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은 무서워하며 조심스럽게 아랫배를 쓰다듬었고 불안감은 한참이 지나서야 잠잠해졌다.“박민정, 나 화나게 하지 마.”유남준은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그의 말이 어렴풋이 들렸던 박민정은 두 눈에 초점을 잃은 채 멍하니 있었다.“내 몸에 영원히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죠?”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탓에 유남준은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이런 짓 하는 거 당신 애인도 알아요? 알게 되면 무조건 화낼 텐데.”예전의 유남준은 차갑긴 해도 배려 깊은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배려조차 없는 무자비한 사람으로 변했다.애인...유남준은 그녀가 가리키는 사람이 이지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네가 연지석이랑 같이 있을 땐 이런 생각 안 해봤어?”마음마저 완전히 짓밟혔다.유남준은 여자 때문에 자신이 속앓이하는 걸 용납하지 못했고 그게 박민정이라면 더더욱 싫었다.그는 조롱하며 입을 열었고 어느새 옷까지 챙겨입었다.“너처럼 뼈만 앙상하게 남은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가 있을 줄은 몰랐네.”박민정은 귀에 이명이 들리고 몸 아래에서 뭔가 흘러나오는 느낌이 들었다...유남준이 떠나기 전 그녀는 마지막으로 한마디 물었다.“남준 씨, 제가 죽으면 슬퍼할 건가요?”죽다니?유남준은 그녀의 질문이 우스운지 대놓고 무시한 후 자기 할 말만 했다.“내일 두원으로 옮겨.”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그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박민정이 사는 집 아래에서 구급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다음날 병원.박민정은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고 연지석이 그녀를 돌보고 있었다.어젯밤, 제때 병원으로 이송된 덕분에 아이는 지킬 수 있었지만 이 일을 통해 그녀는 유남준을 떠나기로 결심했다.띵동.문자 알림음에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해외로 도피한 한수민이 보내온 것이다.「민정아! 살아있다면 최 사장님쪽에 얘기 좀 잘해줘. 나랑 민호 평생 너한테 고마워하며 살게.」박민정은 답장하지 않고 곧바로 메시지를 삭제했다.그녀는 자신이 살아있는 한
김인우는 박민정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병원 직원에게 항상 그녀의 상태를 보고하라고 당부했다.유남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무슨 사고?”“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하게 모르는데 병원에 가보니까 의사 선생님이 사망했다고 하더라.”그 말은 마치 유남준을 향해 내리치는 한줄기의 천둥 같았다.‘죽었다니? 말도 안 돼... 어젯밤까지 멀쩡했잖아.’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유남준은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도대체 무슨 일이야?”“어젯밤에 병원으로 이송됐대. 오늘까지 응급조치를 취하다가 결국에는...”유남준은 아무 말 없이 외투를 집어 들고 집을 나섰다.병원으로 향하는 그의 귓가에는 어젯밤 박민정이 했던 말이 맴돌았다.“남준 씨, 제가 죽으면 슬퍼할 건가요?”이유를 몰랐지만, 점점 숨쉬기 힘들어졌고 셔츠 윗단추 두 개를 풀었는데도 숨이 턱턱 막혔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김인우는 일찌감치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그 사람 지금 어딨어?”유남준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간호사 말로는 이미 데려갔대. CCTV 돌려보니까 연지석이야.”어느덧 새벽 1시가 되었다.김인우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유남준에게 CCTV 영상을 보여주었다.“어젯밤 12시쯤에 병원에 실려 왔는데 과다출혈로...”12시쯤이면 유남준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다.도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과다출혈로 사망했다는 말을 믿지 않았던 그는 재빨리 사람을 시켜 연지석과 박민정의 행방을 조사했다.오늘 밤은 아마도 잠 못 이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김인우는 유남준의 앞을 서성거렸다.“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는 게 말이 돼? 그 귀머거리 또 연기하는 거 아니야?”그와 이런 이야기를 나눌 여유조차 없었던 유남준은 병원 쪽 상황을 알아보라는 말만 남기고 떠났다.유남준이 떠나자마자 병원 측은 김인우에게 박민정의 진료 기록을 전달했고 그는 의자에 앉아 귀찮다는 듯이 펼쳤다.김인우는 박민정이 약을 먹고 자살 시도를 하다가 병원에 이송되어 입
