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타이르는 게 아니라 ‘교육’이나 다름없었다.유남준의 가족부터 전담 비서 서다희, 심지어 저택의 가정부까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박민정을 교육할 수 있었다.그리고 그런 상황이 닥쳐오면 박민정은 웃으며 고마워해야 한다.하지만 이제 더 이상 이런 억울함을 겪고 싶지 않았다...박민정은 주먹을 불끈 쥐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서다희를 바라봤다.“그 사람이 화를 내든 말든 저랑 무슨 상관이죠? 별일 없으면 이만 가보세요.”서다희는 그녀의 싸늘한 눈빛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정신을 차렸을 땐 문이 굳게 닫혔다.서다희는 처음으로 문전박대를 당했다.지난 몇 년 동안 줄곧 차가운 태도로 무시를 하던 사람이 유남준이었는데 왜 이제는 반대가 된 거지?설마 이제 유남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걸까?...박민정은 서다희가 돌아가면 무조건 유남준에게 일러바칠 것을 알았다.그녀는 지친 채로 소파에 앉아 유남준의 질책을 기다리고 있었고 아니나 다를까 예상한 대로 서다희는 여기서 일어난 일에 대해 덧붙여 과장하며 말했다.강한 바람에 창문이 덜거덕거렸다.박민정은 초여름에도 불구하고 추운지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고 박민정은 한참이 지나서야 그걸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려고 했는데 솔직히 보지 않아도 누가 찾아왔는지 짐작 갔다.남자는 큰 키에 늘씬한 몸매가 더해지자 유난히 말라보였다.박민정은 고개를 들어 깊은 심연 같은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비서님이 얘기해줬어요?”유남준은 싸늘한 얼굴로 사진 뭉치를 박민정의 앞에 던졌다.“체면은 세워주려고 했어.”흠칫 놀란 박민정은 그대로 고개를 숙였고 바닥에는 그녀와 연지석이 찍힌 사진이 가득했으나 일부러 묘해 보이게 찍은 사진 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박민정이 설명하기도 전에 유남준이 말을 덧붙였다.“처음에는 모든 게 오해라고 생각했어. 처음에는 네가 아주 순수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다시 만날 마음도 있었다고...”처음에는? 처
박민정은 무서워하며 조심스럽게 아랫배를 쓰다듬었고 불안감은 한참이 지나서야 잠잠해졌다.“박민정, 나 화나게 하지 마.”유남준은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그의 말이 어렴풋이 들렸던 박민정은 두 눈에 초점을 잃은 채 멍하니 있었다.“내 몸에 영원히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죠?”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탓에 유남준은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이런 짓 하는 거 당신 애인도 알아요? 알게 되면 무조건 화낼 텐데.”예전의 유남준은 차갑긴 해도 배려 깊은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배려조차 없는 무자비한 사람으로 변했다.애인...유남준은 그녀가 가리키는 사람이 이지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네가 연지석이랑 같이 있을 땐 이런 생각 안 해봤어?”마음마저 완전히 짓밟혔다.유남준은 여자 때문에 자신이 속앓이하는 걸 용납하지 못했고 그게 박민정이라면 더더욱 싫었다.그는 조롱하며 입을 열었고 어느새 옷까지 챙겨입었다.“너처럼 뼈만 앙상하게 남은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가 있을 줄은 몰랐네.”박민정은 귀에 이명이 들리고 몸 아래에서 뭔가 흘러나오는 느낌이 들었다...유남준이 떠나기 전 그녀는 마지막으로 한마디 물었다.“남준 씨, 제가 죽으면 슬퍼할 건가요?”죽다니?유남준은 그녀의 질문이 우스운지 대놓고 무시한 후 자기 할 말만 했다.“내일 두원으로 옮겨.”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그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박민정이 사는 집 아래에서 구급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다음날 병원.박민정은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고 연지석이 그녀를 돌보고 있었다.어젯밤, 제때 병원으로 이송된 덕분에 아이는 지킬 수 있었지만 이 일을 통해 그녀는 유남준을 떠나기로 결심했다.띵동.문자 알림음에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해외로 도피한 한수민이 보내온 것이다.「민정아! 살아있다면 최 사장님쪽에 얘기 좀 잘해줘. 나랑 민호 평생 너한테 고마워하며 살게.」박민정은 답장하지 않고 곧바로 메시지를 삭제했다.그녀는 자신이 살아있는 한
