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듣고 있던 유남준은 얼굴이 어두워졌지만, 반박은 하지 않았다.그리고 이런 그의 태도 때문에 그의 친구인 김인우도, 그의 엄마인 고영란도, 더불어 그의 비서인 서다희도, 심지어 집에서 도우미 일을 하는 사람들도 박민정을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김인우는 전화를 한 통 받고 급하게 떠났다.그가 떠난 뒤 유남준은 습관처럼 핸드폰을 꺼내 들었지만, 박민정으로부터 온 전화는 없었다.유남준이 전화를 걸자 여전히 차가운 기계음만 들렸다.“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되며 삐 소리 후 통화료가 부과됩니다.”유남준은 짜증이 나서 핸드폰을 옆에 버렸다.그는 몸을 일으켜 창가에 가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박민정이 새벽에 했던 말이 귀가를 맴돌았다. 그녀는 후회한다고 했다.유남준은 입안이 썼다. 크게 기침을 두 번 하자 등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빠, 담배 좀 적게 피워요. 몸에 안 좋아요.”유남준은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무의식적으로 박민정이 돌아온 줄 알았다.하지만 돌아보니 그 자리에 서 있는 건 단아하게 꾸민 이지원이었다.그는 눈에서 빛이 사라지면서 어색하게 물었다.“무슨 일로 왔어?”이지원은 그를 보는 눈빛이 제법 다정했다.“이모가 가보라고 하셔서요. 민정 씨가 그렇게 빠르게 다른 사람을 찾은 걸 알고 오빠보고 깊이 생각하지 말래요.”그녀의 입에서 말하는 이모는 유남준의 엄마였다.4년 전.유남준의 엄마와 김인우는 같은 차를 타고 적대하고 있던 회사로부터 암살 시도를 당했었다.유남준 엄마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렸고 그때 병원에 O형 피가 부족했는데 마침 박민정이 O형이었다.박민정은 김인우를 안정시키고 수혈하러 갔다.수혈한 후 박민정은 체력이 모자라서 그대로 쓰러졌다.그때 박씨 집안이 이지원의 투자자여서 이지원은 박민정과 사이가 꽤 좋았다. 그래서 박민정이 병원에 있는 걸 알고 가타부타 덧붙이지 않고 병원에 가서 박민정을 살폈고 그렇게 박민정이 사람을 구한 일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이 박민정이 입원한 틈
창밖으로 바람이 불었다. 박민정은 창백하고 연약한 손을 배에 올리고 눈빛이 멍해졌다.연지석이 그녀에게 알려주었다. 의사가 검사한 결과, 그녀가 임신이란다.이 타이밍에 아이가 생기다니...은정숙은 져버린 눈을 보며, 삶의 의지가 없어 보이는 박민정을 보면서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민정아.”박민정은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은정숙을 보았다.“아줌마.”은정숙은 눈이 붉어져서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민정아. 아줌마가 자식도 없고 쭉 너를 딸로 여겼어. 아줌마는 너 크게 성공하는 것도 안 바란다. 그저 몸 건강히 지내면 돼. 하나밖에 없는 딸이 죽으면! 엄마는 어떻게 살아가니?”박민정은 흠칫하고 은정숙이 과도를 드는 걸 보았다.“내가 너 열 살까지 키웠어. 열 살부터 너랑 같이 못 있어준 건 내 잘못이야. 지금 가서 너희 아버지한테 사죄할게...”은정숙은 말을 끝내기 무섭게 과도로 손목을 그으려 했다.박민정은 아연실색해서 없는 힘까지 짜내서 말렸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몸도 일으키지 못해서 목멘 소리로 말했다.“아줌마... 하지 마요...”하지만 은정숙은 멈추지 않았다.박민정은 그녀의 손목에서 붉은 피가 나는 걸 보면서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떨어져 내렸다.“멍청한 짓, 안 할게요. 아줌마, 그러지 마요...”박민정의 약속을 듣고서야 은정숙은 멈췄다.그녀의 눈은 잔뜩 충혈돼 있었다.“민정아. 낳아준 빚은 이미 갚았어. 우리 빚진 거 없어. 유남준한테도 빚진 거 없어! 지금부터 너는 너를 사랑하는 사람 위해서, 나를 위해서, 배 속에 아기를 위해서 잘살아 보자!”박민정은 결국 은정숙의 말을 듣기로 했다. 그녀와 아이를 위해 잘살아 보기로.지금부터 한수민은 그녀의 엄마가 아니었고, 그녀는 더 이상 남동생 같은 건 없다.그녀의 가족은 이제 은정숙과 배 속의 아이밖에 없다.은정숙은 사실 이런 방법으로 박민정의 결정을 협박해낼 생각은 없었다.그저 그녀를 살게 하고 싶었다!박민정은 자신의 부모를
여름의 두 번째 절기인 소만. 남방에서는 종종 폭우가 내렸다.퇴원한 후 며칠 동안 연지석은 자주 시간을 내서 박민정과 함께했다.약을 먹은 후유증으로 박민정의 몸 상태는 더 나빠졌다.하지만 그녀의 정신상태는 꽤 좋아졌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던데로부터 억지로라도 음식을 삼켰다.연지석과 함께 할 때 그녀는 단 한 번도 유남준을 언급하지 않았다.어떤 사람은 너무 아파서 입에 담는 것마저도 상처일 때가 있다.그리고 친구가 자신을 따라서 우울한 감정을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혼자 있을 때, 박민정은 유남준의 카톡 프로필 사진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이혼에 관한 일에 대해서 어떻게 입을 열지 몰랐다.그러던 어느 날.박민정은 밖에서 음식을 사고 돌아가는 길이었다.