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는 은정숙에게 남긴 것이었다.그가 열어보자 마지막 줄에 은정숙의 주소가 적혀있었다.연지석은 그대로 뛰쳐나갔다.여기서 교외까지 멀지 않았다. 기껏해서 차로 이십여 분 정도 되는 거리였다.하지만 연지석은 이상하게도 한없이 멀게 느껴졌다.그는 이해가 안 됐다. 자기 눈에 그렇게 찬란하게 반짝이던 사람이 왜 이런 길을 선택했는지.그 동시에 그와 같게 교외로 향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는데 한수민이었다.한수민은 600억을 위해 박민정을 데려다 결혼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교외 묘지.비가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박민정은 묘지에 쓰러져 있었다. 빗줄기는 사정없이 그녀의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의 드레스는 진작 흠뻑 젖었고 피골이 상접해서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았다.연지석은 비를 뚫고 박민정을 향해 달려갔다.“박민정!!”돌아오는 건 바람 소리와 빗소리밖에 없었다. 연지석은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그는 달려가 박민정을 안으며 그녀의 옆에 있는 빈 약병을 발견했다.연지석은 떨리는 손으로 박민정을 안아 올렸다.왜 이렇게 가벼울까.“박민정, 정신 차려! 절대 잠들면 안 돼!”말하면서 그는 산 밑으로 뛰여내려갔다....“사모님, 도착했습니다.”운전기사가 말했다.한수민은 창밖에서 낯선 남자가 뛰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의 품 안에 안긴 건... 박민정이였다.“박민정 이 년이!”그녀는 얼굴을 찌푸리고 우산을 들고 내렸다.오늘 한수민은 한복을 쫙 빼입었는데 빗물이 그의 치맛자락을 적셨다.한수민은 짜증 난다는 듯이 다가가서 박민정을 윽박질렀다.화를 내려는 찰나 그는 연지석 품속에 축 늘어진 박민정을 살폈다. 얼굴은 창백하고 눈은 감겨 있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박민정...”한수민이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는 찰나, 바람에 굴러온 약병을 발견했다.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약병을 주웠는데 약병에는 수면제라는 세글자가 크게 적혀있었다.그 순간, 한수민은 그날 박민정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만약 제가 이 목숨
“네.”박민호는 연지석에게 다가가서 박민정을 뺏으려 했다.하지만 손을 뻗자마자 연지석 때문에 그대로 땅에 고꾸라졌다.“퍽!”소리와 함께 박민호는 1미터 넘게 날아가서 심장을 움켜쥐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한수민은 상황을 보고 급하게 아들을 부축했다. 그리고 연지석을 노려보면서 말했다.“감히 내 아들한테 손을 대!”연지석은 여전히 박민정을 안고 있었다. 도화살 가득한 그 눈에는 차가움이 흘렀다.빗물은 그의 머리카락을 따라 방울방울 떨어졌다.그는 모자 앞에서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그는 귀신 같은 얼굴로 한 글자씩 뱉었다.“죽고 싶어요?”한수민과 박민호는 눈앞의 이 남자에게 놀라서 한순간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연지석은 박민정을 안고 떠나면서 한수민에게 당부하는 걸 잊지 않았다.“민정이 유서에 적혀 있더라고요. 녹음도 있고. 그 녹음에 그쪽이 더 이상 민정이랑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약속했다던데, 잊으셨어요?”박민정은 그 녹음이 법적인 효력이 없다는 건 알았고 그 녹음만으로 모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다는 것도 알았다.하지만 그녀는 한수민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한수민에게 체면은 아주 중요했다.만약 이 녹음이 공개되면 한수민은 자기 딸을 해쳤다는 꼬리표를 평생 달고 다녀야 했다.연지석의 협박에 한수민은 다친 박민호를 데리고 초라하게 떠날 수밖에 없었다.차에 앉아서 한수민은 연지석 품에 안긴, 생사를 알 수 없는 딸을 보며 손바닥을 세게 꼬집었다. “엄마가 모질다고 비난하지 말고 쓸데없는 너 자신을 탓하렴. 유남준 마음 하나 못 사로잡은 널. 지금 이건 전부 네가 초래한 거야.”그 순간 한수민은 엄청난 고통을 느꼈지만 빠르게 냉정해졌다.딸이 죽는 것보다 최 사장과의 거래가 더 중요한 일이었다.연지석은 박민정을 데리고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그리고 박민정이 수술방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았다.수술 중이라는 선명한 세 글자를 보면서 그는 단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수술이 한 시간가량 이어지다가 의
