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두 번째 절기인 소만. 남방에서는 종종 폭우가 내렸다.퇴원한 후 며칠 동안 연지석은 자주 시간을 내서 박민정과 함께했다.약을 먹은 후유증으로 박민정의 몸 상태는 더 나빠졌다.하지만 그녀의 정신상태는 꽤 좋아졌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던데로부터 억지로라도 음식을 삼켰다.연지석과 함께 할 때 그녀는 단 한 번도 유남준을 언급하지 않았다.어떤 사람은 너무 아파서 입에 담는 것마저도 상처일 때가 있다.그리고 친구가 자신을 따라서 우울한 감정을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혼자 있을 때, 박민정은 유남준의 카톡 프로필 사진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이혼에 관한 일에 대해서 어떻게 입을 열지 몰랐다.그러던 어느 날.박민정은 밖에서 음식을 사고 돌아가는 길이었다.한 사람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이지원은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끼고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예쁜 드레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서 있었는데, 그 기세가 대단했다.“민정 씨. 민정 씨 어머니는 당신이 살아있는 거 알아요?”이지원의 눈썹이 둥글게 말렸다.박민정은 여기서 그녀를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둘은 조용한 카페를 찾아 창가 자리에 앉았다.커다란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렸다.이지원이 마스크를 벗자 오밀조밀한 얼굴이 드러났다.“안심하세요. 남준 오빠한테 듣기로는 박민호 씨가 최 사장님 돈 가지고 민정 씨 어머니 모시고 도망치고 있다더라고요. 그분들이 민정 씨 괴롭히는 일은 없을 거예요.”박민정은 이미 연지석을 통해 들었었다.한수민과 박민호가, 박민정이 제때 최 사장과 결혼하지 않아 보복이 두려워서 도망길에 올라서 당일에 해외로 도망쳤다고.그 누가 그토록 부유하던 박씨 집안이 고작 600억 때문에 패가망신할 거라 생각했겠는가?박민정은 조용히 다 듣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물었다.“할 말 있으세요?”이지원의 시선이 그녀의 배를 향했다. 임신한 게 아직 티가 나지 않았다.그녀는 손바닥 살을 세게 꼬집었다. 박민정을 당장 폭로하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말해봐요. 어떻게 해야 남준
박민정은 그제야 이지원이 떠나기 전에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다름 아닌 이간질이었다.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유남준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이혼은 우리 둘 사이의 문제인데 굳이 지원이랑 싸워야겠어? 지원이 지금 병원이야.”박민정은 흠칫 놀랐으나 순간 이 모든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알아챘다.그녀는 이지원이 이렇게 비열한 수단으로 자신을 모함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걸 유남준이 철석같이 믿고 있다니...“믿거나 말거나 전 지원 씨랑 딱 한번 만났고 아무 짓도 한 적 없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그 시각 병원.유남준의 표정은 잔뜩 어두웠고 이지원은 이마에 붕대를 감은 채 병상에 누워 있었다.그녀는 박민정과 만난 후, 스스로 머리를 부딪히는 고통을 불사하고 박민정을 모함했다.“대화를 나누고 싶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할 줄은...”이지원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진 뭉치를 꺼내 유남준에게 건넸다.이 사진들은 박민정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 사람을 시켜 찍은 것이다.“더 이상 숨겨주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오빠, 사진 보고 화내지 마요.”사진을 건네받은 유남준은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고 겹겹이 쌓인 사진 속에는 박민정과 연지석 두 사람뿐이었다.유남준은 썸에 가까운 사진 한 장을 보며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이지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이 사진들을 제가 먼저 발견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만약 사진들이 퍼졌다면 정말 큰일 날뻔했어요.”유남준은 마음이 착잡했다.병원에서 나온 그는 블랙 캐딜락에 앉아 사진에 필요한 돈을 이지원에게 보내라며 서다희에게 명령했다.“박민정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봐.”“알겠습니다.”서다희는 즉시 사람을 시켜 알아보았다....박민정은 밤새도록 악몽에 시달렸다.꿈속에서 유남준과 이지원은 결혼하여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또한 지난 몇 년간의 꿈도 꾸었다.유남준은 화가 나서 그녀를 버린 채 해외로 떠났고 아무리 찾으려 해도 만날 수가
