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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작가: 윤지
인제 보니 아빠는 유남준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걸 진작 알아챘나 보다.

하지만 딸의 행복을 위해 유씨 일가와 계약을 체결했고 박민정도 소원대로 유남준에게 시집갈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두 사람이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아빠가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만약 아빠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남동생과 엄마도 계약을 위반하지 않을 텐데...

박민정은 재산 양도 수속을 전부 장 변호사에게 건넨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길옆에서 이지원의 홍보 포스터들을 보게 됐다.

포스터 속 그녀는 더없이 눈부시고 아름답고 해맑은 모습이었다.

‘이젠 놓아줄 때가 됐어. 남준 씨도 나도 자유를 되찾아야지.’

두원 별장에 도착한 그녀는 짐 정리를 마쳤다.

결혼한 3년 동안 그녀의 짐이라곤 고작 캐리어 하나에 다 들어갔다.

이혼합의서는 작년에 이미 장 변호사에게 부탁해 작성해달라고 했다.

유남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고 자괴감이 들고 마음이 약해진다.

그녀는 진작 알아챘다. 둘 사이의 감정은 조만간 끝이 닿는다는 걸, 그래서 일찌감치 떠날 채비를 했다...

저녁 시간, 유남준의 문자는 없었다.

박민정은 용기 내어 그에게 먼저 문자를 보냈다.

「오늘 밤 시간 돼요? 당신한테 할 얘기 있어요.」

상대는 한참 동안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박민정은 어두운 얼굴로 생각했다.

‘이젠 문자로 답장하는 것조차 싫은가 보네. 내일 아침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어쩌겠어.’

그 시각 유앤케이 그룹 대표이사 사무실 안.

유남준은 문자를 확인하곤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았다.

절친 김인우가 소파에 앉아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끝내 못 참고 물었다.

“민정 씨 문자야?”

유남준이 묵인했고 김인우는 거리낌 없이 비난해 댔다.

“이 귀머거리가 진짜! 제가 정말 유씨 가문의 사모님이라도 된 줄 아나? 어딜 감히 남편을 감시해? 남준아, 너 설마 걔랑 평생 시간 끌려는 건 아니지? 박씨 일가는 인제 아무것도 아니야. 걔 남동생 박민호는 회사도 운영할 줄 모르는 바보 멍청이라고. 얼마 안 가 박씨 가문이 그대로 망할걸. 걔네 엄마는 또 밑 빠진 독이지!!”

유남준은 담담한 얼굴로 그의 말을 들었다.

“알아 나도.”

“근데 왜 이혼 안 해? 지원이는 여태껏 너만 기다렸어.”

김인우가 초조하게 물었다.

단순하고 또 항상 노력하는 이지원은 약아빠진 박민정보다 몇 배는 더 나은데, 김인우는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이혼 얘기에 유남준은 침묵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김인우가 못 참고 물었다.

“너 설마 박민정한테 정든 건 아니지?”

정든다고?

유남준은 경멸의 미소를 날렸다.

“걔가 그럴 자격이나 돼?”

그는 인수합병 계약서 한 부를 김인우에게 건넸다.

이를 본 김인우는 입이 쩍 벌어졌다.

‘유남준, 너 진짜 독하다 독해!’

그는 단지 유남준과 박민정이 이혼하길 바랐지만 절친 남준이가 바움 그룹을 단번에 인수할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뜻밖에도 박민정이 살짝 안쓰럽게 느껴졌다.

부부로 3년을 지내오며 박민정이 유남준에게 얼마나 잘해주는지는 눈이 달린 사람이라면 다 안다.

유남준은 무자비하기 그지없고 박민정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것도 팩트이다!

...

그가 안 돌아올 줄 알았는데 새벽 12시에 두원 별장으로 돌아왔다.

박민정은 아직 안 자서 재빨리 그를 마중 갔다. 그녀는 숙련된 솜씨로 그의 외투와 서류 가방을 넘겨받았다.

일련의 행동은 보통 부부들과 별다를 게 없었다.

