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하랑이 먼저 입을 열었다.“에리 씨, 예전에 에리 씨 노래만 들었어요! 너무 팬인데 사인해 주실 수 있을까요?”에리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조하랑을 쳐다보더니 웃으며 대답했다.“그럼요. 번호도 교환하는 게 어때요? 민정이 친구면 제 친구이기도 하니까요.”“친구면 말 편하게 해야죠. 지금부터 반말하는 거야!”두 여인은 흥분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박민정은 피식 웃더니 박윤우와 박예찬을 데리고 사진을 찍었다. 박예찬은 박민정이 사준 짱구 캐릭터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예찬아, 웃어야지. 스마일!”박윤우가 박예찬 옷에 달린 코끼리 코를 잡아당기며 말했다.“형, 엄마가 웃으래.”박예찬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고 기괴한 미소를 지어서 박윤우의 환한 표정과 온도 차이가 선명했다. “자, 다른 포즈로 찍어보자.”박민정은 아이들을 달래며 사진을 찍었고 한참 후에 정민기를 불렀다.“민기 씨, 이쪽으로 와보세요. 우리 윤우랑 예찬이랑 사진 찍어야죠.”정민기는 친구이자 생명의 은인이기에 박민정은 정민기를 가족처럼 생각했고 아이들한테 삼촌이라고 부르라고 당부했었다.“민기 삼촌, 빨리 와요!”박윤우는 두 손을 입가에 모으고 소리를 질렀다. 정민기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굳은 표정으로 함께 사진을 찍었다.한편, 김인우는 조하랑 곁으로 다가가더니 에리를 훑어보며 물었다.“하랑 씨, 이분은 누구시죠?”조하랑은 김인우도 이곳에 온 것을 깜빡했는지 당황하더니 두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에리야, 이분은 김인우 씨. 인우 씨, 이분은 톱스타 에리예요.”김인우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왜 나를 소개할 때는 이름 석 자만 말하고 저 사람을 소개할 때는 앞에 수식어까지 붙이는 건데?’“아, 스폰서만 잘 물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연예인이군요.”김인우는 에리 같은 연예인을 돈만 주면 뭐든지 다 하는 직업으로 생각했기에 적대적으로 대했다. 김인우의 말을 들은 에리의 눈빛에 살기가 돌았고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곁에 있던 민수아는 어찌할 바를 몰라
“괜찮아?”에리가 물었다.민수아는 볼을 붉히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잘생긴 남자 앞에서는 누구나 얼굴이 빨개진다.민수아는 서다희도 멋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서다희와 유남준이 이미 차를 몰고 온 줄 몰랐다.차에서도 서다희는 유남준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냥 연예인인 기생오라비예요. 요즘 회사 일이 너무 많고 바빠서 걔를 깜빡 잊었어요. 이 틈을 타 몰래 아프리카에서 왔나 봐요.”그는 이 말을 할 때만 해도 차분했다. 근데 산기슭에 도착해서 자신의 약혼녀가 그 기생오라비의 부축을 받고 볼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을 멀리서 보고는 눈빛이 이글거렸다.“이 사람이!”서다희는 유남준을 돌볼 겨를도 없이 말했다. “대표님, 저 먼저 내려가서 일을 좀 처리할 테니 잠시만 기다리세요.”“그래.”서다희는 차에서 내려 민수아를 향해 곧장 달려갔다.지금 그 두 사람은 이미 부축하던 손을 놓았다. 민수아는 서다희가 화가 나서 다가오는 것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고마워요, 에리 씨.”그녀는 좀 쑥스러운 듯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에리는 역시 톱스타 같았다. 사람이 너무 좋았고 전혀 톱스타 티를 내지 않았다.“이 정도로 고맙긴…”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먹 하나가 그를 향해 갔는데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에리가 평소에 운동했으니 마련이지, 이 주먹에 맞았더라면 그는 틀림없이 얼굴을 망가뜨렸을 것이다.“기생오라비!”서다희는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주먹을 들고 또 그를 치려 했다.서다희를 본 민수아는 그를 대뜸 껴안았다. “다희야, 뭐 하는 거야?”서다희가 잠시 멈춰서 물었다. “수아야, 방금 둘이 뭐 하고 있었어?”“아까 넘어질 뻔했는데 에리가 도와줘서 괜찮았어. 근데 왜 오자마자 사람을 때린 거야?”이쪽의 떠들썩한 소리는 박민정을 포함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조하랑과 김인우도 더는 싸우지 않았다. “왜 그래?”모두 다가와 물었다.“서 비서님이 여긴 어쩐