이건 타이르는 게 아니라 ‘교육’이나 다름없었다.유남준의 가족부터 전담 비서 서다희, 심지어 저택의 가정부까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박민정을 교육할 수 있었다.그리고 그런 상황이 닥쳐오면 박민정은 웃으며 고마워해야 한다.하지만 이제 더 이상 이런 억울함을 겪고 싶지 않았다...박민정은 주먹을 불끈 쥐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서다희를 바라봤다.“그 사람이 화를 내든 말든 저랑 무슨 상관이죠? 별일 없으면 이만 가보세요.”서다희는 그녀의 싸늘한 눈빛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정신을 차렸을 땐 문이 굳게 닫혔다.서다희는 처음으로 문전박대를 당했다.지난 몇 년 동안 줄곧 차가운 태도로 무시를 하던 사람이 유남준이었는데 왜 이제는 반대가 된 거지?설마 이제 유남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걸까?...박민정은 서다희가 돌아가면 무조건 유남준에게 일러바칠 것을 알았다.그녀는 지친 채로 소파에 앉아 유남준의 질책을 기다리고 있었고 아니나 다를까 예상한 대로 서다희는 여기서 일어난 일에 대해 덧붙여 과장하며 말했다.강한 바람에 창문이 덜거덕거렸다.박민정은 초여름에도 불구하고 추운지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고 박민정은 한참이 지나서야 그걸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려고 했는데 솔직히 보지 않아도 누가 찾아왔는지 짐작 갔다.남자는 큰 키에 늘씬한 몸매가 더해지자 유난히 말라보였다.박민정은 고개를 들어 깊은 심연 같은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비서님이 얘기해줬어요?”유남준은 싸늘한 얼굴로 사진 뭉치를 박민정의 앞에 던졌다.“체면은 세워주려고 했어.”흠칫 놀란 박민정은 그대로 고개를 숙였고 바닥에는 그녀와 연지석이 찍힌 사진이 가득했으나 일부러 묘해 보이게 찍은 사진 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박민정이 설명하기도 전에 유남준이 말을 덧붙였다.“처음에는 모든 게 오해라고 생각했어. 처음에는 네가 아주 순수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다시 만날 마음도 있었다고...”처음에는? 처
박민정은 무서워하며 조심스럽게 아랫배를 쓰다듬었고 불안감은 한참이 지나서야 잠잠해졌다.“박민정, 나 화나게 하지 마.”유남준은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그의 말이 어렴풋이 들렸던 박민정은 두 눈에 초점을 잃은 채 멍하니 있었다.“내 몸에 영원히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죠?”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탓에 유남준은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이런 짓 하는 거 당신 애인도 알아요? 알게 되면 무조건 화낼 텐데.”예전의 유남준은 차갑긴 해도 배려 깊은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배려조차 없는 무자비한 사람으로 변했다.애인...유남준은 그녀가 가리키는 사람이 이지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네가 연지석이랑 같이 있을 땐 이런 생각 안 해봤어?”마음마저 완전히 짓밟혔다.유남준은 여자 때문에 자신이 속앓이하는 걸 용납하지 못했고 그게 박민정이라면 더더욱 싫었다.그는 조롱하며 입을 열었고 어느새 옷까지 챙겨입었다.“너처럼 뼈만 앙상하게 남은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가 있을 줄은 몰랐네.”박민정은 귀에 이명이 들리고 몸 아래에서 뭔가 흘러나오는 느낌이 들었다...유남준이 떠나기 전 그녀는 마지막으로 한마디 물었다.“남준 씨, 제가 죽으면 슬퍼할 건가요?”죽다니?유남준은 그녀의 질문이 우스운지 대놓고 무시한 후 자기 할 말만 했다.“내일 두원으로 옮겨.”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그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박민정이 사는 집 아래에서 구급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다음날 병원.박민정은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고 연지석이 그녀를 돌보고 있었다.어젯밤, 제때 병원으로 이송된 덕분에 아이는 지킬 수 있었지만 이 일을 통해 그녀는 유남준을 떠나기로 결심했다.띵동.문자 알림음에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해외로 도피한 한수민이 보내온 것이다.「민정아! 살아있다면 최 사장님쪽에 얘기 좀 잘해줘. 나랑 민호 평생 너한테 고마워하며 살게.」박민정은 답장하지 않고 곧바로 메시지를 삭제했다.그녀는 자신이 살아있는 한
