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에 약을 탄 박민정은 어깨가 반쯤 드러나는 요염한 민소매 잠옷으로 갈아입고 유남준에게 다가가 술을 따랐다.“받으세요.”유남준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한눈에 바라보며 그녀가 건네는 잔을 받아 들었지만 마시지 않았다.“열 살 때 고향에서 진주로 왔어. 그때 처음 만났고.”순간 박민정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유남준이 두 사람의 첫 만남을 기억하고 있을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녀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 술잔을 다시 그의 앞으로 밀었다.하지만 유남준은 그녀가 민 술잔을 다시 박민정 앞으로 들이밀며 말했다.“네가 먼저 마셔!”약을 탄 잔 속의 술을 보며 박민정은 순간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잔을 들고 바로 마셨다. 목구멍으로 흘러 들어가는 술은 그렇게 맵고 쓸 수가 없었다.그녀는 만약 자기가 마시지 않으면 유남준이 분명 의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오랫동안 사업에 몸담은 유남준은 눈치가 빨라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이면 바로 알아채기 때문이다.박민정은 다시 술잔에 술을 따라 유남준 앞에 놓았다.“유 대표님, 이제 당신 차례예요.”유남준은 손목 마디마디가 뚜렷이 보이는 긴 손으로 잔을 들어 살랑살랑 흔들었지만 계속 마시지 않았다.그는 여유 있는 눈빛으로 박민정을 바라보며 말했다.“뭐가 그리 급해, 우리 추억부터 먼저 회상해야지.”추억?십여 년의 추억을 어찌 하룻밤에 다 말할 수 있겠는가?박민정은 예쁜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실내는 분명 에어컨을 시원하게 켠 상태였지만 그녀의 이마에서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 손바닥을 계속 꼬집으며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녀는 맑은 눈으로 유남준을 깊이 바라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앞으로 추억할 시간은 많아요. 오늘은 시간도 늦었는데 여기서 쉬다 가시지 않을래요?”박민정은 말을 하면서 백옥 같은 손으로 술잔을 들어 유남준의 앞에 내밀었다.그녀도 자기가 이렇게 행동하는 게 맞는지 확신이 없었다.하지만 어렵게 얻은 기회, 절대 이대로 놓치고
정민기는 얇은 잠옷을 입고 온몸이 흠뻑 젖은 채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박민정을 발견했다. 그녀의 손과 다리는 이미 새빨갛게 할퀸 상처들로 가득했다. 그는 재빨리 물을 잠그고 가운을 집어 박민정의 보일 듯 말 듯 한 몸을 가렸다.“괜찮으세요?”그의 목소리는 그리 낮은 편은 아니었으나 박민정의 귀에는 그저 희미하게 들릴 뿐이었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박민정은 창백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괜찮아요”“제가 병원까지 모셔다드릴게요.”정민기가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으려 하자 그녀는 옆으로 피하며 말했다.“안 돼요. 진주에 있는 모든 병원은 전부 김씨 가문의 손아귀에 있어요. 그리고 김인우도 내가 돌아온 것을 이미 알고 있고요. 혹시라도 내가 약을 먹은 것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김인우는 분명 유남준에게 말할 거예요. 유남준이 술에 약을 탔다는 걸 알면 앞으로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는 겨우겨우 긴 말을 끝냈다.4년 전, 그녀는 자기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었다.연지석의 도움이 없었다면 절대 김인우를 속일 수 없었을 것이다.연지석이 곁에 없는 지금, 그녀가 병원에 간다면 그쪽 사람들은 분명 김인우에게 가장 먼저 알릴 것이다.박민정이 병원을 가지 않고 혼자 이겨내겠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정민기는 욕실에 들어오기 전, 거실 바닥에 쏟아진 술을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하게 되었다. 그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하지만 지금 민정 씨 몸 상태가...”“얼음 좀 가져다주세요.”“네. 알겠어요.”정민기는 주방에 들어가 냉장고에서 얼음을 가져왔다.얼음 한 봉지를 통째로 욕조 안에 넣자 살을 에는 듯한 차가움이 박민정의 달아오른 몸을 그나마 편하게 했다.정민기는 또 의약 상자를 가져와 그녀 옆에 놓았다.“고마워요.” 박민정은 진심 어린 말투로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정민기는 아무 말도 없이 욕실을 나가 그녀가 정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면서 연지석에게 그녀의 안부도 전해줬다.몇 시간
