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원은 인터뷰를 마친 후 한수민을 찾아갔다.그리고 한수민과 박민정 동생이 600억을 위해 박민정을 늙은이에게 시집 보내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유남준이 대답이 없자 이지원은 말을 얹었다.“민정 씨 어머니 말로는 민정 씨가 먼저 600억을 요구했다더라고요. 그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그리고 아직 두 분 숙려기간이 끝나지 않아서 정식으로 결혼하는 대신 식만 올리기로 했다고요.”...박민정은 엄마와 동생이 자기 의견은 모조리 무시한 채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신혼을 준비 중인 건 꿈에도 몰랐다.한수민은 그녀가 절대 죽을 용기도 없고 절대 죽지 못하리라 생각했다.어릴 때부터 많은 괴롭힘을 당했지만 떠나기를 선택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이번에도 같을 것으로 생각했다.동생인 박민호는 진즉에 그 600억을 받아서 새로운 회사를 준비 중이었다. 그는 박민정에게 단 조금의 죄책감도 없었다.그리고 이날, 박민정은 한수민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최 사장님이 좋은 날짜 받아오셨어. 이번 달 15일이야. 나흘 동안 잘 준비해서 시집 가면 돼. 이번에는 꼭 이 남자의 마음을 잡아야 한다. 알았지?”박민정은 이 두 메시지를 보면서 마음이 복잡해졌다.15일. 기쁘고 즐거워야 할 날이었다. 그녀가 유남준과 이혼을 약속한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가 떠나려는 날이기도 했다. 박민정은 자신이 또 잊을까 봐 이날을 노트에 기록해 뒀다.그리고 그녀는 친필로 유서를 써 내렸다.필을 들었지만 뭘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에 그녀는 윤정숙과 연지석에게 말을 남겼다.다 쓴 뒤 그녀는 유서를 자신의 베개 밑에 넣어뒀다.사흘 뒤.14일에는 비가 크게 내렸다.핸드폰을 테이블에 올려놨는데 온종일 벨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모두 한수민이 걸어온 전화였고 그녀가 어디 있는지 묻는 것이었다.내일이면 결혼식이니 그녀더러 집에 들러 최 사장에게 시집갈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박민정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 새로 맞춘 붉은 드레스를 입고 예쁘게 화장도 했다.
핸드폰이 박민정 손에서 떨어졌다.빗방울이 핸드폰을 적셨고 스크린도 검게 변했다.박민정은 아빠의 묘에 기대서 품 안의 나무 인형을 끌어안았다. 차가운 비를 맞으면서 아빠가 자상한 얼굴로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걸 보는 것만 같았다.깊은 사랑은 낭만적이고, 가벼운 사랑은 현실적이다. 하지만 둘 중 어느 쪽이든, 미련이 남는 것은 같았다. ...두원 별장.유남준은 끊겨버린 핸드폰을 보며 불안해졌다.다시 걸어보자, 핸드폰에서 들리는 건 차가운 기계음이었다.“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되며 삐 소리 후 통화료가 부과됩니다...”유남준은 몸을 일으켜 외투를 입은 후 밖으로 나갔다.그러고는 문에서 발걸음을 멈췄다.박민정이 밀당을 하는 것이다!곧 이혼인데 그녀가 못할 게 뭐가 있겠는가?침실로 돌아왔지만 왜인지 모르게 그는 잠들 수가 없었다.박민정이 한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만약 엄마랑 동생이 한 일을 알았다면, 전 절대... 절대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에요. 만약에 제가 당신이 이지원을 좋아한 걸 알았다면...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에요. 만약에 아빠가 결혼식 당일 교통사고가 날 걸 알았다면...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예요.”유남준은 몸을 일으켜 자기도 모르게 박민정의 방문 앞에 섰다.박민정이 그곳을 떠난 지 이미 한 달이 훌쩍 넘었다.그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두컴컴한 것이 무척 답답했다.불을 켜자, 박민정의 아무 물건도 남아 있지 않아 휑해 보였다.유남준이 침대맡 테이블을 열어보자 작은 노트가 있었다.노트에는 딱 한 마디만 적혀 있었다.「떠나기로 결심한 사람이 가장 고통스럽겠지. 마음속으로 이미 수도 없이 발버둥 치고서야 그 결심을 내렸을 테니까.」유남준은 수려한 글씨를 보고 차갑게 웃었다.“고통? 너랑 그 몇 년을 보낸 나는 안 고통스러워?”그는 노트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방을 떠날 때 노트는 다시 깨끗하게 머리맡 테이블에 되돌려졌다.방을 떠난 그는 다시는 잠들지 못했다....한편.연