이건 틀림없이 우연의 일치다! 무조건!정말로 박민정이 구한 게 맞다면 어떻게 지금까지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았을까?만약 그녀라면 지난 몇 년 동안 했던 짓들은...김인우는 박민정의 진료 기록을 거두고 사무실로 돌아왔다.그는 밤새 앉아서 생각했다.다음 날 아침, 김인우는 이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지원아, 할 말 있어서 그런데 오늘 잠깐 만날래?”개인 레스토랑의 어느 룸 안.이지원은 한껏 꾸민 채로 들어왔고 웨이터가 다가와 그녀의 코트를 받았다.김인우의 시선은 흉터 하나 없이 매끈한 그녀의 하얀 팔에 머물렀다.4년 전, 그는 교통사고를 당했다.당시 온몸이 피투성이 된 채 의식을 잃고 차 안에 갇혀있었다.그러던 중 어떤 소녀가 위험을 무릅쓰고 깨진 유리창 사이로 손을 뻗어 강제로 문을 열었다.손을 뻗을 때 깨진 유리창에 팔이 깊숙이 긁혔고, 원장은 무조건 상처를 꿰매야 한다고 말했다.그러니 아무리 복원한다고 해도 흔적이 남지 않을 수 없다.김인우의 시선을 마주한 이지원은 찔리는 게 있는 듯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인우 오빠, 할 말 있다고 부르신 거 아니에요? 무슨 일이에요?”김인우는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거두며 진지하게 말했다.“박민정 죽었어.”이지원은 깜짝 놀라더니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언제요? 갑자기요?”너무 놀란 나머지 이 사실이 믿기지 않는 건 맞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쾌감이 밀려왓다.박민정이 죽었다는 건 그녀와 유남준 사이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사라졌다는 걸 뜻했다.“오늘 과다출혈로 죽었어. 응급처치해도 소용없었대.”김인우는 와인을 집어 들고 가볍게 흔들더니 단숨에 들이켰다.그 동시에 그는 유리잔 너머로 웃고 있는 이지원의 모습을 보았으나 이내 사라졌다.“이것 또한 운명이겠죠.”이지원은 한숨을 내쉬었다.“태어날 때부터 남들이 이룰 수 없는 삶을 살고, 집안의 힘과 권력으로 남준 오빠와 강제로 결혼했으니 이제 죽은 것도 업보인 셈이죠.”업보라니?그 말을 들은 김인우는 처음으
이지원이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알고 있을 리가 없다.그러나 워낙 눈치가 빨랐던 그녀는 오늘따라 이상한 김인우의 모습과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자신의 팔을 주시하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뭔가 깨달은 듯 태연하게 맞장구를 쳤다.“당연히 기억하죠. 그때 온몸이 피투성이여서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폭발 직전의 차에서 오빠를 끌어내기 위해 제가 강제로 차 문을 열려다가 팔에 상처가 났잖아요. 오빠는 모르겠지만 그 흉터가 엄청 끔찍했거든요. 다행히 나중에 수술해서 완전히 지워졌지만...”이지원은 팔에 난 상처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왜냐하면 그때 당시 박민정을 발견하고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봤으니까...예전 같으면 김인우는 주저 없이 이지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을 텐데, 지금은 반신반의하고 있다.“무조건 강해야 해요.”그때 그를 구해준 소녀가 수없이 했던 말이다.무서워하지 말라는 상식적인 말이 아니라서 지금까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식사를 마치고 떠나기 전.김인우는 이지원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지원아, 우리가 오랫동안 알고 지냈으니까 내가 어떤 성격인지는 잘 알지? 나는 다른 사람이 날 속이는 게 제일 싫어.”할 말만 하고 먼저 떠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지원은 조금 무서웠다.그러나 박민정은 이미 죽었고 죽은 사람은 말이 없는 법이니 설사 그날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들 잡아떼면 그만이다.저택으로 돌아온 김인우는 사람을 시켜 그 날의 일을 재조사했다.이지원이 처음으로 그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주장했을 때 별다른 조사 없이 그대로 믿었다. 그녀 외에는 아무도 그를 구해줬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그런데 지금은...그게 실수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두원 별장 밖.