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우는 지금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박민정에게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머릿속에서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사과부터 해야 할까?아니면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지 물어봐야 할까?그것도 아니면...하지만 그의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박민정은 그를 스쳐 지나더니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순간 어리둥절해진 김인우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박민정은 차에 올라타 상냥한 목소리로 운전 기사에게 말했다.“가시죠.”곱고 평온한 옆모습이 차와 함께 점점 멀어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김인우는 한참 만에야 정신을 차리고 휴대전화를 집어 들어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하지만 그동안 유남준이 박민정에게 한 짓을 떠올린 그는 다시 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김인우는 일단 박민정의 차 번호를 적어둔 뒤 사람을 보내 그녀가 사는 곳을 알아봤다.검은색 벤틀리가 천천히 길을 달리고 있었고 박민정은 차분한 마음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녀의 마음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김인우가 무슨 일로 서교 추모 공원에 나타났는지 그저 의아할 뿐이었다.과거 김인우가 자기를 괴롭히던 모습이 떠오른 박민정은 손을 뻗어 보청기를 제거했다.원래 난청이었던 그녀의 귀는 김인우 때문에 지금은 가끔 굉음 같은 이명이 동반해 들렸고 감정 기복이 심할 때면 피가 나기도 했다.이런 인간을 어찌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박민정도 가끔 그때 김인우를 구한 것을 후회했다. 그를 구하지 않았더라면 지금과 같은 병마와 싸우지 않아도 됐을 테니까...하지만 긁어 부스럼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괜히 쓸데없이 일을 만들었다가 고생하는 것보다는 가만히 있는 게 낫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김인우와의 접촉을 멀리해야 했다. 그녀에게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윤우를 구하는 것이다.그래서 김인우를 계속 모른척하며 문제 자체를 일으키지 않게 하고 싶었다.아무래도 김인우는 이지원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발 벗고 나설 테니까....
이지원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어찌 된 일인지 김인우는 4년 전부터 완전히 딴사람이 된 듯 이지원의 여러 가지 부탁을 무시하고 있었다.유남준이 자기를 도와줄지 말지에 대해서도 이지원은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이지원은 자기가 원하는 것은 꼭 손에 넣고야 마는 성격이다.“생각 좀 해봐, 어떻게든 민 선생 곡을 꼭 손에 넣어야지.”...주상 엔터테인먼트의 전화를 끊은 박민정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녀보다 이지원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연예계든 가요계든 그녀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었다.다른 사람의 성과를 표절하고 다른 사람의 쌓은 업적을 빼앗고...유남준과 김인우의 절대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그녀는 절대 이 바닥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청각 장애가 있는 사람이 곡을 만드는 것, 이것보다 더 힘든 일은 없을 것이다. 박민정은 그동안 두 아이와 은정숙을 돌보느라 혼자 고생을 다 해왔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모은 돈은 한 가족이 살기에 충분했기에 돈 때문에 직접 만든 곡을 이지원에게 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었다.숙소로 돌아온 박민정은 휴대전화를 옆에 두고 욕실로 가서 샤워하며 계획했던 물건을 어떻게 빨리 손에 넣을지 고민했다.피곤해서인지 욕조에 누워있던 박민정은 어느새 잠이 들었다.얼마나 잤을까, 절친 조하랑의 전화가 그녀를 깨웠다.“민정아, 이틀 뒤면 나도 돌아가.”박민정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알았어, 네가 오면 내가 한턱 톡톡히 낼게.”“좋아. 그런데 요즘 어떻게 지내? 유남준이 괴롭히거나 그러지는 않아? 그리고 이지원 그 나쁜 년은 네가 돌아온 거 알아?”조하랑은 박민정이 혼자 여기에 있는 게 너무 걱정되었다. “이지원은 아직 내가 돌아온 거 몰라. 하지만 곧 알게 되겠지.”박민정이 베란다로 나가자 여름 바람이 뜨거운 공기와 함께 그녀를 감쌌다.“유남준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절대 나에게 함부로 못 할 거야.”한창 조하랑과 얘기 중일 때,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저녁 9시가 다 된