이지원은 조금 전 유남준의 마지막 말을 듣고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워낙 생각이 많은 서다희는 그녀의 물음에 한두 마디 야유를 퍼부었지만, 박민정이 돌아왔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알리지 않았다.눈치 빠른 이지원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속으로 서다희를 욕하며 유남준에게 다가갔다.“오빠, 명절이 곧 다가온다고 어머님이 오늘 저녁에 같이 밥 먹자고 했어요.”이지원이 말하는 어머님은 바로 유남준의 어머니이다.분명 또 두 사람이 빨리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라는 말을 하기 위함일 것이다. 유남준은 고개도 들지 않고 한 마디 툭 내뱉었다.“알았어.”그의 대답을 들은 이지원은 사무실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저 오늘은 별일 없으니 여기서 기다릴게요.”하루 종일?유남준은 그녀를 힐끗 보며 한마디 했다.“그렇게 한가해?”이지원은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태연한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편 유남준은 그녀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나는 일할 때 남이 옆에 있는 거 안 좋아해.”그의 말에 이지원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그저 한마디만 내뱉었다.“그럼, 밖에서 기다릴게요.”유남준이 더 이상 대꾸하지 않자 이지원은 내키지 않은 얼굴로 대표이사실을 나섰다.유남준의 차갑게 거절하는 얼굴은 예전에 사귀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늘 변함이 없었다.이런 사람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박민정뿐일 것이다.기분 전환을 위해 밖으로 나간 이지원은 김인우의 사무실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비서에게 물었다.“인우 오빠 요즘 안 오나요?”“요즘 집안 어르신들이 김 대표님에게 결혼 준비를 하라고 해서 못 왔어요.”비서는 사실대로 대답했다.결혼?이지원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김인우는 이지원 때문에 집안 어르신들이 안배한 혼사를 거절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하지만 요즘 집안 어르신들이 한창 김인우의 결혼 준비를 한다는 말에 이지원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씁쓸했다.“상대방이 누군데요?”이지원은 궁금한 마음에 비서에게 물었다.비서
고아로서 어릴 때부터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이었다.김인우의 말은 그녀가 처음 재벌 2세들과 합류했을 때 얼마나 많은 추태를 부렸는지, 몇 년 전에 얼마나 창피했는지를 상기시켜 주었다."내가 유씨 가문의 며느리가 되면 누가 나를 무시할지 보자!”이지원이 박민정을 언급하지 않은 걸 보니 그녀가 돌아온 걸 모르는 것 같았다.김인우는 9번 공관 밖에서 계속 기다렸다."도련님, 민정 씨는 오늘 내내 안 나오셨어요. 제가 가서 문을 두드려볼까요?"보디가드는 그를 기다리게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김인우는 거절했다."아뇨, 그냥 여기서 기다릴게요.”어제 박민정이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나서 그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설렘을 느꼈고 즉시 그녀를 찾아가 그해의 일을 묻고 싶었다.하지만 그가 박민정을 괴롭혔을 때를 생각하면 그는 감히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한번 기다리기 시작하니 벌써 두 시간이 지났다.박민정은 어젯밤에 얼음물에 샤워해서 오늘 감기에 걸린 듯 머리가 어지러웠다. 정민기가 그녀에게 약을 사줬는데 마신 후에도 여전히 몸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외투를 걸치고 어제의 긁힌 상처를 가리고 밖에서 기분 전환을 하려고 공관을 나왔다. 여름인데도 긴 옷에 긴 바지를 입고 있는 그녀는 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의사는 어젯밤 일로 그녀를 다시 병원에 입원시킬 뻔했다고 말했다. 앞으로 천천히 신중하게 의논해야 할 것 같다고 하셨다.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차를 눈치채지 못한 박민정이 그대로 지나가려 하자 김인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어... 민정아.”박민정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며 멍하니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김인우는 곧장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가에 이르러서는 다 사라져 버렸다."그동안 잘 지냈니?”‘잘 지냈냐고?'그녀가 마음속으로 냉소를 지었다.‘내가 잘 못 지내지 않기를 가장 바라는 사람이 아닌가?'그녀는 입술을 꼭 오