유남준은 차 안에 앉아 줄줄이 담배를 태웠다.오늘 박민정이 예전에 살았던 곳으로 갔지만 거긴 이미 비어있었다.사람을 시켜 그녀의 행방을 조사하게 했지만, 지금까지 그 어떤 단서도 발견하지 못했다.유남준은 두통을 느끼며 마지막 담배를 껐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차를 단숨에 들이마셨다.“남준아, 정말 죽었으니까 이제 그만하자.”말을 내뱉고 나서야 김인우는 자신이 박민정의 입장을 대신하여 말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유남준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계속 진료 기록을 보고 있었고 거의 다 볼 때쯤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비서 서다희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대표님, 연지석 씨의 행방을 알아냈습니다.”서다희는 재빨리 주소를 보내왔고 그곳은 외딴 지역에 있는 신림현이었다.어디선가 들어본 듯 익숙했지만 정확하게 기억이 떠오르지는 않았다.“왜 그래?”김인우는 아무 말 없는 그의 모습을 보고선 의아해하며 물었고 유남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말을 마친 그는 두말없이 외투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김인우는 어디로 가는지 묻고 싶었지만, 부랴부랴 떠나는 그의 모습을 보고 말을 아꼈다.그렇게 홀로 집에 남겨진 그는 시간도 늦었고 마침 피곤했던 터라 잠깐 이곳에서 눈을 붙이기로 했다....새벽, 유남준은 신림현에 도착했다.흐린 날에 더불어 빗줄기도 점점 거세졌다.서다희는 검은 우산을 펼치며 유남준을 마중했다.“대표님.”“응?”서다희는 유남준과 함께 신림현으로 오는 길에 많은 것들을 설명해 줬다.“조사 결과 이곳에서 연지석 씨의 행방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민정 씨가 어릴적 양어머니와 함께 지냈던 곳이라고 합니다.”양어머니...장대 같은 빗속에서 유남준은 침울한 눈빛을 드리우면서 왜 산림이라는 이름이 익숙하게 느껴졌는지 알아챘다.박민정이 수도 없이 언급했으니까.결혼 3년 동안 명절 때마다 박민정이 눈치를 보며 물었었다.“남준 씨, 볼일 있어서 그러는데 나 잠깐 신림현에 다녀와도 될까?”그때의 유남준은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무슨 일로 신림현에 가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그는 줄곧 무관심하게 답했다.“나한테 일일이 보고할 필요 없으니까 마음대로 해.”그렇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박민정은 매번
“저 집 엄마도 참 불쌍하지. 이제 딸이 없잖아. 애지중지 키우던 애가 이렇게 세상을 떠나버렸네.”“그러게나 말이에요. 민정이 참 똑똑하고 밝은 아이였는데... 이렇게 어린 나이에 죽었다는 게 믿기지 않네요.”“재벌 집에 시집가도 좋은 게 아닌가 봐요. 저번에 민정이 돌아온 거 보니까 딴사람인 줄 알았어요. 어찌나 야위었는지 바람에 날아갈 것 같았다니까요.”“남편이 엄청 잘해준다고 얘기하던데 그것도 아닌가 봐요. 하긴, 3년 동안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춘 적 없으니...”이웃들의 대화를 들은 유남준은 목이 메었다.역시나 하루 종일 기다려도 은정숙과 박민정을 만나지 못했다.유남준은 의자에 기대어 잠깐 눈을 붙였다가 악몽을 꾼 듯 벌떡 일어났다.또 꿈속에 박민정이 나왔다...눈을 떠 주위를 둘러보니 오직 적막과 어둠뿐이었고 박민정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그 순간 유남준은 정말로 그녀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늦은밤 10시.은정숙의 이웃들은 모두 벽돌집 안으로 끌려와 ‘심문’을 당했고 주위에 경호원들로 가득 찬 방은 더욱 비좁아 보였다.“그 사람들 지금 어디 있어요?”이런 상황이 처음이었던 그들은 하나같이 옷깃을 여미고 고개를 숙인 채 감히 유남준을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는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싸늘함을 내뿜었다.“어젯밤에 정숙이 우는 소리가 들려서 찾아와봤는데 민정이가 죽었다고 얘기하더군요.”“젊은 애가 죽은 게 좋은 일은 아니니 그날 밤에 바로 화장하고 묻었어요.”그날 밤에 바로 화장했다니...유남준은 눈앞이 캄캄해졌다.“장례를 치르고 나서 정숙이가 어디로 갔는지는 저희도 잘...”다른 사람들도 그 말을 듣고 맞장구를 쳤다.서다희는 곧바로 연지석의 행방을 물었고 그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어릴 적부터 고아였던 연지석은 1년 전 이곳을 떠난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밤 12시 3분.아직도 거센 비가 내리며 번개가 치고 있었다. 시골길은 진흙으로 변해 이동