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꼭 움켜쥐었다.유남준은 그녀가 경직된 것을 느끼고 큰 손으로 그녀의 작은 손을 감싸며 더 거칠게 키스를 퍼부었다.박민정은 등을 꼿꼿이 세운 채 그를 밀치고 싶은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고 있었다. 윤우와 예찬이가 그녀가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다...아이를 머릿속에 떠올린 그녀는 이대로 그에게 순종해 바로 아이를 가질 계획이다.여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서툰 행동으로 그의 움직임에 응하려고 했다.유남준은 살짝 멈칫했지만 이내 찌푸린 인상을 펴고 옷깃의 단추를 잡아당기며 허리띠를 풀었다.목욕을 방금 마친 박민정의 싱그러운 냄새가 그의 코를 파고들자, 그의 심장도 더 빨리 요동쳤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거실 소파에 박민정을 올려놓고는 그녀의 가운을 잡아당겼다.박민정은 두 손을 더 꽉 움켜쥐었다.그녀는 유남준의 눈을 똑바로 마주할 수도 없었고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다. 머리 위에 비치는 따뜻한 불빛으로 시선을 옮긴 그녀는 순간 머릿속에 과거 이지원이 자신에게 보낸 수많은 유남준과의 다정한 사진들이 맴돌았다. 그리고 귓가에는 이지원이 했던 말들이 울려 퍼졌다.“민정 씨, 남준 씨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한 적 있어요? 예전에 나에게는 자주 말했었는데.”남자의 뜨거운 체온이 점점 가까워짐을 느낀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유 대표님, 우리가 이러면 톱스타 이지원 씨가 질투해서 대표님께 따지지 않을까요?”이제 막 정점에 도달하려던 찰나, 흥을 깨는 박민정의 말에 유남준은 모든 행동을 멈췄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박민정! 계속 아무것도 모른 척할 거야?”박민정은 옆에 떨어진 가운을 주워 몸을 가리며 말했다.“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그녀의 이런 행동에 유남준은 저도 모르게 몇 년 전의 그날 밤을 떠올렸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손으로 박민정의 하얀 얼굴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다가갔다.“이번에 돌아온 목적이 뭐야?”4년 넘게 도망쳐 놓고 갑자기 돌아온 건
와인에 약을 탄 박민정은 어깨가 반쯤 드러나는 요염한 민소매 잠옷으로 갈아입고 유남준에게 다가가 술을 따랐다.“받으세요.”유남준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한눈에 바라보며 그녀가 건네는 잔을 받아 들었지만 마시지 않았다.“열 살 때 고향에서 진주로 왔어. 그때 처음 만났고.”순간 박민정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유남준이 두 사람의 첫 만남을 기억하고 있을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녀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 술잔을 다시 그의 앞으로 밀었다.하지만 유남준은 그녀가 민 술잔을 다시 박민정 앞으로 들이밀며 말했다.“네가 먼저 마셔!”약을 탄 잔 속의 술을 보며 박민정은 순간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잔을 들고 바로 마셨다. 목구멍으로 흘러 들어가는 술은 그렇게 맵고 쓸 수가 없었다.그녀는 만약 자기가 마시지 않으면 유남준이 분명 의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오랫동안 사업에 몸담은 유남준은 눈치가 빨라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이면 바로 알아채기 때문이다.박민정은 다시 술잔에 술을 따라 유남준 앞에 놓았다.“유 대표님, 이제 당신 차례예요.”유남준은 손목 마디마디가 뚜렷이 보이는 긴 손으로 잔을 들어 살랑살랑 흔들었지만 계속 마시지 않았다.그는 여유 있는 눈빛으로 박민정을 바라보며 말했다.“뭐가 그리 급해, 우리 추억부터 먼저 회상해야지.”추억?십여 년의 추억을 어찌 하룻밤에 다 말할 수 있겠는가?박민정은 예쁜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실내는 분명 에어컨을 시원하게 켠 상태였지만 그녀의 이마에서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 손바닥을 계속 꼬집으며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녀는 맑은 눈으로 유남준을 깊이 바라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앞으로 추억할 시간은 많아요. 오늘은 시간도 늦었는데 여기서 쉬다 가시지 않을래요?”박민정은 말을 하면서 백옥 같은 손으로 술잔을 들어 유남준의 앞에 내밀었다.그녀도 자기가 이렇게 행동하는 게 맞는지 확신이 없었다.하지만 어렵게 얻은 기회, 절대 이대로 놓치고
