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담 비서 서다희는 이들의 대화를 듣고 바로 제지했다. 오지랖이 넓은 비서여서가 아니라 눈치가 빠르기 때문이었다.요즘 유남준은 일 말고도 박민정을 찾고 연지석의 회사를 제압하는 데 힘쓰고 있었다. 이 모든 일련의 행동들로 서다희는 유남준이 박민정을 싫어하는 게 아님을 알았다.시간은 계속 흘렀지만 유남준은 박민정을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눈이 펑펑 내리는 섣달 그믐날 밤, 예전의 박민정이라면 분명 유남준과 같이 본가로 내려가 그의 가족과 함께 섣달 그믐날을 보냈을 것이었다.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유남준이 혼자 본가로 돌아갔다.박민정이 금방 떠났을 때 그의 웃고 떠들던 모습과 달리 지금은 혼자 앉아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점점 차가워졌고 주위만 가면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느낌에 도저히 다가가기 어려웠다. 그는 본가에 갔다가 얼마 있지 않고 다시 두원 별장으로 돌아왔다. 두원 별장 밖에도 어느새 새하얀 눈이 가득 쌓여 온 세상을 한층 더 아름답게 만들었다.하지만 유남준은 왠지 뭔가 부족한 느낌을 받았다.그는 창가 앞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혼자 중얼거렸다. “박민정, 내 눈앞에 나타나기만 해봐!”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고영란이 화려한 차림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남준아, 너 대체 왜 그래? 너 진짜 민정이가 죽은 이후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유남준은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그는 여태껏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으니까!그때 고영란은 그동안 참아왔던 말을 그에게 물었다.“혹시 민정이를 진짜로 좋아하게 된 거야? 그런데 이제 곁에 없잖아...”유남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좋아하면 안 돼요?”고영란이 더 말을 하려 하자 유남준은 바로 그녀를 내쫓았다.그녀가 떠나자마자 유남준은 거실에 혼자 앉아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분명 히터를 틀었음에도 유남준은 온몸이 차갑게 느껴졌고 입으로는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박민정은 창밖의 흰 구름을 바라보며 4년 전을 떠올렸다.그때 절망에 빠져있던 그녀는 연지석의 도움을 받아 죽은 척하고 해외로 나온 뒤 쌍둥이를 낳았다.모든 것이 순탄했지만 안타깝게도 올 3월, 빠른 출산으로 늘 시름시름 앓던 막내아들 박윤우가 조혈모세포 악성 혈액질환인 속칭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의사는 박민정에게 제대혈 조혈모세포 이식을 통해 혈액질환을 치료할 수 있다고 말했다.지난 몇 달 동안 박민정은 유남준의 정자를 채취할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치료는 빠를수록 좋다는 말에 박민정은 직접 진주에 가서 정자를 채취하기로 했다.윤우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절대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었고 유남준을 찾는 일도 절대 없었을 것이다.비행기가 이륙하기 전, 박민정은 절친 조하랑의 문자를 받았다.[요즘 좀 바쁘니까 내가 돌아온 후에 너와 같이 유남준을 처리할게. 이지원 그 여자도.]조하랑은 박민정이 대학을 다닐 때 친해진 친구로 졸업 후 그녀는 해외 유학을 하러 외국으로 갔고 박민정은 결혼하면서 그녀와 연락이 뜸해졌다.그리고 4년 전 박민정이 에스토니아에 도착했을 때 우연히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박민정은 그녀의 문자를 보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답장했다.[좋아.]답장을 마친 그녀는 이륙하기 위해 휴대전화를 비행기 모드로 전환했다.진주는 여름만 되면 큰비가 끊임없이 내렸다.박민정이 비행기에서 내릴 때는 이미 저녁 7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곳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황홀함이 가득했다.공항을 나서자 럭셔리한 링컨 한 대가 시간 맞춰 박민정의 앞에 멈춰 섰다.운전기사는 차에서 내려 공손히 차 문을 열었다.“민정 씨, 어서 앉으세요.”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부탁드릴게요.”운전기사는 부드럽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민정 씨는 우리 선생님의 친구예요. 사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선생님께서 아가씨 숙소를 이미 마련해 두셨어요.”기사가 말하는 선생님이라는 사람은 다름 아닌 연지석