남자는 잘 짜인 슈트에 키가 크고 몸매가 좋았는데 카리스마도 대단했다.에리는 유남준이 이쪽으로 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분명히 유남준의 눈도 보이지 않는데 이상하게 압박감을 느꼈다. “남준아.”김인우가 소리쳤다.“응.”유남준이 대답했다.왠지 모르게 그가 오자마자 이곳은 순식간에 썰렁해졌다.박민정은 의아해했다. 처음에는 서다희가 수아가 마음이 안 놓여서 온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닌 것 같다. 에리가 보는 앞에서 박민정은 유남준이 왜 왔는지 직접 묻기는 곤란했다. 박민정이 말했다. “우리 지금 어디 가서 좀 쉴까요?”에리가 먼저 말했다. “앞으로 좀 가면 제가 묵는 호텔이 있어요. 자리를 예약해 드렸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릴 줄은 몰랐어요. 공간이 좀 작을지도 몰라요.”“괜찮아.”조하랑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은 듯 선뜻 말했다. “김인우 씨, 서다희 씨, 유남준 씨, 당신들은 모두 후에 온 사람들이니, 셋은 나가서 자세요.”세 남자는 순간 안색이 나빠졌다.조하랑이 앞장서자 서다희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저는 수아를 한방 쓰면 돼요.”민수아는 싫어해서 말했다. “누가 너랑 같이 잔대?”“수아야.”“내 이름 부르지 마.”민수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두 사람은 이미 고향에서 약혼했다. 연말에 결혼하기로 약속했지만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다.박윤우도 말했다. “우리 아빠는 엄마랑 같이 자면 돼요.”유남준과 박민정의 안색은 순식간에 변했다.박윤우는 한마디 보탰다. “왜 그래요? 전에 항상 같이 안고 잤잖아요.”박민정은 침묵했다. 박예찬은 그를 살짝 터치하며 말했다. “네가 말을 안 해도 아무도 너를 벙어리라고 생각 안 해.”박윤우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지금 가장 난처한 사람은 김인우뿐이다.서다희는 민수아가 있고, 남준이는 박민정이 있다. 오직 김인우만이...김인우는 조하랑을 바라보았다. 말을 건네기도 전에 조하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 자리를 뺏지 않을게요.”“누가 당신이랑
“일단 식사부터 하세요.”사장님이 말했다.한 무리의 사람들이 1층 레스토랑에 갔는데 식탁에는 간단한 가정 요리들이 차려져 있었다. 음식들은 모두 맛있어 보였다.에리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일단 여기서 먹고 내일은 산에 올라가 텐트를 치고 캠핑하러 가죠.”여자들은 그의 계획이 마음에 들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정교한 음식이 산 아래에서 배달되었다.김인우가 말했다. “에리 씨 혼자 사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먹을 것을 좀 시켰어요.”에리는 씩 웃더니 마스크를 벗었다. 혼혈인 같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좋아요,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김인우는 그의 그런 모습을 좋아하지 않았다.식사를 마친 뒤 그는 사석에서 유남준과 말했다. “남준아 조심해, 이 에리 생긴 게...”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그는 에리를 연지석과 비교해서 말했다.“연지석보다 더 잘생겼어. 스물다섯도 안 돼 보이던데?”유남준은 기억을 잃기 전이나 후나 에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이 없다. 에리가 처음 귀국했을 때 그의 눈은 이미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아이돌이 잘생긴 건 당연한 거잖아. 걱정할 필요 없어.”유남준은 박민정이 바보만 아니라면 자신과 에리 중 누가 더 믿을만한지 알 거라고 생각했다.에리 같은 스타의 생활은 얼마나 어지러운지 모른다.“하긴, 네 말이 맞아. 내가 생각이 짧았어.”“너는 생각이 짧아도 괜찮아.”유남준이 말했다.김인우는 그의 말이 이해가 안 됐다. 유남준은 더는 그에게 말을 걸지 않고 서다희한테 얘기했다. “오늘 여기에서 쓰는 모든 돈을 지불해.”그는 결코 남의 은혜를 받고 싶지 않았다.“네.”서다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대표님이 말하지 않아도 그는 계산하러 갈 것이다.호텔 주인은 아홉 자리의 수표 한 장을 보고 넋이 나갔다. 그는 돈이 부족하지 않는데 이렇게 돈을 헤프게 쓰는 사람도 보지 못했다.그는 에리를 옆으로 불러서 그에게 수표를 보여주었다.“너희들이 하룻밤을 묵으면서 저의 1년 치 봉급을 줬
이 말을 들은 유남준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들은 내 아들이에요. 난 당연히 참을성 있게 잘해줄 거고요.”박민정은 그제야 비로소 안심하고 아이를 돌보러 갔다.밤이 되었다.모두들 방으로 돌아가서 쉬려 했는데 박윤우는 유남준의 허벅지를 껴안았다. “아빠, 오늘 밤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우리 네 식구가 함께 자요, 네?”그가 이 말을 꺼내자 주위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았다.유남준이 대답하기도 전에 박예찬이 말했다. “박윤우, 너 아직 어린애야? 에리 아저씨가 이미 우리의 방을 마련해 줬어. 우리 둘이 같이 자자.”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박예찬이 박윤우보고 어린애라고 하는 말에 조하랑은 피식 웃었다. “예찬아, 너랑 윤우랑 나이가 같잖아.”박예찬은 그녀를 흘겨보았다.조하랑은 박예찬이 점점 귀엽지 않게 변한다고 생각했다.박윤우는 눈에 문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나는 엄마 아빠랑 잘 거야. 형은 어른이니까 혼자 자.”박예찬은 박윤우 때문에 정말 화가 났다.