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는 얇은 잠옷을 입고 온몸이 흠뻑 젖은 채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박민정을 발견했다. 그녀의 손과 다리는 이미 새빨갛게 할퀸 상처들로 가득했다. 그는 재빨리 물을 잠그고 가운을 집어 박민정의 보일 듯 말 듯 한 몸을 가렸다.“괜찮으세요?”그의 목소리는 그리 낮은 편은 아니었으나 박민정의 귀에는 그저 희미하게 들릴 뿐이었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박민정은 창백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괜찮아요”“제가 병원까지 모셔다드릴게요.”정민기가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으려 하자 그녀는 옆으로 피하며 말했다.“안 돼요. 진주에 있는 모든 병원은 전부 김씨 가문의 손아귀에 있어요. 그리고 김인우도 내가 돌아온 것을 이미 알고 있고요. 혹시라도 내가 약을 먹은 것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김인우는 분명 유남준에게 말할 거예요. 유남준이 술에 약을 탔다는 걸 알면 앞으로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는 겨우겨우 긴 말을 끝냈다.4년 전, 그녀는 자기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었다.연지석의 도움이 없었다면 절대 김인우를 속일 수 없었을 것이다.연지석이 곁에 없는 지금, 그녀가 병원에 간다면 그쪽 사람들은 분명 김인우에게 가장 먼저 알릴 것이다.박민정이 병원을 가지 않고 혼자 이겨내겠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정민기는 욕실에 들어오기 전, 거실 바닥에 쏟아진 술을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하게 되었다. 그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하지만 지금 민정 씨 몸 상태가...”“얼음 좀 가져다주세요.”“네. 알겠어요.”정민기는 주방에 들어가 냉장고에서 얼음을 가져왔다.얼음 한 봉지를 통째로 욕조 안에 넣자 살을 에는 듯한 차가움이 박민정의 달아오른 몸을 그나마 편하게 했다.정민기는 또 의약 상자를 가져와 그녀 옆에 놓았다.“고마워요.” 박민정은 진심 어린 말투로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정민기는 아무 말도 없이 욕실을 나가 그녀가 정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면서 연지석에게 그녀의 안부도 전해줬다.몇 시간
이지원은 조금 전 유남준의 마지막 말을 듣고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워낙 생각이 많은 서다희는 그녀의 물음에 한두 마디 야유를 퍼부었지만, 박민정이 돌아왔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알리지 않았다.눈치 빠른 이지원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속으로 서다희를 욕하며 유남준에게 다가갔다.“오빠, 명절이 곧 다가온다고 어머님이 오늘 저녁에 같이 밥 먹자고 했어요.”이지원이 말하는 어머님은 바로 유남준의 어머니이다.분명 또 두 사람이 빨리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라는 말을 하기 위함일 것이다. 유남준은 고개도 들지 않고 한 마디 툭 내뱉었다.“알았어.”그의 대답을 들은 이지원은 사무실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저 오늘은 별일 없으니 여기서 기다릴게요.”하루 종일?유남준은 그녀를 힐끗 보며 한마디 했다.“그렇게 한가해?”이지원은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태연한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편 유남준은 그녀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나는 일할 때 남이 옆에 있는 거 안 좋아해.”그의 말에 이지원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그저 한마디만 내뱉었다.“그럼, 밖에서 기다릴게요.”유남준이 더 이상 대꾸하지 않자 이지원은 내키지 않은 얼굴로 대표이사실을 나섰다.유남준의 차갑게 거절하는 얼굴은 예전에 사귀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늘 변함이 없었다.이런 사람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박민정뿐일 것이다.기분 전환을 위해 밖으로 나간 이지원은 김인우의 사무실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비서에게 물었다.“인우 오빠 요즘 안 오나요?”“요즘 집안 어르신들이 김 대표님에게 결혼 준비를 하라고 해서 못 왔어요.”비서는 사실대로 대답했다.결혼?이지원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김인우는 이지원 때문에 집안 어르신들이 안배한 혼사를 거절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하지만 요즘 집안 어르신들이 한창 김인우의 결혼 준비를 한다는 말에 이지원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씁쓸했다.“상대방이 누군데요?”이지원은 궁금한 마음에 비서에게 물었다.비서
