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박민정은 증명해 냈다. 난청이라도 피아노, 춤, 노래 모두 그녀는 정상인보다 모자라지 않았다.이 기사는 마치 빛 같았다. 연지석은 그렇게 천천히 일어설 수 있었다.연지석이 자세하게 말하는 그 빛 났던 순간들은 박민정 본인도 잊기 직전이었다.연지석은 그녀를 묵을 곳으로 데려다주었다.박민정은 웃으면서 그한테 말했다.“고마워. 나도 원래의 날 잊기 직전이었어.”연지석은 그녀와 밥 먹으러 갔다.하루 종일 함께 있으면서도 그는 섬세하게도 박민정이 결혼한 후의 일들은 묻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이 흘렀다.날짜를 확인해보니 이혼이 예정된 5월 15일과는 열흘 좀 넘게 남아 있었다.한수민과의 약속이 문득 생각이 났다.그녀는 어느 아침, 돌아간 아빠를 보러 갔었다.돌아가신 아빠의 묘비 앞에서, 자상한 사진 속의 아빠를 보며 박민정은 목이 메왔다.“아빠. 보고 싶어요.”여린 바람이 가볍게 박민정의 볼을 스쳤다.그녀는 코끝이 시렸다.“아빠. 만약 지금 아빠를 보러 가면 무조건 저한테 화내시겠죠?”그는 묘비에 붙은 나뭇잎을 하나하나 떼여냈다.“저도 제가 조금 더 강해야 한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죄송해요...”묘비 앞에 한참을 서 있고서야 박민정은 발걸음을 옮겼다.그녀는 떠날 때 유골함을 샀다.그러고는 사진관에 가서 일하는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 속에서 흑백사진을 찍었다.이 모든 걸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그녀는 창밖의 풍경을 보면서 넋을 놓았다.이때 핸드폰이 울렸다.은정숙 아줌마였다.“민정아. 요새 어떻게 지내?”박민정은 은정숙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잘 지내요.”은정숙은 한숨을 내쉬고는 잔소리했다.“누가 너더러 나한테 몰래 돈 보내랬니? 그 돈, 나는 필요 없다. 뒀다가 너 써. 나중에 사업 같은 거 할 때나...”지난 몇 년간, 박민정은 몰래 그녀에게 돈을 보내왔다.그녀는 시골 사람이다 보니 그리 많은 돈을 쓸 일도 없었고 모두 저축해 두고 있었다.전화 저편에서 은정숙의 관심 어린
이지원은 인터뷰를 마친 후 한수민을 찾아갔다.그리고 한수민과 박민정 동생이 600억을 위해 박민정을 늙은이에게 시집 보내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유남준이 대답이 없자 이지원은 말을 얹었다.“민정 씨 어머니 말로는 민정 씨가 먼저 600억을 요구했다더라고요. 그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그리고 아직 두 분 숙려기간이 끝나지 않아서 정식으로 결혼하는 대신 식만 올리기로 했다고요.”...박민정은 엄마와 동생이 자기 의견은 모조리 무시한 채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신혼을 준비 중인 건 꿈에도 몰랐다.한수민은 그녀가 절대 죽을 용기도 없고 절대 죽지 못하리라 생각했다.어릴 때부터 많은 괴롭힘을 당했지만 떠나기를 선택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이번에도 같을 것으로 생각했다.동생인 박민호는 진즉에 그 600억을 받아서 새로운 회사를 준비 중이었다. 그는 박민정에게 단 조금의 죄책감도 없었다.그리고 이날, 박민정은 한수민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최 사장님이 좋은 날짜 받아오셨어. 이번 달 15일이야. 나흘 동안 잘 준비해서 시집 가면 돼. 이번에는 꼭 이 남자의 마음을 잡아야 한다. 알았지?”박민정은 이 두 메시지를 보면서 마음이 복잡해졌다.15일. 기쁘고 즐거워야 할 날이었다. 그녀가 유남준과 이혼을 약속한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가 떠나려는 날이기도 했다. 박민정은 자신이 또 잊을까 봐 이날을 노트에 기록해 뒀다.그리고 그녀는 친필로 유서를 써 내렸다.필을 들었지만 뭘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에 그녀는 윤정숙과 연지석에게 말을 남겼다.다 쓴 뒤 그녀는 유서를 자신의 베개 밑에 넣어뒀다.사흘 뒤.14일에는 비가 크게 내렸다.핸드폰을 테이블에 올려놨는데 온종일 벨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모두 한수민이 걸어온 전화였고 그녀가 어디 있는지 묻는 것이었다.내일이면 결혼식이니 그녀더러 집에 들러 최 사장에게 시집갈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박민정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 새로 맞춘 붉은 드레스를 입고 예쁘게 화장도 했다.
