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은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남자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죄송합니다만 몇 년 전에 아팠던 적이 있어서 많은 사람과 일을 기억하지 못해요.”말을 마친 박민정은 돌아서서 공관으로 돌아갔다. 김인우의 큰 몸집은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기억이 안 난다고?'그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감명을 받지 못했다. 보디가드도 도련님이 이렇게 넋이 나가시는 걸 처음 보기 때문에 앞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공관으로 돌아와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박민정은 에스토니아 공항에서 절친 조하랑이 미리 비행기 표를 끊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오늘 밤이면 진주시에 도착할 것이었다. 그리고 박예찬도 인터넷에서 같은 비행기 표를 사서 몰래 비행기에 올랐다.저녁 7시에 조하랑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그녀는 트렁크 높이도 안 되는 운동복 차림에 마스크와 모자까지 쓴 박예찬이 뒤따라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자신보다 더 큰 캐리어를 끌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이상한 시선에 조하랑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사람들의 비난 소리가 높았다."엄마가 어떻게 아이한테 저렇게 큰 가방을 끌고 다니게 할 수 있지.”"90년대 엄마들은 기가 막히네.”"저런 사람은 엄마가 될 자격이 없어.”‘이상하네, 왜 다들 날 잡아먹으려는 것 같지?'박예찬의 진지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나서야 그녀는 큰일이 났다는 것을 알았다."엄마, 걸을 때 전화하면 안 돼요.”조하랑은 자신이 언제 아들을 낳았는지 궁금했다. 커다란 상자를 끌고 마스크와 모자를 쓴 채 빛이 나는 순진한 눈망울을 돌아보던 그녀는 하마터면 발을 동동 구를 뻔했다.욕을 하고 싶은데 할 수 없었다. 만약 박민정이 그녀의 아들이 몰래 따라온다는 것을 알았다면 미쳐버릴 것이 틀림없었다.공항의 많은 사람은 몰랐지만 그의 말을 듣고 순간 마음이 아프면서 사랑스럽기도 했다."귀여워, 철이 든 아가야.”"내 아들이었으면 좋겠다.”"이렇게 무책임한 엄마
"...... "‘이 녀석은 꼬맹이가 아니야.'박예찬은 조하랑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이미 왔는데 걱정하지 마, 이모. 내가 엄마에게 가서 사과할게.”조하랑은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지 않았다. 어린아이한테 당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혼자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 녀석이 혼자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도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너 말 잘 듣고 여기 있어. 민정이한테 전화하고 올게. 그렇지 않으면 민정이랑 할머니가 널 걱정하겠어.”"걱정 마, 내가 할머니랑 같이 가자고 메모 남겨놨어.""..."그녀는 휴대전화를 들고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한편, 박민정은 따뜻한 물 한 잔을 들고 베란다에 앉아 전화를 받았다."하랑아.”조하랑은 뭔가 찔리는 듯한 표정으로 옆에 있는 박예찬를 바라보았다."민정아, 그, 그게…. 서프라이즈 해 주고 싶었는데 그만...”"왜 그래?""나 진주시로 돌아왔어. 지금 공항인데... 예찬이가 날 따라왔…네? 아하하…”박민정의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조하랑이 박예찬에게 휴대전화를 건네며 입모양으로 "스스로 해명해"를 외쳤다."엄마, 이모 탓하지 마. 내가 몰래 항공권을 끊고 따라온 거야.”"엄마 혼자 진주시에 있으니까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혼자 몰래 비행기 티켓을 샀다고?'박예찬이 똑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린아이가 혼자서 공항에 갈 줄은 몰랐다."박예찬! 엄마가 너한테 했던 말 잊었어?”"엄마가 보고 싶은 걸 어떡해. 걱정도 되고.”박예찬은 대답 대신 이렇게 말했다.박민정은 갑자기 목이 메어 대답하지 못했다. 조하랑도 박예찬이 한 말에 놀라 몸을 웅크리고 앉아 휴대전화를 가져와서 말했다."민정아, 걱정하지 마. 내가 예찬이를 데리고 있을게. 유남준이 예찬이를 발견하지 못하게.”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화를 끊기 전에 그들은 한 음식점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조하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박예찬을 바라보았다. 두 그림자가 함께 공항 밖으로 걸어 나갔다.
