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경호원들이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노인을 밖으로 내던졌다. 김인우는 이 사람이 최명길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그저께 유남준은 해외로 도피한 박 씨네 모자를 찾아냈고 박민정이 시집갈 사람이 연지석이 아닌 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래서 그는 직접 사람을 시켜 이 노인을 납치했다.하지만 하루 내내 이 노인을 협박해도 박민정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유남준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박민정과 결혼할 거예요?”노인은 온몸에 상처를 안고 황급히 절을 했다.“아니요, 아니요. 두 번 다시 그러지 않겠습니다...”경호원들이 노인을 끌고 나갔고 그 뒤는... 굳이 보지 않아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눈에 보였다.유남준의 표정에서는 그 어떤 희로애락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김인우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아까는 박민정을 감싼 거야?”김인우는 순간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그의 말에 반박하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내 생각에 굳이 민정이를 겨냥할 필요 없다고 생각해.”그 말에 유남준은 손에 들고 있던 펜을 꽉 움켜쥐었고 순간 손등의 핏줄이 선명히 보였다. “민정이가 먼저 시작한 거야.”유남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인우야, 너는 민정이가 정말 죽었다고 생각해? 욕 많이 먹을수록 오래 산다는 말 못 들었어? 민정이는 절대 죽지 않았어!”사실 유남준은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휴대전화 알람이 울리자 유남준은 고개를 들어 시간을 한 번 힐끗 보더니 김인우만 그곳에 남기고 혼자 퇴근해 버렸다. 텅 빈 사무실에서 김인우는 손에 있는 옥패를 꽉 움켜쥐었고 얼마나 힘을 세게 주었는지 손바닥에 피가 날 정도였다.밖으로 나온 그는 길에 쓰러진 채 가까스로 숨을 쉬고 있는 최명길을 보고 옆 비서에게 한마디 했다.“데려가.”두원 별장.고요한 집안에서 거실 구석에 있는 빨간색 상자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유남준은 제시간에 집에 돌아와 박민정이 자주 앉던 소파에 앉았다.모든
전담 비서 서다희는 이들의 대화를 듣고 바로 제지했다. 오지랖이 넓은 비서여서가 아니라 눈치가 빠르기 때문이었다.요즘 유남준은 일 말고도 박민정을 찾고 연지석의 회사를 제압하는 데 힘쓰고 있었다. 이 모든 일련의 행동들로 서다희는 유남준이 박민정을 싫어하는 게 아님을 알았다.시간은 계속 흘렀지만 유남준은 박민정을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눈이 펑펑 내리는 섣달 그믐날 밤, 예전의 박민정이라면 분명 유남준과 같이 본가로 내려가 그의 가족과 함께 섣달 그믐날을 보냈을 것이었다.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유남준이 혼자 본가로 돌아갔다.박민정이 금방 떠났을 때 그의 웃고 떠들던 모습과 달리 지금은 혼자 앉아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점점 차가워졌고 주위만 가면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느낌에 도저히 다가가기 어려웠다. 그는 본가에 갔다가 얼마 있지 않고 다시 두원 별장으로 돌아왔다. 두원 별장 밖에도 어느새 새하얀 눈이 가득 쌓여 온 세상을 한층 더 아름답게 만들었다.하지만 유남준은 왠지 뭔가 부족한 느낌을 받았다.그는 창가 앞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혼자 중얼거렸다. “박민정, 내 눈앞에 나타나기만 해봐!”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고영란이 화려한 차림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남준아, 너 대체 왜 그래? 너 진짜 민정이가 죽은 이후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유남준은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그는 여태껏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으니까!그때 고영란은 그동안 참아왔던 말을 그에게 물었다.“혹시 민정이를 진짜로 좋아하게 된 거야? 그런데 이제 곁에 없잖아...”유남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좋아하면 안 돼요?”고영란이 더 말을 하려 하자 유남준은 바로 그녀를 내쫓았다.그녀가 떠나자마자 유남준은 거실에 혼자 앉아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분명 히터를 틀었음에도 유남준은 온몸이 차갑게 느껴졌고 입으로는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박민정은 창밖의 흰 구름을 바라보며 4년 전을 떠올렸다.그때 절망에 빠져있던 그녀는 연지석의 도움을 받아 죽은 척하고 해외로 나온 뒤 쌍둥이를 낳았다.