“엄마, 도착했어? 내가 없어도 자기 전에 따뜻한 우유 한 잔 꼭 마시고 자. 그리고 비타민 먹는 거 까먹지 말고... 저녁에 이불 꼭 덮고 자야 해. 안 그러면 추워. 그리고 엄마 캐리어에 윤우가 제일 좋아하는 인형 넣어놨어. 잠이 안 오면 인형이 우리라고 생각하고 안고 자.”박민정의 이 큰아들은 말을 하기 싫을 때면 한마디를 하지 않다가도 일단 말문이 트이기만 하면 어른처럼 잔소리가 끝이 없다. '참... 도대체 누구를 닮았는지...'가끔 박민정은 예찬이가 자기보다 더 어른 같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알았어, 우리 아들 말 엄마가 다 메모했어.”예찬이의 말이 끝났지만 박민정은 전화 끊기가 아쉬웠다.우울증, 난청, 게다가 임신까지 겹친 상황에서 금방 해외에 나왔을 때, 그녀는 자주 잠을 설쳤다. 잠도 제대로 못 잤고 밥도 넘어가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병원을 가지 않았지만 병이 저절로 호전되었다.아이들이 점차 크고 두 녀석이 걸음마를 하고 말을 할 때쯤이 되자 녀석들은 그녀를 돌보기 시작했다.두 아이는 그녀에게 마치 인생의 구세주 같은 존재였다.우유를 마시고 비타민을 먹은 박민정은 캐리어를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안에는 아이 냄새가 은은하게 배어있는 토끼 인형 두 마리가 있었다.이날 밤, 박민정은 침대에 누워 편안하게 잠을 잤다.다음 날 아침 일찍, 박민정은 문자 한 통을 받았다.[유남준이 오늘 돌아와. 오후 9시, 그랜드 호텔에서 열리는 자선 경매에 나갈 거야.]이곳으로 돌아오기 전, 박민정은 일찌감치 국내 사람들에게 유남준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그가 해외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최근에 돌아오는 것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복귀할 줄은 몰랐다.4년 동안, 비록 그녀는 천천히 모든 것을 내려놓았지만 다시 적극적으로 이 남자에게 다가갈 생각을 하니 순간 마음이 매우 복잡해졌다.저녁 9시, 자선 파티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유남준처럼 권력 있고 힘 있는 사람은 룸이 따로 준비되어 있었고 굳이 나서서 가
아래층에 있는 박민정은 앉기 전부터 위층에 있는 가장 럭셔리하고 경매장이 제일 잘 보이는 룸을 눈여겨보고 있었다.룸에 별도로 설계된 유리는 바깥에서는 안에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지만 안쪽에 있는 사람은 바깥을 보일 수 있도록 했다.박민정은 일부러 룸에서 제일 잘 보이는 곳을 골라 앉았다. 그리고 금액을 부를 때 일부러 무심코 고개를 들어 위층 룸을 바라보았다.그저 가볍게 흘끗 시선을 스친 그녀의 눈에는 한치의 감정도 엿볼 수 없었다.룸 안에 있는 유남준의 전담 비서인 서다희는 바로 그녀를 알아봤다.“민정 씨!”유남준은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서다희에게 지시를 내렸다.“경매, 멈춰.”“네.”아래층에 있던 비서는 지시를 받고 경매를 포기했다.사람들은 오늘 돈 자랑 대회를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유남준이 먼저 포기한 것을 보고 다들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들은 눈앞의 이 여자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감히 유남준의 물건을 빼앗으려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유남준이 한발 물러서기까지 하다니...자선 경매가 끝난 후, 경매 행사 규정상 낙찰인은 돈을 내고 물건을 가져가야 했다.경매장 무대 뒤로 간 박민정은 홀로 소파에 앉아 있는 유남준과 마주쳤다.훤칠한 키에 검정색 슈트를 입고 있는 그는 귀티를 물씬 풍기고 있었고 잘생기고 차가운 얼굴과 까만 눈동자는 박민정이 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그녀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박민정!”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박민정을 바라보며 그녀를 불렀다.유남준은 그녀가 왜 죽은 척하고 4년 동안 사라졌는지, 4년 동안 그녀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는지, 또 무엇을 했는지 설명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4년 동안 그녀는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원래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 않던 그녀는 화장을 곱게 하고 있었고 어두운색의 옷만 입던 그녀는 화사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유남준은 자기 아내에게 이런 면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그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박민정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천천