박민정은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남자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죄송합니다만 몇 년 전에 아팠던 적이 있어서 많은 사람과 일을 기억하지 못해요.”말을 마친 박민정은 돌아서서 공관으로 돌아갔다. 김인우의 큰 몸집은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기억이 안 난다고?'그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감명을 받지 못했다. 보디가드도 도련님이 이렇게 넋이 나가시는 걸 처음 보기 때문에 앞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공관으로 돌아와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박민정은 에스토니아 공항에서 절친 조하랑이 미리 비행기 표를 끊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오늘 밤이면 진주시에 도착할 것이었다. 그리고 박예찬도 인터넷에서 같은 비행기 표를 사서 몰래 비행기에 올랐다.저녁 7시에 조하랑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그녀는 트렁크 높이도 안 되는 운동복 차림에 마스크와 모자까지 쓴 박예찬이 뒤따라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자신보다 더 큰 캐리어를 끌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이상한 시선에 조하랑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사람들의 비난 소리가 높았다."엄마가 어떻게 아이한테 저렇게 큰 가방을 끌고 다니게 할 수 있지.”"90년대 엄마들은 기가 막히네.”"저런 사람은 엄마가 될 자격이 없어.”‘이상하네, 왜 다들 날 잡아먹으려는 것 같지?'박예찬의 진지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나서야 그녀는 큰일이 났다는 것을 알았다."엄마, 걸을 때 전화하면 안 돼요.”조하랑은 자신이 언제 아들을 낳았는지 궁금했다. 커다란 상자를 끌고 마스크와 모자를 쓴 채 빛이 나는 순진한 눈망울을 돌아보던 그녀는 하마터면 발을 동동 구를 뻔했다.욕을 하고 싶은데 할 수 없었다. 만약 박민정이 그녀의 아들이 몰래 따라온다는 것을 알았다면 미쳐버릴 것이 틀림없었다.공항의 많은 사람은 몰랐지만 그의 말을 듣고 순간 마음이 아프면서 사랑스럽기도 했다."귀여워, 철이 든 아가야.”"내 아들이었으면 좋겠다.”"이렇게 무책임한 엄마
"...... "‘이 녀석은 꼬맹이가 아니야.'박예찬은 조하랑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이미 왔는데 걱정하지 마, 이모. 내가 엄마에게 가서 사과할게.”조하랑은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지 않았다. 어린아이한테 당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혼자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 녀석이 혼자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도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너 말 잘 듣고 여기 있어. 민정이한테 전화하고 올게. 그렇지 않으면 민정이랑 할머니가 널 걱정하겠어.”"걱정 마, 내가 할머니랑 같이 가자고 메모 남겨놨어.""..."그녀는 휴대전화를 들고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한편, 박민정은 따뜻한 물 한 잔을 들고 베란다에 앉아 전화를 받았다."하랑아.”조하랑은 뭔가 찔리는 듯한 표정으로 옆에 있는 박예찬를 바라보았다."민정아, 그, 그게…. 서프라이즈 해 주고 싶었는데 그만...”"왜 그래?""나 진주시로 돌아왔어. 지금 공항인데... 예찬이가 날 따라왔…네? 아하하…”박민정의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조하랑이 박예찬에게 휴대전화를 건네며 입모양으로 "스스로 해명해"를 외쳤다."엄마, 이모 탓하지 마. 내가 몰래 항공권을 끊고 따라온 거야.”"엄마 혼자 진주시에 있으니까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혼자 몰래 비행기 티켓을 샀다고?'박예찬이 똑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린아이가 혼자서 공항에 갈 줄은 몰랐다."박예찬! 엄마가 너한테 했던 말 잊었어?”"엄마가 보고 싶은 걸 어떡해. 걱정도 되고.”박예찬은 대답 대신 이렇게 말했다.박민정은 갑자기 목이 메어 대답하지 못했다. 조하랑도 박예찬이 한 말에 놀라 몸을 웅크리고 앉아 휴대전화를 가져와서 말했다."민정아, 걱정하지 마. 내가 예찬이를 데리고 있을게. 유남준이 예찬이를 발견하지 못하게.”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화를 끊기 전에 그들은 한 음식점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조하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박예찬을 바라보았다. 두 그림자가 함께 공항 밖으로 걸어 나갔다.