한 사람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이지원은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끼고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예쁜 드레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서 있었는데, 그 기세가 대단했다.“민정 씨. 민정 씨 어머니는 당신이 살아있는 거 알아요?”이지원의 눈썹이 둥글게 말렸다.박민정은 여기서 그녀를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둘은 조용한 카페를 찾아 창가 자리에 앉았다.커다란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렸다.이지원이 마스크를 벗자 오밀조밀한 얼굴이 드러났다.“안심하세요. 남준 오빠한테 듣기로는 박민호 씨가 최 사장님 돈 가지고 민정 씨 어머니 모시고 도망치고 있다더라고요. 그분들이 민정 씨 괴롭히는 일은 없을 거예요.”박민정은 이미 연지석을 통해 들었었다.한수민과 박민호가, 박민정이 제때 최 사장과 결혼하지 않아 보복이 두려워서 도망길에 올라서 당일에 해외로 도망쳤다고.그 누가 그토록 부유하던 박씨 집안이 고작 600억 때문에 패가망신할 거라 생각했겠는가?박민정은 조용히 다 듣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물었다.“할 말 있으세요?”이지원의 시선이 그녀의 배를 향했다. 임신한 게 아직 티가 나지 않았다.그녀는 손바닥 살을 세게 꼬집었다. 박민정을 당장 폭로하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말해봐요. 어떻게 해야 남준
박민정은 그제야 이지원이 떠나기 전에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다름 아닌 이간질이었다.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유남준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이혼은 우리 둘 사이의 문제인데 굳이 지원이랑 싸워야겠어? 지원이 지금 병원이야.”박민정은 흠칫 놀랐으나 순간 이 모든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알아챘다.그녀는 이지원이 이렇게 비열한 수단으로 자신을 모함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걸 유남준이 철석같이 믿고 있다니...“믿거나 말거나 전 지원 씨랑 딱 한번 만났고 아무 짓도 한 적 없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그 시각 병원.유남준의 표정은 잔뜩 어두웠고 이지원은 이마에 붕대를 감은 채 병상에 누워 있었다.그녀는 박민정과 만난 후, 스스로 머리를 부딪히는 고통을 불사하고 박민정을 모함했다.“대화를 나누고 싶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할 줄은...”이지원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진 뭉치를 꺼내 유남준에게 건넸다.이 사진들은 박민정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 사람을 시켜 찍은 것이다.“더 이상 숨겨주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오빠, 사진 보고 화내지 마요.”사진을 건네받은 유남준은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고 겹겹이 쌓인 사진 속에는 박민정과 연지석 두 사람뿐이었다.유남준은 썸에 가까운 사진 한 장을 보며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이지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이 사진들을 제가 먼저 발견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만약 사진들이 퍼졌다면 정말 큰일 날뻔했어요.”유남준은 마음이 착잡했다.병원에서 나온 그는 블랙 캐딜락에 앉아 사진에 필요한 돈을 이지원에게 보내라며 서다희에게 명령했다.“박민정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봐.”“알겠습니다.”서다희는 즉시 사람을 시켜 알아보았다....박민정은 밤새도록 악몽에 시달렸다.꿈속에서 유남준과 이지원은 결혼하여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또한 지난 몇 년간의 꿈도 꾸었다.유남준은 화가 나서 그녀를 버린 채 해외로 떠났고 아무리 찾으려 해도 만날 수가
이건 타이르는 게 아니라 ‘교육’이나 다름없었다.유남준의 가족부터 전담 비서 서다희, 심지어 저택의 가정부까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박민정을 교육할 수 있었다.그리고 그런 상황이 닥쳐오면 박민정은 웃으며 고마워해야 한다.하지만 이제 더 이상 이런 억울함을 겪고 싶지 않았다...박민정은 주먹을 불끈 쥐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서다희를 바라봤다.“그 사람이 화를 내든 말든 저랑 무슨 상관이죠? 별일 없으면 이만 가보세요.”서다희는 그녀의 싸늘한 눈빛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정신을 차렸을 땐 문이 굳게 닫혔다.서다희는 처음으로 문전박대를 당했다.지난 몇 년 동안 줄곧 차가운 태도로 무시를 하던 사람이 유남준이었는데 왜 이제는 반대가 된 거지?설마 이제 유남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걸까?...