조용히 듣고 있던 유남준은 얼굴이 어두워졌지만, 반박은 하지 않았다.그리고 이런 그의 태도 때문에 그의 친구인 김인우도, 그의 엄마인 고영란도, 더불어 그의 비서인 서다희도, 심지어 집에서 도우미 일을 하는 사람들도 박민정을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김인우는 전화를 한 통 받고 급하게 떠났다.그가 떠난 뒤 유남준은 습관처럼 핸드폰을 꺼내 들었지만, 박민정으로부터 온 전화는 없었다.유남준이 전화를 걸자 여전히 차가운 기계음만 들렸다.“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되며 삐 소리 후 통화료가 부과됩니다.”유남준은 짜증이 나서 핸드폰을 옆에 버렸다.그는 몸을 일으켜 창가에 가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박민정이 새벽에 했던 말이 귀가를 맴돌았다. 그녀는 후회한다고 했다.유남준은 입안이 썼다. 크게 기침을 두 번 하자 등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빠, 담배 좀 적게 피워요. 몸에 안 좋아요.”유남준은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무의식적으로 박민정이 돌아온 줄 알았다.하지만 돌아보니 그 자리에 서 있는 건 단아하게 꾸민 이지원이었다.그는 눈에서 빛이 사라지면서 어색하게 물었다.“무슨 일로 왔어?”이지원은 그를 보는 눈빛이 제법 다정했다.“이모가 가보라고 하셔서요. 민정 씨가 그렇게 빠르게 다른 사람을 찾은 걸 알고 오빠보고 깊이 생각하지 말래요.”그녀의 입에서 말하는 이모는 유남준의 엄마였다.4년 전.유남준의 엄마와 김인우는 같은 차를 타고 적대하고 있던 회사로부터 암살 시도를 당했었다.유남준 엄마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렸고 그때 병원에 O형 피가 부족했는데 마침 박민정이 O형이었다.박민정은 김인우를 안정시키고 수혈하러 갔다.수혈한 후 박민정은 체력이 모자라서 그대로 쓰러졌다.그때 박씨 집안이 이지원의 투자자여서 이지원은 박민정과 사이가 꽤 좋았다. 그래서 박민정이 병원에 있는 걸 알고 가타부타 덧붙이지 않고 병원에 가서 박민정을 살폈고 그렇게 박민정이 사람을 구한 일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이 박민정이 입원한 틈
창밖으로 바람이 불었다. 박민정은 창백하고 연약한 손을 배에 올리고 눈빛이 멍해졌다.연지석이 그녀에게 알려주었다. 의사가 검사한 결과, 그녀가 임신이란다.이 타이밍에 아이가 생기다니...은정숙은 져버린 눈을 보며, 삶의 의지가 없어 보이는 박민정을 보면서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민정아.”박민정은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은정숙을 보았다.“아줌마.”은정숙은 눈이 붉어져서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민정아. 아줌마가 자식도 없고 쭉 너를 딸로 여겼어. 아줌마는 너 크게 성공하는 것도 안 바란다. 그저 몸 건강히 지내면 돼. 하나밖에 없는 딸이 죽으면! 엄마는 어떻게 살아가니?”박민정은 흠칫하고 은정숙이 과도를 드는 걸 보았다.“내가 너 열 살까지 키웠어. 열 살부터 너랑 같이 못 있어준 건 내 잘못이야. 지금 가서 너희 아버지한테 사죄할게...”은정숙은 말을 끝내기 무섭게 과도로 손목을 그으려 했다.박민정은 아연실색해서 없는 힘까지 짜내서 말렸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몸도 일으키지 못해서 목멘 소리로 말했다.“아줌마... 하지 마요...”하지만 은정숙은 멈추지 않았다.박민정은 그녀의 손목에서 붉은 피가 나는 걸 보면서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떨어져 내렸다.“멍청한 짓, 안 할게요. 아줌마, 그러지 마요...”박민정의 약속을 듣고서야 은정숙은 멈췄다.그녀의 눈은 잔뜩 충혈돼 있었다.“민정아. 낳아준 빚은 이미 갚았어. 우리 빚진 거 없어. 유남준한테도 빚진 거 없어! 지금부터 너는 너를 사랑하는 사람 위해서, 나를 위해서, 배 속에 아기를 위해서 잘살아 보자!”박민정은 결국 은정숙의 말을 듣기로 했다. 그녀와 아이를 위해 잘살아 보기로.지금부터 한수민은 그녀의 엄마가 아니었고, 그녀는 더 이상 남동생 같은 건 없다.그녀의 가족은 이제 은정숙과 배 속의 아이밖에 없다.은정숙은 사실 이런 방법으로 박민정의 결정을 협박해낼 생각은 없었다.그저 그녀를 살게 하고 싶었다!박민정은 자신의 부모를
여름의 두 번째 절기인 소만. 남방에서는 종종 폭우가 내렸다.퇴원한 후 며칠 동안 연지석은 자주 시간을 내서 박민정과 함께했다.약을 먹은 후유증으로 박민정의 몸 상태는 더 나빠졌다.하지만 그녀의 정신상태는 꽤 좋아졌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던데로부터 억지로라도 음식을 삼켰다.연지석과 함께 할 때 그녀는 단 한 번도 유남준을 언급하지 않았다.어떤 사람은 너무 아파서 입에 담는 것마저도 상처일 때가 있다.그리고 친구가 자신을 따라서 우울한 감정을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혼자 있을 때, 박민정은 유남준의 카톡 프로필 사진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이혼에 관한 일에 대해서 어떻게 입을 열지 몰랐다.그러던 어느 날.박민정은 밖에서 음식을 사고 돌아가는 길이었다.한 사람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이지원은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끼고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예쁜 드레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서 있었는데, 그 기세가 대단했다.“민정 씨. 민정 씨 어머니는 당신이 살아있는 거 알아요?”이지원의 눈썹이 둥글게 말렸다.박민정은 여기서 그녀를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둘은 조용한 카페를 찾아 창가 자리에 앉았다.커다란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렸다.