[알겠어.]마침내 일을 그만둔 그를 본 이지원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아줌마가 재촉하셨어요?”유남준의 얇은 입술이 가볍게 열리며 말했다."아니야.”그녀는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다 입을 닫았다. 그리고는 그의 시선이 창밖으로 간 것을 발견했다. 차량은 금월호텔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벤틀리 한 대에서 한두 명이 내렸다.유남준의 시선은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말할 수 없는 익숙함이 느껴지는 그 작은 소년에게로 쏠렸다. 그는 두 사람이 식당 입구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유남준은 운전 기사에게 말했다."차 세워.”이지원은 좀 이상해서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그는 대답도 하지 않고 문을 밀고 곧장 내려갔다.조하랑이 박예찬을 데리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화장실이 급해서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어 데리러 오라고 했다. 그녀가 문을 나서자 양복 차림의 빳빳한 유남준이 곧장 자신을 향해 걸어왔다.순간적으로 손바닥에 땀이 줄줄 흘러서 그녀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돌아섰다."우연이네."유남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박민정은 피할 수 없었다. 그녀는 조하랑과 박예찬이 지금 올라오지 않기를 기도했다."유 대표님도 여기 식사하러 오셨나요?"그녀가 한마디 대꾸했다."전 아직 일이 좀 있어서 방해하지 않을게요.”"민정아."막 가려는데 조하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민정의 가슴이 뜨끔했다. 유남준은 계단을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하랑과 박예찬은 계단을 올라왔을 뿐 유남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인사를 한 것이었다.그는 소리를 듣고 조하랑과 박예찬을 바라보았다. 박예찬은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그의 까만 눈동자는 유남준에게 이상한 익숙함을 줬다.사방이 갑자기 고요해졌다. 조하랑이 완전히 굳어 있었다. 박민정은 아들이 자신을 부를까 봐 숨을 죽였다."민정 이모, 안녕하세요.”말을 마치고 그는 조하랑의 손을 잡았다."엄마, 배고파. 빨리 이모랑 밥 먹자.”조하랑은 정신을 차렸다."가자, 민정아.”그녀는 박예찬의 손을
박예찬의 작은 얼굴이 잘 익은 사과같이 더 빨개졌다.그는 기침을 두어 번 하고 목소리를 낮추었다."엄마, 난 어린아이가 아니야. 게다가 이모도 있는데.”이 말 때문에 방금 유남준때문에 파괴되었던 분위기가 정상으로 돌아와 떠들썩해졌다.조하랑은 처음으로 박예찬이 부끄러워하는 것을 보고 놀리기 시작했다."엉덩이를 맞은 적이 있었구나!""아니거든!”이런 박예찬이야말로 어린아이 같았다. 박민정은 다급하게 해명하는 아들을 보며 화가 사그라들었다. 박예찬과 박윤우는 하늘이 준 보배라서 그녀가 전혀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리고 여기로 오는 길에 그녀는 생각했다.‘나는 계속 유남준을 피할 수 있지만 두 아들도 계속 숨어 있어야 해? 분명 아무 잘못도 없는데 왜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없고 집이 있어도 돌아갈 수 없는 거지?'그리고 오늘 이 갑작스러운 상황은 그녀로 하여금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 결정하게 했다.밥을 먹을 때, 조하랑이 사람을 찾아서 박예찬을 돌려보내려고 건의했다가 박민정에게 거절당했다."생각해 봤는데 계속 숨어 있는 게 최선의 해결 방법은 아닌 것 같아.”"예찬이를 여기에 남아 있게 하도록 결정했어.”"남준 씨도 이미 예찬이를 보았고 예찬이가 네 아들이라고 생각하니까 걱정할 것 없어.”"조금 있다가 할머니께 거기서 윤우를 돌보라고 말씀드릴게. 예찬이는 나와 함께 진주시 있다가 진전이 있으면 다시 돌아가자.”조하랑도 이에 동의했다."할머니 쪽에는 간병인이 있지만 어르신 한 명이 두 아이를 돌보기엔 벅차. 예찬이가 남아 있으면 너랑 같이 있을 수도 있고.”"남준 씨가 알아도 겁낼 것 없어 나랑 연지석이 있잖아.”"나도 있어, 엄마. 내가 꼭 엄마랑 윤우를 지켜줄게.”박예찬이 말했다.박민정과 조하랑이 그 말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그래.""그럼 내가 먼저 예찬이를 데리고 갈게. 네가 임신하기 전에 예찬이는 먼저 나랑 같이 있고. 네가 그를 만나고 싶을 때 내 쪽으로 와."조하랑이 말했다. 지금은 이럴 수밖에 없었다. 박민정은
박민정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좋아요, 신고해요. 경찰이 와서 모든 걸 조사하게 해요. 제가 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은 겁니다!”그녀는 나쁜 짓을 하기 않았기에 당당했다.윤소현은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려 했지만 고영란이 그녀를 막아섰다.“소현아, 분명 이건 오해가 있을 거야. 민정이가 그렇게 어린 아이를 해칠 리가 없잖니.”정수미도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우리 모두 한 가족인데 경찰까지 부르는 건 너무하지 않니?”그러나 윤소현은 눈가가 붉어진 채 항의했다.“엄마, 지금 제 딸이 이런 상태인데도 엄마는 저를 외면하시겠다는 거예요? 우리 아이 편을 들어주실 생각은 없으세요?”박민정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그만해요. 차라리 신고해요.”지금 상황에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방법은 경찰 조사를 통해서뿐이었다.