박민정은 유남준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아 수표 한 장을 꺼내 그에게 쥐여주었다.“돈은 냈으니 물건은 제가 가져갈게요.”손에 수표가 쥐어진 유남준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자리를 떠나는 박민정을 보며 옆에 있는 비서에게 분부했다. “잘 지켜봐.”...9호 공관.숙소로 돌아온 박민정은 베란다에서 술을 한잔 또 한잔 들이켰다.예전에 그녀는 술을 즐겨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해외에 나간 후 혼자 힘들어 인생이 버겁다고 느껴질 때마다 알코올은 마치 마취약과 같이 그녀를 마비시킬 수 있었다. 두 아이가 태어난 후, 그들과 함께하면서 그녀는 점차 나쁜 습관을 고쳤다. 하지만 오늘 유남준을 만나고 나니 그녀는 또 한 번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다...기억상실증... 사실 거짓말은 아니다. 해외로 나간 후, 그녀는 육체적으로 너무 큰 부담을 느꼈고 우울증과 임신까지 겹치면서 확실히 기억력이 많이 안 좋아졌고 은정숙마저도 간헐적으로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그동안 그녀는 무척 괴로웠다. 그녀의 기억은 가끔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인 어린 시절로, 가끔은 학창시절로, 또 가끔은 유남준과 결혼했을 때로 돌아갔었다.한 번은 유남준과 이혼한 것을 잊고 죽은 척하며 출국한 것도 잊은 채 갓 결혼했던 그 시간의 두 사람만 기억한 적도 있었다.그래서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귀국 비행기 티켓을 사서 유남준을 찾아가려고 했었다.그날, 그녀는 하마터면 진주까지 올 뻔했지만 다행히 공항에서 유남준과 이지원이 함께 파티하는 사진을 보고 두 사람이 끝났다는 것을 뒤늦게 기억해냈다.뒤죽박죽된 기억 때문에 짧은 시간 안에 희망과 절망을 번갈아 경험하는 그런 느낌은 오직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고통이었다.그녀는 유남준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지난 4년 동안 유남준이 그녀를 찾아다닌 이유는 그녀를 그저 놓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그녀에게 남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래서 이번에 그녀는 기억을 잃은 척하며 신체접촉이 아닌
낮은 목소리로 애교를 부리는 아들 모습이 영상 너머로 보였다. 박예찬과 똑같은 모습을 한 사내아이는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박민정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순간 박민정의 마음은 눈 녹듯이 사르르 녹아내렸다.“윤우야, 우리 아들.”박윤우는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엄마, 어젯밤에 왜 나에게 전화 안 했어? 잘 자라고 얘기 안 했잖아.”큰아들 박예찬이 잔소리가 많은 따뜻한 아들이라면 막내아들은 애교는 많지만 늘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는 딱 그 나이 또래에 맞는 정상적인 아이였다. 물론 이것은 박민정 자신의 판단일뿐이다. “미안해, 엄마가 까먹었어. 우리 윤우 화내지 마.”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한 윤우가 백혈병 진단까지 받자 박민정은 윤우를 유달리 더 보살폈다.박윤우는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응, 이번만 봐주는 거야. 다음에는 절대 안 돼.”어린 아들의 애교에 박민정은 순간 마음속의 먹구름이 싹 걷히는 듯했다.그녀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할머니랑 형은?”그러자 윤우는 화난 척하며 대답했다.“할머니와 형 물어볼 줄 알았다니까! 그럴 줄 알았으면 엄마에게 연락 안 했을 거야.”순간 말문이 막힌 박민정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알았어, 엄마 안 물어볼게.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까 일찍 쉬어. 잘자.”전화를 끊은 박윤우는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고 우울한 눈빛으로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쌍둥이 형 박예찬을 보며 말했다.“엄마가 또 술 마셨어.”동생의 말을 들은 박예찬은 노트북을 닫았다.“아무래도 내가 먼저 진주로 가서 엄마를 돌봐야 할 것 같아.”“응.” 형의 말에 윤우는 눈을 꼭 감으며 대답했다. 자기 몸도 건강하다면 형과 같이 돌아가서 얄미운 아빠를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하지만 두 녀석의 속셈을 모르고 있는 박민정은 세수한 후, 예찬이가 챙겨준 토끼 인형 두 마리를 안고 침대에 누웠다.낯선 침대 때문인지, 아니면 오늘 유남준을 만난 것 때문인지 박민정은 잠이 쉽게 들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 일찍