또 하나는 은정숙에게 남긴 것이었다.그가 열어보자 마지막 줄에 은정숙의 주소가 적혀있었다.연지석은 그대로 뛰쳐나갔다.여기서 교외까지 멀지 않았다. 기껏해서 차로 이십여 분 정도 되는 거리였다.하지만 연지석은 이상하게도 한없이 멀게 느껴졌다.그는 이해가 안 됐다. 자기 눈에 그렇게 찬란하게 반짝이던 사람이 왜 이런 길을 선택했는지.그 동시에 그와 같게 교외로 향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는데 한수민이었다.한수민은 600억을 위해 박민정을 데려다 결혼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교외 묘지.비가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박민정은 묘지에 쓰러져 있었다. 빗줄기는 사정없이 그녀의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의 드레스는 진작 흠뻑 젖었고 피골이 상접해서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았다.연지석은 비를 뚫고 박민정을 향해 달려갔다.“박민정!!”돌아오는 건 바람 소리와 빗소리밖에 없었다. 연지석은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그는 달려가 박민정을 안으며 그녀의 옆에 있는 빈 약병을 발견했다.연지석은 떨리는 손으로 박민정을 안아 올렸다.왜 이렇게 가벼울까.“박민정, 정신 차려! 절대 잠들면 안 돼!”말하면서 그는 산 밑으로 뛰여내려갔다....“사모님, 도착했습니다.”운전기사가 말했다.한수민은 창밖에서 낯선 남자가 뛰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의 품 안에 안긴 건... 박민정이였다.“박민정 이 년이!”그녀는 얼굴을 찌푸리고 우산을 들고 내렸다.오늘 한수민은 한복을 쫙 빼입었는데 빗물이 그의 치맛자락을 적셨다.한수민은 짜증 난다는 듯이 다가가서 박민정을 윽박질렀다.화를 내려는 찰나 그는 연지석 품속에 축 늘어진 박민정을 살폈다. 얼굴은 창백하고 눈은 감겨 있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박민정...”한수민이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는 찰나, 바람에 굴러온 약병을 발견했다.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약병을 주웠는데 약병에는 수면제라는 세글자가 크게 적혀있었다.그 순간, 한수민은 그날 박민정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만약 제가 이 목숨
“네.”박민호는 연지석에게 다가가서 박민정을 뺏으려 했다.하지만 손을 뻗자마자 연지석 때문에 그대로 땅에 고꾸라졌다.“퍽!”소리와 함께 박민호는 1미터 넘게 날아가서 심장을 움켜쥐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한수민은 상황을 보고 급하게 아들을 부축했다. 그리고 연지석을 노려보면서 말했다.“감히 내 아들한테 손을 대!”연지석은 여전히 박민정을 안고 있었다. 도화살 가득한 그 눈에는 차가움이 흘렀다.빗물은 그의 머리카락을 따라 방울방울 떨어졌다.그는 모자 앞에서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그는 귀신 같은 얼굴로 한 글자씩 뱉었다.“죽고 싶어요?”한수민과 박민호는 눈앞의 이 남자에게 놀라서 한순간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연지석은 박민정을 안고 떠나면서 한수민에게 당부하는 걸 잊지 않았다.“민정이 유서에 적혀 있더라고요. 녹음도 있고. 그 녹음에 그쪽이 더 이상 민정이랑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약속했다던데, 잊으셨어요?”박민정은 그 녹음이 법적인 효력이 없다는 건 알았고 그 녹음만으로 모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다는 것도 알았다.하지만 그녀는 한수민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한수민에게 체면은 아주 중요했다.만약 이 녹음이 공개되면 한수민은 자기 딸을 해쳤다는 꼬리표를 평생 달고 다녀야 했다.연지석의 협박에 한수민은 다친 박민호를 데리고 초라하게 떠날 수밖에 없었다.차에 앉아서 한수민은 연지석 품에 안긴, 생사를 알 수 없는 딸을 보며 손바닥을 세게 꼬집었다. “엄마가 모질다고 비난하지 말고 쓸데없는 너 자신을 탓하렴. 유남준 마음 하나 못 사로잡은 널. 지금 이건 전부 네가 초래한 거야.”그 순간 한수민은 엄청난 고통을 느꼈지만 빠르게 냉정해졌다.딸이 죽는 것보다 최 사장과의 거래가 더 중요한 일이었다.연지석은 박민정을 데리고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그리고 박민정이 수술방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았다.수술 중이라는 선명한 세 글자를 보면서 그는 단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수술이 한 시간가량 이어지다가 의
조용히 듣고 있던 유남준은 얼굴이 어두워졌지만, 반박은 하지 않았다.그리고 이런 그의 태도 때문에 그의 친구인 김인우도, 그의 엄마인 고영란도, 더불어 그의 비서인 서다희도, 심지어 집에서 도우미 일을 하는 사람들도 박민정을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김인우는 전화를 한 통 받고 급하게 떠났다.그가 떠난 뒤 유남준은 습관처럼 핸드폰을 꺼내 들었지만, 박민정으로부터 온 전화는 없었다.유남준이 전화를 걸자 여전히 차가운 기계음만 들렸다.“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되며 삐 소리 후 통화료가 부과됩니다.”유남준은 짜증이 나서 핸드폰을 옆에 버렸다.그는 몸을 일으켜 창가에 가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박민정이 새벽에 했던 말이 귀가를 맴돌았다. 그녀는 후회한다고 했다.유남준은 입안이 썼다. 크게 기침을 두 번 하자 등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빠, 담배 좀 적게 피워요. 