고아로서 어릴 때부터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이었다.김인우의 말은 그녀가 처음 재벌 2세들과 합류했을 때 얼마나 많은 추태를 부렸는지, 몇 년 전에 얼마나 창피했는지를 상기시켜 주었다."내가 유씨 가문의 며느리가 되면 누가 나를 무시할지 보자!”이지원이 박민정을 언급하지 않은 걸 보니 그녀가 돌아온 걸 모르는 것 같았다.김인우는 9번 공관 밖에서 계속 기다렸다."도련님, 민정 씨는 오늘 내내 안 나오셨어요. 제가 가서 문을 두드려볼까요?"보디가드는 그를 기다리게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김인우는 거절했다."아뇨, 그냥 여기서 기다릴게요.”어제 박민정이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나서 그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설렘을 느꼈고 즉시 그녀를 찾아가 그해의 일을 묻고 싶었다.하지만 그가 박민정을 괴롭혔을 때를 생각하면 그는 감히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한번 기다리기 시작하니 벌써 두 시간이 지났다.박민정은 어젯밤에 얼음물에 샤워해서 오늘 감기에 걸린 듯 머리가 어지러웠다. 정민기가 그녀에게 약을 사줬는데 마신 후에도 여전히 몸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외투를 걸치고 어제의 긁힌 상처를 가리고 밖에서 기분 전환을 하려고 공관을 나왔다. 여름인데도 긴 옷에 긴 바지를 입고 있는 그녀는 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의사는 어젯밤 일로 그녀를 다시 병원에 입원시킬 뻔했다고 말했다. 앞으로 천천히 신중하게 의논해야 할 것 같다고 하셨다.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차를 눈치채지 못한 박민정이 그대로 지나가려 하자 김인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어... 민정아.”박민정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며 멍하니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김인우는 곧장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가에 이르러서는 다 사라져 버렸다."그동안 잘 지냈니?”‘잘 지냈냐고?'그녀가 마음속으로 냉소를 지었다.‘내가 잘 못 지내지 않기를 가장 바라는 사람이 아닌가?'그녀는 입술을 꼭 오
박민정은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남자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죄송합니다만 몇 년 전에 아팠던 적이 있어서 많은 사람과 일을 기억하지 못해요.”말을 마친 박민정은 돌아서서 공관으로 돌아갔다. 김인우의 큰 몸집은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기억이 안 난다고?'그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감명을 받지 못했다. 보디가드도 도련님이 이렇게 넋이 나가시는 걸 처음 보기 때문에 앞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공관으로 돌아와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박민정은 에스토니아 공항에서 절친 조하랑이 미리 비행기 표를 끊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오늘 밤이면 진주시에 도착할 것이었다. 그리고 박예찬도 인터넷에서 같은 비행기 표를 사서 몰래 비행기에 올랐다.저녁 7시에 조하랑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그녀는 트렁크 높이도 안 되는 운동복 차림에 마스크와 모자까지 쓴 박예찬이 뒤따라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자신보다 더 큰 캐리어를 끌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이상한 시선에 조하랑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사람들의 비난 소리가 높았다."엄마가 어떻게 아이한테 저렇게 큰 가방을 끌고 다니게 할 수 있지.”"90년대 엄마들은 기가 막히네.”"저런 사람은 엄마가 될 자격이 없어.”‘이상하네, 왜 다들 날 잡아먹으려는 것 같지?'박예찬의 진지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나서야 그녀는 큰일이 났다는 것을 알았다."엄마, 걸을 때 전화하면 안 돼요.”조하랑은 자신이 언제 아들을 낳았는지 궁금했다. 커다란 상자를 끌고 마스크와 모자를 쓴 채 빛이 나는 순진한 눈망울을 돌아보던 그녀는 하마터면 발을 동동 구를 뻔했다.욕을 하고 싶은데 할 수 없었다. 만약 박민정이 그녀의 아들이 몰래 따라온다는 것을 알았다면 미쳐버릴 것이 틀림없었다.공항의 많은 사람은 몰랐지만 그의 말을 듣고 순간 마음이 아프면서 사랑스럽기도 했다."귀여워, 철이 든 아가야.”"내 아들이었으면 좋겠다.”"이렇게 무책임한 엄마
