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은 유남준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아 수표 한 장을 꺼내 그에게 쥐여주었다.“돈은 냈으니 물건은 제가 가져갈게요.”손에 수표가 쥐어진 유남준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자리를 떠나는 박민정을 보며 옆에 있는 비서에게 분부했다. “잘 지켜봐.”...9호 공관.숙소로 돌아온 박민정은 베란다에서 술을 한잔 또 한잔 들이켰다.예전에 그녀는 술을 즐겨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해외에 나간 후 혼자 힘들어 인생이 버겁다고 느껴질 때마다 알코올은 마치 마취약과 같이 그녀를 마비시킬 수 있었다. 두 아이가 태어난 후, 그들과 함께하면서 그녀는 점차 나쁜 습관을 고쳤다. 하지만 오늘 유남준을 만나고 나니 그녀는 또 한 번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다...기억상실증... 사실 거짓말은 아니다. 해외로 나간 후, 그녀는 육체적으로 너무 큰 부담을 느꼈고 우울증과 임신까지 겹치면서 확실히 기억력이 많이 안 좋아졌고 은정숙마저도 간헐적으로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그동안 그녀는 무척 괴로웠다. 그녀의 기억은 가끔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인 어린 시절로, 가끔은 학창시절로, 또 가끔은 유남준과 결혼했을 때로 돌아갔었다.한 번은 유남준과 이혼한 것을 잊고 죽은 척하며 출국한 것도 잊은 채 갓 결혼했던 그 시간의 두 사람만 기억한 적도 있었다.그래서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귀국 비행기 티켓을 사서 유남준을 찾아가려고 했었다.그날, 그녀는 하마터면 진주까지 올 뻔했지만 다행히 공항에서 유남준과 이지원이 함께 파티하는 사진을 보고 두 사람이 끝났다는 것을 뒤늦게 기억해냈다.뒤죽박죽된 기억 때문에 짧은 시간 안에 희망과 절망을 번갈아 경험하는 그런 느낌은 오직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고통이었다.그녀는 유남준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지난 4년 동안 유남준이 그녀를 찾아다닌 이유는 그녀를 그저 놓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그녀에게 남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래서 이번에 그녀는 기억을 잃은 척하며 신체접촉이 아닌
낮은 목소리로 애교를 부리는 아들 모습이 영상 너머로 보였다. 박예찬과 똑같은 모습을 한 사내아이는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박민정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순간 박민정의 마음은 눈 녹듯이 사르르 녹아내렸다.“윤우야, 우리 아들.”박윤우는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엄마, 어젯밤에 왜 나에게 전화 안 했어? 잘 자라고 얘기 안 했잖아.”큰아들 박예찬이 잔소리가 많은 따뜻한 아들이라면 막내아들은 애교는 많지만 늘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는 딱 그 나이 또래에 맞는 정상적인 아이였다. 물론 이것은 박민정 자신의 판단일뿐이다. “미안해, 엄마가 까먹었어. 우리 윤우 화내지 마.”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한 윤우가 백혈병 진단까지 받자 박민정은 윤우를 유달리 더 보살폈다.박윤우는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응, 이번만 봐주는 거야. 다음에는 절대 안 돼.”어린 아들의 애교에 박민정은 순간 마음속의 먹구름이 싹 걷히는 듯했다.그녀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할머니랑 형은?”그러자 윤우는 화난 척하며 대답했다.“할머니와 형 물어볼 줄 알았다니까! 그럴 줄 알았으면 엄마에게 연락 안 했을 거야.”순간 말문이 막힌 박민정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알았어, 엄마 안 물어볼게.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까 일찍 쉬어. 잘자.”전화를 끊은 박윤우는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고 우울한 눈빛으로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쌍둥이 형 박예찬을 보며 말했다.“엄마가 또 술 마셨어.”동생의 말을 들은 박예찬은 노트북을 닫았다.“아무래도 내가 먼저 진주로 가서 엄마를 돌봐야 할 것 같아.”“응.” 형의 말에 윤우는 눈을 꼭 감으며 대답했다. 자기 몸도 건강하다면 형과 같이 돌아가서 얄미운 아빠를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하지만 두 녀석의 속셈을 모르고 있는 박민정은 세수한 후, 예찬이가 챙겨준 토끼 인형 두 마리를 안고 침대에 누웠다.낯선 침대 때문인지, 아니면 오늘 유남준을 만난 것 때문인지 박민정은 잠이 쉽게 들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 일찍