모든 것이 순탄했지만 안타깝게도 올 3월, 빠른 출산으로 늘 시름시름 앓던 막내아들 박윤우가 조혈모세포 악성 혈액질환인 속칭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의사는 박민정에게 제대혈 조혈모세포 이식을 통해 혈액질환을 치료할 수 있다고 말했다.지난 몇 달 동안 박민정은 유남준의 정자를 채취할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치료는 빠를수록 좋다는 말에 박민정은 직접 진주에 가서 정자를 채취하기로 했다.윤우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절대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었고 유남준을 찾는 일도 절대 없었을 것이다.비행기가 이륙하기 전, 박민정은 절친 조하랑의 문자를 받았다.[요즘 좀 바쁘니까 내가 돌아온 후에 너와 같이 유남준을 처리할게. 이지원 그 여자도.]조하랑은 박민정이 대학을 다닐 때 친해진 친구로 졸업 후 그녀는 해외 유학을 하러 외국으로 갔고 박민정은 결혼하면서 그녀와 연락이 뜸해졌다.그리고 4년 전 박민정이 에스토니아에 도착했을 때 우연히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박민정은 그녀의 문자를 보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답장했다.[좋아.]답장을 마친 그녀는 이륙하기 위해 휴대전화를 비행기 모드로 전환했다.진주는 여름만 되면 큰비가 끊임없이 내렸다.박민정이 비행기에서 내릴 때는 이미 저녁 7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곳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황홀함이 가득했다.공항을 나서자 럭셔리한 링컨 한 대가 시간 맞춰 박민정의 앞에 멈춰 섰다.운전기사는 차에서 내려 공손히 차 문을 열었다.“민정 씨, 어서 앉으세요.”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부탁드릴게요.”운전기사는 부드럽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민정 씨는 우리 선생님의 친구예요. 사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선생님께서 아가씨 숙소를 이미 마련해 두셨어요.”기사가 말하는 선생님이라는 사람은 다름 아닌 연지석
“엄마, 도착했어? 내가 없어도 자기 전에 따뜻한 우유 한 잔 꼭 마시고 자. 그리고 비타민 먹는 거 까먹지 말고... 저녁에 이불 꼭 덮고 자야 해. 안 그러면 추워. 그리고 엄마 캐리어에 윤우가 제일 좋아하는 인형 넣어놨어. 잠이 안 오면 인형이 우리라고 생각하고 안고 자.”박민정의 이 큰아들은 말을 하기 싫을 때면 한마디를 하지 않다가도 일단 말문이 트이기만 하면 어른처럼 잔소리가 끝이 없다. '참... 도대체 누구를 닮았는지...'가끔 박민정은 예찬이가 자기보다 더 어른 같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알았어, 우리 아들 말 엄마가 다 메모했어.”예찬이의 말이 끝났지만 박민정은 전화 끊기가 아쉬웠다.우울증, 난청, 게다가 임신까지 겹친 상황에서 금방 해외에 나왔을 때, 그녀는 자주 잠을 설쳤다. 잠도 제대로 못 잤고 밥도 넘어가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병원을 가지 않았지만 병이 저절로 호전되었다.아이들이 점차 크고 두 녀석이 걸음마를 하고 말을 할 때쯤이 되자 녀석들은 그녀를 돌보기 시작했다.두 아이는 그녀에게 마치 인생의 구세주 같은 존재였다.우유를 마시고 비타민을 먹은 박민정은 캐리어를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안에는 아이 냄새가 은은하게 배어있는 토끼 인형 두 마리가 있었다.이날 밤, 박민정은 침대에 누워 편안하게 잠을 잤다.다음 날 아침 일찍, 박민정은 문자 한 통을 받았다.[유남준이 오늘 돌아와. 오후 9시, 그랜드 호텔에서 열리는 자선 경매에 나갈 거야.]이곳으로 돌아오기 전, 박민정은 일찌감치 국내 사람들에게 유남준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그가 해외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최근에 돌아오는 것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복귀할 줄은 몰랐다.4년 동안, 비록 그녀는 천천히 모든 것을 내려놓았지만 다시 적극적으로 이 남자에게 다가갈 생각을 하니 순간 마음이 매우 복잡해졌다.저녁 9시, 자선 파티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유남준처럼 권력 있고 힘 있는 사람은 룸이 따로 준비되어 있었고 굳이 나서서 가
아래층에 있는 박민정은 앉기 전부터 위층에 있는 가장 럭셔리하고 경매장이 제일 잘 보이는 룸을 눈여겨보고 있었다.룸에 별도로 설계된 유리는 바깥에서는 안에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지만 안쪽에 있는 사람은 바깥을 보일 수 있도록 했다.박민정은 일부러 룸에서 제일 잘 보이는 곳을 골라 앉았다. 그리고 금액을 부를 때 일부러 무심코 고개를 들어 위층 룸을 바라보았다.그저 가볍게 흘끗 시선을 스친 그녀의 눈에는 한치의 감정도 엿볼 수 없었다.룸 안에 있는 유남준의 전담 비서인 서다희는 바로 그녀를 알아봤다.“민정 씨!”유남준은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서다희에게 지시를 내렸다.“경매, 멈춰.”“네.”아래층에 있던 비서는 지시를 받고 경매를 포기했다.