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준은 순간 침을 꿀꺽 삼켰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굳이 그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다희는 그의 마음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유앤케이 그룹의 사업부에서는 한 거물급 인사가 유앤케이 그룹의 희망 프로젝트, 즉 무료 자선 사업을 돕기 위해 거액을 투자할 것이라는 정보가 돌고 있었다.회사 안의 일부 사람들은 이 일로 열심히 토론을 펼치고 있었다. “도대체 어느 거물급 인사가 이런 호구 짓도 마다하지 않는지 궁금하네요.”“누가 알겠어요. 돈을 너무 많이 벌어서 쓸 데가 없나 보죠.”“해외에서 왔다고 들었어요...”이때 박민정이 탄 차가 유앤케이 그룹의 본사 앞에 막 도착했다.우뚝 솟은 빌딩을 바라본 박민정은 유앤케이 그룹이 4년 전보다 훨씬 더 크게 발전했다는 것을 느꼈다. 이런 거침없는 발전은 유남준의 천재적인 능력과 유씨 집안 자본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녀도 4년 동안 퇴폐적인 생활을 해 온 것은 아니었다. 연지석의 도움으로 그녀만의 회사를 차렸고 약간의 돈도 벌었다.진주로 돌아오기 전 그녀는 이곳저곳의 모든 정보를 끌어모아 준비를 철저히 했다. 그래서 유앤케이 그룹이 전국적으로 희망사업을 벌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투자 협력에 나섰던 것이다.협력이라는 이름으로 그녀는 유남준에게 다가갈 명분을 얻었다.어제 자선 경매에 나온 것은 사실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투자 협력만으로는 유남준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었다.어떻게든 유남준의 흥미를 불러일으켜 자신을 만나러 나오게 하는 게 목적이었다.유앤케이 그룹의 담당자들은 일찌감치 일 층 로비 앞에 대기하고 있었고 박민정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고는 도착한 사람이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라는 것에 순간 다들 어리둥절해졌다.“박 사장님이세요?”박민정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왜요, 뭐가 문제가 있나요?”담당자의 의아한 얼굴을 본 박민정은 그동안 서로 주고받았던 대화 내용을 그에게 보여줬다. 그러자 그 담당자는 연신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얼굴도 이쁘고
유남준은 박민정의 과거 검진 결과를 보고 심한 우울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그리고 이 우울증이 기억력 감퇴를 초래하는 병이라는 것도 알아봤지만 단 한 사람만 잊는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게다가 그들은 십여 년 동안 알고 지낸 사이이다.유남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박민정은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설마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인가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당신을 기억하지 못할 수 있죠?”이 한 마디는 마치 가시처럼 유남준의 심장을 찔렀다.그녀의 말에 유남준은 차가운 얼굴로 대답했다. “박민정 씨, 너무 멀리까지 생각하시네요. 저희는 그저 우연히 만났을 뿐이에요.”굳이 박민정이 모른척하려 한다면 유남준도 같이 맞춰주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두 사람이 부부라고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떠나기 전 유남준은 사람을 시켜 박민정과 계약서를 쓰라고 했다.사무실로 돌아간 후, 유남준은 담배를 피우며 박민정의 말을 떠올렸다.“설마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인가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당신을 기억하지 못할 수 있죠?”순간 유남준의 가슴은 무언가에 꽉 막힌 듯 답답하고 불편했다.서다희가 대표이사실에 들어왔을 때 방안은 희뿌연 담배 연기로 꽉 차 있었다. 4년 전, 박민정이 사라진 뒤부터 유 대표는 다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하지만 지금 그가 찾던 사람이 돌아왔지만 그는 여전히 이러고 있었다.“박민정이 지난 4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낱낱이 조사해와. 내가 꼭 알아야겠으니까!”유남준이 서다희를 쳐다보며 명령하자 순간 그는 멈칫했다.“유 대표님, 제가 사람을 보내 조사했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어요.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의 자료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어요.”“그럼 해외의 다른 역량을 동원해서라도 알아봐!”유남준의 말에 서다희는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그가 말한 다른 역량이 무엇인지 서다희는 잘 알고 있었다. 지난번, 유앤케이 그룹의 대표이사 자리를 놓고 경쟁할 때 말고는 유남준은 ‘
