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집 엄마도 참 불쌍하지. 이제 딸이 없잖아. 애지중지 키우던 애가 이렇게 세상을 떠나버렸네.”“그러게나 말이에요. 민정이 참 똑똑하고 밝은 아이였는데... 이렇게 어린 나이에 죽었다는 게 믿기지 않네요.”“재벌 집에 시집가도 좋은 게 아닌가 봐요. 저번에 민정이 돌아온 거 보니까 딴사람인 줄 알았어요. 어찌나 야위었는지 바람에 날아갈 것 같았다니까요.”“남편이 엄청 잘해준다고 얘기하던데 그것도 아닌가 봐요. 하긴, 3년 동안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춘 적 없으니...”이웃들의 대화를 들은 유남준은 목이 메었다.역시나 하루 종일 기다려도 은정숙과 박민정을 만나지 못했다.유남준은 의자에 기대어 잠깐 눈을 붙였다가 악몽을 꾼 듯 벌떡 일어났다.또 꿈속에 박민정이 나왔다...눈을 떠 주위를 둘러보니 오직 적막과 어둠뿐이었고 박민정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그 순간 유남준은 정말로 그녀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늦은밤 10시.은정숙의 이웃들은 모두 벽돌집 안으로 끌려와 ‘심문’을 당했고 주위에 경호원들로 가득 찬 방은 더욱 비좁아 보였다.“그 사람들 지금 어디 있어요?”이런 상황이 처음이었던 그들은 하나같이 옷깃을 여미고 고개를 숙인 채 감히 유남준을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는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싸늘함을 내뿜었다.“어젯밤에 정숙이 우는 소리가 들려서 찾아와봤는데 민정이가 죽었다고 얘기하더군요.”“젊은 애가 죽은 게 좋은 일은 아니니 그날 밤에 바로 화장하고 묻었어요.”그날 밤에 바로 화장했다니...유남준은 눈앞이 캄캄해졌다.“장례를 치르고 나서 정숙이가 어디로 갔는지는 저희도 잘...”다른 사람들도 그 말을 듣고 맞장구를 쳤다.서다희는 곧바로 연지석의 행방을 물었고 그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어릴 적부터 고아였던 연지석은 1년 전 이곳을 떠난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밤 12시 3분.아직도 거센 비가 내리며 번개가 치고 있었다. 시골길은 진흙으로 변해 이동
그는 잠자고 밥 먹는 것 외에는 밤낮없이 회사에서 일했다.연지석 집에 있던 박민정의 유품들도 김인우를 시켜서 옮겼다.그는 유남준이 어딘가 변했다는 걸 느꼈다.돌아온 이후로 그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듯 유난히 조용했다.참다못한 김인우가 서다희에게 물었다.“요즘 왜 저래요?”서다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잘 모르겠습니다. 도련님, 설마 대표님이 민정 씨를 좋아하게 된 건 아니겠죠?”그 말을 들은 김인우는 이상한 기색을 보였다.“누가 알겠어요?”말을 마친 그는 차에 올라타 기사에게 운전을 부탁한 후 의자에 등을 댄 채 머리가 아픈 듯 지그시 눌렀다.‘만약 남준이가 정말로 박민정을 좋아하게 됐다면 왜 바움 그룹을 인수하지 못해서 안달 난 거지?’바움 그룹은 박민정을 끔찍하게 아끼는 박형식이 피땀 흘려 일어 세운 회사였기에 박민정에게 매우 중요했다.‘만약 남준이가 정말로 박민정을 좋아한다면 굳이 가족들을 괴롭히러 해외로 사람을 보냈을까?’김인우는 박민정이 엄마, 동생과의 관계를 끊었다는 사실을 몰랐고 그들이 박민정의 몇 안 되는 가족이라는 것만 알았다.유남준은 여태껏 자기 여자에게 푸대접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예전에 이지원과 만나고 있었을 때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건 무조건 이지원에게도 선물해 줬다.그러나 오직 박민정에게만 원수를 대하는 듯 가혹하고 잔인한 모습을 보였다.그렇게 생각하던 중 어느덧 럭셔리한 동네에 도착했다.김인우는 차에서 내리며 주위를 힐끗 둘러봤다.“비싸 보이네요.”“평당 수천만 원일 겁니다.”기사가 답했다.김인우에게는 별거 아닌 금액일지 몰라도 일반인이 이런 곳에서 집을 산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가 안으로 들어서자 가정부가 문을 열어줬다.“민정 씨 물건은 모두 안방에 있습니다. 물건만 챙기고 즉시 떠나라고 하셨습니다.”김인우는 가정부를 바라보며 물었다.“그 사람은 지금 어딨죠?”가정부는 퉁명스럽게 답했다.“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워낙 바쁜 사람이라서 당신들을 상대할 시간 따윈