핸드폰이 박민정 손에서 떨어졌다.빗방울이 핸드폰을 적셨고 스크린도 검게 변했다.박민정은 아빠의 묘에 기대서 품 안의 나무 인형을 끌어안았다. 차가운 비를 맞으면서 아빠가 자상한 얼굴로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걸 보는 것만 같았다.깊은 사랑은 낭만적이고, 가벼운 사랑은 현실적이다. 하지만 둘 중 어느 쪽이든, 미련이 남는 것은 같았다. ...두원 별장.유남준은 끊겨버린 핸드폰을 보며 불안해졌다.다시 걸어보자, 핸드폰에서 들리는 건 차가운 기계음이었다.“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되며 삐 소리 후 통화료가 부과됩니다...”유남준은 몸을 일으켜 외투를 입은 후 밖으로 나갔다.그러고는 문에서 발걸음을 멈췄다.박민정이 밀당을 하는 것이다!곧 이혼인데 그녀가 못할 게 뭐가 있겠는가?침실로 돌아왔지만 왜인지 모르게 그는 잠들 수가 없었다.박민정이 한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만약 엄마랑 동생이 한 일을 알았다면, 전 절대... 절대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에요. 만약에 제가 당신이 이지원을 좋아한 걸 알았다면...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에요. 만약에 아빠가 결혼식 당일 교통사고가 날 걸 알았다면...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예요.”유남준은 몸을 일으켜 자기도 모르게 박민정의 방문 앞에 섰다.박민정이 그곳을 떠난 지 이미 한 달이 훌쩍 넘었다.그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두컴컴한 것이 무척 답답했다.불을 켜자, 박민정의 아무 물건도 남아 있지 않아 휑해 보였다.유남준이 침대맡 테이블을 열어보자 작은 노트가 있었다.노트에는 딱 한 마디만 적혀 있었다.「떠나기로 결심한 사람이 가장 고통스럽겠지. 마음속으로 이미 수도 없이 발버둥 치고서야 그 결심을 내렸을 테니까.」유남준은 수려한 글씨를 보고 차갑게 웃었다.“고통? 너랑 그 몇 년을 보낸 나는 안 고통스러워?”그는 노트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방을 떠날 때 노트는 다시 깨끗하게 머리맡 테이블에 되돌려졌다.방을 떠난 그는 다시는 잠들지 못했다....한편.연
또 하나는 은정숙에게 남긴 것이었다.그가 열어보자 마지막 줄에 은정숙의 주소가 적혀있었다.연지석은 그대로 뛰쳐나갔다.여기서 교외까지 멀지 않았다. 기껏해서 차로 이십여 분 정도 되는 거리였다.하지만 연지석은 이상하게도 한없이 멀게 느껴졌다.그는 이해가 안 됐다. 자기 눈에 그렇게 찬란하게 반짝이던 사람이 왜 이런 길을 선택했는지.그 동시에 그와 같게 교외로 향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는데 한수민이었다.한수민은 600억을 위해 박민정을 데려다 결혼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교외 묘지.비가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박민정은 묘지에 쓰러져 있었다. 빗줄기는 사정없이 그녀의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의 드레스는 진작 흠뻑 젖었고 피골이 상접해서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았다.연지석은 비를 뚫고 박민정을 향해 달려갔다.“박민정!!”돌아오는 건 바람 소리와 빗소리밖에 없었다. 연지석은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그는 달려가 박민정을 안으며 그녀의 옆에 있는 빈 약병을 발견했다.연지석은 떨리는 손으로 박민정을 안아 올렸다.왜 이렇게 가벼울까.“박민정, 정신 차려! 절대 잠들면 안 돼!”말하면서 그는 산 밑으로 뛰여내려갔다....“사모님, 도착했습니다.”운전기사가 말했다.한수민은 창밖에서 낯선 남자가 뛰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의 품 안에 안긴 건... 박민정이였다.“박민정 이 년이!”그녀는 얼굴을 찌푸리고 우산을 들고 내렸다.오늘 한수민은 한복을 쫙 빼입었는데 빗물이 그의 치맛자락을 적셨다.한수민은 짜증 난다는 듯이 다가가서 박민정을 윽박질렀다.화를 내려는 찰나 그는 연지석 품속에 축 늘어진 박민정을 살폈다. 얼굴은 창백하고 눈은 감겨 있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박민정...”한수민이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는 찰나, 바람에 굴러온 약병을 발견했다.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약병을 주웠는데 약병에는 수면제라는 세글자가 크게 적혀있었다.그 순간, 한수민은 그날 박민정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만약 제가 이 목숨
