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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Author: 윤지
이지원은 인터뷰를 마친 후 한수민을 찾아갔다.

그리고 한수민과 박민정 동생이 600억을 위해 박민정을 늙은이에게 시집 보내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남준이 대답이 없자 이지원은 말을 얹었다.

“민정 씨 어머니 말로는 민정 씨가 먼저 600억을 요구했다더라고요. 그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그리고 아직 두 분 숙려기간이 끝나지 않아서 정식으로 결혼하는 대신 식만 올리기로 했다고요.”

...

박민정은 엄마와 동생이 자기 의견은 모조리 무시한 채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신혼을 준비 중인 건 꿈에도 몰랐다.

한수민은 그녀가 절대 죽을 용기도 없고 절대 죽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많은 괴롭힘을 당했지만 떠나기를 선택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같을 것으로 생각했다.

동생인 박민호는 진즉에 그 600억을 받아서 새로운 회사를 준비 중이었다. 그는 박민정에게 단 조금의 죄책감도 없었다.

그리고 이날, 박민정은 한수민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최 사장님이 좋은 날짜 받아오셨어. 이번 달 15일이야. 나흘 동안 잘 준비해서 시집 가면 돼. 이번에는 꼭 이 남자의 마음을 잡아야 한다. 알았지?”

박민정은 이 두 메시지를 보면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15일. 기쁘고 즐거워야 할 날이었다. 그녀가 유남준과 이혼을 약속한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가 떠나려는 날이기도 했다. 박민정은 자신이 또 잊을까 봐 이날을 노트에 기록해 뒀다.

그리고 그녀는 친필로 유서를 써 내렸다.

필을 들었지만 뭘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에 그녀는 윤정숙과 연지석에게 말을 남겼다.

다 쓴 뒤 그녀는 유서를 자신의 베개 밑에 넣어뒀다.

사흘 뒤.

14일에는 비가 크게 내렸다.

핸드폰을 테이블에 올려놨는데 온종일 벨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모두 한수민이 걸어온 전화였고 그녀가 어디 있는지 묻는 것이었다.

내일이면 결혼식이니 그녀더러 집에 들러 최 사장에게 시집갈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박민정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 새로 맞춘 붉은 드레스를 입고 예쁘게 화장도 했다.

사실 그녀의 본판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저 너무 마르고 너무 창백할 따름이었다.

박민정은 거울 속의 한껏 꾸민 자신을 보았다. 유남준에게 시집가던 때 같기도 했다.

택시를 타고 묘지로 향했다.

그녀는 우산을 들고 차에서 내려 아빠의 묘지로 걸어가 흰 국화를 내려놓았다.

“아빠.”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들리는 건 우산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밖에 없었다.

“죄송해요... 여기 올 생각은 아니었는데 도저히 갈 데가 없었어요. 인정해요. 저는 겁쟁이예요. 혼자 외롭게 떠나기 싫어서 아빠가 있는 여기에 온 거예요. 혼내려면 혼내요.”

박민정은 낮은 목소리로 말한 뒤 묘지 옆에 앉아서 자기 자신을 끌어안았다.

그녀가 핸드폰을 켜자, 한수민의 악독한 말이 하나하나 전해졌다.

「박민정! 네가 숨는다고 숨을 수 있을 것 같아?」

「네 동생이 이미 돈도 다 받았다고. 최 사장님도 목이 빠지게 너를 기다리는데 우리가 너를 놓아줄 것 같아?」

「똑바로 생각해. 내일 네 발로 걸어 시집갈지, 다른 사람들한테 묶여서 시집갈지.」

「이건 네 임무야.」

조용히 모든 메시지를 읽어내렸다.

박민정은 대답할 말을 써 내려갔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내일, 교외로 데리러 오세요. 아빠 묘비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한수민은 박민정의 대답을 듣고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운명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하고 더는 전화를 치지 않았다.

박민정은 그제야 순간의 안녕을 만끽했다.