김인우는 지금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박민정에게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머릿속에서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사과부터 해야 할까?아니면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지 물어봐야 할까?그것도 아니면...하지만 그의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박민정은 그를 스쳐 지나더니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순간 어리둥절해진 김인우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박민정은 차에 올라타 상냥한 목소리로 운전 기사에게 말했다.“가시죠.”곱고 평온한 옆모습이 차와 함께 점점 멀어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김인우는 한참 만에야 정신을 차리고 휴대전화를 집어 들어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하지만 그동안 유남준이 박민정에게 한 짓을 떠올린 그는 다시 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김인우는 일단 박민정의 차 번호를 적어둔 뒤 사람을 보내 그녀가 사는 곳을 알아봤다.검은색 벤틀리가 천천히 길을 달리고 있었고 박민정은 차분한 마음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녀의 마음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김인우가 무슨 일로 서교 추모 공원에 나타났는지 그저 의아할 뿐이었다.과거 김인우가 자기를 괴롭히던 모습이 떠오른 박민정은 손을 뻗어 보청기를 제거했다.원래 난청이었던 그녀의 귀는 김인우 때문에 지금은 가끔 굉음 같은 이명이 동반해 들렸고 감정 기복이 심할 때면 피가 나기도 했다.이런 인간을 어찌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박민정도 가끔 그때 김인우를 구한 것을 후회했다. 그를 구하지 않았더라면 지금과 같은 병마와 싸우지 않아도 됐을 테니까...하지만 긁어 부스럼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괜히 쓸데없이 일을 만들었다가 고생하는 것보다는 가만히 있는 게 낫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김인우와의 접촉을 멀리해야 했다. 그녀에게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윤우를 구하는 것이다.그래서 김인우를 계속 모른척하며 문제 자체를 일으키지 않게 하고 싶었다.아무래도 김인우는 이지원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발 벗고 나설 테니까....
이지원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어찌 된 일인지 김인우는 4년 전부터 완전히 딴사람이 된 듯 이지원의 여러 가지 부탁을 무시하고 있었다.유남준이 자기를 도와줄지 말지에 대해서도 이지원은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이지원은 자기가 원하는 것은 꼭 손에 넣고야 마는 성격이다.“생각 좀 해봐, 어떻게든 민 선생 곡을 꼭 손에 넣어야지.”...주상 엔터테인먼트의 전화를 끊은 박민정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녀보다 이지원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연예계든 가요계든 그녀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었다.다른 사람의 성과를 표절하고 다른 사람의 쌓은 업적을 빼앗고...유남준과 김인우의 절대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그녀는 절대 이 바닥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청각 장애가 있는 사람이 곡을 만드는 것, 이것보다 더 힘든 일은 없을 것이다. 박민정은 그동안 두 아이와 은정숙을 돌보느라 혼자 고생을 다 해왔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모은 돈은 한 가족이 살기에 충분했기에 돈 때문에 직접 만든 곡을 이지원에게 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었다.숙소로 돌아온 박민정은 휴대전화를 옆에 두고 욕실로 가서 샤워하며 계획했던 물건을 어떻게 빨리 손에 넣을지 고민했다.피곤해서인지 욕조에 누워있던 박민정은 어느새 잠이 들었다.얼마나 잤을까, 절친 조하랑의 전화가 그녀를 깨웠다.“민정아, 이틀 뒤면 나도 돌아가.”박민정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알았어, 네가 오면 내가 한턱 톡톡히 낼게.”“좋아. 그런데 요즘 어떻게 지내? 유남준이 괴롭히거나 그러지는 않아? 그리고 이지원 그 나쁜 년은 네가 돌아온 거 알아?”조하랑은 박민정이 혼자 여기에 있는 게 너무 걱정되었다. “이지원은 아직 내가 돌아온 거 몰라. 하지만 곧 알게 되겠지.”박민정이 베란다로 나가자 여름 바람이 뜨거운 공기와 함께 그녀를 감쌌다.“유남준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절대 나에게 함부로 못 할 거야.”한창 조하랑과 얘기 중일 때,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저녁 9시가 다 된