윤소현은 사실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 없었다. 아이의 일은 박민정과 무관했으며 그녀 스스로 꾸며낸 일이었기 때문이다.“민정아, 흥분하지 마. 우리 가족 일이니 우리끼리 해결해.”정수미가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윤소현은 한 발 앞으로 다가서며 비꼬듯 말했다.“좋아요. 우리끼리 해결하죠.”“그럼 말해봐, 박민정. 내 딸이 이렇게 됐는데 넌 어떻게 책임질 거야?”“제가 한 일이 아닌데 왜 제가 책임져야 하죠?”박민정이 한 치의 주저도 없이 되묻자 윤소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지금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야? 우리 다혜는 늘 멀쩡했어. 그런데 네가 안은 뒤로 이렇게 됐다고!”박민정은 미간을 찌푸렸다.“이미 말했잖아요. 전 그런 적 없어요!”그녀는 어린 다혜가 이렇게 심한 상처를 입은 걸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그런데도 윤소현은 여전히 공격적이었다.“엄마, 보셨어요? 얘는 끝까지 오리발만 내밀잖아요!”정수미는 한숨을 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유다혜는 너무 어리고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누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때 고영란이 오늘 아이를 돌본 보모를 불러왔고 보모는 떨
박민정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망설일 필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유남준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박민정은 고영란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해 윤소현이 말한 병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아이는 보이지 않았고 윤소현이 병실에서 달려나오더니 곧장 박민정에게 달려들었다.모든 일이 너무 순식간에 벌어져 주위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박민정 역시 피할 겨를이 없었고 결국 윤소현의 손바닥이 그녀의 뺨에 세게 내려앉았다.뜨겁게 달아오르는 통증이 얼굴을 타고 번졌다. 그러나 윤소현은 멈추지 않았고 계속 박민정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박민정도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았고 그렇게 둘은 뒤엉켜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고영란은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 했지만 도저히 가로막을 수 없었다.“박민정, 네가 어떻게 다혜한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다혜는 이제 겨우 몇 달밖에 안 됐는데!”‘뭐?’박민정은 이해할 수 없었다.“뭔가 오해를 한 것 같아요. 전 당신 딸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우리 다혜 몸에 이렇게나 많은 상처가 났는데도 끝까지 모른 척하겠다고? 너 정말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윤소현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분노를 퍼부었고 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방어에만 집중했다.고영란이 아무리 소리쳐도 윤소현은 멈추지 않았다.“소현아!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당장 그만둬!”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고 윤소현은 그제야 멈췄다.박민정도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정수미가 황급히 달려와 박민정의 얼굴에 선명히 남은 손자국을 보고 안타까워했다.“민정아, 괜찮아?” 그녀가 걱정스레 물었다.하지만 윤소현은 불만을 터트렸다.“엄마, 똑같이 엄마 딸인데 우리가 싸웠으면 두 사람 다 챙겨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박민정만 신경 쓰는 거예요? 너무 편애하시는 거 아니에요?”정수미는 한숨을 내쉬며 윤소현을 돌아보았다.“무슨 일인지 제대로 설명해봐. 왜 둘이
박민정은 그 아기가 윤소현의 딸이라는 걸 전혀 알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다가갔다.“무슨 일이죠?”보모는 그녀를 보고도 별다른 경계 없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 오늘 하루 종일 울기만 하고 어떻게 달래도 소용이 없네요.”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따라온 보모에게 두 아들을 잘 돌보라고 지시한 뒤, 직접 아이를 안아 들어 달래기 시작했다.그러나 유다혜는 그녀의 품에서도 여전히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아마도 엄마가 된 경험 덕분인지 박민정은 아기를 돌보는 법을 잊었더라도 본능적으로 해야 할 일은 알 수 있었다.그녀는 먼저 보모에게 아이가 충분히 먹었는지 물었고 이어 아이의 기저귀를 확인하며 배탈이 났는지 살펴보았다.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도 아기가 계속 울자 박민정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아기를 병원에 데려가 보세요. 이렇게 계속 우는 건 뭔가 이상한 것 같아요.”보모도 동의했다.