정민기는 얇은 잠옷을 입고 온몸이 흠뻑 젖은 채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박민정을 발견했다. 그녀의 손과 다리는 이미 새빨갛게 할퀸 상처들로 가득했다. 그는 재빨리 물을 잠그고 가운을 집어 박민정의 보일 듯 말 듯 한 몸을 가렸다.“괜찮으세요?”그의 목소리는 그리 낮은 편은 아니었으나 박민정의 귀에는 그저 희미하게 들릴 뿐이었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박민정은 창백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괜찮아요”“제가 병원까지 모셔다드릴게요.”정민기가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으려 하자 그녀는 옆으로 피하며 말했다.“안 돼요. 진주에 있는 모든 병원은 전부 김씨 가문의 손아귀에 있어요. 그리고 김인우도 내가 돌아온 것을 이미 알고 있고요. 혹시라도 내가 약을 먹은 것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김인우는 분명 유남준에게 말할 거예요. 유남준이 술에 약을 탔다는 걸 알면 앞으로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는 겨우겨우 긴 말을 끝냈다.4년 전, 그녀는 자기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었다.연지석의 도움이 없었다면 절대 김인우를 속일 수 없었을 것이다.연지석이 곁에 없는 지금, 그녀가 병원에 간다면 그쪽 사람들은 분명 김인우에게 가장 먼저 알릴 것이다.박민정이 병원을 가지 않고 혼자 이겨내겠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정민기는 욕실에 들어오기 전, 거실 바닥에 쏟아진 술을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하게 되었다. 그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하지만 지금 민정 씨 몸 상태가...”“얼음 좀 가져다주세요.”“네. 알겠어요.”정민기는 주방에 들어가 냉장고에서 얼음을 가져왔다.얼음 한 봉지를 통째로 욕조 안에 넣자 살을 에는 듯한 차가움이 박민정의 달아오른 몸을 그나마 편하게 했다.정민기는 또 의약 상자를 가져와 그녀 옆에 놓았다.“고마워요.” 박민정은 진심 어린 말투로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정민기는 아무 말도 없이 욕실을 나가 그녀가 정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면서 연지석에게 그녀의 안부도 전해줬다.몇 시간
이지원은 조금 전 유남준의 마지막 말을 듣고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워낙 생각이 많은 서다희는 그녀의 물음에 한두 마디 야유를 퍼부었지만, 박민정이 돌아왔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알리지 않았다.눈치 빠른 이지원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속으로 서다희를 욕하며 유남준에게 다가갔다.“오빠, 명절이 곧 다가온다고 어머님이 오늘 저녁에 같이 밥 먹자고 했어요.”이지원이 말하는 어머님은 바로 유남준의 어머니이다.분명 또 두 사람이 빨리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라는 말을 하기 위함일 것이다. 유남준은 고개도 들지 않고 한 마디 툭 내뱉었다.“알았어.”그의 대답을 들은 이지원은 사무실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저 오늘은 별일 없으니 여기서 기다릴게요.”하루 종일?유남준은 그녀를 힐끗 보며 한마디 했다.“그렇게 한가해?”이지원은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태연한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편 유남준은 그녀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나는 일할 때 남이 옆에 있는 거 안 좋아해.”그의 말에 이지원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그저 한마디만 내뱉었다.“그럼, 밖에서 기다릴게요.”유남준이 더 이상 대꾸하지 않자 이지원은 내키지 않은 얼굴로 대표이사실을 나섰다.유남준의 차갑게 거절하는 얼굴은 예전에 사귀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늘 변함이 없었다.이런 사람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박민정뿐일 것이다.기분 전환을 위해 밖으로 나간 이지원은 김인우의 사무실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비서에게 물었다.“인우 오빠 요즘 안 오나요?”“요즘 집안 어르신들이 김 대표님에게 결혼 준비를 하라고 해서 못 왔어요.”비서는 사실대로 대답했다.결혼?이지원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김인우는 이지원 때문에 집안 어르신들이 안배한 혼사를 거절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하지만 요즘 집안 어르신들이 한창 김인우의 결혼 준비를 한다는 말에 이지원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씁쓸했다.“상대방이 누군데요?”이지원은 궁금한 마음에 비서에게 물었다.비서