몸에 안 좋아요.”유남준은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무의식적으로 박민정이 돌아온 줄 알았다.하지만 돌아보니 그 자리에 서 있는 건 단아하게 꾸민 이지원이었다.그는 눈에서 빛이 사라지면서 어색하게 물었다.“무슨 일로 왔어?”이지원은 그를 보는 눈빛이 제법 다정했다.“이모가 가보라고 하셔서요. 민정 씨가 그렇게 빠르게 다른 사람을 찾은 걸 알고 오빠보고 깊이 생각하지 말래요.”그녀의 입에서 말하는 이모는 유남준의 엄마였다.4년 전.유남준의 엄마와 김인우는 같은 차를 타고 적대하고 있던 회사로부터 암살 시도를 당했었다.유남준 엄마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렸고 그때 병원에 O형 피가 부족했는데 마침 박민정이 O형이었다.박민정은 김인우를 안정시키고 수혈하러 갔다.수혈한 후 박민정은 체력이 모자라서 그대로 쓰러졌다.그때 박씨 집안이 이지원의 투자자여서 이지원은 박민정과 사이가 꽤 좋았다. 그래서 박민정이 병원에 있는 걸 알고 가타부타 덧붙이지 않고 병원에 가서 박민정을 살폈고 그렇게 박민정이 사람을 구한 일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이 박민정이 입원한 틈
창밖으로 바람이 불었다. 박민정은 창백하고 연약한 손을 배에 올리고 눈빛이 멍해졌다.연지석이 그녀에게 알려주었다. 의사가 검사한 결과, 그녀가 임신이란다.이 타이밍에 아이가 생기다니...은정숙은 져버린 눈을 보며, 삶의 의지가 없어 보이는 박민정을 보면서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민정아.”박민정은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은정숙을 보았다.“아줌마.”은정숙은 눈이 붉어져서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민정아. 아줌마가 자식도 없고 쭉 너를 딸로 여겼어. 아줌마는 너 크게 성공하는 것도 안 바란다. 그저 몸 건강히 지내면 돼. 하나밖에 없는 딸이 죽으면! 엄마는 어떻게 살아가니?”박민정은 흠칫하고 은정숙이 과도를 드는 걸 보았다.“내가 너 열 살까지 키웠어. 열 살부터 너랑 같이 못 있어준 건 내 잘못이야. 지금 가서 너희 아버지한테 사죄할게...”은정숙은 말을 끝내기 무섭게 과도로 손목을 그으려 했다.박민정은 아연실색해서 없는 힘까지 짜내서 말렸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몸도 일으키지 못해서 목멘 소리로 말했다.“아줌마... 하지 마요...”하지만 은정숙은 멈추지 않았다.박민정은 그녀의 손목에서 붉은 피가 나는 걸 보면서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떨어져 내렸다.“멍청한 짓, 안 할게요. 아줌마, 그러지 마요...”박민정의 약속을 듣고서야 은정숙은 멈췄다.그녀의 눈은 잔뜩 충혈돼 있었다.“민정아. 낳아준 빚은 이미 갚았어. 우리 빚진 거 없어. 유남준한테도 빚진 거 없어! 지금부터 너는 너를 사랑하는 사람 위해서, 나를 위해서, 배 속에 아기를 위해서 잘살아 보자!”박민정은 결국 은정숙의 말을 듣기로 했다. 그녀와 아이를 위해 잘살아 보기로.지금부터 한수민은 그녀의 엄마가 아니었고, 그녀는 더 이상 남동생 같은 건 없다.그녀의 가족은 이제 은정숙과 배 속의 아이밖에 없다.은정숙은 사실 이런 방법으로 박민정의 결정을 협박해낼 생각은 없었다.그저 그녀를 살게 하고 싶었다!박민정은 자신의 부모를
여름의 두 번째 절기인 소만. 남방에서는 종종 폭우가 내렸다.퇴원한 후 며칠 동안 연지석은 자주 시간을 내서 박민정과 함께했다.약을 먹은 후유증으로 박민정의 몸 상태는 더 나빠졌다.하지만 그녀의 정신상태는 꽤 좋아졌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던데로부터 억지로라도 음식을 삼켰다.연지석과 함께 할 때 그녀는 단 한 번도 유남준을 언급하지 않았다.어떤 사람은 너무 아파서 입에 담는 것마저도 상처일 때가 있다.그리고 친구가 자신을 따라서 우울한 감정을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혼자 있을 때, 박민정은 유남준의 카톡 프로필 사진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이혼에 관한 일에 대해서 어떻게 입을 열지 몰랐다.그러던 어느 날.박민정은 밖에서 음식을 사고 돌아가는 길이었다.한 사람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이지원은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끼고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예쁜 드레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서 있었는데, 그 기세가 대단했다.“민정 씨. 민정 씨 어머니는 당신이 살아있는 거 알아요?”이지원의 눈썹이 둥글게 말렸다.박민정은 여기서 그녀를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둘은 조용한 카페를 찾아 창가 자리에 앉았다.커다란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렸다.이지원이 마스크를 벗자 오밀조밀한 얼굴이 드러났다.“안심하세요. 남준 오빠한테 듣기로는 박민호 씨가 최 사장님 돈 가지고 민정 씨 어머니 모시고 도망치고 있다더라고요. 그분들이 민정 씨 괴롭히는 일은 없을 거예요.”박민정은 이미 연지석을 통해 들었었다.한수민과 박민호가, 박민정이 제때 최 사장과 결혼하지 않아 보복이 두려워서 도망길에 올라서 당일에 해외로 도망쳤다고.그 누가 그토록 부유하던 박씨 집안이 고작 600억 때문에 패가망신할 거라 생각했겠는가?박민정은 조용히 다 듣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물었다.“할 말 있으세요?”이지원의 시선이 그녀의 배를 향했다. 임신한 게 아직 티가 나지 않았다.그녀는 손바닥 살을 세게 꼬집었다. 박민정을 당장 폭로하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말해봐요. 어떻게 해야 남준