“네.”박민호는 연지석에게 다가가서 박민정을 뺏으려 했다.하지만 손을 뻗자마자 연지석 때문에 그대로 땅에 고꾸라졌다.“퍽!”소리와 함께 박민호는 1미터 넘게 날아가서 심장을 움켜쥐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한수민은 상황을 보고 급하게 아들을 부축했다. 그리고 연지석을 노려보면서 말했다.“감히 내 아들한테 손을 대!”연지석은 여전히 박민정을 안고 있었다. 도화살 가득한 그 눈에는 차가움이 흘렀다.빗물은 그의 머리카락을 따라 방울방울 떨어졌다.그는 모자 앞에서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그는 귀신 같은 얼굴로 한 글자씩 뱉었다.“죽고 싶어요?”한수민과 박민호는 눈앞의 이 남자에게 놀라서 한순간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연지석은 박민정을 안고 떠나면서 한수민에게 당부하는 걸 잊지 않았다.“민정이 유서에 적혀 있더라고요. 녹음도 있고. 그 녹음에 그쪽이 더 이상 민정이랑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약속했다던데, 잊으셨어요?”박민정은 그 녹음이 법적인 효력이 없다는 건 알았고 그 녹음만으로 모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다는 것도 알았다.하지만 그녀는 한수민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한수민에게 체면은 아주 중요했다.만약 이 녹음이 공개되면 한수민은 자기 딸을 해쳤다는 꼬리표를 평생 달고 다녀야 했다.연지석의 협박에 한수민은 다친 박민호를 데리고 초라하게 떠날 수밖에 없었다.차에 앉아서 한수민은 연지석 품에 안긴, 생사를 알 수 없는 딸을 보며 손바닥을 세게 꼬집었다. “엄마가 모질다고 비난하지 말고 쓸데없는 너 자신을 탓하렴. 유남준 마음 하나 못 사로잡은 널. 지금 이건 전부 네가 초래한 거야.”그 순간 한수민은 엄청난 고통을 느꼈지만 빠르게 냉정해졌다.딸이 죽는 것보다 최 사장과의 거래가 더 중요한 일이었다.연지석은 박민정을 데리고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그리고 박민정이 수술방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았다.수술 중이라는 선명한 세 글자를 보면서 그는 단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수술이 한 시간가량 이어지다가 의
조용히 듣고 있던 유남준은 얼굴이 어두워졌지만, 반박은 하지 않았다.그리고 이런 그의 태도 때문에 그의 친구인 김인우도, 그의 엄마인 고영란도, 더불어 그의 비서인 서다희도, 심지어 집에서 도우미 일을 하는 사람들도 박민정을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김인우는 전화를 한 통 받고 급하게 떠났다.그가 떠난 뒤 유남준은 습관처럼 핸드폰을 꺼내 들었지만, 박민정으로부터 온 전화는 없었다.유남준이 전화를 걸자 여전히 차가운 기계음만 들렸다.“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되며 삐 소리 후 통화료가 부과됩니다.”유남준은 짜증이 나서 핸드폰을 옆에 버렸다.그는 몸을 일으켜 창가에 가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박민정이 새벽에 했던 말이 귀가를 맴돌았다. 그녀는 후회한다고 했다.유남준은 입안이 썼다. 크게 기침을 두 번 하자 등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빠, 담배 좀 적게 피워요. 몸에 안 좋아요.”유남준은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무의식적으로 박민정이 돌아온 줄 알았다.하지만 돌아보니 그 자리에 서 있는 건 단아하게 꾸민 이지원이었다.그는 눈에서 빛이 사라지면서 어색하게 물었다.“무슨 일로 왔어?”이지원은 그를 보는 눈빛이 제법 다정했다.“이모가 가보라고 하셔서요. 민정 씨가 그렇게 빠르게 다른 사람을 찾은 걸 알고 오빠보고 깊이 생각하지 말래요.”그녀의 입에서 말하는 이모는 유남준의 엄마였다.4년 전.유남준의 엄마와 김인우는 같은 차를 타고 적대하고 있던 회사로부터 암살 시도를 당했었다.유남준 엄마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렸고 그때 병원에 O형 피가 부족했는데 마침 박민정이 O형이었다.박민정은 김인우를 안정시키고 수혈하러 갔다.수혈한 후 박민정은 체력이 모자라서 그대로 쓰러졌다.그때 박씨 집안이 이지원의 투자자여서 이지원은 박민정과 사이가 꽤 좋았다. 그래서 박민정이 병원에 있는 걸 알고 가타부타 덧붙이지 않고 병원에 가서 박민정을 살폈고 그렇게 박민정이 사람을 구한 일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이 박민정이 입원한 틈
창밖으로 바람이 불었다. 박민정은 창백하고 연약한 손을 배에 올리고 눈빛이 멍해졌다.연지석이 그녀에게 알려주었다. 의사가 검사한 결과, 그녀가 임신이란다.이 타이밍에 아이가 생기다니...은정숙은 져버린 눈을 보며, 삶의 의지가 없어 보이는 박민정을 보면서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민정아.”박민정은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은정숙을 보았다.“아줌마.”은정숙은 눈이 붉어져서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민정아. 아줌마가 자식도 없고 쭉 너를 딸로 여겼어. 아줌마는 너 크게 성공하는 것도 안 바란다. 그저 몸 건강히 지내면 돼. 하나밖에 없는 딸이 죽으면! 엄마는 어떻게 살아가니?”박민정은 흠칫하고 은정숙이 과도를 드는 걸 보았다.“내가 너 열 살까지 키웠어. 열 살부터 너랑 같이 못 있어준 건 내 잘못이야. 지금 가서 너희 아버지한테 사죄할게...”은정숙은 말을 끝내기 무섭게 과도로 손목을 그으려 했다.