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꼭 움켜쥐었다.유남준은 그녀가 경직된 것을 느끼고 큰 손으로 그녀의 작은 손을 감싸며 더 거칠게 키스를 퍼부었다.박민정은 등을 꼿꼿이 세운 채 그를 밀치고 싶은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고 있었다. 윤우와 예찬이가 그녀가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다...아이를 머릿속에 떠올린 그녀는 이대로 그에게 순종해 바로 아이를 가질 계획이다.여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서툰 행동으로 그의 움직임에 응하려고 했다.유남준은 살짝 멈칫했지만 이내 찌푸린 인상을 펴고 옷깃의 단추를 잡아당기며 허리띠를 풀었다.목욕을 방금 마친 박민정의 싱그러운 냄새가 그의 코를 파고들자, 그의 심장도 더 빨리 요동쳤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거실 소파에 박민정을 올려놓고는 그녀의 가운을 잡아당겼다.박민정은 두 손을 더 꽉 움켜쥐었다.그녀는 유남준의 눈을 똑바로 마주할 수도 없었고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다. 머리 위에 비치는 따뜻한 불빛으로 시선을 옮긴 그녀는 순간 머릿속에 과거 이지원이 자신에게 보낸 수많은 유남준과의 다정한 사진들이 맴돌았다. 그리고 귓가에는 이지원이 했던 말들이 울려 퍼졌다.“민정 씨, 남준 씨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한 적 있어요? 예전에 나에게는 자주 말했었는데.”남자의 뜨거운 체온이 점점 가까워짐을 느낀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유 대표님, 우리가 이러면 톱스타 이지원 씨가 질투해서 대표님께 따지지 않을까요?”이제 막 정점에 도달하려던 찰나, 흥을 깨는 박민정의 말에 유남준은 모든 행동을 멈췄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박민정! 계속 아무것도 모른 척할 거야?”박민정은 옆에 떨어진 가운을 주워 몸을 가리며 말했다.“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그녀의 이런 행동에 유남준은 저도 모르게 몇 년 전의 그날 밤을 떠올렸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손으로 박민정의 하얀 얼굴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다가갔다.“이번에 돌아온 목적이 뭐야?”4년 넘게 도망쳐 놓고 갑자기 돌아온 건
와인에 약을 탄 박민정은 어깨가 반쯤 드러나는 요염한 민소매 잠옷으로 갈아입고 유남준에게 다가가 술을 따랐다.“받으세요.”유남준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한눈에 바라보며 그녀가 건네는 잔을 받아 들었지만 마시지 않았다.“열 살 때 고향에서 진주로 왔어. 그때 처음 만났고.”순간 박민정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유남준이 두 사람의 첫 만남을 기억하고 있을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녀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 술잔을 다시 그의 앞으로 밀었다.하지만 유남준은 그녀가 민 술잔을 다시 박민정 앞으로 들이밀며 말했다.“네가 먼저 마셔!”약을 탄 잔 속의 술을 보며 박민정은 순간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잔을 들고 바로 마셨다. 목구멍으로 흘러 들어가는 술은 그렇게 맵고 쓸 수가 없었다.그녀는 만약 자기가 마시지 않으면 유남준이 분명 의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오랫동안 사업에 몸담은 유남준은 눈치가 빨라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이면 바로 알아채기 때문이다.박민정은 다시 술잔에 술을 따라 유남준 앞에 놓았다.“유 대표님, 이제 당신 차례예요.”유남준은 손목 마디마디가 뚜렷이 보이는 긴 손으로 잔을 들어 살랑살랑 흔들었지만 계속 마시지 않았다.그는 여유 있는 눈빛으로 박민정을 바라보며 말했다.“뭐가 그리 급해, 우리 추억부터 먼저 회상해야지.”추억?십여 년의 추억을 어찌 하룻밤에 다 말할 수 있겠는가?박민정은 예쁜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실내는 분명 에어컨을 시원하게 켠 상태였지만 그녀의 이마에서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 손바닥을 계속 꼬집으며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녀는 맑은 눈으로 유남준을 깊이 바라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앞으로 추억할 시간은 많아요. 오늘은 시간도 늦었는데 여기서 쉬다 가시지 않을래요?”박민정은 말을 하면서 백옥 같은 손으로 술잔을 들어 유남준의 앞에 내밀었다.그녀도 자기가 이렇게 행동하는 게 맞는지 확신이 없었다.하지만 어렵게 얻은 기회, 절대 이대로 놓치고