“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보모가 아기를 다시 받으려던 찰나, 멀리서 윤소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뭐 하는 거야? 누가 내 딸을 저 여자한테 맡기라고 했어?”윤소현은 높은 굽의 힐을 신은 채 빠르게 걸어와 박민정의 품에서 아이를 거칠게 빼앗아 갔다. 그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보모를 질책했다.“내 딸을 당신한테 맡겼더니 이렇게밖에 돌보지 못해? 내 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당신 책임인 줄 알아!”그녀는 이어 박민정을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너도 아이가 있잖아. 내 아이를 왜 안고 있었던 거야?”박민정은 그 아이가 윤소현의 딸임을 알았더라면 절대 안았을 리 없었다.보모는 난처한 표정으로 해명했다.“작은 사모님, 다혜가 계속 울어서 달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모님께서 잠깐 도와주셨던 것뿐이에요. 아무런 악의도 없었습니다.”“악의가 없었다고?”윤소현은 여전히 울고 있는 딸을 보며 냉소를 지었다.“그 말이 사실이길 바랄 뿐이야.”그러다 보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작은 사모님, 아이를 병
윤소현은 말을 마치자마자 선두에 있던 여하인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이어 한 하인을 거칠게 밀어내고 안으로 들어섰다.들어가자마자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박민정과 유남준 가족이 함께 웃으며 화목하게 있는 모습이었다.그 광경에 윤소현의 눈빛이 질투로 뒤덮였다. 그녀는 곧바로 고영란을 향해 차갑게 비아냥댔다.“어머니, 저랑 남우 씨가 비록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한 건 아니지만 저도 유씨 가문에서 떳떳하게 맞아들인 며느리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저를 모른 척하시겠다는 거예요?”고영란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윤소현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하지만 유남우 역시 큰 잘못을 저질렀고 이 모든 상황이 그녀에겐 큰 실수로 느껴졌다.“소현아, 내가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야. 어서 남우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렴. 여긴... 당분간 환영받지 못할 것 같구나.”윤소현은 이 말을 듣고도 뻔뻔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왜요? 제가 여기 있으면 어쩌시려고요? 혹시 당신 아들 유남우가 저지른 일들을 제가 다 까발릴까 봐 그러시는 건가요?”고영란도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윤소현이 마지막 퇴로조차 거부하자 냉소를 띠며 대꾸했다.“우리 아들이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한번 말해 보렴.”윤소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뭘 말하냐고요? 당신 아들이 자기 형의 여자를 탐냈다는 거. 이게 바로 당신들이 자랑하는 유씨 집안의 가풍인가요?”그 말이 떨어지자 방 안에 있던 하인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박민정은 옆에서 두 아이를 달래며 이 상황에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그러나 유남준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다들 뭘 보고 있어? 당장 저 여자를 끌어내!”윤소현은 유남준이 자신을 쫓아내려 하자 더 큰 소리로 외쳤다.“유남준 씨, 이 말을 듣기 싫은 거죠? 뭐, 당연하죠. 형의 여자를 뺏어갔다니, 저라도 그런 꼴은 못 참겠어요!”만약 그녀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유남준은 벌써 그녀에게 직접 손을 댔을 것이다.곧
박민정의 시선이 우연히 유남준과 마주쳤고 그 순간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유남준은 숨이 가빠지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입술이 닿기 직전 박민정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저기... 어젯밤 감사했어요.”박민정은 짧게 말한 뒤 유남준의 품에서 빠져나가려 했다.유남준의 품이 순식간에 비어지며 허전함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억지로 붙잡지 않았다.그도 조용히 일어났다.창밖에는 두껍게 쌓인 눈이 온 세상을 덮고 있었다.“기억나? 재작년 이맘때도 우리 여기 머물렀었잖아.” 유남준이 말을 꺼냈다.박민정은 그의 말을 들었지만 머릿속엔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두 사람은 먼저 읍내로 나가 식사를 한 뒤 어머니 같은 존재였던 은정숙을 찾아가 제사를 지냈다. 이후 차를 타고 진주시로 향했다.진주시는 여전히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길 위에는 삼삼오오 모여 눈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지나갔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민정은 잠시 멍해졌다.‘만약 내가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나도 지금쯤 저렇게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을까?’하지만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몇 개의 희미한 기억의 조각들뿐이었다.