김인우는 박민정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병원 직원에게 항상 그녀의 상태를 보고하라고 당부했다.유남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무슨 사고?”“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하게 모르는데 병원에 가보니까 의사 선생님이 사망했다고 하더라.”그 말은 마치 유남준을 향해 내리치는 한줄기의 천둥 같았다.‘죽었다니? 말도 안 돼... 어젯밤까지 멀쩡했잖아.’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유남준은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도대체 무슨 일이야?”“어젯밤에 병원으로 이송됐대. 오늘까지 응급조치를 취하다가 결국에는...”유남준은 아무 말 없이 외투를 집어 들고 집을 나섰다.병원으로 향하는 그의 귓가에는 어젯밤 박민정이 했던 말이 맴돌았다.“남준 씨, 제가 죽으면 슬퍼할 건가요?”이유를 몰랐지만, 점점 숨쉬기 힘들어졌고 셔츠 윗단추 두 개를 풀었는데도 숨이 턱턱 막혔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김인우는 일찌감치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그 사람 지금 어딨어?”유남준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간호사 말로는 이미 데려갔대. CCTV 돌려보니까 연지석이야.”어느덧 새벽 1시가 되었다.김인우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유남준에게 CCTV 영상을 보여주었다.“어젯밤 12시쯤에 병원에 실려 왔는데 과다출혈로...”12시쯤이면 유남준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다.도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과다출혈로 사망했다는 말을 믿지 않았던 그는 재빨리 사람을 시켜 연지석과 박민정의 행방을 조사했다.오늘 밤은 아마도 잠 못 이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김인우는 유남준의 앞을 서성거렸다.“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는 게 말이 돼? 그 귀머거리 또 연기하는 거 아니야?”그와 이런 이야기를 나눌 여유조차 없었던 유남준은 병원 쪽 상황을 알아보라는 말만 남기고 떠났다.유남준이 떠나자마자 병원 측은 김인우에게 박민정의 진료 기록을 전달했고 그는 의자에 앉아 귀찮다는 듯이 펼쳤다.김인우는 박민정이 약을 먹고 자살 시도를 하다가 병원에 이송되어 입
이건 틀림없이 우연의 일치다! 무조건!정말로 박민정이 구한 게 맞다면 어떻게 지금까지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았을까?만약 그녀라면 지난 몇 년 동안 했던 짓들은...김인우는 박민정의 진료 기록을 거두고 사무실로 돌아왔다.그는 밤새 앉아서 생각했다.다음 날 아침, 김인우는 이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지원아, 할 말 있어서 그런데 오늘 잠깐 만날래?”개인 레스토랑의 어느 룸 안.이지원은 한껏 꾸민 채로 들어왔고 웨이터가 다가와 그녀의 코트를 받았다.김인우의 시선은 흉터 하나 없이 매끈한 그녀의 하얀 팔에 머물렀다.4년 전, 그는 교통사고를 당했다.당시 온몸이 피투성이 된 채 의식을 잃고 차 안에 갇혀있었다.그러던 중 어떤 소녀가 위험을 무릅쓰고 깨진 유리창 사이로 손을 뻗어 강제로 문을 열었다.손을 뻗을 때 깨진 유리창에 팔이 깊숙이 긁혔고, 원장은 무조건 상처를 꿰매야 한다고 말했다.그러니 아무리 복원한다고 해도 흔적이 남지 않을 수 없다.김인우의 시선을 마주한 이지원은 찔리는 게 있는 듯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인우 오빠, 할 말 있다고 부르신 거 아니에요? 무슨 일이에요?”김인우는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거두며 진지하게 말했다.“박민정 죽었어.”이지원은 깜짝 놀라더니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언제요? 갑자기요?”너무 놀란 나머지 이 사실이 믿기지 않는 건 맞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쾌감이 밀려왓다.박민정이 죽었다는 건 그녀와 유남준 사이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사라졌다는 걸 뜻했다.“오늘 과다출혈로 죽었어. 응급처치해도 소용없었대.”김인우는 와인을 집어 들고 가볍게 흔들더니 단숨에 들이켰다.그 동시에 그는 유리잔 너머로 웃고 있는 이지원의 모습을 보았으나 이내 사라졌다.“이것 또한 운명이겠죠.”이지원은 한숨을 내쉬었다.“태어날 때부터 남들이 이룰 수 없는 삶을 살고, 집안의 힘과 권력으로 남준 오빠와 강제로 결혼했으니 이제 죽은 것도 업보인 셈이죠.”업보라니?그 말을 들은 김인우는 처음으