고아로서 어릴 때부터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이었다.김인우의 말은 그녀가 처음 재벌 2세들과 합류했을 때 얼마나 많은 추태를 부렸는지, 몇 년 전에 얼마나 창피했는지를 상기시켜 주었다."내가 유씨 가문의 며느리가 되면 누가 나를 무시할지 보자!”이지원이 박민정을 언급하지 않은 걸 보니 그녀가 돌아온 걸 모르는 것 같았다.김인우는 9번 공관 밖에서 계속 기다렸다."도련님, 민정 씨는 오늘 내내 안 나오셨어요. 제가 가서 문을 두드려볼까요?"보디가드는 그를 기다리게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김인우는 거절했다."아뇨, 그냥 여기서 기다릴게요.”어제 박민정이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나서 그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설렘을 느꼈고 즉시 그녀를 찾아가 그해의 일을 묻고 싶었다.하지만 그가 박민정을 괴롭혔을 때를 생각하면 그는 감히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한번 기다리기 시작하니 벌써 두 시간이 지났다.박민정은 어젯밤에 얼음물에 샤워해서 오늘 감기에 걸린 듯 머리가 어지러웠다. 정민기가 그녀에게 약을 사줬는데 마신 후에도 여전히 몸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외투를 걸치고 어제의 긁힌 상처를 가리고 밖에서 기분 전환을 하려고 공관을 나왔다. 여름인데도 긴 옷에 긴 바지를 입고 있는 그녀는 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의사는 어젯밤 일로 그녀를 다시 병원에 입원시킬 뻔했다고 말했다. 앞으로 천천히 신중하게 의논해야 할 것 같다고 하셨다.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차를 눈치채지 못한 박민정이 그대로 지나가려 하자 김인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어... 민정아.”박민정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며 멍하니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김인우는 곧장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가에 이르러서는 다 사라져 버렸다."그동안 잘 지냈니?”‘잘 지냈냐고?'그녀가 마음속으로 냉소를 지었다.‘내가 잘 못 지내지 않기를 가장 바라는 사람이 아닌가?'그녀는 입술을 꼭 오
박민정은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남자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죄송합니다만 몇 년 전에 아팠던 적이 있어서 많은 사람과 일을 기억하지 못해요.”말을 마친 박민정은 돌아서서 공관으로 돌아갔다. 김인우의 큰 몸집은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기억이 안 난다고?'그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감명을 받지 못했다. 보디가드도 도련님이 이렇게 넋이 나가시는 걸 처음 보기 때문에 앞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공관으로 돌아와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박민정은 에스토니아 공항에서 절친 조하랑이 미리 비행기 표를 끊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오늘 밤이면 진주시에 도착할 것이었다. 그리고 박예찬도 인터넷에서 같은 비행기 표를 사서 몰래 비행기에 올랐다.저녁 7시에 조하랑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그녀는 트렁크 높이도 안 되는 운동복 차림에 마스크와 모자까지 쓴 박예찬이 뒤따라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자신보다 더 큰 캐리어를 끌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이상한 시선에 조하랑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사람들의 비난 소리가 높았다."엄마가 어떻게 아이한테 저렇게 큰 가방을 끌고 다니게 할 수 있지.”"90년대 엄마들은 기가 막히네.”"저런 사람은 엄마가 될 자격이 없어.”‘이상하네, 왜 다들 날 잡아먹으려는 것 같지?'박예찬의 진지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나서야 그녀는 큰일이 났다는 것을 알았다."엄마, 걸을 때 전화하면 안 돼요.”조하랑은 자신이 언제 아들을 낳았는지 궁금했다. 커다란 상자를 끌고 마스크와 모자를 쓴 채 빛이 나는 순진한 눈망울을 돌아보던 그녀는 하마터면 발을 동동 구를 뻔했다.욕을 하고 싶은데 할 수 없었다. 만약 박민정이 그녀의 아들이 몰래 따라온다는 것을 알았다면 미쳐버릴 것이 틀림없었다.공항의 많은 사람은 몰랐지만 그의 말을 듣고 순간 마음이 아프면서 사랑스럽기도 했다."귀여워, 철이 든 아가야.”"내 아들이었으면 좋겠다.”"이렇게 무책임한 엄마
조하랑은 종일 그저 멍하니 호텔에만 있으며 결혼 준비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다음날 오후가 되자 그녀는 김인우에게 자신의 의견을 얘기해주려 했다. 그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방 문을 두드렸다.조하랑은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내려놓고는 슬리퍼를 끌며 문을 열어주러 걸음을 옮겼다.하지만 문이 열린 그 순간,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나타나 그녀의 코와 입을 손수건으로 막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조하랑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김인우의 집.김인우는 오늘 종일 마음이 복잡했다. 그는 초조한 심경으로 조하랑의 결정을 기다렸지만, 오후 5시가 돼도, 6시가 돼도 울리지 않는 휴대폰에 마음은 점점 불안해져만 갔다.결국, 참지 못한 김인우가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생각 정리 끝났어요?”