이지원이 마스크를 벗자 오밀조밀한 얼굴이 드러났다.“안심하세요. 남준 오빠한테 듣기로는 박민호 씨가 최 사장님 돈 가지고 민정 씨 어머니 모시고 도망치고 있다더라고요. 그분들이 민정 씨 괴롭히는 일은 없을 거예요.”박민정은 이미 연지석을 통해 들었었다.한수민과 박민호가, 박민정이 제때 최 사장과 결혼하지 않아 보복이 두려워서 도망길에 올라서 당일에 해외로 도망쳤다고.그 누가 그토록 부유하던 박씨 집안이 고작 600억 때문에 패가망신할 거라 생각했겠는가?박민정은 조용히 다 듣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물었다.“할 말 있으세요?”이지원의 시선이 그녀의 배를 향했다. 임신한 게 아직 티가 나지 않았다.그녀는 손바닥 살을 세게 꼬집었다. 박민정을 당장 폭로하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말해봐요. 어떻게 해야 남준
박민정은 그제야 이지원이 떠나기 전에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다름 아닌 이간질이었다.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유남준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이혼은 우리 둘 사이의 문제인데 굳이 지원이랑 싸워야겠어? 지원이 지금 병원이야.”박민정은 흠칫 놀랐으나 순간 이 모든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알아챘다.그녀는 이지원이 이렇게 비열한 수단으로 자신을 모함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걸 유남준이 철석같이 믿고 있다니...“믿거나 말거나 전 지원 씨랑 딱 한번 만났고 아무 짓도 한 적 없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그 시각 병원.유남준의 표정은 잔뜩 어두웠고 이지원은 이마에 붕대를 감은 채 병상에 누워 있었다.그녀는 박민정과 만난 후, 스스로 머리를 부딪히는 고통을 불사하고 박민정을 모함했다.“대화를 나누고 싶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할 줄은...”이지원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진 뭉치를 꺼내 유남준에게 건넸다.이 사진들은 박민정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 사람을 시켜 찍은 것이다.“더 이상 숨겨주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오빠, 사진 보고 화내지 마요.”사진을 건네받은 유남준은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고 겹겹이 쌓인 사진 속에는 박민정과 연지석 두 사람뿐이었다.유남준은 썸에 가까운 사진 한 장을 보며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이지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이 사진들을 제가 먼저 발견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만약 사진들이 퍼졌다면 정말 큰일 날뻔했어요.”유남준은 마음이 착잡했다.병원에서 나온 그는 블랙 캐딜락에 앉아 사진에 필요한 돈을 이지원에게 보내라며 서다희에게 명령했다.“박민정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봐.”“알겠습니다.”서다희는 즉시 사람을 시켜 알아보았다....박민정은 밤새도록 악몽에 시달렸다.꿈속에서 유남준과 이지원은 결혼하여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또한 지난 몇 년간의 꿈도 꾸었다.유남준은 화가 나서 그녀를 버린 채 해외로 떠났고 아무리 찾으려 해도 만날 수가
이건 타이르는 게 아니라 ‘교육’이나 다름없었다.유남준의 가족부터 전담 비서 서다희, 심지어 저택의 가정부까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박민정을 교육할 수 있었다.그리고 그런 상황이 닥쳐오면 박민정은 웃으며 고마워해야 한다.하지만 이제 더 이상 이런 억울함을 겪고 싶지 않았다...박민정은 주먹을 불끈 쥐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서다희를 바라봤다.“그 사람이 화를 내든 말든 저랑 무슨 상관이죠? 별일 없으면 이만 가보세요.”서다희는 그녀의 싸늘한 눈빛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정신을 차렸을 땐 문이 굳게 닫혔다.서다희는 처음으로 문전박대를 당했다.지난 몇 년 동안 줄곧 차가운 태도로 무시를 하던 사람이 유남준이었는데 왜 이제는 반대가 된 거지?설마 이제 유남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걸까?...박민정은 서다희가 돌아가면 무조건 유남준에게 일러바칠 것을 알았다.그녀는 지친 채로 소파에 앉아 유남준의 질책을 기다리고 있었고 아니나 다를까 예상한 대로 서다희는 여기서 일어난 일에 대해 덧붙여 과장하며 말했다.강한 바람에 창문이 덜거덕거렸다.박민정은 초여름에도 불구하고 추운지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고 박민정은 한참이 지나서야 그걸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려고 했는데 솔직히 보지 않아도 누가 찾아왔는지 짐작 갔다.남자는 큰 키에 늘씬한 몸매가 더해지자 유난히 말라보였다.박민정은 고개를 들어 깊은 심연 같은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비서님이 얘기해줬어요?”유남준은 싸늘한 얼굴로 사진 뭉치를 박민정의 앞에 던졌다.“체면은 세워주려고 했어.”흠칫 놀란 박민정은 그대로 고개를 숙였고 바닥에는 그녀와 연지석이 찍힌 사진이 가득했으나 일부러 묘해 보이게 찍은 사진 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박민정이 설명하기도 전에 유남준이 말을 덧붙였다.“처음에는 모든 게 오해라고 생각했어. 처음에는 네가 아주 순수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다시 만날 마음도 있었다고...”처음에는? 처
