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훈은 조용히 한숨을 내뱉었다.진요한을 죽인 사람들은 악마와 같은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진서준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그 사람들을 죽이려면 우선 천의방에 들어가야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그럼 제가 실력이 충분히 성장한 다음 저에게 알려주세요.”진서준이 말했다.“그러고 보니 지금은 왜 아까 양씨 가문에서처럼 날뛰지 않는 것이냐?”진서훈은 진서준이 당장 그 사람들의 이름을 말하라고 할 줄 알았으나 얌전한 그의 태도에 의외라고 생각했다.“제가 양씨 가문에서 그렇게 횡포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은 할아버지 덕분입니다.”진서준은 허허 웃었다.“너 이 녀석! 이젠 할아버지도 이용하는구나!”진서훈은 쓴웃음을 지었다.“됐다. 내일 밤에 사람을 보내 너를 데려오겠으니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어라.”“할아버지, 부디 살펴 가십시오!”진서준은 발걸음을 옮겼다.양재민의 생일 연회에서 진서준이 하도 일을 크게 벌여놓은지라 양씨 집안 전체의 분위기도 가라앉았다.오늘 밤의 일이 당장 내일이라도 전국에 퍼질까 두려웠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양씨 가문이 엄청난 수치를 당한 건 아니었다.무려 용란 공주와 현천진군이 모두 진서준을 지키러 왔단 말이다.양재민은 감히 호국장군의 체면을 깎을 수는 없었다.밤이 깊어지고 연회가 끝나 귀빈들도 모두 돌아간 후에 양재민은 양지천을 자신의 앞으로 불렀다.“꿇거라!”양재민은 낮게 읊조렸다.털썩...양지천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양재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왜 무릎을 꿇으라 했는지 알고 있느냐?”“알고 있습니다. 제가 양씨 가문이 모욕을 당하게 했기 때문입니다.”양지천은 이를 깨물며 말했다.“틀렸다!”양재민은 차디찬 눈빛으로 양지천을 바라보았다.“이런 네가 사람들에게 지혜로운 도련님이라고 불리다니! 네가 오늘 밤 황현호 그 자식에게 이용당한 건 알고나 있느냐?”사실 오늘 밤의 일은 모두 황현호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만약 황현호가 찾아와 진서준을 건드리지만 않았어도 오늘 밤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진서준은 지금 김평안의 신분으로 이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다.만약 진서준이 자신의 원래 신분으로 이곳에 왔다면 이 일곱 사람은 아마 기뻐서 날뛰고도 남았을 것이다.작년 말, 진서준이 용존 봉호를 하사받았을 때 국안부 내의 많은 종사가 진서준의 팬이 되었을 정도였다.그들이 진서준에 대한 존경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자신보다 천부적인 재능이 타고나다 느끼면 질투만 하던 나영진과는 확연히 달랐다.국안부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은 보통의 무인들보다 가치관이나 포부가 훨씬 훌륭했다.진서준은 한밤중에 화장실을 갈 때 호창정과 나머지 사람들이 아직도 도장에서 연습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진짜 열심히 하네...”“설마 할아버지께서 이 사람들에게 내 실력을 알려주지 않은 건가?”진서준은 작게 웃고는 도장을 향해 걸어갔다.“저희가 무술을 연마하는 소리가 김평안 씨를 시끄럽게 했습니까?”호창정은 진서준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눈썹을 꿈틀이고는 물었다.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멈추고 진서준을 바라보았다.“아닙니다. 전 그저 여러분이 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어서 온 것뿐입니다.”진서준은 작게 웃었다.진서준의 말을 들은 가장 어린 무인의 얼굴에는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김평안 씨 방금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승산이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어서 아예 포기하란 말입니까?”“현천진군께서 왜 당신 같은 사람을 교류전에 참가하라고 보냈는지 모르겠습니다!”몇몇은 안색마저 눈에 띄게 나빠졌다.그들도 이번 교류전에서 우승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하지만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그들은 결코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사람들이 자신을 오해하자 진서준은 서둘러 해석했다.“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그럼 무슨 뜻이었습니까?”진서준은 살짝 웃고는 말을 이어나갔다.“제 말은, 제가 있는 한 여러분은 출전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습니다.”호창정을 비롯한 팀원들은 진서준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진서준이 있는 한 다른