유남준은 순간 침을 꿀꺽 삼켰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굳이 그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다희는 그의 마음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유앤케이 그룹의 사업부에서는 한 거물급 인사가 유앤케이 그룹의 희망 프로젝트, 즉 무료 자선 사업을 돕기 위해 거액을 투자할 것이라는 정보가 돌고 있었다.회사 안의 일부 사람들은 이 일로 열심히 토론을 펼치고 있었다. “도대체 어느 거물급 인사가 이런 호구 짓도 마다하지 않는지 궁금하네요.”“누가 알겠어요. 돈을 너무 많이 벌어서 쓸 데가 없나 보죠.”“해외에서 왔다고 들었어요...”이때 박민정이 탄 차가 유앤케이 그룹의 본사 앞에 막 도착했다.우뚝 솟은 빌딩을 바라본 박민정은 유앤케이 그룹이 4년 전보다 훨씬 더 크게 발전했다는 것을 느꼈다. 이런 거침없는 발전은 유남준의 천재적인 능력과 유씨 집안 자본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녀도 4년 동안 퇴폐적인 생활을 해 온 것은 아니었다. 연지석의 도움으로 그녀만의 회사를 차렸고 약간의 돈도 벌었다.진주로 돌아오기 전 그녀는 이곳저곳의 모든 정보를 끌어모아 준비를 철저히 했다. 그래서 유앤케이 그룹이 전국적으로 희망사업을 벌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투자 협력에 나섰던 것이다.협력이라는 이름으로 그녀는 유남준에게 다가갈 명분을 얻었다.어제 자선 경매에 나온 것은 사실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투자 협력만으로는 유남준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었다.어떻게든 유남준의 흥미를 불러일으켜 자신을 만나러 나오게 하는 게 목적이었다.유앤케이 그룹의 담당자들은 일찌감치 일 층 로비 앞에 대기하고 있었고 박민정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고는 도착한 사람이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라는 것에 순간 다들 어리둥절해졌다.“박 사장님이세요?”박민정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왜요, 뭐가 문제가 있나요?”담당자의 의아한 얼굴을 본 박민정은 그동안 서로 주고받았던 대화 내용을 그에게 보여줬다. 그러자 그 담당자는 연신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얼굴도 이쁘고
유남준은 박민정의 과거 검진 결과를 보고 심한 우울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그리고 이 우울증이 기억력 감퇴를 초래하는 병이라는 것도 알아봤지만 단 한 사람만 잊는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게다가 그들은 십여 년 동안 알고 지낸 사이이다.유남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박민정은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설마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인가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당신을 기억하지 못할 수 있죠?”이 한 마디는 마치 가시처럼 유남준의 심장을 찔렀다.그녀의 말에 유남준은 차가운 얼굴로 대답했다. “박민정 씨, 너무 멀리까지 생각하시네요. 저희는 그저 우연히 만났을 뿐이에요.”굳이 박민정이 모른척하려 한다면 유남준도 같이 맞춰주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두 사람이 부부라고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떠나기 전 유남준은 사람을 시켜 박민정과 계약서를 쓰라고 했다.사무실로 돌아간 후, 유남준은 담배를 피우며 박민정의 말을 떠올렸다.“설마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인가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당신을 기억하지 못할 수 있죠?”순간 유남준의 가슴은 무언가에 꽉 막힌 듯 답답하고 불편했다.서다희가 대표이사실에 들어왔을 때 방안은 희뿌연 담배 연기로 꽉 차 있었다. 4년 전, 박민정이 사라진 뒤부터 유 대표는 다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하지만 지금 그가 찾던 사람이 돌아왔지만 그는 여전히 이러고 있었다.“박민정이 지난 4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낱낱이 조사해와. 내가 꼭 알아야겠으니까!”유남준이 서다희를 쳐다보며 명령하자 순간 그는 멈칫했다.“유 대표님, 제가 사람을 보내 조사했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어요.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의 자료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어요.”“그럼 해외의 다른 역량을 동원해서라도 알아봐!”유남준의 말에 서다희는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그가 말한 다른 역량이 무엇인지 서다희는 잘 알고 있었다. 지난번, 유앤케이 그룹의 대표이사 자리를 놓고 경쟁할 때 말고는 유남준은 ‘