"...... "‘이 녀석은 꼬맹이가 아니야.'박예찬은 조하랑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이미 왔는데 걱정하지 마, 이모. 내가 엄마에게 가서 사과할게.”조하랑은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지 않았다. 어린아이한테 당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혼자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 녀석이 혼자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도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너 말 잘 듣고 여기 있어. 민정이한테 전화하고 올게. 그렇지 않으면 민정이랑 할머니가 널 걱정하겠어.”"걱정 마, 내가 할머니랑 같이 가자고 메모 남겨놨어.""..."그녀는 휴대전화를 들고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한편, 박민정은 따뜻한 물 한 잔을 들고 베란다에 앉아 전화를 받았다."하랑아.”조하랑은 뭔가 찔리는 듯한 표정으로 옆에 있는 박예찬를 바라보았다."민정아, 그, 그게…. 서프라이즈 해 주고 싶었는데 그만...”"왜 그래?""나 진주시로 돌아왔어. 지금 공항인데... 예찬이가 날 따라왔…네? 아하하…”박민정의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조하랑이 박예찬에게 휴대전화를 건네며 입모양으로 "스스로 해명해"를 외쳤다."엄마, 이모 탓하지 마. 내가 몰래 항공권을 끊고 따라온 거야.”"엄마 혼자 진주시에 있으니까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혼자 몰래 비행기 티켓을 샀다고?'박예찬이 똑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린아이가 혼자서 공항에 갈 줄은 몰랐다."박예찬! 엄마가 너한테 했던 말 잊었어?”"엄마가 보고 싶은 걸 어떡해. 걱정도 되고.”박예찬은 대답 대신 이렇게 말했다.박민정은 갑자기 목이 메어 대답하지 못했다. 조하랑도 박예찬이 한 말에 놀라 몸을 웅크리고 앉아 휴대전화를 가져와서 말했다."민정아, 걱정하지 마. 내가 예찬이를 데리고 있을게. 유남준이 예찬이를 발견하지 못하게.”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화를 끊기 전에 그들은 한 음식점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조하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박예찬을 바라보았다. 두 그림자가 함께 공항 밖으로 걸어 나갔다.
[알겠어.]마침내 일을 그만둔 그를 본 이지원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아줌마가 재촉하셨어요?”유남준의 얇은 입술이 가볍게 열리며 말했다."아니야.”그녀는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다 입을 닫았다. 그리고는 그의 시선이 창밖으로 간 것을 발견했다. 차량은 금월호텔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벤틀리 한 대에서 한두 명이 내렸다.유남준의 시선은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말할 수 없는 익숙함이 느껴지는 그 작은 소년에게로 쏠렸다. 그는 두 사람이 식당 입구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유남준은 운전 기사에게 말했다."차 세워.”이지원은 좀 이상해서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그는 대답도 하지 않고 문을 밀고 곧장 내려갔다.조하랑이 박예찬을 데리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화장실이 급해서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어 데리러 오라고 했다. 그녀가 문을 나서자 양복 차림의 빳빳한 유남준이 곧장 자신을 향해 걸어왔다.순간적으로 손바닥에 땀이 줄줄 흘러서 그녀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돌아섰다."우연이네."유남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박민정은 피할 수 없었다. 그녀는 조하랑과 박예찬이 지금 올라오지 않기를 기도했다."유 대표님도 여기 식사하러 오셨나요?"그녀가 한마디 대꾸했다."전 아직 일이 좀 있어서 방해하지 않을게요.”"민정아."막 가려는데 조하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민정의 가슴이 뜨끔했다. 유남준은 계단을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하랑과 박예찬은 계단을 올라왔을 뿐 유남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인사를 한 것이었다.그는 소리를 듣고 조하랑과 박예찬을 바라보았다. 박예찬은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그의 까만 눈동자는 유남준에게 이상한 익숙함을 줬다.사방이 갑자기 고요해졌다. 조하랑이 완전히 굳어 있었다. 박민정은 아들이 자신을 부를까 봐 숨을 죽였다."민정 이모, 안녕하세요.”말을 마치고 그는 조하랑의 손을 잡았다."엄마, 배고파. 빨리 이모랑 밥 먹자.”조하랑은 정신을 차렸다."가자, 민정아.”그녀는 박예찬의 손을