유남준은 순간 침을 꿀꺽 삼켰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굳이 그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다희는 그의 마음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유앤케이 그룹의 사업부에서는 한 거물급 인사가 유앤케이 그룹의 희망 프로젝트, 즉 무료 자선 사업을 돕기 위해 거액을 투자할 것이라는 정보가 돌고 있었다.회사 안의 일부 사람들은 이 일로 열심히 토론을 펼치고 있었다. “도대체 어느 거물급 인사가 이런 호구 짓도 마다하지 않는지 궁금하네요.”“누가 알겠어요. 돈을 너무 많이 벌어서 쓸 데가 없나 보죠.”“해외에서 왔다고 들었어요...”이때 박민정이 탄 차가 유앤케이 그룹의 본사 앞에 막 도착했다.우뚝 솟은 빌딩을 바라본 박민정은 유앤케이 그룹이 4년 전보다 훨씬 더 크게 발전했다는 것을 느꼈다. 이런 거침없는 발전은 유남준의 천재적인 능력과 유씨 집안 자본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녀도 4년 동안 퇴폐적인 생활을 해 온 것은 아니었다. 연지석의 도움으로 그녀만의 회사를 차렸고 약간의 돈도 벌었다.진주로 돌아오기 전 그녀는 이곳저곳의 모든 정보를 끌어모아 준비를 철저히 했다. 그래서 유앤케이 그룹이 전국적으로 희망사업을 벌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투자 협력에 나섰던 것이다.협력이라는 이름으로 그녀는 유남준에게 다가갈 명분을 얻었다.어제 자선 경매에 나온 것은 사실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투자 협력만으로는 유남준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었다.어떻게든 유남준의 흥미를 불러일으켜 자신을 만나러 나오게 하는 게 목적이었다.유앤케이 그룹의 담당자들은 일찌감치 일 층 로비 앞에 대기하고 있었고 박민정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고는 도착한 사람이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라는 것에 순간 다들 어리둥절해졌다.“박 사장님이세요?”박민정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왜요, 뭐가 문제가 있나요?”담당자의 의아한 얼굴을 본 박민정은 그동안 서로 주고받았던 대화 내용을 그에게 보여줬다. 그러자 그 담당자는 연신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얼굴도 이쁘고
유남준은 박민정의 과거 검진 결과를 보고 심한 우울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그리고 이 우울증이 기억력 감퇴를 초래하는 병이라는 것도 알아봤지만 단 한 사람만 잊는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게다가 그들은 십여 년 동안 알고 지낸 사이이다.유남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박민정은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설마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인가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당신을 기억하지 못할 수 있죠?”이 한 마디는 마치 가시처럼 유남준의 심장을 찔렀다.그녀의 말에 유남준은 차가운 얼굴로 대답했다. “박민정 씨, 너무 멀리까지 생각하시네요. 저희는 그저 우연히 만났을 뿐이에요.”굳이 박민정이 모른척하려 한다면 유남준도 같이 맞춰주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두 사람이 부부라고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떠나기 전 유남준은 사람을 시켜 박민정과 계약서를 쓰라고 했다.사무실로 돌아간 후, 유남준은 담배를 피우며 박민정의 말을 떠올렸다.“설마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인가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당신을 기억하지 못할 수 있죠?”순간 유남준의 가슴은 무언가에 꽉 막힌 듯 답답하고 불편했다.서다희가 대표이사실에 들어왔을 때 방안은 희뿌연 담배 연기로 꽉 차 있었다. 4년 전, 박민정이 사라진 뒤부터 유 대표는 다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하지만 지금 그가 찾던 사람이 돌아왔지만 그는 여전히 이러고 있었다.“박민정이 지난 4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낱낱이 조사해와. 내가 꼭 알아야겠으니까!”유남준이 서다희를 쳐다보며 명령하자 순간 그는 멈칫했다.“유 대표님, 제가 사람을 보내 조사했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어요.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의 자료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어요.”“그럼 해외의 다른 역량을 동원해서라도 알아봐!”유남준의 말에 서다희는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그가 말한 다른 역량이 무엇인지 서다희는 잘 알고 있었다. 지난번, 유앤케이 그룹의 대표이사 자리를 놓고 경쟁할 때 말고는 유남준은 ‘