사람들은 오늘 돈 자랑 대회를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유남준이 먼저 포기한 것을 보고 다들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들은 눈앞의 이 여자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감히 유남준의 물건을 빼앗으려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유남준이 한발 물러서기까지 하다니...자선 경매가 끝난 후, 경매 행사 규정상 낙찰인은 돈을 내고 물건을 가져가야 했다.경매장 무대 뒤로 간 박민정은 홀로 소파에 앉아 있는 유남준과 마주쳤다.훤칠한 키에 검정색 슈트를 입고 있는 그는 귀티를 물씬 풍기고 있었고 잘생기고 차가운 얼굴과 까만 눈동자는 박민정이 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그녀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박민정!”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박민정을 바라보며 그녀를 불렀다.유남준은 그녀가 왜 죽은 척하고 4년 동안 사라졌는지, 4년 동안 그녀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는지, 또 무엇을 했는지 설명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4년 동안 그녀는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원래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 않던 그녀는 화장을 곱게 하고 있었고 어두운색의 옷만 입던 그녀는 화사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유남준은 자기 아내에게 이런 면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그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박민정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천천
박민정은 유남준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아 수표 한 장을 꺼내 그에게 쥐여주었다.“돈은 냈으니 물건은 제가 가져갈게요.”손에 수표가 쥐어진 유남준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자리를 떠나는 박민정을 보며 옆에 있는 비서에게 분부했다. “잘 지켜봐.”...9호 공관.숙소로 돌아온 박민정은 베란다에서 술을 한잔 또 한잔 들이켰다.예전에 그녀는 술을 즐겨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해외에 나간 후 혼자 힘들어 인생이 버겁다고 느껴질 때마다 알코올은 마치 마취약과 같이 그녀를 마비시킬 수 있었다. 두 아이가 태어난 후, 그들과 함께하면서 그녀는 점차 나쁜 습관을 고쳤다. 하지만 오늘 유남준을 만나고 나니 그녀는 또 한 번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다...기억상실증... 사실 거짓말은 아니다. 해외로 나간 후, 그녀는 육체적으로 너무 큰 부담을 느꼈고 우울증과 임신까지 겹치면서 확실히 기억력이 많이 안 좋아졌고 은정숙마저도 간헐적으로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그동안 그녀는 무척 괴로웠다. 그녀의 기억은 가끔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인 어린 시절로, 가끔은 학창시절로, 또 가끔은 유남준과 결혼했을 때로 돌아갔었다.한 번은 유남준과 이혼한 것을 잊고 죽은 척하며 출국한 것도 잊은 채 갓 결혼했던 그 시간의 두 사람만 기억한 적도 있었다.그래서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귀국 비행기 티켓을 사서 유남준을 찾아가려고 했었다.그날, 그녀는 하마터면 진주까지 올 뻔했지만 다행히 공항에서 유남준과 이지원이 함께 파티하는 사진을 보고 두 사람이 끝났다는 것을 뒤늦게 기억해냈다.뒤죽박죽된 기억 때문에 짧은 시간 안에 희망과 절망을 번갈아 경험하는 그런 느낌은 오직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고통이었다.그녀는 유남준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지난 4년 동안 유남준이 그녀를 찾아다닌 이유는 그녀를 그저 놓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그녀에게 남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래서 이번에 그녀는 기억을 잃은 척하며 신체접촉이 아닌
낮은 목소리로 애교를 부리는 아들 모습이 영상 너머로 보였다. 박예찬과 똑같은 모습을 한 사내아이는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박민정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순간 박민정의 마음은 눈 녹듯이 사르르 녹아내렸다.“윤우야, 우리 아들.”박윤우는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엄마, 어젯밤에 왜 나에게 전화 안 했어? 잘 자라고 얘기 안 했잖아.”큰아들 박예찬이 잔소리가 많은 따뜻한 아들이라면 막내아들은 애교는 많지만 늘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는 딱 그 나이 또래에 맞는 정상적인 아이였다. 물론 이것은 박민정 자신의 판단일뿐이다. “미안해, 엄마가 까먹었어. 우리 윤우 화내지 마.”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한 윤우가 백혈병 진단까지 받자 박민정은 윤우를 유달리 더 보살폈다.