정민기는 얇은 잠옷을 입고 온몸이 흠뻑 젖은 채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박민정을 발견했다. 그녀의 손과 다리는 이미 새빨갛게 할퀸 상처들로 가득했다. 그는 재빨리 물을 잠그고 가운을 집어 박민정의 보일 듯 말 듯 한 몸을 가렸다.“괜찮으세요?”그의 목소리는 그리 낮은 편은 아니었으나 박민정의 귀에는 그저 희미하게 들릴 뿐이었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박민정은 창백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괜찮아요”“제가 병원까지 모셔다드릴게요.”정민기가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으려 하자 그녀는 옆으로 피하며 말했다.“안 돼요. 진주에 있는 모든 병원은 전부 김씨 가문의 손아귀에 있어요. 그리고 김인우도 내가 돌아온 것을 이미 알고 있고요. 혹시라도 내가 약을 먹은 것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김인우는 분명 유남준에게 말할 거예요. 유남준이 술에 약을 탔다는 걸 알면 앞으로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는 겨우겨우 긴 말을 끝냈다.4년 전, 그녀는 자기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었다.연지석의 도움이 없었다면 절대 김인우를 속일 수 없었을 것이다.연지석이 곁에 없는 지금, 그녀가 병원에 간다면 그쪽 사람들은 분명 김인우에게 가장 먼저 알릴 것이다.박민정이 병원을 가지 않고 혼자 이겨내겠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정민기는 욕실에 들어오기 전, 거실 바닥에 쏟아진 술을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하게 되었다. 그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하지만 지금 민정 씨 몸 상태가...”“얼음 좀 가져다주세요.”“네. 알겠어요.”정민기는 주방에 들어가 냉장고에서 얼음을 가져왔다.얼음 한 봉지를 통째로 욕조 안에 넣자 살을 에는 듯한 차가움이 박민정의 달아오른 몸을 그나마 편하게 했다.정민기는 또 의약 상자를 가져와 그녀 옆에 놓았다.“고마워요.” 박민정은 진심 어린 말투로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정민기는 아무 말도 없이 욕실을 나가 그녀가 정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면서 연지석에게 그녀의 안부도 전해줬다.몇 시간
이지원은 조금 전 유남준의 마지막 말을 듣고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워낙 생각이 많은 서다희는 그녀의 물음에 한두 마디 야유를 퍼부었지만, 박민정이 돌아왔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알리지 않았다.눈치 빠른 이지원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속으로 서다희를 욕하며 유남준에게 다가갔다.“오빠, 명절이 곧 다가온다고 어머님이 오늘 저녁에 같이 밥 먹자고 했어요.”이지원이 말하는 어머님은 바로 유남준의 어머니이다.분명 또 두 사람이 빨리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라는 말을 하기 위함일 것이다. 유남준은 고개도 들지 않고 한 마디 툭 내뱉었다.“알았어.”그의 대답을 들은 이지원은 사무실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저 오늘은 별일 없으니 여기서 기다릴게요.”하루 종일?유남준은 그녀를 힐끗 보며 한마디 했다.“그렇게 한가해?”이지원은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태연한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편 유남준은 그녀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나는 일할 때 남이 옆에 있는 거 안 좋아해.”그의 말에 이지원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그저 한마디만 내뱉었다.“그럼, 밖에서 기다릴게요.”유남준이 더 이상 대꾸하지 않자 이지원은 내키지 않은 얼굴로 대표이사실을 나섰다.유남준의 차갑게 거절하는 얼굴은 예전에 사귀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늘 변함이 없었다.이런 사람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박민정뿐일 것이다.기분 전환을 위해 밖으로 나간 이지원은 김인우의 사무실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비서에게 물었다.“인우 오빠 요즘 안 오나요?”“요즘 집안 어르신들이 김 대표님에게 결혼 준비를 하라고 해서 못 왔어요.”비서는 사실대로 대답했다.결혼?이지원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김인우는 이지원 때문에 집안 어르신들이 안배한 혼사를 거절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하지만 요즘 집안 어르신들이 한창 김인우의 결혼 준비를 한다는 말에 이지원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씁쓸했다.“상대방이 누군데요?”이지원은 궁금한 마음에 비서에게 물었다.비서
유남준은 퇴근하면 무조건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었고 박민정도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미주알고주알 알려줬다.“나 내일에 갈게.”“그래요. 그러면 여기서 얼마간 머물면서 같이 놀 수 있겠네요.”“당연하지.”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박민정 곁으로 날아가서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다.그렇게 박민정은 유남준과의 통화를 끝낸 뒤 누워서 조하랑과 또 어디로 놀러 갈지 생각해 보았다.며칠 전, 조하랑은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김인우가 알아버렸다고 했다.그리고 아이 때문인지 두 사람 사이가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다.조하랑이 어디를 가든 김인우가 항상 따라붙었고 혹시나 어디에 부딪힐까 노심초사했다.