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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작가: 윤지
업무상의 문자 말곤 지금까지 꼬박 하루가 지났는데 박민정은 그에게 사과의 전화나 문자 한 통도 없다.

“언제까지 참는지 두고 봐!”

유남준은 휴대폰을 옆에 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갔다.

냉장고 문을 연 순간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

음식 외에 갖가지 한약들이 들어 있었는데 대충 하나 꺼내 보니 ‘불임 치료, 1일 5팩’이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

불임 치료...

유남준은 고약한 한약 냄새를 맡으며 전에 박민정의 몸에서 났던 약 냄새가 이 한약이란 걸 깨달았다.

그는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제아무리 약을 먹는다고 임신이 될까?

유남준은 가차 없이 약을 내던지고 인제야 그녀가 화난 연유를 알 것만 같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침실로 들어간 그는 푹 휴식을 취했다.

박민정이 없으니 앞으론 돌아오고 싶을 때 마음껏 돌아와도 된다, 일부러 그녀를 피하지 않아도 된다.

그날 밤 유남준은 아주 잘 잤다.

오늘은 절친 김인우와 함께 골프 치러 가는 날이다.

하여 아침 댓바람부터 옷방에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거실에 나왔는데 습관처럼 오늘 집에 안 온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나 오늘...”

박민정은 이젠 집에 없다. 앞으론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다.

골프장.

유남준은 한껏 들뜬 마음으로 흰색 운동복을 입고 있었는데 잘생긴 얼굴이 오늘따라 더 자상해 보였다.

훤칠한 체구에 골프장에 서 있으니 영화배우를 방불케 했다.

스윙 한 번에 홀인원이다.

절친 인우가 옆에서 칭찬을 남발했다.

“남준이 오늘 컨디션 좋은데. 너 무슨 좋은 일 있어?”

박민정이 유남준과 이혼하려는 일은 어제에 걸쳐 주변 사람들이 거의 다 아는데 김인우가 모를 리 있을까?

그저 유남준의 입으로 한 말을 직접 들어야 진작 밖에서 기다린 이지원을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으니 슬쩍 떠본 것이다.

유남준은 물 한 모금 마시고 넌지시 대답했다.

“별거 없어. 그냥 민정이랑 이혼하려고.”

두 귀로 직접 들었지만 김인우는 여전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유남준의 절친으로서 그는 박민정을 너무 잘 안다. 가녀린 척, 착한 척만 해대면서 남준이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천한 년!

이혼할 수 있다면 진작 했겠지, 뭣 하러 3년이나 버텼을까?

“그 귀머거리가 해주겠대?”

김인우의 물음에 유남준의 두 눈이 확 어두워졌다.

“걔가 먼저 하자고 했어.”

김인우가 하찮다는 듯이 웃었다.

“홀리는 수작이네. 이런 여자들 나 너무 많이 봐왔어.”

그는 또다시 배시시 웃으며 유남준에게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남준아, 오늘 내가 이벤트 하나 준비했는데.”

유남준이 의아해할 때 김인우가 이지원에게 문자를 보냈다.

곧이어 멀지 않은 곳에서 연핑크 색 운동복 차림에 예쁘게 치장한 이지원이 유남준을 향해 손짓했다.

그녀는 곧장 두 사람 앞으로 걸어왔고 김인우가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두 사람 얘기 나누고 있어. 난 이만 빠질게.”

그가 떠난 후 이지원은 유남준에게 함께 좀 걷자고 제안했다.

골프장을 나서니 한때 다녔던 두 사람의 대학교가 저 앞에 보였다.

남자를 잘 아는 이지원이기에 박민정 얘기를 꺼내지 않고 둘만의 추억을 되새겼다.

“오빠 이 길 기억나요? 전에 우리 사귈 때 자주 걸었었잖아요. 그때 오빠가 내 손 꼭 잡고 영원히 걸어가자고 했는데.”

여기까지 말한 이지원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유남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빠, 계속 내 손 잡고 걸어갈 수 있어요?”

손이 닿은 순간 유남준이 본능적으로 피했고 이지원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유남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지나간 일은 이젠 기억 안 나.”