그는 잠자고 밥 먹는 것 외에는 밤낮없이 회사에서 일했다.연지석 집에 있던 박민정의 유품들도 김인우를 시켜서 옮겼다.그는 유남준이 어딘가 변했다는 걸 느꼈다.돌아온 이후로 그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듯 유난히 조용했다.참다못한 김인우가 서다희에게 물었다.“요즘 왜 저래요?”서다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잘 모르겠습니다. 도련님, 설마 대표님이 민정 씨를 좋아하게 된 건 아니겠죠?”그 말을 들은 김인우는 이상한 기색을 보였다.“누가 알겠어요?”말을 마친 그는 차에 올라타 기사에게 운전을 부탁한 후 의자에 등을 댄 채 머리가 아픈 듯 지그시 눌렀다.‘만약 남준이가 정말로 박민정을 좋아하게 됐다면 왜 바움 그룹을 인수하지 못해서 안달 난 거지?’바움 그룹은 박민정을 끔찍하게 아끼는 박형식이 피땀 흘려 일어 세운 회사였기에 박민정에게 매우 중요했다.‘만약 남준이가 정말로 박민정을 좋아한다면 굳이 가족들을 괴롭히러 해외로 사람을 보냈을까?’김인우는 박민정이 엄마, 동생과의 관계를 끊었다는 사실을 몰랐고 그들이 박민정의 몇 안 되는 가족이라는 것만 알았다.유남준은 여태껏 자기 여자에게 푸대접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예전에 이지원과 만나고 있었을 때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건 무조건 이지원에게도 선물해 줬다.그러나 오직 박민정에게만 원수를 대하는 듯 가혹하고 잔인한 모습을 보였다.그렇게 생각하던 중 어느덧 럭셔리한 동네에 도착했다.김인우는 차에서 내리며 주위를 힐끗 둘러봤다.“비싸 보이네요.”“평당 수천만 원일 겁니다.”기사가 답했다.김인우에게는 별거 아닌 금액일지 몰라도 일반인이 이런 곳에서 집을 산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가 안으로 들어서자 가정부가 문을 열어줬다.“민정 씨 물건은 모두 안방에 있습니다. 물건만 챙기고 즉시 떠나라고 하셨습니다.”김인우는 가정부를 바라보며 물었다.“그 사람은 지금 어딨죠?”가정부는 퉁명스럽게 답했다.“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워낙 바쁜 사람이라서 당신들을 상대할 시간 따윈
김인우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소리쳤고 비서는 당황하며 물었다.“도련님, 왜 그러세요?”김인우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질문 하나만 할게. 상대방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는 걸 모르고 그동안 계속 괴롭혔어. 왜 상대방은 구해줬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을까? 그걸 말한다면 괴롭힘을 멈출 수도 있을 텐데?”그 말을 들은 비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아주 간단해요. 첫 번째 이유는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커요. 은혜를 갚을 줄 모르는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은 거죠. 두 번째는 누군가를 구해준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아 말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거죠.”누군가의 목숨을 구해준 게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걸까?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동안 박민정은 유남준에 대한 헌신과 그의 주변 모든 사람에 대한 헌신을 스스로 언급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어쩌면 정말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김인우는 순간 목에 가시가 걸리듯 아팠다....해운 별장.김인우는 돌아오자마자 마당에 앉아있는 익숙한 모습을 보았다.“인우 오빠, 드디어 왔네요.”이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김인우를 향해 걸어갔다.그는 익숙한 사람이 왠지 낯설게만 느껴졌다.이지원은 가까이 다가오더니 손을 들어 능숙하게 셔츠 단추를 잠갔고 언뜻 보면 마치 연인 같았다.“왜 이렇게 꼼꼼하지 못해요? 매번 이래...”이지원이 화난척하며 얘기하자 김인우는 싸늘하게 그녀의 손을 밀어냈다.“무슨 일로 왔어?”이지원은 원하는 게 있을 때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아부하는 사람이었다.그녀는 김인우의 말투가 싸늘해진 걸 눈치채지 못했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남준 오빠가 요즘 박민정 찾으러 다닌다면서요? 어떻게 되고 있어요?”김인우는 순진한 척하는 그녀의 두 눈을 응시했다.“박민정은 죽었다고 내가 얘기해줬잖아? 도대체 뭘 두려워하는 거야?”이지원은 흠칫하더니 곧바로 설명을 덧붙였다.“그냥 궁금해서 여쭤봤어요. 박씨 가문은 저한테