그녀가 그곳에 조금 앉아 있는 게 온종일이 되었다.

밤의 장막이 드리우기 전 그는 아빠가 어릴 적에 직접 조각해 준 나무 인형을 꺼내 품에 안았다. 온몸으로 밤의 어둠과 내리는 빗방울을 막았다.

시간은 일분일초가 흘러갔고 열두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15일의 하루가 다가왔다.

박민정은 고개를 들어 끝도 없는 검은 밤하늘을 바라보았고 목구멍에는 울음이 차올랐다.

새벽 3시.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가방에서 약을 꺼냈다.

그 시각. 두원 별장.

유남준은 돌아온 후 전등도 켜지 않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피곤한 그는 태양혈을 누르면서 쪽잠을 자다가 화들짝 깨났다.

이상했다!

그는 또 악몽을 꿨는데 그 꿈은 박민정에 관한 것이었다.

유남준은 박민정이 죽는 걸 꿈으로 봤고 너무나도 리얼했다.

핸드폰을 꺼내 보니 새벽 4시였다.

유남준은 오늘이 숙려기간이 끝나는 날이라는 게 생각났고 이혼 수속을 밟기로 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 박민정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잊지 마. 오늘 이혼 수속해야 해.」

박민정은 메시지를 받고 의식이 흐릿했지만 겨우 유남준에게 답장했다.

「미안해요. 못 갈 것 같아요. 하지만 걱정 마요. 우리는 꼭 헤여질테니까...」

그녀가 죽으면 혼인은 당연히 없던 게 된다.

유남준은 박민정의 메시지를 받고 마음속으로 저도 모르게 안심이 됐다.

그도 박민정이 절대 죽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유남준은 박민정이 죽는 것에도, 자신과의 이혼에도 미련이 가득할 것으로 생각했다.

유남준은 전화를 걸었다.

지난 몇 년.

박민정은 유남준의 전화를 몇 번 받아보지 못했다.

그는 늘 말을 간략하게 했고 대부분 메시지로 말을 보내서 전화를 건 적이 거의 없었다.

박민정이 통화 연결을 누르고 아직 입도 떼지 않았는데 유남준의 차가운 말이 들렸다.

“박민정, 참는 것도 한계가 있어. 애초에 네가 하자고 한 이혼이잖아? 이제 와서 후회하는 이유가 혹시 내가 너한테 돈 안 주지 않아서야? 그래, 새 사람 찾아서 결혼해! 600억이면 충분하잖아?!”

박민정은 목이 막혔다.

그녀는 순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마지막에 다다르자, 그녀는 인정하기 싫었던 사실을 남은 힘을 짜내서 말해냈다.

“남준 씨... 당신한테 시집간 건... 처음부터 돈 때문이 아녔어요! 이혼하려는 것도... 돈 때문이 아니고요... 믿지 않겠지만, 그래도 말하고 싶어요... 엄마랑 동생이 계약을 어긴 건, 전 정말... 모르는 일이에요... 지금의 저도 그 600억을 위해서.... 아무나, 결혼하지 않을 거고...”

박민정은 숨을 겨우 쉬면서 말을 이었다. 유남준은 전화기 너머에서 바람이 불고 빗소리까지 들리는 걸 의식했다.

“지금 어디야?”

박민정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위태롭게 핸드폰을 부여잡고 몇 번이고 해명을 쏟아냈다.

“만약... 엄마랑 동생이 한 일을 알았다면, 전 절대... 절대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예요... 만약에 제가... 당신이 이지원을 좋아한 걸 알았다면...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예요... 만약에 아빠가 결혼식 당일 교통사고가 날 걸 알았다면...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예요.”

결혼 하지 않았을 거다.

유남준은 박민정의 말 속에서 그녀가 지난 몇 년에 대한 울분을 들어냈다.

그녀가 얼마나 이 결혼을 후회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의 목은 마치 솜으로 틀어막힌 것처럼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후회하는데? 그때 울면서 나랑 결혼하겠다는 건 너 아니었어?”