박민정은 서다희가 돌아가면 무조건 유남준에게 일러바칠 것을 알았다.그녀는 지친 채로 소파에 앉아 유남준의 질책을 기다리고 있었고 아니나 다를까 예상한 대로 서다희는 여기서 일어난 일에 대해 덧붙여 과장하며 말했다.강한 바람에 창문이 덜거덕거렸다.박민정은 초여름에도 불구하고 추운지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고 박민정은 한참이 지나서야 그걸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려고 했는데 솔직히 보지 않아도 누가 찾아왔는지 짐작 갔다.남자는 큰 키에 늘씬한 몸매가 더해지자 유난히 말라보였다.박민정은 고개를 들어 깊은 심연 같은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비서님이 얘기해줬어요?”유남준은 싸늘한 얼굴로 사진 뭉치를 박민정의 앞에 던졌다.“체면은 세워주려고 했어.”흠칫 놀란 박민정은 그대로 고개를 숙였고 바닥에는 그녀와 연지석이 찍힌 사진이 가득했으나 일부러 묘해 보이게 찍은 사진 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박민정이 설명하기도 전에 유남준이 말을 덧붙였다.“처음에는 모든 게 오해라고 생각했어. 처음에는 네가 아주 순수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다시 만날 마음도 있었다고...”처음에는? 처
박민정은 무서워하며 조심스럽게 아랫배를 쓰다듬었고 불안감은 한참이 지나서야 잠잠해졌다.“박민정, 나 화나게 하지 마.”유남준은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그의 말이 어렴풋이 들렸던 박민정은 두 눈에 초점을 잃은 채 멍하니 있었다.“내 몸에 영원히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죠?”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탓에 유남준은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이런 짓 하는 거 당신 애인도 알아요? 알게 되면 무조건 화낼 텐데.”예전의 유남준은 차갑긴 해도 배려 깊은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배려조차 없는 무자비한 사람으로 변했다.애인...유남준은 그녀가 가리키는 사람이 이지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네가 연지석이랑 같이 있을 땐 이런 생각 안 해봤어?”마음마저 완전히 짓밟혔다.유남준은 여자 때문에 자신이 속앓이하는 걸 용납하지 못했고 그게 박민정이라면 더더욱 싫었다.그는 조롱하며 입을 열었고 어느새 옷까지 챙겨입었다.“너처럼 뼈만 앙상하게 남은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가 있을 줄은 몰랐네.”박민정은 귀에 이명이 들리고 몸 아래에서 뭔가 흘러나오는 느낌이 들었다...유남준이 떠나기 전 그녀는 마지막으로 한마디 물었다.“남준 씨, 제가 죽으면 슬퍼할 건가요?”죽다니?유남준은 그녀의 질문이 우스운지 대놓고 무시한 후 자기 할 말만 했다.“내일 두원으로 옮겨.”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그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박민정이 사는 집 아래에서 구급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다음날 병원.박민정은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고 연지석이 그녀를 돌보고 있었다.어젯밤, 제때 병원으로 이송된 덕분에 아이는 지킬 수 있었지만 이 일을 통해 그녀는 유남준을 떠나기로 결심했다.띵동.문자 알림음에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해외로 도피한 한수민이 보내온 것이다.「민정아! 살아있다면 최 사장님쪽에 얘기 좀 잘해줘. 나랑 민호 평생 너한테 고마워하며 살게.」박민정은 답장하지 않고 곧바로 메시지를 삭제했다.그녀는 자신이 살아있는 한
김인우는 박민정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병원 직원에게 항상 그녀의 상태를 보고하라고 당부했다.유남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무슨 사고?”“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하게 모르는데 병원에 가보니까 의사 선생님이 사망했다고 하더라.”그 말은 마치 유남준을 향해 내리치는 한줄기의 천둥 같았다.‘죽었다니? 말도 안 돼... 어젯밤까지 멀쩡했잖아.’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유남준은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도대체 무슨 일이야?”“어젯밤에 병원으로 이송됐대. 오늘까지 응급조치를 취하다가 결국에는...”유남준은 아무 말 없이 외투를 집어 들고 집을 나섰다.병원으로 향하는 그의 귓가에는 어젯밤 박민정이 했던 말이 맴돌았다.“남준 씨, 제가 죽으면 슬퍼할 건가요?”이유를 몰랐지만, 점점 숨쉬기 힘들어졌고 셔츠 윗단추 두 개를 풀었는데도 숨이 턱턱 막혔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김인우는 일찌감치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그 사람 지금 어딨어?”유남준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간호사 말로는 이미 데려갔대. CCTV 돌려보니까 연지석이야.”