회사 직원들이 하나둘 퇴근하고 주영리는 박민정에게 고객을 위해 차를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사이 그녀는 박민정의 자리로 가서 그녀가 마시던 물컵에 무언가를 몰래 넣었다.차를 준비하고 돌아온 박민정은 별 의심 없이 물을 마신 뒤 자리를 정리하며 퇴근 준비를 했다.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주영리는 여유롭게 말했다.“민정 씨, 잠시만 기다려요. 곧 다른 고객들이 올 거예요. 혹시 민정 씨 도움이 필요할지도 몰라.”“알겠습니다.”박민정은 주영리의 지시를 거절하기 어려워 자리로 돌아와 기다리기로 했다.그 사이 주영리는 회사 입구로 내려가 최 사장을 맞이했다.“최 사장님, 오셨군요! 어서 들어오세요.” 그녀가 밝은 미소로 맞았다.최 사장은 그녀 뒤를 둘러보며 물었다.“민정 씨는? 준비됐다더니?”주영리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아직 위층에 있어요. 아직 신입이라 부끄러움을 많이 타거든요. 곧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호텔도 이미 준비해뒀어요. 근처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곳으로요.”최 사장의 얼굴에 즉시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역시 주 비서야.”“별말씀을요.” 주영리는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위층에서는 박민정이 물을 마신 뒤 갑자기 극심한 졸음이 몰려왔다. 그녀는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생각하며 고객이 오기 전 잠시 책상에 엎드려 눈을 붙였다.잠시 후 주영리와 최 사장이 위층으로 올라왔다. 그들은 책상에 엎드려 잠든 박민정을 발견했고 주영리는 최 사장에게 조용히 손짓하며 그녀를 데리고 내려가 차에 태웠다.반쯤 깨어난 박민정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지만 눈을 뜨려고 애써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희미하게 들려오는 남자와 여자의 대화를 들었다.“어떻게 이렇게 깊이 자는 거지?”“깊이 안 자면 사장님께서 어떻게 즐기실 수 있겠어요?” 주영리는 웃으며 대답했는데 그 말에는 죄책감 따위는 전혀 없었다.그녀의 마음속에는 복수의 쾌감만이 가득했다. 그녀는 박민정에게 자신을 건드린 대가가 무엇인지 똑똑히 알게 해주고 싶었다
다음 날 아침, 박민정은 소파에서 일어나자마자 다리 통증이 한결 나아진 것을 느꼈다.간단히 약을 먹고 연고를 발라 통증을 다스린 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제야 유남우가 전화를 여러 번 했고 문자도 몇 개 남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박민정은 즉시 그에게 전화를 걸었고 금세 연결되었다.“민정아, 왜 이제야 전화를 받아?” 유남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미안해요. 어제 너무 피곤해서 그대로 잠들어버렸어요. 전화 소리를 못 들었네요.”박민정은 어제 다리가 아팠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그제야 유남우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괜찮아. 아무 일 없으면 됐어. 나 오늘 저녁 비행기로 돌아갈 거야.”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급히 말했다.“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 전 정말 괜찮으니까 일에 더 집중해요.”자신이 그의 일에 방해가 될까 걱정이었다.“일이 중요하다는 거 알아. 하지만 너도 중요해.” 유남우는 그녀의 말을 끊고 단호히 말했다.“더 이상 말하지 말고 저녁에 보자.”“알겠어요.”박민정은 결국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전화를 끊고 나서 박민정은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는데 전보다 상태가 더 나빠 보였다.‘오빠가 오면 이걸 보고 또 걱정하겠지.’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상처 부위에 숨을 불어넣었다.“빨리 나아야 할 텐데.”그렇게 그녀는 간단히 씻고 아침을 먹은 뒤 절뚝거리며 회사에 갔다.한편, 유남우는 해외 출장을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윤소현은 끝까지 그를 붙잡아두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며칠 전 누군가 유남우에게 보낸 메시지가 그녀의 신경을 건드린 탓인지 그녀는 출국하자마자 사람을 시켜 유남우를 따라가게 했다.“남우 씨를 잘 감시하세요. 특히 남우 씨 곁에 있는 여자들, 그게 누구든 보고하세요. 알겠죠?” 윤소현은 전화기 너머로 단호히 말했다.“네. 걱정 마세요.”“좋아요.”그녀는 전화를 끊으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해외 회사.박민정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보니 책상 위에 작은 봉투가 놓여 있었다.