박민정은 무서워하며 조심스럽게 아랫배를 쓰다듬었고 불안감은 한참이 지나서야 잠잠해졌다.“박민정, 나 화나게 하지 마.”유남준은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그의 말이 어렴풋이 들렸던 박민정은 두 눈에 초점을 잃은 채 멍하니 있었다.“내 몸에 영원히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죠?”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탓에 유남준은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이런 짓 하는 거 당신 애인도 알아요? 알게 되면 무조건 화낼 텐데.”예전의 유남준은 차갑긴 해도 배려 깊은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배려조차 없는 무자비한 사람으로 변했다.애인...유남준은 그녀가 가리키는 사람이 이지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네가 연지석이랑 같이 있을 땐 이런 생각 안 해봤어?”마음마저 완전히 짓밟혔다.유남준은 여자 때문에 자신이 속앓이하는 걸 용납하지 못했고 그게 박민정이라면 더더욱 싫었다.그는 조롱하며 입을 열었고 어느새 옷까지 챙겨입었다.“너처럼 뼈만 앙상하게 남은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가 있을 줄은 몰랐네.”박민정은 귀에 이명이 들리고 몸 아래에서 뭔가 흘러나오는 느낌이 들었다...유남준이 떠나기 전 그녀는 마지막으로 한마디 물었다.“남준 씨, 제가 죽으면 슬퍼할 건가요?”죽다니?유남준은 그녀의 질문이 우스운지 대놓고 무시한 후 자기 할 말만 했다.“내일 두원으로 옮겨.”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그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박민정이 사는 집 아래에서 구급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다음날 병원.박민정은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고 연지석이 그녀를 돌보고 있었다.어젯밤, 제때 병원으로 이송된 덕분에 아이는 지킬 수 있었지만 이 일을 통해 그녀는 유남준을 떠나기로 결심했다.띵동.문자 알림음에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해외로 도피한 한수민이 보내온 것이다.「민정아! 살아있다면 최 사장님쪽에 얘기 좀 잘해줘. 나랑 민호 평생 너한테 고마워하며 살게.」박민정은 답장하지 않고 곧바로 메시지를 삭제했다.그녀는 자신이 살아있는 한
방성원도 방은정의 작은 손을 꼭 잡아주고 나서야 그녀는 안심하고 다시 잠에 들었다.그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설인하는 왠지 모르게 씁쓸한 감정이 몰려왔다.그러다가 문득 이혼도 먼저 제안하고 거기에 아이 양육권까지 달라고 한 자신이 너무 이기적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아이도 아빠를 너무 잘 따랐고 방성원도 아이를 많이 예뻐했다.이때, 차가 갑자기 급정거하게 되었는데 설인하가 채 반응도 하기 전에 방성원은 그녀와 방은정을 자기 품에 꼭 안았다.그리고 살벌한 얼굴로 운전 기사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에요?”“대표님, 죄송합니다. 갑자기 앞에 차가 급정거하는 바람에...”연신 사과하는 운전기사를 보고 방성원이 다시 차분하게 답했다.“천천히 몰아요.”“네.”이 시각 설인하는 여전히 딸과 함께 방성원의 품에 안겨 있었는데 또다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그러다가 문득 그의 두 눈과 마주하게 되었고 두 사람은 한동안 그 상태로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이때, 방은정이 방성원의 옷자락을 잡고 그를 불렀다.“아빠...”방성원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면서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그 뒤로 차는 도로 위를 아주 천천히 달리게 되었는데 이상하게 설인하는 아까부터 심장이 계속 두근거려 창밖을 바라보면서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집에 도착하자마자 방성원은 방은정을 안은 채 앞에서 걸었고 설인하는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도우미는 세 사람이 같이 돌아온 모습을 보고 살짝 긴장한 얼굴로 다가와 물었다.“은정이는 괜찮나요?” “그저 보통 감기래요.”방성원은 아이를 그녀에게 넘기며 말했다.“너무 다행이네요.”여태껏 도우미가 방은정을 계속 돌보고 있었는데 이렇게 예쁜 아이가 아프다고 하니 자신도 걱정되었다.그렇게 도우미는 방은정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이때, 방성원은 한창 출근 준비 중인 설인하를 불러세웠다. “얘기 좀 해.”“뭐?”두 사람은 나란히 집을 나섰고 방성원이 대뜸 그녀에게 물었다.“정말 나랑 이혼하고 싶어?”