어느덧 새벽 1시가 되었다.김인우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유남준에게 CCTV 영상을 보여주었다.“어젯밤 12시쯤에 병원에 실려 왔는데 과다출혈로...”12시쯤이면 유남준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다.도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과다출혈로 사망했다는 말을 믿지 않았던 그는 재빨리 사람을 시켜 연지석과 박민정의 행방을 조사했다.오늘 밤은 아마도 잠 못 이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김인우는 유남준의 앞을 서성거렸다.“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는 게 말이 돼? 그 귀머거리 또 연기하는 거 아니야?”그와 이런 이야기를 나눌 여유조차 없었던 유남준은 병원 쪽 상황을 알아보라는 말만 남기고 떠났다.유남준이 떠나자마자 병원 측은 김인우에게 박민정의 진료 기록을 전달했고 그는 의자에 앉아 귀찮다는 듯이 펼쳤다.김인우는 박민정이 약을 먹고 자살 시도를 하다가 병원에 이송되어 입
이건 틀림없이 우연의 일치다! 무조건!정말로 박민정이 구한 게 맞다면 어떻게 지금까지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았을까?만약 그녀라면 지난 몇 년 동안 했던 짓들은...김인우는 박민정의 진료 기록을 거두고 사무실로 돌아왔다.그는 밤새 앉아서 생각했다.다음 날 아침, 김인우는 이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지원아, 할 말 있어서 그런데 오늘 잠깐 만날래?”개인 레스토랑의 어느 룸 안.이지원은 한껏 꾸민 채로 들어왔고 웨이터가 다가와 그녀의 코트를 받았다.김인우의 시선은 흉터 하나 없이 매끈한 그녀의 하얀 팔에 머물렀다.4년 전, 그는 교통사고를 당했다.당시 온몸이 피투성이 된 채 의식을 잃고 차 안에 갇혀있었다.그러던 중 어떤 소녀가 위험을 무릅쓰고 깨진 유리창 사이로 손을 뻗어 강제로 문을 열었다.손을 뻗을 때 깨진 유리창에 팔이 깊숙이 긁혔고, 원장은 무조건 상처를 꿰매야 한다고 말했다.그러니 아무리 복원한다고 해도 흔적이 남지 않을 수 없다.김인우의 시선을 마주한 이지원은 찔리는 게 있는 듯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인우 오빠, 할 말 있다고 부르신 거 아니에요? 무슨 일이에요?”김인우는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거두며 진지하게 말했다.“박민정 죽었어.”이지원은 깜짝 놀라더니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언제요? 갑자기요?”너무 놀란 나머지 이 사실이 믿기지 않는 건 맞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쾌감이 밀려왓다.박민정이 죽었다는 건 그녀와 유남준 사이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사라졌다는 걸 뜻했다.“오늘 과다출혈로 죽었어. 응급처치해도 소용없었대.”김인우는 와인을 집어 들고 가볍게 흔들더니 단숨에 들이켰다.그 동시에 그는 유리잔 너머로 웃고 있는 이지원의 모습을 보았으나 이내 사라졌다.“이것 또한 운명이겠죠.”이지원은 한숨을 내쉬었다.“태어날 때부터 남들이 이룰 수 없는 삶을 살고, 집안의 힘과 권력으로 남준 오빠와 강제로 결혼했으니 이제 죽은 것도 업보인 셈이죠.”업보라니?그 말을 들은 김인우는 처음으
박민정은 미소를 띤 채 유남우에게 걸어갔다.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별과 바다를 품고 있는 듯했다.유남우는 넋을 잃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눈 부신 햇살에 유남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모습은 유남준과 똑같았다.하지만 박민정은 끝까지 자신이 사람을 잘못 봤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고 유남우를 보며 말했다.“가요.”유남우는 박민정이 자신을 유남준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지만 아무 해명도 하지 않고 그녀를 따라 앞쪽으로 걸어갔다.임신 중인 박민정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아무 말 없는 유남우에 혼잣말을 시작했다.“이따가 예찬이한테 말 좀 잘 해줘요. 화가 좀 난 것 같은데, 남준 씨를 안 부른 제 탓이에요.”유남우는 짧은 대답을 내놓았다. 그는 혹시라도 자신의 실수로 이 평온한 순간을 깨뜨릴까 봐 말을 최대한 아꼈다.그들 뒤에서는 전화 통화를 마친 윤소현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눈에 멀리서 걸어가고 있는 유남우와 박민정의 뒷모습이 들어왔다.윤소현의 동공이 순식간에 좁아지며 두 눈빛에 분노가 가득 찼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을 향해 걸어갔다.그때, 타이밍 좋게 유남준의 차도 도착했다.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걸어간 윤소현은 이내 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박민정을 향해 소리쳤다.“박민정, 염치도 없어?”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박민정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는 윤소현을 발견했다.