박예찬의 작은 얼굴이 잘 익은 사과같이 더 빨개졌다.그는 기침을 두어 번 하고 목소리를 낮추었다."엄마, 난 어린아이가 아니야. 게다가 이모도 있는데.”이 말 때문에 방금 유남준때문에 파괴되었던 분위기가 정상으로 돌아와 떠들썩해졌다.조하랑은 처음으로 박예찬이 부끄러워하는 것을 보고 놀리기 시작했다."엉덩이를 맞은 적이 있었구나!""아니거든!”이런 박예찬이야말로 어린아이 같았다. 박민정은 다급하게 해명하는 아들을 보며 화가 사그라들었다. 박예찬과 박윤우는 하늘이 준 보배라서 그녀가 전혀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리고 여기로 오는 길에 그녀는 생각했다.‘나는 계속 유남준을 피할 수 있지만 두 아들도 계속 숨어 있어야 해? 분명 아무 잘못도 없는데 왜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없고 집이 있어도 돌아갈 수 없는 거지?'그리고 오늘 이 갑작스러운 상황은 그녀로 하여금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 결정하게 했다.밥을 먹을 때, 조하랑이 사람을 찾아서 박예찬을 돌려보내려고 건의했다가 박민정에게 거절당했다."생각해 봤는데 계속 숨어 있는 게 최선의 해결 방법은 아닌 것 같아.”"예찬이를 여기에 남아 있게 하도록 결정했어.”"남준 씨도 이미 예찬이를 보았고 예찬이가 네 아들이라고 생각하니까 걱정할 것 없어.”"조금 있다가 할머니께 거기서 윤우를 돌보라고 말씀드릴게. 예찬이는 나와 함께 진주시 있다가 진전이 있으면 다시 돌아가자.”조하랑도 이에 동의했다."할머니 쪽에는 간병인이 있지만 어르신 한 명이 두 아이를 돌보기엔 벅차. 예찬이가 남아 있으면 너랑 같이 있을 수도 있고.”"남준 씨가 알아도 겁낼 것 없어 나랑 연지석이 있잖아.”"나도 있어, 엄마. 내가 꼭 엄마랑 윤우를 지켜줄게.”박예찬이 말했다.박민정과 조하랑이 그 말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그래.""그럼 내가 먼저 예찬이를 데리고 갈게. 네가 임신하기 전에 예찬이는 먼저 나랑 같이 있고. 네가 그를 만나고 싶을 때 내 쪽으로 와."조하랑이 말했다. 지금은 이럴 수밖에 없었다. 박민정은
박예찬은 그녀의 말을 듣고 순결을 지키지 못한다는 생각만 들었다.얼마 후 그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바로 자기 방으로 가서 쉬었다....한편, 고씨 저택.경호원은 유남준에게 박민정이 식당에서 밥을 먹은 후 공관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전했다.그리고 그의 심드렁한 모습은 이지원과 고영란의 눈에 그대로 비쳤다.“지원아, 너 오늘 어렵게 온 건데 그냥 여기서 자고 가. 내일 우리 남편도 돌아올 거야. 널 만나고 싶어 하셔.”유명준은 사랑꾼 탕아로 쉰 살이 넘었건만 정을 여기저기 뿌리고 다니며 좀처럼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이지원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유남준은 그녀들 사이의 대화에 무관심했고 아무렇게나 음식을 먹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식탁을 떠났다.“어디 가니, 남준아?”고영란이 궁금해하며 물었다.“집 갑니다.”그녀는 더욱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거긴 남준이가 예전에 결혼한 뒤 박민정과 함께 살던 곳인데 무슨 집 이긴 집이야?’“오늘은 여기 머물러 있어라. 내일 네 아버지가 돌아올 테니, 너와 지원이의 혼사도 상의해보자꾸나.”‘혼사?’유남준의 깊은 눈동자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저 아직 이혼하지도 않았는데, 무슨 혼사에요?”그러자 고영란은 갑자기 마음 한쪽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한쪽에 있는 이지원은 안색이 변하지 않았지만, 젓가락을 쥔 손이 저절로 조여졌다.‘박민정이 죽은 지가 언젠데, 이혼하고 말고가 그렇게 중요한가?’이윽고 유남준이 발걸음을 돌려 밖으로 걸어갔고 이지원이 그의 뒤를 따랐다.“오빠!”유남준은 발걸음을 멈추었고 이지원은 서둘러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오빠, 내가 뭐 잘못했어요? 왜 지금까지도 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거예요? 오빠가 박민정이랑 결혼한 후로 지금까지 나 8년 동안 오빠 기다렸어요.”이지원은 눈가에 눈물을 머금고 말을 이어갔다.“내가 오빠한테 어울리지 않을까 봐 줄곧 노력해 왔고, 어렵게 지금 이 자리에 서게 된 건데... 이제야 감히 오빠한테 다가갈 수
최현아는 계속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다.“이렇게 보면 또 남자가 너무 잘생기고 능력이 좋아도 파리들이 많이 꼬여서 마냥 기쁜일만은 아닌것 같네. 그러니까 동서도 조심해.”박민정은 그녀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어린애도 아닌데 아무리 감시하고 조심한다고 되겠어요? 그냥 신경끄고 자기 삶을 사는게 낫을 것 같네요.”최현아는 박민정이 이렇게 쿨하게 나올줄은 생각지도 못해 순간 할 말을 잃었다가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이따가 텐트도 쳐야 할 텐데 혹시나 도울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사람 보낼 테니까.”말을 마친 뒤 자리를 떴다.“네, 고마워요.”최현아가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유남준이 박민정의 곁으로 돌아왔다.그런데 이상하게도 방금 유남준의 곁에서 맴돌던 학부모들의 안색이 저마다 어둡더니 더 이상 그와 말을 걸지 못하는 눈치였다.“저 사람들이랑 무슨 얘기를 나눴어요?”유남준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박민정의 관심에 일부러 입을 삐쭉거리며 답했다.