‘정말 오만함의 끝을 달리는구나!’호창정은 진서준의 오만함에 제대로 화가 났다.“좋습니다. 김평안 씨는 부디 본인이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제가 만약 김평안 씨를 다치게 하더라도 제 탓은 하지 말기입니다!”호창정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졌고 두 눈동자는 한기가 잔뜩 서려 빛이 났다.진서준은 호창정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팀장님, 살살하십시오. 그러다 진짜 저 사람이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걱정됩니다.”“내 생각에는 저 사람에게 따끔하게 교훈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봐. 앞으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지금처럼 거만하게 굴다가 화를 자초하는 일이 없게 말이야!”“팀장님의 실력은 비록 약하지만 적어도 팀장님은 반보 대종사야. 동료 중에서도 팀장님의 전력을 다한 주먹을 막아낼 수 있는 사람은 없어!”모든 이들이 진서준을 만만하게 보고 있었다.그들은 진서준이 고생을 찾아서 한다고 생각했다.다른 사람들은 재빨리 두 사람에게 충분한 공간을 내주었다.진서준은 호창정의 앞에 서서 호창정은 안중에도 없단 듯이 얼굴에 잔잔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김평안 씨는 아직 후회할 기회가 있습니다!”호창정은 마지막 경고를 하였다.“바로 시작하십시오, 팀장님.”진서준은 뒷짐을 진 채 여전히 평온한 태도로 말했다.“그럼 그렇게 합시다!”호창정은 온몸의 근육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대종사에 견줄만한 엄청난 위압감이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그 위압감만으로도 주위의 몇몇 사람들이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게 했다.“지금 팀장님의 실력으로 보아 올해 안에 대종사경에 도달할 수 있겠어!”“이 김평안이라는 녀석은 오늘 끝장났어...”“저 주먹이라면 한 대만으로 중상은 무리 없이 가능해!”다들 수군덕거리고 있을 때 호창정은 모든 강기를 주먹 끝에 모았다.엄청난 강기는 금빛의 찬란한 빛을 내며 호창정의 주먹을 감쌌다.“하!”호창정은 기합 소리와 함께 허공을 가르는 소리를 동반한 주먹을 진서준에게 있는 힘껏 내리꽂았다.쿵...굉음과 함께 사방에 먼지가
도리대로라면 김평안처럼 천부적 재능이 있는 사람이 명성이 없을 리 없었다.하지만 오늘까지 그들은 정말 김평안이라는 사람에 대해 들은 게 없었다.상식을 어긋나도 한참 어긋난 황당무계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진서준은 담담하게 웃으며 사람들에게 해석했다.“왜냐하면 저는 그동안 계속 산속에서 혼자 수련을 해왔기 때문입니다.”“이번에 교류전에 참가할 수 있게 된 것도 현천진군께서 직접 저를 요청해주셨기 때문입니다.”“우리나라의 명예와 체면이 걸린 일인데 제가 어찌 감히 거절할 명분이 있겠습니까.”진서준의 말을 듣고 난 호창정을 비롯한 팀원들은 그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김평안이 재야의 고수였다니!그것도 나랏일에 책임감을 지닐 줄 아는 고수였다.“김 선생은 그동안 제가 만나왔던 본인을 은둔 고수라고 자칭하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십니다!”대한민국의 일부 재야의 고수들은 본인밖에 모르고 다른 사람, 심지어는 나라의 안위에 대해서도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호창정은 그런 사람을 적지 않게 봐왔다.“과찬이십니다, 저도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걸 할 따름입니다.”진서준은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나라가 없어지면 제 한 몸 온전히 담글 곳도 사라지지 않겠습니까.”나라가 있어야 집이 있다는 기본적인 도리쯤은 어린아이도 알고 있다. 하지만 정작 한평생을 수련에 몰두한 일부 사람들은 그 도리를 모른다.이 얼마나 슬프고 한탄스러운 사실이란 말인가!“그럼 이제 여러분들은 돌아가서 쉴 수 있는 겁니까?”진서준은 웃으며 호창정을 가리켰다.“팀장님,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왔습니다. 앞으로는 밤을 덜 새셔야겠습니다.”진서준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제야 왜 진서준이 자신들에게 다가와 겨루자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진서준은 팀원들이 일찍 쉬었으면 했기 때문이다.“김 선생, 우리는 방금 소인의 마음으로 군자의 뜻을 멋대로 판단했습니다. 우리는 김 선생께서 저희 때문에 시끄러워서 잠에서 깬 줄로 알았습니다...”호창정의 얼굴에는 머쓱함과 죄책감이 잔뜩 서려 있었다.