박민정은 그제야 이지원이 떠나기 전에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다름 아닌 이간질이었다.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유남준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이혼은 우리 둘 사이의 문제인데 굳이 지원이랑 싸워야겠어? 지원이 지금 병원이야.”박민정은 흠칫 놀랐으나 순간 이 모든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알아챘다.그녀는 이지원이 이렇게 비열한 수단으로 자신을 모함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걸 유남준이 철석같이 믿고 있다니...“믿거나 말거나 전 지원 씨랑 딱 한번 만났고 아무 짓도 한 적 없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그 시각 병원.유남준의 표정은 잔뜩 어두웠고 이지원은 이마에 붕대를 감은 채 병상에 누워 있었다.그녀는 박민정과 만난 후, 스스로 머리를 부딪히는 고통을 불사하고 박민정을 모함했다.“대화를 나누고 싶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할 줄은...”이지원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진 뭉치를 꺼내 유남준에게 건넸다.이 사진들은 박민정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 사람을 시켜 찍은 것이다.“더 이상 숨겨주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오빠, 사진 보고 화내지 마요.”사진을 건네받은 유남준은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고 겹겹이 쌓인 사진 속에는 박민정과 연지석 두 사람뿐이었다.유남준은 썸에 가까운 사진 한 장을 보며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이지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이 사진들을 제가 먼저 발견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만약 사진들이 퍼졌다면 정말 큰일 날뻔했어요.”유남준은 마음이 착잡했다.병원에서 나온 그는 블랙 캐딜락에 앉아 사진에 필요한 돈을 이지원에게 보내라며 서다희에게 명령했다.“박민정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봐.”“알겠습니다.”서다희는 즉시 사람을 시켜 알아보았다....박민정은 밤새도록 악몽에 시달렸다.꿈속에서 유남준과 이지원은 결혼하여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또한 지난 몇 년간의 꿈도 꾸었다.유남준은 화가 나서 그녀를 버린 채 해외로 떠났고 아무리 찾으려 해도 만날 수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고급 차 한 대가 그들 앞에 세워지더니 고영란이 두 동생을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어머님.”고영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민정아.”이때, 정수미가 말소리를 듣고 눈을 뜨자 고영란은 빠르게 그녀에게 다가왔다.“사돈.”마침 두 사람은 나이도 비슷했고 같은 또래다 보니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박민정도 옆에서 네 명의 아이와 놀아줬다.“어, 어마마...”두 동생은 아직 말이 서툴렀지만 박민정은 오히려 그게 듣기 좋았다.이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려 확인해 보니 조하랑이었다.“민정아.”“무슨 일이야?”“혹시 지금 우리 집으로 좀 와 줄 수 있어?”떨리는 소리로 묻는 조하랑의 모습에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든 박민정은 빠르게 답했다.“응. 바로 갈게.”그리고 고영란과 정수미에게도 김씨 가문으로 간다고 말하자 박예찬이 냉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엄마,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그래.”그렇게 박민정은 박예찬을 데리고 김씨 가문으로 가는 차에 올라탔다.도착해보니 조하랑은 진작에 대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고 두 사람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무슨 일인지 인우 씨가 하루 종일 혼자 방안에서 꼼짝도 안 하고 있어. 불러도 대답 없고.”“할아버지는?”“오늘 병원에 검사받으러 가셨는데 괜히 할아버지까지 걱정 끼쳐드리고 싶지 않아.”박민정은 일단 조하랑과 같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그리고 김인우의 방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조하랑은 다시 조심스레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인우 씨, 문 좀 열어봐요. 민정이랑 예찬이가 놀러 왔어요.”박민정이 왔다는 말에 방안에서 의자를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그제야 방안의 인기척을 느낀 조하랑은 다시 그에게 물었다.“혹시 무슨 일 있어요?”“한번 나와봐요.”지금까지 김인우와 같이 살면서도 이런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오래 기다린 끝에 마침내 방문이 열리면서 김인우의 모습이 보였는데 다크써클이 턱까지 내려온 얼굴에 수염까지 덥수룩