그리고 유남우는 인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그만해, 윤소현.”그제야 박민정은 자신이 사람을 잘못 봤다는 것을 깨달았다.“남우 씨였어요?”박민정은 확신할 수 없다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두 걸음 더 다가와 유남우의 팔을 단단히 잡은 윤소현이 말했다.“그럼 누구겠어? 유남준인 줄 알았어?”박민정은 자신이 이렇게 큰 실수를 저지를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유남우 역시 자신의 실수를 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박민정은 퇴근 후, 유치원으로 향했다.김인우와 조하랑 역시 박예찬의 가족을 대표해 참여하기로 했다.두 사람을 발견한 박예찬이 불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두 사람, 방해만 안 되면 다행이네요.”그 말에 김인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야, 이 녀석아. 내가 널 방해할 사람처럼 보이냐?”마음의 상처를 입은 조하랑 역시 입을 열었다.“예찬아, 아줌마 상처받았어.”참다못한 박민정이 박예찬을 보며 말했다.“예찬아, 예의를 갖춰야지. 아저씨랑 아줌마는 널 위해서 쉬는 시간까지 포기해가며 여기까지 와 주신 거야.”박민정의 말에 박예찬은 금세 불만 섞여 있던 표정을 감추었다.“그럼 부탁드릴게요.”“그래야지.”김인우가 대답했다.할아버지가 육아에 미리 적응하라는 명목으로 그와 조하랑을 유치원으로 보내지만 않았어도 김인우는 이런 따분하고 지루한 활동에 참여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가장 성가신 점은 지금 날씨가 너무 더웠다는 것이다.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기 전, 박예찬은 박민정에게 다가와 물었다.“엄마, 그 사람은 안 왔어요?”유남준에게 가까스로 호감을 갖게 된 아이였지만 자신의 유치원 활동에 와 주지 않았다는 조금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박민정이 말했다.“아저씨랑 아줌마가 와 준다고 해서, 굳이 아빠한테까지 얘기하진 않았어.”아빠?박예찬은 그 호칭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엄마, 예전에 했던 말 벌써 까먹은 거예요?”어딘가 당황한 듯한 모습을 보인 박민정이 물었다.“무슨 말?”“아무것도 아니에요.”박예찬은 어딘가 화가 난 듯했다.그는 비록 김씨 가문의 집에서 잘 지내고 있었지만 여전히 박민정과 유남준의 관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아이는 지금 두 사람의 관계가 예전보다 어느 정도 나아졌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박예찬은 조하랑과 김인우에게 다가갔다.박민정은 화난 모습으로 떠나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단순히 유남준이 와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그녀는 뒤늦
함미현은 앞으로 정씨 가문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고 윤소현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그리고 윤소현은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함미현이 이런 속셈을 품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최근 들어 정수미에게 대놓고 미움받고 있던 윤소현은 어쩔 수 없이 유씨 가문으로 돌아가야 했다.유남준은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회사에서 지내다시피 했던 탓에 집에는 항상 그녀와 고영란만 있었다.고영란은 별다른 일만 없으면 두 손자들을 데리러 유치원으로 향하거나 다른 부잣집 사모님들과 함께 미용실로 가 관리를 받으며 윤소현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그렇게 윤소현은 집에 혼자 남아 속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불만을 삭여야 했다.집으로 돌아온 최현아가 말을 걸어왔다.“동서, 이제 배도 많이 나왔네. 도련님이 집에서 안 챙겨줘?”그 말을 듣는 윤소현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없어요. 매번 들어오라고만 하면 항상 야근 핑계를 대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최현아는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으로 말을 이었다.“최근에 민정이가 회사 차렸다는 건 알고 있지?”“모를 리가 있겠어요? 언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우리 윤씨 가문 사업을 인수했더라고요.”윤소현이 주먹을 꽉 쥐었다.“어디서 그렇게 큰돈이 났을까?”최현아는 일부러 윤소현을 자극하기라도 하듯 의문을 제기했다.사실 그녀 역시 어느 정도는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다.“어디서 났겠어요? 아주버님이랑 어머님께서 주신 거겠죠.”윤소현은 죽었다 깨어나도 박민정에게 대단한 능력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예전에는 항상 박민정과 윤소현의 사이에 불화가 이는 것을 두려워했던 최현아였지만 계속해서 패배의 쓴맛만 보는 윤소현의 모습이 점점 마음이 놓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자신의 두 올케가 서로 영원히 지치지 않고 싸우는 것을 구경만 하면 됐으니 말이다.“동서도 엄연한 유씨 가문의 며느리이자 어머님의 며느리잖아. 게다가 뱃속에는 유씨 가문의 아이까지 품고 있고. 그런데 어머님께선 왜 아직도 그