“너 이리 와.”“안 갈 거야.”유남준을 안은 박윤우의 손은 더 조여왔다. “아빠, 빨리 도와주세요, 형이 저를 때리려고 해요.”유남준은 어렸을 때 박예찬과 같이 성숙해서 애교가 없었고 애교 부리는 것을 싫어했다. 그는 박윤우처럼 애교를 부리는 사내아이를 싫어해야 하는 개 맞다. 하지만 그는 박윤우를 한 손에 껴안았다. “가자, 아빠랑 같이 자자.”“좋아요.”박윤우의 두 눈이 순간 반짝반짝 빛났다.박예찬은 어이가 없었다. 이 상황을 보던 박민정도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떠나가는 사람들을 말없이 지켜보던 에리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이 다른 숙소를 마련한다.지금 방이 두 개 더 생겼으니 서다희와 김인우는 한 사람당 한방을 쓸 수 있다.다만 서다희는 낯가죽이 두꺼워서 방안에 머문 지 얼마 되지 않아 민수아의 방문을 두드렸다.그들 옆방은 바로 유남준네 네 식구다.박민정은 두 아이더러 씻은 뒤에 침대에 누우라고 했다.사장은 그들 가족이 한방을 쓰는
“지금 나한테 도움을 청하는 건가요?”박민정이 되물었다.이 녀석은 너무 도도했다. 분명히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인데 도와달라는 말을 하려 하지 않는다.유남준은 한참 동안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가 한 글자를 내뱉었다. “응.”“사람한테 도움을 청하는 게 당신 같은 말투가 아닐 텐데요? 예의 바르게 다시 말해봐요. 나한테 뭘 부탁하려는 거예요?”박민정은 모처럼 그를 괴롭힐 기회가 생겼는데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상처받은 자신에게 미안할 것 같았다. 유남준은 지금 서다희의 월급을 깎아주고픈 심정이 너무 컸다. 자신을 박민정한테 내팽개친 채 내버려 두고 있으니 말이다.그는 가벼운 결벽증이 있어서 씻지 않고는 전혀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것도 낯선 곳에서 말이다. 그가 씻지 않는다고 해도 화장실까지 안 갈 수는 없다. 박민정은 불난 틈을 타서 부채질하는 것이다.“나를 화장실로 데려가서 씻겨줘.”유남준은 말을 꺼내자마자 후회했다.그는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위협을 받은 적이 없다. 예전 같으면 박민정은 끝장이 났을 것이다.근데 방금, 그는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박민정은 이미 그의 한계를 몇 번이나 깼다.그가 기분이 나빠질 때 박민정은 이미 그에게 다가왔다. “당신을 도와주기 전에 당신은 나한테 사과해야 해요.”유남준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물었다. “사과?”내가 유남우와 사귄다고 모함한 거 사과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나는 그때 묘지에 쓰러졌어요. 그 사람이 나를 구해준 거예요.”박민정은 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당신은 내 남편으로서 왜 밤새 돌아오지 않았느냐고 묻지도 않았어요. 그리고는 내가 바람피운다고 누명을 씌웠죠. 심지어 나보고 두 아이의 양육권을 포기하고 당신과 이혼하라고 강요했어요.”그녀의 말에 유남준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그럼 네가 나한테 손찌검을 한 건?”그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덧붙였다. “당신도 내가 당신 남편이라고 했지? 그럼 당신이 밤새 돌아오지 않았으면
“그런 건 아니에요. 만약 환경을 바꾸지 않았다면 남준 씨 기억력이 워낙 좋으니까 3일 정도 설명하면 내 도움 없이도 어떤 물건이 어디 있는지 다 기억할 수 있을 거예요.”박민정이 이렇게 말하더니 칫솔을 유남준의 손에 들려주며 한마디 덧붙였다.“얼른 양치하고 자요.”유남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양치하기 시작했다.세수까지 마친 유남준이 이렇게 말했다.“일단 먼저 나가 봐.”박민정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왜요?”“나 샤워 좀 할게.”박민정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처음도 아닌데요 뭐.”유남준이 손을 내밀어 박민정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뭐라고?”“아무것도 아니에요.”박민정이 바로 부인했다.유남준은 잘못 들은 줄 알고 손을 놓으려는데 갑자기 옆방에서 이상한 대화 소리와 물소리가 들려왔다.“서다희, 이 나쁜 놈. 꺼져.”민수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지는 않았지만 어렴풋이 들려왔다.다들 성인이었기에 옆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박민정의 얼굴이 빠른 속도로 빨개졌다. 그녀는 지금 유남준에게 안긴 채로 옆방에서 들어오는 소리를 들으며 얼굴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유남준도 다 들었는지 호흡이 흐트러지더니 천천히 박민정을 풀어줬다.“나가. 샤워하고 알아서 방으로 돌아갈게.”“그래요.”박민정은 당장이라도 여기를 떠나고 싶었다.침대에 돌아오니 더는 옆방에서 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마 민수아와 서다희도 지금 욕실에 있는 것 같았다.지금 두 아이가 잠들었으니 망정이지 들었으면 정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10여 분 뒤.유남준이 샤워를 끝내고 욕실에서 나왔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박민정도 이때 방안의 불을 껐다.두 아이는 단잠에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박민정과 유남준은 잠이 오지 않았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서다희와 민수아가 다시 방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벽을 하나 사이에 두고 있었기에 방음이 좋지 않았다. 다행히 소리가 너무 크지 않아서 아이들의 숙면은 영향
