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12화

Author: 윤지
주위를 둘러보자 그저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는 또 돌아가는 길을 잊었다.

핸드폰을 꺼내서 내비게이션을 킬 생각이었지만 또 한참 동안 사는 곳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연지석은 쭉 그녀를 따라오고 있었는데 아까 유남준이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박민정 혼자 제자리에 서 있는 걸 보고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박민정.”

박민정은 유남준이 돌아온 줄 알았다.

그녀는 기대 어린 눈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결국 실망하고 말았다.

연지석은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나 진짜 기억 안 나? 나 뚱이야. 잊은 거야?”

연지석은 그녀를 일깨워줬다.

박민정은 그제야 생각이 났다. 어릴 때 은정숙을 따라서 시골에 가 살 때 친해진 절친 뚱이.

그때 연지석은 뚱뚱한 데다가 박민정보다도 키가 작았다. 근데 지금은 190센티미터는 훌쩍 넘는 키에 얼굴도 굉장히 잘생겨졌다.

“생각났어. 너 많이 변했다. 못 알아봤네.”

어릴 때 친구를 우연히 마주치는 건 꽤 기쁜 일이었다.

“가자. 데려다줄게.”

박민정을 데려다주면서 그는 그녀가 작고 볼품없는 모텔에 묵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유씨 집안 같은 부잣집 가문이 박민정과 이혼한다 해도 그녀를 이런 누추한 곳에 데려다 놓는 건 말도 안 됐다.

박민정은 조금 멋쩍게 말했다.

“우스운 꼴만 보였네. 나 여기 묵어. 아주머니한테는 말하지 마! 걱정하실라.”

연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그는 계속 여기 있을 수도 없었다.

연지석은 그저 내일 다시 박민정을 만나러 오겠다고 하고 떠났다.

모텔을 떠나는 연지석은 길 구석에 세워진 검은색 캐딜락 한 대를 발견하지 못했다.

박민정에게 있어서 어디에 묵는지는 다 똑같았다.

연지석이 떠났다.

술을 마셔서인지 위가 불편했고 머리도 어지러웠다.

머릿속에서 유남준이 한 말이 맴돌았다.

‘화장은 무슨 귀신처럼 해서... 너 같은 사람을 어떤 남자가 좋아하겠어?!’

그녀는 힘을 주어 얼굴에 남은 화장과 입술의 립스틱을 문질렀다. 창백했던 얼굴은 그녀 때문에 붉게 부어올랐다.

박민정은 자신이 우울증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녀도 이 병에 관련된 자료를 조사해서 대체적인 건 알고 있었다.

우울증은 뇌에 영향을 주어서 기억력도 떨어지게 만들고 인지장애도 뒤따라오게 된다. 기쁘고 즐거운 일은 생각하지 못하고 우울한 일만 극대화하며...

쿵! 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박민정은 연지석이 돌아온 줄 알고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방문이 열리자, 유남준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유남준이 힘을 주자 그녀의 얇은 손목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박민정! 정말 너 이런 사람이었어?!”

유남준은 문을 닫아 잠그고는 그녀를 끌고 소파까지 갔다.

“이제 보니 이미 갈아탈 준비를 다 한 거였네. 어쩐지 그렇게 쉽게 손을 놓는다고 했어!”

그는 차갑게 말했다.

그 말은 차가운 비수처럼 박민정의 마음을 할퀴었다.

그가 연지석을 보고 오해한 것이었다.

박민정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이 첫사랑에 기울어 있는 건 괜찮으면서 왜 자기는 아무것도 안 된단 말인가.

박민정은 화가 나 있는 유남준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저희 둘 어차피 피차일반이에요.”

박씨 집안은 사기 결혼을 했다.

유남준은 그녀를 삼 년 동안이나 차갑게 대했고 첫사랑을 잊지 못했다.

누구도 고상하지는 않았다.

유남준은 오늘 술을 마셔서 온몸에 술 냄새가 났다.

그는 박민정의 턱을 붙잡고는 빨개진 눈으로 낮게 물었다.

“그 남자 누구야? 언제부터 알던 사이야?”

박민정은 이런 그를 처음 봐서 갑자기 웃어버렸다.

“질투해요?”

유남준은 눈을 부라리더니 비웃었다.

“너 따위한테 그럴 가치가 있어?”

박민정은 목이 메었다.

유남준은 거칠게 그녀를 깔아오면서 그녀의 귀에 대고 계속 물었다.

“저놈, 예전부터 너 건드렸지? 응?”

결혼 삼 년 동안, 유씨 집안의 규칙 때문에 박민정은 직업을 포기하고 이따금 있는 친구들의 만남도 거절해 왔다.

근데 지금 유남준이 그녀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는 체념해 버렸다.

“당신이 보기에는 그래요?”

그녀가 되물었다.

유남준은 제대로 화가 나서 그대로 박민정의 뺨을 내리쳤다.

박민정은 온몸의 피가 그대로 굳는 기분이었다. 눈앞의 모든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밀어내고 싶었고 반항하고 싶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지막 그 순간, 유남준은 조금 차분해진 것 같았다.

어느새 새벽이 지나 아침이 다가오고 있었다.

유남준은 앙상한 박민정을 보고 눈에 띄는 침대 위의 붉은 피를 보면서 마음속이 복잡해졌다.

“퍽!”

박민정은 손을 들어 있는 힘껏 그의 잘생긴 얼굴을 내리쳤다.

이 한 번으로 그녀가 사랑에 품었던 모든 환상을 깨버렸다.

그녀는 귀가 울려서 유남준이 뭐라 말하는지 들리지도 않아서 그의 말을 끊었다.

“꺼져요!”

유남준이 언제 떠났는지도 모르겠다.

머릿속에는 온통 어젯밤의 그 장면이었다.