사무실 밖으로 나서는 에리의 모습을 보던 연지석의 눈빛이 차가웠다.이때, 하민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형, 박민정은 또 왜 건드린 거야? 피도 안 섞인 애들 아빠 되는 걸로도 모자라서 이젠 배 속에 있는 쌍둥이 애들까지 형이 다 떠안으려고?”하민재가 답답한 듯 쏘아붙였다.연지석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헛소리하지 마. 이번에 돌아온 건 정말 일하러 온 거야. 그러면서 민정이도 한 번 보살펴주고.”“정말이야?”하민재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당연히 정말이지.”연지석은 일부러 태연하게 말했다.“민정이는 이미 유남준이랑 새 출발 하기로 한 것 같아. 나도 그거 다 알면서 민정이한테 매달릴 정도로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야.”하민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이다. 형, 세상에 여자는 많아. 제발 천천히 좀 찾아.”“응, 알겠어.”그때, 누군가가 연지석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연지석이 고개를 들어 문 쪽을 확인해보니 설인하가 커피를 든 채 문 앞에 서 있었다.설인하가 뭐든 빨리 배우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아는 박민정이 그녀를 연지석의 비서로 배치해준 것이다.연지석은 설인하를 발견하자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설인하는 사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얘기하고 끊어.”연지석이 수화기 너머로 말했다.설인하는 커피를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부사장님, 여기 커피 가져왔습니다.”“네.”연지석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설인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어색하게 서 있던 설인하가 입을 열었다.“그, 연 대표님. 저한테 아무 일이라도 맡겨주실 수 있을까요?”설인하는 연지석을 따라다니며 중요한 일을 맡고 해낼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정작 이렇게 잡일만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연지석은 설인하의 말에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여인의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한 그는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연지석은 단순히 그녀의 얼굴만 감상하다가 입을 열었다.“어떤 일을 하고
유남준의 대답에 박민정은 기가 막혔다.“내가 뭘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요? 뭐, 연지석이랑 계약 취소하고 에리도 해고할까요?”유남준은 깊은 눈동자로 박민정을 바라보며 말했다.“할 수만 있다면...”“절대 안 돼요!”박민정이 그의 말을 끊었다.“제 친구인 것도 있긴 하지만, 능력을 봐서라도 절대 남준 씨 말대로 해줄 수는 없어요.”유남준은 박민정의 말에 잠시 혼란스러웠다. 예전이었으면 무슨 일이 있든 박민정은 항상 유남준의 말대로 했을 텐데, 이제는 모든 것이 다 변해버렸다.유남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그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요?”“내가 하려던 말은, 가능하다면 그 두 사람이랑 조금 거리를 뒀으면 좋겠다는 거야. 내가 질투 나니까.”유남준은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마음을 담아 해명했다.그 말은 들은 후에야 박민정은 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달았다.“미안해요. 아까는 내가 너무 성급했네요. 말도 끝까지 못 듣고.”잠시 망설이던 박민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걱정 마요. 난 그 두 사람을 단순한 친구로만 생각할 뿐, 다른 감정은 전혀 없으니까요.”비로소 안심한 유남준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박민정은 그대로 유남준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댄 채 물었다.“오늘 이렇게 온 거, 쉬는 날이어서 온 게 아니죠?”“내 회사야. 내가 쉬는 날이라고 하면 쉬는 날이지.”박민정은 아직도 유남준의 회사가 IM 그룹이라는 것을 모른 채 그 역시 자신과 같은 일반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우린 사업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잖아요. 너무 감정적으로 행동해선 안 돼요. 얼른 회사로 돌아가서 다시 일 봐요.”그녀 역시 회사 운영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리더인 회사 대표부터 게으른 태도로 일한다면 밑에 있는 직원들도 열심히 일할 리 없었다.“알겠어.”유남준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지금의 기분은 조금 전보다 한결 나아졌다.오늘에서야 힘들게 민수아와의 데이트를