김인우는 박민정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병원 직원에게 항상 그녀의 상태를 보고하라고 당부했다.유남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무슨 사고?”“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하게 모르는데 병원에 가보니까 의사 선생님이 사망했다고 하더라.”그 말은 마치 유남준을 향해 내리치는 한줄기의 천둥 같았다.‘죽었다니? 말도 안 돼... 어젯밤까지 멀쩡했잖아.’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유남준은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도대체 무슨 일이야?”“어젯밤에 병원으로 이송됐대. 오늘까지 응급조치를 취하다가 결국에는...”유남준은 아무 말 없이 외투를 집어 들고 집을 나섰다.병원으로 향하는 그의 귓가에는 어젯밤 박민정이 했던 말이 맴돌았다.“남준 씨, 제가 죽으면 슬퍼할 건가요?”이유를 몰랐지만, 점점 숨쉬기 힘들어졌고 셔츠 윗단추 두 개를 풀었는데도 숨이 턱턱 막혔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김인우는 일찌감치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그 사람 지금 어딨어?”유남준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간호사 말로는 이미 데려갔대. CCTV 돌려보니까 연지석이야.”어느덧 새벽 1시가 되었다.김인우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유남준에게 CCTV 영상을 보여주었다.“어젯밤 12시쯤에 병원에 실려 왔는데 과다출혈로...”12시쯤이면 유남준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다.도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과다출혈로 사망했다는 말을 믿지 않았던 그는 재빨리 사람을 시켜 연지석과 박민정의 행방을 조사했다.오늘 밤은 아마도 잠 못 이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김인우는 유남준의 앞을 서성거렸다.“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는 게 말이 돼? 그 귀머거리 또 연기하는 거 아니야?”그와 이런 이야기를 나눌 여유조차 없었던 유남준은 병원 쪽 상황을 알아보라는 말만 남기고 떠났다.유남준이 떠나자마자 병원 측은 김인우에게 박민정의 진료 기록을 전달했고 그는 의자에 앉아 귀찮다는 듯이 펼쳤다.김인우는 박민정이 약을 먹고 자살 시도를 하다가 병원에 이송되어 입
이건 틀림없이 우연의 일치다! 무조건!정말로 박민정이 구한 게 맞다면 어떻게 지금까지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았을까?만약 그녀라면 지난 몇 년 동안 했던 짓들은...김인우는 박민정의 진료 기록을 거두고 사무실로 돌아왔다.그는 밤새 앉아서 생각했다.다음 날 아침, 김인우는 이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지원아, 할 말 있어서 그런데 오늘 잠깐 만날래?”개인 레스토랑의 어느 룸 안.이지원은 한껏 꾸민 채로 들어왔고 웨이터가 다가와 그녀의 코트를 받았다.김인우의 시선은 흉터 하나 없이 매끈한 그녀의 하얀 팔에 머물렀다.4년 전, 그는 교통사고를 당했다.당시 온몸이 피투성이 된 채 의식을 잃고 차 안에 갇혀있었다.그러던 중 어떤 소녀가 위험을 무릅쓰고 깨진 유리창 사이로 손을 뻗어 강제로 문을 열었다.손을 뻗을 때 깨진 유리창에 팔이 깊숙이 긁혔고, 원장은 무조건 상처를 꿰매야 한다고 말했다.그러니 아무리 복원한다고 해도 흔적이 남지 않을 수 없다.김인우의 시선을 마주한 이지원은 찔리는 게 있는 듯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인우 오빠, 할 말 있다고 부르신 거 아니에요? 무슨 일이에요?”김인우는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거두며 진지하게 말했다.“박민정 죽었어.”이지원은 깜짝 놀라더니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언제요? 갑자기요?”너무 놀란 나머지 이 사실이 믿기지 않는 건 맞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쾌감이 밀려왓다.박민정이 죽었다는 건 그녀와 유남준 사이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사라졌다는 걸 뜻했다.“오늘 과다출혈로 죽었어. 응급처치해도 소용없었대.”김인우는 와인을 집어 들고 가볍게 흔들더니 단숨에 들이켰다.그 동시에 그는 유리잔 너머로 웃고 있는 이지원의 모습을 보았으나 이내 사라졌다.“이것 또한 운명이겠죠.”이지원은 한숨을 내쉬었다.“태어날 때부터 남들이 이룰 수 없는 삶을 살고, 집안의 힘과 권력으로 남준 오빠와 강제로 결혼했으니 이제 죽은 것도 업보인 셈이죠.”업보라니?그 말을 들은 김인우는 처음으
이지원이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알고 있을 리가 없다.그러나 워낙 눈치가 빨랐던 그녀는 오늘따라 이상한 김인우의 모습과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자신의 팔을 주시하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뭔가 깨달은 듯 태연하게 맞장구를 쳤다.“당연히 기억하죠. 그때 온몸이 피투성이여서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폭발 직전의 차에서 오빠를 끌어내기 위해 제가 강제로 차 문을 열려다가 팔에 상처가 났잖아요. 오빠는 모르겠지만 그 흉터가 엄청 끔찍했거든요. 다행히 나중에 수술해서 완전히 지워졌지만...”