듣자 황예은의 눈에서 뿜어나오던 냉기가 다소 누그러졌다.어쨌든 자기 목숨을 구해준 은인인데 너무 차가운 태도로 대할 수는 없었다.그러나 황예은은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내 옷은 네가 벗긴 거야?”서지은은 그 말에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서준이 언니를 치료할 때 상황이 너무 위급해서 먼저 언니를 여기 데려온 거예요. 나도 여기 들어와 치료 과정을 볼 때 서준이 언니를 추행하는 줄 알았어
지금까지도 진서준은 박씨 가문의 의도가 오리무중이었다.하지만 박씨 가문의 일은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지금 진서준의 우선순위는 약재를 구하고 모든 정력을 간첩을 잡는 데 쏟아부어야 했다.호텔을 떠난 진서준은 이용진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30여 분을 달린 끝에 진서준 일행은 마침내 이용진의 장원에 도착했다.이용진의 장원 면적은 서씨 가문 것만큼 크지 않았지만 화려함만큼은 서씨 가문을 능가할 기세였다.각종 명인의 고화와 진귀한 보물들이 온 사방에 진열되어 있었다.이 모든 보물은 하나하나가 최소 10억 이상의 진품이었고 적어도 진서준이 자세히 살펴본 결과 위조품은 하나도 없었다.이 보물들만 해도 자산 가치가 조 단위를 뛰어넘을 될 터였다.“용존님,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말만 하세요.”이용진이 호탕한 어조로 말했다.“난 이런 것들에는 관심 없습니다.”진서준은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렇군요...”이용진은 약간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돈을 통해 진서준과의 관계를 더 가까이 만들고자 했던 이용진의 계획이 무산되는 순간이었다.진서준과 친분이 두터워지면 나중에 치료를 부탁하기도 훨씬 수월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진서준은 이용진의 속셈을 꿰뚫어 본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약왕님 체내 내상이 다 나으면 매주 두 번씩 무도를 연마하고 한 달에 다른 사람과 한 번 실력을 겨루는 수준으로 수련하면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약왕님 무도 실력도 늘어날 뿐 아니라 건강에도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겁니다.”“알겠습니다. 앞으로 꼭 용존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이용진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수많은 별장을 지나 진서준은 이용진을 따라 규모가 어마어마한 냉장실로 들어갔다.냉장실 안에는 사람 키 절반 정도 되는 기둥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각 기둥 위에는 희귀한 약재들이 놓여 있었고 방탄유리로 보호되고 있었다.진서준이 자세히 둘러보니 여기에 진열된 약재는 성약당의 것만큼 많지는 않았지만 희귀성만큼은 성약당을 훨씬 뛰어넘었다.
이 사람은 바로 어제 서울시에서 체포되었던 박운기였다.진서준 역시 이렇게 빨리 박운기를 다시 마주칠 줄은 몰랐다.“운기야, 저 사람 알아?”무리의 선두에 서 있던 중년 남자가 박운기를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바로 저놈이 사람들을 이끌고 내 계획을 망쳤습니다.”박운기가 이를 갈며 말했다.만약 진서준이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박운기의 계획은 이미 성공했을 것이다.그랬다면 박씨 가문으로 돌아갈 때는 차가운 시선 대신 온갖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을 터였다.이번에 서울시에서의 임무를 맡기 위해 박운기는 온갖 시련을 이겨내며 경쟁했다.모두가 보기에 이 임무는 그야말로 공을 세우기 위한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렇게 쉬운 임무를 박운기가 망쳐버렸다.망친 것도 모자라 박씨 가문은 관계를 동원해 박운기를 구출해야만 했다.공을 세워야 할 장사가 완전히 손해만 본 장사로 탈바꿈한 것이다.박씨 가문의 계획을 망친 장본인이 진서준이라는 사실을 알자 중년 남자는 진서준을 쓱 훑어보고는 냉랭하게 비웃었다.“전설 속의 용존님, 역시 이름값 제대로 하시는군요.”진서준은 그 남자를 힐끗 보고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로 걸어 들어갔다.진서준이 자기를 무시하자 중년 남자의 눈빛에 차가운 기운이 잠깐 스쳤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약왕님은 언제부터 용존님과 친구가 되셨습니까?”중년 남자는 이용진을 발견하자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박재명, 분명히 말해두지. 용존님 일은 바로 내 일이야. 감히 용존님에게 시비를 걸려고 한다면 내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이용진이 싸늘하게 대응했다.박재명은 박씨 가문의 실질적인 권력자가 아니었다.그는 단지 박서명의 넷째 동생일 뿐이었다.그래서 이용진은 굳이 박재명을 깍듯하게 모시며 아부할 필요가 없었다.이용진의 말에 박재명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약왕님, 굳이 한 사람 때문에 우리 박씨 가문을 적으로 돌릴 필요가 있겠습니까?”이용진은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당연히 가능하죠. 그렇지 않았다면 제가 애초에 병이 있다고 말하지도 않았겠죠.”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정말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용존님.”그러자 진서준이 손을 내저으며 진지하게 말했다.“아직은 섣불리 고마워하지 마세요. 제가 치료하는 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저 이용진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기꺼이 돕겠습니다!”이용진이 자신 있게 가슴을 치며 말했다.“제가 약왕인 당신에게 부탁이 있다면 당연히 약재 때문이죠.”진서준은 차분하게 진서라의 체내 독소를 치료하기 위해 필요한 네 가지 약재를 설명했다.