“괜찮아. 할아버지께서 건강검진 받으셨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했대.”조하랑도 병원 의사한테서 들은 얘기였지만 김훈이 미리 시켰단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박예찬은 당장에라도 조하랑에게 모든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게 너무 답답해서 그저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저는 그래도 이모가 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순간 조하랑은 깜짝 놀라 단번에 박예찬의 입을 막았다.“예찬아, 이 일은 이모랑도 약속했지? 절대로 할아버지랑 인우 삼촌한테 말하면 안 돼. 알겠지?”그러자 박예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말하려면 진작에 말했어요.”‘하긴.’조하랑은 이미 어른이랑 별다를 게 없는 박예찬이 너무 든든했다.“그러면 다행이고. 어른들의 일은 어른이 해결할 테니까 넌 빨리 학교 가.” 박예찬은 자신의 설득에도 조하랑이 고집을 부리니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다른 한편, 김인우는 그제야 박민정의 난청 수술에 관한 일이 떠올라 수술 시간을 확인차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자 박민정은 서주에 갔다 와서 다시 수술 날짜를 잡겠다고 말했다.순간 오늘 갑자기 서주로 가겠다던 조하랑이 떠올랐는데 사실 지금 그녀가 하는 업무는 온라인 마케팅 부분이라 굳이 출장 갈 필요가 없었다.설령 필요하다고 해도 이렇게나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아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요 며칠 하랑 씨가 뭐 하고 다니는지 잘 지켜봐 봐.”김인우는 모든 일을 안배한 뒤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그러나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방성원, 설인하 부부와 딸 방은정의 모습이 보였다.“성원아, 병원엔 웬일이야?”“아기가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아서 검사하러 왔어.”“그래.”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더 얘기를 나눈 뒤 헤어졌다.그러다가 김인우는 다시 뒤돌아 방성원네 세 식구의 모습을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은 언제쯤 아이가 있을지, 언제쯤 조하랑과 아이와
“왜요? 혹시 아이 갖고 싶어요?”저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데 과연 조하랑이 뭐라고 할 수 있을까?순간 짜증이 밀려온 조하랑은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저도 싫어요. 애초에 아기를 잘 돌보는 타입도 아니라서 그냥 말해본 거예요.”그녀는 말하면서도 이불자락을 꽉 쥐었다.동시에 김인우도 그녀의 대답에 적잖이 실망감을 느꼈다.여태껏 조하랑이 박예찬과 잘 놀아주는 모습만 봐서 당연히 그녀가 아이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솔직한 마음을 속인 채 불편한 상태로 자야 했다.그러나 조하랑은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고 내일은 무조건 할아버지한테 외지로 떠나겠다고 말할 셈이었다.이튿날 아침.두 사람은 모두 일찍 일어났는데 그중 김인우는 확실히 어제보다 안색이 좋아졌다.“깼어요? 언제 시간 있을 때 우리 또 훠궈 먹으러 가요.”김인우는 이제부터 그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 했지만 조하랑은 왠지 그러기 싫어졌다.“아마 내년까지 기다려야겠네요.”식탁 옆에 앉아 있던 김훈이 그녀의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하랑아, 왜 내년까지 기다려?”“할아버지, 마침 말씀드리려던 참이었는데요. 저 서주시에 가서 일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략 1년 반 정도 뒤에 다시 돌아올게요.”조하랑의 말에 김훈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왜 갑자기 그리 멀리 가는데?”이때 조하랑은 박예찬에게 눈빛을 보내며 자신을 도와 몇 마디라도 해주길 바랐다.그러나 지금 박예찬의 머릿속은 온통 김훈의 건강 때문에 누구를 도와줄 처지가 아닌 것 같아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밥만 먹었다.“할아버지, 저는 아직 나이도 어리고 여러 곳에서 많이 도전해 보고 싶어요. 그러니까 부디 허락해 주세요.”조하랑은 활짝 웃으며 그에게 애교를 부렸다.그녀가 김씨 가문으로 시집오고부터 김훈은 조하랑이 원하는 건 모두 들어줬고 단 한 번도 안 된다고 거절한 적이 없었다.그러나 문득 자기 건강을 생각해 보니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그래. 그럼 인우랑