차에 앉아서 그는 서다희에게 전화 쳤다.

“알아봐. 박민정이 알고 지내는 남자가 누가 있는지.”

서다희는 어리둥절했다.

박민정이 결혼하고 나서 매일 유 대표를 제외하고는 다른 남자는 없었다. 박민정에게는 유 대표밖에 없었는데 어디서 남자를 알고 지낸단 말인가?

모텔 안.

유남준이 떠났다.

박민정은 여러 번 샤워를 하고 자신을 씻어냈다.

이혼이 가까워져서야 둘 사이에 부부 같은 점이 생겼다는 건 우습기도 하고 비참하기도 했다.

아침 9시. 연지석은 아침을 가지고 왔지만, 박민정의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어제는 너무 일찍 가는 바람에 알려주는 걸 까먹었어. 나한테 마침 빈 집이 하나 있는데 거기 가 묵어도 돼. 여자애 혼자 모텔에 묵는 건 너무 위험해.”

박민정은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인정을 갚는다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빚지고 싶지 않았다.

연지석은 그녀가 거절할 줄 알고 있었다.

“어차피 비어 있는 데야. 네가 가서 묵는다고 월세 안 받을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많아서 한 달밖에 안 있을건데...”

“한 달이면 한 달이지. 사람 사는 흔적이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아.”

연지석은 그녀가 왜 한 달밖에 못 있는다고 하는지 몰랐다. 앞으로 계속 머물 시간이 길 것으로 생각했다.

연지석은 운전해서 박민정을 데리고 갔다.

그녀는 간단한 캐리어 하나만 들었다. 다른 짐은 없었다.

차에 앉은 후, 연지석은 박민정과 어릴 때 일로 대화를 나눴고 먼저 요 몇 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외국으로 유학을 가고,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외국에서 알바하다가 스무 살에 창업 성공해서 자기 회사가 있고, 지금은 어엿한 돈 좀 있는 사장님이라고 말이다.

박민정은 그의 화려한 이력들을 들으면서 자신을 돌아보았다.

졸업한 뒤 유남준에게 시집가서 지금까지 가정주부이기만 했다.

박민정은 감탄하며 말했다.

“너 대단하다.”

“너도 가능해. 네가 마을에서 떠난 뒤에도 난 너를 쭉 지켜봤어. 네가 티비에 나오는 것도 보고, 청소년 피아노 시합에서 일 등을 하는 것도 보고... 그리고 노래 시합 맞지? 너 알아? 그때 네가 내 아이돌이었어...”

연지석은 박민정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때, 혼자 외국에서 공부할 때, 처음엔 상황이 좋지 않았고 많은 나쁜 일들을 배우다가 자포자기했었다고.

박민정이 선천적 난청이 있다는 기사가 뜨기 전까지 말이다.

선천적 난청이 있는 사람에게 음악의 길은 거의 막혀있는 것이나 다름 없으니까.
Comments (1)
goodnovel comment avatar
뛣쀆꿾
지석아 너가 희망이다
VIEW ALL COMMENTS

Related chapters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3화

    하지만 박민정은 증명해 냈다. 난청이라도 피아노, 춤, 노래 모두 그녀는 정상인보다 모자라지 않았다.이 기사는 마치 빛 같았다. 연지석은 그렇게 천천히 일어설 수 있었다.연지석이 자세하게 말하는 그 빛 났던 순간들은 박민정 본인도 잊기 직전이었다.연지석은 그녀를 묵을 곳으로 데려다주었다.박민정은 웃으면서 그한테 말했다.“고마워. 나도 원래의 날 잊기 직전이었어.”연지석은 그녀와 밥 먹으러 갔다.하루 종일 함께 있으면서도 그는 섬세하게도 박민정이 결혼한 후의 일들은 묻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이 흘렀다.날짜를 확인해보니 이혼이 예정된 5월 15일과는 열흘 좀 넘게 남아 있었다.한수민과의 약속이 문득 생각이 났다.그녀는 어느 아침, 돌아간 아빠를 보러 갔었다.돌아가신 아빠의 묘비 앞에서, 자상한 사진 속의 아빠를 보며 박민정은 목이 메왔다.“아빠. 보고 싶어요.”여린 바람이 가볍게 박민정의 볼을 스쳤다.그녀는 코끝이 시렸다.“아빠. 만약 지금 아빠를 보러 가면 무조건 저한테 화내시겠죠?”그는 묘비에 붙은 나뭇잎을 하나하나 떼여냈다.“저도 제가 조금 더 강해야 한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죄송해요...”묘비 앞에 한참을 서 있고서야 박민정은 발걸음을 옮겼다.그녀는 떠날 때 유골함을 샀다.그러고는 사진관에 가서 일하는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 속에서 흑백사진을 찍었다.이 모든 걸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그녀는 창밖의 풍경을 보면서 넋을 놓았다.이때 핸드폰이 울렸다.은정숙 아줌마였다.“민정아. 요새 어떻게 지내?”박민정은 은정숙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잘 지내요.”은정숙은 한숨을 내쉬고는 잔소리했다.“누가 너더러 나한테 몰래 돈 보내랬니? 그 돈, 나는 필요 없다. 뒀다가 너 써. 나중에 사업 같은 거 할 때나...”지난 몇 년간, 박민정은 몰래 그녀에게 돈을 보내왔다.그녀는 시골 사람이다 보니 그리 많은 돈을 쓸 일도 없었고 모두 저축해 두고 있었다.전화 저편에서 은정숙의 관심 어린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4화