“맞춰봐.”그러나 박민정은 그의 도발에 순간 흥미가 뚝 떨어졌다.“됐어요. 그럼 전 텐트 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자리를 뜨는 박민정을 보고 유남준도 냉큼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별일 아니고 IM 그룹이랑 협력하고 싶다고.”“그렇군요.”갑자기 냉담해진 박민정의 태도에 유남준은 그녀의 생각을 더욱 알기 힘들었다.“민정아, 화났어?”그의 물음에 박민정은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아니요? 제가 왜 화 나요?”유남준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거짓말하는 건 같지 않아 오히려 마음이 더욱 불편했다.“내가 다른 여자들이랑 수다를 떨어도 너는 아무렇지 않다는 거네?”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텐트를 들고 그녀를 지나쳐 앞으로 걸어 나갔는데 박민정은 그제야 유남준이 화났다는 걸 눈치챘다.유남준이 혼자서 말없이 텐트 치는 모습을 보고 있던 박예찬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재빨리 박민정에게 다가와 물었다.“엄마, 무슨 일이야?”박민정은 순간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몰라
박민정은 장연수란 사실을 발견하고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연수 씨, 무슨 일이에요?”장연수는 살짝 당황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민정 씨, 제가 오늘 오면서 돗자리를 못 챙겼는데 혹시 같이 밥 먹어도 될까요?”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세요.”어차피 갖고 온 돗자리 사이즈가 커서 비좁지는 않았다.장연수는 그녀의 허락에 활짝 웃더니 지원이만 남기고 먹거리 가지러 달려갔다.그러나 유남준은 그런 장연수의 행동이 의심스러워 박민정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내가 다른 돗자리 사 오라고 할게.”“지금 사러 가도 이미 늦었어요. 아쉬운 대로 그냥 먹어요.”“그래.”이때 장연수는 어느새 음식을 한 보따리 가져와서 돗자리에 올려놨다.“제가 직접 한 음식들인데 괜찮으면 같이 먹어요.”“감사합니다.”그러다가 그녀느 문득 유남준을 바라보며 그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유 대표님의 명성은 오래전부터 익히 들었고 저희 남편도 자주 언급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예전에 어느 연회에서 대화도 나눴다던데요?”“그래서 제가 오늘 대표님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을 저희 남편이 듣더니 대표님 명함 하나만 부탁하던데 혹시 받아볼 수 있을까요?”박민정은 그제야 장연수가 오늘 그들에게 접근한 의도를 알아챘다.그러나 남편의 이익을 위해 관계를 맺는 건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유남준도 그녀가 그저 학부모라고 생각하고는 선뜻 자기 명함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장연수는 밥 먹을 때도 유남준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으면서 어렴풋이 자기 남편과 같이 협력해 주기를 바란다는 의지를 드러냈다.그러나 유남준은 그저 예의상 몇 마디 대답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그렇게 식사 자리가 끝난 뒤 장연수는 박민정이 뒷정리하는 걸 가로막으며 자신이 하겠다고 나섰고 박민정도 진작에 그녀의 의도를 눈치채고는 쉽세 물러서지 않았다.“지원이 엄마, 제가 하면 돼요.”“아니요. 이건 제가 정리할게요. 민정 씨는 아이들이랑 놀아
최현아는 유남준이 계속 따라오는 게 불편했다. 그가 옆에 있으면 박민정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다른 사람에게 굳이 부탁할 필요 없이 저만 따라가는 게 왠지 더 안심될 것 같네요.”유남준의 말에 최현아는 더욱 거절할 수 없게 되었다.이때 학부모들은 박민정 곁에 서 있는 유남준에게 눈길을 몇 번 더 주더니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저렇게 잘생기고 능력도 좋은 남편이 있는 걸 보면 예찬이 엄마는 참 복도 많아.”“그러게요. 그러니까 태어난 아들도 똑똑한가 보죠. 지난번 수학 경시대회에서도 1등 했다던데요?”“우리 딸이 나중에 예찬이랑 결혼했으면 좋겠네요.”“꿈 깨요.”그들은 말하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오늘 유남준 외에도 많은 아이의 부모님들이 야외 캠핑을 즐기기 위해 참석하게 되었다.그리고 각자의 차에 올라탄 뒤 함께 출발했다.박예찬은 차에 올라타서도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엄마, 요즘 몸은 괜찮아? 어디 아픈 데 없어?”박민정이 웃으며 답했다.“많이 좋아졌어. 기억들도 서서히 돌아오는 것 같고.”순간, 박예찬의 눈빛이 반짝거렸다.“뭐가 기억났는데?”“너랑 윤우에 관한 기억인 것 같은데 너무 흐릿했어.”박민정의 말에 박예찬은 소리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당장에라도 박민정을 꼭 안아주고 싶었지만 부끄러워 차마 그러지 못했다.“엄마, 건강도 챙기고 밥도 많이 먹어야 해.”