박민정은 매니저의 말을 듣고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매니저님, 이게 농담인가요? 만약 회사가 직원들에게 고객 접대를 의무로 여기고 그런 자리에서 신체 접촉까지 용인한다면 저는 이런 회사에 남을 생각이 없습니다.”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단호히 자리를 떠났다.매니저는 황당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박민정이 이렇게 단호하고 고집스러울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한편 최 사장은 박민정이 떠나는 것을 보고 의아해하며 물었다.“뭐야? 그냥 가버린 거야?”매니저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신입이라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것 같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을 불러 같이 술자리를 즐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하지만 최 사장은 테이블 주위의 다른 여직원들을 훑어보더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무슨 소리야? 아무나 데려와서 우리를 대충 넘어가려는 거야?”매니저는 난처해졌다. 이미 박민정이 돌아올 리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미모가 뛰어난 주영리를 향해 손짓했다.“주 비서, 잠시 이쪽으로 와볼래?”주영리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마자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 박민정을 험담했던 것은 완전히 잊은 듯 얼굴 가득한 부끄러운 미소를 띠고 매니저 쪽으로 다가갔다.“무슨 일이세요, 매니저님?”매니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사장님들께 술자리 접대를 좀 부탁할게. 특히 최 사장님께 신경 좀 써주면 좋겠어.”주영리는 기다렸다는 듯 흔쾌히 대답했다.“알겠습니다.”그녀는 능숙하게 사장들에게 아첨하며 분위기를 띄우기 시작했고 사장들의 불쾌한 손길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최 사장에게 의도적으로 다가가 그의 옆자리에 앉았지만 최 사장은 주영리에게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주 비서, 아까 무대에서 춤췄던 신입, 그 사람과 친한가?” 최 사장이 이렇게 묻자 주영리는 순간 얼굴이 굳었다. 원래는 별로 친하지 않다고 대답하려 했지만 최 사장의 눈빛을 보고 곧 말을 바꿨다.“같은 부서 동료입니다. 그리고 지금 제 부하직원이기도
주영리는 그 순간 무용 선생님에게 뺨이라도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감히 그럴 수 없었다. 선생님 뒤에는 매니저 남편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결국 그녀는 억울함을 꾹 삼키며 모든 잘못을 무대 위에 있는 박민정에게 돌렸다.‘좋아, 아주 좋아!’‘네가 날 이렇게 몰래 괴롭히다니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주영리는 이를 악물며 속으로 다짐했다.한편, 박민정은 이 모든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무용 선생님이 자신을 위해 주영리에게 억울한 일을 시켰다는 것도, 그녀가 몇 날 며칠을 공연을 위해 헛수고했다는 것도 알 리 없었다.무대 위에서 박민정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우아하고 고혹적인 춤사위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녀의 매혹적인 자태에 눈길을 떼지 못하는 사장들이 많았다.“저 주연 무용수는 누구야? 정말 예쁘게 생겼네. 몸매도 완벽하고.”“우리 회사 직원입니다. 이름은 박민정이라고 합니다.” 술을 따르던 매니저가 재빨리 대답했다.“오호, 공연 끝나면 우리 테이블로 와서 같이 밥 먹으라고 해.”한 사장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매니저는 이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알겠습니다. 공연 끝나면 바로 데려오겠습니다.”춤은 금세 끝났고 박민정은 고통을 꾹 참으며 무대를 내려왔다. 하지만 매니저가 그녀를 붙잡았다.“박 비서, 몇몇 사장님들이 박 비서 재능을 매우 높이 평가하셨어. 그분들과 식사를 같이 해.”매니저는 부드럽게 말을 꺼냈지만 박민정은 그의 진짜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녀는 단호히 거절했다.“죄송하지만 동료들과 함께 있는 게 편합니다. 게다가 저는 말주변이 없어서 실수라도 하면 안 될 것 같아요.”하지만 매니저는 물러서지 않았다.“걱정 마. 박 비서는 예쁘니까 뭔가 잘못 말해도 사장님들이 화낼 일 없을 거야. 오히려 더 좋아하시겠지.”그러면서 음성을 낮춰 말을 덧붙였다.“만약 이번에 잘하면 복귀 후 바로 정규직으로 전환될 거야. 보너스도 넉넉히 챙겨줄 거고.”매니저는 박민정을 억