    이지원은 인터뷰를 마친 후 한수민을 찾아갔다.그리고 한수민과 박민정 동생이 600억을 위해 박민정을 늙은이에게 시집 보내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유남준이 대답이 없자 이지원은 말을 얹었다.“민정 씨 어머니 말로는 민정 씨가 먼저 600억을 요구했다더라고요. 그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그리고 아직 두 분 숙려기간이 끝나지 않아서 정식으로 결혼하는 대신 식만 올리기로 했다고요.”...박민정은 엄마와 동생이 자기 의견은 모조리 무시한 채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신혼을 준비 중인 건 꿈에도 몰랐다.한수민은 그녀가 절대 죽을 용기도 없고 절대 죽지 못하리라 생각했다.어릴 때부터 많은 괴롭힘을 당했지만 떠나기를 선택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이번에도 같을 것으로 생각했다.동생인 박민호는 진즉에 그 600억을 받아서 새로운 회사를 준비 중이었다. 그는 박민정에게 단 조금의 죄책감도 없었다.그리고 이날, 박민정은 한수민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최 사장님이 좋은 날짜 받아오셨어. 이번 달 15일이야. 나흘 동안 잘 준비해서 시집 가면 돼. 이번에는 꼭 이 남자의 마음을 잡아야 한다. 알았지?”박민정은 이 두 메시지를 보면서 마음이 복잡해졌다.15일. 기쁘고 즐거워야 할 날이었다. 그녀가 유남준과 이혼을 약속한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가 떠나려는 날이기도 했다. 박민정은 자신이 또 잊을까 봐 이날을 노트에 기록해 뒀다.그리고 그녀는 친필로 유서를 써 내렸다.필을 들었지만 뭘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에 그녀는 윤정숙과 연지석에게 말을 남겼다.다 쓴 뒤 그녀는 유서를 자신의 베개 밑에 넣어뒀다.사흘 뒤.14일에는 비가 크게 내렸다.핸드폰을 테이블에 올려놨는데 온종일 벨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모두 한수민이 걸어온 전화였고 그녀가 어디 있는지 묻는 것이었다.내일이면 결혼식이니 그녀더러 집에 들러 최 사장에게 시집갈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박민정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 새로 맞춘 붉은 드레스를 입고 예쁘게 화장도 했다.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5화

    핸드폰이 박민정 손에서 떨어졌다.빗방울이 핸드폰을 적셨고 스크린도 검게 변했다.박민정은 아빠의 묘에 기대서 품 안의 나무 인형을 끌어안았다. 차가운 비를 맞으면서 아빠가 자상한 얼굴로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걸 보는 것만 같았다.깊은 사랑은 낭만적이고, 가벼운 사랑은 현실적이다. 하지만 둘 중 어느 쪽이든, 미련이 남는 것은 같았다. ...두원 별장.유남준은 끊겨버린 핸드폰을 보며 불안해졌다.다시 걸어보자, 핸드폰에서 들리는 건 차가운 기계음이었다.“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되며 삐 소리 후 통화료가 부과됩니다...”유남준은 몸을 일으켜 외투를 입은 후 밖으로 나갔다.그러고는 문에서 발걸음을 멈췄다.박민정이 밀당을 하는 것이다!곧 이혼인데 그녀가 못할 게 뭐가 있겠는가?침실로 돌아왔지만 왜인지 모르게 그는 잠들 수가 없었다.박민정이 한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만약 엄마랑 동생이 한 일을 알았다면, 전 절대... 절대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에요. 만약에 제가 당신이 이지원을 좋아한 걸 알았다면...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에요. 만약에 아빠가 결혼식 당일 교통사고가 날 걸 알았다면...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예요.”유남준은 몸을 일으켜 자기도 모르게 박민정의 방문 앞에 섰다.박민정이 그곳을 떠난 지 이미 한 달이 훌쩍 넘었다.그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두컴컴한 것이 무척 답답했다.불을 켜자, 박민정의 아무 물건도 남아 있지 않아 휑해 보였다.유남준이 침대맡 테이블을 열어보자 작은 노트가 있었다.노트에는 딱 한 마디만 적혀 있었다.「떠나기로 결심한 사람이 가장 고통스럽겠지. 마음속으로 이미 수도 없이 발버둥 치고서야 그 결심을 내렸을 테니까.」유남준은 수려한 글씨를 보고 차갑게 웃었다.“고통? 너랑 그 몇 년을 보낸 나는 안 고통스러워?”그는 노트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방을 떠날 때 노트는 다시 깨끗하게 머리맡 테이블에 되돌려졌다.방을 떠난 그는 다시는 잠들지 못했다....한편.연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화

    또 하나는 은정숙에게 남긴 것이었다.그가 열어보자 마지막 줄에 은정숙의 주소가 적혀있었다.연지석은 그대로 뛰쳐나갔다.여기서 교외까지 멀지 않았다. 기껏해서 차로 이십여 분 정도 되는 거리였다.하지만 연지석은 이상하게도 한없이 멀게 느껴졌다.그는 이해가 안 됐다. 자기 눈에 그렇게 찬란하게 반짝이던 사람이 왜 이런 길을 선택했는지.그 동시에 그와 같게 교외로 향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는데 한수민이었다.한수민은 600억을 위해 박민정을 데려다 결혼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교외 묘지.비가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박민정은 묘지에 쓰러져 있었다. 빗줄기는 사정없이 그녀의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의 드레스는 진작 흠뻑 젖었고 피골이 상접해서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았다.연지석은 비를 뚫고 박민정을 향해 달려갔다.“박민정!!”돌아오는 건 바람 소리와 빗소리밖에 없었다. 연지석은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그는 달려가 박민정을 안으며 그녀의 옆에 있는 빈 약병을 발견했다.연지석은 떨리는 손으로 박민정을 안아 올렸다.왜 이렇게 가벼울까.“박민정, 정신 차려! 절대 잠들면 안 돼!”말하면서 그는 산 밑으로 뛰여내려갔다....“사모님, 도착했습니다.”운전기사가 말했다.한수민은 창밖에서 낯선 남자가 뛰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의 품 안에 안긴 건... 박민정이였다.“박민정 이 년이!”그녀는 얼굴을 찌푸리고 우산을 들고 내렸다.오늘 한수민은 한복을 쫙 빼입었는데 빗물이 그의 치맛자락을 적셨다.한수민은 짜증 난다는 듯이 다가가서 박민정을 윽박질렀다.화를 내려는 찰나 그는 연지석 품속에 축 늘어진 박민정을 살폈다. 얼굴은 창백하고 눈은 감겨 있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박민정...”한수민이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는 찰나, 바람에 굴러온 약병을 발견했다.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약병을 주웠는데 약병에는 수면제라는 세글자가 크게 적혀있었다.그 순간, 한수민은 그날 박민정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만약 제가 이 목숨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7화