이지원은 팔에 난 상처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왜냐하면 그때 당시 박민정을 발견하고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봤으니까...예전 같으면 김인우는 주저 없이 이지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을 텐데, 지금은 반신반의하고 있다.“무조건 강해야 해요.”그때 그를 구해준 소녀가 수없이 했던 말이다.무서워하지 말라는 상식적인 말이 아니라서 지금까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식사를 마치고 떠나기 전.김인우는 이지원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지원아, 우리가 오랫동안 알고 지냈으니까 내가 어떤 성격인지는 잘 알지? 나는 다른 사람이 날 속이는 게 제일 싫어.”할 말만 하고 먼저 떠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지원은 조금 무서웠다.그러나 박민정은 이미 죽었고 죽은 사람은 말이 없는 법이니 설사 그날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들 잡아떼면 그만이다.저택으로 돌아온 김인우는 사람을 시켜 그 날의 일을 재조사했다.이지원이 처음으로 그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주장했을 때 별다른 조사 없이 그대로 믿었다. 그녀 외에는 아무도 그를 구해줬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그런데 지금은...그게 실수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두원 별장 밖.유남준은 차 안에 앉아 줄줄이 담배를 태웠다.오늘 박민정이 예전에 살았던 곳으로 갔지만 거긴 이미 비어있었다.사람을 시켜 그녀의 행방을 조사하게 했지만, 지금까지 그 어떤 단서도 발견하지 못했다.유남준은 두통을 느끼며 마지막 담배를 껐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차를 단숨에 들이마셨다.“남준아, 정말 죽었으니까 이제 그만하자.”말을 내뱉고 나서야 김인우는 자신이 박민정의 입장을 대신하여 말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유남준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계속 진료 기록을 보고 있었고 거의 다 볼 때쯤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비서 서다희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대표님, 연지석 씨의 행방을 알아냈습니다.”서다희는 재빨리 주소를 보내왔고 그곳은 외딴 지역에 있는 신림현이었다.어디선가 들어본 듯 익숙했지만 정확하게 기억이 떠오르지는 않았다.“왜 그래?”김인우는 아무 말 없는 그의 모습을 보고선 의아해하며 물었고 유남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말을 마친 그는 두말없이 외투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김인우는 어디로 가는지 묻고 싶었지만, 부랴부랴 떠나는 그의 모습을 보고 말을 아꼈다.그렇게 홀로 집에 남겨진 그는 시간도 늦었고 마침 피곤했던 터라 잠깐 이곳에서 눈을 붙이기로 했다....새벽, 유남준은 신림현에 도착했다.흐린 날에 더불어 빗줄기도 점점 거세졌다.서다희는 검은 우산을 펼치며 유남준을 마중했다.“대표님.”“응?”서다희는 유남준과 함께 신림현으로 오는 길에 많은 것들을 설명해 줬다.“조사 결과 이곳에서 연지석 씨의 행방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민정 씨가 어릴적 양어머니와 함께 지냈던 곳이라고 합니다.”양어머니...장대 같은 빗속에서 유남준은 침울한 눈빛을 드리우면서 왜 산림이라는 이름이 익숙하게 느껴졌는지 알아챘다.박민정이 수도 없이 언급했으니까.결혼 3년 동안 명절 때마다 박민정이 눈치를 보며 물었었다.“남준 씨, 볼일 있어서 그러는데 나 잠깐 신림현에 다녀와도 될까?”그때의 유남준은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무슨 일로 신림현에 가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그는 줄곧 무관심하게 답했다.“나한테 일일이 보고할 필요 없으니까 마음대로 해.”그렇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박민정은 매번
“저 집 엄마도 참 불쌍하지. 이제 딸이 없잖아. 애지중지 키우던 애가 이렇게 세상을 떠나버렸네.”“그러게나 말이에요. 민정이 참 똑똑하고 밝은 아이였는데... 이렇게 어린 나이에 죽었다는 게 믿기지 않네요.”“재벌 집에 시집가도 좋은 게 아닌가 봐요. 저번에 민정이 돌아온 거 보니까 딴사람인 줄 알았어요. 어찌나 야위었는지 바람에 날아갈 것 같았다니까요.”“남편이 엄청 잘해준다고 얘기하던데 그것도 아닌가 봐요. 하긴, 3년 동안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춘 적 없으니...”이웃들의 대화를 들은 유남준은 목이 메었다.역시나 하루 종일 기다려도 은정숙과 박민정을 만나지 못했다.유남준은 의자에 기대어 잠깐 눈을 붙였다가 악몽을 꾼 듯 벌떡 일어났다.또 꿈속에 박민정이 나왔다...눈을 떠 주위를 둘러보니 오직 적막과 어둠뿐이었고 박민정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그 순간 유남준은 정말로 그녀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늦은밤 10시.