“앞으론 함부로 문자 보내지 마.”

유남준의 쌀쌀맞은 목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깨트렸다.

그녀는 일도 안 하고 종일 집에 있으면서 굳이 무슨 할 얘기가 있다고?!

박민정은 외투를 옷장에 걸다가 손이 파르르 떨렸다.

“네, 앞으론 더는 그런 일 없어요.”

유남준은 그녀의 말뜻을 알아채지 못하고 곧게 서재로 향했다.

몇 해 동안 그는 돌아오면 대부분 시간을 서재에서 보낸다.

두 사람은 분명 한 지붕 아래에 있지만 박민정은 늘 혼자였다.

어쩌면 유남준은 청각장애인의 세계가 늘 조용하다고 생각할지도, 또 혹은 아예 그녀를 신경 쓰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일 듯싶다.

서재로 들어간 후 유남준은 하던 대로 비즈니스 업무를 상의했고 그 내용은 바움 그룹 인수합병 건이었다...

박민정도 늘 그랬듯 위를 따뜻하게 해주는 차 한 잔 타왔고 그가 부하 직원에게 명령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동생 박민호가 무능해서 바움 그룹은 조만간 이날을 맞이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바움에 제일 빨리 손 쓴 자가 남편일 줄이야.

“남준 씨.”

그녀의 부름에 유남준은 하던 말을 멈췄다.

그는 가슴이 찔렸는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흠칫 놀라더니 재빨리 온라인 통화를 마치고 노트북도 접었다.

박민정은 일부러 그의 동작을 못 본 듯 가까이 다가와 케모마일 차 한 잔을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남준 씨, 차 마시고 일찍 쉬어요. 무엇보다 건강이 우선이에요.”

왠지 모르게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유남준의 긴장했던 마음을 조금 풀어주었다.

그녀는 듣지 못했겠지. 만약 들었다면 분명 한바탕 소란을 피웠을 테니까!

미안함 때문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유남준은 떠나가는 그녀를 불러세웠다.

“할 얘기가 뭐야?”

박민정은 더없이 익숙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오늘 오전에 시간 돼요? 우리 함께 가정법원 가서 이혼 신청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잔잔한 바람처럼 차분하게 울려 퍼졌다.

마치 평상시 흔하디흔한, 아주 사소한 일을 말하듯 이혼을 언급했다.

유남준의 눈빛이 확 어두워졌다. 그는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박민정에게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결혼생활 3년 동안 그가 아무리 도가 지나친 일을 해도 박민정은 이혼을 언급한 적이 없다.

사실 유남준도 알고 있다. 그녀는 유남준을 정말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이전에 두 집안이 이웃으로 지낼 때부터 이 어린 소녀가 자신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무려 십여 년 동안 자신만 좋아한 것도 잘 안다.

그런데 그녀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박민정의 퀭했던 두 눈이 지금 이 순간 더할 나위 없이 영롱하게 빛났다.

“남준 씨, 그동안 당신 시간을 너무 지체했어요. 우리 이만 이혼해요.”

유남준은 양옆에 내려놓았던 손이 저도 몰래 움찔거렸다.

회사에서 김인우가 이혼하라고 다그칠 때도 그는 아무 말 없었는데 박민정이 먼저 얘기를 꺼내다니, 대체 그녀가 무슨 자격으로?

“방금 너도 들었지? 바움은 이젠 말로에 세워졌어. 내가 따오거나 딴 사람이 따가거나 뭐가 다른데? 이혼 얘기는 대체 왜 꺼내는 거야? 아이 때문이야 아니면 돈 때문이야? 그것도 아니면 지금 나더러 바움에서 손 떼라고?”

유남준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잊지 마. 난 널 사랑한 적 없어. 이런 협박 따위 나한테 안 통해.”

박민정은 이혼으로 협박할 뿐 절대 이혼할 엄두가 안 날 것이다. 그는 그렇게 굳게 믿었다.

박씨 일가가 감히 이혼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녀는 더더욱 못하겠지!