[알겠어.]마침내 일을 그만둔 그를 본 이지원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아줌마가 재촉하셨어요?”유남준의 얇은 입술이 가볍게 열리며 말했다."아니야.”그녀는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다 입을 닫았다. 그리고는 그의 시선이 창밖으로 간 것을 발견했다. 차량은 금월호텔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벤틀리 한 대에서 한두 명이 내렸다.유남준의 시선은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말할 수 없는 익숙함이 느껴지는 그 작은 소년에게로 쏠렸다. 그는 두 사람이 식당 입구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유남준은 운전 기사에게 말했다."차 세워.”이지원은 좀 이상해서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그는 대답도 하지 않고 문을 밀고 곧장 내려갔다.조하랑이 박예찬을 데리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화장실이 급해서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어 데리러 오라고 했다. 그녀가 문을 나서자 양복 차림의 빳빳한 유남준이 곧장 자신을 향해 걸어왔다.순간적으로 손바닥에 땀이 줄줄 흘러서 그녀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돌아섰다."우연이네."유남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박민정은 피할 수 없었다. 그녀는 조하랑과 박예찬이 지금 올라오지 않기를 기도했다."유 대표님도 여기 식사하러 오셨나요?"그녀가 한마디 대꾸했다."전 아직 일이 좀 있어서 방해하지 않을게요.”"민정아."막 가려는데 조하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민정의 가슴이 뜨끔했다. 유남준은 계단을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하랑과 박예찬은 계단을 올라왔을 뿐 유남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인사를 한 것이었다.그는 소리를 듣고 조하랑과 박예찬을 바라보았다. 박예찬은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그의 까만 눈동자는 유남준에게 이상한 익숙함을 줬다.사방이 갑자기 고요해졌다. 조하랑이 완전히 굳어 있었다. 박민정은 아들이 자신을 부를까 봐 숨을 죽였다."민정 이모, 안녕하세요.”말을 마치고 그는 조하랑의 손을 잡았다."엄마, 배고파. 빨리 이모랑 밥 먹자.”조하랑은 정신을 차렸다."가자, 민정아.”그녀는 박예찬의 손을
박예찬의 작은 얼굴이 잘 익은 사과같이 더 빨개졌다.그는 기침을 두어 번 하고 목소리를 낮추었다."엄마, 난 어린아이가 아니야. 게다가 이모도 있는데.”이 말 때문에 방금 유남준때문에 파괴되었던 분위기가 정상으로 돌아와 떠들썩해졌다.조하랑은 처음으로 박예찬이 부끄러워하는 것을 보고 놀리기 시작했다."엉덩이를 맞은 적이 있었구나!""아니거든!”이런 박예찬이야말로 어린아이 같았다. 박민정은 다급하게 해명하는 아들을 보며 화가 사그라들었다. 박예찬과 박윤우는 하늘이 준 보배라서 그녀가 전혀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리고 여기로 오는 길에 그녀는 생각했다.‘나는 계속 유남준을 피할 수 있지만 두 아들도 계속 숨어 있어야 해? 분명 아무 잘못도 없는데 왜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없고 집이 있어도 돌아갈 수 없는 거지?'그리고 오늘 이 갑작스러운 상황은 그녀로 하여금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 결정하게 했다.밥을 먹을 때, 조하랑이 사람을 찾아서 박예찬을 돌려보내려고 건의했다가 박민정에게 거절당했다."생각해 봤는데 계속 숨어 있는 게 최선의 해결 방법은 아닌 것 같아.”"예찬이를 여기에 남아 있게 하도록 결정했어.”"남준 씨도 이미 예찬이를 보았고 예찬이가 네 아들이라고 생각하니까 걱정할 것 없어.”"조금 있다가 할머니께 거기서 윤우를 돌보라고 말씀드릴게. 예찬이는 나와 함께 진주시 있다가 진전이 있으면 다시 돌아가자.”조하랑도 이에 동의했다."할머니 쪽에는 간병인이 있지만 어르신 한 명이 두 아이를 돌보기엔 벅차. 예찬이가 남아 있으면 너랑 같이 있을 수도 있고.”"남준 씨가 알아도 겁낼 것 없어 나랑 연지석이 있잖아.”"나도 있어, 엄마. 내가 꼭 엄마랑 윤우를 지켜줄게.”박예찬이 말했다.박민정과 조하랑이 그 말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그래.""그럼 내가 먼저 예찬이를 데리고 갈게. 네가 임신하기 전에 예찬이는 먼저 나랑 같이 있고. 네가 그를 만나고 싶을 때 내 쪽으로 와."조하랑이 말했다. 지금은 이럴 수밖에 없었다. 박민정은