은정숙의 이웃들은 모두 벽돌집 안으로 끌려와 ‘심문’을 당했고 주위에 경호원들로 가득 찬 방은 더욱 비좁아 보였다.“그 사람들 지금 어디 있어요?”이런 상황이 처음이었던 그들은 하나같이 옷깃을 여미고 고개를 숙인 채 감히 유남준을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는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싸늘함을 내뿜었다.“어젯밤에 정숙이 우는 소리가 들려서 찾아와봤는데 민정이가 죽었다고 얘기하더군요.”“젊은 애가 죽은 게 좋은 일은 아니니 그날 밤에 바로 화장하고 묻었어요.”그날 밤에 바로 화장했다니...유남준은 눈앞이 캄캄해졌다.“장례를 치르고 나서 정숙이가 어디로 갔는지는 저희도 잘...”다른 사람들도 그 말을 듣고 맞장구를 쳤다.서다희는 곧바로 연지석의 행방을 물었고 그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어릴 적부터 고아였던 연지석은 1년 전 이곳을 떠난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밤 12시 3분.아직도 거센 비가 내리며 번개가 치고 있었다. 시골길은 진흙으로 변해 이동
그는 잠자고 밥 먹는 것 외에는 밤낮없이 회사에서 일했다.연지석 집에 있던 박민정의 유품들도 김인우를 시켜서 옮겼다.그는 유남준이 어딘가 변했다는 걸 느꼈다.돌아온 이후로 그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듯 유난히 조용했다.참다못한 김인우가 서다희에게 물었다.“요즘 왜 저래요?”서다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잘 모르겠습니다. 도련님, 설마 대표님이 민정 씨를 좋아하게 된 건 아니겠죠?”그 말을 들은 김인우는 이상한 기색을 보였다.“누가 알겠어요?”말을 마친 그는 차에 올라타 기사에게 운전을 부탁한 후 의자에 등을 댄 채 머리가 아픈 듯 지그시 눌렀다.‘만약 남준이가 정말로 박민정을 좋아하게 됐다면 왜 바움 그룹을 인수하지 못해서 안달 난 거지?’바움 그룹은 박민정을 끔찍하게 아끼는 박형식이 피땀 흘려 일어 세운 회사였기에 박민정에게 매우 중요했다.‘만약 남준이가 정말로 박민정을 좋아한다면 굳이 가족들을 괴롭히러 해외로 사람을 보냈을까?’김인우는 박민정이 엄마, 동생과의 관계를 끊었다는 사실을 몰랐고 그들이 박민정의 몇 안 되는 가족이라는 것만 알았다.유남준은 여태껏 자기 여자에게 푸대접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예전에 이지원과 만나고 있었을 때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건 무조건 이지원에게도 선물해 줬다.그러나 오직 박민정에게만 원수를 대하는 듯 가혹하고 잔인한 모습을 보였다.그렇게 생각하던 중 어느덧 럭셔리한 동네에 도착했다.김인우는 차에서 내리며 주위를 힐끗 둘러봤다.“비싸 보이네요.”“평당 수천만 원일 겁니다.”기사가 답했다.김인우에게는 별거 아닌 금액일지 몰라도 일반인이 이런 곳에서 집을 산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가 안으로 들어서자 가정부가 문을 열어줬다.“민정 씨 물건은 모두 안방에 있습니다. 물건만 챙기고 즉시 떠나라고 하셨습니다.”김인우는 가정부를 바라보며 물었다.“그 사람은 지금 어딨죠?”가정부는 퉁명스럽게 답했다.“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워낙 바쁜 사람이라서 당신들을 상대할 시간 따윈
이 시각, 조하랑은 무작정 핸들은 잡았는데 어디로 가면 좋을지 몰랐다.김인우도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 없는 것 같아 그저 도로를 따라 앞으로 계속 직진했다.평소 재잘거리기 좋아하던 김인우는 오늘 유난히 조용했고 그저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조하랑은 가는 도중에도 사실 몇 번이고 그를 위로해 보고 싶었지만 끝내 내뱉지 못하고 말을 다시 삼켰다.딱히 위로할 줄 아는 사람도 아니었기에 김인우가 스스로 이 우울함을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앞으로 조금만 가다가 오른쪽으로 가요.”이때, 김인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네.”그리고 그의 말대로 옆 골목으로 빠지니 어느새 인적이 없는 작은 길이 나왔다.얼마쯤 더 가보니 조하랑은 산 중턱에 있는 묘원을 발견했다.“여기서 세워줘요.”“네.”차가 멈추자마자 김인우가 먼저 내렸고 조하랑은 빠르게 그의 옆으로 다가가 물었다.“여긴 어디예요?”“김씨 가문의 묘지에요.”조하랑은 말없이 그를 따라갔다.그렇게 수많은 묘비를 지나 김인우는 어느 부부의 합장 묘비 앞에 멈춰 섰다.조하랑은 묘비에 걸려있는 왼쪽과 오른쪽 두 장의 흑백 영정사진을 번갈아 보다가 그제야 두 부부의 모습이 김인우와 많이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외모상으로 봤을 때는 겨우 20~30대밖에 안 돼보이는데 생각해 보면 너무 일찍 고인이 된 것 같았다.김인우는 묘비 위의 부모님 사진을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그들을 불렀다.“아빠, 엄마.”조하랑은 가만히 서 있다가 앞으로 한 발짝 내딛으며 인사를 건넸다.“아버님, 어머님, 제 이름은 조하랑이고 인우 씨 아내입니다.”두 사람은 결혼한 후에도 김씨 가문의 묘원에는 와본 적이 없었다.김훈은 그녀가 사람이 많은 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에 추석이나 설 때에도 될수록 친정집에서 가족들과 명절을 쇨 수 있게 배려해 줬다.김인우는 뜬금없는 조하랑의 행동에 어리둥절해서 그녀에게 되물었다.“왜 갑자기...”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하랑이 먼저 말했다.“뭐가