김인우가 마른기침하자 방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조하랑을 끌고 자기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순간 당황한 조하랑이 소리를 질렀다.“김인우 씨, 다짜고짜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신고라도 할까요?”김인우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그녀를 놓아주고는 방문을 닫았다.“아직 그렇게 굶주리지는 않아요.”조하랑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하긴 늘 그녀를 성에 차지 않아 했던 김인우였기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그러면 왜 방으로 데려온 건데요?”김인우가 자리에 앉더니 고개를 들고 보기 드물게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조하랑 씨. 어찌 됐든 간에 다른 사람이 보기에 우리는 약혼한 사이에요. 그러니 최대한 다른 구설수는 만들지 말았으면 하거든요.”“정말 그 기생오라비가 좋다면 할아버지한테 직접 말씀드려요.”조하랑은 그제야 김인우가 오해하고 있음을 알아챘다.“무슨 생각하는 거예요? 내 방에 포트가 없어서 사장님한테 물어봤더니 에리 방에 남는 거 있다고 해서 간 거예요.”“포트는요?”김인우는 조하랑의 말을 믿지 않았다. 포트를 가지러 간 거라면 나올 때 그렇게 주변을 두리번거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조하랑은 김인우가 오해하는 건 딱히 두렵지는 않았지만 그가 사처에 소문을 내고 다닐 것 같아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에리가 문을 닫지 않았더라고요. 내가 들어갈 때 샤워 중이었어요.”‘그래서 그런 거였구나.’김인우는 그제야 이해했다. 하지만 조하랑이 변태적이던 게 떠올랐다.“내 방에 있는 거 써요. 어차피 나는 안 쓰니까.”김인우는 보기 드물게 젠틀했다.조하랑은 포트를 들고 김인우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더니 바로 방에서 나갔다.조하랑이 가고 옆방도 조용해졌다. 김인우는 드디어 단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이튿날 아침.민수아와 서다희를 제외하고 옆방에 지낸 다른 사람은 많이 피곤해 보였다.조하랑도 하품을 연거푸 해댔다. 다들 알면서도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다.“오늘 캠핑 하러 가기로 했지?”조하랑이 물었다.“응. 캠핑에 필요한
유남우는 오늘따라 이상하게 윤소현을 밀어내지도 않고 오히려 위로해 줬는데 이런 모습을 일부러 박민정에게 보여주려는 건지 아니면 홍주영에게 보여주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그러나 홍주영과 박민정 두 사람은 그저 한쪽에 가만히 서서 바라보고만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이때, 의사가 수술실 문을 열고 나오더니 그들에게 말했다.“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거부 반응은 없는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감사합니다.”의사가 떠나간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박민정과 조하랑도 그곳에 한참 동안 머물다가 병원을 빠져나왔다.돌아오는 길에 조하랑은 이상하게 마음이 착잡했다.그녀는 원래 뱃속의 아이를 지우려 했지만 오늘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유다혜를 본 뒤로는 이상하게 망설여지기 시작했다.모든 아이한테 이 세상에 태어날 기회가 주어지는데 괜히 그 기회를 마음대로 저버리는 게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런데 김인우 씨가 혹시나 아이를 원치 않으면 어떡하지?’“민정아, 내가 임신한 사실은 일단 비밀로 해줘. 특히 인우 씨한테.”박민정은 왜 그래야 하는지 여전히 이해가 안 갔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먼저 조하랑을 데려다준 뒤 박민정은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에리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민정아, 아까 급하게 나가더니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박민정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별일 아니야. 그저 하랑이 만나고 왔어.”“그럼 됐어.”그렇게 사람들이 다 떠나갔지만 에리만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민정아, 저번에 그 뉴스 기사 봤어?”‘기사?’순간 저번에 최현아가 에리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에리가 다급하게 해명하기 시작했다.“민정아, 난 극히 정상적인 남자야. 절대 게이가 아니니까 믿어줘.”그의 말에 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그래. 믿을게.”박민정이 웃자 에리