박예찬은 그녀의 말을 듣고 순결을 지키지 못한다는 생각만 들었다.얼마 후 그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바로 자기 방으로 가서 쉬었다....한편, 고씨 저택.경호원은 유남준에게 박민정이 식당에서 밥을 먹은 후 공관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전했다.그리고 그의 심드렁한 모습은 이지원과 고영란의 눈에 그대로 비쳤다.“지원아, 너 오늘 어렵게 온 건데 그냥 여기서 자고 가. 내일 우리 남편도 돌아올 거야. 널 만나고 싶어 하셔.”유명준은 사랑꾼 탕아로 쉰 살이 넘었건만 정을 여기저기 뿌리고 다니며 좀처럼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이지원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유남준은 그녀들 사이의 대화에 무관심했고 아무렇게나 음식을 먹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식탁을 떠났다.“어디 가니, 남준아?”고영란이 궁금해하며 물었다.“집 갑니다.”그녀는 더욱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거긴 남준이가 예전에 결혼한 뒤 박민정과 함께 살던 곳인데 무슨 집 이긴 집이야?’“오늘은 여기 머물러 있어라. 내일 네 아버지가 돌아올 테니, 너와 지원이의 혼사도 상의해보자꾸나.”‘혼사?’유남준의 깊은 눈동자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저 아직 이혼하지도 않았는데, 무슨 혼사에요?”그러자 고영란은 갑자기 마음 한쪽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한쪽에 있는 이지원은 안색이 변하지 않았지만, 젓가락을 쥔 손이 저절로 조여졌다.‘박민정이 죽은 지가 언젠데, 이혼하고 말고가 그렇게 중요한가?’이윽고 유남준이 발걸음을 돌려 밖으로 걸어갔고 이지원이 그의 뒤를 따랐다.“오빠!”유남준은 발걸음을 멈추었고 이지원은 서둘러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오빠, 내가 뭐 잘못했어요? 왜 지금까지도 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거예요? 오빠가 박민정이랑 결혼한 후로 지금까지 나 8년 동안 오빠 기다렸어요.”이지원은 눈가에 눈물을 머금고 말을 이어갔다.“내가 오빠한테 어울리지 않을까 봐 줄곧 노력해 왔고, 어렵게 지금 이 자리에 서게 된 건데... 이제야 감히 오빠한테 다가갈 수
「호산 그룹 CEO, 고씨 가문의 가장 젊고 유능한 후계자...」박예찬은 곧 호산 그룹, 즉 유앤케이 그룹 본사 건물을 찾아 묵묵히 위치를 적었다.곧 또 하나의 새로운 소식이 보였다.「이지원이 호산 그룹 대표와 함께 집으로 가 부모님을 뵀다. 아마도 그녀는 재벌가에 발을 들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박예찬의 작은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이윽고 그는 즉시 이지원의 자료를 뒤지러 갔다.다크웹에서 그는 이지원에 대한 많은 폭로를 발견했는데, 하나하나가 매우 경이로웠다.그것들을 보는 박예찬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나쁜 아빠! 어떻게 이런 쓰레기 같은 여자랑 눈이 맞을 수 있어?! 정말 창피해!’박예찬은 원래 이것들을 전부 공개해보려고 했지만 생각을 해보니 이건 ‘쓰레기 같은 아빠’를 너무 쉽게 곤란하게 하는 거라 생각되었다.‘이런 여자는 끝까지 남아서 아빠로 하여금 스스로 애초의 잘못을 뉘우치게 해야 해.’...다음 날.조하랑은 이번에 돌아와 일을 찾았다.조씨 가문의 세상 둘도 없는 보배딸로서 그녀의 아버지는 조하랑에게 돌아와 지사를 관리하고 자신을 단련하라고 하셨다.그래서 그녀는 자주 별장에 와 살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 그곳에는 가정부가 있었다.또 박예찬은 어른 같은 아이라 거두기도 매우 쉬웠다.“민정아, 예찬이 말 잘 들어. 지금도 자기 방에서 쿨쿨 자고 있는걸?”조하랑은 씻으면서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럼 다행이네. 에스토니아에 있을 때 내가 예찬이를 학교에 보내려고 했는데 윤우 일 때문에 늦어졌어. 그래서 나도 유치원을 찾을 생각이야.”“응?! 유치원?!”조하랑은 손을 멈칫했다.‘이런 똑똑한 애가 유치원에 가면 그곳에 있는 어린애들한테 엄청난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까? 하지만 예찬이는 사람들을 좋아해서 다른 애들을 괴롭히지는 않을 거야. 또 아주 잘생겼으니까 유치원 다른 남자애들 체면도 서지 않을 것이고.’“왜 그래?”박민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니야, 나한테 맡기면 돼. 내가 아는 국제 유치원
그때 김훈의 전화가 걸려왔다.“이 자식! 너는 외롭게 늙어 죽을 작정이야?! 누가 너더러 맞선 상대를 그냥 날려버리라고 했어?! 간땡이가 부었어?!”노인은 잔뜩 화나 보였다.“할아버지, 저는 지금 바빠요.”“바빠? 내가 모르는 줄 알아? 밖에 나가서 날마다 그 나쁜 친구들하고 어울려 다니면서 전혀 진취적이지 않다는 거?”김훈은 끝내 인내심을 잃었다.“지금 당장 나한테 와라. 그렇지 않으면 네 모든 길을 끊어버릴 테니까!” 그렇게 김인우는 어쩔 수 없이 우선 돌아갈 수밖에 없다.호산 그룹.박민정은 회사에 온 후 곧장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유남준의 전담비서인 서다희는 세련된 차림새와 요염함을 잃지 않은 박민정을 보고 두 눈을 휘둥그레 뜨게 되었다.서다희는 아직도 옛날 박민정이 치장하기 싫어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의 그녀는 매일 어두운 색조의 옷을 입으며 볼품없이 보여 전혀 고귀한 사람 같지 않았다.그러나 지금, 눈앞의 여인은 아름답고 눈에 띌 뿐만 아니라 온몸에 고귀한 기품과 매력이 배어 마치 다른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민정 씨, 무슨 일 있어요?”박민정이 냉담하게 말했다.