유남준의 저음의 목소리에 물기가 서렸다.

하지만 박민정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서 유남준은 거의 들을 수가 없었다.

“박민정! 너 지금 어디야?”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들리지 않았고 박민정의 마지막 한마디만 들렸다.

“사실... 당신이 행복하길 바랐어요.”

툭.
Comments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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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그냥 연지석이랑 이어지게 해주세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ㅜ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ㅜㅠㅠㅜ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솔직히 민정이 존나 까놓고 저 지랄 한다는게 맘에 안들어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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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춘화
새벽부터 계속 읽고있어요
goodnovel comment avatar
뛣쀆꿾
ㅠㅠ 안도ㅑ 죽지마아아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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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민정은 그제야 이지원이 떠나기 전에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다름 아닌 이간질이었다.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유남준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이혼은 우리 둘 사이의 문제인데 굳이 지원이랑 싸워야겠어? 지원이 지금 병원이야.”박민정은 흠칫 놀랐으나 순간 이 모든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알아챘다.그녀는 이지원이 이렇게 비열한 수단으로 자신을 모함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걸 유남준이 철석같이 믿고 있다니...“믿거나 말거나 전 지원 씨랑 딱 한번 만났고 아무 짓도 한 적 없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그 시각 병원.유남준의 표정은 잔뜩 어두웠고 이지원은 이마에 붕대를 감은 채 병상에 누워 있었다.그녀는 박민정과 만난 후, 스스로 머리를 부딪히는 고통을 불사하고 박민정을 모함했다.“대화를 나누고 싶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할 줄은...”이지원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진 뭉치를 꺼내 유남준에게 건넸다.이 사진들은 박민정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 사람을 시켜 찍은 것이다.“더 이상 숨겨주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오빠, 사진 보고 화내지 마요.”사진을 건네받은 유남준은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고 겹겹이 쌓인 사진 속에는 박민정과 연지석 두 사람뿐이었다.유남준은 썸에 가까운 사진 한 장을 보며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이지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이 사진들을 제가 먼저 발견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만약 사진들이 퍼졌다면 정말 큰일 날뻔했어요.”유남준은 마음이 착잡했다.병원에서 나온 그는 블랙 캐딜락에 앉아 사진에 필요한 돈을 이지원에게 보내라며 서다희에게 명령했다.“박민정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봐.”“알겠습니다.”서다희는 즉시 사람을 시켜 알아보았다....박민정은 밤새도록 악몽에 시달렸다.꿈속에서 유남준과 이지원은 결혼하여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또한 지난 몇 년간의 꿈도 꾸었다.유남준은 화가 나서 그녀를 버린 채 해외로 떠났고 아무리 찾으려 해도 만날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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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타이르는 게 아니라 ‘교육’이나 다름없었다.유남준의 가족부터 전담 비서 서다희, 심지어 저택의 가정부까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박민정을 교육할 수 있었다.그리고 그런 상황이 닥쳐오면 박민정은 웃으며 고마워해야 한다.하지만 이제 더 이상 이런 억울함을 겪고 싶지 않았다...박민정은 주먹을 불끈 쥐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서다희를 바라봤다.“그 사람이 화를 내든 말든 저랑 무슨 상관이죠? 별일 없으면 이만 가보세요.”서다희는 그녀의 싸늘한 눈빛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정신을 차렸을 땐 문이 굳게 닫혔다.서다희는 처음으로 문전박대를 당했다.지난 몇 년 동안 줄곧 차가운 태도로 무시를 하던 사람이 유남준이었는데 왜 이제는 반대가 된 거지?설마 이제 유남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걸까?...박민정은 서다희가 돌아가면 무조건 유남준에게 일러바칠 것을 알았다.그녀는 지친 채로 소파에 앉아 유남준의 질책을 기다리고 있었고 아니나 다를까 예상한 대로 서다희는 여기서 일어난 일에 대해 덧붙여 과장하며 말했다.강한 바람에 창문이 덜거덕거렸다.박민정은 초여름에도 불구하고 추운지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고 박민정은 한참이 지나서야 그걸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려고 했는데 솔직히 보지 않아도 누가 찾아왔는지 짐작 갔다.남자는 큰 키에 늘씬한 몸매가 더해지자 유난히 말라보였다.박민정은 고개를 들어 깊은 심연 같은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비서님이 얘기해줬어요?”유남준은 싸늘한 얼굴로 사진 뭉치를 박민정의 앞에 던졌다.“체면은 세워주려고 했어.”흠칫 놀란 박민정은 그대로 고개를 숙였고 바닥에는 그녀와 연지석이 찍힌 사진이 가득했으나 일부러 묘해 보이게 찍은 사진 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박민정이 설명하기도 전에 유남준이 말을 덧붙였다.“처음에는 모든 게 오해라고 생각했어. 처음에는 네가 아주 순수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다시 만날 마음도 있었다고...”처음에는?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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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508화