공부하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일하기까지...

유남준에겐 그저 인생에 반드시 거쳐야 할 일일 뿐 미션 수행과 별다를 게 없었다.

첫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이지원의 눈시울이 빨개졌다.

“아직도 나 원망해요? 그땐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오빠 떠날 생각 없었다고요. 나 오빠 사랑해요, 아주 많이... 이 몇 년 동안 내가 어떻게 견뎌왔는지 알아요? 우리의 추억을 회상하며 더 우수해져야지, 더 나아진 모습으로 돌아와서 오빠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되어야지 하면서 수없이 되뇌었다고요.”

유남준의 정교한 눈썹이 문득 일그러졌다.

“난 이미 결혼했어.”

“알아요, 민정 씨가 오빠랑 이혼할 거잖아요.”

이지원이 계속 말을 이었다.

“오빠를 내게 돌려줘서 민정 씨한테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고 저도 몰래 팔을 벌려 유남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거 알아요? 나 민정 씨 너무 미워. 진짜예요. 민정 씨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갈라져 있은 거잖아요.”

사람들은 흔히들 지난 일을 잊는 듯싶다.

이지원이 애초에 먼저 유남준과 헤어지고 박민정이 그 후에 유남준과 약혼했다. 이지원은 이 일을 깜빡하고 있었다.

박민정, 박민정...

유남준의 머릿속에 그녀의 온화한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녀는 아빠가 돌아가신 후 울먹이며 유남준에게 물었다.

“남준 오빠, 나 안아줄 수 있어요?”

하지만 바로 그때 박민정의 남동생 박민호가 두 사람의 정략결혼 조건을 전부 무너뜨리고 유남준이 박씨 일가에 준 돈과 박씨 일가가 유씨 일가에 준 모든 것까지 본인이 통째로 삼켰다.

하여 유남준은 매정하게 돌아서며 위로의 말조차 건네지 않았다.

머릿속을 맴도는 박민정의 가여운 모습에 유남준은 저도 몰래 이지원을 뿌리쳤다.

이지원이 뭐라 더 말하려 했지만 김인우가 재빨리 달려왔고 그녀도 그제야 눈물을 멈췄다.

김인우는 뭔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지만 여전히 수중의 서류를 유남준에게 건넸다.

“남준아, 이거 봐.”

펼쳐보니 재산양도 협의서였다.

“민정 씨가 변호사 통해서 보내온 거야. 너희 두 사람 3년 동안 결혼생활에 대한 보상이래.”

보상?!

김인우는 본인이 말하고도 믿기지 않았다. 박민정이 유남준에게 위자료를 얻어내려고 급하게 집 나간 줄 알았는데 이게 대체 웬일인가?

유남준도 서류를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박민정이 재산을 전부 그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럴 수가!

맨 마지막에 적힌 재산양도 금액 100억을 본 순간 실소가 새어 나왔다.

‘박민정, 너 대체 날 뭐로 본 거야?’

“고작 100억으로 박씨 가문을 내 손에서 빼내려고? 이 돈이면 내가 용서해 줄 거라고 여긴 거야?”

유남준은 김인우와 이지원 앞에서 대놓고 맹비난을 해댔다.

김인우도 그제야 알아채고 따라서 피식 웃었다.

“귀머거리가 종일 무고한 척하더니 몰래 100억이나 숨겨뒀네. 걔 남동생이랑 밑 빠진 독 같은 걔네 엄마는 이 사실 알아?”

옆에 있던 이지원은 김인우와 유남준이 박민정을 능멸하는 걸 빤히 지켜봤다.

남준 오빠가 민정이를 좋아할까 봐 걱정했는데, 어쨌거나 그 둘은 결혼한 지 3년이나 되었으니... 하지만 인제 보니 결혼 3년이 아니라 평생을 가도 유남준처럼 우수한 남자는 잔잔한 호수 같은 박민정에게 마음을 줄 리가 없다.

박민정은 아예 그녀의 라이벌로 될 자격이 없다.

...

그 시각 어두컴컴한 모텔 안.