이지원이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알고 있을 리가 없다.그러나 워낙 눈치가 빨랐던 그녀는 오늘따라 이상한 김인우의 모습과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자신의 팔을 주시하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뭔가 깨달은 듯 태연하게 맞장구를 쳤다.“당연히 기억하죠. 그때 온몸이 피투성이여서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폭발 직전의 차에서 오빠를 끌어내기 위해 제가 강제로 차 문을 열려다가 팔에 상처가 났잖아요. 오빠는 모르겠지만 그 흉터가 엄청 끔찍했거든요. 다행히 나중에 수술해서 완전히 지워졌지만...”이지원은 팔에 난 상처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왜냐하면 그때 당시 박민정을 발견하고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봤으니까...예전 같으면 김인우는 주저 없이 이지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을 텐데, 지금은 반신반의하고 있다.“무조건 강해야 해요.”그때 그를 구해준 소녀가 수없이 했던 말이다.무서워하지 말라는 상식적인 말이 아니라서 지금까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식사를 마치고 떠나기 전.김인우는 이지원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지원아, 우리가 오랫동안 알고 지냈으니까 내가 어떤 성격인지는 잘 알지? 나는 다른 사람이 날 속이는 게 제일 싫어.”할 말만 하고 먼저 떠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지원은 조금 무서웠다.그러나 박민정은 이미 죽었고 죽은 사람은 말이 없는 법이니 설사 그날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들 잡아떼면 그만이다.저택으로 돌아온 김인우는 사람을 시켜 그 날의 일을 재조사했다.이지원이 처음으로 그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주장했을 때 별다른 조사 없이 그대로 믿었다. 그녀 외에는 아무도 그를 구해줬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그런데 지금은...그게 실수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두원 별장 밖.유남준은 차 안에 앉아 줄줄이 담배를 태웠다.오늘 박민정이 예전에 살았던 곳으로 갔지만 거긴 이미 비어있었다.사람을 시켜 그녀의 행방을 조사하게 했지만, 지금까지 그 어떤 단서도 발견하지 못했다.유남준은 두통을 느끼며 마지막 담배를 껐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차를 단숨에 들이마셨다.“남준아, 정말 죽었으니까 이제 그만하자.”말을 내뱉고 나서야 김인우는 자신이 박민정의 입장을 대신하여 말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유남준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계속 진료 기록을 보고 있었고 거의 다 볼 때쯤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비서 서다희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대표님, 연지석 씨의 행방을 알아냈습니다.”서다희는 재빨리 주소를 보내왔고 그곳은 외딴 지역에 있는 신림현이었다.어디선가 들어본 듯 익숙했지만 정확하게 기억이 떠오르지는 않았다.“왜 그래?”김인우는 아무 말 없는 그의 모습을 보고선 의아해하며 물었고 유남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말을 마친 그는 두말없이 외투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김인우는 어디로 가는지 묻고 싶었지만, 부랴부랴 떠나는 그의 모습을 보고 말을 아꼈다.그렇게 홀로 집에 남겨진 그는 시간도 늦었고 마침 피곤했던 터라 잠깐 이곳에서 눈을 붙이기로 했다....새벽, 유남준은 신림현에 도착했다.흐린 날에 더불어 빗줄기도 점점 거세졌다.서다희는 검은 우산을 펼치며 유남준을 마중했다.“대표님.”“응?”서다희는 유남준과 함께 신림현으로 오는 길에 많은 것들을 설명해 줬다.“조사 결과 이곳에서 연지석 씨의 행방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민정 씨가 어릴적 양어머니와 함께 지냈던 곳이라고 합니다.”양어머니...장대 같은 빗속에서 유남준은 침울한 눈빛을 드리우면서 왜 산림이라는 이름이 익숙하게 느껴졌는지 알아챘다.박민정이 수도 없이 언급했으니까.결혼 3년 동안 명절 때마다 박민정이 눈치를 보며 물었었다.“남준 씨, 볼일 있어서 그러는데 나 잠깐 신림현에 다녀와도 될까?”그때의 유남준은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무슨 일로 신림현에 가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그는 줄곧 무관심하게 답했다.“나한테 일일이 보고할 필요 없으니까 마음대로 해.”그렇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박민정은 매번
“아니에요. 별장 청소와 정리는 가정부가 하면 돼요.”박민정의 말에 설인하가 고집을 부렸다.“안 돼요. 그 얘기는 이미 청소는 모두 제가 하기로 했잖아요. 그대로 해요. 민정 씨, 나와 방성원의 관계 때문이라면 이러지 않아도 돼요. 그리고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긴 하지만 전부 처음부터 배울 거예요.”설인하는 박민정이 거절할까 봐 박민정이 다른 말을 하기도 전에 청소하기 시작했다.박민정은 설인하의 모습을 보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별장 관리인을 불러서 앞으로 매월 급여 발급할 때 설인하에게도 주라고 지시했다.사실 박민정이 설인하에게 별장 청소를 시키지 않은 것은 방성원과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현재 그녀의 몸 상태가 감당을 못할까 봐서였다.