김인우는 살짝 어리둥절했다.집에 있을 때도 매번 셰프에게 평범한 집밥 요리만 주문했던 그녀였기 때문이다.그러자 조하랑이 매운 닭발 하나를 들고 그에게 말했다.“저는 기분이 다운되거나 우울한 일이 있으면 무조건 매운 음식을 먹어줘야 해요.”“먹으면 좀 나아져요?”“당연하죠. 입 안이 얼얼해지면서 온몸이 개운해지거든요. 믿지 못하겠으면 오늘 한번 도전해 보시든지.”말을 마치자마자 조하랑은 그의 접시에 고기 한 점을 덜어줬다.김인우는 거절하는 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젓가락으로 집어서 입에 넣었는데 순간 너무 뜨겁고 매워 허겁지겁 물로 입을 헹궜다.“너무 매운데요? 이런 음식은 건강에도 안 좋을 것 같은데 적게 먹는 게 좋겠어요.”그러자 조하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저도 아는데 가끔 먹는 건 상관없어요.”그녀는 지금 임신 중이라 매일 집에서 해주는 요리를 거의 못 먹는 상황이었는데 오늘 훠궈를 보자마자 갑자기 집 나갔던 입맛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자, 여기 더 먹어요. 이것도 먹다 보면 습관 되거든요.”김인우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먹기 시작했다.조하랑의 말대로 처음에는 살짝 받아들이기 힘들었는데 먹다 보니 너무 매운 것도 아니었다.그러나 확실히 덥긴 더웠는지 두 사람은 땀도 많이 흘리고 물도 엄청나게 마셨다.어느새 배가 부른 조하랑은 만족스러운 듯 자기 배를 통통 두드렸고 김인우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확실히 이 방법이 효과가 있는 것 같네요.”“당연하죠. 저는 매번 이렇게 스트레스 풀거든요.”말하면서 활짝 웃는 조하랑의 모습을 김인우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이 빤히 바라보았다.어느새 그의 뜨거운 시선을 느낀 조하랑은 뚝딱거리며 그에게 물었다.“왜 그렇게 봐요?”김인우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 몇 번 하더니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너무 배불러서 잠깐 멍때린 거지 일부러 본 거 아니에요.”“아, 네네.”조하랑은 그의 대답에 별생각 없이 또 우유 한 잔을 들이켰다.사실 지금 상태로는 가능한 매운
이 시각, 조하랑은 무작정 핸들은 잡았는데 어디로 가면 좋을지 몰랐다.김인우도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 없는 것 같아 그저 도로를 따라 앞으로 계속 직진했다.평소 재잘거리기 좋아하던 김인우는 오늘 유난히 조용했고 그저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조하랑은 가는 도중에도 사실 몇 번이고 그를 위로해 보고 싶었지만 끝내 내뱉지 못하고 말을 다시 삼켰다.딱히 위로할 줄 아는 사람도 아니었기에 김인우가 스스로 이 우울함을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앞으로 조금만 가다가 오른쪽으로 가요.”이때, 김인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네.”그리고 그의 말대로 옆 골목으로 빠지니 어느새 인적이 없는 작은 길이 나왔다.얼마쯤 더 가보니 조하랑은 산 중턱에 있는 묘원을 발견했다.“여기서 세워줘요.”“네.”차가 멈추자마자 김인우가 먼저 내렸고 조하랑은 빠르게 그의 옆으로 다가가 물었다.“여긴 어디예요?”“김씨 가문의 묘지에요.”조하랑은 말없이 그를 따라갔다.그렇게 수많은 묘비를 지나 김인우는 어느 부부의 합장 묘비 앞에 멈춰 섰다.조하랑은 묘비에 걸려있는 왼쪽과 오른쪽 두 장의 흑백 영정사진을 번갈아 보다가 그제야 두 부부의 모습이 김인우와 많이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외모상으로 봤을 때는 겨우 20~30대밖에 안 돼보이는데 생각해 보면 너무 일찍 고인이 된 것 같았다.김인우는 묘비 위의 부모님 사진을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그들을 불렀다.“아빠, 엄마.”조하랑은 가만히 서 있다가 앞으로 한 발짝 내딛으며 인사를 건넸다.“아버님, 어머님, 제 이름은 조하랑이고 인우 씨 아내입니다.”두 사람은 결혼한 후에도 김씨 가문의 묘원에는 와본 적이 없었다.김훈은 그녀가 사람이 많은 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에 추석이나 설 때에도 될수록 친정집에서 가족들과 명절을 쇨 수 있게 배려해 줬다.김인우는 뜬금없는 조하랑의 행동에 어리둥절해서 그녀에게 되물었다.“왜 갑자기...”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하랑이 먼저 말했다.“뭐가