하지만 1분이 지나도, 10분이 지나도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김인우는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에 원하면 원한다, 싫으면 싫다는 의사 표현조차 똑바로 하지 않는 조하랑을 원망했다.마음 같아서는 조하랑의 앞으로 순간이동을 해서라도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초조하게 자신의 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김인우를 바라보던 박예찬은 덩달아 함께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아저씨, 가만히 좀 앉아계시면 안 돼요?”그 말에 김인우는 곧장 걸음을 멈춘 채 박예찬을 바라보며 말했다.“하랑 이모한테 전화 좀 해줄래?”박예찬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스마트워치를 이용해 조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아이의 스마트워치에서도 들려온 건 그저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이었다.“왜 아직도 전화기가 꺼져 있는 거지?”김인우가 미간을 찡그린 채 말했다.그때, 김훈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솔직히 말해 봐. 너 하랑이한테 뭐 잘못한 거 있지?”김인우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반박했다.“제가 감히 어떻게 그래요.”“그럼 하랑이가 왜 갑자기 네 연락을 안 받겠어? 휴대폰도 꺼져 있고 말이야. 내일이 당장 결혼식인데.”김훈은 김인우의 머리를 툭툭 건드리며 말을 이어갔다.“솔직하게 말해. 너 밖에서
조하랑은 김인우를 그저 멍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인우 씨...”김인우는 조하랑이 입을 열기도 전에 다시 말을 이었다.“내일까지 고민할 시간 더 줄게요. 하지만 그다음 날에 갑자기 결혼 취소해서 나한테 망신을 준다면, 나도 하랑 씨 용서 안 해줄 거예요.”김인우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김인우가 진주시에서 그 어떤 여자를 못 만나봤을까. 적어도 진주시 90%의 여자들은 그와 결혼하고 싶어 할 것이다.만약 조하랑이 결혼식 당일 갑자기 결혼을 취소해 버린다면 그는 조하랑을 절대 가만둘 생각이 없었다.김인우의 말에 조하랑은 한동안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자신이 사랑하던 강연우는 이미 유부남이었고, 황예지도 아주 좋은 여자였다.“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조하랑이 말했다.핸들을 잡고 있던 김인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이미 결혼을 확정 지은 조하랑이 이제 와서 결혼식을 취소할 것이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그런데도 아직까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그녀는 김인우를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단순한 예비 후보 취급을 받은 김인우의 마음이 불쾌했다.“집으로 데려다줄까요?”이틀 뒤면 결혼식이었던 탓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집으로 갈 수 없었다. 결혼 절차라는 것은 지켜야 하는 법이었으니까.“싫어요.”조하랑은 단호하게 그의 말을 거절했다.“근처에 있는 아무 호텔로 데려다주세요.”“그래요.”김인우가 대답했다.그는 시설이 좋은 호텔 하나를 찾아 조하랑을 내려주었다.원래였다면 조하랑을 직접 방까지 데려다줬을 테지만 이미 빈정이 상해버린 탓에 김인우는 그녀를 혼자 호텔로 들어가게 두었다.그녀를 호텔까지 데려다준 김인우는 곧장 조석천에게 안부를 전했다.호텔 방 안으로 들어온 조하랑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지만 따로 하소연할 사람도 없었다.결국,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박민정에게 연락했다.마침 휴식을 취하려던 박민정은 조하랑에게서 결려온 전화에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박
“하랑아, 왜 아무 말도 안 해? 제발 아빠 좀 놀라게 하지 마. 난 정말 널 위해서 그랬던 거라고. 지금 아빠는 먹고사는 데 아무 문제 없고, 딱히 바라는 것도 없어. 굳이 너를 재벌 집에 시집 보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뜻이야. 하지만 네 미래도 생각해야지. 아무 걱정 없이, 특히 돈 걱정 없이 살기 위해서는 재벌 집으로 들어가는 게 최고야.”“너도 알잖아. 우리 집은 그냥 졸부일 뿐이야. 돈 없을 때를 생각해 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릴 무시했는지. 엄마랑 아빠는 네가 그렇게 살길 원하지 않아.”조석천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났다.그의 아내가 세상을 뜨게 된 것도 치료비가 부족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그것이 트라우마로 남은 탓에 조석천은 가난할지도 모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항상 갖고 있었다. 자신의 딸이 혹시라도 가난한 남자 때문에 고생하지는 않을까 무서웠다.