박민정은 순간 눈앞의 유남준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는 목이 뻣뻣함과 동시에 귀가 아프기 시작했다. 보청기를 착용했지만 그가 뭐라 말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제멋대로 이해하고 방금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난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유남준이 이상한 낌새라도 눈치챌까 봐 그녀는 얼른 서재를 나섰다.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유남준은 전례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

딴 사람 때문에 감정 조절을 못 하고 책상을 뒤집는 일이 없는데...

그녀가 방금 따라온 케모마일 차가 바닥에 쏟아져 흥건해지고 책상 위에 놓였던 서류들도 바닥에 널브러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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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민정은 오른쪽 귀에서 피가 나는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한수민은 이토록 연약하고 무능한 딸을 보자 자기 자신이 불쌍하게 느껴졌다.그녀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문서를 박민정에게 건네주었다.“잘 살펴봐.”“엄마가 널 위해서 만들어준 배경이니까.”문서를 받아들자 문서에는 혼인계약서 다섯글자만 보였다.박민정은 문서를 열어보았다.「...박민정 양은 최명길 군의 아내가 되여 그의 일생을 책임지고... 최명길 군은 박진정 양의 가족들의 생활을 보장해주고 600억의 자산을 박씨 집안에게 제공해준다...」최명길. 그는 진주시의 오래된 사업가 중 한명으로 올해 일흔에서 여든이었다.박민정은 뇌가 아릿하게 당겨오는 것 같았다.한수민이 이어 말하는 게 들렸다.“최 사장님이 말씀 하셨어. 네가 재혼이어도 불쾌해 하지 않을거고 자기한테 시집만 오면 박씨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겠다고.”한수민은 기대에 찬 눈으로 박민정을 보면서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으면서 말했다.“착한 우리 딸. 너는 엄마랑 동생을 실망 시키지 않을거야. 맞지?”박민정은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녀는 손 안에 든 계약서를 꽉 움켜쥔 채 말했다.“저랑 남준 씨, 아직 완전히 이혼한 게 아니에요.”한수민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말했다.“최 사장님이 말씀하셨어. 먼저 결혼식을 올린 다음에 혼인신고해도 된다고. 어차피 유남준은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닌데 엄마는 네 선택을 존중한단다. 너희 둘 이혼 허락해줄게.”박민정과 유남준의 결혼을 무를 수도 없었다.한수민은 아들의 말대로 딸이 아직 어릴 때 그 가치를 최대한 사용하고 싶었다.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목이 메어왔다.“뭐 하나만 물어도 돼요?”그녀는 잠깐 멈칫하고 말을 이었다.“제가 친딸은 맞는 거예요?”한수민은 흠칫했다.어르고 달래던 한수민은 바로 표정이 바뀌어 책망하듯이 얘기했다.“내가 너만 아니었으면 내 몸매가 이렇게 될 일이 있었겠니? 세계적인 무용가가 진창에 떨어질 일이 있었겠냐고! 너는 정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2화