김인우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소리쳤고 비서는 당황하며 물었다.“도련님, 왜 그러세요?”김인우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질문 하나만 할게. 상대방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는 걸 모르고 그동안 계속 괴롭혔어. 왜 상대방은 구해줬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을까? 그걸 말한다면 괴롭힘을 멈출 수도 있을 텐데?”그 말을 들은 비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아주 간단해요. 첫 번째 이유는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커요. 은혜를 갚을 줄 모르는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은 거죠. 두 번째는 누군가를 구해준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아 말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거죠.”누군가의 목숨을 구해준 게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걸까?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동안 박민정은 유남준에 대한 헌신과 그의 주변 모든 사람에 대한 헌신을 스스로 언급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어쩌면 정말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김인우는 순간 목에 가시가 걸리듯 아팠다....해운 별장.김인우는 돌아오자마자 마당에 앉아있는 익숙한 모습을 보았다.“인우 오빠, 드디어 왔네요.”이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김인우를 향해 걸어갔다.그는 익숙한 사람이 왠지 낯설게만 느껴졌다.이지원은 가까이 다가오더니 손을 들어 능숙하게 셔츠 단추를 잠갔고 언뜻 보면 마치 연인 같았다.“왜 이렇게 꼼꼼하지 못해요? 매번 이래...”이지원이 화난척하며 얘기하자 김인우는 싸늘하게 그녀의 손을 밀어냈다.“무슨 일로 왔어?”이지원은 원하는 게 있을 때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아부하는 사람이었다.그녀는 김인우의 말투가 싸늘해진 걸 눈치채지 못했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남준 오빠가 요즘 박민정 찾으러 다닌다면서요? 어떻게 되고 있어요?”김인우는 순진한 척하는 그녀의 두 눈을 응시했다.“박민정은 죽었다고 내가 얘기해줬잖아? 도대체 뭘 두려워하는 거야?”이지원은 흠칫하더니 곧바로 설명을 덧붙였다.“그냥 궁금해서 여쭤봤어요. 박씨 가문은 저한테
그의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경호원들이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노인을 밖으로 내던졌다. 김인우는 이 사람이 최명길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그저께 유남준은 해외로 도피한 박 씨네 모자를 찾아냈고 박민정이 시집갈 사람이 연지석이 아닌 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래서 그는 직접 사람을 시켜 이 노인을 납치했다.하지만 하루 내내 이 노인을 협박해도 박민정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유남준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박민정과 결혼할 거예요?”노인은 온몸에 상처를 안고 황급히 절을 했다.“아니요, 아니요. 두 번 다시 그러지 않겠습니다...”경호원들이 노인을 끌고 나갔고 그 뒤는... 굳이 보지 않아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눈에 보였다.유남준의 표정에서는 그 어떤 희로애락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김인우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아까는 박민정을 감싼 거야?”김인우는 순간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그의 말에 반박하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내 생각에 굳이 민정이를 겨냥할 필요 없다고 생각해.”그 말에 유남준은 손에 들고 있던 펜을 꽉 움켜쥐었고 순간 손등의 핏줄이 선명히 보였다. “민정이가 먼저 시작한 거야.”유남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인우야, 너는 민정이가 정말 죽었다고 생각해? 욕 많이 먹을수록 오래 산다는 말 못 들었어? 민정이는 절대 죽지 않았어!”사실 유남준은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휴대전화 알람이 울리자 유남준은 고개를 들어 시간을 한 번 힐끗 보더니 김인우만 그곳에 남기고 혼자 퇴근해 버렸다. 텅 빈 사무실에서 김인우는 손에 있는 옥패를 꽉 움켜쥐었고 얼마나 힘을 세게 주었는지 손바닥에 피가 날 정도였다.밖으로 나온 그는 길에 쓰러진 채 가까스로 숨을 쉬고 있는 최명길을 보고 옆 비서에게 한마디 했다.“데려가.”두원 별장.고요한 집안에서 거실 구석에 있는 빨간색 상자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유남준은 제시간에 집에 돌아와 박민정이 자주 앉던 소파에 앉았다.모든