    “네.”박민호는 연지석에게 다가가서 박민정을 뺏으려 했다.하지만 손을 뻗자마자 연지석 때문에 그대로 땅에 고꾸라졌다.“퍽!”소리와 함께 박민호는 1미터 넘게 날아가서 심장을 움켜쥐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한수민은 상황을 보고 급하게 아들을 부축했다. 그리고 연지석을 노려보면서 말했다.“감히 내 아들한테 손을 대!”연지석은 여전히 박민정을 안고 있었다. 도화살 가득한 그 눈에는 차가움이 흘렀다.빗물은 그의 머리카락을 따라 방울방울 떨어졌다.그는 모자 앞에서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그는 귀신 같은 얼굴로 한 글자씩 뱉었다.“죽고 싶어요?”한수민과 박민호는 눈앞의 이 남자에게 놀라서 한순간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연지석은 박민정을 안고 떠나면서 한수민에게 당부하는 걸 잊지 않았다.“민정이 유서에 적혀 있더라고요. 녹음도 있고. 그 녹음에 그쪽이 더 이상 민정이랑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약속했다던데, 잊으셨어요?”박민정은 그 녹음이 법적인 효력이 없다는 건 알았고 그 녹음만으로 모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다는 것도 알았다.하지만 그녀는 한수민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한수민에게 체면은 아주 중요했다.만약 이 녹음이 공개되면 한수민은 자기 딸을 해쳤다는 꼬리표를 평생 달고 다녀야 했다.연지석의 협박에 한수민은 다친 박민호를 데리고 초라하게 떠날 수밖에 없었다.차에 앉아서 한수민은 연지석 품에 안긴, 생사를 알 수 없는 딸을 보며 손바닥을 세게 꼬집었다. “엄마가 모질다고 비난하지 말고 쓸데없는 너 자신을 탓하렴. 유남준 마음 하나 못 사로잡은 널. 지금 이건 전부 네가 초래한 거야.”그 순간 한수민은 엄청난 고통을 느꼈지만 빠르게 냉정해졌다.딸이 죽는 것보다 최 사장과의 거래가 더 중요한 일이었다.연지석은 박민정을 데리고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그리고 박민정이 수술방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았다.수술 중이라는 선명한 세 글자를 보면서 그는 단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수술이 한 시간가량 이어지다가 의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8화

    조용히 듣고 있던 유남준은 얼굴이 어두워졌지만, 반박은 하지 않았다.그리고 이런 그의 태도 때문에 그의 친구인 김인우도, 그의 엄마인 고영란도, 더불어 그의 비서인 서다희도, 심지어 집에서 도우미 일을 하는 사람들도 박민정을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김인우는 전화를 한 통 받고 급하게 떠났다.그가 떠난 뒤 유남준은 습관처럼 핸드폰을 꺼내 들었지만, 박민정으로부터 온 전화는 없었다.유남준이 전화를 걸자 여전히 차가운 기계음만 들렸다.“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되며 삐 소리 후 통화료가 부과됩니다.”유남준은 짜증이 나서 핸드폰을 옆에 버렸다.그는 몸을 일으켜 창가에 가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박민정이 새벽에 했던 말이 귀가를 맴돌았다. 그녀는 후회한다고 했다.유남준은 입안이 썼다. 크게 기침을 두 번 하자 등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빠, 담배 좀 적게 피워요. 몸에 안 좋아요.”유남준은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무의식적으로 박민정이 돌아온 줄 알았다.하지만 돌아보니 그 자리에 서 있는 건 단아하게 꾸민 이지원이었다.그는 눈에서 빛이 사라지면서 어색하게 물었다.“무슨 일로 왔어?”이지원은 그를 보는 눈빛이 제법 다정했다.“이모가 가보라고 하셔서요. 민정 씨가 그렇게 빠르게 다른 사람을 찾은 걸 알고 오빠보고 깊이 생각하지 말래요.”그녀의 입에서 말하는 이모는 유남준의 엄마였다.4년 전.유남준의 엄마와 김인우는 같은 차를 타고 적대하고 있던 회사로부터 암살 시도를 당했었다.유남준 엄마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렸고 그때 병원에 O형 피가 부족했는데 마침 박민정이 O형이었다.박민정은 김인우를 안정시키고 수혈하러 갔다.수혈한 후 박민정은 체력이 모자라서 그대로 쓰러졌다.그때 박씨 집안이 이지원의 투자자여서 이지원은 박민정과 사이가 꽤 좋았다. 그래서 박민정이 병원에 있는 걸 알고 가타부타 덧붙이지 않고 병원에 가서 박민정을 살폈고 그렇게 박민정이 사람을 구한 일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이 박민정이 입원한 틈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9화