“왜요?” 주영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주연 무용수를 다시 맡기 위해 그렇게 애를 썼는데 이제 와서 필요 없다니.“더 잘 추는 사람을 찾았거든.” 무용 선생님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사실 선생님은 박민정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싶었을 뿐이었지만 이 말이 주영리의 분노를 더욱 부추겨 이후 박민정이 큰일을 당할 뻔한 계기가 되고 말았다.“그 사람이 누구인데요?” 주영리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잠시 후 무대에 오를 거야. 보면 알겠지만 정말 주 비서가 따라갈 수 없는 실력이더라.” 무용 선생님은 담담하게 말했다.주영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지금껏 동료들에게 자신이 주연 무용수로 공연한다고 떠벌렸는데 이게 모두 헛소리가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도대체 누가 그녀를 대신하게 됐는지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호텔 밖에서는 고급 차들이 하나둘씩 도착하며 적지 않은 기업인들이 차에서 내렸다.박민정의 회사 사장인 제임스는 특별히 중요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은은한 고급스러움을 자랑하는 한 대의 링컨 차량이 천천히 호텔로 들어섰다.이를 본 제임스의 눈이 반짝였고 그는 직접 차량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유 대표님.”차에서 내린 사람은 유남준이었다. 그는 제임스와 간단히 악수를 나눴다.“유 대표님, 조용히 대화 나눌 수 있는 전용 룸을 준비해뒀습니다. 함께 가시죠.”“좋습니다.”제임스는 유남준을 모시고 2층의 특별실로 향했다.이를 지켜본 회사 직원들은 사장이 젊은 외국 남성에게 이렇게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의아했다.“저 사람 누구야? 사장님이 저렇게 친절한 건 처음 보는데?”“몇 년 전 협력 파트너라고 하던데, 엄청난 실력을 가진 사람이래.” 누군가가 대답했다.“외모도 멋지네. 설마 대기업 대표일 줄이야.”직원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말이 오갔다.그때 박민정이 그들 앞을 지나며 대화 내용을 듣게 되었고 무심코 유남준이 사라져간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은 어딘가 익숙했지만 곧 시야에서 사
박민정은 주영리가 이렇게 서두를 줄 몰랐지만 더 숨길 필요는 없다고 판단해 자신의 상태를 솔직히 설명했다.“그럼 공연 당일에는 무용이 가능하다는 말이지?”“네, 당일에는 문제없을 것 같아요. 다만, 그전까지는 연습이 힘들 것 같아요.”무용 선생님은 그 말을 듣고 한숨 돌렸다.“그럼 괜찮아. 공연만 잘하면 돼. 민정 씨 연습 수준이라면 당일엔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거야.”그녀는 확신했다. 몇 날 며칠을 연습하지 않아도 박민정의 실력은 주영리보다 월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알겠습니다. 그럼 이틀간만 쉬겠습니다.”“그래, 푹 쉬어.”박민정은 문득 떠오른 듯 말을 덧붙였다.“하지만 부탁 하나만 드릴게요. 주 비서님에겐 다른 무용수를 섭외했다고만 말해주세요.”무용 선생님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왜?”박민정은 자신의 부상 이유와 병원에 가게 된 사정을 솔직히 털어놓았다.이야기를 들은 선생님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뭐? 주영리가 그런 짓을 했단 말이야? 아까 와서 주연 무용수 자리를 달라고 하더니, 민정 씨가 오후에 넘어졌다길래 이상하다 싶었어. 주영리의 품성이 이렇게 바닥일 줄은 몰랐네!”선생님은 화가 나면서도 박민정의 부탁을 이해했다. 그녀 역시 주영리가 또 다른 수를 쓰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그 후, 박민정은 온라인으로 이틀간의 휴가를 신청했다.주영리는 박민정이 부상을 당했으니 굳이 더 괴롭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휴가를 승인하고는 집으로 돌아가 춤 연습에 몰두했다.그녀는 반드시 공연 당일 모두를 놀라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날 회사의 중요한 인사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무용 선생님은 그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정의감이 강한 그녀는 주영리에게 전화를 걸었다.“주 비서, 민정 씨가 부상으로 무대에 오를 수 없게 됐어. 주 비서가 주연 무용수를 맡을 수 있을까?”주영리는 일부러 망설이는 척했다.“저요? 선생님, 예전에 제가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나섰다가 공연을
병원에서 의사는 박민정의 다리를 엑스레이로 찍고 정밀 검사를 진행했다.“다리 관절 부상이 꽤 심합니다. 최소 일주일은 쉬셔야 하고 되도록 움직이지 않는 게 좋겠어요.”“그 정도로 심각한가요?”박민정은 단순히 넘어져서 조금 아플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놀라며 물었다.“네, 관찰 결과 그렇습니다.”“하지만 며칠 후에 무용 공연이 있는데 빨리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조급한 표정으로 묻는 그녀의 목소리에 간절함이 묻어났다.무용 선생님이 자신을 회사에 추천한 만큼 그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더구나 오랜 시간 연습한 공연을 이렇게 포기하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안 됩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이지만 근육과 뼈에 무리가 갔습니다. 집에서 잘 쉬셔야 해요. 움직임은 최소화하셔야 하고 춤은 절대 안 됩니다.”의사는 약을 처방하며 그녀에게 집에서 충분히 쉬라고 당부했다.병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박민정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다리 관절을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느껴졌다.그때 주영리가 전화를 걸어왔다.“민정 씨, 병원에서는 뭐래요? 많이 다친 건 아니죠? 보니까 꽤 심하게 넘어졌던데. 상태가 심각하면 며칠 휴가 내고 푹 쉬어요.”주영리의 목소리는 겉으론 걱정하는 듯했지만 속내를 들킨 듯한 뻔뻔함이 느껴졌다.