말을 마친 뒤 그는 주머니에서 핫팩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줬다.“아직 추우니까 손에 쥐고 있어.”이건 같은 반에 여자아이가 박예찬에게 준 물건이었다.박민정은 손에 든 핫팩을 바라보다가 무심결에 자기 아들이 말은 투박해도 참 따뜻한 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순간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우리 아들, 고마워.”그러다가 자기 아들을 꽉 안아줬는데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박예찬은 순간 얼굴이 빨개졌다.그러나 옆에서 이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유남준은 괜스레 마음이 씁쓸해지기 시작했다.아침에 그녀를 위해
유남준은 쉽사리 상대할 인물이 아니었지만 박민정은 그에게 있어 유일한 약점이었다.최현아는 학부모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남겼다.[여러분, 선생님과 상의한 끝에 봄도 왔겠다 싶어 아이들과 함께 교외로 소풍을 가려고 합니다. 좋은 날씨를 놓치지 말고 모든 학부모님께서 꼭 참석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그녀의 제안은 순식간에 대다수 부모들의 찬성을 얻었다.박민정도 그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 모든 학부모가 참여한다니 혼자 거절하기도 애매해 결국 그녀도 동행하기로 했다.최현아는 박민정의 답변을 확인하고 살짝 안도했다. 곧바로 그녀에게 개인적으로 주의 사항을 보냈다.[동서, 이모님께 들으니 동서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하더라. 예찬이를 데리고 가려면 조심해야 할 거야. 여기 필요한 물품 리스트가 있어. 소풍뿐만 아니라 캠핑도 할 거니까 모기 기피제나 감기약 같은 것도 꼭 챙겨가도록 해.]박민정은 메시지를 확인하고 간단히 답장을 보냈다.[고마워요.]그 무렵,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지원이 엄마였다.[예전엔 이런 소풍이나 캠핑 같은 걸 한 적이 없었는데 올해는 어쩐 일로 최현아가 나서서 추진하는 걸까요?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이제 완전히 박민정의 편이 된 지원이 엄마였다.박민정도 신중한 태도로 답장을 보냈다.[어떻게 돌아가는지 좀 더 지켜봐요.][네, 알겠어요.]박민정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유남준에게 박예찬과 함께 교외로 소풍을 가야 한다고 말했다.이 말에 유남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너 혼자?”박민정은 가볍게 끄덕였다.“네, 학교에서 부모 한 명만 동행하면 된다고 했어요.”유남준의 대답은 단호했다.“안 돼. 나도 같이 갈 거야.”그녀와 박예찬을 단둘이 외부에 내보내는 건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박민정은 그를 올려다보며 망설였다.“근데 남준 씨는 회사에 나가야 하잖아요?”“일은 언제든 할 수 있지만 소풍은 1년에 몇 번 있지도 않아. 그런데 날짜는 언제야?”“모레예요.”“좋아. 내
정호철은 박예찬이 다니는 유치원을 알아낸 후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그 앞에서 기다렸다.멀리서 유치원으로 들어가는 아이의 모습을 보자마자 그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아이는 단순히 잘생긴 것뿐만이 아니었다. 머리도 비상해 아이들 무리 속에서도 단연 돋보였다.한편, 박예찬도 누군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최근 들어 유지훈은 박예찬이 곤경에 빠지길 기다렸다. 자신의 부모가 다시금 세력을 되찾기를 기대하며 버텼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예찬아.”그가 서둘러 박예찬의 곁으로 다가가자 박예찬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무슨 일이야?”“우리 다시 친해지자.”“친해지자고?”박예찬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너, 얼마 전에 나랑 안 놀겠다고 하지 않았어? 앞으로 난 네 졸개고 넌 유씨 가문의 후계자라고도 했지?”유지훈의 얼굴이 금세 새빨개졌다.“그건... 그냥 농담이었어!”“아, 농담이었어?”하지만 박예찬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최근 그는 김훈에게 부탁해 자신의 주변 경호를 한층 더 강화했다. 혹시라도 유지훈의 부모가 또 무슨 수를 쓸지 몰랐기 때문이다.“예찬아, 나 정말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우리 친구로 지내자, 응?”“난 친구 같은 거 필요 없어.”박예찬은 그의 손을 툭 뿌리치고 그대로 교실로 들어가 버렸고 유지훈은 제자리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표정에는 깊은 상실감이 묻어났다.“너도 거절당했구나?”그때 조동민이 다가왔다.“유지훈, 너 예찬이한테 퇴짜 맞았구나? 하하하!”유지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뭐가 그렇게 웃기냐? 조씨 가문의 자식이라고 나를 비웃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그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위협했다.“원장님한테 한 마디만 하면 널 유치원에서 내쫓는 건 일도 아니야.”조동민은 움찔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면서도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쪼잔하기는.”조동민이 떠난 뒤 유지훈의 기분은 더욱 나빠졌다