    창밖으로 바람이 불었다. 박민정은 창백하고 연약한 손을 배에 올리고 눈빛이 멍해졌다.연지석이 그녀에게 알려주었다. 의사가 검사한 결과, 그녀가 임신이란다.이 타이밍에 아이가 생기다니...은정숙은 져버린 눈을 보며, 삶의 의지가 없어 보이는 박민정을 보면서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민정아.”박민정은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은정숙을 보았다.“아줌마.”은정숙은 눈이 붉어져서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민정아. 아줌마가 자식도 없고 쭉 너를 딸로 여겼어. 아줌마는 너 크게 성공하는 것도 안 바란다. 그저 몸 건강히 지내면 돼. 하나밖에 없는 딸이 죽으면! 엄마는 어떻게 살아가니?”박민정은 흠칫하고 은정숙이 과도를 드는 걸 보았다.“내가 너 열 살까지 키웠어. 열 살부터 너랑 같이 못 있어준 건 내 잘못이야. 지금 가서 너희 아버지한테 사죄할게...”은정숙은 말을 끝내기 무섭게 과도로 손목을 그으려 했다.박민정은 아연실색해서 없는 힘까지 짜내서 말렸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몸도 일으키지 못해서 목멘 소리로 말했다.“아줌마... 하지 마요...”하지만 은정숙은 멈추지 않았다.박민정은 그녀의 손목에서 붉은 피가 나는 걸 보면서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떨어져 내렸다.“멍청한 짓, 안 할게요. 아줌마, 그러지 마요...”박민정의 약속을 듣고서야 은정숙은 멈췄다.그녀의 눈은 잔뜩 충혈돼 있었다.“민정아. 낳아준 빚은 이미 갚았어. 우리 빚진 거 없어. 유남준한테도 빚진 거 없어! 지금부터 너는 너를 사랑하는 사람 위해서, 나를 위해서, 배 속에 아기를 위해서 잘살아 보자!”박민정은 결국 은정숙의 말을 듣기로 했다. 그녀와 아이를 위해 잘살아 보기로.지금부터 한수민은 그녀의 엄마가 아니었고, 그녀는 더 이상 남동생 같은 건 없다.그녀의 가족은 이제 은정숙과 배 속의 아이밖에 없다.은정숙은 사실 이런 방법으로 박민정의 결정을 협박해낼 생각은 없었다.그저 그녀를 살게 하고 싶었다!박민정은 자신의 부모를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20화

    여름의 두 번째 절기인 소만. 남방에서는 종종 폭우가 내렸다.퇴원한 후 며칠 동안 연지석은 자주 시간을 내서 박민정과 함께했다.약을 먹은 후유증으로 박민정의 몸 상태는 더 나빠졌다.하지만 그녀의 정신상태는 꽤 좋아졌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던데로부터 억지로라도 음식을 삼켰다.연지석과 함께 할 때 그녀는 단 한 번도 유남준을 언급하지 않았다.어떤 사람은 너무 아파서 입에 담는 것마저도 상처일 때가 있다.그리고 친구가 자신을 따라서 우울한 감정을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혼자 있을 때, 박민정은 유남준의 카톡 프로필 사진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이혼에 관한 일에 대해서 어떻게 입을 열지 몰랐다.그러던 어느 날.박민정은 밖에서 음식을 사고 돌아가는 길이었다.한 사람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이지원은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끼고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예쁜 드레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서 있었는데, 그 기세가 대단했다.“민정 씨. 민정 씨 어머니는 당신이 살아있는 거 알아요?”이지원의 눈썹이 둥글게 말렸다.박민정은 여기서 그녀를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둘은 조용한 카페를 찾아 창가 자리에 앉았다.커다란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렸다.이지원이 마스크를 벗자 오밀조밀한 얼굴이 드러났다.“안심하세요. 남준 오빠한테 듣기로는 박민호 씨가 최 사장님 돈 가지고 민정 씨 어머니 모시고 도망치고 있다더라고요. 그분들이 민정 씨 괴롭히는 일은 없을 거예요.”박민정은 이미 연지석을 통해 들었었다.한수민과 박민호가, 박민정이 제때 최 사장과 결혼하지 않아 보복이 두려워서 도망길에 올라서 당일에 해외로 도망쳤다고.그 누가 그토록 부유하던 박씨 집안이 고작 600억 때문에 패가망신할 거라 생각했겠는가?박민정은 조용히 다 듣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물었다.“할 말 있으세요?”이지원의 시선이 그녀의 배를 향했다. 임신한 게 아직 티가 나지 않았다.그녀는 손바닥 살을 세게 꼬집었다. 박민정을 당장 폭로하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말해봐요. 어떻게 해야 남준

Latest chapter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508화

    박민정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좋아요, 신고해요. 경찰이 와서 모든 걸 조사하게 해요. 제가 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은 겁니다!”그녀는 나쁜 짓을 하기 않았기에 당당했다.윤소현은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려 했지만 고영란이 그녀를 막아섰다.“소현아, 분명 이건 오해가 있을 거야. 민정이가 그렇게 어린 아이를 해칠 리가 없잖니.”정수미도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우리 모두 한 가족인데 경찰까지 부르는 건 너무하지 않니?”그러나 윤소현은 눈가가 붉어진 채 항의했다.“엄마, 지금 제 딸이 이런 상태인데도 엄마는 저를 외면하시겠다는 거예요? 우리 아이 편을 들어주실 생각은 없으세요?”박민정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그만해요. 차라리 신고해요.”지금 상황에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방법은 경찰 조사를 통해서뿐이었다.윤소현은 사실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 없었다. 아이의 일은 박민정과 무관했으며 그녀 스스로 꾸며낸 일이었기 때문이다.“민정아, 흥분하지 마. 우리 가족 일이니 우리끼리 해결해.”정수미가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윤소현은 한 발 앞으로 다가서며 비꼬듯 말했다.“좋아요. 우리끼리 해결하죠.”“그럼 말해봐, 박민정. 내 딸이 이렇게 됐는데 넌 어떻게 책임질 거야?”“제가 한 일이 아닌데 왜 제가 책임져야 하죠?”박민정이 한 치의 주저도 없이 되묻자 윤소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지금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야? 우리 다혜는 늘 멀쩡했어. 그런데 네가 안은 뒤로 이렇게 됐다고!”박민정은 미간을 찌푸렸다.“이미 말했잖아요. 전 그런 적 없어요!”그녀는 어린 다혜가 이렇게 심한 상처를 입은 걸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그런데도 윤소현은 여전히 공격적이었다.“엄마, 보셨어요? 얘는 끝까지 오리발만 내밀잖아요!”정수미는 한숨을 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유다혜는 너무 어리고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누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때 고영란이 오늘 아이를 돌본 보모를 불러왔고 보모는 떨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507화