김훈은 박예찬이 일찍 철이 들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생각이 깊은 아이일 줄은 몰랐다.“할아버지가 사실대로 말해주면 절대로 하랑 이모랑 우리 인우한테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알겠지?”박예찬은 머뭇거리다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네.”김훈은 그제야 오늘 병원에서 들은 결과를 말해줬는데 지금 상황이 매우 안 좋다고 했다. 계속 시도 때도 없이 심장이 두근거려서 검사해 보니 심장병이 맞았고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고 했다.그러나 김훈은 여태껏 사람들 앞에서 줄곧 꾀병을 부리는 듯한 행동을 보여줬다.“증조할아버지, 그런데 왜 하랑 이모랑 은우 삼촌한테 비밀로 하나요?”박예찬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김인우가 자기 앞에서 김훈이 얼마나 고집불통인지 불만을 토로하던 모습이 떠올랐다.만약 자기 할아버지가 진짜로 병에 걸렸다는 걸 알면 그런 소리도 못 할 텐데 말이다.그리고 조하랑도 마찬가지다.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김훈에게 알려주면 엄청 기뻐할 텐데 애석하게도 그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바보야, 사람이 늙으면 죽는 게 자연스러운 거야. 그걸 뭣 하러 말해? 말해봤자 괜히 걱정만 시키겠지. 남은 사람이라도 즐겁게 살아야 하지 않겠어?”박예찬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렸다.그러자 김훈이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말했다.“예찬아, 방금 한 약속은 꼭 지켜야 해. 절대로 두 사람에게 말하면 안 된다. 아니면 이 할아버지가 진짜로 화낼 거야.”“네.”박예찬은 자꾸만 목이 메어와 겨우 답했다....다른 한편.조하랑은 김훈의 부탁대로 김인우의 방문 앞까지는 왔지만 뭐라고 문을 두드려야 할지 막막했다.바로 이때, 방문이 갑자기 열리면서 김인우는 또다시 자기 눈앞에 서 있는 조하랑과 마주하게 되었다.“왜요? 또 무슨 일 있어요?”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가 다시 끄덕였다.“네, 아, 아니요.”혼란스러운 그녀의 대답에 김인우가 미간을 찌푸리고 되물었다.“맞다는 거예요, 아니라는 거예요?”“그, 그게 혹시 지금 어디로 가요?
“하랑아, 할아버지가 잊어버리고 너한테 말해주지 않았는데 오늘이 인우 부모님 기일이야.”김훈의 말에 조하랑은 그제야 김인우가 오늘 왜 저리도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는지 이해가 갔다.“지금 생각해 보니 작년 이맘때쯤에도 그랬던 것 같네요.”작년에는 김인우한테 별로 관심이 없었을 때라 물어보지도 않았다.김훈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때 인우가 어리기도 했고 또 부모님의 죽음이 커서도 큰 트라우마로 남았나 봐.”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하랑아, 혹시 우리 인우 좀 도와줄 수 있을까?”“나는 인우가 그래도 널 좋아한다고 생각하거든. 가서 그냥 옆에 있어 주기만 해도 돼. 저렇게 방안에 자신을 가두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서 그래. 아무리 평소에는 까불거리고 말하기 좋아한다고 해도 마음이 아주 여린 아이라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거야.”조하랑은 점점 김인우가 안쓰럽게 느껴졌다.사실 그의 어머니는 어릴 적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그러나 아버지는 항상 엄마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도록 그에게 최선을 다해 아낌없는 사랑을 줬다.“네, 제가 노력해 볼게요.”조하랑의 대답에 김훈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그리고 박예찬의 방에 가서 문을 두드렸다.“예찬아.”“증조할아버지, 들어오세요.”김훈은 박예찬의 말에 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가 활짝 웃으며 물었다.“예찬아, 할아버지가 오늘 무슨 선물을 가져왔게?”김훈은 손을 뒤로 감췄으나 박예찬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바로 답했다.“또 어디서 간식 사 왔어요?”“아이고, 먹는 게 아닌데?”김훈이 장난스레 답했다.“그럼 바둑인가요?”김훈은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 네 연령대에 어울리는 물건이라고 생각해 줄래?”그러나 박예찬은 끝까지 알아맞히지 못했다.김훈은 그제야 싱글벙글해서 손에 감췄던 물건을 내놓았는데 그건 바로 다이아몬드 게임이었다.“우리 보드게임 한판 하자.”박예찬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너처럼 매일 컴퓨터만 보고 있으면 시력 건강에 아주 안 좋아.