김인우의 태도에 박민정은 그제야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다른 한편.정수미는 방 안에 있다가 갑자기 심하게 기침하더니 피까지 토해내기 시작했다.순간 깜짝 놀란 길연서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정 대표님, 당장 저랑 같이 병원에 가요.”“안돼. 갑자기 병원에 가면 엄마랑 아빠, 그리고 민정이가 바로 눈치챌 거란 말이야.”정수미는 단호하게 거부했다.“걱정하지 마. 아직은 버틸 만하니까.”“이게 다 윤소현 씨 때문이에요. 어떻게 사람이 이리도 독할 수 있어요? 그때 그런 약을 매일 먹이지만 않았더라면 이 정도로 건강이 악화할 일도 없었을 텐데.”길연서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비록 정수미는 젊었을 때부터 잔병치레가 많았지만 약만 꾸준히 먹으면 6~7년은 끄떡없다고 의사가 말했다.하지만 지금은...길연서는 혹시나 정수미가 어느 날 갑자기 자기 곁을 떠날까 봐 너무 무서웠다.“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우리는 그저 앞으로의 하루하루를 기쁘게 살면 되지.”정수미는 이제 두려울 게 없었다.“네.”“그리고 앞으로 우리 민정이를 잘 부탁해. 아직 어려서 회사를 혼자 관리하기가 분명 힘들 거야. 혹시나 남준이가 우리 민정이를 괴롭히지 않는지도 잘 지켜보고.”정수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유언처럼 들렸고 길연서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
때마침 맞은편에서 다가오던 사람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녀는 한껏 아니꼬운 눈빛으로 박민정을 쏘아보았다.“그런 속담이 있죠?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진다.”눈앞의 여자는 분명 박민정보다 한참 어린 것 같았고 나이가 많아 봤자 고작 스무 살 정도로 보였다.사실 이미 어제 한 번 만났었는데 먼 친척의 딸이라고 했고 잠시 이곳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이름은 정윤아.그녀를 기억하게 된 원인도 수많은 사람 중에 오직 정윤아만 자신을 혐오와 경멸이 가득 찬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정윤아는 일부러 큰 소리로 말하며 지나가려 했지만 순순히 보내줄 박민정이 아니었기에 대뜸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물었다.“제가 뭘 잘못했나요?”박민정의 돌발행동에 정윤아는 살짝 놀란 듯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 물었다.“자기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도 몰라요?”박민정은 눈앞의 여자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무슨 헛소리에요? 전 당신을 아예 모르는데 제가 그쪽한테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거죠?”지금의 박민정은 더 이상 예전의 그 겁도 많고 물러터진 사람이 아니었다.그리고 눈앞의 사람이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자신을 비꼬는데 무조건 확실하게 따져야겠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의 말에 정윤아는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제가 아니라 소현 언니요.”‘소현 언니라... 보아하니 윤소현 때문에 나한테 이러는 거였구나?’“제가 소현 씨한테 잘못한 건 또 뭔데요?”“당신이 이 가문에 돌아오지만 않았다면 소현 언니가 쫓겨날 일도, 교도소에 가게 될 일도 없겠죠? 이 모든 게 다 그쪽 때문이잖아요. 우리 고모한테도 무슨 약을 쳤는지 그쪽 말이라면 아주 철석같이 믿더라고요.”박민정은 그녀의 말이 황당하기 그지없었다.윤소현이 지금처럼 변한 게 다 자업자득이고 모두 자신이 저지른 죄인데 그걸 왜 박민정 탓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정윤아 씨, 우리 일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입을 함부로 놀리면 안 되죠.” “제가 왜 몰라요? 소현 언니는 저
“어차피 우리 아이면 어떤 모습이든지 제 눈에는 다 예뻐 보일 겁니다.”김인우가 껄껄거리며 팔불출 같은 모습을 보이자 조하랑은 방금 한 말이 빈말은 아닌 것 같았다.하여 고민 끝에 그에게 말했다.“알겠어요. 그러면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게요. 그런데 만약 저랑 제 아이한테 조금이라도 모질게 굴면 바로 짐 싸서 또다시 도망칠 거란 사실만은 알아둬요.”조하랑은 뜸을 들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맞다, 그리고 위자료도 넉넉하게 줘야 하고요.”그녀는 배신당해도 가만히 있을 멍청이가 아니다.그러자 김인우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하죠. 지금 당장 계약서 씁시다. 제가 만약 하랑 씨랑 아이한테 잘 못하면 김씨 가문의 모든 재산을 전부 하랑 씨한테 넘겨줄 것이고 저는 늙을 때까지 외롭고 비참하게 살다가 죽겠습니다.”김인우의 말에 조하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프런트 데스크에 전화를 걸어 당장 종이와 펜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자, 여기에 적어요.”