“잠시 후 우리 집, 본가로 갈 거야.” 유남준이 그녀를 바라보다 나지막이 말했다.박민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본가요?”“응, 우리 집.”유남준의 대답에 박민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마침 그녀도 그곳에서 두 아이를 보고 싶었다.유씨 가문의 저택에서 고영란은 요즘 완벽한 가정의 화목을 누리고 있었다.자식과 손자들이 곁에 머물렀고 두 아이는 날마다 그녀를 웃게 했다.박민정이 온다는 소식에 그녀는 하인들에게 특별히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도록 했다.차가 저택 입구에 도착하자 고영란은 직접 마중을 나왔다.“민정아, 어서 와서 앉아.”박민정의 기억 속 고영란은 어린 시절에만 머물러 있었다.그때의 고영란은 차갑고 냉담한 분위기를 풍기며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사람이었다.박민정은 어릴 적 그녀를 조금 두려워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박민정과 유남준은 오늘 하루 동안 많은 곳을 둘러보며 꽤 많은 기억을 떠올렸다.저녁이 되어서야 둘은 시골의 집으로 돌아왔다.박민정은 약간의 후회를 드러냈다.“벌써 열 시가 넘었네요. 지금 진주시로 돌아가면 새벽이 되어야 도착하겠어요.”유남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그럼 오늘은 여기서 묵자. 밤늦게 운전하는 건 위험하니까. 게다가 돌아가면 다른 사람들을 깨울 수도 있잖아.”박민정은 타인의 사정을 가장 먼저 고려하는 성격이었기에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여기서 자는 걸로 할게요. 그런데 괜찮을까요?”“물론 괜찮지.”유남준은 내심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된 것이 몹시 반가웠다.박민정이 말한 건 두 개의 방이 있다는 뜻이었지만 유남준은 하나의 방을 생각했다. 그녀는 집 안을 둘러본 뒤 침실이 하나뿐임을 깨닫고 이렇게 말했다.“그럼 저는 거실 소파에서 잘게요.”여기는 박씨 가문의 본가와는 달랐다. 박씨 가문의 저택은 침실 안에도 넉넉한 공간이 있어 소파를 두는 게 가능했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유남준은 단 한 순간도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그럼 나도 소파에서 같이 잘게.”그의 대답에 박민정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그러지 말고 각자 따로 자요.”박민정은 비록 기억의 조각들을 조금씩 되찾고 있었지만 유남준과의 관계가 너무 빨리 진전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유남준은 억지로 그녀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혼자 침실에서 자게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여기는 외딴곳이라 네가 혼자 소파에서 자는 건 걱정돼. 침실 침대는 넓으니까 네가 불편하면 이불 하나로 우리 사이를 막아두면 되잖아. 어때?”그는 마치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박민정은 망설이면서도 밖에서 들려오는 거센 바람 소리에 마음이 흔들렸다.“...좋아요.”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남준은 곧바로 이불을 가져와 침대 가운데를 나누고 각각 이불을 하나씩 준비했다.유남준이 침대에 눕고 나서야 박민정도 몸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로
전날 밤 악몽 탓에 잠을 설친 박민정은 차 안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어느덧 차는 어느새 시골에 도착해 있었다.유남준은 그녀를 깨우지 않고 운전기사에게 차를 잠시 멈추게 했다.박민정은 깊이 잠들지 못했는지 몸을 비틀다가 그만 유남준의 품으로 넘어질 뻔했다.그는 재빨리 그녀를 받아 안았다.박민정은 흐릿한 의식 속에서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다가 자신이 그의 몸에 기대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당황스러워 얼굴이 붉어졌다.“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유남준은 고개를 저었다.“사과할 일은 아니야. 가자, 다 왔어.”벌써 도착한 걸까?박민정은 창밖을 보았는데 새하얀 눈 아래 작은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그곳은 어린 시절 그녀와 정숙 아줌마가 함께 살던 집, 그녀의 진짜 집이었다.어릴 적 기억의 단편들이 박민정의 머릿속에서 하나둘 떠올랐다.“맞아요, 여기가 바로 그 집이에요.”그녀는 유남준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가가 뜨거워졌다.“아줌마, 나 돌아왔어요.”박민정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이제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차가운 바람이 귀를 스치고 박민정은 눈 덮인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집으로 향했다.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녀는 문이 잠겨 있다는 것을 깨닫고 멈칫했고 그때 유남준이 다가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박민정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당신한테 여기 열쇠가 왜 있어요?”“예전에 네가 나한테 맡겼잖아. 우리 여기서 잠시 함께 살았었지.”“우리가 여기서 같이 살았다고요?”박민정은 이 말에 믿기지 않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명품 정장에 품격이 넘치는 태도를 지닌 그가 이렇게 낡은 집에서 자신과 함께 살았다는 사실이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유남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응. 예전에 네가 자꾸 삐져서 가출했잖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도 따라왔지.”그의 농담 섞인 말에 박민정은 어리둥절하면서도 놀랐다.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집 안을 둘러보았다. 테