    주위를 둘러보자 그저 낯설게 느껴졌다.그녀는 또 돌아가는 길을 잊었다.핸드폰을 꺼내서 내비게이션을 킬 생각이었지만 또 한참 동안 사는 곳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연지석은 쭉 그녀를 따라오고 있었는데 아까 유남준이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박민정 혼자 제자리에 서 있는 걸 보고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박민정.”박민정은 유남준이 돌아온 줄 알았다.그녀는 기대 어린 눈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결국 실망하고 말았다. 연지석은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나 진짜 기억 안 나? 나 뚱이야. 잊은 거야?”연지석은 그녀를 일깨워줬다.박민정은 그제야 생각이 났다. 어릴 때 은정숙을 따라서 시골에 가 살 때 친해진 절친 뚱이.그때 연지석은 뚱뚱한 데다가 박민정보다도 키가 작았다. 근데 지금은 190센티미터는 훌쩍 넘는 키에 얼굴도 굉장히 잘생겨졌다.“생각났어. 너 많이 변했다. 못 알아봤네.”어릴 때 친구를 우연히 마주치는 건 꽤 기쁜 일이었다.“가자. 데려다줄게.”박민정을 데려다주면서 그는 그녀가 작고 볼품없는 모텔에 묵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유씨 집안 같은 부잣집 가문이 박민정과 이혼한다 해도 그녀를 이런 누추한 곳에 데려다 놓는 건 말도 안 됐다.박민정은 조금 멋쩍게 말했다.“우스운 꼴만 보였네. 나 여기 묵어. 아주머니한테는 말하지 마! 걱정하실라.”연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너무 늦은 시간이었다.그는 계속 여기 있을 수도 없었다.연지석은 그저 내일 다시 박민정을 만나러 오겠다고 하고 떠났다.모텔을 떠나는 연지석은 길 구석에 세워진 검은색 캐딜락 한 대를 발견하지 못했다.박민정에게 있어서 어디에 묵는지는 다 똑같았다.연지석이 떠났다.술을 마셔서인지 위가 불편했고 머리도 어지러웠다.머릿속에서 유남준이 한 말이 맴돌았다.‘화장은 무슨 귀신처럼 해서... 너 같은 사람을 어떤 남자가 좋아하겠어?!’그녀는 힘을 주어 얼굴에 남은 화장과 입술의 립스틱을 문질렀다. 창백했던 얼굴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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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78화

    결국 진서연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의 말을 들어줬다.그리고 자기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정민기에게 오늘은 안 될 것 같으니 내일 같이 밥 먹자고 문자를 보냈다.이 시각, 정민기는 문자를 보자마자 혹시나 진서연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걱정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원래 많이 물어보는 걸 좋아하지 않는 그는 비록 궁금하긴 하지만 애써 참고 메시지에 답장했다.“네.”저녁때쯤, 에리는 진서연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갔다.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정민기가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따라오던 그의 부하가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보스, 오늘 형수님 만난다고 하지 않았어요?”“일 있대.”“헐, 저거 엄청 비싼 차인데!”그의 말에 정민기가 고개를 돌려보니 두 사람은 값비싼 슈퍼 카를 타고 자리를 떴다.부하들은 원래 정민기를 무서워했지만 같이 지낸 시간이 오래되다 보니 이제는 많이 편해진 것 같았다.“보스, 형수님은 왜 갑자기 저런 차를 타고 갈까요?”정민기는 원래 몇십억짜리 자동차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생각했지만 부하가 대놓고 물어보니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나도 몰라.”그리고 퉁명스럽게 대답한 뒤 다시 자기 차에 올라탔다.지금 그가 타고 다는 차는 고작 몇천만짜리였고 길거리에 몰고 나가도 눈길 한 번을 안 줄 그런 차였다.그저 박민정의 보디가드로서 너무 좋은 차를 끌고 다녀 굳이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정민기가 말없이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본 부하들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설마 형수님이랑 다툰 건가?” “아까 그 차는 한눈에 봐도 엄청 비싼 차일 것 같은데 설마 형수님께서 마음을 바꾼 건 아니겠지? 우리 보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어떻게...”“대단하면 뭐 해? 지금 시대는 돈이 제일 쓸모가 있단 걸 몰라?”“하긴 요즘 사람들은 너무 현실적이야.”부하들의 말을 정민기는 차 안에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핸들을 꽉 쥐었다.그러나 지금은 퇴근한 박민정을 박씨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77화