김인우는 예전에 법에 대해서 공부했던 사람이고 어차피 빈 말도 아니었기에 막힘없이 술술 써 내려갔다.조하랑도 변호사 일을 했던 사람이라 그가 적은 내용이 혹시나 자신과 아이한테 이로운 게 맞는지 다시 한번 꼼꼼하게 검사해 보았다.“이만하면 된 것 같아요. 사인하고 도장 찍읍시다.”그녀의 말대로 김인우는 두말없이 서류에 사인하고 지장을 찍었다.그리고 모든 게 끝난 뒤에야 조하랑은 비로소 안심되었다.“그러면 우리는 이만 돌아가도 되지 않나요? 가서 할아버지한테 말씀드리면 분명 좋아하실 텐데.”“며칠 있다가요. 이왕 온 김에 여행이라 생각하고 며칠 더 놀고 싶어요.”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짠 여행 계획을 그에게 보여줬다.“봐요. 아직 가야 할 곳이 엄청 많다고요.”“저도 같이 가요.”김인우의 말에 조하랑이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았다.“그러면 민정이도 같이 데리고 갑시다. 우리랑 같이 놀다가 진주로 돌아갈 때 셋이 같이 돌아가면 되잖아요.”“그래요.”김인우는 이제 조하랑의 말이라면 뭐든 다
김인우는 정작 말하려니 살짝 망설여지기 시작했다.‘만약 내 아이가 아니라고 하면 어떡하지?’‘그러면 나 말고 또 다른 남자가 있단 말인가?’조하랑이 김씨 가문으로 시집오고 난 뒤부터 김훈이 감시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거의 매일 같은 방에서 자야 했다.김인우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하고 싶은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하랑 씨, 임신했죠!”이건 의문문이 아니라 아예 확신에 찬 서술문이었다.조하랑은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고 깜짝 놀란 나머지 몸이 살짝 떨려왔다.그러나 조하랑의 태도에 김인우는 여태껏 의심만 하던 게 설마 진짜인가 싶어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아 다시 물었다.“아이 아빠는 제가 맞는 거죠?”그래도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조하랑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얼굴이 빨개진 채 오히려 그에게 되물었다.“아닐 수도 있나요?”그녀의 한마디에 김인우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고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조하랑을 안아주고 싶었다.하여 김인우는 단번에 조하랑을 공주님 안기식으로 안아 올렸다.“그러면 저도 이제 애 아빠가 되는 거예요?”그리고 입꼬리가 주체할 수 없이 자꾸만 올라갔다.조하랑은 갑자기 몸이 공중에 뜨게 되자 깜짝 놀라 김인우의 한쪽 팔을 부여잡고 배를 움켜쥐었다.“왜, 왜 그래요! 당장 내려줘요!” 조하랑은 임신 후 예전과는 달리 겁이 많아져 지금은 혼자 길을 건너는 것도 무서웠다.김인우는 그제야 그녀를 놀라게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빠르게 내려주고 사과했다.“미안해요. 많이 놀랐어요?”그리고 조심스레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괜찮아요?”조하랑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그저 애써 감춰왔던 비밀이 이렇게 허망하게 탄로 난 것 같아 마음이 복잡했다.“뜬금없이 무슨 임신이에요. 헛소리 그만해요.”그녀는 애써 김인우의 눈빛을 피했다.“하랑 씨, 제가 의사라는 걸 잊었어요?”“방금 맥을 짚어보니까 임신이 맞던데요?”조하랑은 그가 맥 짚을
그렇게 박민정은 옆에서 조하랑이 기도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그러나 조하랑은 아직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김인우가 이미 알아버렸다는 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그리고 행운을 비는 글도 몇 글자 적어서 이루어지길 바라는 의미로 나무에 걸어뒀다.박민정도 윤우와 예찬이, 그리고 두 동생과 유남준, 거기에 정수미까지 모두 건강하기를 기도했다.밖으로 나와보니 밖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이때, 조하랑은 수많은 사람들 무리에서 어두운 얼굴을 한 채, 자신을 째려보고 있는 김인우를 발견했다.그리고 그에게 빠르게 다가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여기에는 왜 또 따라왔어요?”김인우의 눈가는 어느새 빨개져 있었고 당장에라도 눈앞의 조하랑에게 따져 묻고 싶었지만 옆에 박민정도 있다는 걸 인지하고는 다시 말을 삼켜야 했다.“물어볼 게 있어서 그러는데 언제 돌아가요?”김인우는 애써 차분하게 물었지만 여전히 아무런 낌새도 못 느낀 조하랑은 그저 짜증만 냈다.“오랜만에 민정이랑 쇼핑하는데 분위기 깨지 말고 따라오지도 말아요. 제가 알아서 들어가고 싶을 때 들어갈 테니까.”이때, 옆에서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박민정은 단번에 김인우가 뭔가를 알아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하여 조하랑의 손을 잡고 김인우에게 말했다.“저희도 거의 끝나가던 참이었는데 이만 하랑이를 데리고 가요.”김인우는 창백한 얼굴로 애써 미소를 지었다.“형수님, 감사합니다.”왠지 김인우를 도와주는 것 같은 상황에 조하랑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박민정을 바라보며 물었다.“민정아, 왜 그래?”“분위기상 인우 씨가 급히 너랑 할 말이 있어 보여서. 일단 오늘에는 집에 가고 우리는 다음에 다시 만나 쇼핑하자.”박민정은 슬쩍 그녀에게 눈치 줬다.그러나 조하랑은 여전히 눈치채지 못 채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급하긴 개뿔.”“됐어. 빨리 돌아가.”박민정이 조하랑의 등을 떠밀자 그제야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김인우의 차에 올라타더니 출발하기 전까지도 박민정에게 잊지 않고 당