“민정아, 하랑 씨.”다름 아닌 정수미와 윤소현이었는데 그중 정수미는 빠르게 두 사람에게 다가와 걱정스레 물었다.“민정아, 병원에는 웬일이야? 어디 아픈 거야?”이때 조하랑이 갑자기 일부러 기침하더니 박민정 대신 답했다.“콜록! 콜록! 제가 감기 걸려서 민정이랑 같이 왔어요.”그러나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의사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보고서를 그녀에게 건네줬다.“조하랑 환자분, 임신 보고서를 두고 가셨어요.”순간 조하랑은 온몸이 굳어버렸다.그녀의 거짓말이 이렇게 빨리 탄로 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박민정은 재빨리 일어나 보고서를 건네받았고 조하랑도 멋쩍게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왔던 김에 산부인과에도 와봤어요.”정수미는 그녀의 말에 활짝 웃었다.“축하해요.”“감사합니다.”그러나 조하랑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옆에 서 있던 윤소현은 김씨 가문의 후계자를 임신했다는 소리에 또다시 질투심이 마구 불타올랐다.이렇게 되면 김씨 가문에서 조하랑의 입지가 더욱 확고해진다고 볼 수 있다.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신분이나 지위, 외모 면에서 조하랑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밀려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멀지 않은 곳에서 유남우와 홍주영 두 사람도 손에 한 무더기 결과서를 갖고 이쪽으로 걸어오다가 문득 박민정 손에 들린 검사 보고서를 본 순간 표정이 변했다.‘임신 보고서인가?’‘또 임신했다고?’유남우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윤소현이 빠르게 다가와 그에게 물었다.“남우 씨, 우리 다혜는 어떻게 됐어요?”“방금 수술이 끝나서 이제 회복 결과를 지켜봐야지.”윤소현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사람들 앞에서 유남우의 품에 안겨 울기 시작했다.“만약 우리 다혜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 그러면 저도 그냥 죽어버릴래요.”유남우는 그녀를 밀쳐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보는 눈이 많아 애써 참고 그녀를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분명 아무 일도 없을 거야.”“너무 무섭지만 남우 씨가 제 옆에 있어서 다행이에요.”윤
박민정은 왠지 조급하게 들리는 조하랑의 목소리에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하던 일을 멈추고 답했다.“그래.”한 시간 뒤, 어느 작은 내과 병원.박민정은 허름한 병원 외부와 안절부절못해 보이는 조하랑에게 의아해서 물었다.“하랑아, 대체 이런 곳에는 왜 온 거야?”조하랑은 그녀의 말소리에 화들짝 놀라더니 급하게 그녀의 입을 막았다.“조용히 해.”그리고 주머니에서 마스크 두 장을 꺼내더니 하나는 박민정에게 건네며 다시 말을 이었다.“민정아, 나 아무래도 임신한 것 같아서 검사해 봐야겠어.”“뭐?”박민정은 진짜 큰 일인 줄 알고 가슴을 졸였는데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런 건 먼저 테스트기로 확인해 볼 수 있지 않나?’조하랑은 단번에 그녀의 마음을 읽었는지 재빨리 해명했다.“임테기도 다 정확한 건 아니잖아. 무조건 병원에 와서 초음파 검사를 하는 게 제일 확실할 것 같아서.”“그렇지만 꼭 이런 곳에서 검사해야 해?”박민정은 이곳의 위생 상태가 너무 걱정되었다.그러나 진주시의 크고 작은 병원들은 거의 다 김씨 가문 산업이다 보니 조하랑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혹시나 김씨 가문에서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나중에 김인우랑 김훈한테 해명하기조차 어려워질 것이다.“가자. 걱정하지 마.”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들어가서 더러운 의료 기기들을 보고는 기겁하더니 빠르게 뛰쳐나왔다.“그냥 다른 병원으로 가자.”두 사람은 다시 짐을 싸서 결국에는 큰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소변 검사와 초음파 검사까지 마친 조하랑은 검사 보고서에 임신 4주 차라는 글씨를 본 순간 눈앞이 아찔해 났다.“어떻게 4주가 되는 거예요?”“마지막 생리 주기를 계산해 본 결과가 그렇게 나왔습니다.”조하랑은 지금 온몸에 힘이 다 빠지는 것 같았다.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박민정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아줬다.“좋은 일인데 인우 씨한테 빨리 알려줘.”그러나 조하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아니, 절대 안 돼.”자신도 아직 받아 들을 준비가 안