“엄마, 제가 직접 끓인 죽이에요.” 아침 일찍, 이지원은 정수미의 환심을 사려 했다. 만약 정수미가 그녀가 사기꾼이라는 걸 이미 알지 못했다면 아마도 진심으로 감동했을지도 모른다.정수미는 죽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거기 놓아.”“네.” 이지원은 죽을 내려놓고도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녀는 정수미의 뒤로 가서 말했다. “엄마, 매일 일 하시느라 힘드실 텐데 제가 등 좀 마사지해 드릴까요?”“괜찮아. 집에서 심심하면 밖에 나가서 견문이나 넓히는 게 어떻겠니.”정수미가 말했다.또다시 차가운 대우를 받은 이지원은 정수미의 성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는 할 수 없이 나왔다. “내가 대체 뭘 잘못한 거지? 왜 나한테 이렇게 차갑게 대하는 거야?”이지원이 이해할 수 없는 가운데, 윤소현이 제멋대로인 모습으로 정수미를 찾아가는 걸 보았다.문득 뭔가를 깨달은 듯, 그녀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떠올랐다.“자업자득이네. 당신은 이렇게 제멋대로이고 불효한 자식이 좋은가 보지!”오늘은 정수미의 환심을 살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더 이상 괜한 수고를 하지 않기로 했다.지금 이지원의 손에는 쓰고도 남을 돈과, 많은 이들이 꿈꾸는 권력이 있었다.그녀가 제호에 가면 늘 최상층의 고급 룸을 썼다.예전에 그녀를 무시하던 그 귀족 아가씨들과 도련님들이 이제는 앞다투어 아첨을 했다.“지원아, 난 네가 예전부터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어. 알고 보니 정씨 가문의 공주였다니.”“그래, 넌 그렇게 예쁜걸. 한눈에 봐도 가난한 집 딸은 아니었지.”“난 예전부터 네가 나중에 크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이지원은 그들의 아부를 들으며 더 이상 얼굴의 득의양양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와인 잔을 들며 말했다. “하지만 너희들 예전엔 날 무시하지 않았나? 내가 고아라고 했지? 근데 그거 알아? 민정 씨가 진짜 고아야.”사람들은 잠시 멍해졌다. 박민정이 한수민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 이지원은 거리낌 없이 모
박민정은 대답 없이 천천히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완전히 혼란스러웠다.정민기는 그녀가 나오는 것을 기다리다가, 유난히 창백한 안색을 보고 급히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아무것도 아니에요. 돌아가죠.” 박민정이 말했다.“네.”차에 탄 후. 박민정의 머릿속에는 함미현이 한 말들이 맴돌았다. 정수미가 자신의 친엄마라고?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자신의 친엄마가 과거에 자신과 아들의 목숨을 노렸다고?‘안 돼, 절대로 함미현의 일방적인 말만 믿을 순 없어.’“민기 씨,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그녀는 자신과 정수미가 정말 모녀 관계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정민기에게 이 일을 부탁한 후, 박민정은 윤우가 있는 병원으로 돌아왔다.아이는 이미 잠들어 있었고, 유남준이 아이 곁을 지키며 쉬지 않고 있다가 그녀를 보자 일어나 그녀를 부축했다. “어땠어?”“별일 없었어요.” 박민정은 아직 확실한 결과를 모르는 상황이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 오해였다면?유남준은 그녀에게 무슨 걱정거리가 있다는 걸 알아챘지만, 말하기 꺼려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피곤하지? 일찍 자.”“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간단히 씻은 후 옆방 간병인 방에서 잠들었다.깊은 밤, 박민정은 편히 잠들지 못했다.그녀는 또다시 어린 시절의 꿈을 꾸었다. 시골에서 박씨 가문으로 데려와졌을 때의 일, 한수민에게 아무리 잘 보이려 해도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던 때를.한수민이 그녀를 무릎 꿇게 하며 말했다. “네가 감히 네 동생을 괴롭혀? 둘이 같을 줄 알아?”그때의 박민정은 아직 아무것도 몰랐기에 한수민에게 반박했다. “우리 모두 엄마의 자식인데, 왜 이렇게 차별하세요? 왜 저를 조금도 사랑해 주지 않으세요?”한수민은 이 말을 듣고 냉소를 지었다.“너를 사랑하라고? 너무 바라는 거 아니니? 말해주마. 넌 그저 아무도 원하지 않는 쓰레기일 뿐이야. 내 딸이 될 자격도 없어!”과거의 장
이지원은 창밖에서 스치듯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유남준이 날 좋아하지 않았으니, 나도 너희들을 망쳐놓을 거야.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박민정 너도 절대 가질 수 없어.’그녀는 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깊게 파고들어 피가 맺혔다...한편, 박민정은 정민기의 차를 타고 정신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정신병원 내부.함미현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아들이 병원에 있는지조차 모르겠으며 남편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그녀는 깊은 후회를 느꼈다. 왜 그때 욕심을 부렸을까.부유함에 대한 욕망만 없었어도, 지금처럼 이렇게 떨어져 있지는 않았을 텐데.함미현은 윤소현이 얼마나 끔찍한 사람인지를 깨달았다. 그녀는 절대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녀를 죽인 후, 아들과 남편까지 해치려 할 수 있었다.그녀는 억울한 마음에 몇 번이고 이곳에서 도망치려 했지만, 매번 붙잡혀 돌아왔다.벽에 기대어 멍하니 있을 때,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구석으로 피했다. 누군가 자신에게 약을 주거나 주사를 놓으러 온 게 아닐까 두려워서였다.