“김 선생, 반드시 고필두 그 사람을 조심해야 합니다.”호창정이 진서준에게 주의하라고 하였다.“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뽑을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는 일입니다.”진서준은 담담하게 웃었다.이번 교류전은 제비뽑기의 방식으로 진행된다.출전하는 나라가 모두 열세 개라는 뜻은 곧 한 나라는 반드시 공표를 뽑게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공표를 뽑은 나라는 다른 나라들보다 한 경기 적게 출전하고 바로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있다.매 경기는 3판 2선승제로 진행되며 중간에 선수를 교체할 수 있다.따라서 이번 교류전에 출전하는 각 나라는 적어도 일고여덟 명의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다.“어라? 김평안 이 녀석도 이번 교류전에 참가하는구나!”황현호가 차에서 금방 내린 진서준을 발견했다.원수를 만나면 유달리 눈에 핏발이 서기 마련이다.하지만 황현호는 무식하게 곧장 진서준을 찾아가 그의 앞에 대고 욕을 퍼붓진 않을 것이다.지금 진서준은 나라를 대표하여 다국적 교류전에 참가한 사람이니 말이다.만약 황현호가 진서준에게 욕을 하는 장면이 찍히기라도 한다면 아무리 갑부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결코 좋은 영향이 있진 않을 것이다.“이 거만한 자식, 앞으로 딱 이틀만 그렇게 계속 거들먹거려라. 교류전이 끝나면 당장 죽청 부모님께 널 죽여달라고 부탁하마!”황현호는 이를 깨물고 낮게 중얼거렸다.계속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진서준은 고개를 돌려 시선이 느껴지던 곳을 보았다.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 시선의 주인이 황현호임을 확인한 진서준은 그저 황현호를 한번 흘겨보고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황현호처럼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가장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바로 자신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이었다.만약 아까 진서준이 조금이라도 분노했다면, 혹은 냉소적인 웃음이라도 지어 보였다면 황현호는 적어도 상대방이 본인을 신경 쓰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하지만 진서준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없었고 다만 황현호를 흘깃 보고 말았을 뿐이었다.무시당하는 듯한 느낌은 여태
진서준도 해리스가 자신을 보는 눈길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래서 얼른 영기로 자신의 기세를 조절하여 더욱 사십 대의 중년 남자처럼 보이게 했다.해리스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까의 그 익숙한 느낌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뭐지? 설마 내 착각인가?”해리스는 낮게 중얼거렸다.엘리사는 해리스가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듣지 못해 고개를 돌려 해리스에게 물었다.“해리스 씨, 방금 뭐라고 했어요?”“공주님, 방금 공주님과 대화를 나눈 그 사람이 저는 왠지 익숙합니다.”해리스는 몸을 살짝 숙여 엘리사에게 귓속말로 전해주었다.해리스의 말을 들은 엘리사의 안광이 빛났다.“해리스 씨도 익숙하죠? 진서준 씨와 많이 닮지 않았나요?”“네... 방금까지 꽤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보니 딱히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엘리사는 작게 웃으며 해리스에게 물었다.“해리스 씨는 대한민국의 변검을 아나요?”“변검이요? 잘 모르겠습니다.”해리스는 대한민국의 문화에 대해 엘리사만큼 잘 알지 못했다.해리스는 용란 왕실에 있을 때 학교에 다니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시간을 자신의 성안에서 보냈다.엘리사는 지루한 시간을 틈타 많은 나라의 전통문화를 연구했었다.그중에서도 대한민국의 전통문화를 가장 많이 알게 되었다. 엘리사는 심지어 적지 않은 선생님들을 요청해 대한민국의 문화에 대한 강의도 들었었다.“잘 몰라도 괜찮아요.”엘리사는 미소를 짓고는 진서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당신은 대체 진서준 씨입니까, 아니면 김평안 씨입니까?’진서준은 해리스와 엘리사의 대화를 모두 듣게 되었다.여인의 육감은 정말 무서웠다.하지만 아직은 엘리사도 실질적인 증거가 없다.동시에 이는 진서준에게 경종을 울려주었다. 김평안이라는 신분을 이용할 때만큼은 절대로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그 시각, 사회자는 이미 무대에 올라 장황한 발언을 시작했다.사람들은 30분 정도 듣더니 다들 졸린 기색이 역력해졌다.“다음은 각국의 대