그러나 정호철은 고민조차 하지 않고 단번에 거절했다.“무슨 말씀이세요? 저도 이제 쉰 살이나 넘는데 어떤 여자가 저한테 시집오고 싶겠어요. 게다가 전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자기만의 가정을 꾸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그러는 정수미는 거의 인생의 대부분을 자기 딸을 찾는 데에 썼다.고민 끝에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솔직하게 고백했다.“호철아, 나 사실 얼마 못 살아.”갑작스러운 말에 정호철은 눈이 휘둥그레졌다.“이게 무슨 말이에요? 왜 얼마 못 살아요? 이상한 생각하지 마세요.”정수미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이상한 생각한 적 없어. 그리고 이건 의사가 해준 말인데 지금 내 몸 상태로는 길어서 2년이래.”정호철은 자기도 모르게 휠체어의 손잡이를 꼭 잡고 분노에 차서 말했다.“분명 돌팔이 의사가 아무 말이나 한 거예요. 이따 제가 다시 가서 물어볼게요. 정 안되면 다른 전문의로 바꾸던지 해요.”그러자 정수미가 그에게 고개를 돌려 되물었다.“의사한테 폐 끼치지 말라던 민정이 말을 벌써 잊었어?”순간 정호철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저는...”“됐어. 사람은 결국에는 다 죽을 텐데 뭐가 무서워? 지금 이렇게 죽는 것도 다 하느님 덕분이야. 결국에는 딸을 찾게 도와주고 날 용서해 줬잖아. 난 이제 죽어도 아무런 여한이 없어.”정수미는 싱긋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지만 정호철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따사로운 햇볕이 두 사람에 비쳤는데 정호철은 따뜻함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그러다가 정수미는 다시 정호철에게 말했다.“아까운 시간을 나같이 곧 죽을 사람에게 낭비하지 말고 너도 이제 너만의 행복을 찾아가.”정호철은 더는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물었다.“정 대표님, 지금도 그분을 못 잊은 거 맞으시죠?”그분이라...순간 정호철의 입에서 나온 그 사람이 머릿속에 떠오른 정수미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부터 떨렸다.“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평생 용서하지 못할 거야.”정호철은 여전히 자신과 그 사람은 전혀 비교
박민정은 순간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왜 갑자기 그만두시는 거예요?”“사실 민정 씨가 기억도 잃고 정 대표님을 원망하고 계셨을 때, 저는 그저 두 분을 돕고 싶어서 지금까지 옆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억도 돌아왔고 또 두 분이 화목하게 지내시는 걸 보니 저도 제가 해야 할 일을 마무리하고 싶어서요.”저 말은 분명 자수하러 가겠다는 뜻이었다.예전에 정호철은 박예찬을 납치하면서 하마터면 박민정과 아이를 죽일 뻔했다.박민정은 모든 기억이 돌아오면서 그때의 일도 생각났다.솔직히 그를 용서한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그리고 지금까지 오른쪽 얼굴에 그날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어 볼 때마다 그 일이 떠오르곤 했다.그러나 이 일이 전부 정호철 잘못이라고는 말하기 힘들었다.“그러면 우리 엄마도 같이 감옥에 가야 할까요?”박민정이 담담하게 되묻자 정호철은 깜짝 놀라 빠르게 답했다.“이 일은 저 혼자만의 잘못이지 정 대표님과는 무관합니다. 그저 속았을 뿐이라고요. 민정 씨, 그분은 만약 자기 목숨과 민정 씨를 바꾼다고 하면 기꺼이 받아들일 겁니다.”“게다가 지금의 몸 상태로는 감옥에서 버티기도 힘들 거예요. 요 몇 년간 너무나 많은 일들을 겪었거든요...”정호철은 정수미 편을 드느라 박민정의 진짜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하여 박민정이 그의 말을 자르고 다시 말해줬다.“정 부장님, 그냥 지금처럼 계속 저희 엄마 곁에 있어 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순간 정호철은 어리둥절해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고 박민정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이 일은 그냥 이렇게 넘어갑시다.”“민정 씨...”정호철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까지 더듬었다.“그런데 얼굴에 난 상처랑... 예찬이는...”“사람은 이기적인 동물이라잖아요. 그때 정 부장님은 윤소현 씨를 돕기 위해 제 얼굴에 상처를 냈고, 지금은 제가 정수미 씨의 딸이란걸 아니까 저한테 사과하는 거겠죠?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제가 정수미 씨의 친딸로서 정 부장님을 감옥에 보내지 않을 겁니다.”이 세