이용진은 그 얘기를 들은 뒤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용존님, 솔직하게 말할게요. 용존님이 언급하신 약재 중 혈령지는 제 약재 창고에 하나 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세 가지 약재는 아쉽게도 제 창고에 없습니다.”“그것 하나만 있어도 충분합니다.”진서준은 크게 실망하진 않았다. 적어도 하나는 확보했으니 오늘 헛걸음을 한 게 아니었다.“얼마면 되겠습니까? 시세대로 구매하겠습니다.”이용진은 그 말을 듣고 자기 얼굴을 가볍게 툭툭 쳤다.“용존님, 가격을 말하는 건 제게 따귀를 날리는 겁니다. 용존님이 제 목숨을 구해주셨는데 제가 어떻게 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제 약재 창고에 나머지 세 가지 약재가 있었다면 전부 무료로 드렸을 겁니다.”이용진이 이렇게 호탕하게 나오자 진서준도 더는 사양하지 않았다.생명을 구해준 대가로 혈령지 하나를 받는 건 결코 과한 요구가 아니었다.“용존님, 급하지 않으시다면 식사를 마친 후 제가 약재 창고로 가서 혈령지를 가져오겠습니다.”이용진의 제안에 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하죠.”“오늘 식사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곽 선생님, 어서 앉으시죠.”이용진은 웨이터를 불러 이곳의 대표 요리를 전부 주문했다.이 대표 요리들만 해도 가격이 2억을 넘겼다.일반인 한평생 월급을 한 끼 식사로 소비하는, 그야말로 호화로운 만찬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차려졌
이용진은 평생 실력이 이 정도로 무시무시한 청년을 본 적이 없었다.자기를 지키는 두 호위가 반응할 틈조차 없이, 아니, 심지어 방어할 기회도 없이 한순간에 당하다니,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다.곽윤상 역시 진서준이 갑자기 공격을 시도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해명할 기회가 생겼다.“약왕님, 이분은 바로 국안부 용존님이십니다.”곽윤상이 재빨리 이 틈을 이용해 설명했다.“뭐라고? 네가 바로 그 용존이라고?”이용진은 입을 떡 벌린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진서준을 바라보았다.용존이라는 이름은 이미 명주시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대다수 명주시 명문대가는 이 절세 천재를 돈으로라도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진서준을 끌어들이려는 이유는 단순했다. 진서준이 아직은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었기 때문이다.스무 살 남짓한 나이에 용존이라는 봉호를 받은 인물이니 앞으로 거의 30년이 지나면 대한민국 전역에서 진서준과 겨뤄볼 만한 상대가 있을 리 없었다.심지어 4대 은거 문파조차도 진서준에게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보시다시피 용존이 틀림없습니다.”진서준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진서준이 처음부터 용존이라는 신분을 밝혔다면 이용진은 아마 믿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대한민국 전역에서 이 나이에 육급 절정의 대종사를 단숨에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진서준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이용진은 이제야 이 청년이 이렇게 자신만만하고 여유로운 태도로 대화할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용존님, 방금 제가 무례했던 점은 널리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약왕 이용진은 몸을 약간 숙이며 진서준에게 진심으로 사과했고 조금 전의 거만했던 태도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용진은 곽윤상이 명주시의 얼굴에 먹칠을 한다고 질책했었다.그런데 3분도 안 돼 본인이 직접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고 있었다.이용진은 지금 누군가가 그에게 귀싸대기라도 날린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약왕님, 앉으세요.”진서준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용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놀라운 기색이 담긴 눈빛으로 진서준을 바라봤다.진서준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방금 당신이 한 얘기는 전부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 체내에 숨은 질병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비 오는 날씨에 수련을 하다 보면 체내 강기를 돌릴 때 복부 아래쪽에 약간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 통증은 심하지 않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겠지요. 설령 신경이 쓰여 의사를 보인다고 해도 보통 의사라면 문제를 발견하지 못할 겁니다. 병원에서 사용하는 정밀한 장비로도 알아내기 어렵겠죠.”진서준의 이 말에 이용진의 표정이 한순간 어두워졌다.진서준은 정확히 이용진의 몸 상태를 파악하고 있었다.지난 2년 동안, 비만 오면 이용진은 온몸이 불편해졌다.특히 강기를 돌릴 때면 복부 아래쪽에서 은은하게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처음에는 이용진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그러나 점점 이상하다고 느껴져 성약당의 장로까지 불러 진찰을 받았지만 아무런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다.그런데 진서준이 오늘 초면에 단번에 이 문제를 짚어내자 이용진은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그걸 어떻게 알았어?”이용진이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이며 묻자 진서준은 태연히 대답했다.“당연히 당신 얼굴을 보고 알았죠.”