호창정은 그들의 말에 상냥한 미소로 회답했다.“저는 제일 마지막에 뽑았는데 굳이 손을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호창정의 말에 소안 대표팀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고는 분개하며 단상에서 내려왔다.호창정은 대표팀으로 돌아오자마자 진서준에게 속삭였다.“김 선생, 일단 1라운드는 쉬시지요. 만약 제 운이 따라준다면 다음 라운드도 쉴 수 있게 해주겠습니다!”1라운드에서 모두 열두 팀이 대결한다.그리고 그 중 여섯 팀만 다음 라운드로 진출하는데 1라운드에서 공표를 뽑은 대한민국 팀까지 합하면 전체 팀은 또 홀수가 된다.그래서 한 팀이 또 공표를 뽑게 된다.하지만 준결승전에서는 더는 공표를 뽑을 수 없다.“해리스 씨, 조심해요.”첫 번째 경기는 용란과 소안의 대결이다.해리스는 용란 대표팀의 팀장으로서 용란을 대표해 제일 첫 주자로 출전한다.몇몇 베테랑 무인들은 해리스를 알아보고 자기들끼리 조용히 토론했다.“난 저 용란 남자를 알고 있어. 용란 황실 친위대의 대장이야. 듣기로는 육급 대종사라고 하더군!”“이봐, 육급 대종사라고? 그럼 우리 대한민국 팀은 정말 이길 수 있는 희망조차도 없는 것 아닌가?”“이길 생각을 하다니. 사람이 죽지만 않으면 다행인 거야!”호창정 같은 사람은 그 작은 지방에서 그래도 나름 유명한 사람이었다.하지만 경성처럼 숨은 인재가 넘쳐나는 곳에 오면 그도 어디 가서 명함 한 장 못 내밀 수준에 불과했다.그러니 호창정 같은 사람들을 인정해주지 않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일부 가문에서는 내부 소식을 통해 국안부의 모든 인재가 대한민국의 국경에 파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곧 큰일이 일어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해리스가 경기장에 출전하자 소안 쪽에서도 한 사람이 출전했는데 그 사람은 피부가 검고 체구가 작은 남자였다.이 체구가 왜소한 남자가 해리스의 앞에 서자 둘의 엄청난 체형 차이 때문에 순식간에 많은 사람의 폭소를 불러일으켰다.해리스도 소안의 그 남자를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소안에는
체육관은 숨 막히는 침묵에 휩싸였다.소안의 일인자와 해리스 사이에는 분명 어느 정도 차이가 있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식간에 패배할 정도로 큰 차이는 아닌 게 정상이었다.소안 대표팀의 나머지 일고여덟 명은 검은 숯에 그은 사람처럼 굳은 얼굴에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소안의 최강자조차도 순식간에 무너졌으니 다른 사람들은 굳이 링에 오를 필요도 없었다.이 광경을 목격한 섬나라 대표팀의 팔자수염을 기른 중년 남자가 물었다.“필두야, 네가 해리스와 싸운다면 승률이 몇 퍼센트 정도나 돼?”팔자수염 옆에 앉은 고필두는 눈을 감고 침묵을 지키며 묵묵히 손가락 다섯 개를 펼쳤다.팔자수염 남자는 그 모습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너도 겨우 50% 승률밖에 장담할 수 없단 말이야?”고필두는 섬나라 대표팀에서 실력이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고 섬나라 내부에서도 상위 10위 안에 드는 유명한 고수였다.그런 고수가 겨우 50% 승률밖에 보장하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더 이상 토론할 가치도 없었다.고필두는 팀장의 말을 듣고 서서히 눈을 뜨고 날카로운 눈빛을 보였다.“50%라니, 농담하는 거야?”“너 손가락 다섯 개를 펼쳤잖아?”팔자수염 팀장이 고필두의 말에 놀라며 되물었다.손가락 다섯 개, 즉 50% 승률을 의미하는 뜻이 분명해 보였다.“내 말은 모든 상황이 내 손안에서 돌아가고 있다는 거야.”고필두는 자기 생각을 밝히며 쫙 펼친 다섯 손가락을 접어 주먹을 움켜잡았다.“음...”팔자수염 팀장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거 참 다행이네. 이따가 링에 올라가면 죽일 수 있는 녀석은 다 죽이고 내려와. 여기서 똑똑히 지켜보겠어.”이번 섬나라의 방문은 사실 무도 교류보다는 살인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용멸 계획은 공식적으로 시작된 상태였다.동북, 서북, 서남, 그리고 동남 네 방향에서 이번 계획에 참여하는 해외 무인들이 거의 다 대한민국 변경에 도착했다.계획이 시작될 그날이 다가오면 네 방향의 해외 강자들이 동시
황예은이 옷을 다 갈아입자 서지은이 자리에서 일어나 진서준을 찾으러 갔다.“서준아, 예은 언니가 좀 화난 것 같으니까 이따가 해명할 때 되도록 조심해.”서지은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알았어.”진서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서준은 조심하라는 말을 다시 되새겼다.만약 상대가 너무 무례하게 굴면 진서준도 결코 양보하며 자세를 낮추지 않을 예정이었다.문제는 자기가 일부러 실수한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진서준은 황예은이 안에서 옷을 갈아입는 걸 번연히 알면서도 들어간 게 아니었다.게다가 진서준은 황예은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진서준 씨, 아까 지은한테서 들었는데, 진서준 씨가 저를 구했다고 하던데요.”황예은은 소파에 앉아 고개를 들어 진서준을 바라보았다.그 눈빛과 태도는 마치 왕좌에 앉은 여왕처럼 고압적이었다.이는 오랫동안 높은 자리를 지키며 형성된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황경영이 대한민국을 떠나기 전에 이미 황예은은 회사 업무의 일부를 맡아 처리하고 있었다.회사의 지도자, 그것도 여성이 지도자가 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그러니 황예은의 성격도 강인하고 단호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회사 사람들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었다.황예은이 이사장으로 올라간 후, 회사 내에서 황예은의 이름만 들어도 직원들이 벌벌 떨곤 했다.“맞아요. 제가 구했습니다.”진서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황예은 맞은편에 앉았다.그런데 앉고 나서야 진서준은 후회했다.황예은이 입은 옷은 목선이 매우 낮았다.비록 황예은이 자세를 바르게 고치고 앉아 있었지만 풍만한 가슴이 살짝 드러나 있었고 그 모습이 진서준의 시야에 그대로 들어왔다.당혹한 모습을 감추려고 진서준은 뒤로 기대어 눈을 감았다.하지만 이 자세는 상대방에게 매우 무례하다는 인상을 주었다.황예은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녀와 대화할 때 이런 태도로 임하는 것은 큰 실례였다.진서준이 소파에 기대 누운 모습을 보자 황예은의 마음속에서 잠잠했던 분노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진서준 씨는 다른 사람