박민정은 아연실색해서 없는 힘까지 짜내서 말렸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몸도 일으키지 못해서 목멘 소리로 말했다.“아줌마... 하지 마요...”하지만 은정숙은 멈추지 않았다.박민정은 그녀의 손목에서 붉은 피가 나는 걸 보면서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떨어져 내렸다.“멍청한 짓, 안 할게요. 아줌마, 그러지 마요...”박민정의 약속을 듣고서야 은정숙은 멈췄다.그녀의 눈은 잔뜩 충혈돼 있었다.“민정아. 낳아준 빚은 이미 갚았어. 우리 빚진 거 없어. 유남준한테도 빚진 거 없어! 지금부터 너는 너를 사랑하는 사람 위해서, 나를 위해서, 배 속에 아기를 위해서 잘살아 보자!”박민정은 결국 은정숙의 말을 듣기로 했다. 그녀와 아이를 위해 잘살아 보기로.지금부터 한수민은 그녀의 엄마가 아니었고, 그녀는 더 이상 남동생 같은 건 없다.그녀의 가족은 이제 은정숙과 배 속의 아이밖에 없다.은정숙은 사실 이런 방법으로 박민정의 결정을 협박해낼 생각은 없었다.그저 그녀를 살게 하고 싶었다!박민정은 자신의 부모를
여름의 두 번째 절기인 소만. 남방에서는 종종 폭우가 내렸다.퇴원한 후 며칠 동안 연지석은 자주 시간을 내서 박민정과 함께했다.약을 먹은 후유증으로 박민정의 몸 상태는 더 나빠졌다.하지만 그녀의 정신상태는 꽤 좋아졌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던데로부터 억지로라도 음식을 삼켰다.연지석과 함께 할 때 그녀는 단 한 번도 유남준을 언급하지 않았다.어떤 사람은 너무 아파서 입에 담는 것마저도 상처일 때가 있다.그리고 친구가 자신을 따라서 우울한 감정을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혼자 있을 때, 박민정은 유남준의 카톡 프로필 사진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이혼에 관한 일에 대해서 어떻게 입을 열지 몰랐다.그러던 어느 날.박민정은 밖에서 음식을 사고 돌아가는 길이었다.한 사람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이지원은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끼고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예쁜 드레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서 있었는데, 그 기세가 대단했다.“민정 씨. 민정 씨 어머니는 당신이 살아있는 거 알아요?”이지원의 눈썹이 둥글게 말렸다.박민정은 여기서 그녀를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둘은 조용한 카페를 찾아 창가 자리에 앉았다.커다란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렸다.이지원이 마스크를 벗자 오밀조밀한 얼굴이 드러났다.“안심하세요. 남준 오빠한테 듣기로는 박민호 씨가 최 사장님 돈 가지고 민정 씨 어머니 모시고 도망치고 있다더라고요. 그분들이 민정 씨 괴롭히는 일은 없을 거예요.”박민정은 이미 연지석을 통해 들었었다.한수민과 박민호가, 박민정이 제때 최 사장과 결혼하지 않아 보복이 두려워서 도망길에 올라서 당일에 해외로 도망쳤다고.그 누가 그토록 부유하던 박씨 집안이 고작 600억 때문에 패가망신할 거라 생각했겠는가?박민정은 조용히 다 듣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물었다.“할 말 있으세요?”이지원의 시선이 그녀의 배를 향했다. 임신한 게 아직 티가 나지 않았다.그녀는 손바닥 살을 세게 꼬집었다. 박민정을 당장 폭로하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말해봐요. 어떻게 해야 남준
윤소현은 최대한 감정을 누르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어머니.”“정씨 가문으로 갈 테니, 우리 한번 보자.” “네.”윤소현은 여전히 고영란이 두려웠다. 다만 자신이 임신 중이라는 사실이 방패막이가 되어줄 거라 생각했다.고영란은 곧바로 정수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수미는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해입니다. 제 사람들이 실수로 아이를 다치게 한 거예요.”하지만 고영란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정 대표, 우리 모두 똑똑한 사람이잖아요. 양녀 관리 제대로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나서게 될 테니까요.”전화를 끊은 후에도 고영란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토록 애지중지 키운 똑똑하고 착한 손주들이 윤소현 때문에 위험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정씨 가문 앞에 도착하자 윤소현이 이미 와있었다. “어머니...”윤소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임신 사실이 보호막이 되어줄 거라 믿었다.“몇 개월 됐지?”고영란이 물었다. 윤소현은 잠시 망설이다 미소 지으며 답했다. “다섯 달 정도요.” “다섯 달이라... 이제 안정기네.” 고영란은 중얼거리듯 말하더니, 갑자기 손을 들어 윤소현의 뺨을 세게 때렸다. 윤소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어머니, 어떻게 임신한 며느리를 때리실 수 있어요?” 윤소현이 뺨을 감싸며 항의했다. “임신했다고? 그럼 너는 왜 윤우를 그렇게 때릴 수 있었니? 너도 곧 애 엄마가 될 사람이면서!”고영란이 호통을 쳤다. 윤소현은 억울한 듯 물린 자국이 남은 손을 들어 보였다. “보세요, 예찬이랑 윤우가 먼저 절 물었다고요!” “그게 네 변명이야? 윤우가 다 말했어. 네가 먼저 때리려고 했고, 아이들은 자신을 지키려 했다는 걸!”“믿기지 않으면 조사해도 된다고 하더구나!” 윤소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가 먼저 손을 댄 건 사실이었으니까.“앞으로 또 이런 일이 생기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보여줄 거야. 선 넘지 마!” 고영란은 말을