김훈은 박예찬이 일찍 철이 들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생각이 깊은 아이일 줄은 몰랐다.“할아버지가 사실대로 말해주면 절대로 하랑 이모랑 우리 인우한테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알겠지?”박예찬은 머뭇거리다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네.”김훈은 그제야 오늘 병원에서 들은 결과를 말해줬는데 지금 상황이 매우 안 좋다고 했다. 계속 시도 때도 없이 심장이 두근거려서 검사해 보니 심장병이 맞았고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고 했다.그러나 김훈은 여태껏 사람들 앞에서 줄곧 꾀병을 부리는 듯한 행동을 보여줬다.“증조할아버지, 그런데 왜 하랑 이모랑 은우 삼촌한테 비밀로 하나요?”박예찬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김인우가 자기 앞에서 김훈이 얼마나 고집불통인지 불만을 토로하던 모습이 떠올랐다.만약 자기 할아버지가 진짜로 병에 걸렸다는 걸 알면 그런 소리도 못 할 텐데 말이다.그리고 조하랑도 마찬가지다.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김훈에게 알려주면 엄청 기뻐할 텐데 애석하게도 그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바보야, 사람이 늙으면 죽는 게 자연스러운 거야. 그걸 뭣 하러 말해? 말해봤자 괜히 걱정만 시키겠지. 남은 사람이라도 즐겁게 살아야 하지 않겠어?”박예찬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렸다.그러자 김훈이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말했다.“예찬아, 방금 한 약속은 꼭 지켜야 해. 절대로 두 사람에게 말하면 안 된다. 아니면 이 할아버지가 진짜로 화낼 거야.”“네.”박예찬은 자꾸만 목이 메어와 겨우 답했다....다른 한편.조하랑은 김훈의 부탁대로 김인우의 방문 앞까지는 왔지만 뭐라고 문을 두드려야 할지 막막했다.바로 이때, 방문이 갑자기 열리면서 김인우는 또다시 자기 눈앞에 서 있는 조하랑과 마주하게 되었다.“왜요? 또 무슨 일 있어요?”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가 다시 끄덕였다.“네, 아, 아니요.”혼란스러운 그녀의 대답에 김인우가 미간을 찌푸리고 되물었다.“맞다는 거예요, 아니라는 거예요?”“그, 그게 혹시 지금 어디로 가요?
“하랑아, 할아버지가 잊어버리고 너한테 말해주지 않았는데 오늘이 인우 부모님 기일이야.”김훈의 말에 조하랑은 그제야 김인우가 오늘 왜 저리도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는지 이해가 갔다.“지금 생각해 보니 작년 이맘때쯤에도 그랬던 것 같네요.”작년에는 김인우한테 별로 관심이 없었을 때라 물어보지도 않았다.김훈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때 인우가 어리기도 했고 또 부모님의 죽음이 커서도 큰 트라우마로 남았나 봐.”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하랑아, 혹시 우리 인우 좀 도와줄 수 있을까?”“나는 인우가 그래도 널 좋아한다고 생각하거든. 가서 그냥 옆에 있어 주기만 해도 돼. 저렇게 방안에 자신을 가두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서 그래. 아무리 평소에는 까불거리고 말하기 좋아한다고 해도 마음이 아주 여린 아이라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거야.”조하랑은 점점 김인우가 안쓰럽게 느껴졌다.사실 그의 어머니는 어릴 적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그러나 아버지는 항상 엄마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도록 그에게 최선을 다해 아낌없는 사랑을 줬다.“네, 제가 노력해 볼게요.”조하랑의 대답에 김훈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그리고 박예찬의 방에 가서 문을 두드렸다.“예찬아.”“증조할아버지, 들어오세요.”김훈은 박예찬의 말에 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가 활짝 웃으며 물었다.“예찬아, 할아버지가 오늘 무슨 선물을 가져왔게?”김훈은 손을 뒤로 감췄으나 박예찬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바로 답했다.“또 어디서 간식 사 왔어요?”“아이고, 먹는 게 아닌데?”김훈이 장난스레 답했다.“그럼 바둑인가요?”김훈은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 네 연령대에 어울리는 물건이라고 생각해 줄래?”그러나 박예찬은 끝까지 알아맞히지 못했다.김훈은 그제야 싱글벙글해서 손에 감췄던 물건을 내놓았는데 그건 바로 다이아몬드 게임이었다.“우리 보드게임 한판 하자.”박예찬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너처럼 매일 컴퓨터만 보고 있으면 시력 건강에 아주 안 좋아.