그는 그녀의 말을 듣고 온 얼굴에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대표님은 오늘 매우 바쁘셔서 아마 민정 씨를 만날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서다희는 그대로였다.그는 원래 그녀에게 별로 호감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박민정을 데리고 유남준을 만나려 하지 않았다.그러나 박민정은 하도 서다희에게 문전박대를 많이 당해서 이미 습관이 되어 있었다.그녀는 올라오기 직전, 이미 유남준의 일정에 대해 알아보았고 오늘은 중요한 회의가 없는 것을 확인했다.“아, 그래요? 그럼 대표님께 말씀하세요. 저희의 협력도 여기서 끝내자고요.”이윽고 말을 마친 박민정이 떠나려 하자 과연 서다희가 태도를 바꿨다.“민정 씨, 잠시만요. 그럼 대표님께 한 번 여쭤볼게요.”그러다 그들은 비서 사무실을 지나게 되었다.이전부터 지금까지 줄곧 일해 온 몇 명의 비서들은 하나같이
그의 눈빛에는 박민정이 읽을 수 없는 기분이 가득했다.“5년도 안 됐는데, 어디서 그렇게 많은 돈이 나서 자선 사업을 펼치고 있어? 연지석이 준거야?”박민정은 그녀가 떠난 후로 유남준이 한 번도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다는 것을 몰랐다.요 며칠, 유남준은 더욱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박민정과 연지석이 함께 있는 그림들로 가득했다.“지석이랑은 그냥 친구입니다. 제 돈은 전부 제가 직접 벌어들인 거고요...”박민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남준은 큰 손바닥을 그녀의 어깨에 떨어뜨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어떻게 벌었는데? 이걸로?”박민정의 머릿속에는 쿵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유남준을 쳐다보았다.“뭐라고 하셨어요?”그의 손은 매우 뜨거웠지만 내뱉은 말은 오히려 그렇게 냉혹했다.박민정은 말문이 막혀 주먹을 꽉 쥐었다. 너무 세게 쥔 탓인지 손톱은 당장이라도 손바닥 안을 뚫고 들어갈 지경이었다.유남준은 그녀의 귀가에 몸을 숙이고 말했다.“연지석이 얼마를 줬는지 말해. 나는 두 배로 줄 테니까!”유남준은 손가락으로 몇 번이나 그녀의 피부를 쓰다듬으며 박민정을 영원히 품속에 가두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했다.“아직도 너희 가족이 나한테 얼마를 빚졌는지 기억해? 이제 더 원하지 않겠어. 그냥 액수만 말해. 나랑 이런 장난 치지 말고. 성실하게 말하면 내가 전부 다 줄게!”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민정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 뺨을 호되게 갈겼다.“이 개자식!”유남준의 수려한 얼굴이 화끈거렸다.다만 아프지도 않은 지 그는 오히려 박민정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그러고는 고개를 숙이고 차가운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말해! 얼마를 원하냐고!”박민정은 자신이 잘못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을 진작 알았지만 자신이 한 번도 그를 알아가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그저 줄곧 유남준이 결벽증이고 꽃 도령이며 다른 남자들과는 다르다고 여겼다.그러나 이제야 그녀는
박민정은 미소를 띤 채 유남우에게 걸어갔다.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별과 바다를 품고 있는 듯했다.유남우는 넋을 잃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눈 부신 햇살에 유남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모습은 유남준과 똑같았다.하지만 박민정은 끝까지 자신이 사람을 잘못 봤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고 유남우를 보며 말했다.“가요.”유남우는 박민정이 자신을 유남준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지만 아무 해명도 하지 않고 그녀를 따라 앞쪽으로 걸어갔다.임신 중인 박민정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아무 말 없는 유남우에 혼잣말을 시작했다.“이따가 예찬이한테 말 좀 잘 해줘요. 화가 좀 난 것 같은데, 남준 씨를 안 부른 제 탓이에요.”유남우는 짧은 대답을 내놓았다. 그는 혹시라도 자신의 실수로 이 평온한 순간을 깨뜨릴까 봐 말을 최대한 아꼈다.그들 뒤에서는 전화 통화를 마친 윤소현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눈에 멀리서 걸어가고 있는 유남우와 박민정의 뒷모습이 들어왔다.윤소현의 동공이 순식간에 좁아지며 두 눈빛에 분노가 가득 찼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을 향해 걸어갔다.그때, 타이밍 좋게 유남준의 차도 도착했다.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걸어간 윤소현은 이내 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박민정을 향해 소리쳤다.“박민정, 염치도 없어?”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박민정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는 윤소현을 발견했다.