    박민정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망설일 필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유남준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박민정은 고영란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해 윤소현이 말한 병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아이는 보이지 않았고 윤소현이 병실에서 달려나오더니 곧장 박민정에게 달려들었다.모든 일이 너무 순식간에 벌어져 주위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박민정 역시 피할 겨를이 없었고 결국 윤소현의 손바닥이 그녀의 뺨에 세게 내려앉았다.뜨겁게 달아오르는 통증이 얼굴을 타고 번졌다. 그러나 윤소현은 멈추지 않았고 계속 박민정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박민정도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았고 그렇게 둘은 뒤엉켜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고영란은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 했지만 도저히 가로막을 수 없었다.“박민정, 네가 어떻게 다혜한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다혜는 이제 겨우 몇 달밖에 안 됐는데!”‘뭐?’박민정은 이해할 수 없었다.“뭔가 오해를 한 것 같아요. 전 당신 딸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우리 다혜 몸에 이렇게나 많은 상처가 났는데도 끝까지 모른 척하겠다고? 너 정말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윤소현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분노를 퍼부었고 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방어에만 집중했다.고영란이 아무리 소리쳐도 윤소현은 멈추지 않았다.“소현아!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당장 그만둬!”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고 윤소현은 그제야 멈췄다.박민정도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정수미가 황급히 달려와 박민정의 얼굴에 선명히 남은 손자국을 보고 안타까워했다.“민정아, 괜찮아?” 그녀가 걱정스레 물었다.하지만 윤소현은 불만을 터트렸다.“엄마, 똑같이 엄마 딸인데 우리가 싸웠으면 두 사람 다 챙겨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박민정만 신경 쓰는 거예요? 너무 편애하시는 거 아니에요?”정수미는 한숨을 내쉬며 윤소현을 돌아보았다.“무슨 일인지 제대로 설명해봐. 왜 둘이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506화

    박민정은 그 아기가 윤소현의 딸이라는 걸 전혀 알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다가갔다.“무슨 일이죠?”보모는 그녀를 보고도 별다른 경계 없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 오늘 하루 종일 울기만 하고 어떻게 달래도 소용이 없네요.”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따라온 보모에게 두 아들을 잘 돌보라고 지시한 뒤, 직접 아이를 안아 들어 달래기 시작했다.그러나 유다혜는 그녀의 품에서도 여전히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아마도 엄마가 된 경험 덕분인지 박민정은 아기를 돌보는 법을 잊었더라도 본능적으로 해야 할 일은 알 수 있었다.그녀는 먼저 보모에게 아이가 충분히 먹었는지 물었고 이어 아이의 기저귀를 확인하며 배탈이 났는지 살펴보았다.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도 아기가 계속 울자 박민정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아기를 병원에 데려가 보세요. 이렇게 계속 우는 건 뭔가 이상한 것 같아요.”보모도 동의했다.“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보모가 아기를 다시 받으려던 찰나, 멀리서 윤소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뭐 하는 거야? 누가 내 딸을 저 여자한테 맡기라고 했어?”윤소현은 높은 굽의 힐을 신은 채 빠르게 걸어와 박민정의 품에서 아이를 거칠게 빼앗아 갔다. 그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보모를 질책했다.“내 딸을 당신한테 맡겼더니 이렇게밖에 돌보지 못해? 내 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당신 책임인 줄 알아!”그녀는 이어 박민정을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너도 아이가 있잖아. 내 아이를 왜 안고 있었던 거야?”박민정은 그 아이가 윤소현의 딸임을 알았더라면 절대 안았을 리 없었다.보모는 난처한 표정으로 해명했다.“작은 사모님, 다혜가 계속 울어서 달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모님께서 잠깐 도와주셨던 것뿐이에요. 아무런 악의도 없었습니다.”“악의가 없었다고?”윤소현은 여전히 울고 있는 딸을 보며 냉소를 지었다.“그 말이 사실이길 바랄 뿐이야.”그러다 보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작은 사모님, 아이를 병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505화