박민정이 비몽사몽 눈을 떴는데 머리가 엄청 아프고 주위가 유난히 조용했다.

병세가 악화하였다는 걸 그녀는 바로 알아챘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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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윤
단체로 한 사람을 욕하네...미친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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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박민정은 증명해 냈다. 난청이라도 피아노, 춤, 노래 모두 그녀는 정상인보다 모자라지 않았다.이 기사는 마치 빛 같았다. 연지석은 그렇게 천천히 일어설 수 있었다.연지석이 자세하게 말하는 그 빛 났던 순간들은 박민정 본인도 잊기 직전이었다.연지석은 그녀를 묵을 곳으로 데려다주었다.박민정은 웃으면서 그한테 말했다.“고마워. 나도 원래의 날 잊기 직전이었어.”연지석은 그녀와 밥 먹으러 갔다.하루 종일 함께 있으면서도 그는 섬세하게도 박민정이 결혼한 후의 일들은 묻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이 흘렀다.날짜를 확인해보니 이혼이 예정된 5월 15일과는 열흘 좀 넘게 남아 있었다.한수민과의 약속이 문득 생각이 났다.그녀는 어느 아침, 돌아간 아빠를 보러 갔었다.돌아가신 아빠의 묘비 앞에서, 자상한 사진 속의 아빠를 보며 박민정은 목이 메왔다.“아빠. 보고 싶어요.”여린 바람이 가볍게 박민정의 볼을 스쳤다.그녀는 코끝이 시렸다.“아빠. 만약 지금 아빠를 보러 가면 무조건 저한테 화내시겠죠?”그는 묘비에 붙은 나뭇잎을 하나하나 떼여냈다.“저도 제가 조금 더 강해야 한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죄송해요...”묘비 앞에 한참을 서 있고서야 박민정은 발걸음을 옮겼다.그녀는 떠날 때 유골함을 샀다.그러고는 사진관에 가서 일하는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 속에서 흑백사진을 찍었다.이 모든 걸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그녀는 창밖의 풍경을 보면서 넋을 놓았다.이때 핸드폰이 울렸다.은정숙 아줌마였다.“민정아. 요새 어떻게 지내?”박민정은 은정숙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잘 지내요.”은정숙은 한숨을 내쉬고는 잔소리했다.“누가 너더러 나한테 몰래 돈 보내랬니? 그 돈, 나는 필요 없다. 뒀다가 너 써. 나중에 사업 같은 거 할 때나...”지난 몇 년간, 박민정은 몰래 그녀에게 돈을 보내왔다.그녀는 시골 사람이다 보니 그리 많은 돈을 쓸 일도 없었고 모두 저축해 두고 있었다.전화 저편에서 은정숙의 관심 어린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4화

    이지원은 인터뷰를 마친 후 한수민을 찾아갔다.그리고 한수민과 박민정 동생이 600억을 위해 박민정을 늙은이에게 시집 보내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유남준이 대답이 없자 이지원은 말을 얹었다.“민정 씨 어머니 말로는 민정 씨가 먼저 600억을 요구했다더라고요. 그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그리고 아직 두 분 숙려기간이 끝나지 않아서 정식으로 결혼하는 대신 식만 올리기로 했다고요.”...박민정은 엄마와 동생이 자기 의견은 모조리 무시한 채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신혼을 준비 중인 건 꿈에도 몰랐다.한수민은 그녀가 절대 죽을 용기도 없고 절대 죽지 못하리라 생각했다.어릴 때부터 많은 괴롭힘을 당했지만 떠나기를 선택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이번에도 같을 것으로 생각했다.동생인 박민호는 진즉에 그 600억을 받아서 새로운 회사를 준비 중이었다. 그는 박민정에게 단 조금의 죄책감도 없었다.그리고 이날, 박민정은 한수민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최 사장님이 좋은 날짜 받아오셨어. 이번 달 15일이야. 나흘 동안 잘 준비해서 시집 가면 돼. 이번에는 꼭 이 남자의 마음을 잡아야 한다. 알았지?”박민정은 이 두 메시지를 보면서 마음이 복잡해졌다.15일. 기쁘고 즐거워야 할 날이었다. 그녀가 유남준과 이혼을 약속한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가 떠나려는 날이기도 했다. 박민정은 자신이 또 잊을까 봐 이날을 노트에 기록해 뒀다.그리고 그녀는 친필로 유서를 써 내렸다.필을 들었지만 뭘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에 그녀는 윤정숙과 연지석에게 말을 남겼다.다 쓴 뒤 그녀는 유서를 자신의 베개 밑에 넣어뒀다.사흘 뒤.14일에는 비가 크게 내렸다.핸드폰을 테이블에 올려놨는데 온종일 벨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모두 한수민이 걸어온 전화였고 그녀가 어디 있는지 묻는 것이었다.내일이면 결혼식이니 그녀더러 집에 들러 최 사장에게 시집갈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박민정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 새로 맞춘 붉은 드레스를 입고 예쁘게 화장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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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13화