정수미와 정호철이 돌아간 후, 윤소현 역시 박민정의 말을 전해 들었다.“엄마, 아저씨. 두 분은 어른이잖아요. 사과하는 건 그렇다 쳐도, 대체 왜 감옥에 가겠다는 말을 진심으로 하신 거예요?”그녀가 가장 두려운 것은 이 일이 자신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정호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모두 내 탓이야. 그때 악행을 저지르지 말았어야 했는데... 결국 우리 식구들에게까지 화를 미치게 됐구나. 이렇게 된 것도 다 내 업보다.”그의 말을 듣자 정수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네 탓이 아니야. 모든 건 내 불찰이었어.”그녀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과거의 오만함이었다. 권세를 믿고, 남을 업신여겼던 그 시절.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소현은 눈에 노골적인 냉소를 띠었다.“이 일은 누구의 탓도 아니에요. 그때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민정이가 제 동생일 줄은.”정수미는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그게 친족이든 아니든, 우리는 애초에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됐어.”“그래.”정호철은 깊은 한숨을 쉬며 무릎 위를 주먹으로 툭 쳤다.“난 평생 대표님을 따라다니면서 함부로 약한 사람을 건드린 적이 없었어. 하지만 정씨 가문이 점점 커지면서 우리 마음가짐도 변하고 말았지.”그는 윤소현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소현아, 너도 이제 성격을 좀 고쳐야 한다. 더 이상 약한 사람들을 억누르려 해서는 안 돼. 너희 어머니와 나는 이제 나이가 많다. 앞으로는 너 혼자 가야 해.”그러나 윤소현은 그 말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아저씨, 어릴 때는 그렇게 안 말씀하셨잖아요? 전 정씨 가문의 장녀니까 원하는 건 뭐든 가질 수 있다고 하셨죠. 설령 빼앗아서라도 말이에요.”정호철은 말문이 막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정수미도 더 이상 그녀를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윤소현은 두 사람이 침묵하자 다시 물었다.“민정이가 저까지 감옥에 가라고 했어요? 설마 두 분도 그 말을 덥석 받아들이신 건 아니죠?”정호철은 고개를 저었다.“걱정 마라. 예전 일은 내
정호철이 박민정 앞까지 걸어가더니 말없이 무릎을 꿇자 박민정은 크게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뭐하는 거예요?”그때 정수미가 정호철의 곁으로 다가섰다.“민정아, 예전에 예찬이를 납치하고 목숨까지 위협한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내가 시킨 일이었어.”정호철 역시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작은 아가씨, 죄송합니다. 저는 이번에 죗값을 치르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 제 목숨을 내놓겠습니다.”그 말을 들은 순간, 정수미의 온몸이 떨렸다.정호철은 오랜 세월 자신의 곁을 지켜온 사람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그녀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민정아, 네게 부탁하고 싶구나. 이 사람을 용서해주겠니?”이 말을 꺼내는 데조차 정수미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사실 나야말로 용서를 구할 자격이 없어. 외할머니라는 사람이 정호철보다 더한 죄를 저질렀으니.”박민정은 이제야 그들이 찾아온 이유를 이해했다. 비록 그녀의 기억은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꿈속에서조차 박예찬이 위험에 처하는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그것은 자신의 아들의 목숨이었다. 그런데 쉽게 용서하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박민정은 주먹을 꽉 쥐었다.“제가 용서하지 않으면요?”그때 유남준이 조용히 다가와 그녀의 곁에 섰다.“정 대표님, 지금 이건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민정이는 아직 기억도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렇게 몰아붙이면 안 되죠.”정수미의 눈가가 붉어졌다.“그게 아니라...”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남준아, 민정아, 너희가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 봐. 할 수 있는 건 뭐든 하겠다.”정수미는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남준은 박민정을 바라보았는데 그녀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악문 채 말했다.“죄를 지었다면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죠. 당신과 정호철, 그리고 윤소현. 당시 당신들은 제 아들의