그리고 유남우는 인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그만해, 윤소현.”그제야 박민정은 자신이 사람을 잘못 봤다는 것을 깨달았다.“남우 씨였어요?”박민정은 확신할 수 없다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두 걸음 더 다가와 유남우의 팔을 단단히 잡은 윤소현이 말했다.“그럼 누구겠어? 유남준인 줄 알았어?”박민정은 자신이 이렇게 큰 실수를 저지를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유남우 역시 자신의 실수를 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박민정은 퇴근 후, 유치원으로 향했다.김인우와 조하랑 역시 박예찬의 가족을 대표해 참여하기로 했다.두 사람을 발견한 박예찬이 불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두 사람, 방해만 안 되면 다행이네요.”그 말에 김인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야, 이 녀석아. 내가 널 방해할 사람처럼 보이냐?”마음의 상처를 입은 조하랑 역시 입을 열었다.“예찬아, 아줌마 상처받았어.”참다못한 박민정이 박예찬을 보며 말했다.“예찬아, 예의를 갖춰야지. 아저씨랑 아줌마는 널 위해서 쉬는 시간까지 포기해가며 여기까지 와 주신 거야.”박민정의 말에 박예찬은 금세 불만 섞여 있던 표정을 감추었다.“그럼 부탁드릴게요.”“그래야지.”김인우가 대답했다.할아버지가 육아에 미리 적응하라는 명목으로 그와 조하랑을 유치원으로 보내지만 않았어도 김인우는 이런 따분하고 지루한 활동에 참여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가장 성가신 점은 지금 날씨가 너무 더웠다는 것이다.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기 전, 박예찬은 박민정에게 다가와 물었다.“엄마, 그 사람은 안 왔어요?”유남준에게 가까스로 호감을 갖게 된 아이였지만 자신의 유치원 활동에 와 주지 않았다는 조금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박민정이 말했다.“아저씨랑 아줌마가 와 준다고 해서, 굳이 아빠한테까지 얘기하진 않았어.”아빠?박예찬은 그 호칭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엄마, 예전에 했던 말 벌써 까먹은 거예요?”어딘가 당황한 듯한 모습을 보인 박민정이 물었다.“무슨 말?”“아무것도 아니에요.”박예찬은 어딘가 화가 난 듯했다.그는 비록 김씨 가문의 집에서 잘 지내고 있었지만 여전히 박민정과 유남준의 관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아이는 지금 두 사람의 관계가 예전보다 어느 정도 나아졌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박예찬은 조하랑과 김인우에게 다가갔다.박민정은 화난 모습으로 떠나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단순히 유남준이 와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그녀는 뒤늦
함미현은 앞으로 정씨 가문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고 윤소현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그리고 윤소현은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함미현이 이런 속셈을 품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최근 들어 정수미에게 대놓고 미움받고 있던 윤소현은 어쩔 수 없이 유씨 가문으로 돌아가야 했다.유남준은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회사에서 지내다시피 했던 탓에 집에는 항상 그녀와 고영란만 있었다.고영란은 별다른 일만 없으면 두 손자들을 데리러 유치원으로 향하거나 다른 부잣집 사모님들과 함께 미용실로 가 관리를 받으며 윤소현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그렇게 윤소현은 집에 혼자 남아 속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불만을 삭여야 했다.집으로 돌아온 최현아가 말을 걸어왔다.“동서, 이제 배도 많이 나왔네. 도련님이 집에서 안 챙겨줘?”그 말을 듣는 윤소현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없어요. 매번 들어오라고만 하면 항상 야근 핑계를 대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최현아는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으로 말을 이었다.“최근에 민정이가 회사 차렸다는 건 알고 있지?”“모를 리가 있겠어요? 언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우리 윤씨 가문 사업을 인수했더라고요.”윤소현이 주먹을 꽉 쥐었다.“어디서 그렇게 큰돈이 났을까?”최현아는 일부러 윤소현을 자극하기라도 하듯 의문을 제기했다.사실 그녀 역시 어느 정도는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다.“어디서 났겠어요? 아주버님이랑 어머님께서 주신 거겠죠.”윤소현은 죽었다 깨어나도 박민정에게 대단한 능력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예전에는 항상 박민정과 윤소현의 사이에 불화가 이는 것을 두려워했던 최현아였지만 계속해서 패배의 쓴맛만 보는 윤소현의 모습이 점점 마음이 놓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자신의 두 올케가 서로 영원히 지치지 않고 싸우는 것을 구경만 하면 됐으니 말이다.“동서도 엄연한 유씨 가문의 며느리이자 어머님의 며느리잖아. 게다가 뱃속에는 유씨 가문의 아이까지 품고 있고. 그런데 어머님께선 왜 아직도 그