정수미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의사한테 자신이 사인하겠다고 말하려는데 멀리서부터 유남우가 다가와 그들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윤소현은 유남우의 목소리가 들리자 얼굴이 갑자기 돌변하더니 눈물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다.“남우 씨, 우리 다혜가 혈액암이래요. 그래서 다른 피를 수혈받아야 한다는데 그래도 살 확률이 그리 높지 않대요. 저희 이제 어떡하죠?”유남우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그럼 빨리 수혈부터 진행하자고 해.”윤소현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빨리 사인했다.그러나 정수미는 그녀의 빠른 태세 전환에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분명 이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유남우의 원인이 크다는 걸 윤소현도 알 텐데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이 남자를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그렇게 그들은 밤새 병원에서 지내야 했다.새벽 때쯤, 홍주영도 전문의들을 데리고 달려왔다.그리고 어린아이가 고생하고 있는 게 너무 안쓰러웠다.“도련님, 다혜는 괜찮나요?”홍주영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유남우는 문득 어제 하민재와 그녀가 같이 있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나도 아직 몰라. 지금 수술 중이야.”홍주영은 수술실 쪽을 바라보면서 애써 조급한 마음을 달랬다.그러나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윤소현은 그녀의 모습이 참 가증스럽다고 생각되었다.“홍 비서님, 다혜는 제 딸인데 왜 비서님이 난리예요?”그녀의 날카로운 말투에 홍주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이때 유남우가 고개를 돌리고 윤소현에게 물었다.“다혜가 자기 딸인 걸 아는 사람이 왜 지금 하나도 걱정하고 있는 것 같지 않지?”그는 원래 이 계기로 윤소현에게도 만약 아이한테 사고가 일어나게 되면 어떤 느낌인지 알려주고 싶었다.그러나 이 여자는 전혀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윤소현은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이 일은 점점 크게 번져 어느새 김씨 가문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다.김인우는 유다혜가 병원에서 수술받는다는
“연애해 본 적 없다면서요?”하민재는 다소 의아했다.도대체 자신이 그 남자보다 부족한 게 뭐란 말인가?홍주영은 그의 말에 씁쓸하게 웃었다. “네, 연애는 해 본 적 없어요. 그냥... 짝사랑이었을 뿐이에요.” 하민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이렇게 솔직한 여자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그럼 왜 고백하지 않았어요?” 그는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홍주영은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그 사람은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은 절 좋아하지 않거든요.”“그럼 둘이 이어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거네요?”하민재가 다시 한번 확인하자 홍주영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 가능성은 없어요.”“그렇다면 굳이 우리가 헤어질 필요도 없잖아요? 난 신경 안 써.”짝사랑이라면 아무 문제없었다.하민재는 자신만만했다. 연애 경험 없는 홍주영쯤이야 얼마든지 자신의 매력으로 사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홍주영이 더 말을 잇기도 전에 하민재가 가로막았다.“하지만은 무슨. 이제 이 얘긴 그만해요. 연애에 공평함 같은 게 어디 있어요? 난 주영 씨 마음속에 누군가 있는 걸 개의치 않으니까 주영 씨도 내 과거에 신경 쓰지 않으면 돼요.”하민재의 단호한 태도에 홍주영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좋아요, 약속할게요.”“네.”그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때, 하민재의 할머니가 다가와 넌지시 물었다.“어떻게 됐어?”“뭐가요?”하민재가 되묻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너랑 주영이 말이다. 주영이 같은 아이, 꼭 소중히 여겨야 한다. 부잣집 딸들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할 것 없는 아이야.”하민재의 할머니는 함부로 연을 맺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홍주영에 대해 충분히 조사했었다. 홍주영은 비록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능력만큼은 인정할 만했다.