게다가 박민정이 설인하에 대해 조사를 했는데 그녀도 예전에는 부잣집 딸로서 아무 일도 해본 적이 없이 자랐었다.설인하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가 결혼한 후 어떤 일을 겪었을지를 생각하며 마음 아파했다.설인하는 집 안 청소도 하고 또 주동적으로 진서연을 찾아서 업무상의 일을 시작했다.박민정은 소파에 앉아서 휴식하고 있었는데 진서연이 언제 나갔었는지 밖에서 들어오며 말했다.“보스, 정민기 씨가 찾아요.”“알았어.”박민정은 소파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자, 정민기가 손에 서류 더미를 들고 있었다.“전에 조사하라고 한 함미현에 관한 자료예요. 출생한 병원과 그때 혈액 등 기록들이에요. 서류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함미현은 정수미의 친딸이 아니에요.”박민정이 서류를 받아보자, 거기에는 함미현의 출생 관련 기록들이 그대로 있었다. 만약 염혜란이 입양한 거라면 이런 내용을 모두 만들었을 수는 없을 것이다.“최근에 염혜란 씨에 대한 소식은 없어요?”박민정의 물음에 정민기가 신중한 표정으로 변하며 말했다.“사람을 시켜서 염혜란 씨 집 근처 CCTV를 모두 조사했는데 그중 한 카메라에서 종적을 찾았는데 옆으로 차 한 대가 지나가면서 염혜란 씨도 같이 화면에서 사라졌어요. 그 차를 조
박민정은 전혀 여지를 주지 않았다.“그건 무슨 말이에요? 우린 이혼했으니 같은 집에서 살면 안 되는 거잖아요.”유남준은 고개를 숙여 박민정의 등의 양양한 표정을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박윤우를 불렀다.“윤우야.”박윤우는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유남준을 보며 물었다.“아빠, 왜요?”박민정은 순식간에 당황하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갈 곳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이렇게 유치하게 할 거예요?”유남준이 말했다.“윤우야, 아빠는 이제 갈게.”박윤우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빠, 우리랑 같이 살지 않을 거예요?”박민정은 유남준이 겁먹은 척 자기를 바라보는 모습이 어이가 없고 화가 났지만, 박윤우 때문에 목소리를 낮추었다.“정말 그렇게 유치하게 아이를 이용할 거예요?”유남준은 모르는 체하며 대답했다.“이용한다고 말하면 안 되지. 윤우는 내 아들이고, 지금 그 금쪽같은 아들이 한 가족이 화목하게 함께 살기를 바라는 거잖아.”그는 또 고개를 돌려 박윤우를 보며 말했다.“윤우야, 아빠도 윤우랑 같이 살고 싶어. 그런데...”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윤우의 눈빛이 변하는 모습을 보고 박민정이 말했다.“아빠도 우리와 같이 살고 싶지만 지금 서연 이모와 수아 이모 그리고 인하 이모까지 우리 집에서 살고 있어서 아빠가 갑자기 들어오면 모두 불편할 거야.”결국 유남준은 박민정의 이유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박윤우는 비록 박민정과 유남준이 함께 살기로 바랐지만, 세 명의 예쁜 여인들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포기했다.“아빠, 조금만 더 참아요.”그는 유남준 곁에 가서 속삭였다.순간 유남준은 마음이 따뜻해졌다.“그래, 알았어. 윤우만 믿고 있을게.”이 말은 박윤우에게 아주 효과가 있었다.“걱정하지 마세요.”유남준을 떠나보낸 후, 박윤우는 자기를 믿는다고 한 말에 더 책임감을 느꼈다.박민정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윤우야, 방금 아빠와 무슨 말을 한 거야?”“별거 아니에요. 아빠한테 엄마를 잘 돌봐달라고 했어요.”“그래.”박민정
박윤우의 말에 박민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윤우야, 모든 엄마와 아빠들의 표현 방식이 다 같은 건 아니란다.”옆에 있던 유남준이 갑자기 말을 이었다.“그래서 나에 대한 표현 방식은 내가 싫다는 거네? 손을 잡는 것도 싫을 만큼?”박민정이 당황해하며 대답했다.“그렇게 말한 적 없어요.”그녀의 말에 박윤우가 눈을 크게 뜨고 기대하는 표정으로 말했다.“엄마, 그럼 아빠를 안아주고 뽀뽀해요.”박민정은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윤우야...”“결국 나와 형은 온전한 가족을 수가 없네요. 우리 반 옥미의 엄마와 아빠도 처음에는 서로 안고 뽀뽀하는 것을 싫어하다가 나중에 이혼했고 또 서로 다른 사람을 찾아 아이도 낳았대요.”말을 마친 박윤우가 고개를 숙이자 눈물이 흘러내렸다.“엄마와 아빠도 이혼하고 지금 저를 속이는 거예요? 그리고 나중에 다른 동생들이 생기면 나와 예찬이 형은 신경도 안 쓸 거예요?”박윤우의 우는 모습은 유난히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박민정은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이 휴지를 꺼내 그의 눈물을 닦아주며 달랬다.“윤우야, 말도 안 되는 생각하지 마. 엄마와 아빠가 왜 너랑 예찬이를 모르는 체하겠어?”그러고는 유남준을 보며 물었다.“그렇죠?”유남준은 박민정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했다.“우리가 계속 이렇게 지내면 정말로 우리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우우우...”박윤우가 더욱 크게 울음을 터뜨리는 것을 보고 유남준이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윤우야, 걱정하지 마. 아빠는 절대 다른 여자와 결혼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엄마가 너를 원하지 않아도 아빠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박민정이 얼굴을 찡그리며 소리쳤다.유남준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내가 틀린 말 했어? 윤우와 예찬이는 너의 마음속에서 연지석 씨와 에리 씨가 나보다 더 중요하다는 걸 다 알고 있어.”이건 질투였다.박민정은 유남준이 시력을 회복한 후 제일 처음