박윤우는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응, 이번만 봐주는 거야. 다음에는 절대 안 돼.”어린 아들의 애교에 박민정은 순간 마음속의 먹구름이 싹 걷히는 듯했다.그녀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할머니랑 형은?”그러자 윤우는 화난 척하며 대답했다.“할머니와 형 물어볼 줄 알았다니까! 그럴 줄 알았으면 엄마에게 연락 안 했을 거야.”순간 말문이 막힌 박민정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알았어, 엄마 안 물어볼게.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까 일찍 쉬어. 잘자.”전화를 끊은 박윤우는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고 우울한 눈빛으로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쌍둥이 형 박예찬을 보며 말했다.“엄마가 또 술 마셨어.”동생의 말을 들은 박예찬은 노트북을 닫았다.“아무래도 내가 먼저 진주로 가서 엄마를 돌봐야 할 것 같아.”“응.” 형의 말에 윤우는 눈을 꼭 감으며 대답했다. 자기 몸도 건강하다면 형과 같이 돌아가서 얄미운 아빠를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하지만 두 녀석의 속셈을 모르고 있는 박민정은 세수한 후, 예찬이가 챙겨준 토끼 인형 두 마리를 안고 침대에 누웠다.낯선 침대 때문인지, 아니면 오늘 유남준을 만난 것 때문인지 박민정은 잠이 쉽게 들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 일찍
유남준은 순간 침을 꿀꺽 삼켰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굳이 그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다희는 그의 마음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유앤케이 그룹의 사업부에서는 한 거물급 인사가 유앤케이 그룹의 희망 프로젝트, 즉 무료 자선 사업을 돕기 위해 거액을 투자할 것이라는 정보가 돌고 있었다.회사 안의 일부 사람들은 이 일로 열심히 토론을 펼치고 있었다. “도대체 어느 거물급 인사가 이런 호구 짓도 마다하지 않는지 궁금하네요.”“누가 알겠어요. 돈을 너무 많이 벌어서 쓸 데가 없나 보죠.”“해외에서 왔다고 들었어요...”이때 박민정이 탄 차가 유앤케이 그룹의 본사 앞에 막 도착했다.우뚝 솟은 빌딩을 바라본 박민정은 유앤케이 그룹이 4년 전보다 훨씬 더 크게 발전했다는 것을 느꼈다. 이런 거침없는 발전은 유남준의 천재적인 능력과 유씨 집안 자본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녀도 4년 동안 퇴폐적인 생활을 해 온 것은 아니었다. 연지석의 도움으로 그녀만의 회사를 차렸고 약간의 돈도 벌었다.진주로 돌아오기 전 그녀는 이곳저곳의 모든 정보를 끌어모아 준비를 철저히 했다. 그래서 유앤케이 그룹이 전국적으로 희망사업을 벌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투자 협력에 나섰던 것이다.협력이라는 이름으로 그녀는 유남준에게 다가갈 명분을 얻었다.어제 자선 경매에 나온 것은 사실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투자 협력만으로는 유남준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었다.어떻게든 유남준의 흥미를 불러일으켜 자신을 만나러 나오게 하는 게 목적이었다.유앤케이 그룹의 담당자들은 일찌감치 일 층 로비 앞에 대기하고 있었고 박민정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고는 도착한 사람이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라는 것에 순간 다들 어리둥절해졌다.“박 사장님이세요?”박민정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왜요, 뭐가 문제가 있나요?”담당자의 의아한 얼굴을 본 박민정은 그동안 서로 주고받았던 대화 내용을 그에게 보여줬다. 그러자 그 담당자는 연신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얼굴도 이쁘고
박민정은 오늘의 유남우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뭐가 문제인지 명확히 알 수 없었다.“남... 남우 오빠...”그녀는 다시 한 번 그를 불렀다.“왜 그래요? 어디 아픈 건 아니죠?”그녀는 말하면서 손을 들어 그의 이마에 손등을 댔다.유남준의 깊은 눈동자 속엔 격렬한 감정의 파도가 일었다. 그의 목구멍은 마치 날카로운 가시가 걸린 것처럼 답답하고 쓰렸다.박민정이 손을 내리려는 순간, 그는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너 지금 뭐라고 불렀어? 남우 오빠?”그의 눈가는 점점 더 붉어졌다.지난 1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박민정은 그의 강렬한 눈빛에 놀라 움찔했다.그리고 며칠 전 꾼 꿈이 문득 떠올랐다. 꿈속에서 유남우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도 지금처럼 이상한 분위기를 풍겼다.“오빠,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그녀는 어쩐지 마음이 불안해졌다.유남준은 그녀의 손을 더욱 세게 쥐며 말했다.“난 유남우가 아니야. 난 유남준이야!”“너... 날 잊어버린 거야?”그의 목소리는 거칠고 쉰 듯했다.