    하정철의 황당한 물음에 에리는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아빠,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제가 어떻게 연 사장님을 좋아해요?”보기만 해도 짜증 나는 얼굴인데 좋아한다고 하니 너무 어이가 없었다.만약 이런 사람이랑 매일 같이 살 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에리의 말에 연지석은 그제야 마음 놓고 여유롭게 물 한 잔을 따르며 말했다.“어르신, 들으셨죠? 정말 오해라니까요.”하정철은 그제야 묵은 체가 내려가는 것 같았다.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직 궁금증이 해결이 안 된 게 있어 다시 에리에게 다가갔다.“그러면 네가 좋아한다는 사람이 누구야? 애초에 없는 거 아냐? 만약 없으면 저번에 외삼촌이 소개한 그 여자를 한 번 만나보던지.”여기까지 와서 결혼을 재촉하는 아버지를 보고 에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이때, 마침 진서연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문 앞에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에리가 대뜸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빠, 제가 좋아하는 여자가 바로 저 사람이에요.”순간, 문 어구에 서 있던 진서연은 어안이벙벙해졌다.“네?”‘에리 씨가 날 좋아한다고?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자신은 정민기와 사귀는 사이인데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랐다.에리도 외모가 아주 잘생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딴마음을 가질 수 없는 노릇이었다.“저기, 어르신...”진서연이 막 해명하려는데 에리가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와 슬쩍 눈빛을 보냈다.이건 분명 도와달라는 구조신호였다.하여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이 예의상 하정철에게 말했다.“처음 뵙겠습니다.”하정철은 진서연을 다시 아래위로 훑어보니 얼굴도 귀엽고 예의 바른 것 같아 마음에 들었는데 무엇보다도 ‘여자’라는 면에서 크게 안심이 되었다.“아가씨, 이름이 뭐예요?”“진서연이라고 합니다.”하정철 세대의 어르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얼굴상이 바로 진서연처럼 귀엽고 순진한 여자일 것이다.“그래요. 오늘 퇴근하면 우리 집에 밥 먹으러 와요. 제가 제 아내한테 말할 테니까 혹시 특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76화

    하정철은 최대한 그가 알아듣기 쉽게 말했으나 연지석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저기 어르신, 혹시 무슨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랑 에리가 왜 거짓말하겠어요?”에리랑은 친구 사이라고도 말 못 하는데 어떻게 그런 사람과 함께 말을 맞춰 그를 속일 수 있단 말인가?하정철은 한숨을 깊게 내쉬더니 더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그러면 제가 더 알아듣게 말할까요?”순간 직원들의 시선이 전부 두 사람 쪽으로 쏠리게 되었다.그의 으름장에도 연지석은 덤덤하게 답했다.“네. 전 괜히 오해를 사기 싫습니다.”그러나 연지석은 이 말을 내뱉는 순간 후회했다.“당신이랑 우리 에리가 지금 사귀는 중인가요?”하정철의 말에 주변은 삽시에 조용해졌고 연지석은 혹시나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그에게 되물었다.“뭐라고요?” “시치미 뗄 생각하지 말아요. 저랑 에리 엄마도 이미 다 눈치챘으니까. 만약 두 사람이 진짜 사랑하는 거라면 일찍이 말해주지, 굳이 이렇게까지 늙은이들을 마음고생시킬 필요는 없잖아요!”하정철의 호소에도 연지석은 여전히 이게 무슨 말인지 상황판단이 안 섰다.유부녀를 좋아한다는 소문까지는 견딜 수 있어도 남자를 좋아한다는 소리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가 어떻게 게이란 말인가? 그것도 한때의 라이벌인 사람과?“오해입니다. 저랑 에리는 그저 동료일 뿐, 생각하시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주변에 보는 눈이 너무 많아 연지석은 모든 사람이 다 들을 수 있도록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이에 대해 해명하게 되었다.사람 중에서 구경하던 진서연은 갑작스러운 일의 전개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들고 있던 파일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대박, 설마 진짜야?’구경꾼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 연지석은 어쩔 수 없이 하정철의 팔을 이끌며 말했다.“일단 제 사무실로 가시죠.”“인정하는 건가요? 그래서 창피해서 이러는 거죠?”하정철은 그의 뒤를 따라가며 계속 캐물었지만 연지석은 대답할 가치도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75화