정씨 가문의 두 노인은 아주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었다.조하랑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어차피 정씨 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부자라 딱히 필요한 물건이 없을 것 같았다.“이따 쇼핑 좀 하면서 혹시나 선물할 게 없나 봐야겠어.”“그래.”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주문하려고 웨이터를 부르니 뜬금없이 사장이 직접 와서 공손하게 말했다.“혹시 두 분께서는 어떤 음식으로 주문하실까요? 메뉴판은 여기에 있는데 드시고 싶은 음식은 맘껏 주문하셔도 되겠습니다.”박민정은 너무 배고픈 상태가 아니어서 조하랑에게 주문을 넘겼다.그렇게 몇 가지 메뉴를 주문하니 빠르게 음식들이 차례대로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조하랑은 밥을 먹다가 요즘 따라 김인우가 거머리처럼 자신에게 달라붙는다고 박민정에게 하소연했다.“나 어떡해?”이때, 조하랑은 또다시 속이 울렁거려 밥 먹다가 재빨리 화장실로 달려갔다.그 모습을 본 사장은 깜짝 놀라 얼굴까지 창백해져서는 다급히 박민정에게 다가와 물었다.“혹시 저희 요리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을까요? 아니면 알레르기가 있는 음식이라도 드신 건지요?”박민정은 안절부절못하는 사장의 모습을 보고 빠르게 해명했다.“아니요. 임신 중이라 입덧이 좀 심할 뿐입니다.”“아, 네네. 그러면 다행이네요.”그래도 여전히 창백한 얼굴인 사장을 보고 박민정은 점점 미안해지기 시작했다.왠지 오늘 이 가게에 적잖이 민폐 끼친 것 같아 박민정은 조하랑을 데리고 빠르게 가게에서 나와 그길로 쇼핑하러 갔다.그러나 두 사람이 가게에서 나오자마자 웬 남자가 다시 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바로 김인우였는데 그는 아까부터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걸 발견하고는 시름 놓고 멀리서 지켜보고만 있다가 조하랑이 토하는 모습을 보고 또다시 이상함을 느꼈다.하여 사장에게 방금 상황을 묻자 그는 사실대로 알려줬다.“아, 아까 그 아가씨가 지금 임신 중이라면서 음식을 먹으면 자주 토한다고 하셨어요.”임신!김인우는 순간 온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잘못 들었나 싶어
그 사람이 박민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조하랑의 입꼬리는 주체를 못하고 아래위로 춤을 췄다.‘뭐야?’‘민정이가 언제부터 이렇게 꼴값을 떨었지? 오늘은 그저 밥이나 먹고 쇼핑하는 건데 이렇게 많은 경호원을 데려올 필요가 있나?’박민정도 차 안에서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을 느끼고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숨고 싶었다.하여 차에서 내리자마자 빠르게 가게 안으로 달려가다가 뒤따라오는 경호원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여기까지 데려다주시면 돼요. 그리고 밖에서 기다려줘요.”그러자 그들은 난감한 얼굴로 박민정에게 말했다.“안 됩니다. 정 대표님께서 무조건 10미터 이내로 밀착 경호하라고 했거든요.”순간 할 말을 잃은 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모든 경호원을 데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사장은 갑자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이닥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조심스레 물었다.“저기, 혹시 저희 가게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요?”순간 박민정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답했다.“가게는 괜찮네요. 인테리어도 심플해서 마음에 들고요. 왜요?”그녀의 대답에 순간 사장은 어리둥절했다.“그러면 여기까지 온 목적이...”사장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그저 친구랑 밥 먹으러 왔는데요?”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두리번거리다가 그제야 구석 창가 쪽에 앉아 있는 조하랑을 발견했다.원래 주목받는 걸 좋아하지 않는 조하랑은 지금 이 순간에도 박민정과는 모르는 사이라고 말하고 싶었다.그러나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박민정은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다가왔다.“하랑아.”조하랑이 못 들은 척 고개를 수그리자 박민정은 오늘따라 그녀의 모습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껴졌다.뒤따라오던 경호원들이 사장에게 말했다.“이제부터 다른 손님은 받지 말아 주세요.”이런 상황이 처음이라 살짝 당황했지만 그래도 사장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네네.”그렇게 경호원들은 다시 박민정의 주위로 흩어져서는 혹시나 위험한 인물이 없는지 관찰하기 시작했다.박민정이 맞은편에 앉자