윤소현은 자기 딸을 보러 가겠다고 병문안을 신청했다.그리고 수중에 남아있던 돈으로 변호사도 불렀다.교도소에서는 그녀의 딸이 지금 중병에 걸린 점을 고려하여 하루만 딸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줬다.병원 안.윤소현은 병실 침대에 창백한 얼굴을 한 채 누워있는 아이를 보고 나서도 일말의 애틋함이 아닌 오직 분노만 가득 차올랐다.“다 너 때문이야!”그러다가 갑자기 아이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아이는 아직 너무 어리기도 하고 몸도 허약해 울거나 발버둥조차 치지 않았다.다혜가 그저 유남우의 복수 도구였다는 사실에 윤소현은 이 아이를 당장 죽여도 시원치 않았다.“윤소현 씨.”이때 변호사가 들어오는 모습에 윤소현은 재빨리 손을 거두고 한껏 불쌍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주 변호사님, 어린아이가 지금 옆에서 돌봐줄 사람도 없는데 꼭 저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더 이상 감옥에 있을 수 없어요.”주영훈은 아직 윤소현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병든 아이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쓰이긴 했다.“소현 씨,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꼭 잘 조율해 보겠습니다.”이 뜻은 감형받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예상 밖으로 오늘날 이 아이가 자신에게 도움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윤소현은 속으로 너무 기뻤다.하여 윤소현은 딸을 엄청 아끼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둔갑해 변호사더러 영상 하나를 찍게 하여 모든 사람이 보고 도와주길 바랐다....이 시각, 정수미도 마침 영상을 보고는 한껏 불쾌한 얼굴로 되물었다.“윤소현은 애초에 아이를 싫어하는 인간인데 이게 진심일 리가 없잖아?”길서연도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당연하죠. 이 기회에 동정표나 받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아이만 너무 불쌍해.”정수미는 안타까운 얼굴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이때,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박민정이 문득 호기심에 물었다.“다혜는 윤소현 씨랑 유남우 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아닌가요? 왜 두 사람이 모두 아이를 돌봐주지 않나요?”“민정아, 너 몰랐어? 다혜는 유남우 씨 친딸이 아니라 소현이가
시간이 1분 1초 흘러갔고 윤소현은 점점 버티기 힘들었다.그러나 누구한테도 연락할 사람이 없어 막막했는데 이튿날 어렵게 유남우와 연락이 닿았고 또 직접 면회 오겠다고 했다.윤소현은 자신의 추해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서둘러 엉망진창인 머리를 정리했다.그리고 그의 앞에 마주 앉아 애틋한 얼굴로 말했다.“남우 씨, 이렇게 와줘서 고마워요.”그러나 유남우는 한껏 쌀쌀맞은 얼굴로 한참 동안 가만히 있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고마워할 필요 없어. 오늘 여기에 온 목적은 너한테 꼭 할 말이 있어서니까.”“뭘요?”“예전에 네가 당했던 그 불미스러운 일 말이야.”유남우의 말에 윤소현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지더니 머릿속에 그때의 그 끔찍했던 장면이 또다시 떠올랐다.“남우 씨,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유남우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앉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사실 그 일을 내가 시켰어.”순간 윤소현은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여태껏 범인을 찾아내지 못해 계속 애를 먹고 있었는데 그 주범이 유남우라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그러다가 애써 정신을 차린 뒤 책상을 세차게 두드리며 그에게 따져 물었다.“대체 왜요? 제가 뭘 그리 잘못했는데요? 왜요!”윤소현은 여태껏 친엄마인 한수민, 자신을 키워줬던 정수미한테도 마음을 열지 않았는데 유일하게 유남우한테만은 진심이었다.그런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 칠 줄은 정말 몰랐다.유남우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윤소현의 모습을 보고도 차분하게 답했다.“네가 먼저 나를 건드렸잖아.”“뭐라고요?”윤소현이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제가 뭘 했는데요?”“나한테 약을 타서 먹이려 했단 사실을 내가 모를 것 같아? 그리고 그때 민정이랑 민정이 아들을 해치려 했던 사람이 너란 것도 이미 알게 돼버렸네?”그의 대답에 윤소현은 순간 멍해졌다.“그래서 이 모든 게 다 박민정 때문이었다는 건가요?”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라 두 주먹을 꼭 쥐고 또다시 테이블을 쾅쾅 두드렸다.“왜! 대