    “내일 회사에 가서 그 여자가 누구인지 한번 봐야겠어.”에리의 아버지 하정철이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하자 조미연도 맞장구를 쳤다.“그래요. 우리 아들이 나쁜 길로 빠지게 할 수는 없잖아요.”사실 그녀도 에리가 진짜로 남자를 좋아할까 봐 걱정되었는데 다시 생각해 봐도 오히려 돌싱에 아이도 있는 여자가 차라리 낫다고 생각되었다.이튿날 아침.박민정이 회사로 와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착해 있었고 설인하의 모습도 보였다.“인하 씨, 무슨 일이에요?”“에리 씨 아버님께서 오셨는데 에리 씨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고 싶다고 하셔서요.”“네?”박민정은 화들짝 놀라더니 어제 에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혹시 인하 씨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어요?”박민정의 물음에 설인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저야 당연히 모르죠. 회사에 이렇게 많은 인플루언서며 예쁜 여배우들이 있는데 에리는 다 싫대요. 눈이 아주 높은가 봐요.”“그럼 에리랑 아주 친한 사람이겠네요?”아마 그의 아버지도 어쩔 수 없이 혼기가 찬 에리가 걱정되어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또한 신경외과 전문의의인데도 이렇게 회사까지 직접 와서 소란을 피우는 거면 분명 에리의 아버지도 큰 용기를 냈을 것이다.설인하는 에리가 평소에도 자주 교류하는 사람이 손에 꼽을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하는데 만약 그 사람들을 다 제외한다면...그녀의 얼굴이 순간 돌변하더니 박민정에게 물었다.“에리가 좋아한다는 사람이 설마 연 사장님은 아니겠죠?”싸우면서 정이 든다는 말처럼 아마 에리는 연지석을 좋아해서 그와 자주 트러블이 생겼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네?”박민정은 순간 깜짝 놀랐다.그러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확실히 연지석과 두 사람이 티격태격 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보통 사랑에 빠지고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괜히 그 사람한테 장난치고 싶고 투정 부리고 싶어진다.“설마 진짜일까요?”박민정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뭐가?”이때 연지석이 언제 왔는지 문 앞에서 두 사람을 가만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74화

    유남우는 오늘따라 이상하게 윤소현을 밀어내지도 않고 오히려 위로해 줬는데 이런 모습을 일부러 박민정에게 보여주려는 건지 아니면 홍주영에게 보여주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그러나 홍주영과 박민정 두 사람은 그저 한쪽에 가만히 서서 바라보고만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이때, 의사가 수술실 문을 열고 나오더니 그들에게 말했다.“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거부 반응은 없는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감사합니다.”의사가 떠나간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박민정과 조하랑도 그곳에 한참 동안 머물다가 병원을 빠져나왔다.돌아오는 길에 조하랑은 이상하게 마음이 착잡했다.그녀는 원래 뱃속의 아이를 지우려 했지만 오늘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유다혜를 본 뒤로는 이상하게 망설여지기 시작했다.모든 아이한테 이 세상에 태어날 기회가 주어지는데 괜히 그 기회를 마음대로 저버리는 게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런데 김인우 씨가 혹시나 아이를 원치 않으면 어떡하지?’“민정아, 내가 임신한 사실은 일단 비밀로 해줘. 특히 인우 씨한테.”박민정은 왜 그래야 하는지 여전히 이해가 안 갔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먼저 조하랑을 데려다준 뒤 박민정은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에리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민정아, 아까 급하게 나가더니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박민정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별일 아니야. 그저 하랑이 만나고 왔어.”“그럼 됐어.”그렇게 사람들이 다 떠나갔지만 에리만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민정아, 저번에 그 뉴스 기사 봤어?”‘기사?’순간 저번에 최현아가 에리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에리가 다급하게 해명하기 시작했다.“민정아, 난 극히 정상적인 남자야. 절대 게이가 아니니까 믿어줘.”그의 말에 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그래. 믿을게.”박민정이 웃자 에리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73화