박민정은 손을 꽉 쥐며 차분히 대답했다.“좀 심각하긴 해요. 의사가 될 수 있으면 움직이지 말라고 했어요. 그래도 출근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어머, 큰일이네! 다리를 다쳤는데 그럼 주연 무용수는 어쩌죠?”주영리는 놀란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이제 박민정이 빠지면 자신이 주연으로 무대에 설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저도 모르겠네요.”박민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아마 다른 사람으로 바꿔야 할 것 같아요.”주영리는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며 더욱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요, 이런 기회는 또 있을 테니까요! 내가 선생님께 잘 얘기해볼게요. 민정 씨는 푹 쉬고
해외.지난번 박민정이 회사 직원들에게 한 방 먹인 후, 직원들은 더 이상 자신의 일을 그녀에게 떠넘기지 않았다.하지만 그와 동시에 박민정은 회사 직원들 사이에서 철저히 고립되었다.모두가 그녀를 외면했으며 주영리는 그녀에게 가장 어려운 업무만 할당했다.“민정 씨, 당신 능력 좋잖아요? 능력 있는 사람이 더 일하는 게 당연하죠. 설마 이번에도 사장님께 가서 이건 내 일이 아니라고 할 거예요?”주영리는 비꼬는 어투로 말했다.다른 인턴이었다면 벌써 그녀의 이런 태도에 못 이겨 회사를 떠났을 것이다.하지만 박민정은 달랐다. 주영리가 아무리 어려운 업무를 맡겨도 그녀는 끝내 방법을 찾아 일을 완벽히 마무리했다.사내 동료들은 그녀를 외면했지만 아래층에서 오후에 진행되는 댄스 연습에서는 다른 부서 직원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다들 박민정의 성격을 좋아했고 그녀와도 꽤 좋은 관계를 맺었다.주영리는 이런 사실을 알 리 없었다. 그녀는 그저 박민정이 스스로 지쳐 나가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박민정은 오히려 더욱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며 모두를 놀라게 했다.사장은 그녀를 몇 차례나 칭찬했다.“실제로 민정 씨는 인턴 같지 않아. 정직원보다 훨씬 뛰어나니까.”그 말을 들을 때마다 주영리의 마음은 질투로 불타올랐다.이제 곧 국내 손님들을 맞이할 행사를 준비해야 했고 직원들의 업무도 점점 바빠졌다.주영리는 박민정이 참여하는 댄스 연습을 보러 갔다가 그녀가 주연 무용수로 가장 앞에서 춤추는 모습을 목격했다.백조처럼 눈에 띄는 그녀의 모습에 주영리는 속이 끓어올랐다.만약 박민정이 이번에 주연으로 나서고 국내 사장들에게 눈에 띄게 된다면 그녀는 단숨에 회사에서 입지를 다질 것이 분명했다.사실 주영리는 주연 자리에 별다른 욕심이 없었다. 하지만 박민정이 자신을 대신하게 된 걸 깨닫자 깊은 후회와 함께 분노가 치밀었다.“원래 이 자리는 내 거였어!”주영리는 무용 선생님을 찾아가 따졌다.“분명 예전에 제가 주연 하기로 했잖아요. 그런데 왜
유남준은 잠든 아들이 꿈속에서조차 자신을 두려워하며 박민정을 그리워한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바늘로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박윤우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힌 뒤 다시 서재로 향했다.여전히 찾아내지 못한 박민정의 행방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그녀 없이 다른 일에 집중하기 힘들었고 피곤함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침대에 누워도 그의 눈은 감기지 않았다.왜 이렇게 긴 시간 동안 그녀를 찾을 수 없던 걸까?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설마 정말 죽었단 말인가?‘죽음’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칠 때마다 그는 단호히 부정했다.‘아니야. 민정이는 절대 죽지 않았어. 만약 민정이가 정말 죽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그렇게 새벽까지 뒤척이다 겨우 몇 시간 눈을 붙이고 아침이 되자 전화벨 소리가 그의 짧은 잠을 깨웠다.전화를 보니 서다희의 이름이 떠 있었다. 그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민정이에 대한 소식이라도 있어?”서다희는 상사의 질문에 솔직히 답했다.“아직 없습니다.”“그럼 무슨 일이야?”“제임스 씨 기억하시죠? 다음 주 해외에서 대표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네요. 해외 무역 관련해서 논의하고 싶답니다.”“좋아. 일정 잡아.”전화를 끊기 전 유남준은 다시 물었다.“아직 조사하지 않은 곳은 얼마나 남았지?”세상은 참 크다고 하면 작다고 하면 작았다.서다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전 고민했다. 모든 곳을 다 찾으려면 평생이 걸릴지도 몰랐다.“대부분의 국가들은 이미 확인했지만 이번에 제임스 씨 고향은 아직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겸사겸사 그쪽도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좋아. 그리고 다른 지역도 인력을 더 투입해.”“알겠습니다.”전화를 끊은 뒤 더 이상 잠들 수 없었던 그는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바로 움직였다.그의 얼굴은 한 해 동안 한층 늙어 보였고 깔끔하게 정리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박윤우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그는 보모에게 아이를 잘 돌봐달라고 당부한 뒤 집을 나섰다.그가 향한 곳은 IM이 아닌 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