김인우는 지금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박민정에게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머릿속에서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사과부터 해야 할까?아니면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지 물어봐야 할까?그것도 아니면...하지만 그의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박민정은 그를 스쳐 지나더니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순간 어리둥절해진 김인우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박민정은 차에 올라타 상냥한 목소리로 운전 기사에게 말했다.“가시죠.”곱고 평온한 옆모습이 차와 함께 점점 멀어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김인우는 한참 만에야 정신을 차리고 휴대전화를 집어 들어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하지만 그동안 유남준이 박민정에게 한 짓을 떠올린 그는 다시 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김인우는 일단 박민정의 차 번호를 적어둔 뒤 사람을 보내 그녀가 사는 곳을 알아봤다.검은색 벤틀리가 천천히 길을 달리고 있었고 박민정은 차분한 마음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녀의 마음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김인우가 무슨 일로 서교 추모 공원에 나타났는지 그저 의아할 뿐이었다.과거 김인우가 자기를 괴롭히던 모습이 떠오른 박민정은 손을 뻗어 보청기를 제거했다.원래 난청이었던 그녀의 귀는 김인우 때문에 지금은 가끔 굉음 같은 이명이 동반해 들렸고 감정 기복이 심할 때면 피가 나기도 했다.이런 인간을 어찌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박민정도 가끔 그때 김인우를 구한 것을 후회했다. 그를 구하지 않았더라면 지금과 같은 병마와 싸우지 않아도 됐을 테니까...하지만 긁어 부스럼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괜히 쓸데없이 일을 만들었다가 고생하는 것보다는 가만히 있는 게 낫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김인우와의 접촉을 멀리해야 했다. 그녀에게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윤우를 구하는 것이다.그래서 김인우를 계속 모른척하며 문제 자체를 일으키지 않게 하고 싶었다.아무래도 김인우는 이지원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발 벗고 나설 테니까....
이지원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어찌 된 일인지 김인우는 4년 전부터 완전히 딴사람이 된 듯 이지원의 여러 가지 부탁을 무시하고 있었다.유남준이 자기를 도와줄지 말지에 대해서도 이지원은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이지원은 자기가 원하는 것은 꼭 손에 넣고야 마는 성격이다.“생각 좀 해봐, 어떻게든 민 선생 곡을 꼭 손에 넣어야지.”...주상 엔터테인먼트의 전화를 끊은 박민정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녀보다 이지원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연예계든 가요계든 그녀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었다.다른 사람의 성과를 표절하고 다른 사람의 쌓은 업적을 빼앗고...유남준과 김인우의 절대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그녀는 절대 이 바닥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청각 장애가 있는 사람이 곡을 만드는 것, 이것보다 더 힘든 일은 없을 것이다. 박민정은 그동안 두 아이와 은정숙을 돌보느라 혼자 고생을 다 해왔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모은 돈은 한 가족이 살기에 충분했기에 돈 때문에 직접 만든 곡을 이지원에게 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었다.숙소로 돌아온 박민정은 휴대전화를 옆에 두고 욕실로 가서 샤워하며 계획했던 물건을 어떻게 빨리 손에 넣을지 고민했다.피곤해서인지 욕조에 누워있던 박민정은 어느새 잠이 들었다.얼마나 잤을까, 절친 조하랑의 전화가 그녀를 깨웠다.“민정아, 이틀 뒤면 나도 돌아가.”박민정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알았어, 네가 오면 내가 한턱 톡톡히 낼게.”“좋아. 그런데 요즘 어떻게 지내? 유남준이 괴롭히거나 그러지는 않아? 그리고 이지원 그 나쁜 년은 네가 돌아온 거 알아?”조하랑은 박민정이 혼자 여기에 있는 게 너무 걱정되었다. “이지원은 아직 내가 돌아온 거 몰라. 하지만 곧 알게 되겠지.”박민정이 베란다로 나가자 여름 바람이 뜨거운 공기와 함께 그녀를 감쌌다.“유남준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절대 나에게 함부로 못 할 거야.”한창 조하랑과 얘기 중일 때,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저녁 9시가 다 된