박민정은 그저 이지원이 더 이상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만큼만 손을 썼을 뿐인데 지금의 보니 거의 반쯤 미쳐있었다.“유 대표님, 그래도 한때 연인이었던 정을 봐서라도 한 번만 살려주세요.”그녀의 말에 유남준은 순간 두 사람의 과거가 머릿속에 떠올라 짜증이 확 밀려왔다.“이지원, 네가 감히 그 일을 입에 올려?”그리고 온몸에서 살기를 마구 뿜어내며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순간 이지원은 그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 빠르게 해명했다.“저도 둘째 도련님께서 그때 억지로 시킨 일이라 어쩔 수 없었어요. 제가 거절하면 저를 죽인다고 하는데 제가 뭘 어떡해요.”‘또 유남우야?’유남준은 이제 유남우라면 치가 떨리는 사람이었기에 이번 일까지 마무리하면 그와 정리를 잘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남우가 죽이는 건 무섭고 나는 안 무서웠나 봐?”그의 물음에 이지원이 막 변명하려는데 진서연과 정민기가 차를 몰고 퇴근하다가 마침 이지원을 발견했다.“이지원 씨!”진서연은 한껏 분노에 차 씩씩거리며 다가왔다.“또 우리 보스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에요?”그리고 한 발짝 더 다가가 되물었다.“정말 뻔뻔스럽군요.”이지원은 이미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려놓은 상황이라 애써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진 비서님, 뭔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 오늘에는 저 좀 살려달라고 부탁하러 왔어요.”“그런데 그때는 왜 저희 보스를 살려주지 않으셨는지?”진서연의 물음에 이지원은 고개를 떨군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어차피 예전부터 양심 없는 사람이란걸 알았기에 진서연은 더는 상대하기 싫어 유남준을 바라보며 물었다.“유 대표님, 어떻게 처리할까요?”“끌고 나가주세요.”유남준은 박민정의 말대로 진서연에게 맡겼다.“네.”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진서연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바로 끌어내려 하는데, 옆에 서 있던 정민기가 그녀를 말렸다.“제가 할게요.” “괜찮아요. 저도 꽤 힘이 세요.”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진서연을 보고 정민기는 머뭇거리다가 다시 그녀의
정수미는 박민정이 핸드폰을 들고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동의 버튼을 누르지 않는 것이 마치 거절하는 것이라 여겼다.“괜찮아. 추가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돼. 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원래 이런 현대식 연락 수단을 잘 사용하지 않으시니까. 우리가 본가에 가면 직접 이야기하면 돼.”박민정은 거절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단지 지금의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숨을 들이쉬고 한 명씩 차례로 친구 요청을 수락한 뒤 담담하게 말했다.“그냥...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서요.”정수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다들 너무 반가워서 그래. 혹시라도 부담스러운 게 있으면 꼭 말해. 혼자 애쓰지 말고.”박민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부담스럽다기보다는 그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뿐이었다.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었으니까.그렇게 정수미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박민정은 외할머니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녀가 화면을 열자 눈앞에 나타난 것은 송금 내역이었다.4000만 원은 하루 송금 한도였다. 하지만 그것이 곧 할머니가 정한 한도라는 뜻은 아니었다.곧이어 다급한 메시지가 도착했다.[민정아, 하루에 4000만밖에 보낼 수가 없구나. 네 카드 번호를 알려주렴. 외할머니가 용돈을 조금 보내줄게.]4000만 원이 조금이라니.박민정이 답장을 보내기도 전에 이번엔 외할아버지에게서도 같은 금액이 송금되었다. 거기에 친척들까지 더해 방금 추가한 이들로부터 줄줄이 돈이 들어왔는데 그들에게는 그저 숫자에 불과한 듯했다. 한도 때문에 더 보내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불만스러워 보였다.박민정은 재빨리 메시지를 보냈다.[괜찮아요. 정말로 필요 없어요. 저도 돈 있어요.]그러나 정수미는 그녀의 반응을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받아 둬. 많지도 않아. 그저 어른들이 손녀에게 건네는 작은 성의일 뿐이야. 안 받으면 어르신들 오늘 밤 잠 못 주무실걸?”그러고는 덧붙였다.“그리고 말