하지만 다가온 간호사는 우선 문을 닫았다.함미현은 그제야 그 얼굴을 알아보았다. “민정 씨?”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간단히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그 후, 박민정은 병실을 둘러보았다. 낡고 좁은 병실, 겨우 1.5미터짜리 침대 하나가 놓여 있을 뿐, 책상이나 의자조차 없는 곳이었다.함미현은 그녀를 보고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그녀의 손을 잡았다.“민정 씨,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제 아들 동하를 찾아주세요. 동하가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어요.”박민정은 그녀의 말을 듣고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제가 여기 온 이유는 물어볼 게 있어서예요.”함미현은 결심을 다졌다.“민정 씨, 질문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아는 것, 다 말할게요.”결국 함미현은 박민정에게 중요한 사실을 숨기고
“지금 어디에 있어요?” 박민정이 급하게 물었다.“여기에서 십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개인 정신병원에 있습니다.” 정민기가 답했다.정신병원?박민정은 이게 정수미가 함미현에 대한 복수 방식임을 알고 있었다. “거기에 들어갈 방법은 없을까요?”“내부 사람들과 가까워졌어요. 만나고 싶다면 병원의 간호사나 의사로 변장하면 될 거예요.” 정민기가 말했다.“좋아요, 그럼 오늘 밤에 가죠.”“네.”박민정은 박윤우가 다친 걸 보고 점점 더 강해져야겠다고 느꼈다.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그날 밤, 박윤우가 잠든 후 박민정은 밖으로 나갈 계획이었다.하지만 두 걸음도 못 떼고, 유남준이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어디 가는 거야?”박민정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그냥, 나가서 산책 좀 하려고요.”“같이 가자.”“괜찮아요.”박민정은 최근 몇 날 며칠 피로해 보였던 그를 생각하며 거절했다.“먼저 자요. 곧 돌아올게요.”하지만 유남준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도대체 어디 가는 거야?”박민정은 그가 계속해서 추궁하자, 결국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민기 씨가 함미현이 지금 있는 곳을 찾았어요. 그때 일에 아직 궁금한 점이 많아서, 직접 만나서 물어보려 해요.”함미현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 박민정은 가끔 꿈에서 함미현을 보곤 했다. 꿈속에서 함미현은 무언가 말하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유남준은 그녀가 무언가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다.“같이 가자.”“안 돼요. 병원에서 푹 쉬면서 윤우를 돌봐줘요. 민기 씨랑 갈 거예요. 당신이 여기서 윤우를 지켜야 제가 마음이 놓여요.”박민정은 유남준의 손을 잡고 간절하게 바라보았다.유남준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손끝으로 박민정의 머리카락을 살짝 쓰다듬었다. “알았어. 하지만 반드시 안전을 지켜. 무슨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나한테 연락하고.”박민정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알았어요.”두 사람의 따뜻한 순간을, 멀리서 한 사람이 지켜보고 있었다.
윤소현은 최대한 감정을 누르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어머니.”“정씨 가문으로 갈 테니, 우리 한번 보자.” “네.”윤소현은 여전히 고영란이 두려웠다. 다만 자신이 임신 중이라는 사실이 방패막이가 되어줄 거라 생각했다.고영란은 곧바로 정수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수미는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해입니다. 제 사람들이 실수로 아이를 다치게 한 거예요.”하지만 고영란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정 대표, 우리 모두 똑똑한 사람이잖아요. 양녀 관리 제대로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나서게 될 테니까요.”전화를 끊은 후에도 고영란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토록 애지중지 키운 똑똑하고 착한 손주들이 윤소현 때문에 위험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정씨 가문 앞에 도착하자 윤소현이 이미 와있었다. “어머니...”윤소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임신 사실이 보호막이 되어줄 거라 믿었다.“몇 개월 됐지?”고영란이 물었다. 윤소현은 잠시 망설이다 미소 지으며 답했다. “다섯 달 정도요.” “다섯 달이라... 이제 안정기네.” 고영란은 중얼거리듯 말하더니, 갑자기 손을 들어 윤소현의 뺨을 세게 때렸다. 윤소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어머니, 어떻게 임신한 며느리를 때리실 수 있어요?” 윤소현이 뺨을 감싸며 항의했다. “임신했다고? 그럼 너는 왜 윤우를 그렇게 때릴 수 있었니? 너도 곧 애 엄마가 될 사람이면서!”고영란이 호통을 쳤다. 윤소현은 억울한 듯 물린 자국이 남은 손을 들어 보였다. “보세요, 예찬이랑 윤우가 먼저 절 물었다고요!” “그게 네 변명이야? 윤우가 다 말했어. 네가 먼저 때리려고 했고, 아이들은 자신을 지키려 했다는 걸!”“믿기지 않으면 조사해도 된다고 하더구나!” 윤소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가 먼저 손을 댄 건 사실이었으니까.“앞으로 또 이런 일이 생기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보여줄 거야. 선 넘지 마!” 고영란은 말을