박민정은 유남준이 주는 것을 덥석 받았다가 나중에 후회하기 싫었다.게다가 두 사람은 이미 남남인데 이런 귀중한 것을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유남준은 박민정이 이렇게 단호하게 거절할 줄 몰랐다.“정말 싫어?”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너무 커요.”“그럼 내가 예찬이와 윤우에게 주는 거라고 생각해. 얘들이 아직 어리고 양육권은 당신에게 있으니, 그들의 후견인으로 잠시 보관하는 거로 하면 되잖아.”박민정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그런 거라면 얘들이 큰 다음에 직접 주면 되잖아요.”차 안의 분위기가 더 살벌해졌다.앞 좌석에 앉아 있던 서다희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사모님, 제 생각에는 사모님이 지금 받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대표님께서 지금은 얘들에게 준다고 했지만, 나중에는 주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만약 대표님이 나중에 다른 분하고 결혼해서 아이가 생겨서 그 아이에게 주면 어떡해요. 그렇게 되면 예찬 도련님과 윤우 도련님에게는 너무 큰 손실이잖아요.”“...”유남준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박민정도 당황해하더니 마음속으로는 서다희의 말에 도리가 있는 것 같았다.‘맞아, 아빠가 애들에게 주겠다는데 거절할 필요 없잖아.’“좋아요. 그럼 예찬이와 윤우 대신해서 먼저 받을게요.”박민정은 서류를 받았다.그들이 서류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어느덧 차는 유치원에 도착했다. 박윤우는 워낙 귀엽고 잘생긴 데다가 얼마 전에 유씨 가문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본 학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박윤우와 같이 놀라고 했기 때문에 현재 인기가 대단했다.“윤우야, 오늘 너의 엄마 아빠가 같이 데리러 오는 거야?”한 아이가 묻자, 박윤우가 고개를 연거푸 끄덕였다.“응.”“엄마 아빠가 같이 데리러 온다니 부럽다.”박윤우는 기쁨을 감추지 않고 환하게 웃고 있다가 유남준의 차를 발견하고는 달려가지 않고 오히려 박민정에게 전화했다.“엄마, 아빠 손잡고 여기로 와주시면 안 될까요?”박민정은 아들이 왜 굳이 유남준의
이지원을 금방 보내고 난 박민정은 조하랑의 말에 깜짝 놀랐다.“뭐라고? 결혼? 누구랑 하는데?”“김인우 씨일 것 같아.”‘같아?’박민정은 순간 충격에 멍해졌다가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물었다.“하랑아, 너 인우 씨 할아버지 때문에 잠시 동의한 거지 절대 결혼은 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어?”“오늘 할아버지가 위독하셨는데 유일한 소원이 나와 김인우 씨가 결혼하는 것을 보고 싶다고 하셔서 할아버지를 실망하게 해드리고 싶지 않아 결혼하기로 했어.”조하랑이 설명했다. 그녀는 어차피 지금 당장 좋아하는 사람도 없었기에 누구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나중에 할아버지가 떠나가신 후에 두 사람이 안 맞으면 그때 다시 이혼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박민정은 조하랑의 대답에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하랑아, 결혼은 그렇게 간단한 거 아니야. 너의 의지가 중요한 거야. 절대 그 할아버지의 말에 흔들려서 억지로 하면 안 돼.”“괜찮아. 억지로 하는 거 아니야. 아빠 말씀처럼 김씨 가문에 시집가면 하루아침에 재벌이 되는 거잖아.”조하랑이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민정아, 걱정하지 마.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이득 보는 거잖아.”조하랑은 오래전에 사랑을 포기했다.과거에 그녀도 강연우와 깊은 사랑을 했었지만 결국은 강연우가 그녀를 배신하고 떠나버렸기 때문에 지금 그녀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결혼할 수 있었다. 어차피 김인우를 사랑하지 않기에 배신도 없을 것이고 따라서 슬프지 않을 것이다.“하랑아, 어찌 됐든 내 말은 네가 원하지 않은 건 절대 하지 마.”“알았어. 끊을게.”조하랑은 전화를 끊고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김인우와 마주쳤다.그녀만 보면 말을 비꼬아서 하던 김인우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할아버지는 절대 빨리 돌아가시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후회되면 지금 가서 얘기해요.”조하랑은 이미 결심을 굳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만약 인우 씨가 후회되면 언제든지 얘기해요. 인우 씨의 선택을