그 남자가 성공을 거둔다고 해도 단순한 도박에 불과했으니 말이다.조하랑 역시 아버지가 이런 짓을 한 이유는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해도 아버지의 행동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알겠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돌발행동 같은 건 할 생각 없으니까요. 지금은 조금 혼자 있고 싶네요.”말을 마친 조하랑은 전화를 끊었다.갑자기 끊긴 전화에 조석천은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조하랑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방법이 없었던 그는 결국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혼자 거리를 배회하던 조하랑은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그녀는 밀려오는 죄책감에 파묻혀 있었다. 눈앞에 강연우가 있다면 당장이라도 따져 묻고 싶었다. 왜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는지, 왜 본인을 정말 쓰레기로 여기게 했는지.얼마나 걸었을까. 돌아가기 싫었던 조하랑은 아무 곳에나 자리를 잡고 앉았다.혹시라도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걸려올까 봐 휴대폰 전원을 꺼두었고, 아직도 다시 켤 용기가 나지 않았고, 연락
그 말에 강연우는 주먹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가까스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다.“그런 말은 왜 한 거야?”고개를 잠시 떨어뜨린 황예지는 대답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우리 내일 이혼하자.”또 이혼 그 소리.강연우의 목울대가 일렁였다.“예지야, 내가 얘기했을 텐데. 죽음은 있어도 이혼은 절대 없을 거라고.”황예지가 불안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강연우는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었다.“걱정하지 마. 난 정말 하랑이랑 다시 시작할 생각이 없어. 우리 둘이 잘살아가면 돼. 내가 너 잘 챙겨줄게.”말을 마친 강연우는 황예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어떤 사람이나 일은 한 번 놓친 순간, 다시는 손에 넣을 수 없게 된다.황예지는 공허하고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강연우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어쩌면 강연우가 정말 자신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계속 자신을 챙겨주며 살겠다는 말을 할까?...조하랑은 넋 나간 사람처럼 정처 없이 거리를 걷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들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빠.”딸이 재벌 집에 시집간다는 생각에 하루하루를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던 조석천이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 우리 딸?”“그때, 아빠는 정말 강연우를 죽일 생각이셨어요?”그 말에 조석천의 심장이 철렁했다.이미 결혼까지 한 강연우가 그 일을 딸에게 얘기해줄 리 없다고 굳게 믿어왔건만, 결국...조하랑이 재벌 집에 시집간다는 것을 안 강연우가 중간에서 뭐라도 뜯어먹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했다.“하랑아, 아빠 말 좀 들어 봐. 강연우 그 쓰레기 자식은 신경 안 써도 돼, 그럴 가치가 없는 놈이야. 지금은 김인우랑 할 결혼식에만 집중해. 그게 제일 중요한 일이니까.”그는 애써 말을 돌렸다.조석천의 말에 조하랑의 눈빛은 한층 더 공허해졌다.“아빠, 일단 대답부터 해주실래요? 왜 강연우가 갑자기 실종됐었는지, 그리고 다시 나타난 강연우가 왜 갑자기
휴대폰을 쥐고 있던 조하랑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는 강연우의 결혼식에 참석하긴 했어도 그와 결혼하는 신부가 누구인지, 이름은 무엇인지,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지 볼 생각은 없었다.저도 모르게 본인과 신부를 픽하면 시도 때도 없이 그 기억이 불쑥 나타나 자신을 괴롭힐까 봐 두려웠다.자신을 강연우의 아내라고 소개하는 황예지를 보며 조하랑은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왜 저를 만나고 싶으셨던 건데요?”조하랑이 겨우 입을 뗐다.“하랑 씨와 연우 사이에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연우 대신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래요. 그러니까 제발 한 번만 만나주시면 안 될까요?”황예지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내일모레가 당장 결혼식인 상황에 조하랑은 그녀의 부탁을 거절해야만 했다. 하지만 너무 간절하면서도 진지한 황예지의 목소리에 조하랑은 홀린 듯 대답했다.“알겠어요.”두 사람의 약속 장소는 한 평범한 식당이었다.조하랑은 여리여리하면서도 차분한 분위기의 황예지를 바라보며 자신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안녕하세요.”