안내데스크 직원은 순간적으로 공포가 엄습해왔다. 저 사람이 정말 박 대표의 남편이라면 자신은 끝장인 게 뻔했으니 말이다.하지만 회사 직원들에게 기재된 박 대표의 소개 글에는 분명 남편과 이혼한 상태라고 되어 있었다.“그냥 우리 와이프랑 밥이나 한 끼 먹으려고 왔지.”말을 마친 유남준은 안내데스크로 고개를 돌리더니 처음으로 그 여직원을 협박하기 시작했다.“잘리고 싶지 않으면 그 남자들 정보는 순순히 부는 게 좋을 거야!”상황 파악을 마친 서다희가 곧장 데스크 직원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네주었다.그리고 안내데스크 직원은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명함을 받아들었다.“네, 네...”이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몰랐던 박민정이 다가와 물었다.“오늘은 출근 안 해요?”“오는 쉬는 날이야.”유남준은 태연한 얼굴로 거짓말을 했다.“목요일인데 쉬는 날이라고요? 당신 회사 직원들은 참 좋겠다.”박민정이 대답했다.곁에서 유남준과 박민정의 사이에 끼어 애매한 포지션이 되긴 싫었던 진서연이 말했다.“보스, 저는 수아 씨랑 이 근처 좀 돌기로 약속해서요. 먼저 가보겠습니다.”“그래.”박민정은 흔쾌히 그 말에 대답했다.유남준도 고개를 돌려 서다희를 바라보며 말했다.“너도 우리 따라오지 말고 수아 씨 찾으러 가. 회사 직원들 간식거리도 좀 챙겨가고.”그의 의도는 아주 명백했다. 그저 XS 그룹의 직원들에게 박민정의 남편이 왔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것이었다.박민정은 그런 유남준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그럼 밥이나 먹으러 가요. 뭐 먹고 싶은데요?”“나는 다 괜찮아. 네가 먹고 싶은 거로 먹자.”유남준은 정말 식사를 위해 찾아온 게 아니라 박민정의 회사 사람들에게 그녀가 유부녀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온 것이었다.“그래요.”박민정도 예의상 해봤던 말을 더 꺼내지 않았다.그녀는 곧장 유남준을 데리고 자신이 자주 가는 회사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배불리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소화도 시킬 겸 함께 산책했다. 그러던 중 궁금
듣고 있던 매니저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에리는 아마 본인도 그렇게 정직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됐어, 화 그만 내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하지만 에리는 지금 밥이 넘어갈 기분이 아니었다.“넌 유남준이 연지석의 존재를 알 거라고 생각해?”그 질문에 미간을 찌푸린 매니저가 대답했다.“너 이건 좀 아니지 않아?”“뭐가 아닌데.”휴대폰을 집어 든 에리는 연지석이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 부사장으로 승진했다는 사실을 유남준에게 알려주었다.유남준의 표정이 보기 좋게 험악해졌다.“연지석이 왜 또 거기 있는 겁니까?”그런 유남준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서다희는 어이가 없었다.‘언제는 자기한테 이런 일 하나하나 알려주지 말라더니?’“게다가 부사장이라고요?”유남준의 기분이 점점 심연으로 곤두박질쳤다. 아침에 박민정을 회사까지 데려다줄 때까지만 해도 그는 에리에 대해서만 몇 가지 물어보려 했다.하지만 정신 차려 보니 어느새 그녀의 옆에는 연지석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해 있었다.유남준은 저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켰다.“대표님, 왜 그러십니까?”서다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오늘 휴가 내고 XS 본사 한 번 가봐야겠어.”그쪽 회사로 가서 자신의 권위를 보여주지 않으면 아내가 정말 다른 사람의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서다희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자신의 대표를 따라나섰다.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인 줄 알았더니 이렇게 불안해할 때도 있다는 것이 새로웠다.XS 그룹.1층 로비의 안내데스크 직원은 유남준과 서다희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선생님, 죄송하지만 저희 대표님과 미리 약속이 안 되어 있으셔서 올라가실 수 없습니다.”정중하게 말을 마친 안내 직원은 유남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눈앞의 남자가 너무 잘생긴 탓이었다.연지석 부대표와 견주어도 밀리지 않을 얼굴이었다.그 말에 윤남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이 회사 박 대표의 남편인데, 따로 예약까지 해야 하나?”