김인우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할아버지, 크게 기뻐하거나 슬퍼하면 안 된다고 했던 의사 말씀 잊으셨어요?”김인우가 입으로는 늙은이들이 귀찮다고 했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김훈을 엄청나게 생각했고 세상을 떠날까 봐 두려워했다.김훈은 손자의 성격이 유별나서 비록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가끔 사리 분별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내가 언제 또 그렇게 크게 기뻐했다고 그래? 기쁠 일이 어디에 있다고.”그는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아직 증손자도 안아보지 못했는데 나한테 기쁠 만한 일이 뭐가 있겠어.”김훈이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닦는 척했다.“예찬이가 오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평생 이런 기쁨을 느낄 수 없었을 거야.”김인우는 김훈의 연기가 너무 익숙했지만, 조하랑은 처음이었기에 서둘러 위로했다.“할아버지,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지금 우리가 옆에 있잖아요. 충분히 그런 기쁨을 느끼실 수 있어요.”김훈은 조하랑의 말을 듣고 말했다.“내가 아직 이루지 못한 일이 있는데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죽어서도 눈을 감을 수 없을 거야.”“무슨 일이에요? 말씀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면 꼭 이루어 드릴게요.”조하랑은 이것이 김훈의 속임수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김훈은 조하랑의 대답에 만족하며 말했다.“나 어제 남우가 결혼하는 모습을 보면서 너와 우리 인우가 생각이 났어. 너희들이 약혼식을 한지도 이제 반년이 지나갔는데 결혼은 언제 할 거야?”조하랑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김인우는 진작 김훈의 의도를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김훈은 계속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어차피 죽기 전에 너희들 결혼하는 모습을 볼 수 없을 바에 차라리 지금 일찍 죽는 게 나을 것 같구나.”그는 말하면서 몸에 있는 의료기기를 떼는 흉내까지 보였다. 그러자 단순한 조하랑이 곧바로 말렸다.“할아버지, 이러시면 안 돼요.”“하랑아, 네가 착한 아이인 걸 알아. 그래도 날 막지는 마. 이대로 죽게 내버려둬!”박예찬은 눈앞의 광경을 보고
김인우는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가 이지원의 말을 듣고 하품했다.“그래.”이지원은 김인우가 자기를 용서한 줄 알고 말했다.“이제 저 용서해 주는 거죠?”수화기 건너편에서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이지원 씨, 지금 나와 장난하는 거예요?”이지원이 온몸을 흠칫했다.“과거에 했던 짓을 생각해 봐. 그까짓 머리를 몇 번 조아렸다고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김인우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나의 기억이 맞는다면 과거에 나를 속여서 돈을 엄청나게 가져갔지? 지금 제호 클럽에서 수입은 어때?”“나... 나는 예솔이 그 나쁜 년에게 속아서 팔려 간 거예요. 돈을 벌 수 없어요.”이지원이 말을 더듬었다.“그럼 어떡하지? 빌려 간 돈은 갚아야 할 거잖아. 손님 없으면 내가 찾아줄 거니까 걱정하지 마. 그런데 혹시 한 번에 여러 명도 가능해?”김인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전화를 끊었다. 그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사람을 속이는 것인데 지금 그는 이지원이 당장 죽게 가만두고 싶었지만 그건 너무 쉬운 벌인 것 같았다.오늘 김훈은 상태가 악화하여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조하랑과 박예찬이 옆을 지키고 있었다.김훈은 조하랑의 손을 잡고 말했다.“하랑아, 인우를 불러줘.”“네, 알았어요.”조하랑은 대답하고 곧바로 김인우를 찾으러 갔는데 사무실 앞에서 김인우의 대화를 들었다.‘빌려 간 돈을 갚아야 한다고? 손님? 한 번에 몇 명을 접대해?’이상한 단어들을 들은 조하랑은 너무 당황했다. 도대체 김인우가 좋은 사람이 맞는지 궁금했고 또 김훈 속이고 많은 나쁜 일들을 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김훈의 상황을 생각하고는 용기를 내서 문을 두드렸다.“들어와요.”김인우가 아무 표정 없이 대답했다.조하랑은 문을 열었지만 들어가지 않고 말했다.“할아버지가 찾아요.”“할아버지가 깨어나셨어요?”김인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김훈의 상태가 갑자기 악화한 것은 바로 어제 유남우의 결혼식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었다.원래 남들의 일에 관