사무실 밖으로 나서는 에리의 모습을 보던 연지석의 눈빛이 차가웠다.이때, 하민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형, 박민정은 또 왜 건드린 거야? 피도 안 섞인 애들 아빠 되는 걸로도 모자라서 이젠 배 속에 있는 쌍둥이 애들까지 형이 다 떠안으려고?”하민재가 답답한 듯 쏘아붙였다.연지석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헛소리하지 마. 이번에 돌아온 건 정말 일하러 온 거야. 그러면서 민정이도 한 번 보살펴주고.”“정말이야?”하민재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당연히 정말이지.”연지석은 일부러 태연하게 말했다.“민정이는 이미 유남준이랑 새 출발 하기로 한 것 같아. 나도 그거 다 알면서 민정이한테 매달릴 정도로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야.”하민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이다. 형, 세상에 여자는 많아. 제발 천천히 좀 찾아.”“응, 알겠어.”그때, 누군가가 연지석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연지석이 고개를 들어 문 쪽을 확인해보니 설인하가 커피를 든 채 문 앞에 서 있었다.설인하가 뭐든 빨리 배우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아는 박민정이 그녀를 연지석의 비서로 배치해준 것이다.연지석은 설인하를 발견하자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설인하는 사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얘기하고 끊어.”연지석이 수화기 너머로 말했다.설인하는 커피를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부사장님, 여기 커피 가져왔습니다.”“네.”연지석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설인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어색하게 서 있던 설인하가 입을 열었다.“그, 연 대표님. 저한테 아무 일이라도 맡겨주실 수 있을까요?”설인하는 연지석을 따라다니며 중요한 일을 맡고 해낼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정작 이렇게 잡일만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연지석은 설인하의 말에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여인의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한 그는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연지석은 단순히 그녀의 얼굴만 감상하다가 입을 열었다.“어떤 일을 하고
유남준의 대답에 박민정은 기가 막혔다.“내가 뭘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요? 뭐, 연지석이랑 계약 취소하고 에리도 해고할까요?”유남준은 깊은 눈동자로 박민정을 바라보며 말했다.“할 수만 있다면...”“절대 안 돼요!”박민정이 그의 말을 끊었다.“제 친구인 것도 있긴 하지만, 능력을 봐서라도 절대 남준 씨 말대로 해줄 수는 없어요.”유남준은 박민정의 말에 잠시 혼란스러웠다. 예전이었으면 무슨 일이 있든 박민정은 항상 유남준의 말대로 했을 텐데, 이제는 모든 것이 다 변해버렸다.유남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그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요?”“내가 하려던 말은, 가능하다면 그 두 사람이랑 조금 거리를 뒀으면 좋겠다는 거야. 내가 질투 나니까.”유남준은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마음을 담아 해명했다.그 말은 들은 후에야 박민정은 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달았다.“미안해요. 아까는 내가 너무 성급했네요. 말도 끝까지 못 듣고.”잠시 망설이던 박민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걱정 마요. 난 그 두 사람을 단순한 친구로만 생각할 뿐, 다른 감정은 전혀 없으니까요.”비로소 안심한 유남준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박민정은 그대로 유남준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댄 채 물었다.“오늘 이렇게 온 거, 쉬는 날이어서 온 게 아니죠?”“내 회사야. 내가 쉬는 날이라고 하면 쉬는 날이지.”박민정은 아직도 유남준의 회사가 IM 그룹이라는 것을 모른 채 그 역시 자신과 같은 일반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우린 사업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잖아요. 너무 감정적으로 행동해선 안 돼요. 얼른 회사로 돌아가서 다시 일 봐요.”그녀 역시 회사 운영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리더인 회사 대표부터 게으른 태도로 일한다면 밑에 있는 직원들도 열심히 일할 리 없었다.“알겠어.”유남준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지금의 기분은 조금 전보다 한결 나아졌다.오늘에서야 힘들게 민수아와의 데이트를