조하랑은 먼저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황예지도 그런 조하랑의 인사에 함께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인사를 받아주었고, 두 사람은 마주 본 상태로 한 테이블 앞에 착석했다.“저한테 하실 말씀이 뭐죠?”조하랑은 자리에 앉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황예지는 대답 대신, 가방에서 병원 진단서를 꺼내 조하랑의 앞에 내밀었다. 그녀가 내민 진단서에는 황예지의 남은 수명이 3년밖에 안 된다는 검사 결과가 적혀있었다.조하랑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진단서를 바라보았다.젊은 나이에 이렇게나 큰 병에 걸렸다는 것이 안쓰러웠다.조하랑이 곧장 입을 열었다.“걱정 마요, 저는 연우랑 아무 사이 아니니까. 저도 곧 결혼할 예정이에요.”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황예지 괜한 오해를 하는 일이 없길 바라서였다.황예지는 그런 조하랑을 보며 그녀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
강연우는 듣고 나서 무력감을 느꼈다. 담배를 세게 몇 모금 빨다가 끄고 쓰레기통에 버렸다.“제가 하랑이한테 말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세요? 만약 비서님이 하랑이라면, 이런 사실을 알고 나서 어떻게 하겠어요? 설마 몇 년을 더 기다리다가, 제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 결혼하자고 할 겁니까?” 강연우가 물었다.서다희는 이 말을 듣고 뭐라 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나중에 하랑 씨가 진실을 알게 되면 분명 변호사님을 미워할 거예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분이 정말로 김인우 씨를 사랑하는 것 같아요?”서다희는 자주 조하랑과 김인우가 다투는 걸 봤고, 그녀가 김인우를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아마도 김인우와 결혼하는 건 강연우에 대한 보복일지도 모른다.강연우는 다시 담배를 한 개비 물었다. “전 바로 그런 상황이 생길까 봐 두려워요. 그래서 김인우 씨와의 결혼을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후회하지 않았으면 해요.”“모레면 두 분 결혼하세요. 그때가 되면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어요. 변호사님이 진실을 말하면 그분이 김인우 씨와 결혼할지, 변호사님을 기다릴지, 아니면 둘 다 선택하지 않을지 직접 판단하게 하세요.” 서다희가 말했다.남자로서 그는 강연우가 조하랑의 인생을 망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이해했다. 하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진실을 알 권리도 중요하다. 일방적으로 이유도 없이 관계를 끝내는 것이 진실보다 더 상대방을 아프게 할 수도 있다.서다희가 보기에 조하랑은 겉으로는 밝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더 생각해 볼게요.” 강연우가 고개를 숙였다.“그러세요.” 서다희는 그제야 자리를 떴다.강연우는 그가 간 후 창밖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확인해 보니 아내였다.“여보, 무슨 일이야?”“연우 씨, 아직도 안 왔어? 야근해?”강연우가 시간을 보니 벌써 저녁 7시 30분이었다. 그는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응, 지금 바로 갈게. 나 기다리지 말고 먼저 밥 먹어.
IM 그룹. 유남준은 강연우를 불러 정씨 가문을 조사하라고 했다. 하지만 강연우는 멍한 듯했고, 정신이 산만해 보였다.유남준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아니에요, 지금 가보겠습니다.” 강연우는 정신을 차리고 나갔다.그가 나가자마자 서다희가 와서 유남준에게 말했다. “모레가 조하랑 양과 김인우 군의 결혼식입니다.”유남준은 이 말을 듣고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강 변호사가 조하랑 씨를 포기한 거 아니었어? 이제 와서 결혼한다고 하니까 이러는 건가?”솔직히 말해서, 남자로서 유남준은 이런 강연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것도 저것도 다 욕심내는 꼴이란 생각이 들었다.서다희는 그의 말에 서둘러 자신이 아는 걸 설명했다. “대표님, 모르시는 게 있으세요. 강 변호사님께서 조하랑 씨를 포기한 데는 이유가 있었어요.”유남준은 그 말을 듣고 그를 깊이 바라보며 계속 말하라는 눈짓을 했다. 유남준이 이런 가십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조하랑이 박민정의 친한 친구인 만큼 박민정과 관련된 사람과 일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아둬야 했다.“그때 두 사람이 헤어진 건 사실 조하랑 씨 아버지가 쫓아냈기 때문이에요. 당시 강 변호사님은 다리가 거의 부러질 뻔했고 목숨도 위험했다고 해요.”서다희는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강 변호사님은 살기 위해 서울로 도망쳤고, 거기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죠.”“그분이 강 변호사님을 구해주고 불편한 몸을 지극정성으로 돌봐줬어요.”유남준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서 은혜를 갚으려고 결혼한 건가?”“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서다희가 계속 말을 이었다. “강 변호사님이 건강을 회복한 후, 지금 아내의 아버지를 통해 유명한 변호사가 되었고 많은 사람을 알게 됐어요. 그래도 여전히 조하랑 씨와 다시 시작하고 싶어 했고, 그분의 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다음 진주시로 돌아왔죠.”“그래서?” 유남준은 흥미가 생겼다. 이렇게 들어보니 강연우는 박민정과 그녀의 친구들이 말하는