박민정이 일하고 있을 때 부하가 찾아와 보고했다.“손님이 찾아왔어요.”“누구예요?”박민정이 묻자, 부하가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요. 처음 보는 여자분인데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고 했어요. 지금 회의실에 있어요.”박민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알았어요.”진서연이 옆에서 문서를 프린트하고 있다고 박민정의 어릴 때 친구가 왔다는 말을 듣고 호기심에 그쪽을 쳐다보았다.박민정이 회의실로 가보니 안에는 이지원이었다.얼마 전에 조하랑에게서 이지원이 친한 친구 하예솔과 같이 나이트에 다닌다는 말을 들었는데 오늘 뭐 하러 왔는지 궁금했다.‘무슨 일이지?’이지원은 회의실 입구로부터 자기를 향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박민정과 눈을 마주쳤다.이지원은 곧바로 박민정의 배를 주의해 보았는데 불룩하게 나온 것이 쌍둥이어서 그런지 6개월이 넘는 것 같았다.“서연아, 경비 불러서 여기 이분을 밖으로 모시라고 해.”박민정이 자신을 쫓아내려 하자 이지원은 빠른 걸음으로 박민정 앞으로 가더니 모든 직원이 보는 앞에서 쿵 하고 무릎을 꿇었다.“민정 씨, 흥분하지 말고 우선 내 말부터 들어줘요. 나 오늘은 민정 씨에게 사과하려고 왔어요. 과거에 내가 민정 씨에게 많은 잘못을 했는데 미안해요.”말을 마친 이지원은 쿵쿵하고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주위의 동료들도 모두 호기심에 무의식적으로 그녀들이 있는 쪽으로 바라보았다.이지원은 창백해 보이게 메이크업했고 옷도 아주 얇게 입어서 유난히 비참해 보였다.그녀는 살기 위해 자기를 학대할 정도로 힘 있게 머리를 조아려서 이마가 까졌다.진서연은 즉시 박민정 옆으로 다가가서 의아한 표정으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았다.“당신은 누구예요?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까지 사과하는 거예요?”역시 박민정이 키운 비서답게 그녀는 핵심을 짚었다.비록 박민정과 이지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지만, 사과하는 방식이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이렇게 많은 동료들이 보는 앞에서 무슨 짓이지? 사과하겠다는 거
유석진도 회사에 나왔는데 유성혁의 사무실의 발코니에서 밖의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그때 최현아가 다가와서 말했다.“아버님, 성혁 씨 찾았어요.”유석진이 돌아서며 물었다.“성혁이 지금 어디에 있어?”최현아는 대답하지 않고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녹음을 틀었다.녹음에는 유성혁이 눈물 콧물에 애걸하는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유석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이건 어떻게 된 거야?”“오늘 아침에 일어나보니 메일이 와 있었는데 누가 보냈는지는 몰라요.”최현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버님, 성혁 씨 아무 일 없겠죠?”비록 유성혁이 자기를 배신했지만 필경 애 아빠이고 오랜 부부 사이였기에 유성혁에게 일이 생기자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유석진은 주먹을 꼭 쥐고 최현아를 다독였다.“대체 누구야? 누가 감히 이런 짓을 하는 거야? 현아야, 걱정하지 마. 우리 유씨 가문과 심씨 가문이 나서면 반드시 성혁이를 찾아낼 수 있을 거야.”최현아는 혼란스러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그녀가 유석진의 사무실에서 나오는 순간 의기양양하게 출근하는 박민정을 보더니 질투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박민정의 앞을 가로막았다.“동서, 설마 남준 도련님이 별일 없을 거라는 걸 진작에 알고 있었던 거야?”박민정은 최현의 질문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그렇다면 왜요?”“동서, 정말 무서운 사람이구나. 그런데 아무리 남준 도련님이 별일 없다고 해도 호산 그룹은 이제 도련님이 어떻게 할 수 없어.”최현아가 말했다.박민정은 최현아의 반응이 조금 웃긴다고 생각하며 말했다.“그래요. 상관없어요. 어차피 저는 그런데 신경 쓰지 않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곧바로 최현아를 지나갔다.최현아는 박민정의 태도에 이를 악물었는데 호산 그룹을 나갈 때까지 그녀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그때 한 그림자가 그의 시선을 끌었는데 멀지 않은 나무 아래에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이지원이 몸을 사리며 움츠리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최현아는 조금 전의 표정을 지우고 이지원을 향해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