박민정은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부드럽게 말했다.“주말에 아이들을 데리고 올게요.”정수미는 기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그러고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박민정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민정아, 여기 일 마무리되면 나랑 함께 집에 다녀오자.”그녀가 말한 ‘집’은 서울을 뜻했다.정씨 가문은 진주시에도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진정한 본가와 본사는 서울에 있었다.박민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물었다.“무슨 일이라도 있어요?”정수미는 가볍게 웃었고 옆에 있던 비서가 참지 못하고 대신 설명했다.“아가씨, 대표님께서 정식으로 찾으신 만큼 이제 본가로 가서 가문에 인사드려야죠.”그러나 정수미는 그녀의 말을 막으며 부드럽게 정정했다.“그런 거창한 일은 아니야. 그냥 너의 집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야.”‘너의 집.’그 단어를 박민정은 처음 들어보았다. 지금까지 그녀에게는 박씨 집안, 유씨 집안, 혹은 친정과 시댁이라는 단어만 있었을 뿐이었다. 자신만의 집이란 것이 있었던가.그녀는 깊이 고민하지 않고 단번에 대답했다.“네, 갈게요.”정수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그래, 가면 친척들도 만나야 해. 모두 너를 보고 싶어 하거든.”‘친척들.'그 말을 듣자 박민정은 조금 불안해졌다.그녀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친척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박씨 집안이든 한수민의 집안이든 모두 그녀를 그저 곁다리처럼 대했을 뿐이었다.“그게...”뭔가 말을 꺼내려던 순간 정수미가 핸드폰을 들고 이마를 툭 쳤다.“아이고, 깜빡했네! 너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오래전부터 널 보고 싶어 하셨어. 가족 채팅방에 초대해달라고 하셨는데 내가 지금 추가할게.”박민정은 순간 당황했다. 그러나 그녀의 동요를 알아채지 못한 정수미는 이미 핸드폰을 조작해 그녀를 가족 단톡방에 초대했다.“자, 어서 수락해.”정수미의 들뜬 표정을 보고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박민정은 천천히 버튼을 눌렀다.순간, 수백 명이 있는 거대한 가족 채팅방이 열렸다. 그
여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결코 유남우가 저지른 일들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박민정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이런저런 사정이 있었겠죠. 아마도 스트레스가 너무 컸던 걸 거예요.”홍주영이 애써 변호하듯 말했다. 어쨌든 두 형제 가운데 무엇이든 유남준이 앞서는 상황이었으니까.박민정은 그가 유남우를 두둔하는 걸 보곤 더는 논쟁을 벌이지 않기로 했다. 마침 유남우가 커피숍에서 나오는 것이 보이자 그녀는 짧게 말했다.“그럼, 난 이만 가볼게요.”“네.”홍주영은 그녀가 멀어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고 그때 유남우가 다가왔다.“방금 민정이랑 무슨 얘길 했어?”홍주영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별 얘기 아니었어요.”그러나 유남우의 눈빛에는 묘한 기색이 스쳤다.“가자, 회사로.”“네.”차 안에서 홍주영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도련님, 이번 주말에 고향에 좀 다녀오려고요.”유남우가 의아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무슨 일 있어?”“...약혼하려고요. 가족들이 서두르네요.”순간 차 안이 고요해졌다. 늘 홍주영에게 빨리 결혼하라고 등을 떠밀던 유남우였는데 이번만큼은 의외로 망설이는 기색이었다.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요즘 고씨 가문과의 협력이 중요한 시기인데, 좀 미룰 수는 없겠어?”홍주영은 깜짝 놀랐다.그는 항상 자기 뜻을 존중해 주었는데 이번엔 은근히 만류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연로한 할머니, 그리고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이 떠올랐다.“...이미 다 정해졌어요. 미루기 힘들 것 같아요.”잠시 침묵하던 유남우의 시선이 깊어졌다.홍주영은 그가 늘 하던 말처럼 ‘잘됐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이번엔 묘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곧 담담하게 말했다.“그래, 널 붙잡아 둘 순 없지.”“감사합니다.”홍주영은 차분히 인사했다.“대신, 재정팀에 말해 놓을게. 약혼 선물로 두둑이 챙겨 줄 테니.”홍주영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