그리고 곧바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어차피 조하랑과 엄마의 비밀은 어느 정도 다 알고 있었다.겨우 거실에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조하랑은 더는 못 참고 입을 열었다.“민정아, 나 인우 씨랑 할아버지한테 아직 임신 사실을 말하지 않았어.”“왜?”박민정은 조하랑의 몸을 보더니 이제 어느 정도 임산부인 티가 난다고 생각했다.그러자 조하랑이 머뭇거리며 답했다.“인우 씨 태도가 계속 애매하더라고. 그리고 이런 부잣집 도련님에 대해 솔직히 믿음이 안가.”지금까지 딱 한번 연애를 해봤는데 그때 호되게 당한 뒤로는 아무리 결혼했다고 해도 여전히 남자에 대한 경계심이 높았다.“그런데 이런 일은 숨긴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잖아.”“그러니까.”조하랑은 깊은 한숨을 쉬더니 박민정을 보며 물었다.“민정아, 예찬이가 그러던데 너희 가족 모두 서주에 간다면서? 나도 따라가면 안 될까?”“뭐?”박민정이 깜짝 놀라 그녀에게 되물었다.“서주에 가서 뭐 하려고?”“일단 서주로 일하러 간다고 하고 1년 반 정도 있다가 다시 돌아오려고.”조하랑은 여전히 김인우가 아이를 빼앗아 갈까 봐 두려워했다.그녀의 말에 박민정은 그제야 조하랑이 홀로 아이를 낳은 뒤 다시 돌아올 계획이란 걸 알아챘다.“과연 할아버지께서 널 보내줄까?”“걱정하지 마. 할아버지쯤이야 가볍게 구슬릴 수 있어. 나를 제일 아끼는 분이라 반드시 허락할 거야.”“그래. 결정되면 알려줘.”조하랑은 둘도 없는 친구이기에 박민정도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돕고 싶었다.“민정아, 고마워.”말을 마치자마자 조하랑은 박민정을 꼭 안아줬는데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 박민정은 그녀의 등을 토닥여줬다.“아무리 그래도 태어날 아이의 미래도 잘 생각해 봐야 해. 혹시나 아빠가 필요할 수도 있잖아...”박민정은 여태껏 겪었던 자기 경험담을 모두 말해줬다.그러자 그녀는 박민정을 더욱 꽉 끌어안으며 답했다.“응, 그럴게.”두 사람은 얼마간 이야기를 더 나누다가 박민정이 그만 집에 가려는데 마침 김훈이 돌아왔다.그리고 박민
얼마 지나지 않아 고급 차 한 대가 그들 앞에 세워지더니 고영란이 두 동생을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어머님.”고영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민정아.”이때, 정수미가 말소리를 듣고 눈을 뜨자 고영란은 빠르게 그녀에게 다가왔다.“사돈.”마침 두 사람은 나이도 비슷했고 같은 또래다 보니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박민정도 옆에서 네 명의 아이와 놀아줬다.“어, 어마마...”두 동생은 아직 말이 서툴렀지만 박민정은 오히려 그게 듣기 좋았다.이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려 확인해 보니 조하랑이었다.“민정아.”“무슨 일이야?”“혹시 지금 우리 집으로 좀 와 줄 수 있어?”떨리는 소리로 묻는 조하랑의 모습에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든 박민정은 빠르게 답했다.“응. 바로 갈게.”그리고 고영란과 정수미에게도 김씨 가문으로 간다고 말하자 박예찬이 냉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엄마,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그래.”그렇게 박민정은 박예찬을 데리고 김씨 가문으로 가는 차에 올라탔다.도착해보니 조하랑은 진작에 대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고 두 사람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무슨 일인지 인우 씨가 하루 종일 혼자 방안에서 꼼짝도 안 하고 있어. 불러도 대답 없고.”“할아버지는?”“오늘 병원에 검사받으러 가셨는데 괜히 할아버지까지 걱정 끼쳐드리고 싶지 않아.”박민정은 일단 조하랑과 같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그리고 김인우의 방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조하랑은 다시 조심스레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인우 씨, 문 좀 열어봐요. 민정이랑 예찬이가 놀러 왔어요.”박민정이 왔다는 말에 방안에서 의자를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그제야 방안의 인기척을 느낀 조하랑은 다시 그에게 물었다.“혹시 무슨 일 있어요?”“한번 나와봐요.”지금까지 김인우와 같이 살면서도 이런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오래 기다린 끝에 마침내 방문이 열리면서 김인우의 모습이 보였는데 다크써클이 턱까지 내려온 얼굴에 수염까지 덥수룩