    윤소현은 말을 마치자마자 선두에 있던 여하인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이어 한 하인을 거칠게 밀어내고 안으로 들어섰다.들어가자마자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박민정과 유남준 가족이 함께 웃으며 화목하게 있는 모습이었다.그 광경에 윤소현의 눈빛이 질투로 뒤덮였다. 그녀는 곧바로 고영란을 향해 차갑게 비아냥댔다.“어머니, 저랑 남우 씨가 비록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한 건 아니지만 저도 유씨 가문에서 떳떳하게 맞아들인 며느리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저를 모른 척하시겠다는 거예요?”고영란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윤소현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하지만 유남우 역시 큰 잘못을 저질렀고 이 모든 상황이 그녀에겐 큰 실수로 느껴졌다.“소현아, 내가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야. 어서 남우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렴. 여긴... 당분간 환영받지 못할 것 같구나.”윤소현은 이 말을 듣고도 뻔뻔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왜요? 제가 여기 있으면 어쩌시려고요? 혹시 당신 아들 유남우가 저지른 일들을 제가 다 까발릴까 봐 그러시는 건가요?”고영란도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윤소현이 마지막 퇴로조차 거부하자 냉소를 띠며 대꾸했다.“우리 아들이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한번 말해 보렴.”윤소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뭘 말하냐고요? 당신 아들이 자기 형의 여자를 탐냈다는 거. 이게 바로 당신들이 자랑하는 유씨 집안의 가풍인가요?”그 말이 떨어지자 방 안에 있던 하인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박민정은 옆에서 두 아이를 달래며 이 상황에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그러나 유남준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다들 뭘 보고 있어? 당장 저 여자를 끌어내!”윤소현은 유남준이 자신을 쫓아내려 하자 더 큰 소리로 외쳤다.“유남준 씨, 이 말을 듣기 싫은 거죠? 뭐, 당연하죠. 형의 여자를 뺏어갔다니, 저라도 그런 꼴은 못 참겠어요!”만약 그녀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유남준은 벌써 그녀에게 직접 손을 댔을 것이다.곧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504화

    박민정의 시선이 우연히 유남준과 마주쳤고 그 순간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유남준은 숨이 가빠지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입술이 닿기 직전 박민정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저기... 어젯밤 감사했어요.”박민정은 짧게 말한 뒤 유남준의 품에서 빠져나가려 했다.유남준의 품이 순식간에 비어지며 허전함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억지로 붙잡지 않았다.그도 조용히 일어났다.창밖에는 두껍게 쌓인 눈이 온 세상을 덮고 있었다.“기억나? 재작년 이맘때도 우리 여기 머물렀었잖아.” 유남준이 말을 꺼냈다.박민정은 그의 말을 들었지만 머릿속엔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두 사람은 먼저 읍내로 나가 식사를 한 뒤 어머니 같은 존재였던 은정숙을 찾아가 제사를 지냈다. 이후 차를 타고 진주시로 향했다.진주시는 여전히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길 위에는 삼삼오오 모여 눈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지나갔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민정은 잠시 멍해졌다.‘만약 내가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나도 지금쯤 저렇게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을까?’하지만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몇 개의 희미한 기억의 조각들뿐이었다.“잠시 후 우리 집, 본가로 갈 거야.” 유남준이 그녀를 바라보다 나지막이 말했다.박민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본가요?”“응, 우리 집.”유남준의 대답에 박민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마침 그녀도 그곳에서 두 아이를 보고 싶었다.유씨 가문의 저택에서 고영란은 요즘 완벽한 가정의 화목을 누리고 있었다.자식과 손자들이 곁에 머물렀고 두 아이는 날마다 그녀를 웃게 했다.박민정이 온다는 소식에 그녀는 하인들에게 특별히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도록 했다.차가 저택 입구에 도착하자 고영란은 직접 마중을 나왔다.“민정아, 어서 와서 앉아.”박민정의 기억 속 고영란은 어린 시절에만 머물러 있었다.그때의 고영란은 차갑고 냉담한 분위기를 풍기며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사람이었다.박민정은 어릴 적 그녀를 조금 두려워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503화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박민정과 유남준은 오늘 하루 동안 많은 곳을 둘러보며 꽤 많은 기억을 떠올렸다.저녁이 되어서야 둘은 시골의 집으로 돌아왔다.박민정은 약간의 후회를 드러냈다.“벌써 열 시가 넘었네요. 지금 진주시로 돌아가면 새벽이 되어야 도착하겠어요.”유남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그럼 오늘은 여기서 묵자. 밤늦게 운전하는 건 위험하니까. 게다가 돌아가면 다른 사람들을 깨울 수도 있잖아.”박민정은 타인의 사정을 가장 먼저 고려하는 성격이었기에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여기서 자는 걸로 할게요. 그런데 괜찮을까요?”“물론 괜찮지.”유남준은 내심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된 것이 몹시 반가웠다.박민정이 말한 건 두 개의 방이 있다는 뜻이었지만 유남준은 하나의 방을 생각했다. 그녀는 집 안을 둘러본 뒤 침실이 하나뿐임을 깨닫고 이렇게 말했다.“그럼 저는 거실 소파에서 잘게요.”여기는 박씨 가문의 본가와는 달랐다. 박씨 가문의 저택은 침실 안에도 넉넉한 공간이 있어 소파를 두는 게 가능했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유남준은 단 한 순간도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그럼 나도 소파에서 같이 잘게.”그의 대답에 박민정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그러지 말고 각자 따로 자요.”박민정은 비록 기억의 조각들을 조금씩 되찾고 있었지만 유남준과의 관계가 너무 빨리 진전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유남준은 억지로 그녀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혼자 침실에서 자게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여기는 외딴곳이라 네가 혼자 소파에서 자는 건 걱정돼. 침실 침대는 넓으니까 네가 불편하면 이불 하나로 우리 사이를 막아두면 되잖아. 어때?”그는 마치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박민정은 망설이면서도 밖에서 들려오는 거센 바람 소리에 마음이 흔들렸다.“...좋아요.”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남준은 곧바로 이불을 가져와 침대 가운데를 나누고 각각 이불을 하나씩 준비했다.유남준이 침대에 눕고 나서야 박민정도 몸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로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502화