별장에서 황예은은 이미 깨어난 상태였다.다만 지금 황예은의 몸에는 옷이 거의 없었다.정확히 말하면 상반신에는 레이스가 달린 검은 속옷 하나만 걸쳐져 있었다.이 속옷은 서지은이 가져온 속옷이었고 아직 한 번도 입지 않은 새것이었다.그리고 하반신에는 아까 진서준이 마사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없었다.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두 여자는 동시에 문 쪽을 바라보았다.황예은은 문을 열고 들어온 낯선 남자를 보고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황예은의 차가운 눈빛만으로도 지금 심정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었다.황예은은 자기 알몸을 보고 있는 이 남자를 죽여버리고 싶었다.하지만 황예은은 사실 이번이 진서준에게 두 번째로 알몸을 고스란히 드러낸 순간이란 걸 몰랐다.“서준아, 왜 노크하지 않고 그냥 들어왔어...”서지은이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서지은은 진서준이 약왕 이용진과 저녁 식사를 오래 하고 밤늦게나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예상과 달리 진서준이 너무 일찍 돌아온 것이다.“언제까지 더 볼 생각이야?”황예은이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진서준은 정신을 차리고 코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돌린 뒤 말했다.“먼저 나가 있을게. 옷을 다 갈아입었으면 날 불러.”진서준이 나간 뒤, 황예은은 서지은을 바라보며 물었다.“저 사람 누구야?”“진서준이에요. 제 남자친구거든요.”서지은이 솔직하게 대답하며 한마디 보탰다.“예은 언니, 사실 언니 목숨도 진서준이 구한 거예요.”그 말을 듣자 황예은의 눈에서 뿜어나오던 냉기가 다소 누그러졌다.어쨌든 자기 목숨을 구해준 은인인데 너무 차가운 태도로 대할 수는 없었다.그러나 황예은은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내 옷은 네가 벗긴 거야?”서지은은 그 말에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서준이 언니를 치료할 때 상황이 너무 위급해서 먼저 언니를 여기 데려온 거예요. 나도 여기 들어와 치료 과정을 볼 때 서준이 언니를 추행하는 줄 알았어
지금까지도 진서준은 박씨 가문의 의도가 오리무중이었다.하지만 박씨 가문의 일은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지금 진서준의 우선순위는 약재를 구하고 모든 정력을 간첩을 잡는 데 쏟아부어야 했다.호텔을 떠난 진서준은 이용진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30여 분을 달린 끝에 진서준 일행은 마침내 이용진의 장원에 도착했다.이용진의 장원 면적은 서씨 가문 것만큼 크지 않았지만 화려함만큼은 서씨 가문을 능가할 기세였다.각종 명인의 고화와 진귀한 보물들이 온 사방에 진열되어 있었다.이 모든 보물은 하나하나가 최소 10억 이상의 진품이었고 적어도 진서준이 자세히 살펴본 결과 위조품은 하나도 없었다.이 보물들만 해도 자산 가치가 조 단위를 뛰어넘을 될 터였다.“용존님,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말만 하세요.”이용진이 호탕한 어조로 말했다.“난 이런 것들에는 관심 없습니다.”진서준은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렇군요...”이용진은 약간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돈을 통해 진서준과의 관계를 더 가까이 만들고자 했던 이용진의 계획이 무산되는 순간이었다.진서준과 친분이 두터워지면 나중에 치료를 부탁하기도 훨씬 수월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진서준은 이용진의 속셈을 꿰뚫어 본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약왕님 체내 내상이 다 나으면 매주 두 번씩 무도를 연마하고 한 달에 다른 사람과 한 번 실력을 겨루는 수준으로 수련하면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약왕님 무도 실력도 늘어날 뿐 아니라 건강에도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겁니다.”“알겠습니다. 앞으로 꼭 용존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이용진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수많은 별장을 지나 진서준은 이용진을 따라 규모가 어마어마한 냉장실로 들어갔다.냉장실 안에는 사람 키 절반 정도 되는 기둥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각 기둥 위에는 희귀한 약재들이 놓여 있었고 방탄유리로 보호되고 있었다.진서준이 자세히 둘러보니 여기에 진열된 약재는 성약당의 것만큼 많지는 않았지만 희귀성만큼은 성약당을 훨씬 뛰어넘었다.