박민정은 그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뭐라고요?”유남우가 아니라고?그렇다면 어째서 두 사람이 똑같이 생겼단 말인가?박민정의 머릿속은 완전히 혼란스러웠다.유남준은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당기며 다시 물었다.“말해봐, 지난 1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왜 나를 잊었어? 왜 유남우만 기억하는 거지?’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도 황당했다.박민정은 그의 말투와 분위기를 보니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그가 진짜로 유남우가 아니라면...그녀는 황급히 그의 손에서 벗어나며 말했다.“그럼 제가 사람을 잘못 봤나 봐요. 죄송합니다.”그리고 덧붙였다.“어젯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박민정은 몇 걸음 물러나더니 어쩔 줄 몰라하며 말을 이었다.“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 저...”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남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길게 뻗은 다리로 그녀 앞으
“여보세요, 혹시 민정 씨 남자친구 되세요?” 주영리는 일부러 친절한 척하며 물었다.유남우는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의심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민정이의 핸드폰이 왜 당신에게 있죠? 누구시죠?”“아, 저는 민정 씨와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동료예요. 오늘 야근하다가 핸드폰 벨소리가 들려 혹시 무슨 급한 일인가 해서 받았습니다.”주영리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이어갔다.“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세요? 혹시 민정 씨가 부탁해서 전화하신 건가요?”“민정이가 집에 오지 않았어요. 혹시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유남우의 이마에는 주름이 깊게 패였다.박민정은 밤늦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자신에게 먼저 연락을 했을 것이다.그는 불길한 느낌에 휩싸였다.“집에 안 갔다고요? 혹시 최 사장님이랑 놀러 간 거 아니에요?”주영리는 의미심장하게 말을 흐렸다.“오늘 퇴근 후에도 우리 회사 고객인 최 사장님과 함께 있던데요. 제가 두 사람이 같이 나가는 걸 봤거든요.”그녀는 이리저리 돌려 말했는데 박민정의 명예를 훼손하려는 속셈이었다.“민정 씨가 말하지 않았나요? 전 다 얘기한 줄 알았는데요. 그래도 남녀가 단둘이 밤늦게까지 같이 있다니... 혹시...”주영리는 일부러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아니겠죠? 그래도 민정 씨는 그런 사람 같진 않은데요.”유남우는 그녀의 말을 듣고도 흔들리지 않았다. 주영리가 노리는 속셈을 정확히 간파했기 때문이다.그는 박민정을 믿었다.“그 최 사장이라는 분 연락처를 알려주실 수 있어요?”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주영리는 잠시 당황했지만 여전히 빈정거리는 태도로 대답했다.“저 같은 작은 직원이 고객님의 연락처를 어떻게 알겠어요? 하지만 민정 씨는 워낙 예쁘고 사교적이니 아마 알고 있을 거예요.”이어 그녀는 비아냥거리듯 말했다.“전에 민정 씨가 최 사장님이 자기에게 얼마나 잘해주는지 자랑하는 걸 들었거든요.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아마 별일 없을 겁니다.”유남우는 더는 말을 섞지 않고 전화를 끊
박민정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최 사장의 손에서 벗어나 유남준에게 몸을 던졌다.그녀의 온기가 그의 품에 닿는 순간, 유남준은 깊은 충격 속에 얼어붙었다.온 몸에 힘이 풀린 박민정은 그의 품에 기대며 안도감을 느꼈다. 마치 자신을 지켜줄 안전한 성채를 찾은 기분이었다.“두 분, 아는 사이인가요?”최 사장은 눈앞의 큰 키에 잘생긴 남자를 바라보며 주춤했다. 그의 강렬한 아우라에 기가 눌려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유남준은 품에 안긴 박민정을 다시 한번 꼭 안으며 현실임을 확인했다. 그런 뒤에야 차가운 눈빛으로 최 사장을 노려보며 낮게 말했다.“꺼져.”최 사장은 그의 압도적인 기세에 겁을 먹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떠나며 그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변명했다.“오해입니다, 정말 오해였어요.”비록 유남준이 누군지 몰랐지만 이 호텔의 최고급 스위트룸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의 격을 알고 있던 최 사장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상대임을 깨달았다.‘박민정 같은 평범한 직원이 이런 남자와 인연이 있을 줄이야...’ 그는 뒷모습이 초라하게 사라졌다.최 사장이 떠난 후, 유남준은 자신의 품에서 안도하며 깊이 잠든 박민정을 보았다. 