    전날 밤 악몽 탓에 잠을 설친 박민정은 차 안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어느덧 차는 어느새 시골에 도착해 있었다.유남준은 그녀를 깨우지 않고 운전기사에게 차를 잠시 멈추게 했다.박민정은 깊이 잠들지 못했는지 몸을 비틀다가 그만 유남준의 품으로 넘어질 뻔했다.그는 재빨리 그녀를 받아 안았다.박민정은 흐릿한 의식 속에서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다가 자신이 그의 몸에 기대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당황스러워 얼굴이 붉어졌다.“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유남준은 고개를 저었다.“사과할 일은 아니야. 가자, 다 왔어.”벌써 도착한 걸까?박민정은 창밖을 보았는데 새하얀 눈 아래 작은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그곳은 어린 시절 그녀와 정숙 아줌마가 함께 살던 집, 그녀의 진짜 집이었다.어릴 적 기억의 단편들이 박민정의 머릿속에서 하나둘 떠올랐다.“맞아요, 여기가 바로 그 집이에요.”그녀는 유남준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가가 뜨거워졌다.“아줌마, 나 돌아왔어요.”박민정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이제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차가운 바람이 귀를 스치고 박민정은 눈 덮인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집으로 향했다.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녀는 문이 잠겨 있다는 것을 깨닫고 멈칫했고 그때 유남준이 다가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박민정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당신한테 여기 열쇠가 왜 있어요?”“예전에 네가 나한테 맡겼잖아. 우리 여기서 잠시 함께 살았었지.”“우리가 여기서 같이 살았다고요?”박민정은 이 말에 믿기지 않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명품 정장에 품격이 넘치는 태도를 지닌 그가 이렇게 낡은 집에서 자신과 함께 살았다는 사실이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유남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응. 예전에 네가 자꾸 삐져서 가출했잖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도 따라왔지.”그의 농담 섞인 말에 박민정은 어리둥절하면서도 놀랐다.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집 안을 둘러보았다. 테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501화

    박민정은 방을 옮기면 더 편히 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밤새 끊임없이 악몽에 시달렸다.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꿈, 정숙 아줌마의 죽음, 그리고 한수민의 죽음까지...꿈속의 모든 일들이 희미하고 불분명했지만 그 슬픔은 그녀의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아침에 눈을 뜨고 나니 꿈에서 겪은 구체적인 상황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 모든 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박민정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꿈을 되짚어보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떠오르는 게 없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했다.세수를 마치고 거실로 나온 박민정은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누나.”동생 박민호였다.박민호는 언제 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를 보자마자 환한 미소를 지었다.박민정은 그를 보고도 별다른 반가움을 느끼지 않았다. 지난 1년 동안 그녀는 박민호를 몇 번이나 마주쳤기 때문이었다.“응, 여긴 웬일이야?”박민정의 목소리는 차가웠다.유남우가 그녀를 속이고 있을 때, 박민호는 늘 유남우를 도와 거짓말을 꾸미는 데 일조했다.박민호도 그녀의 냉랭한 태도를 눈치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박민정 앞으로 다가왔다.“누나, 설마 나한테 화난 거야? 나도 남우 형한테 속았던 거라고!”박민정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속았다니, 무슨 말이야?”“남우 형이 그러더라고. 유 대표가 진심으로 누나를 대하지 않는다면서 오직 형만이 누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나도 예전에 유 대표가 누나에게 잘못했던 걸 생각하니 누나가 더 사랑받는 사람이랑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형 말을 믿었지.”박민호는 한 단어 한 단어 신중히 말했지만 박민정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그래? 알겠어. 그럼 이제 무슨 일로 온 건데?”박민호는 비로소 본론으로 들어갔다.“누나, 기억은 얼마나 돌아왔어? 뭐라도 생각난 거는?”박민정은 솔직히 말하지 않고 고개만 저었다.“아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그래? 괜찮아, 천천히 떠올리게 될 거야.”박민호는 옆에 있는 과일 바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500화

    비서는 정 대표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고 재빨리 나서서 말을 보탰다.“아가씨, 대표님께서 아가씨를 정말 많이 보고 싶어 하십니다. 한 번만이라도 시간을 내서 찾아뵐 수 있을까요?”“대표님께서 예전에 잘못하신 건 전부 아가씨의 정체를 모르셨기 때문이에요. 이제 모든 걸 아시고 정말 많이 후회하고 계십니다.”이 말을 듣자마자 박윤우가 재빨리 박민정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당신들은 다 나쁜 사람들이에요! 우리 엄마를 데려갈 생각하지 마요!”“윤우 군, 저희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대표님은 윤우 군 엄마의 친엄마세요. 절대 두 분을 해칠 분이 아니세요.” 비서는 간절히 설득했지만 박윤우는 냉소를 띠며 되받아쳤다.“그럼 예전에 우리 형이 죽을 뻔한 건 누가 그랬는데요? 엄마 얼굴이 이렇게 된 건 또 누구 탓인데요?”비서는 말문이 막혔고 ‘그건 전부 오해’ 라고 간신히 변명했다. 하지만 그녀가 말을 더 하기도 전에 정수미가 그녀를 제지했다.박윤우는 여전히 비웃는 얼굴로 말했다.“그럼 하나만 물어볼게요. 우리 엄마가 정 대표님 딸이 아니었다면 자기 잘못을 인정했을까요? 우리 엄마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냥 끝까지 괴롭혔겠죠?”“옳고 그름도 모르는 사람이 자기 딸만 감싸고 우리 엄마를 다치게 했어요. 이제 와서 용서를 구한다고요? 웃기지 마요!”박윤우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 정수미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새삼 절실히 깨달았다.“미안하다...”정수미는 고개를 숙이며 박민정에게 사과했다.“민정아, 엄마가 잘못했다. 엄마가 옳고 그름도 모르고 소현이만 감싸느라... 그래서 이렇게 됐어.”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고 목소리는 점점 떨려왔다. 하지만 박민정은 그녀의 이런 모습에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아이조차 아는 간단한 이치를 성인이자 회사 대표인 그녀가 몰랐다는 것이 더 의아했다. 그저 자기 편을 감싸기에 바빴던 사람일 뿐이었다.“정 대표님, 더 할 말이 없으시면 저희는 먼저 들어가겠습니다.”박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