이 사람은 바로 어제 서울시에서 체포되었던 박운기였다.진서준 역시 이렇게 빨리 박운기를 다시 마주칠 줄은 몰랐다.“운기야, 저 사람 알아?”무리의 선두에 서 있던 중년 남자가 박운기를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바로 저놈이 사람들을 이끌고 내 계획을 망쳤습니다.”박운기가 이를 갈며 말했다.만약 진서준이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박운기의 계획은 이미 성공했을 것이다.그랬다면 박씨 가문으로 돌아갈 때는 차가운 시선 대신 온갖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을 터였다.이번에 서울시에서의 임무를 맡기 위해 박운기는 온갖 시련을 이겨내며 경쟁했다.모두가 보기에 이 임무는 그야말로 공을 세우기 위한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렇게 쉬운 임무를 박운기가 망쳐버렸다.망친 것도 모자라 박씨 가문은 관계를 동원해 박운기를 구출해야만 했다.공을 세워야 할 장사가 완전히 손해만 본 장사로 탈바꿈한 것이다.박씨 가문의 계획을 망친 장본인이 진서준이라는 사실을 알자 중년 남자는 진서준을 쓱 훑어보고는 냉랭하게 비웃었다.“전설 속의 용존님, 역시 이름값 제대로 하시는군요.”진서준은 그 남자를 힐끗 보고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로 걸어 들어갔다.진서준이 자기를 무시하자 중년 남자의 눈빛에 차가운 기운이 잠깐 스쳤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약왕님은 언제부터 용존님과 친구가 되셨습니까?”중년 남자는 이용진을 발견하자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박재명, 분명히 말해두지. 용존님 일은 바로 내 일이야. 감히 용존님에게 시비를 걸려고 한다면 내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이용진이 싸늘하게 대응했다.박재명은 박씨 가문의 실질적인 권력자가 아니었다.그는 단지 박서명의 넷째 동생일 뿐이었다.그래서 이용진은 굳이 박재명을 깍듯하게 모시며 아부할 필요가 없었다.이용진의 말에 박재명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약왕님, 굳이 한 사람 때문에 우리 박씨 가문을 적으로 돌릴 필요가 있겠습니까?”이용진은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당연히 가능하죠. 그렇지 않았다면 제가 애초에 병이 있다고 말하지도 않았겠죠.”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정말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용존님.”그러자 진서준이 손을 내저으며 진지하게 말했다.“아직은 섣불리 고마워하지 마세요. 제가 치료하는 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저 이용진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기꺼이 돕겠습니다!”이용진이 자신 있게 가슴을 치며 말했다.“제가 약왕인 당신에게 부탁이 있다면 당연히 약재 때문이죠.”진서준은 차분하게 진서라의 체내 독소를 치료하기 위해 필요한 네 가지 약재를 설명했다.이용진은 그 얘기를 들은 뒤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용존님, 솔직하게 말할게요. 용존님이 언급하신 약재 중 혈령지는 제 약재 창고에 하나 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세 가지 약재는 아쉽게도 제 창고에 없습니다.”“그것 하나만 있어도 충분합니다.”진서준은 크게 실망하진 않았다. 적어도 하나는 확보했으니 오늘 헛걸음을 한 게 아니었다.“얼마면 되겠습니까? 시세대로 구매하겠습니다.”이용진은 그 말을 듣고 자기 얼굴을 가볍게 툭툭 쳤다.“용존님, 가격을 말하는 건 제게 따귀를 날리는 겁니다. 용존님이 제 목숨을 구해주셨는데 제가 어떻게 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제 약재 창고에 나머지 세 가지 약재가 있었다면 전부 무료로 드렸을 겁니다.”이용진이 이렇게 호탕하게 나오자 진서준도 더는 사양하지 않았다.생명을 구해준 대가로 혈령지 하나를 받는 건 결코 과한 요구가 아니었다.“용존님, 급하지 않으시다면 식사를 마친 후 제가 약재 창고로 가서 혈령지를 가져오겠습니다.”이용진의 제안에 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하죠.”“오늘 식사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곽 선생님, 어서 앉으시죠.”이용진은 웨이터를 불러 이곳의 대표 요리를 전부 주문했다.이 대표 요리들만 해도 가격이 2억을 넘겼다.일반인 한평생 월급을 한 끼 식사로 소비하는, 그야말로 호화로운 만찬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차려졌