그날 아침, 고영란은 박씨네 본가에 갔다가 손자의 병세가 재발해 입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박윤우가 있는 앞에서 박민정은 그 사실을 직접 말할 수가 없었다.“괜찮아요. 의사 선생님이 더 쉬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곧 나을 거예요.”“그렇다면 다행이네.” 고영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박윤우의 곁으로 다가갔다.“윤우야, 왜 병이 또 도졌니? 약은 제때 먹었니?”박윤우는 고영란이 여기 왔다는 걸 알자, 이를 기회로 삼기로 결심했다. 그는 먼저 박민정에게 나가서 맛있는 음식을 사 오라고 부탁했다. 그리고는 고영란 앞에서 금세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할머니, 저는 늘 말을 잘 들었죠? 그런데...”잠시 말을 멈추는 사이, 눈물방울이 마치 작은 구슬처럼 굴러떨어졌다.“누가 저를 괴롭혔어요.”“뭐라고?” 고영란은 즉시 화가 나서 물었다.“누가 널 괴롭혔니? 말해봐, 할머니가 대신 복수해 줄게!”그녀는 누가 감히 자기 손자를 괴롭혔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박윤우는 콧물을 훌쩍이며 말했다.“작은숙모요.”“작은숙모?”고영란은 잠시 그 이름을 떠올리지 못하다가, 문득 생각이 나며 물었다.“네 삼촌 아내, 소현이 말이니?”“네.” 박윤우는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이며 울먹이며 말했다.“작은숙모가 저를 때렸어요. 그뿐만 아니라 형도 때리려고 했어요.”고영란은 이 말을 듣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아이를 때릴 수가 있지?”“숙모는 저와 형을 죽이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앞으로 유씨 집안에선 숙모 아들만 있어야 하고, 저랑 형은 없어야 한다고 했어요.” 박윤우는 하나하나 또박또박 말했다.이 말에 고영란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아이는 분명 이런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다.고영란은 박민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런 말을 가르칠 리 없었다.“어떻게 아이를 때릴 수 있지...”고영란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윤우야, 울지 마. 할머니가 꼭 복수해 줄게.”고영란은 복잡한 심정이었다. 윤소현이 유
“사람을 시켜 준비하도록 하지.”정수미가 결심한 듯 말했다.윤소현과 이지원은 서로 마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정수미의 도움이 있으니 이번에야말로 박민정은 끝장이 날 거라고 생각했다.정수미는 단지 박민정에게 본때를 보여주어 다시는 정씨 가문과 윤소현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려 했을 뿐인데, 자기 딸이 그들 모자의 목숨을 노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박예찬은 온라인에서 자신의 작품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비록 이번 일이 정씨 가문과 PMJ에 미치는 영향은 다르지만, 적어도 정씨 가문의 체면을 구기기에는 충분했다.정수미가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조사해 보았지만, 범인이 해외 가상 주소를 사용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다.병원에서 박윤우를 간호하느라 바쁜 박민정은 뉴스를 볼 겨를이 없었다. 진서연이 전화로 알려주기 전까지는.지금은 정씨 가문의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오직 박윤우의 병세만이 그녀의 머릿속을 채웠다.박윤우가 잠들자 박민정은 유남준에게 물었다.“우리... 조산을 하면 안 될까요?”박민정은 박윤우가 아이들이 태어날 때까지 버티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위험해. 정말 다른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면 안 돼.”유남준은 이성적으로 대답했다. 박윤우를 걱정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일일수록 서두르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박민정은 고개를 숙인 채 물었다.“그럼 어떡하죠?”“괜찮을 거야.”유남준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박민정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그를 마주 안았다.둘이 서로를 껴안고 있을 때, 문이 완전히 닫혀 있지 않아 진서연과 함께 박윤우를 보러 온 에리가 그 모습을 목격했다.그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진서연은 상황을 보고 급히 그를 밖으로 이끌었다.약간의 소리가 나자 박민정은 유남준의 품에서 벗어나 문 쪽을 바라보았다.“어머, 왔었네.”진서연은 다소 어색한 듯 정신을 차리고는 들고 있던 과일바구니와 꽃바구니를 들어 보였다.“에리 씨가 윤우가 아프다는 걸 알고, 저와