박민정은 방을 옮기면 더 편히 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밤새 끊임없이 악몽에 시달렸다.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꿈, 정숙 아줌마의 죽음, 그리고 한수민의 죽음까지...꿈속의 모든 일들이 희미하고 불분명했지만 그 슬픔은 그녀의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아침에 눈을 뜨고 나니 꿈에서 겪은 구체적인 상황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 모든 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박민정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꿈을 되짚어보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떠오르는 게 없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했다.세수를 마치고 거실로 나온 박민정은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누나.”동생 박민호였다.박민호는 언제 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를 보자마자 환한 미소를 지었다.박민정은 그를 보고도 별다른 반가움을 느끼지 않았다. 지난 1년 동안 그녀는 박민호를 몇 번이나 마주쳤기 때문이었다.“응, 여긴 웬일이야?”박민정의 목소리는 차가웠다.유남우가 그녀를 속이고 있을 때, 박민호는 늘 유남우를 도와 거짓말을 꾸미는 데 일조했다.박민호도 그녀의 냉랭한 태도를 눈치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박민정 앞으로 다가왔다.“누나, 설마 나한테 화난 거야? 나도 남우 형한테 속았던 거라고!”박민정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속았다니, 무슨 말이야?”“남우 형이 그러더라고. 유 대표가 진심으로 누나를 대하지 않는다면서 오직 형만이 누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나도 예전에 유 대표가 누나에게 잘못했던 걸 생각하니 누나가 더 사랑받는 사람이랑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형 말을 믿었지.”박민호는 한 단어 한 단어 신중히 말했지만 박민정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그래? 알겠어. 그럼 이제 무슨 일로 온 건데?”박민호는 비로소 본론으로 들어갔다.“누나, 기억은 얼마나 돌아왔어? 뭐라도 생각난 거는?”박민정은 솔직히 말하지 않고 고개만 저었다.“아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그래? 괜찮아, 천천히 떠올리게 될 거야.”박민호는 옆에 있는 과일 바
비서는 정 대표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고 재빨리 나서서 말을 보탰다.“아가씨, 대표님께서 아가씨를 정말 많이 보고 싶어 하십니다. 한 번만이라도 시간을 내서 찾아뵐 수 있을까요?”“대표님께서 예전에 잘못하신 건 전부 아가씨의 정체를 모르셨기 때문이에요. 이제 모든 걸 아시고 정말 많이 후회하고 계십니다.”이 말을 듣자마자 박윤우가 재빨리 박민정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당신들은 다 나쁜 사람들이에요! 우리 엄마를 데려갈 생각하지 마요!”“윤우 군, 저희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대표님은 윤우 군 엄마의 친엄마세요. 절대 두 분을 해칠 분이 아니세요.” 비서는 간절히 설득했지만 박윤우는 냉소를 띠며 되받아쳤다.“그럼 예전에 우리 형이 죽을 뻔한 건 누가 그랬는데요? 엄마 얼굴이 이렇게 된 건 또 누구 탓인데요?”비서는 말문이 막혔고 ‘그건 전부 오해’ 라고 간신히 변명했다. 하지만 그녀가 말을 더 하기도 전에 정수미가 그녀를 제지했다.박윤우는 여전히 비웃는 얼굴로 말했다.“그럼 하나만 물어볼게요. 우리 엄마가 정 대표님 딸이 아니었다면 자기 잘못을 인정했을까요? 우리 엄마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냥 끝까지 괴롭혔겠죠?”“옳고 그름도 모르는 사람이 자기 딸만 감싸고 우리 엄마를 다치게 했어요. 이제 와서 용서를 구한다고요? 웃기지 마요!”박윤우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 정수미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새삼 절실히 깨달았다.“미안하다...”정수미는 고개를 숙이며 박민정에게 사과했다.“민정아, 엄마가 잘못했다. 엄마가 옳고 그름도 모르고 소현이만 감싸느라... 그래서 이렇게 됐어.”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고 목소리는 점점 떨려왔다. 하지만 박민정은 그녀의 이런 모습에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아이조차 아는 간단한 이치를 성인이자 회사 대표인 그녀가 몰랐다는 것이 더 의아했다. 그저 자기 편을 감싸기에 바빴던 사람일 뿐이었다.“정 대표님, 더 할 말이 없으시면 저희는 먼저 들어가겠습니다.”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