이용진은 평생 실력이 이 정도로 무시무시한 청년을 본 적이 없었다.자기를 지키는 두 호위가 반응할 틈조차 없이, 아니, 심지어 방어할 기회도 없이 한순간에 당하다니,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다.곽윤상 역시 진서준이 갑자기 공격을 시도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해명할 기회가 생겼다.“약왕님, 이분은 바로 국안부 용존님이십니다.”곽윤상이 재빨리 이 틈을 이용해 설명했다.“뭐라고? 네가 바로 그 용존이라고?”이용진은 입을 떡 벌린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진서준을 바라보았다.용존이라는 이름은 이미 명주시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대다수 명주시 명문대가는 이 절세 천재를 돈으로라도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진서준을 끌어들이려는 이유는 단순했다. 진서준이 아직은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었기 때문이다.스무 살 남짓한 나이에 용존이라는 봉호를 받은 인물이니 앞으로 거의 30년이 지나면 대한민국 전역에서 진서준과 겨뤄볼 만한 상대가 있을 리 없었다.심지어 4대 은거 문파조차도 진서준에게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보시다시피 용존이 틀림없습니다.”진서준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진서준이 처음부터 용존이라는 신분을 밝혔다면 이용진은 아마 믿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대한민국 전역에서 이 나이에 육급 절정의 대종사를 단숨에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진서준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이용진은 이제야 이 청년이 이렇게 자신만만하고 여유로운 태도로 대화할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용존님, 방금 제가 무례했던 점은 널리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약왕 이용진은 몸을 약간 숙이며 진서준에게 진심으로 사과했고 조금 전의 거만했던 태도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용진은 곽윤상이 명주시의 얼굴에 먹칠을 한다고 질책했었다.그런데 3분도 안 돼 본인이 직접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고 있었다.이용진은 지금 누군가가 그에게 귀싸대기라도 날린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약왕님, 앉으세요.”진서준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용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놀라운 기색이 담긴 눈빛으로 진서준을 바라봤다.진서준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방금 당신이 한 얘기는 전부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 체내에 숨은 질병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비 오는 날씨에 수련을 하다 보면 체내 강기를 돌릴 때 복부 아래쪽에 약간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 통증은 심하지 않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겠지요. 설령 신경이 쓰여 의사를 보인다고 해도 보통 의사라면 문제를 발견하지 못할 겁니다. 병원에서 사용하는 정밀한 장비로도 알아내기 어렵겠죠.”진서준의 이 말에 이용진의 표정이 한순간 어두워졌다.진서준은 정확히 이용진의 몸 상태를 파악하고 있었다.지난 2년 동안, 비만 오면 이용진은 온몸이 불편해졌다.특히 강기를 돌릴 때면 복부 아래쪽에서 은은하게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처음에는 이용진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그러나 점점 이상하다고 느껴져 성약당의 장로까지 불러 진찰을 받았지만 아무런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다.그런데 진서준이 오늘 초면에 단번에 이 문제를 짚어내자 이용진은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그걸 어떻게 알았어?”이용진이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이며 묻자 진서준은 태연히 대답했다.“당연히 당신 얼굴을 보고 알았죠.”“얼굴을 본다고 어떻게 알 수 있어?”이용진의 표정이 밝아졌다가 어두워졌고 눈에서 분노의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터무니없군. 성약당의 장로조차 알아내지 못한 문제를 네가 단번에 알아냈다고?”이용진은 탁자를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가락으로 진서준을 가리키며 소리쳤다.“이봐 청년, 솔직하게 말해. 내 곁에 내통자를 심어 놓은 게 아니야?”명주시에서 이용진 같은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은 항상 최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경계해야 했다.다시 말해 억울한 사람 천 명을 죽이더라도 내통자 한 명도 놓치지 않는 태도가 생존의 비결이었다.그렇지 않으면 명주시 같은 복잡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어려웠다.이용진 곁의 두 대종사도 이