    박민정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좋아요, 신고해요. 경찰이 와서 모든 걸 조사하게 해요. 제가 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은 겁니다!”그녀는 나쁜 짓을 하기 않았기에 당당했다.윤소현은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려 했지만 고영란이 그녀를 막아섰다.“소현아, 분명 이건 오해가 있을 거야. 민정이가 그렇게 어린 아이를 해칠 리가 없잖니.”정수미도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우리 모두 한 가족인데 경찰까지 부르는 건 너무하지 않니?”그러나 윤소현은 눈가가 붉어진 채 항의했다.“엄마, 지금 제 딸이 이런 상태인데도 엄마는 저를 외면하시겠다는 거예요? 우리 아이 편을 들어주실 생각은 없으세요?”박민정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그만해요. 차라리 신고해요.”지금 상황에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방법은 경찰 조사를 통해서뿐이었다.윤소현은 사실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 없었다. 아이의 일은 박민정과 무관했으며 그녀 스스로 꾸며낸 일이었기 때문이다.“민정아, 흥분하지 마. 우리 가족 일이니 우리끼리 해결해.”정수미가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윤소현은 한 발 앞으로 다가서며 비꼬듯 말했다.“좋아요. 우리끼리 해결하죠.”“그럼 말해봐, 박민정. 내 딸이 이렇게 됐는데 넌 어떻게 책임질 거야?”“제가 한 일이 아닌데 왜 제가 책임져야 하죠?”박민정이 한 치의 주저도 없이 되묻자 윤소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지금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야? 우리 다혜는 늘 멀쩡했어. 그런데 네가 안은 뒤로 이렇게 됐다고!”박민정은 미간을 찌푸렸다.“이미 말했잖아요. 전 그런 적 없어요!”그녀는 어린 다혜가 이렇게 심한 상처를 입은 걸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그런데도 윤소현은 여전히 공격적이었다.“엄마, 보셨어요? 얘는 끝까지 오리발만 내밀잖아요!”정수미는 한숨을 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유다혜는 너무 어리고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누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때 고영란이 오늘 아이를 돌본 보모를 불러왔고 보모는 떨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507화