그는 그녀를 소중히 들어올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침대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눕힌 그는 그녀가 혹시라도 깰까 봐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그런 다음 침대 옆에 앉아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1년이었다.그는 드디어 그녀를 찾았다.박민정은 전혀 변한 게 없었고 여전히 예전 그대로였다.유남준은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혹시라도 이 모든 게 꿈일까 봐, 아니면 또다시 그녀가 환영처럼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다행히 그녀의 체온이 그의 손끝에 또렷이 전해졌다. 그녀는 환상이 아니었고 진짜로 그의 앞에 있었다.그러나 여전히 긴장을 놓을 수 없던 그는 핸드폰을 꺼내 서다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어서 이리로 와.”서다희는 전화를 받자마자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급히 달려왔다. 방
지난번 춤을 추었을 때 박민정은 두꺼운 화장을 해서 얼굴의 흉터를 가렸다.하지만 오늘은 화장기 하나 없는 상태였다. 그녀의 얼굴에 선명히 드러난 흉터를 보고 최 사장은 그녀의 턱을 거칠게 잡아들며 혀를 찼다.“참 안타깝네. 이렇게 예쁜 얼굴이 어떻게 이렇게 망가질 수가 있지?”그는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덧붙였다.“완벽한 여자인 줄 알았더니 흠이 있네! 알았더라면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 텐데.”최 사장은 미모에 대한 기준이 높았다. 그는 수많은 미녀와 유명 인사들을 상대하며 자신만의 까다로운 기준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그의 말이 들려오는 동안 박민정은 오히려 얼굴의 흉터에 안도했다. ‘이 흉터 때문에 나를 포기해줬으면...’ 그녀는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그러나 그녀의 바람은 너무나도 순진한 희망이었다.“하지만...” 최 사장의 시선이 그녀의 몸으로 내려가며 음흉하게 미소 지었다. “몸매는 정말 훌륭하군.”그는 탐욕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를 만지려 했다.순간 박민정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절대 이런 사람에게 내 몸을 내줄 순 없어!’그녀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어렵게 입을 벌린 그녀는 자신의 혀를 세게 깨물었다.순간적인 통증과 입 안에 퍼지는 쇠 맛이 그녀를 강하게 자극했다.통증 덕분에 여태 흐릿했던 그녀의 시야가 또렷해졌다. 마침내 눈을 떠낸 박민정은 모든 의지를 쏟아 최 사장을 힘껏 밀쳐냈다.최 사장은 그녀가 깨어난 걸 보고 놀라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가씨, 어떻게 이렇게 빨리 깼지?”박민정의 눈은 차갑게 빛났다.“꺼져! 아니면 내가 당신 가만두지 않을 거야!”최 사장은 그녀의 말에 비웃으며 더욱 대담하게 행동했다.“하하하, 네가 뭘 어쩔 건데?”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박민정은 그가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역겨움을 느끼고 몸을 재빨리 피하며 뒤로 물러섰다.그러자 최 사장은 그녀의 팔을 거칠게 붙잡고 강제로 끌어당겼다.그녀는 도망칠 수 없음을 깨닫고
회사 직원들이 하나둘 퇴근하고 주영리는 박민정에게 고객을 위해 차를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사이 그녀는 박민정의 자리로 가서 그녀가 마시던 물컵에 무언가를 몰래 넣었다.차를 준비하고 돌아온 박민정은 별 의심 없이 물을 마신 뒤 자리를 정리하며 퇴근 준비를 했다.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주영리는 여유롭게 말했다.“민정 씨, 잠시만 기다려요. 곧 다른 고객들이 올 거예요. 혹시 민정 씨 도움이 필요할지도 몰라.”“알겠습니다.”박민정은 주영리의 지시를 거절하기 어려워 자리로 돌아와 기다리기로 했다.그 사이 주영리는 회사 입구로 내려가 최 사장을 맞이했다.“최 사장님, 오셨군요! 어서 들어오세요.” 그녀가 밝은 미소로 맞았다.최 사장은 그녀 뒤를 둘러보며 물었다.“민정 씨는? 준비됐다더니?”주영리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아직 위층에 있어요. 아직 신입이라 부끄러움을 많이 타거든요. 곧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호텔도 이미 준비해뒀어요. 근처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곳으로요.”최 사장의 얼굴에 즉시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역시 주 비서야.”“별말씀을요.” 주영리는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위층에서는 박민정이 물을 마신 뒤 갑자기 극심한 졸음이 몰려왔다. 그녀는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생각하며 고객이 오기 전 잠시 책상에 엎드려 눈을 붙였다.잠시 후 주영리와 최 사장이 위층으로 올라왔다. 그들은 책상에 엎드려 잠든 박민정을 발견했고 주영리는 최 사장에게 조용히 손짓하며 그녀를 데리고 내려가 차에 태웠다.반쯤 깨어난 박민정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지만 눈을 뜨려고 애써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희미하게 들려오는 남자와 여자의 대화를 들었다.“어떻게 이렇게 깊이 자는 거지?”“깊이 안 자면 사장님께서 어떻게 즐기실 수 있겠어요?” 주영리는 웃으며 대답했는데 그 말에는 죄책감 따위는 전혀 없었다.그녀의 마음속에는 복수의 쾌감만이 가득했다. 그녀는 박민정에게 자신을 건드린 대가가 무엇인지 똑똑히 알게 해주고 싶었다