그녀는 가문 사업에는 별 관심 없는 손자가 이런 여자를 곁에 두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하민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하민재가 아니라 유남우였다.홍주영은 순간 얼어붙었다.“도련님? 어떻게 오셨어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유남우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애써 눌렀다.“별일 아니야. 네가 연락도 없고 전화도 안 받아서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해서 와봤어.”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거짓말을 했다.홍주영은 황급히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제야 유남우가 여러 번 전화와 문자를 보냈다는 걸 확인했다.“죄송해요. 오늘 오후 바빠서 폰을 무음으로 해뒀거든요. 그래서 확인을 못 했어요.”유남우는 말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다 문득 테이블 위에 놓인 낯선 컵이 눈에 들어왔다.“누가 왔었어?”그가 아무렇지 않은 듯 묻자 홍주영은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오늘 남자 친구 가족을 만나고 왔어요.”‘남자 친구 가족...? 벌써 부모님을 만난 건가?’“언제 그렇게 됐어? 상대는 누구야?”유남우는 모르는 척 물었고 이 말에 홍주영은 주먹을 살며시 쥐었다.“...하민재 씨예요.”‘역시, 그놈이었군.’유남우는 얼굴에 떠오르는 감정을 애써 감췄다.“그때는 사귈 생각 없다고 하지 않았나?”“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 많이 생겼어요.”홍주영은 손바닥을 꼭 쥐었다. 어쩐지 유남우 앞에서는 괜스레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마치 잘못이라도 저지른 아이처럼.더 이상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 그녀는 얼른 주방으로 가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라 건넸다.“도련님 오늘 저한테 왜 연락하신 거예요?”“별건 아니고, 전에 고 대표 건 홍 비서가 맡았지? 그 계약서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연락이 안 되더라. 나중에 혼자 찾았어.”“아... 찾으셨군요. 죄송해요. 앞으로는 업무에 지장 없도록 할게요.”유남우는 그녀가 내민 물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물맛이 입안 가득 퍼졌지만 왠지 씁쓸하게 느껴졌다.“괜찮아. 이제는 홍 비서 일도 중요하니까. 홍 비서도 이제 적지 않은 나이니 결혼을 생각할 때가 됐겠지.”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차 안에 앉아 있던 유남우는 여전히 홍주영에게서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다.이유를 알 수 없는 답답함이 가슴을 짓눌렀고 그는 무심코 넥타이를 당겼다.또다시 10분이 지나도록 메시지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들려온 건 차가운 자동 응답음뿐이었다.“죄송합니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잠시 후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가슴 한구석이 더 답답해졌다. 그는 짜증스럽게 휴대폰을 한쪽으로 던지며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운전해.”운전기사가 물었다.“어디로 모실까요?”“모르겠어. 그냥 아무 데나 가.”“네.”차는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왔고 창밖으로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한편, 홍주영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하씨 가문의 할머니와 몇 마디 더 나눈 뒤 하민재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하민재는 벌써 그녀를 미래의 아내로 여기고 있었다.“어때요? 불편한 점은 있어요?”홍주영이 고개를 끄덕였다.“없어요. 할머니도 너무 좋으시고 아버님과 어머님도 따뜻하게 대해 주셨어요.”그때 하민재가 갑자기 등 뒤에서 작은 상자를 하나 꺼냈다.“자, 받아요.”“이게 뭐예요?”홍주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하민재는 그녀의 손에 상자를 쥐여 주었다.“열어봐요. 우리 부모님께서 주영 씨에게 주시는 첫 선물이에요.”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고풍스러운 장신구 세트가 들어 있었다.아니, 단순한 ‘고풍'이 아니라 대대로 내려온 가문의 전통 예물이었다.하민재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우리 부모님께서 주영 씨를 인정하신 거예요. 이건 우리 집안의 며느리만 받을 수 있는 거거든요.”홍주영은 너무 놀라 얼른 상자를 다시 그의 손에 돌려주었다.“이건 너무 귀한 거라 받을 수 없어요.”“왜 못 받아요? 어차피 우린 결혼할 사이인데.”‘결혼'이라는 단어에 그녀는 순간적으로 망설였다.“결혼하고 나서 받아도 늦지 않잖아요. 아직은 너무 일러요.”결혼 이야기가 나온 이상, 섣불리 받을 수 없었다. 만약 나중에