    박민정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망설일 필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유남준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박민정은 고영란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해 윤소현이 말한 병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아이는 보이지 않았고 윤소현이 병실에서 달려나오더니 곧장 박민정에게 달려들었다.모든 일이 너무 순식간에 벌어져 주위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박민정 역시 피할 겨를이 없었고 결국 윤소현의 손바닥이 그녀의 뺨에 세게 내려앉았다.뜨겁게 달아오르는 통증이 얼굴을 타고 번졌다. 그러나 윤소현은 멈추지 않았고 계속 박민정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박민정도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았고 그렇게 둘은 뒤엉켜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고영란은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 했지만 도저히 가로막을 수 없었다.“박민정, 네가 어떻게 다혜한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다혜는 이제 겨우 몇 달밖에 안 됐는데!”‘뭐?’박민정은 이해할 수 없었다.“뭔가 오해를 한 것 같아요. 전 당신 딸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우리 다혜 몸에 이렇게나 많은 상처가 났는데도 끝까지 모른 척하겠다고? 너 정말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윤소현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분노를 퍼부었고 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방어에만 집중했다.고영란이 아무리 소리쳐도 윤소현은 멈추지 않았다.“소현아!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당장 그만둬!”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고 윤소현은 그제야 멈췄다.박민정도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정수미가 황급히 달려와 박민정의 얼굴에 선명히 남은 손자국을 보고 안타까워했다.“민정아, 괜찮아?” 그녀가 걱정스레 물었다.하지만 윤소현은 불만을 터트렸다.“엄마, 똑같이 엄마 딸인데 우리가 싸웠으면 두 사람 다 챙겨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박민정만 신경 쓰는 거예요? 너무 편애하시는 거 아니에요?”정수미는 한숨을 내쉬며 윤소현을 돌아보았다.“무슨 일인지 제대로 설명해봐. 왜 둘이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506화

    박민정은 그 아기가 윤소현의 딸이라는 걸 전혀 알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다가갔다.“무슨 일이죠?”보모는 그녀를 보고도 별다른 경계 없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 오늘 하루 종일 울기만 하고 어떻게 달래도 소용이 없네요.”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따라온 보모에게 두 아들을 잘 돌보라고 지시한 뒤, 직접 아이를 안아 들어 달래기 시작했다.그러나 유다혜는 그녀의 품에서도 여전히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아마도 엄마가 된 경험 덕분인지 박민정은 아기를 돌보는 법을 잊었더라도 본능적으로 해야 할 일은 알 수 있었다.그녀는 먼저 보모에게 아이가 충분히 먹었는지 물었고 이어 아이의 기저귀를 확인하며 배탈이 났는지 살펴보았다.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도 아기가 계속 울자 박민정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아기를 병원에 데려가 보세요. 이렇게 계속 우는 건 뭔가 이상한 것 같아요.”보모도 동의했다.“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보모가 아기를 다시 받으려던 찰나, 멀리서 윤소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뭐 하는 거야? 누가 내 딸을 저 여자한테 맡기라고 했어?”윤소현은 높은 굽의 힐을 신은 채 빠르게 걸어와 박민정의 품에서 아이를 거칠게 빼앗아 갔다. 그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보모를 질책했다.“내 딸을 당신한테 맡겼더니 이렇게밖에 돌보지 못해? 내 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당신 책임인 줄 알아!”그녀는 이어 박민정을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너도 아이가 있잖아. 내 아이를 왜 안고 있었던 거야?”박민정은 그 아이가 윤소현의 딸임을 알았더라면 절대 안았을 리 없었다.보모는 난처한 표정으로 해명했다.“작은 사모님, 다혜가 계속 울어서 달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모님께서 잠깐 도와주셨던 것뿐이에요. 아무런 악의도 없었습니다.”“악의가 없었다고?”윤소현은 여전히 울고 있는 딸을 보며 냉소를 지었다.“그 말이 사실이길 바랄 뿐이야.”그러다 보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작은 사모님, 아이를 병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505화