다음 날 아침, 박민정은 소파에서 일어나자마자 다리 통증이 한결 나아진 것을 느꼈다.간단히 약을 먹고 연고를 발라 통증을 다스린 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제야 유남우가 전화를 여러 번 했고 문자도 몇 개 남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박민정은 즉시 그에게 전화를 걸었고 금세 연결되었다.“민정아, 왜 이제야 전화를 받아?” 유남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미안해요. 어제 너무 피곤해서 그대로 잠들어버렸어요. 전화 소리를 못 들었네요.”박민정은 어제 다리가 아팠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그제야 유남우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괜찮아. 아무 일 없으면 됐어. 나 오늘 저녁 비행기로 돌아갈 거야.”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급히 말했다.“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 전 정말 괜찮으니까 일에 더 집중해요.”자신이 그의 일에 방해가 될까 걱정이었다.“일이 중요하다는 거 알아. 하지만 너도 중요해.” 유남우는 그녀의 말을 끊고 단호히 말했다.“더 이상 말하지 말고 저녁에 보자.”“알겠어요.”박민정은 결국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전화를 끊고 나서 박민정은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는데 전보다 상태가 더 나빠 보였다.‘오빠가 오면 이걸 보고 또 걱정하겠지.’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상처 부위에 숨을 불어넣었다.“빨리 나아야 할 텐데.”그렇게 그녀는 간단히 씻고 아침을 먹은 뒤 절뚝거리며 회사에 갔다.한편, 유남우는 해외 출장을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윤소현은 끝까지 그를 붙잡아두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며칠 전 누군가 유남우에게 보낸 메시지가 그녀의 신경을 건드린 탓인지 그녀는 출국하자마자 사람을 시켜 유남우를 따라가게 했다.“남우 씨를 잘 감시하세요. 특히 남우 씨 곁에 있는 여자들, 그게 누구든 보고하세요. 알겠죠?” 윤소현은 전화기 너머로 단호히 말했다.“네. 걱정 마세요.”“좋아요.”그녀는 전화를 끊으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해외 회사.박민정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보니 책상 위에 작은 봉투가 놓여 있었다.
박민정은 매니저의 말을 듣고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매니저님, 이게 농담인가요? 만약 회사가 직원들에게 고객 접대를 의무로 여기고 그런 자리에서 신체 접촉까지 용인한다면 저는 이런 회사에 남을 생각이 없습니다.”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단호히 자리를 떠났다.매니저는 황당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박민정이 이렇게 단호하고 고집스러울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한편 최 사장은 박민정이 떠나는 것을 보고 의아해하며 물었다.“뭐야? 그냥 가버린 거야?”매니저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신입이라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것 같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을 불러 같이 술자리를 즐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하지만 최 사장은 테이블 주위의 다른 여직원들을 훑어보더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무슨 소리야? 아무나 데려와서 우리를 대충 넘어가려는 거야?”매니저는 난처해졌다. 이미 박민정이 돌아올 리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미모가 뛰어난 주영리를 향해 손짓했다.“주 비서, 잠시 이쪽으로 와볼래?”주영리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마자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 박민정을 험담했던 것은 완전히 잊은 듯 얼굴 가득한 부끄러운 미소를 띠고 매니저 쪽으로 다가갔다.“무슨 일이세요, 매니저님?”매니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사장님들께 술자리 접대를 좀 부탁할게. 특히 최 사장님께 신경 좀 써주면 좋겠어.”주영리는 기다렸다는 듯 흔쾌히 대답했다.“알겠습니다.”그녀는 능숙하게 사장들에게 아첨하며 분위기를 띄우기 시작했고 사장들의 불쾌한 손길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최 사장에게 의도적으로 다가가 그의 옆자리에 앉았지만 최 사장은 주영리에게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주 비서, 아까 무대에서 춤췄던 신입, 그 사람과 친한가?” 최 사장이 이렇게 묻자 주영리는 순간 얼굴이 굳었다. 원래는 별로 친하지 않다고 대답하려 했지만 최 사장의 눈빛을 보고 곧 말을 바꿨다.“같은 부서 동료입니다. 그리고 지금 제 부하직원이기도