다음 날, 이른 아침.온라인상의 모든 뉴스가 폭발했다.정씨 가문의 사업 자료가 유출되었다는 소식이 각종 플랫폼에 퍼졌다.원래 정수미는 비서에게 이 소식을 절대 새어나가지 않게 하라고 했는데, 하루 만에 모든 사람이 알게 될 줄은 몰랐다.“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비서도 모르는 일이라 겁에 질려 고개를 저었다. “어제 밤부터 네트워크를 감시하게 했고, 이 일은 저희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데...”“박민정!” 정수미는 모든 것을 박민정 탓으로 돌렸다.그녀는 책상을 세게 내리치며 말했다. “어제 밤에는 그 여자 아들이 입원한 것 때문에 약간 죄책감이 들었는데, 이제 보니 잘된 일이었어!”“맞습니다. 정말 가증스럽네요. 먼저는 아가씨의 남편을 유혹하더니, 이제는 감히 정씨 사업까지 겨냥하다니!” 비서도 거들었다.정수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이때 이지원과 윤소현도 도착했는데, 멀리서 소동을 듣고 즉시 다가와 부채질을 했다.“엄마, 온라인의 일 박민정이 한 거예요?”이지원이 물었다.“그 여자 말고 누가 있겠어?” 정수미가 대답했다.이지원은 분노한 척 연기했다. “정말 믿을 수 없어요. 이렇게 많은 세월이 지났는데도 박민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네요.”정수미는 호기심이 생겨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지?”“박민정은 늘 독했어요. 예전에 제가 남준 오빠랑 만날 때도, 박민정은 자신이 박씨 집안의 딸이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저랑 오빠가 함께하는 것을 방해했어요. 나중에는 오빠한테 자신과 결혼해 달라고 강요하기까지 했어요!”“제가 박씨 집안의 지원을 받긴 했지만, 사실은 박민정과 박민정 아버지 때문에 해외로 쫓겨났어요.”“돌아오면 박민정이 그나마 나아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심해졌어요. 남준 오빠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저를 온갖 방법으로 괴롭히고, 많은 근거 없는 죄명을 씌웠죠. 전 딱히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는데 지금은 엄마랑 소현이까지 괴롭히려 한다니... 용서할 수 없어요.”이지원의 말은 진심이 느껴
분명 윤소현이 때린 건데 정수미는 부하 직원 하나를 매수해서 죄를 뒤집어씌우다니, 참으로 가소로웠다.유남준은 천천히 양손을 움켜쥐며 차가운 눈빛을 보였다. “꺼져!”보안요원은 이 말을 듣자마자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네, 네.”그가 떠나자 이곳은 마침내 조용해졌다.김인우가 욕설을 내뱉었다. “정씨 집안 놈들은 자기가 엄청 대단한 줄 아나 봐? 이렇게 멋대로 굴다니!”조하랑도 분노에 차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 여자 딸이 유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으니...”이렇게 보면 사실상 두 시누이 간의 집안 문제가 된 셈이었다.“유남우는 제정신이야? 아이를 때리는 여자랑 결혼하겠다니!” 김인우가 또 한 번 분통을 터뜨렸다.지금 이런 말들은 소용없었다.마침내, 수술실 문이 열렸고, 의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왔다.박민정이 서둘러 일어나 다가갔다. “선생님, 제 아들은 지금 어때요?”“목숨은 건졌습니다만, 현재 체내의 백혈구가 너무 빠르게 확산되고 있어서 가능하다면 빨리 수술하는 게 좋겠습니다.”의사가 말했다.박민정은 배를 감싸안으며 물었다. “다음 달에 해도 될까요?”“그건 저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일단 입원시켜 놓고, 문제가 생기면 바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네, 네, 알겠습니다.”박민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박윤우의 입원 수속을 마치고 박민정 일행은 병실로 가서 아이를 보았다.박윤우는 여전히 매우 허약해 보였고 지친 눈을 겨우 뜨며 말했다. “엄마, 아빠, 형... 아저씨, 하랑 이모... 걱, 걱정하지 마세요.”“이제 괜찮아요.”그는 자신이 너무 미웠다. 왜 이렇게 쓸모없는 걸까, 엄마의 원수를 갚으러 갔다가 오히려 엄마에게 걱정만 끼치게 된 걸까?“그래, 윤우야. 잘 쉬어. 다 나을 거야.” 박민정이 눈물을 참으며 부드럽게 말했다.“네.”박윤우는 바로 대답하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그는 다시 박민정의 손을 잡았다. “엄마, 제가 말씀드린 거 안 잊으셨죠?”박민정은 그가 정수미에 관한