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꼭 움켜쥐었다.유남준은 그녀가 경직된 것을 느끼고 큰 손으로 그녀의 작은 손을 감싸며 더 거칠게 키스를 퍼부었다.박민정은 등을 꼿꼿이 세운 채 그를 밀치고 싶은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고 있었다. 윤우와 예찬이가 그녀가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다...아이를 머릿속에 떠올린 그녀는 이대로 그에게 순종해 바로 아이를 가질 계획이다.여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서툰 행동으로 그의 움직임에 응하려고 했다.유남준은 살짝 멈칫했지만 이내 찌푸린 인상을 펴고 옷깃의 단추를 잡아당기며 허리띠를 풀었다.목욕을 방금 마친 박민정의 싱그러운 냄새가 그의 코를 파고들자, 그의 심장도 더 빨리 요동쳤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거실 소파에 박민정을 올려놓고는 그녀의 가운을 잡아당겼다.박민정은 두 손을 더 꽉 움켜쥐었다.그녀는 유남준의 눈을 똑바로 마주할 수도 없었고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다. 머리 위에 비치는 따뜻한 불빛으로 시선을 옮긴 그녀는 순간 머릿속에 과거 이지원이 자신에게 보낸 수많은 유남준과의 다정한 사진들이 맴돌았다. 그리고 귓가에는 이지원이 했던 말들이 울려 퍼졌다.“민정 씨, 남준 씨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한 적 있어요? 예전에 나에게는 자주 말했었는데.”남자의 뜨거운 체온이 점점 가까워짐을 느낀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유 대표님, 우리가 이러면 톱스타 이지원 씨가 질투해서 대표님께 따지지 않을까요?”이제 막 정점에 도달하려던 찰나, 흥을 깨는 박민정의 말에 유남준은 모든 행동을 멈췄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박민정! 계속 아무것도 모른 척할 거야?”박민정은 옆에 떨어진 가운을 주워 몸을 가리며 말했다.“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그녀의 이런 행동에 유남준은 저도 모르게 몇 년 전의 그날 밤을 떠올렸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손으로 박민정의 하얀 얼굴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다가갔다.“이번에 돌아온 목적이 뭐야?”4년 넘게 도망쳐 놓고 갑자기 돌아온 건
와인에 약을 탄 박민정은 어깨가 반쯤 드러나는 요염한 민소매 잠옷으로 갈아입고 유남준에게 다가가 술을 따랐다.“받으세요.”유남준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한눈에 바라보며 그녀가 건네는 잔을 받아 들었지만 마시지 않았다.“열 살 때 고향에서 진주로 왔어. 그때 처음 만났고.”순간 박민정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유남준이 두 사람의 첫 만남을 기억하고 있을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녀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 술잔을 다시 그의 앞으로 밀었다.하지만 유남준은 그녀가 민 술잔을 다시 박민정 앞으로 들이밀며 말했다.“네가 먼저 마셔!”약을 탄 잔 속의 술을 보며 박민정은 순간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잔을 들고 바로 마셨다. 목구멍으로 흘러 들어가는 술은 그렇게 맵고 쓸 수가 없었다.그녀는 만약 자기가 마시지 않으면 유남준이 분명 의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오랫동안 사업에 몸담은 유남준은 눈치가 빨라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이면 바로 알아채기 때문이다.박민정은 다시 술잔에 술을 따라 유남준 앞에 놓았다.“유 대표님, 이제 당신 차례예요.”유남준은 손목 마디마디가 뚜렷이 보이는 긴 손으로 잔을 들어 살랑살랑 흔들었지만 계속 마시지 않았다.그는 여유 있는 눈빛으로 박민정을 바라보며 말했다.“뭐가 그리 급해, 우리 추억부터 먼저 회상해야지.”추억?십여 년의 추억을 어찌 하룻밤에 다 말할 수 있겠는가?박민정은 예쁜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실내는 분명 에어컨을 시원하게 켠 상태였지만 그녀의 이마에서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 손바닥을 계속 꼬집으며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녀는 맑은 눈으로 유남준을 깊이 바라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앞으로 추억할 시간은 많아요. 오늘은 시간도 늦었는데 여기서 쉬다 가시지 않을래요?”박민정은 말을 하면서 백옥 같은 손으로 술잔을 들어 유남준의 앞에 내밀었다.그녀도 자기가 이렇게 행동하는 게 맞는지 확신이 없었다.하지만 어렵게 얻은 기회, 절대 이대로 놓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