그러나 정호철은 고민조차 하지 않고 단번에 거절했다.“무슨 말씀이세요? 저도 이제 쉰 살이나 넘는데 어떤 여자가 저한테 시집오고 싶겠어요. 게다가 전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자기만의 가정을 꾸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그러는 정수미는 거의 인생의 대부분을 자기 딸을 찾는 데에 썼다.고민 끝에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솔직하게 고백했다.“호철아, 나 사실 얼마 못 살아.”갑작스러운 말에 정호철은 눈이 휘둥그레졌다.“이게 무슨 말이에요? 왜 얼마 못 살아요? 이상한 생각하지 마세요.”정수미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이상한 생각한 적 없어. 그리고 이건 의사가 해준 말인데 지금 내 몸 상태로는 길어서 2년이래.”정호철은 자기도 모르게 휠체어의 손잡이를 꼭 잡고 분노에 차서 말했다.“분명 돌팔이 의사가 아무 말이나 한 거예요. 이따 제가 다시 가서 물어볼게요. 정 안되면 다른 전문의로 바꾸던지 해요.”그러자 정수미가 그에게 고개를 돌려 되물었다.“의사한테 폐 끼치지 말라던 민정이 말을 벌써 잊었어?”순간 정호철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저는...”“됐어. 사람은 결국에는 다 죽을 텐데 뭐가 무서워? 지금 이렇게 죽는 것도 다 하느님 덕분이야. 결국에는 딸을 찾게 도와주고 날 용서해 줬잖아. 난 이제 죽어도 아무런 여한이 없어.”정수미는 싱긋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지만 정호철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따사로운 햇볕이 두 사람에 비쳤는데 정호철은 따뜻함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그러다가 정수미는 다시 정호철에게 말했다.“아까운 시간을 나같이 곧 죽을 사람에게 낭비하지 말고 너도 이제 너만의 행복을 찾아가.”정호철은 더는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물었다.“정 대표님, 지금도 그분을 못 잊은 거 맞으시죠?”그분이라...순간 정호철의 입에서 나온 그 사람이 머릿속에 떠오른 정수미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부터 떨렸다.“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평생 용서하지 못할 거야.”정호철은 여전히 자신과 그 사람은 전혀 비교
박민정은 순간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왜 갑자기 그만두시는 거예요?”“사실 민정 씨가 기억도 잃고 정 대표님을 원망하고 계셨을 때, 저는 그저 두 분을 돕고 싶어서 지금까지 옆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억도 돌아왔고 또 두 분이 화목하게 지내시는 걸 보니 저도 제가 해야 할 일을 마무리하고 싶어서요.”저 말은 분명 자수하러 가겠다는 뜻이었다.예전에 정호철은 박예찬을 납치하면서 하마터면 박민정과 아이를 죽일 뻔했다.박민정은 모든 기억이 돌아오면서 그때의 일도 생각났다.솔직히 그를 용서한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그리고 지금까지 오른쪽 얼굴에 그날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어 볼 때마다 그 일이 떠오르곤 했다.그러나 이 일이 전부 정호철 잘못이라고는 말하기 힘들었다.“그러면 우리 엄마도 같이 감옥에 가야 할까요?”박민정이 담담하게 되묻자 정호철은 깜짝 놀라 빠르게 답했다.“이 일은 저 혼자만의 잘못이지 정 대표님과는 무관합니다. 그저 속았을 뿐이라고요. 민정 씨, 그분은 만약 자기 목숨과 민정 씨를 바꾼다고 하면 기꺼이 받아들일 겁니다.”“게다가 지금의 몸 상태로는 감옥에서 버티기도 힘들 거예요. 요 몇 년간 너무나 많은 일들을 겪었거든요...”정호철은 정수미 편을 드느라 박민정의 진짜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하여 박민정이 그의 말을 자르고 다시 말해줬다.“정 부장님, 그냥 지금처럼 계속 저희 엄마 곁에 있어 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순간 정호철은 어리둥절해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고 박민정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이 일은 그냥 이렇게 넘어갑시다.”“민정 씨...”정호철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까지 더듬었다.“그런데 얼굴에 난 상처랑... 예찬이는...”“사람은 이기적인 동물이라잖아요. 그때 정 부장님은 윤소현 씨를 돕기 위해 제 얼굴에 상처를 냈고, 지금은 제가 정수미 씨의 딸이란걸 아니까 저한테 사과하는 거겠죠?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제가 정수미 씨의 친딸로서 정 부장님을 감옥에 보내지 않을 겁니다.”이 세