조하랑은 모레면 결혼이다. 그동안 계속 결혼식 준비를 해왔음에도 아직도 정신없이 바빴다. 박민정은 박윤우의 상태가 크게 나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조하랑을 도와 준비를 함께했다.“이 웨딩드레스 정말 무거워.” 조하랑은 맞춤 제작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은 채 천천히 걸어 나왔다.김인우는 옆에서 휴대폰을 보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는데, 눈빛에 감탄의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늘 조하랑이 평범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왜인지 꽤 예뻤다.김인우가 한참을 반응이 없자, 조하랑은 그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 박민정에게만 물었다. “민정아, 어때? 나한테 안 어울리는 것 같아. 너무 무거워.”박민정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예뻐.”조하랑은 그다지 자신이 없었다. “정말?”“당연하지, 완전 예뻐.” 말을 마친 박민정은 김인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인우 씨, 어때요?”김인우는 정신을 차리고 얼른 시선을 돌려 휴대폰을 보며 말했다. “그럭저럭.”“그럭저럭이 뭐예요?” 조하랑은 둘이 정말 천생연분이 아닌 것 같다고 느꼈다. “예쁘면 예쁘다고 하고 안 예쁘면 안 예쁘다고 하면 되죠.”“...예뻐요.” 김인우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이 한마디를 겨우 뱉어냈다.조하랑은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좋아요. 그럼 이걸로 해요.”결혼식에 한 벌로 끝날 리 없었다. 조하랑은 잇따라 여러 벌의 옷을 입어보았고, 축배 드레스도 있었다. 모든 걸 다 마치고 나니 그녀는 이미 기진맥진했다.“아, 너무 피곤해. 결혼 정말 귀찮네.”김훈이 다가와 말했다. “인생에 결혼식이 딱 한 번뿐인데 귀찮다고 하지 마. 절대로 후회 남기지 말아야 해, 알겠니?”박민정은 김인우 할아버지가 정말로 조하랑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시댁 식구라기보다는 친정 식구 같았다.“알겠어요, 할아버지. 그런데 오늘 너무 피곤해서요, 민정이도 이렇게 오래 같이 있었는데 저희 좀 나가서 돌아다녀도 될까요?” 조하랑은 무언가가 생각난
“엄마, 제가 직접 끓인 죽이에요.” 아침 일찍, 이지원은 정수미의 환심을 사려 했다. 만약 정수미가 그녀가 사기꾼이라는 걸 이미 알지 못했다면 아마도 진심으로 감동했을지도 모른다.정수미는 죽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거기 놓아.”“네.” 이지원은 죽을 내려놓고도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녀는 정수미의 뒤로 가서 말했다. “엄마, 매일 일 하시느라 힘드실 텐데 제가 등 좀 마사지해 드릴까요?”“괜찮아. 집에서 심심하면 밖에 나가서 견문이나 넓히는 게 어떻겠니.”정수미가 말했다.또다시 차가운 대우를 받은 이지원은 정수미의 성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는 할 수 없이 나왔다. “내가 대체 뭘 잘못한 거지? 왜 나한테 이렇게 차갑게 대하는 거야?”이지원이 이해할 수 없는 가운데, 윤소현이 제멋대로인 모습으로 정수미를 찾아가는 걸 보았다.문득 뭔가를 깨달은 듯, 그녀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떠올랐다.“자업자득이네. 당신은 이렇게 제멋대로이고 불효한 자식이 좋은가 보지!”오늘은 정수미의 환심을 살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더 이상 괜한 수고를 하지 않기로 했다.지금 이지원의 손에는 쓰고도 남을 돈과, 많은 이들이 꿈꾸는 권력이 있었다.그녀가 제호에 가면 늘 최상층의 고급 룸을 썼다.예전에 그녀를 무시하던 그 귀족 아가씨들과 도련님들이 이제는 앞다투어 아첨을 했다.“지원아, 난 네가 예전부터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어. 알고 보니 정씨 가문의 공주였다니.”“그래, 넌 그렇게 예쁜걸. 한눈에 봐도 가난한 집 딸은 아니었지.”“난 예전부터 네가 나중에 크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이지원은 그들의 아부를 들으며 더 이상 얼굴의 득의양양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와인 잔을 들며 말했다. “하지만 너희들 예전엔 날 무시하지 않았나? 내가 고아라고 했지? 근데 그거 알아? 민정 씨가 진짜 고아야.”사람들은 잠시 멍해졌다. 박민정이 한수민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 이지원은 거리낌 없이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