전담 비서 서다희는 이들의 대화를 듣고 바로 제지했다. 오지랖이 넓은 비서여서가 아니라 눈치가 빠르기 때문이었다.요즘 유남준은 일 말고도 박민정을 찾고 연지석의 회사를 제압하는 데 힘쓰고 있었다. 이 모든 일련의 행동들로 서다희는 유남준이 박민정을 싫어하는 게 아님을 알았다.시간은 계속 흘렀지만 유남준은 박민정을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눈이 펑펑 내리는 섣달 그믐날 밤, 예전의 박민정이라면 분명 유남준과 같이 본가로 내려가 그의 가족과 함께 섣달 그믐날을 보냈을 것이었다.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유남준이 혼자 본가로 돌아갔다.박민정이 금방 떠났을 때 그의 웃고 떠들던 모습과 달리 지금은 혼자 앉아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점점 차가워졌고 주위만 가면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느낌에 도저히 다가가기 어려웠다. 그는 본가에 갔다가 얼마 있지 않고 다시 두원 별장으로 돌아왔다. 두원 별장 밖에도 어느새 새하얀 눈이 가득 쌓여 온 세상을 한층 더 아름답게 만들었다.하지만 유남준은 왠지 뭔가 부족한 느낌을 받았다.그는 창가 앞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혼자 중얼거렸다. “박민정, 내 눈앞에 나타나기만 해봐!”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고영란이 화려한 차림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남준아, 너 대체 왜 그래? 너 진짜 민정이가 죽은 이후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유남준은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그는 여태껏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으니까!그때 고영란은 그동안 참아왔던 말을 그에게 물었다.“혹시 민정이를 진짜로 좋아하게 된 거야? 그런데 이제 곁에 없잖아...”유남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좋아하면 안 돼요?”고영란이 더 말을 하려 하자 유남준은 바로 그녀를 내쫓았다.그녀가 떠나자마자 유남준은 거실에 혼자 앉아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분명 히터를 틀었음에도 유남준은 온몸이 차갑게 느껴졌고 입으로는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박민정은 창밖의 흰 구름을 바라보며 4년 전을 떠올렸다.그때 절망에 빠져있던 그녀는 연지석의 도움을 받아 죽은 척하고 해외로 나온 뒤 쌍둥이를 낳았다.모든 것이 순탄했지만 안타깝게도 올 3월, 빠른 출산으로 늘 시름시름 앓던 막내아들 박윤우가 조혈모세포 악성 혈액질환인 속칭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의사는 박민정에게 제대혈 조혈모세포 이식을 통해 혈액질환을 치료할 수 있다고 말했다.지난 몇 달 동안 박민정은 유남준의 정자를 채취할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치료는 빠를수록 좋다는 말에 박민정은 직접 진주에 가서 정자를 채취하기로 했다.윤우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절대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었고 유남준을 찾는 일도 절대 없었을 것이다.비행기가 이륙하기 전, 박민정은 절친 조하랑의 문자를 받았다.[요즘 좀 바쁘니까 내가 돌아온 후에 너와 같이 유남준을 처리할게. 이지원 그 여자도.]조하랑은 박민정이 대학을 다닐 때 친해진 친구로 졸업 후 그녀는 해외 유학을 하러 외국으로 갔고 박민정은 결혼하면서 그녀와 연락이 뜸해졌다.그리고 4년 전 박민정이 에스토니아에 도착했을 때 우연히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박민정은 그녀의 문자를 보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답장했다.[좋아.]답장을 마친 그녀는 이륙하기 위해 휴대전화를 비행기 모드로 전환했다.진주는 여름만 되면 큰비가 끊임없이 내렸다.박민정이 비행기에서 내릴 때는 이미 저녁 7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곳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황홀함이 가득했다.공항을 나서자 럭셔리한 링컨 한 대가 시간 맞춰 박민정의 앞에 멈춰 섰다.운전기사는 차에서 내려 공손히 차 문을 열었다.“민정 씨, 어서 앉으세요.”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부탁드릴게요.”운전기사는 부드럽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민정 씨는 우리 선생님의 친구예요. 사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선생님께서 아가씨 숙소를 이미 마련해 두셨어요.”기사가 말하는 선생님이라는 사람은 다름 아닌 연지석