그날 아침, 고영란은 박씨네 본가에 갔다가 손자의 병세가 재발해 입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박윤우가 있는 앞에서 박민정은 그 사실을 직접 말할 수가 없었다.“괜찮아요. 의사 선생님이 더 쉬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곧 나을 거예요.”“그렇다면 다행이네.” 고영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박윤우의 곁으로 다가갔다.“윤우야, 왜 병이 또 도졌니? 약은 제때 먹었니?”박윤우는 고영란이 여기 왔다는 걸 알자, 이를 기회로 삼기로 결심했다. 그는 먼저 박민정에게 나가서 맛있는 음식을 사 오라고 부탁했다. 그리고는 고영란 앞에서 금세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할머니, 저는 늘 말을 잘 들었죠? 그런데...”잠시 말을 멈추는 사이, 눈물방울이 마치 작은 구슬처럼 굴러떨어졌다.“누가 저를 괴롭혔어요.”“뭐라고?” 고영란은 즉시 화가 나서 물었다.“누가 널 괴롭혔니? 말해봐, 할머니가 대신 복수해 줄게!”그녀는 누가 감히 자기 손자를 괴롭혔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박윤우는 콧물을 훌쩍이며 말했다.“작은숙모요.”“작은숙모?”고영란은 잠시 그 이름을 떠올리지 못하다가, 문득 생각이 나며 물었다.“네 삼촌 아내, 소현이 말이니?”“네.” 박윤우는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이며 울먹이며 말했다.“작은숙모가 저를 때렸어요. 그뿐만 아니라 형도 때리려고 했어요.”고영란은 이 말을 듣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아이를 때릴 수가 있지?”“숙모는 저와 형을 죽이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앞으로 유씨 집안에선 숙모 아들만 있어야 하고, 저랑 형은 없어야 한다고 했어요.” 박윤우는 하나하나 또박또박 말했다.이 말에 고영란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아이는 분명 이런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다.고영란은 박민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런 말을 가르칠 리 없었다.“어떻게 아이를 때릴 수 있지...”고영란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윤우야, 울지 마. 할머니가 꼭 복수해 줄게.”고영란은 복잡한 심정이었다. 윤소현이 유
“사람을 시켜 준비하도록 하지.”정수미가 결심한 듯 말했다.윤소현과 이지원은 서로 마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정수미의 도움이 있으니 이번에야말로 박민정은 끝장이 날 거라고 생각했다.정수미는 단지 박민정에게 본때를 보여주어 다시는 정씨 가문과 윤소현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려 했을 뿐인데, 자기 딸이 그들 모자의 목숨을 노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박예찬은 온라인에서 자신의 작품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비록 이번 일이 정씨 가문과 PMJ에 미치는 영향은 다르지만, 적어도 정씨 가문의 체면을 구기기에는 충분했다.정수미가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조사해 보았지만, 범인이 해외 가상 주소를 사용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다.병원에서 박윤우를 간호하느라 바쁜 박민정은 뉴스를 볼 겨를이 없었다. 진서연이 전화로 알려주기 전까지는.지금은 정씨 가문의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오직 박윤우의 병세만이 그녀의 머릿속을 채웠다.박윤우가 잠들자 박민정은 유남준에게 물었다.“우리... 조산을 하면 안 될까요?”박민정은 박윤우가 아이들이 태어날 때까지 버티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위험해. 정말 다른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면 안 돼.”유남준은 이성적으로 대답했다. 박윤우를 걱정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일일수록 서두르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박민정은 고개를 숙인 채 물었다.“그럼 어떡하죠?”“괜찮을 거야.”유남준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박민정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그를 마주 안았다.둘이 서로를 껴안고 있을 때, 문이 완전히 닫혀 있지 않아 진서연과 함께 박윤우를 보러 온 에리가 그 모습을 목격했다.그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진서연은 상황을 보고 급히 그를 밖으로 이끌었다.약간의 소리가 나자 박민정은 유남준의 품에서 벗어나 문 쪽을 바라보았다.“어머, 왔었네.”진서연은 다소 어색한 듯 정신을 차리고는 들고 있던 과일바구니와 꽃바구니를 들어 보였다.“에리 씨가 윤우가 아프다는 걸 알고, 저와