    최현아는 계속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다.“이렇게 보면 또 남자가 너무 잘생기고 능력이 좋아도 파리들이 많이 꼬여서 마냥 기쁜일만은 아닌것 같네. 그러니까 동서도 조심해.”박민정은 그녀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어린애도 아닌데 아무리 감시하고 조심한다고 되겠어요? 그냥 신경끄고 자기 삶을 사는게 낫을 것 같네요.”최현아는 박민정이 이렇게 쿨하게 나올줄은 생각지도 못해 순간 할 말을 잃었다가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이따가 텐트도 쳐야 할 텐데 혹시나 도울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사람 보낼 테니까.”말을 마친 뒤 자리를 떴다.“네, 고마워요.”최현아가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유남준이 박민정의 곁으로 돌아왔다.그런데 이상하게도 방금 유남준의 곁에서 맴돌던 학부모들의 안색이 저마다 어둡더니 더 이상 그와 말을 걸지 못하는 눈치였다.“저 사람들이랑 무슨 얘기를 나눴어요?”유남준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박민정의 관심에 일부러 입을 삐쭉거리며 답했다.“맞춰봐.”그러나 박민정은 그의 도발에 순간 흥미가 뚝 떨어졌다.“됐어요. 그럼 전 텐트 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자리를 뜨는 박민정을 보고 유남준도 냉큼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별일 아니고 IM 그룹이랑 협력하고 싶다고.”“그렇군요.”갑자기 냉담해진 박민정의 태도에 유남준은 그녀의 생각을 더욱 알기 힘들었다.“민정아, 화났어?”그의 물음에 박민정은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아니요? 제가 왜 화 나요?”유남준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거짓말하는 건 같지 않아 오히려 마음이 더욱 불편했다.“내가 다른 여자들이랑 수다를 떨어도 너는 아무렇지 않다는 거네?”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텐트를 들고 그녀를 지나쳐 앞으로 걸어 나갔는데 박민정은 그제야 유남준이 화났다는 걸 눈치챘다.유남준이 혼자서 말없이 텐트 치는 모습을 보고 있던 박예찬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재빨리 박민정에게 다가와 물었다.“엄마, 무슨 일이야?”박민정은 순간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몰라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12화