윤소현은 자기 딸을 보러 가겠다고 병문안을 신청했다.그리고 수중에 남아있던 돈으로 변호사도 불렀다.교도소에서는 그녀의 딸이 지금 중병에 걸린 점을 고려하여 하루만 딸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줬다.병원 안.윤소현은 병실 침대에 창백한 얼굴을 한 채 누워있는 아이를 보고 나서도 일말의 애틋함이 아닌 오직 분노만 가득 차올랐다.“다 너 때문이야!”그러다가 갑자기 아이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아이는 아직 너무 어리기도 하고 몸도 허약해 울거나 발버둥조차 치지 않았다.다혜가 그저 유남우의 복수 도구였다는 사실에 윤소현은 이 아이를 당장 죽여도 시원치 않았다.“윤소현 씨.”이때 변호사가 들어오는 모습에 윤소현은 재빨리 손을 거두고 한껏 불쌍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주 변호사님, 어린아이가 지금 옆에서 돌봐줄 사람도 없는데 꼭 저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더 이상 감옥에 있을 수 없어요.”주영훈은 아직 윤소현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병든 아이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쓰이긴 했다.“소현 씨,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꼭 잘 조율해 보겠습니다.”이 뜻은 감형받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예상 밖으로 오늘날 이 아이가 자신에게 도움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윤소현은 속으로 너무 기뻤다.하여 윤소현은 딸을 엄청 아끼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둔갑해 변호사더러 영상 하나를 찍게 하여 모든 사람이 보고 도와주길 바랐다....이 시각, 정수미도 마침 영상을 보고는 한껏 불쾌한 얼굴로 되물었다.“윤소현은 애초에 아이를 싫어하는 인간인데 이게 진심일 리가 없잖아?”길서연도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당연하죠. 이 기회에 동정표나 받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아이만 너무 불쌍해.”정수미는 안타까운 얼굴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이때,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박민정이 문득 호기심에 물었다.“다혜는 윤소현 씨랑 유남우 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아닌가요? 왜 두 사람이 모두 아이를 돌봐주지 않나요?”“민정아, 너 몰랐어? 다혜는 유남우 씨 친딸이 아니라 소현이가
시간이 1분 1초 흘러갔고 윤소현은 점점 버티기 힘들었다.그러나 누구한테도 연락할 사람이 없어 막막했는데 이튿날 어렵게 유남우와 연락이 닿았고 또 직접 면회 오겠다고 했다.윤소현은 자신의 추해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서둘러 엉망진창인 머리를 정리했다.그리고 그의 앞에 마주 앉아 애틋한 얼굴로 말했다.“남우 씨, 이렇게 와줘서 고마워요.”그러나 유남우는 한껏 쌀쌀맞은 얼굴로 한참 동안 가만히 있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고마워할 필요 없어. 오늘 여기에 온 목적은 너한테 꼭 할 말이 있어서니까.”“뭘요?”“예전에 네가 당했던 그 불미스러운 일 말이야.”유남우의 말에 윤소현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지더니 머릿속에 그때의 그 끔찍했던 장면이 또다시 떠올랐다.“남우 씨,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유남우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앉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사실 그 일을 내가 시켰어.”순간 윤소현은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여태껏 범인을 찾아내지 못해 계속 애를 먹고 있었는데 그 주범이 유남우라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그러다가 애써 정신을 차린 뒤 책상을 세차게 두드리며 그에게 따져 물었다.“대체 왜요? 제가 뭘 그리 잘못했는데요? 왜요!”윤소현은 여태껏 친엄마인 한수민, 자신을 키워줬던 정수미한테도 마음을 열지 않았는데 유일하게 유남우한테만은 진심이었다.그런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 칠 줄은 정말 몰랐다.유남우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윤소현의 모습을 보고도 차분하게 답했다.“네가 먼저 나를 건드렸잖아.”“뭐라고요?”윤소현이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제가 뭘 했는데요?”“나한테 약을 타서 먹이려 했단 사실을 내가 모를 것 같아? 그리고 그때 민정이랑 민정이 아들을 해치려 했던 사람이 너란 것도 이미 알게 돼버렸네?”그의 대답에 윤소현은 순간 멍해졌다.“그래서 이 모든 게 다 박민정 때문이었다는 건가요?”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라 두 주먹을 꼭 쥐고 또다시 테이블을 쾅쾅 두드렸다.“왜!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