정수미에게 붙여둔 미행인이 박민정과 유남준에게 상황을 전달해 주었다.모든 것을 전해 들은 박민정이 혀를 찼다.“정말 한 편의 드라마가 따로 없네. 그래도 이제 함미현이 걱정하고 있는 게 뭔지는 잘 알겠네요.”유남준 역시 대략적인 상황을 짐작한 듯했다.“윤소현이 이미 함미현의 정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어쩐지 정수미 친딸이라는 함미현 씨가 윤소현 말에 너무 고분고분 따르더라고요. 이제 모든 게 다 이해가 되네요.”박민정인 이제 정수미가 안쓰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곁에 딸이라고 남아 있는 사람 중에 그녀를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말이다.그렇게 힘들게 찾아낸 친딸도 가짜였다니.이제는 염혜란까지 사라졌다. 박민정은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해 추모를 마치고 유남준과 함께 돌아갔다.운전기사는 박민정을 회사 정문에 내려주었다.박민정이 차에서 내리려 하던 그때, 유남준이 그녀를 불러세웠다.“잠시만.”“왜요?”박민정이 고개를 돌려 유남준을 바라보며 물었다.잠시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던 유남준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아니야. 저녁에 데리러 올게.”“알겠어요.”박민정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최근 들어 회사에서는 꽤 많은 신입 직원들을 채용했고, 그중에는 호산 그룹에서 건너온 사람들도 꽤 많았다.회사로 들어선 박민정은 오늘따라 유난히 떠들썩한 회사 분위기를 눈치챘다. 자세히 보니 여직원들 여럿이 스튜디오와 고층을 오가며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서연아, 무슨 일이야?”진서연이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이게 다 우리 회사 요물들 때문이잖아요.”“요물들이라니?”서류 뭉치를 들고 지나가던 설인하가 말했다.“연지석이랑 에리잖아요.”설인하의 말을 들은 박민정도 뒤늦게 상황을 이해했다.그럴 만도 한 것이 그 두 명은 정말 요물이 다름없었다. 생김새부터 비현실적으로 잘생긴 탓에 회사 여직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보스, 요즘에 그 능력 있는 홍
10분 후.어느 정도 마음의 위안을 얻어 진정된 함미현은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사람은 이제 윤소현으로 바뀌었다.방 안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고 윤소현은 차오르는 눈물에 목소리도 똑바로 낼 수 없었다.“엄마, 제가 잘못했어요. 저는 다 엄마를 위해서 그랬던 거예요.”“날 위해서였다고?”윤소현의 말을 듣는 순간, 정수미는 분노 섞인 헛웃음을 터뜨렸다.“날 위해서 사람을 죽이고, 남을 해쳤단 말이니? 어디 한번 말해봐. 염혜란 씨를 죽인 게 어떻게 날 위해서였다는 건지.”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몸을 덜덜 떨고 있던 윤소현이 입을 열었다.“염혜란만 사라지면, 미현이한테는 엄마만 남잖아요. 그러면 미현이도 굳이 다른 사람들 신경 안 써도 될 거고.”“고작 그 이유라는 거니?”정수미는 윤소현의 입에서 나온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윤소현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다.“엄마, 저는 그냥 엄마가 행복하시길 바랐던 거예요.”“저는 엄마를 위해서 제 친엄마인 한수민이랑 천륜까지 끊었는데 미현이가 양엄마를 끊어내지 못할 건 또 뭔데요? 걔가 못 끊겠다고 하니까 제가 대신 나서서 직접 끊어준 거예요. 덕분에 미현이한테는 지금 한 명의 엄마만 남게 됐잖아요!”윤소현의 태도는 아주 당당했다.정수미는 말을 마친 윤소현의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더니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이런 못된 것!”정수미의 손바닥이 거쳐 간 윤소현의 뺨은 이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정수미가 살면서 처음으로 윤소현에게 손찌검을 한 것이다.“엄마, 어떻게 저를 때리실 수가 있어요? 저는 항상 엄마를 친엄마라고 생각해왔는데, 미현이 오니까 이젠 저한테 손찌검도 하시네요.”윤소현은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정수미를 올려다보았다.“그러니까 너는 지금, 이게 다 내 잘못이라는 거니? 내가 너랑 한수민을 끊어낸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어? 내 가정을 파탄 낸 사람이 바로 한수민이었으니까! 그리고 너는 그 여자랑 윤석후의 딸이었고.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