‘이 녀석 미쳤나?’방 안의 모든 사람이 같은 반응을 보였다.이용진이 누구인가? 바로 명주시에서 누구나 다 아는 약왕이었다.전국을 논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절반 이상의 귀한 약재는 약왕의 손을 거친다.이런 사람이 어떻게 병에 걸릴 수 있을까?더군다나 매일 약재를 다루는 약왕에게 병이 있다면 명의들이 못 알아챘을 리가 없었다.그러니 진서준이 이용진에게 병에 걸렸다고 말한 건 미친 소리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소리였다.“이봐, 넌 지금 무슨 헛소릴 지껄이는지 알고는 있나?”이용진의 얼굴은 어둠 그 자체였다.그는 이곳에서 꼬박 30분 넘게 기다렸다.그런데 자기를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한 장본인이 고작 이런 애송이였고 오자마자 병이 있다며 모욕까지 했다.평소 인내심이 깊고 신사적이던 이용진도 이 순간만큼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이용진의 분노를 눈치채자 곽윤상은 얼굴이 창백해졌고 겁에 질려 진서준의 옷자락을 살짝 당겼다.하지만 진서준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 태연히 이용진 맞은편에 앉아 스스로 차를 따라 마셨다.진서준의 이 태연한 모습에 이용진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아무래도 이 청년은 약왕인 이용진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난 똑같은 말을 두 번 하지 않아요.”진서준은 차 한 모금을 마신 뒤,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진서준의 말에 이용진 오른쪽에 앉아 있던 대종사가 비웃으며 말했다.“약왕님은 무공을 수십 년간 연마하셨고 이미 종사 경지에 도달한 무인이야. 병에 걸렸다면 네가 말하지 않아도 진작 발견되었을 거야. 허튼소리도 정도껏 해야지.”보통 종사 경지에 오른 무인은 병에 걸리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무인의 근육, 뼈, 혈액은 이미 평범한 인간을 초월했기에 체내 바이러스조차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종사 무인이 병에 걸릴 경우라면 대개 다음 세 가지 이유 중 하나였다.난치병이거나 중독이거나 아니면 심각한 내상이 있을 경우였다.하지만 이용진은 이 세 가지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았다.난치병은커녕, 누군가의 독에
“여기는 국제적인 대도시잖아요.”곽윤상도 감탄했다.호텔 입구에 도착하자 교내 미인 대회에 나가도 손색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 안내원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손님, 저희 호텔은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식사나 숙박을 원하시면 회원 자격이 필요합니다.”곽윤상은 군말 없이 금박으로 장식된 카드를 꺼냈다.여성 안내원은 카드를 꼼꼼히 확인한 뒤,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곽 선생님, 안으로 모시겠습니다.”“이미 예약을 해두었습니다. 꼭대기 층의 5번 방입니다.”곽윤상의 말에 여성 안내원이 대답했다.“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확인해 보겠습니다.”여성 안내원은 프런트로 가서 예약 사항을 확인한 뒤, 두 사람을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꼭대기 층으로 가는 직행 엘리베이터는 총 네 대였고 속도는 어마어마했다.무려 300미터의 높이를 단 20초도 되지 않아 올라갔다.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진서준은 눈앞의 광경에 말문이 막혔다.사방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 멀리 보이는 구름층과 자기와 나란히 있는 듯한 달빛이 시야에 들어와 하늘 속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진 마스터님, 여긴 어떠십니까?”곽윤상의 질문에 진서준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내가 가본 레스토랑 중 가장 호화로운 곳 중 하나로군요.”“그렇긴 하죠. 이 호텔은 국제적으로도 유명한 곳입니다.”곽윤상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이 호텔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반드시 회원이어야 하는데 꼭대기 층에 오고 싶다면 일반 회원으로는 부족하고 최소한 골드 회원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골드 회원권을 발급받는 데만 200억이 필요합니다.”골드 회원권이 200억이나 한다는 말에 진서준이 다른 질문을 던졌다.“그럼 일반 회원은 얼마인가?”“10 억입니다.”곽윤상이 손가락으로 숫자를 표시하며 말했다.“그리고 이 돈은 카드에 적립되는 게 아니라 그냥 회원권 발급 비용일 뿐입니다.”그 말을 듣고 진서준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전국을 통틀어도 이런 가격을 자신 있게 책정하는 곳은 명주시의 호텔들뿐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