    윤소현은 말을 마치자마자 선두에 있던 여하인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이어 한 하인을 거칠게 밀어내고 안으로 들어섰다.들어가자마자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박민정과 유남준 가족이 함께 웃으며 화목하게 있는 모습이었다.그 광경에 윤소현의 눈빛이 질투로 뒤덮였다. 그녀는 곧바로 고영란을 향해 차갑게 비아냥댔다.“어머니, 저랑 남우 씨가 비록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한 건 아니지만 저도 유씨 가문에서 떳떳하게 맞아들인 며느리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저를 모른 척하시겠다는 거예요?”고영란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윤소현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하지만 유남우 역시 큰 잘못을 저질렀고 이 모든 상황이 그녀에겐 큰 실수로 느껴졌다.“소현아, 내가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야. 어서 남우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렴. 여긴... 당분간 환영받지 못할 것 같구나.”윤소현은 이 말을 듣고도 뻔뻔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왜요? 제가 여기 있으면 어쩌시려고요? 혹시 당신 아들 유남우가 저지른 일들을 제가 다 까발릴까 봐 그러시는 건가요?”고영란도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윤소현이 마지막 퇴로조차 거부하자 냉소를 띠며 대꾸했다.“우리 아들이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한번 말해 보렴.”윤소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뭘 말하냐고요? 당신 아들이 자기 형의 여자를 탐냈다는 거. 이게 바로 당신들이 자랑하는 유씨 집안의 가풍인가요?”그 말이 떨어지자 방 안에 있던 하인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박민정은 옆에서 두 아이를 달래며 이 상황에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그러나 유남준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다들 뭘 보고 있어? 당장 저 여자를 끌어내!”윤소현은 유남준이 자신을 쫓아내려 하자 더 큰 소리로 외쳤다.“유남준 씨, 이 말을 듣기 싫은 거죠? 뭐, 당연하죠. 형의 여자를 뺏어갔다니, 저라도 그런 꼴은 못 참겠어요!”만약 그녀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유남준은 벌써 그녀에게 직접 손을 댔을 것이다.곧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504화

    박민정의 시선이 우연히 유남준과 마주쳤고 그 순간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유남준은 숨이 가빠지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입술이 닿기 직전 박민정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저기... 어젯밤 감사했어요.”박민정은 짧게 말한 뒤 유남준의 품에서 빠져나가려 했다.유남준의 품이 순식간에 비어지며 허전함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억지로 붙잡지 않았다.그도 조용히 일어났다.창밖에는 두껍게 쌓인 눈이 온 세상을 덮고 있었다.“기억나? 재작년 이맘때도 우리 여기 머물렀었잖아.” 유남준이 말을 꺼냈다.박민정은 그의 말을 들었지만 머릿속엔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두 사람은 먼저 읍내로 나가 식사를 한 뒤 어머니 같은 존재였던 은정숙을 찾아가 제사를 지냈다. 이후 차를 타고 진주시로 향했다.진주시는 여전히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길 위에는 삼삼오오 모여 눈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지나갔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민정은 잠시 멍해졌다.‘만약 내가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나도 지금쯤 저렇게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을까?’하지만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몇 개의 희미한 기억의 조각들뿐이었다.“잠시 후 우리 집, 본가로 갈 거야.” 유남준이 그녀를 바라보다 나지막이 말했다.박민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본가요?”“응, 우리 집.”유남준의 대답에 박민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마침 그녀도 그곳에서 두 아이를 보고 싶었다.유씨 가문의 저택에서 고영란은 요즘 완벽한 가정의 화목을 누리고 있었다.자식과 손자들이 곁에 머물렀고 두 아이는 날마다 그녀를 웃게 했다.박민정이 온다는 소식에 그녀는 하인들에게 특별히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도록 했다.차가 저택 입구에 도착하자 고영란은 직접 마중을 나왔다.“민정아, 어서 와서 앉아.”박민정의 기억 속 고영란은 어린 시절에만 머물러 있었다.그때의 고영란은 차갑고 냉담한 분위기를 풍기며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사람이었다.박민정은 어릴 적 그녀를 조금 두려워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503화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박민정과 유남준은 오늘 하루 동안 많은 곳을 둘러보며 꽤 많은 기억을 떠올렸다.저녁이 되어서야 둘은 시골의 집으로 돌아왔다.박민정은 약간의 후회를 드러냈다.“벌써 열 시가 넘었네요. 지금 진주시로 돌아가면 새벽이 되어야 도착하겠어요.”유남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그럼 오늘은 여기서 묵자. 밤늦게 운전하는 건 위험하니까. 게다가 돌아가면 다른 사람들을 깨울 수도 있잖아.”박민정은 타인의 사정을 가장 먼저 고려하는 성격이었기에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여기서 자는 걸로 할게요. 그런데 괜찮을까요?”“물론 괜찮지.”유남준은 내심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된 것이 몹시 반가웠다.박민정이 말한 건 두 개의 방이 있다는 뜻이었지만 유남준은 하나의 방을 생각했다. 그녀는 집 안을 둘러본 뒤 침실이 하나뿐임을 깨닫고 이렇게 말했다.“그럼 저는 거실 소파에서 잘게요.”여기는 박씨 가문의 본가와는 달랐다. 박씨 가문의 저택은 침실 안에도 넉넉한 공간이 있어 소파를 두는 게 가능했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유남준은 단 한 순간도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그럼 나도 소파에서 같이 잘게.”그의 대답에 박민정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그러지 말고 각자 따로 자요.”박민정은 비록 기억의 조각들을 조금씩 되찾고 있었지만 유남준과의 관계가 너무 빨리 진전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유남준은 억지로 그녀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혼자 침실에서 자게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여기는 외딴곳이라 네가 혼자 소파에서 자는 건 걱정돼. 침실 침대는 넓으니까 네가 불편하면 이불 하나로 우리 사이를 막아두면 되잖아. 어때?”그는 마치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박민정은 망설이면서도 밖에서 들려오는 거센 바람 소리에 마음이 흔들렸다.“...좋아요.”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남준은 곧바로 이불을 가져와 침대 가운데를 나누고 각각 이불을 하나씩 준비했다.유남준이 침대에 눕고 나서야 박민정도 몸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로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502화