    “민정아, 하랑 씨.”다름 아닌 정수미와 윤소현이었는데 그중 정수미는 빠르게 두 사람에게 다가와 걱정스레 물었다.“민정아, 병원에는 웬일이야? 어디 아픈 거야?”이때 조하랑이 갑자기 일부러 기침하더니 박민정 대신 답했다.“콜록! 콜록! 제가 감기 걸려서 민정이랑 같이 왔어요.”그러나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의사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보고서를 그녀에게 건네줬다.“조하랑 환자분, 임신 보고서를 두고 가셨어요.”순간 조하랑은 온몸이 굳어버렸다.그녀의 거짓말이 이렇게 빨리 탄로 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박민정은 재빨리 일어나 보고서를 건네받았고 조하랑도 멋쩍게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왔던 김에 산부인과에도 와봤어요.”정수미는 그녀의 말에 활짝 웃었다.“축하해요.”“감사합니다.”그러나 조하랑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옆에 서 있던 윤소현은 김씨 가문의 후계자를 임신했다는 소리에 또다시 질투심이 마구 불타올랐다.이렇게 되면 김씨 가문에서 조하랑의 입지가 더욱 확고해진다고 볼 수 있다.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신분이나 지위, 외모 면에서 조하랑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밀려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멀지 않은 곳에서 유남우와 홍주영 두 사람도 손에 한 무더기 결과서를 갖고 이쪽으로 걸어오다가 문득 박민정 손에 들린 검사 보고서를 본 순간 표정이 변했다.‘임신 보고서인가?’‘또 임신했다고?’유남우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윤소현이 빠르게 다가와 그에게 물었다.“남우 씨, 우리 다혜는 어떻게 됐어요?”“방금 수술이 끝나서 이제 회복 결과를 지켜봐야지.”윤소현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사람들 앞에서 유남우의 품에 안겨 울기 시작했다.“만약 우리 다혜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 그러면 저도 그냥 죽어버릴래요.”유남우는 그녀를 밀쳐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보는 눈이 많아 애써 참고 그녀를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분명 아무 일도 없을 거야.”“너무 무섭지만 남우 씨가 제 옆에 있어서 다행이에요.”윤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72화

    박민정은 왠지 조급하게 들리는 조하랑의 목소리에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하던 일을 멈추고 답했다.“그래.”한 시간 뒤, 어느 작은 내과 병원.박민정은 허름한 병원 외부와 안절부절못해 보이는 조하랑에게 의아해서 물었다.“하랑아, 대체 이런 곳에는 왜 온 거야?”조하랑은 그녀의 말소리에 화들짝 놀라더니 급하게 그녀의 입을 막았다.“조용히 해.”그리고 주머니에서 마스크 두 장을 꺼내더니 하나는 박민정에게 건네며 다시 말을 이었다.“민정아, 나 아무래도 임신한 것 같아서 검사해 봐야겠어.”“뭐?”박민정은 진짜 큰 일인 줄 알고 가슴을 졸였는데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런 건 먼저 테스트기로 확인해 볼 수 있지 않나?’조하랑은 단번에 그녀의 마음을 읽었는지 재빨리 해명했다.“임테기도 다 정확한 건 아니잖아. 무조건 병원에 와서 초음파 검사를 하는 게 제일 확실할 것 같아서.”“그렇지만 꼭 이런 곳에서 검사해야 해?”박민정은 이곳의 위생 상태가 너무 걱정되었다.그러나 진주시의 크고 작은 병원들은 거의 다 김씨 가문 산업이다 보니 조하랑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혹시나 김씨 가문에서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나중에 김인우랑 김훈한테 해명하기조차 어려워질 것이다.“가자. 걱정하지 마.”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들어가서 더러운 의료 기기들을 보고는 기겁하더니 빠르게 뛰쳐나왔다.“그냥 다른 병원으로 가자.”두 사람은 다시 짐을 싸서 결국에는 큰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소변 검사와 초음파 검사까지 마친 조하랑은 검사 보고서에 임신 4주 차라는 글씨를 본 순간 눈앞이 아찔해 났다.“어떻게 4주가 되는 거예요?”“마지막 생리 주기를 계산해 본 결과가 그렇게 나왔습니다.”조하랑은 지금 온몸에 힘이 다 빠지는 것 같았다.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박민정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아줬다.“좋은 일인데 인우 씨한테 빨리 알려줘.”그러나 조하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아니, 절대 안 돼.”자신도 아직 받아 들을 준비가 안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71화