“얼굴을 본다고 어떻게 알 수 있어?”이용진의 표정이 밝아졌다가 어두워졌고 눈에서 분노의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터무니없군. 성약당의 장로조차 알아내지 못한 문제를 네가 단번에 알아냈다고?”이용진은 탁자를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가락으로 진서준을 가리키며 소리쳤다.“이봐 청년, 솔직하게 말해. 내 곁에 내통자를 심어 놓은 게 아니야?”명주시에서 이용진 같은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은 항상 최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경계해야 했다.다시 말해 억울한 사람 천 명을 죽이더라도 내통자 한 명도 놓치지 않는 태도가 생존의 비결이었다.그렇지 않으면 명주시 같은 복잡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어려웠다.이용진 곁의 두 대종사도 이
‘이 녀석 미쳤나?’방 안의 모든 사람이 같은 반응을 보였다.이용진이 누구인가? 바로 명주시에서 누구나 다 아는 약왕이었다.전국을 논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절반 이상의 귀한 약재는 약왕의 손을 거친다.이런 사람이 어떻게 병에 걸릴 수 있을까?더군다나 매일 약재를 다루는 약왕에게 병이 있다면 명의들이 못 알아챘을 리가 없었다.그러니 진서준이 이용진에게 병에 걸렸다고 말한 건 미친 소리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소리였다.“이봐, 넌 지금 무슨 헛소릴 지껄이는지 알고는 있나?”이용진의 얼굴은 어둠 그 자체였다.그는 이곳에서 꼬박 30분 넘게 기다렸다.그런데 자기를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한 장본인이 고작 이런 애송이였고 오자마자 병이 있다며 모욕까지 했다.평소 인내심이 깊고 신사적이던 이용진도 이 순간만큼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이용진의 분노를 눈치채자 곽윤상은 얼굴이 창백해졌고 겁에 질려 진서준의 옷자락을 살짝 당겼다.하지만 진서준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 태연히 이용진 맞은편에 앉아 스스로 차를 따라 마셨다.진서준의 이 태연한 모습에 이용진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아무래도 이 청년은 약왕인 이용진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난 똑같은 말을 두 번 하지 않아요.”진서준은 차 한 모금을 마신 뒤,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진서준의 말에 이용진 오른쪽에 앉아 있던 대종사가 비웃으며 말했다.“약왕님은 무공을 수십 년간 연마하셨고 이미 종사 경지에 도달한 무인이야. 병에 걸렸다면 네가 말하지 않아도 진작 발견되었을 거야. 허튼소리도 정도껏 해야지.”보통 종사 경지에 오른 무인은 병에 걸리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무인의 근육, 뼈, 혈액은 이미 평범한 인간을 초월했기에 체내 바이러스조차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종사 무인이 병에 걸릴 경우라면 대개 다음 세 가지 이유 중 하나였다.난치병이거나 중독이거나 아니면 심각한 내상이 있을 경우였다.하지만 이용진은 이 세 가지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았다.난치병은커녕, 누군가의 독에
“여기는 국제적인 대도시잖아요.”곽윤상도 감탄했다.호텔 입구에 도착하자 교내 미인 대회에 나가도 손색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 안내원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손님, 저희 호텔은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식사나 숙박을 원하시면 회원 자격이 필요합니다.”곽윤상은 군말 없이 금박으로 장식된 카드를 꺼냈다.여성 안내원은 카드를 꼼꼼히 확인한 뒤,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곽 선생님, 안으로 모시겠습니다.”“이미 예약을 해두었습니다. 꼭대기 층의 5번 방입니다.”곽윤상의 말에 여성 안내원이 대답했다.“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확인해 보겠습니다.”여성 안내원은 프런트로 가서 예약 사항을 확인한 뒤, 두 사람을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꼭대기 층으로 가는 직행 엘리베이터는 총 네 대였고 속도는 어마어마했다.무려 300미터의 높이를 단 20초도 되지 않아 올라갔다.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진서준은 눈앞의 광경에 말문이 막혔다.사방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 멀리 보이는 구름층과 자기와 나란히 있는 듯한 달빛이 시야에 들어와 하늘 속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진 마스터님, 여긴 어떠십니까?”곽윤상의 질문에 진서준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내가 가본 레스토랑 중 가장 호화로운 곳 중 하나로군요.”“그렇긴 하죠. 이 호텔은 국제적으로도 유명한 곳입니다.”곽윤상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이 호텔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반드시 회원이어야 하는데 꼭대기 층에 오고 싶다면 일반 회원으로는 부족하고 최소한 골드 회원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골드 회원권을 발급받는 데만 200억이 필요합니다.”골드 회원권이 200억이나 한다는 말에 진서준이 다른 질문을 던졌다.“그럼 일반 회원은 얼마인가?”“10 억입니다.”곽윤상이 손가락으로 숫자를 표시하며 말했다.“그리고 이 돈은 카드에 적립되는 게 아니라 그냥 회원권 발급 비용일 뿐입니다.”그 말을 듣고 진서준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전국을 통틀어도 이런 가격을 자신 있게 책정하는 곳은 명주시의 호텔들뿐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