윤소현은 정수미와 정보주를 바라보며 속으로 차가운 결심을 내렸다. 정보주가 떠나는 순간부터 그녀의 계획이 시작될 것이었다.그날 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정수미는 직접 정보주를 공항까지 배웅했다.집으로 돌아오자, 윤소현은 여전히 깨어 있었다. 그녀는 다가와 따뜻한 우유 한 잔을 건넸다.“엄마, 우유 드세요.”“그래, 고맙구나.”정수미는 별다른 의심 없이 우유를 받아 들이켰다. 모두 마신 후, 그녀는 윤소현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오늘 너희 이모랑 함께 민정이를 만나고 왔어.”윤소현은 대범한 척 웃어 보였다.“이제 민정이가 엄마를 용서했나요?”정수미는 고개를 저었다.“아직도 나를 멀리해. 어떻게 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윤소현을 바라보았다.“소현아, 엄마가 유언장을 수정했어. 유산의 절반을 민정이에게 주기로 했다. 네가 너무 마음 쓰진 않았으면 좋겠구나.”유산의 절반!윤소현의 속에서는 거대한 파도가 일렁였다.대체 무슨 이유로 엄마라고조차 부르지 않는 그 애한테 재산의 절반을 넘겨야 한단 말인가? 왜 하필 박민정이에게?윤소현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엄마, 저는 오히려 모든 유산을 동생에게 주실 줄 알았어요.”“말도 안 되는 소리. 너도 내 딸인데.”정수미는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감쌌다. 그러나 윤소현은 그 손길이 너무나 역겨웠다.하지만 얼마 남지 않았다. 곧, 이 세상에서 정수미는 사라질 것이고 더는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엄마, 정말 고마워요. 저 같은 양녀까지 친딸처럼 대해 주시다니요.”겉으로는 감격한 듯 말했지만 그녀의 속눈썹 아래로는 차가운 빛이 스쳤다.정수미는 무언가 더 이야기하려 했으나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답답해졌다.“됐어, 이제 그만 자야겠다.”“네, 편히 쉬세요.”윤소현은 그녀가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그녀가 사라지자 윤소현은 들고 있던 우유 잔을 깨끗이 씻어냈다.“엄마, 날 원망하지 마세요. 애초에 엄마가 쓸
아침 식사를 하면서 정수미는 옆에서 몰래 정보주에게 비법을 전수받고 있었다.“넌 대체 어떻게 해서 민정이랑 그 친구들을 데리고 나온 거야?”“이건 가르쳐서 되는 일이 아니야, 언니.” 정보주는 여유롭게 말했다.“기억해야 할 건 단 하나,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가는 거야.”정수미도 급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이 그 시간을 견뎌낼 수 있을지 걱정될 뿐이었다.정보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독였다.“민정이는 착한 아이야. 언젠가는 스스로 깨닫게 될 거야. 우리한테 중요한 건 그 아이와 좋은 관계를 쌓는 거지, 어떤 신분으로 다가갈지는 중요하지 않아.”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고마워.”“우리 사이에 그런 말이 어딨어?”정보주는 정수미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관자놀이에 늘어난 흰 머리카락을 보니 괜히 마음이 아렸다.“언니, 제발 자기 몸 좀 더 신경 써.”갑작스러운 포옹에 정수미는 어색한 듯 몸을 살짝 빼면서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알았어, 근데 넌 왜 이래? 별일도 아닌데 자꾸 끌어안고.”“이렇게 해야 더 친밀한 느낌이 나잖아.”정보주는 장난스럽게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자, 가자. 민정이랑 그 친구들하고 같이 앉아서 먹자고.”“좋아.”정수미는 선뜻 동의했다.젊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니 왠지 자신도 한층 젊어진 기분이었다.다만, 그녀는 가끔씩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가빠졌다. 그녀는 자신의 몸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때, 진서연이 문득 떠오른 듯 말했다.“정 대표님, 저희 회사에 투자해 주신 거 정말 감사합니다.”정수미는 미소를 지었다.“별거 아니에요. 앞으로도 열심히 해요. 회사는 분명 더 성장할 거예요.”진서연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박민정 역시 놀라운 눈길로 정수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의 회사에 투자할 줄은 예상도 못 했던 것이다.식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졌다.한편, 오늘 윤소현은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제 정수미와 정보주가 변호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