정수미는 컴퓨터에 적힌 자신을 저주하는 말을 보며 혀를 찼다. 역시 세상의 모든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건 아니었다.만약 딸을 찾는다면, 반드시 잘 대해주고 절대로 딸이 어떤 서러움도 겪지 않게 할 것이다....이지원과 윤소현이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윤소현은 꽁꽁 싸맨 자신의 손을 보며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 못된 녀석, 감히 나를 물어?!”“소현 씨, 화내지 마요. 제가 보기에 그들도 얼마 못 갈 거예요.” 이지원이 달랬다.“지원 씨가 박민정이랑 그 두 못된 녀석들을 함께 없애버린다면, 제가 반드시 후하게 보답하겠어요.”“저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어요. 저는 박민정을 소현 씨보다 더 증오하니까요!” 이지원이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그러고는 아까 서재에서 있었던 일이 마음에 걸린다는 듯이 덧붙였다. “그런데, 왜 정 대표님께서 저를 싫어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까요?”“그럴 리가요. 엄마 눈에는 지원 씨가 친딸이에요. 저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죠. 그저 기분이 안 좋아서 그런 거니 너무 신경 쓰지 마요.” 윤소현이 설명했다.이지원은 마음속으로는 걱정되었지만, 겉으로는 멀쩡한 척했다.“그랬으면 좋겠네요.”두 사람의 대화가 정수미의 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이제 와서 뭘 더 의심할 게 있단 말인가?그녀의 양녀가 외부인과 손잡고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니!“소현이가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정수미는 마치 비서에게 묻는 것처럼, 또 자신에게 묻는 것처럼 말했다.비서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했다. “아가씨의 입장에서는 대표님이 친딸을 못 찾으시는 게 가장 좋을 텐데, 어떻게 누군가를 내세워 대표님의 딸 행세를 하게 하는 걸까요? 그 사람이 정말로 아가씨의 지위를 빼앗는다면 곤란하실 텐데요.”정수미가 쓴웃음을 지었다.“그 아이는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을 내세워서, 내가 친딸을 찾는 걸 방해하려는 거야. 소현이의 행동 패턴을 보면 이미 이지원의 약점도 쥐고 있을 텐데, 과연 정씨 가문에서 위치가 흔들릴
박예찬은 그렇게 위로를 받았지만, 여전히 동생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자책하고 있었다.일행은 수술실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고, 박윤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두려웠다.한편, 정씨 가문도 조용하지 않았다.정수미는 곧 누군가 자신의 서재를 뒤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모든 문서가 사라져 버렸으니까.“어떻게 된 거지?”비서는 엉망이 된 서재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혹시 그 두 아이가 한 짓일까요?”정수미는 틀림없이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그녀는 컴퓨터를 확인했다. 중요한 자료 파일들이 많이 있었으니까.다행히도 노트북은 손상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 꼬마들은 그저 아이들일 뿐이니, 종이만 찢을 줄 알지 컴퓨터를 망가뜨릴 줄은 모를 것이다.정수미가 이렇게 안도하며 컴퓨터를 켰다.평소에는 빨리 켜지던 컴퓨터가 이번에는 한참이 지나서야 화면이 나타났다.하지만 화면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곧이어 정수미의 흑백 사진이 조롱하듯 화면에 나타났다.거기에는 ‘죽어버려!’라는 글씨도 쓰여 있었다.정수미의 눈썹이 순간 찌푸려졌다.비서도 그 흑백 사진을 보고 분노했다. “이 괘씸한 녀석들!”“겨우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데, 이런 걸 어떻게 했지?” 정수미가 말하면서 파일들을 찾으려 했다.하지만 찾아보니 컴퓨터의 모든 파일이 자신의 흑백 사진으로 변해있었다!정수미는 이 상황을 보고 현기증이 났다.“빨리 전문 기술자를 불러와.”“네, 네.”비서가 서둘러 나갔다.윤소현과 이지원이 밖에서 기다리다가 안의 소리를 듣고 참지 못하고 들어왔다. “엄마, 무슨 일이에요?”“컴퓨터가 해킹당해서 회사의 기밀 문서가 전부 사라졌어.” 정수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어떻게 이런 일이...” 이지원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엄마, 제가 한번 봐 드릴까요? 저 대학 다닐 때 컴퓨터 관련 지식을 배웠거든요.”이지원이 말하면서 컴퓨터에 손을 뻗었다.하지만 정수미는 그녀의 손을 바로 쳐냈다. “필요 없어.”