그리고 곧바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어차피 조하랑과 엄마의 비밀은 어느 정도 다 알고 있었다.겨우 거실에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조하랑은 더는 못 참고 입을 열었다.“민정아, 나 인우 씨랑 할아버지한테 아직 임신 사실을 말하지 않았어.”“왜?”박민정은 조하랑의 몸을 보더니 이제 어느 정도 임산부인 티가 난다고 생각했다.그러자 조하랑이 머뭇거리며 답했다.“인우 씨 태도가 계속 애매하더라고. 그리고 이런 부잣집 도련님에 대해 솔직히 믿음이 안가.”지금까지 딱 한번 연애를 해봤는데 그때 호되게 당한 뒤로는 아무리 결혼했다고 해도 여전히 남자에 대한 경계심이 높았다.“그런데 이런 일은 숨긴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잖아.”“그러니까.”조하랑은 깊은 한숨을 쉬더니 박민정을 보며 물었다.“민정아, 예찬이가 그러던데 너희 가족 모두 서주에 간다면서? 나도 따라가면 안 될까?”“뭐?”박민정이 깜짝 놀라 그녀에게 되물었다.“서주에 가서 뭐 하려고?”“일단 서주로 일하러 간다고 하고 1년 반 정도 있다가 다시 돌아오려고.”조하랑은 여전히 김인우가 아이를 빼앗아 갈까 봐 두려워했다.그녀의 말에 박민정은 그제야 조하랑이 홀로 아이를 낳은 뒤 다시 돌아올 계획이란 걸 알아챘다.“과연 할아버지께서 널 보내줄까?”“걱정하지 마. 할아버지쯤이야 가볍게 구슬릴 수 있어. 나를 제일 아끼는 분이라 반드시 허락할 거야.”“그래. 결정되면 알려줘.”조하랑은 둘도 없는 친구이기에 박민정도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돕고 싶었다.“민정아, 고마워.”말을 마치자마자 조하랑은 박민정을 꼭 안아줬는데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 박민정은 그녀의 등을 토닥여줬다.“아무리 그래도 태어날 아이의 미래도 잘 생각해 봐야 해. 혹시나 아빠가 필요할 수도 있잖아...”박민정은 여태껏 겪었던 자기 경험담을 모두 말해줬다.그러자 그녀는 박민정을 더욱 꽉 끌어안으며 답했다.“응, 그럴게.”두 사람은 얼마간 이야기를 더 나누다가 박민정이 그만 집에 가려는데 마침 김훈이 돌아왔다.그리고 박민
얼마 지나지 않아 고급 차 한 대가 그들 앞에 세워지더니 고영란이 두 동생을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어머님.”고영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민정아.”이때, 정수미가 말소리를 듣고 눈을 뜨자 고영란은 빠르게 그녀에게 다가왔다.“사돈.”마침 두 사람은 나이도 비슷했고 같은 또래다 보니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박민정도 옆에서 네 명의 아이와 놀아줬다.“어, 어마마...”두 동생은 아직 말이 서툴렀지만 박민정은 오히려 그게 듣기 좋았다.이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려 확인해 보니 조하랑이었다.“민정아.”“무슨 일이야?”“혹시 지금 우리 집으로 좀 와 줄 수 있어?”떨리는 소리로 묻는 조하랑의 모습에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든 박민정은 빠르게 답했다.“응. 바로 갈게.”그리고 고영란과 정수미에게도 김씨 가문으로 간다고 말하자 박예찬이 냉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엄마,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그래.”그렇게 박민정은 박예찬을 데리고 김씨 가문으로 가는 차에 올라탔다.도착해보니 조하랑은 진작에 대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고 두 사람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무슨 일인지 인우 씨가 하루 종일 혼자 방안에서 꼼짝도 안 하고 있어. 불러도 대답 없고.”“할아버지는?”“오늘 병원에 검사받으러 가셨는데 괜히 할아버지까지 걱정 끼쳐드리고 싶지 않아.”박민정은 일단 조하랑과 같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그리고 김인우의 방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조하랑은 다시 조심스레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인우 씨, 문 좀 열어봐요. 민정이랑 예찬이가 놀러 왔어요.”박민정이 왔다는 말에 방안에서 의자를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그제야 방안의 인기척을 느낀 조하랑은 다시 그에게 물었다.“혹시 무슨 일 있어요?”“한번 나와봐요.”지금까지 김인우와 같이 살면서도 이런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오래 기다린 끝에 마침내 방문이 열리면서 김인우의 모습이 보였는데 다크써클이 턱까지 내려온 얼굴에 수염까지 덥수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