    정수미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의사한테 자신이 사인하겠다고 말하려는데 멀리서부터 유남우가 다가와 그들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윤소현은 유남우의 목소리가 들리자 얼굴이 갑자기 돌변하더니 눈물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다.“남우 씨, 우리 다혜가 혈액암이래요. 그래서 다른 피를 수혈받아야 한다는데 그래도 살 확률이 그리 높지 않대요. 저희 이제 어떡하죠?”유남우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그럼 빨리 수혈부터 진행하자고 해.”윤소현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빨리 사인했다.그러나 정수미는 그녀의 빠른 태세 전환에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분명 이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유남우의 원인이 크다는 걸 윤소현도 알 텐데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이 남자를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그렇게 그들은 밤새 병원에서 지내야 했다.새벽 때쯤, 홍주영도 전문의들을 데리고 달려왔다.그리고 어린아이가 고생하고 있는 게 너무 안쓰러웠다.“도련님, 다혜는 괜찮나요?”홍주영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유남우는 문득 어제 하민재와 그녀가 같이 있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나도 아직 몰라. 지금 수술 중이야.”홍주영은 수술실 쪽을 바라보면서 애써 조급한 마음을 달랬다.그러나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윤소현은 그녀의 모습이 참 가증스럽다고 생각되었다.“홍 비서님, 다혜는 제 딸인데 왜 비서님이 난리예요?”그녀의 날카로운 말투에 홍주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이때 유남우가 고개를 돌리고 윤소현에게 물었다.“다혜가 자기 딸인 걸 아는 사람이 왜 지금 하나도 걱정하고 있는 것 같지 않지?”그는 원래 이 계기로 윤소현에게도 만약 아이한테 사고가 일어나게 되면 어떤 느낌인지 알려주고 싶었다.그러나 이 여자는 전혀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윤소현은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이 일은 점점 크게 번져 어느새 김씨 가문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다.김인우는 유다혜가 병원에서 수술받는다는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70화

    “연애해 본 적 없다면서요?”하민재는 다소 의아했다.도대체 자신이 그 남자보다 부족한 게 뭐란 말인가?홍주영은 그의 말에 씁쓸하게 웃었다. “네, 연애는 해 본 적 없어요. 그냥... 짝사랑이었을 뿐이에요.” 하민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이렇게 솔직한 여자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그럼 왜 고백하지 않았어요?” 그는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홍주영은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그 사람은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은 절 좋아하지 않거든요.”“그럼 둘이 이어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거네요?”하민재가 다시 한번 확인하자 홍주영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 가능성은 없어요.”“그렇다면 굳이 우리가 헤어질 필요도 없잖아요? 난 신경 안 써.”짝사랑이라면 아무 문제없었다.하민재는 자신만만했다. 연애 경험 없는 홍주영쯤이야 얼마든지 자신의 매력으로 사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홍주영이 더 말을 잇기도 전에 하민재가 가로막았다.“하지만은 무슨. 이제 이 얘긴 그만해요. 연애에 공평함 같은 게 어디 있어요? 난 주영 씨 마음속에 누군가 있는 걸 개의치 않으니까 주영 씨도 내 과거에 신경 쓰지 않으면 돼요.”하민재의 단호한 태도에 홍주영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좋아요, 약속할게요.”“네.”그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때, 하민재의 할머니가 다가와 넌지시 물었다.“어떻게 됐어?”“뭐가요?”하민재가 되묻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너랑 주영이 말이다. 주영이 같은 아이, 꼭 소중히 여겨야 한다. 부잣집 딸들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할 것 없는 아이야.”하민재의 할머니는 함부로 연을 맺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홍주영에 대해 충분히 조사했었다. 홍주영은 비록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능력만큼은 인정할 만했다.그녀는 가문 사업에는 별 관심 없는 손자가 이런 여자를 곁에 두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하민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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