“엄마, 그게 무슨 말이에요.”박민정은 어렵게 되찾은 자기 친엄마를 두 번 다시는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정수미는 이 기회에 원래 자기 건강 상태를 솔직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박민정의 반응을 보고는 말을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그래, 그만 말할게. 너도 얼른 쉬어. 그리고 요 며칠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아이들이랑 즐겁게 놀기만 해.”“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인 뒤 정수미를 문 앞까지 배웅했다.정수미가 집에 돌아와 보니 길연서가 이미 그녀를 위해 약을 준비하고 있었다.“대표님, 혹시 민정 씨한테 말했어요?”그러자 정수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약을 한 입 마셨다.“아니.”그러다가 허망한 눈빛으로 창밖을 내다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분명히 아주 간단한 몇 마디인데도 그녀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네.”길연서는 한숨을 길게 내뱉더니 다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이런 일은 최대한 빨리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겁니다.”“나도 알아.”정수미는 빈 컵을 그녀에게 건네며 다시 말을 이었다.“됐어. 오늘 너도 힘들었을 텐데 이만 가서 쉬어. 난 괜찮으니까.”“네.”길연서는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를 떴다....이튿날, 아침.박민정은 일찍 깨어나 모든 준비를 마쳤다.도우미들은 박예찬과 박윤우가 일어나자마자 학교 갈 준비를 도와줬는데 그 모습이 박민정에게는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정근우와 임은숙은 박민정이 오늘 친구 만나러 간다는 걸 알고 특별히 조하랑에게 줄 선물까지 준비해 뒀다.“민정아, 이건 우리가 준비한 선물인데 네 친구한테 주면 분명 좋아할 거야.”그러나 박민정은 습관적으로 거절했다.“아니에요. 저랑 오래된 친구라 그럴 필요 없어요.”“바보야, 오래된 친구일수록 이런 서프라이즈도 가끔 필요한 거야.”임은숙은 다시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 선물은 우리가 꼭 주고 싶었어. 우리 민정이랑 친구로 지내줘서 고맙다는 표시니까 빨리 갖고 가.”자신
“네 아빠는 그저 평범하디 평범한 사람이었지. 그런데...”정수미가 잠깐 머뭇거리다가 다시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그런데 잘 생겼던 건 인정, 아니면 내가 데리고 살아주지도 않았을 거야.”박민정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정수미는 한숨을 다시 내뱉었다.“사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가정 환경마저 평범한 아주 보통 집에서 태어난 남자였지.”“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결국에는 혼자만의 힘으로 서주에서 가장 잘나가는 사람으로 되었고.”“나랑 네 아빠는 어느 기업의 한 파티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 뒤로 연인 사이가 되어버렸어.”“그렇게 약혼도 하고 네가 태어난 거야.”정수미는 간단하게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해줬다.“그때의 정씨 가문은 지금처럼 그리 화목하지 않았어. 내 위로 오빠 한 명이 있는데 그 사람은 네 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께서 데려온 아이였지. 그리고 내가 임신한 사실과 네 아빠랑 결혼하겠다고 하자 내가 정씨 가문의 재산을 빼앗아 갈까 봐 몰래 우리한테 손을 썼어.”“그렇게 너는 그 사람 손에 의해 보육원에 보내졌는데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실 그 사람은 그때 널 죽이려 했어. 그런데 마지막에 마음이 약해졌는지 널 그냥 살려둔 거야.”“그때의 나는 너를 낳고 나서 몸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가 하마터면 그 사람이 지른 불로 인해 죽을뻔했어.”“그렇게 네 아빠가 나를 불바다에서 꺼내주다가 본인은 죽게 되었지...”여기까지 말하던 정수미의 눈가는 이미 빨개졌고 두 주먹을 꽉 쥐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나랑 꼭 행복하게 살겠다고 맹세했는데 그렇게 나만 두고 가버린 사람을 난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결국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말로는 용서할 수 없다고 했지만 그 사람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 자체만으로도 너무 괴로워 아무 핑곗거리나 찾았던 것 같았다.박민정은 뭐라고 답하면 좋을지 몰라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그녀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아빠도 아마 엄마가 남은 생을 행복하게 살길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