“엄마, 도착했어? 내가 없어도 자기 전에 따뜻한 우유 한 잔 꼭 마시고 자. 그리고 비타민 먹는 거 까먹지 말고... 저녁에 이불 꼭 덮고 자야 해. 안 그러면 추워. 그리고 엄마 캐리어에 윤우가 제일 좋아하는 인형 넣어놨어. 잠이 안 오면 인형이 우리라고 생각하고 안고 자.”박민정의 이 큰아들은 말을 하기 싫을 때면 한마디를 하지 않다가도 일단 말문이 트이기만 하면 어른처럼 잔소리가 끝이 없다. '참... 도대체 누구를 닮았는지...'가끔 박민정은 예찬이가 자기보다 더 어른 같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알았어, 우리 아들 말 엄마가 다 메모했어.”예찬이의 말이 끝났지만 박민정은 전화 끊기가 아쉬웠다.우울증, 난청, 게다가 임신까지 겹친 상황에서 금방 해외에 나왔을 때, 그녀는 자주 잠을 설쳤다. 잠도 제대로 못 잤고 밥도 넘어가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병원을 가지 않았지만 병이 저절로 호전되었다.아이들이 점차 크고 두 녀석이 걸음마를 하고 말을 할 때쯤이 되자 녀석들은 그녀를 돌보기 시작했다.두 아이는 그녀에게 마치 인생의 구세주 같은 존재였다.우유를 마시고 비타민을 먹은 박민정은 캐리어를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안에는 아이 냄새가 은은하게 배어있는 토끼 인형 두 마리가 있었다.이날 밤, 박민정은 침대에 누워 편안하게 잠을 잤다.다음 날 아침 일찍, 박민정은 문자 한 통을 받았다.[유남준이 오늘 돌아와. 오후 9시, 그랜드 호텔에서 열리는 자선 경매에 나갈 거야.]이곳으로 돌아오기 전, 박민정은 일찌감치 국내 사람들에게 유남준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그가 해외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최근에 돌아오는 것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복귀할 줄은 몰랐다.4년 동안, 비록 그녀는 천천히 모든 것을 내려놓았지만 다시 적극적으로 이 남자에게 다가갈 생각을 하니 순간 마음이 매우 복잡해졌다.저녁 9시, 자선 파티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유남준처럼 권력 있고 힘 있는 사람은 룸이 따로 준비되어 있었고 굳이 나서서 가
아래층에 있는 박민정은 앉기 전부터 위층에 있는 가장 럭셔리하고 경매장이 제일 잘 보이는 룸을 눈여겨보고 있었다.룸에 별도로 설계된 유리는 바깥에서는 안에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지만 안쪽에 있는 사람은 바깥을 보일 수 있도록 했다.박민정은 일부러 룸에서 제일 잘 보이는 곳을 골라 앉았다. 그리고 금액을 부를 때 일부러 무심코 고개를 들어 위층 룸을 바라보았다.그저 가볍게 흘끗 시선을 스친 그녀의 눈에는 한치의 감정도 엿볼 수 없었다.룸 안에 있는 유남준의 전담 비서인 서다희는 바로 그녀를 알아봤다.“민정 씨!”유남준은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서다희에게 지시를 내렸다.“경매, 멈춰.”“네.”아래층에 있던 비서는 지시를 받고 경매를 포기했다.사람들은 오늘 돈 자랑 대회를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유남준이 먼저 포기한 것을 보고 다들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들은 눈앞의 이 여자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감히 유남준의 물건을 빼앗으려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유남준이 한발 물러서기까지 하다니...자선 경매가 끝난 후, 경매 행사 규정상 낙찰인은 돈을 내고 물건을 가져가야 했다.경매장 무대 뒤로 간 박민정은 홀로 소파에 앉아 있는 유남준과 마주쳤다.훤칠한 키에 검정색 슈트를 입고 있는 그는 귀티를 물씬 풍기고 있었고 잘생기고 차가운 얼굴과 까만 눈동자는 박민정이 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그녀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박민정!”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박민정을 바라보며 그녀를 불렀다.유남준은 그녀가 왜 죽은 척하고 4년 동안 사라졌는지, 4년 동안 그녀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는지, 또 무엇을 했는지 설명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4년 동안 그녀는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원래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 않던 그녀는 화장을 곱게 하고 있었고 어두운색의 옷만 입던 그녀는 화사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유남준은 자기 아내에게 이런 면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그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박민정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천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