    전날 밤 악몽 탓에 잠을 설친 박민정은 차 안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어느덧 차는 어느새 시골에 도착해 있었다.유남준은 그녀를 깨우지 않고 운전기사에게 차를 잠시 멈추게 했다.박민정은 깊이 잠들지 못했는지 몸을 비틀다가 그만 유남준의 품으로 넘어질 뻔했다.그는 재빨리 그녀를 받아 안았다.박민정은 흐릿한 의식 속에서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다가 자신이 그의 몸에 기대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당황스러워 얼굴이 붉어졌다.“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유남준은 고개를 저었다.“사과할 일은 아니야. 가자, 다 왔어.”벌써 도착한 걸까?박민정은 창밖을 보았는데 새하얀 눈 아래 작은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그곳은 어린 시절 그녀와 정숙 아줌마가 함께 살던 집, 그녀의 진짜 집이었다.어릴 적 기억의 단편들이 박민정의 머릿속에서 하나둘 떠올랐다.“맞아요, 여기가 바로 그 집이에요.”그녀는 유남준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가가 뜨거워졌다.“아줌마, 나 돌아왔어요.”박민정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이제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차가운 바람이 귀를 스치고 박민정은 눈 덮인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집으로 향했다.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녀는 문이 잠겨 있다는 것을 깨닫고 멈칫했고 그때 유남준이 다가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박민정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당신한테 여기 열쇠가 왜 있어요?”“예전에 네가 나한테 맡겼잖아. 우리 여기서 잠시 함께 살았었지.”“우리가 여기서 같이 살았다고요?”박민정은 이 말에 믿기지 않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명품 정장에 품격이 넘치는 태도를 지닌 그가 이렇게 낡은 집에서 자신과 함께 살았다는 사실이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유남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응. 예전에 네가 자꾸 삐져서 가출했잖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도 따라왔지.”그의 농담 섞인 말에 박민정은 어리둥절하면서도 놀랐다.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집 안을 둘러보았다. 테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501화