안내데스크 직원은 순간적으로 공포가 엄습해왔다. 저 사람이 정말 박 대표의 남편이라면 자신은 끝장인 게 뻔했으니 말이다.하지만 회사 직원들에게 기재된 박 대표의 소개 글에는 분명 남편과 이혼한 상태라고 되어 있었다.“그냥 우리 와이프랑 밥이나 한 끼 먹으려고 왔지.”말을 마친 유남준은 안내데스크로 고개를 돌리더니 처음으로 그 여직원을 협박하기 시작했다.“잘리고 싶지 않으면 그 남자들 정보는 순순히 부는 게 좋을 거야!”상황 파악을 마친 서다희가 곧장 데스크 직원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네주었다.그리고 안내데스크 직원은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명함을 받아들었다.“네, 네...”이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몰랐던 박민정이 다가와 물었다.“오늘은 출근 안 해요?”“오는 쉬는 날이야.”유남준은 태연한 얼굴로 거짓말을 했다.“목요일인데 쉬는 날이라고요? 당신 회사 직원들은 참 좋겠다.”박민정이 대답했다.곁에서 유남준과 박민정의 사이에 끼어 애매한 포지션이 되긴 싫었던 진서연이 말했다.“보스, 저는 수아 씨랑 이 근처 좀 돌기로 약속해서요. 먼저 가보겠습니다.”“그래.”박민정은 흔쾌히 그 말에 대답했다.유남준도 고개를 돌려 서다희를 바라보며 말했다.“너도 우리 따라오지 말고 수아 씨 찾으러 가. 회사 직원들 간식거리도 좀 챙겨가고.”그의 의도는 아주 명백했다. 그저 XS 그룹의 직원들에게 박민정의 남편이 왔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것이었다.박민정은 그런 유남준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그럼 밥이나 먹으러 가요. 뭐 먹고 싶은데요?”“나는 다 괜찮아. 네가 먹고 싶은 거로 먹자.”유남준은 정말 식사를 위해 찾아온 게 아니라 박민정의 회사 사람들에게 그녀가 유부녀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온 것이었다.“그래요.”박민정도 예의상 해봤던 말을 더 꺼내지 않았다.그녀는 곧장 유남준을 데리고 자신이 자주 가는 회사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배불리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소화도 시킬 겸 함께 산책했다. 그러던 중 궁금
듣고 있던 매니저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에리는 아마 본인도 그렇게 정직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됐어, 화 그만 내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하지만 에리는 지금 밥이 넘어갈 기분이 아니었다.“넌 유남준이 연지석의 존재를 알 거라고 생각해?”그 질문에 미간을 찌푸린 매니저가 대답했다.“너 이건 좀 아니지 않아?”“뭐가 아닌데.”휴대폰을 집어 든 에리는 연지석이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 부사장으로 승진했다는 사실을 유남준에게 알려주었다.유남준의 표정이 보기 좋게 험악해졌다.“연지석이 왜 또 거기 있는 겁니까?”그런 유남준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서다희는 어이가 없었다.‘언제는 자기한테 이런 일 하나하나 알려주지 말라더니?’“게다가 부사장이라고요?”유남준의 기분이 점점 심연으로 곤두박질쳤다. 아침에 박민정을 회사까지 데려다줄 때까지만 해도 그는 에리에 대해서만 몇 가지 물어보려 했다.하지만 정신 차려 보니 어느새 그녀의 옆에는 연지석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해 있었다.유남준은 저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켰다.“대표님, 왜 그러십니까?”서다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오늘 휴가 내고 XS 본사 한 번 가봐야겠어.”그쪽 회사로 가서 자신의 권위를 보여주지 않으면 아내가 정말 다른 사람의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서다희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자신의 대표를 따라나섰다.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인 줄 알았더니 이렇게 불안해할 때도 있다는 것이 새로웠다.XS 그룹.1층 로비의 안내데스크 직원은 유남준과 서다희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선생님, 죄송하지만 저희 대표님과 미리 약속이 안 되어 있으셔서 올라가실 수 없습니다.”정중하게 말을 마친 안내 직원은 유남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눈앞의 남자가 너무 잘생긴 탓이었다.연지석 부대표와 견주어도 밀리지 않을 얼굴이었다.그 말에 윤남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이 회사 박 대표의 남편인데, 따로 예약까지 해야 하나?”