다음 날, 이른 아침.온라인상의 모든 뉴스가 폭발했다.정씨 가문의 사업 자료가 유출되었다는 소식이 각종 플랫폼에 퍼졌다.원래 정수미는 비서에게 이 소식을 절대 새어나가지 않게 하라고 했는데, 하루 만에 모든 사람이 알게 될 줄은 몰랐다.“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비서도 모르는 일이라 겁에 질려 고개를 저었다. “어제 밤부터 네트워크를 감시하게 했고, 이 일은 저희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데...”“박민정!” 정수미는 모든 것을 박민정 탓으로 돌렸다.그녀는 책상을 세게 내리치며 말했다. “어제 밤에는 그 여자 아들이 입원한 것 때문에 약간 죄책감이 들었는데, 이제 보니 잘된 일이었어!”“맞습니다. 정말 가증스럽네요. 먼저는 아가씨의 남편을 유혹하더니, 이제는 감히 정씨 사업까지 겨냥하다니!” 비서도 거들었다.정수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이때 이지원과 윤소현도 도착했는데, 멀리서 소동을 듣고 즉시 다가와 부채질을 했다.“엄마, 온라인의 일 박민정이 한 거예요?”이지원이 물었다.“그 여자 말고 누가 있겠어?” 정수미가 대답했다.이지원은 분노한 척 연기했다. “정말 믿을 수 없어요. 이렇게 많은 세월이 지났는데도 박민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네요.”정수미는 호기심이 생겨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지?”“박민정은 늘 독했어요. 예전에 제가 남준 오빠랑 만날 때도, 박민정은 자신이 박씨 집안의 딸이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저랑 오빠가 함께하는 것을 방해했어요. 나중에는 오빠한테 자신과 결혼해 달라고 강요하기까지 했어요!”“제가 박씨 집안의 지원을 받긴 했지만, 사실은 박민정과 박민정 아버지 때문에 해외로 쫓겨났어요.”“돌아오면 박민정이 그나마 나아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심해졌어요. 남준 오빠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저를 온갖 방법으로 괴롭히고, 많은 근거 없는 죄명을 씌웠죠. 전 딱히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는데 지금은 엄마랑 소현이까지 괴롭히려 한다니... 용서할 수 없어요.”이지원의 말은 진심이 느껴
분명 윤소현이 때린 건데 정수미는 부하 직원 하나를 매수해서 죄를 뒤집어씌우다니, 참으로 가소로웠다.유남준은 천천히 양손을 움켜쥐며 차가운 눈빛을 보였다. “꺼져!”보안요원은 이 말을 듣자마자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네, 네.”그가 떠나자 이곳은 마침내 조용해졌다.김인우가 욕설을 내뱉었다. “정씨 집안 놈들은 자기가 엄청 대단한 줄 아나 봐? 이렇게 멋대로 굴다니!”조하랑도 분노에 차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 여자 딸이 유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으니...”이렇게 보면 사실상 두 시누이 간의 집안 문제가 된 셈이었다.“유남우는 제정신이야? 아이를 때리는 여자랑 결혼하겠다니!” 김인우가 또 한 번 분통을 터뜨렸다.지금 이런 말들은 소용없었다.마침내, 수술실 문이 열렸고, 의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왔다.박민정이 서둘러 일어나 다가갔다. “선생님, 제 아들은 지금 어때요?”“목숨은 건졌습니다만, 현재 체내의 백혈구가 너무 빠르게 확산되고 있어서 가능하다면 빨리 수술하는 게 좋겠습니다.”의사가 말했다.박민정은 배를 감싸안으며 물었다. “다음 달에 해도 될까요?”“그건 저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일단 입원시켜 놓고, 문제가 생기면 바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네, 네, 알겠습니다.”박민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박윤우의 입원 수속을 마치고 박민정 일행은 병실로 가서 아이를 보았다.박윤우는 여전히 매우 허약해 보였고 지친 눈을 겨우 뜨며 말했다. “엄마, 아빠, 형... 아저씨, 하랑 이모... 걱, 걱정하지 마세요.”“이제 괜찮아요.”그는 자신이 너무 미웠다. 왜 이렇게 쓸모없는 걸까, 엄마의 원수를 갚으러 갔다가 오히려 엄마에게 걱정만 끼치게 된 걸까?“그래, 윤우야. 잘 쉬어. 다 나을 거야.” 박민정이 눈물을 참으며 부드럽게 말했다.“네.”박윤우는 바로 대답하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그는 다시 박민정의 손을 잡았다. “엄마, 제가 말씀드린 거 안 잊으셨죠?”박민정은 그가 정수미에 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