“저는 남준 씨가 동서를 못마땅해하던 시절도 지켜봤어요. 그 삼 년 동안 동서는 정말 처참했죠. 아무도 동서를 사모님으로 대우하지 않았어요.” 최현아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빨리 변하다니. 나는 동서가 영영 남준 씨랑 화해하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동서는 정말 너그럽네요.”유남우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으나 최현아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사실 도련님께서 돌아오기 전에 전 이미 동서한테 사람을 잘못 알아봤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동서는 그때 이미 남준 씨를 좋아하게 된 게 아닐까 싶어요.”유남우는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다. “지나간 일은 이미 지나간 거니 더 이상 말할 필요 없어요.”최현아는 입을 다물었다.유남우는 시선을 거두고 돌아서서 걸어갔고 최현아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유남우는 유남준이 잘되는 꼴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제 두 형제가 어떻게 싸울지 지켜보는 일만 남았다.유남우는 차에 올라탔다.차 안에서는 홍주영이 조수석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그가 타자 그녀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도련님.”“응, 회사로 가자.”“네.”홍주영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의 핸드폰은 계속 진동하고 있었다.그녀는 확인하지 않았고 유남우는 그런 모습을 보고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왜 메시지를 안 봐?”홍주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개인적인 메시지라 굳이 볼 필요 없어요.”그녀에게 계속 메시지를 보내는 건 하민재였다. 둘은 이제 화해하고 교제하기로 했는데 하민재는 예상외로 틈만 나면 연락을 해왔다.“괜찮아. 지금 업무 시간도 아닌데.” 유남우는 부드럽게 말했다.“네.”홍주영은 그제야 핸드폰을 들어 하민재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그는 오늘 오후에 그녀를 하씨 가문에 초대했다. 할머니가 그녀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홍주영은 한참을 고민한 끝에 유남우에게 말했다. “도련님, 오늘 오후에 개인적인 일이 좀 있어요.”유남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
그가 고개를 숙이며 여느 때처럼 자연스럽게 박민정에게 입을 맞추려 했다.박민정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흔들리며 그녀는 반사적으로 입을 손으로 가렸다. 덕분에 그의 입술은 그녀의 손등에 살짝 닿고 말았다.둘의 시선이 엉키며 공기마저 뜨겁게 달아올랐다.유남준이 손을 들어 그녀의 손을 치우려 하자 박민정은 급히 외쳤다.“안 돼요!”그녀의 반응에 유남준의 동작이 멈췄다.“저... 저 갑자기 기억이 난 것 같아요.”유남준이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쥐었다.“정말?”“네! 어제, 아마도 음료에 술이 조금 섞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정말 미안해요.” 박민정은 얼굴이 불타오를 듯이 새빨개졌으나 유남준은 오히려 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당연한 거야. 너도 결국 참지 못한 거잖아.”“뭐라고요?” 박민정은 순간 주먹을 꼭 쥐었다. “내가 뭘 참지 못했다고요?”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자, 이제 그만. 일어나자. 예찬이랑 윤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박민정은 아이들이 밤새 자신을 찾아다니다 놀랐을 걸 생각하니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유남준은 그녀를 놓아주며 말했다.“좋아. 아침 먹고 바로 돌아가자.”그의 기분은 오늘따라 유난히 좋아 보였다. 돌아가는 길 내내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반면, 박민정은 그의 곁에 앉아 잔뜩 긴장한 채 앉아 있었다.두 사람이 부부라는 것, 이미 일어날 일은 일어났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젯밤을 떠올릴 때마다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도대체 왜 참지 못한 거지?'유남준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 채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고 박민정은 깜짝 놀라며 손을 빼려 했다.“괜찮아요. 나 혼자 걸을 수 있어요.”하지만 그는 손을 놓지 않았다.“이건 걷는 문제랑 상관없어.”박민정은 그의 아내였다. 그는 그녀가 항상 그의 시야 안에 머물도록 곁에 두고 싶었다. 그러다 갑자기 유남준이 어제 일을 떠올리며 물었다.“어제, 최현아가 너한테 뭘 하지 않았어?”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