주영리는 그 순간 무용 선생님에게 뺨이라도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감히 그럴 수 없었다. 선생님 뒤에는 매니저 남편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결국 그녀는 억울함을 꾹 삼키며 모든 잘못을 무대 위에 있는 박민정에게 돌렸다.‘좋아, 아주 좋아!’‘네가 날 이렇게 몰래 괴롭히다니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주영리는 이를 악물며 속으로 다짐했다.한편, 박민정은 이 모든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무용 선생님이 자신을 위해 주영리에게 억울한 일을 시켰다는 것도, 그녀가 몇 날 며칠을 공연을 위해 헛수고했다는 것도 알 리 없었다.무대 위에서 박민정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우아하고 고혹적인 춤사위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녀의 매혹적인 자태에 눈길을 떼지 못하는 사장들이 많았다.“저 주연 무용수는 누구야? 정말 예쁘게 생겼네. 몸매도 완벽하고.”“우리 회사 직원입니다. 이름은 박민정이라고 합니다.” 술을 따르던 매니저가 재빨리 대답했다.“오호, 공연 끝나면 우리 테이블로 와서 같이 밥 먹으라고 해.”한 사장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매니저는 이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알겠습니다. 공연 끝나면 바로 데려오겠습니다.”춤은 금세 끝났고 박민정은 고통을 꾹 참으며 무대를 내려왔다. 하지만 매니저가 그녀를 붙잡았다.“박 비서, 몇몇 사장님들이 박 비서 재능을 매우 높이 평가하셨어. 그분들과 식사를 같이 해.”매니저는 부드럽게 말을 꺼냈지만 박민정은 그의 진짜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녀는 단호히 거절했다.“죄송하지만 동료들과 함께 있는 게 편합니다. 게다가 저는 말주변이 없어서 실수라도 하면 안 될 것 같아요.”하지만 매니저는 물러서지 않았다.“걱정 마. 박 비서는 예쁘니까 뭔가 잘못 말해도 사장님들이 화낼 일 없을 거야. 오히려 더 좋아하시겠지.”그러면서 음성을 낮춰 말을 덧붙였다.“만약 이번에 잘하면 복귀 후 바로 정규직으로 전환될 거야. 보너스도 넉넉히 챙겨줄 거고.”매니저는 박민정을 억
“왜요?” 주영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주연 무용수를 다시 맡기 위해 그렇게 애를 썼는데 이제 와서 필요 없다니.“더 잘 추는 사람을 찾았거든.” 무용 선생님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사실 선생님은 박민정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싶었을 뿐이었지만 이 말이 주영리의 분노를 더욱 부추겨 이후 박민정이 큰일을 당할 뻔한 계기가 되고 말았다.“그 사람이 누구인데요?” 주영리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잠시 후 무대에 오를 거야. 보면 알겠지만 정말 주 비서가 따라갈 수 없는 실력이더라.” 무용 선생님은 담담하게 말했다.주영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지금껏 동료들에게 자신이 주연 무용수로 공연한다고 떠벌렸는데 이게 모두 헛소리가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도대체 누가 그녀를 대신하게 됐는지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호텔 밖에서는 고급 차들이 하나둘씩 도착하며 적지 않은 기업인들이 차에서 내렸다.박민정의 회사 사장인 제임스는 특별히 중요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은은한 고급스러움을 자랑하는 한 대의 링컨 차량이 천천히 호텔로 들어섰다.이를 본 제임스의 눈이 반짝였고 그는 직접 차량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유 대표님.”차에서 내린 사람은 유남준이었다. 그는 제임스와 간단히 악수를 나눴다.“유 대표님, 조용히 대화 나눌 수 있는 전용 룸을 준비해뒀습니다. 함께 가시죠.”“좋습니다.”제임스는 유남준을 모시고 2층의 특별실로 향했다.이를 지켜본 회사 직원들은 사장이 젊은 외국 남성에게 이렇게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의아했다.“저 사람 누구야? 사장님이 저렇게 친절한 건 처음 보는데?”“몇 년 전 협력 파트너라고 하던데, 엄청난 실력을 가진 사람이래.” 누군가가 대답했다.“외모도 멋지네. 설마 대기업 대표일 줄이야.”직원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말이 오갔다.그때 박민정이 그들 앞을 지나며 대화 내용을 듣게 되었고 무심코 유남준이 사라져간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은 어딘가 익숙했지만 곧 시야에서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