    박민정은 방을 옮기면 더 편히 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밤새 끊임없이 악몽에 시달렸다.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꿈, 정숙 아줌마의 죽음, 그리고 한수민의 죽음까지...꿈속의 모든 일들이 희미하고 불분명했지만 그 슬픔은 그녀의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아침에 눈을 뜨고 나니 꿈에서 겪은 구체적인 상황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 모든 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박민정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꿈을 되짚어보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떠오르는 게 없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했다.세수를 마치고 거실로 나온 박민정은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누나.”동생 박민호였다.박민호는 언제 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를 보자마자 환한 미소를 지었다.박민정은 그를 보고도 별다른 반가움을 느끼지 않았다. 지난 1년 동안 그녀는 박민호를 몇 번이나 마주쳤기 때문이었다.“응, 여긴 웬일이야?”박민정의 목소리는 차가웠다.유남우가 그녀를 속이고 있을 때, 박민호는 늘 유남우를 도와 거짓말을 꾸미는 데 일조했다.박민호도 그녀의 냉랭한 태도를 눈치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박민정 앞으로 다가왔다.“누나, 설마 나한테 화난 거야? 나도 남우 형한테 속았던 거라고!”박민정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속았다니, 무슨 말이야?”“남우 형이 그러더라고. 유 대표가 진심으로 누나를 대하지 않는다면서 오직 형만이 누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나도 예전에 유 대표가 누나에게 잘못했던 걸 생각하니 누나가 더 사랑받는 사람이랑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형 말을 믿었지.”박민호는 한 단어 한 단어 신중히 말했지만 박민정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그래? 알겠어. 그럼 이제 무슨 일로 온 건데?”박민호는 비로소 본론으로 들어갔다.“누나, 기억은 얼마나 돌아왔어? 뭐라도 생각난 거는?”박민정은 솔직히 말하지 않고 고개만 저었다.“아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그래? 괜찮아, 천천히 떠올리게 될 거야.”박민호는 옆에 있는 과일 바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500화

    비서는 정 대표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고 재빨리 나서서 말을 보탰다.“아가씨, 대표님께서 아가씨를 정말 많이 보고 싶어 하십니다. 한 번만이라도 시간을 내서 찾아뵐 수 있을까요?”“대표님께서 예전에 잘못하신 건 전부 아가씨의 정체를 모르셨기 때문이에요. 이제 모든 걸 아시고 정말 많이 후회하고 계십니다.”이 말을 듣자마자 박윤우가 재빨리 박민정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당신들은 다 나쁜 사람들이에요! 우리 엄마를 데려갈 생각하지 마요!”“윤우 군, 저희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대표님은 윤우 군 엄마의 친엄마세요. 절대 두 분을 해칠 분이 아니세요.” 비서는 간절히 설득했지만 박윤우는 냉소를 띠며 되받아쳤다.“그럼 예전에 우리 형이 죽을 뻔한 건 누가 그랬는데요? 엄마 얼굴이 이렇게 된 건 또 누구 탓인데요?”비서는 말문이 막혔고 ‘그건 전부 오해’ 라고 간신히 변명했다. 하지만 그녀가 말을 더 하기도 전에 정수미가 그녀를 제지했다.박윤우는 여전히 비웃는 얼굴로 말했다.“그럼 하나만 물어볼게요. 우리 엄마가 정 대표님 딸이 아니었다면 자기 잘못을 인정했을까요? 우리 엄마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냥 끝까지 괴롭혔겠죠?”“옳고 그름도 모르는 사람이 자기 딸만 감싸고 우리 엄마를 다치게 했어요. 이제 와서 용서를 구한다고요? 웃기지 마요!”박윤우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 정수미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새삼 절실히 깨달았다.“미안하다...”정수미는 고개를 숙이며 박민정에게 사과했다.“민정아, 엄마가 잘못했다. 엄마가 옳고 그름도 모르고 소현이만 감싸느라... 그래서 이렇게 됐어.”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고 목소리는 점점 떨려왔다. 하지만 박민정은 그녀의 이런 모습에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아이조차 아는 간단한 이치를 성인이자 회사 대표인 그녀가 몰랐다는 것이 더 의아했다. 그저 자기 편을 감싸기에 바빴던 사람일 뿐이었다.“정 대표님, 더 할 말이 없으시면 저희는 먼저 들어가겠습니다.”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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