정수미에게 붙여둔 미행인이 박민정과 유남준에게 상황을 전달해 주었다.모든 것을 전해 들은 박민정이 혀를 찼다.“정말 한 편의 드라마가 따로 없네. 그래도 이제 함미현이 걱정하고 있는 게 뭔지는 잘 알겠네요.”유남준 역시 대략적인 상황을 짐작한 듯했다.“윤소현이 이미 함미현의 정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어쩐지 정수미 친딸이라는 함미현 씨가 윤소현 말에 너무 고분고분 따르더라고요. 이제 모든 게 다 이해가 되네요.”박민정인 이제 정수미가 안쓰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곁에 딸이라고 남아 있는 사람 중에 그녀를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말이다.그렇게 힘들게 찾아낸 친딸도 가짜였다니.이제는 염혜란까지 사라졌다. 박민정은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해 추모를 마치고 유남준과 함께 돌아갔다.운전기사는 박민정을 회사 정문에 내려주었다.박민정이 차에서 내리려 하던 그때, 유남준이 그녀를 불러세웠다.“잠시만.”“왜요?”박민정이 고개를 돌려 유남준을 바라보며 물었다.잠시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던 유남준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아니야. 저녁에 데리러 올게.”“알겠어요.”박민정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최근 들어 회사에서는 꽤 많은 신입 직원들을 채용했고, 그중에는 호산 그룹에서 건너온 사람들도 꽤 많았다.회사로 들어선 박민정은 오늘따라 유난히 떠들썩한 회사 분위기를 눈치챘다. 자세히 보니 여직원들 여럿이 스튜디오와 고층을 오가며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서연아, 무슨 일이야?”진서연이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이게 다 우리 회사 요물들 때문이잖아요.”“요물들이라니?”서류 뭉치를 들고 지나가던 설인하가 말했다.“연지석이랑 에리잖아요.”설인하의 말을 들은 박민정도 뒤늦게 상황을 이해했다.그럴 만도 한 것이 그 두 명은 정말 요물이 다름없었다. 생김새부터 비현실적으로 잘생긴 탓에 회사 여직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보스, 요즘에 그 능력 있는 홍
10분 후.어느 정도 마음의 위안을 얻어 진정된 함미현은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사람은 이제 윤소현으로 바뀌었다.방 안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고 윤소현은 차오르는 눈물에 목소리도 똑바로 낼 수 없었다.“엄마, 제가 잘못했어요. 저는 다 엄마를 위해서 그랬던 거예요.”“날 위해서였다고?”윤소현의 말을 듣는 순간, 정수미는 분노 섞인 헛웃음을 터뜨렸다.“날 위해서 사람을 죽이고, 남을 해쳤단 말이니? 어디 한번 말해봐. 염혜란 씨를 죽인 게 어떻게 날 위해서였다는 건지.”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몸을 덜덜 떨고 있던 윤소현이 입을 열었다.“염혜란만 사라지면, 미현이한테는 엄마만 남잖아요. 그러면 미현이도 굳이 다른 사람들 신경 안 써도 될 거고.”“고작 그 이유라는 거니?”정수미는 윤소현의 입에서 나온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윤소현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다.“엄마, 저는 그냥 엄마가 행복하시길 바랐던 거예요.”“저는 엄마를 위해서 제 친엄마인 한수민이랑 천륜까지 끊었는데 미현이가 양엄마를 끊어내지 못할 건 또 뭔데요? 걔가 못 끊겠다고 하니까 제가 대신 나서서 직접 끊어준 거예요. 덕분에 미현이한테는 지금 한 명의 엄마만 남게 됐잖아요!”윤소현의 태도는 아주 당당했다.정수미는 말을 마친 윤소현의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더니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이런 못된 것!”정수미의 손바닥이 거쳐 간 윤소현의 뺨은 이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정수미가 살면서 처음으로 윤소현에게 손찌검을 한 것이다.“엄마, 어떻게 저를 때리실 수가 있어요? 저는 항상 엄마를 친엄마라고 생각해왔는데, 미현이 오니까 이젠 저한테 손찌검도 하시네요.”윤소현은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정수미를 올려다보았다.“그러니까 너는 지금, 이게 다 내 잘못이라는 거니? 내가 너랑 한수민을 끊어낸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어? 내 가정을 파탄 낸 사람이 바로 한수민이었으니까! 그리고 너는 그 여자랑 윤석후의 딸이었고.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