박윤우와 박예찬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박예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엄마, 저희가 뉴스를 봤어요. 정씨 가문이 엄마를 괴롭혔다는 걸 알고, 엄마를 위해 분풀이를 하고 싶었어요.”박민정은 마음이 아팠다. 두 아이는 또래보다 철이 들었기에 이유 없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얼마나 컸다고 나를 위해 분풀이를 하려고 해.”박윤우가 서둘러 말했다. “엄마, 저랑 형은 이제 세 살배기 어린애가 아니에요. 그리고 오늘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됐어요.”박민정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비밀인데?”“이지원이 정수미 아줌마 친딸이 아니래요.” 박윤우가 한 자 한 자 또렷하게 말했다. “게다가 아줌마도 이미 알고 있대요.”이 소식은 정말 믿기 힘든 것이었다.박민정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떻게 그걸 알게 된 거니?”“제가 책상 뒤에 숨어서 들었어요.” 박윤우가 말을 마치고, 당시 상황을 박민정에게 자세히 설명했다.박민정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만약 그렇다면 이지원이 어떻게 멀쩡하게 정씨 가문에 있을 수 있었을까.박윤우는 뭔가 빠뜨린 게 있을까 봐 열심히 기억을 더듬었다. “맞다, 또 일을 키우지 말라고 했어요.”“일을 키우지 말라고?” 박민정이 물었다.“네!”박윤우가 흥분해서 말하는 순간, 그의 코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박민정은 아이가 코피를 흘리는 것을 보고 순간 당황했다. “윤우야...”“기사님, 빨리 병원으로 가요!”그녀는 즉시 기사에게 병원으로 방향을 돌리라고 외쳤다.박예찬은 그제야 아까 윤소현이 동생을 꽤 세게 때렸다는 걸 떠올렸다.“윤우야...”박윤우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박민정과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는 유남준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엄마, 아빠, 앞으로 두 분 잘 지내세요...”“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박민정의 눈가가 붉어졌다.유남준은 오히려 침착했다. 병원이 보이자 박윤우를 한 팔에 안아 들며 박민정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윤우를 데리고 갈
정수미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밖으로 나가보니 보안 요원들이 두 아이를 제압하고 있었다.그리고 윤소현의 손은 이미 박윤우의 얼굴에 내려앉아 있었다.박윤우는 윤소현에게 맞는 순간 머리가 멍해지기 시작하더니 귀까지 울려댔다.“윤우야!”마음이 급해진 박예찬이 어떻게든 박윤우를 막으려 했지만 보안 요원들을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나한테 하라고! 내 동생한테 손대지 마!”박윤우를 때리면서 모든 힘을 쏟아부은 윤소현의 손바닥은 아직도 얼얼했다.그녀는 자신을 도발하는 박예찬을 발견하자마자 곧장 손을 들어 박예찬에게도 폭력을 행사하려 했다.그 순간, 밖에서 소란스러운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윤소현이 그 소리에 멍하니 서 있는 동안, 박민정만 유남준이 사람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섰다.“예찬아, 윤우야!”박민정은 집안의 보안 요원들에게 제압당한 두 아이들을 발견하자마자 임신 중이라는 사실도 입은 채 다급히 두 아이에게 달려갔다.하지만 보안 요원들은 아이를 단단히 포박한 채 놓아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유남준의 표정도 눈에 띄게 굳었다. 그는 자신이 데려온 경호원들에게 즉시 움직일 것을 요구했고 박예찬과 박윤우를 제압 중이던 보안 요원 두 명은 순식간에 나가떨어졌다.박민정은 다급히 달려가 두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괜찮아?”그녀의 눈빛에는 온통 걱정뿐이었다.박윤우는 아픔을 꾹 참은 채 박민정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괜찮아요, 엄마.”박윤우는 어딘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박예찬 역시 박민정을 안심시키며 말했다.“맞아요, 우리 괜찮아요.”두 아이의 입에서 괜찮다는 말이 나오자 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을 놓으며 정수미와 윤소현에게 시선을 돌렸다.“정 대표님, 아이들한테까지 손을 대시다니,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정수미는 그 말에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민정아. 네 아이들이 어떻게 우리 집에 들어왔는지 물어보는 게 먼저 아니니?”그 말에 박민정은 두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아이들은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