    박민정은 장연수란 사실을 발견하고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연수 씨, 무슨 일이에요?”장연수는 살짝 당황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민정 씨, 제가 오늘 오면서 돗자리를 못 챙겼는데 혹시 같이 밥 먹어도 될까요?”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세요.”어차피 갖고 온 돗자리 사이즈가 커서 비좁지는 않았다.장연수는 그녀의 허락에 활짝 웃더니 지원이만 남기고 먹거리 가지러 달려갔다.그러나 유남준은 그런 장연수의 행동이 의심스러워 박민정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내가 다른 돗자리 사 오라고 할게.”“지금 사러 가도 이미 늦었어요. 아쉬운 대로 그냥 먹어요.”“그래.”이때 장연수는 어느새 음식을 한 보따리 가져와서 돗자리에 올려놨다.“제가 직접 한 음식들인데 괜찮으면 같이 먹어요.”“감사합니다.”그러다가 그녀느 문득 유남준을 바라보며 그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유 대표님의 명성은 오래전부터 익히 들었고 저희 남편도 자주 언급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예전에 어느 연회에서 대화도 나눴다던데요?”“그래서 제가 오늘 대표님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을 저희 남편이 듣더니 대표님 명함 하나만 부탁하던데 혹시 받아볼 수 있을까요?”박민정은 그제야 장연수가 오늘 그들에게 접근한 의도를 알아챘다.그러나 남편의 이익을 위해 관계를 맺는 건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유남준도 그녀가 그저 학부모라고 생각하고는 선뜻 자기 명함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장연수는 밥 먹을 때도 유남준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으면서 어렴풋이 자기 남편과 같이 협력해 주기를 바란다는 의지를 드러냈다.그러나 유남준은 그저 예의상 몇 마디 대답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그렇게 식사 자리가 끝난 뒤 장연수는 박민정이 뒷정리하는 걸 가로막으며 자신이 하겠다고 나섰고 박민정도 진작에 그녀의 의도를 눈치채고는 쉽세 물러서지 않았다.“지원이 엄마, 제가 하면 돼요.”“아니요. 이건 제가 정리할게요. 민정 씨는 아이들이랑 놀아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11화

    최현아는 유남준이 계속 따라오는 게 불편했다. 그가 옆에 있으면 박민정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다른 사람에게 굳이 부탁할 필요 없이 저만 따라가는 게 왠지 더 안심될 것 같네요.”유남준의 말에 최현아는 더욱 거절할 수 없게 되었다.이때 학부모들은 박민정 곁에 서 있는 유남준에게 눈길을 몇 번 더 주더니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저렇게 잘생기고 능력도 좋은 남편이 있는 걸 보면 예찬이 엄마는 참 복도 많아.”“그러게요. 그러니까 태어난 아들도 똑똑한가 보죠. 지난번 수학 경시대회에서도 1등 했다던데요?”“우리 딸이 나중에 예찬이랑 결혼했으면 좋겠네요.”“꿈 깨요.”그들은 말하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오늘 유남준 외에도 많은 아이의 부모님들이 야외 캠핑을 즐기기 위해 참석하게 되었다.그리고 각자의 차에 올라탄 뒤 함께 출발했다.박예찬은 차에 올라타서도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엄마, 요즘 몸은 괜찮아? 어디 아픈 데 없어?”박민정이 웃으며 답했다.“많이 좋아졌어. 기억들도 서서히 돌아오는 것 같고.”순간, 박예찬의 눈빛이 반짝거렸다.“뭐가 기억났는데?”“너랑 윤우에 관한 기억인 것 같은데 너무 흐릿했어.”박민정의 말에 박예찬은 소리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당장에라도 박민정을 꼭 안아주고 싶었지만 부끄러워 차마 그러지 못했다.“엄마, 건강도 챙기고 밥도 많이 먹어야 해.”말을 마친 뒤 그는 주머니에서 핫팩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줬다.“아직 추우니까 손에 쥐고 있어.”이건 같은 반에 여자아이가 박예찬에게 준 물건이었다.박민정은 손에 든 핫팩을 바라보다가 무심결에 자기 아들이 말은 투박해도 참 따뜻한 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순간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우리 아들, 고마워.”그러다가 자기 아들을 꽉 안아줬는데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박예찬은 순간 얼굴이 빨개졌다.그러나 옆에서 이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유남준은 괜스레 마음이 씁쓸해지기 시작했다.아침에 그녀를 위해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10화

    유남준은 쉽사리 상대할 인물이 아니었지만 박민정은 그에게 있어 유일한 약점이었다.최현아는 학부모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남겼다.[여러분, 선생님과 상의한 끝에 봄도 왔겠다 싶어 아이들과 함께 교외로 소풍을 가려고 합니다. 좋은 날씨를 놓치지 말고 모든 학부모님께서 꼭 참석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그녀의 제안은 순식간에 대다수 부모들의 찬성을 얻었다.박민정도 그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 모든 학부모가 참여한다니 혼자 거절하기도 애매해 결국 그녀도 동행하기로 했다.최현아는 박민정의 답변을 확인하고 살짝 안도했다. 곧바로 그녀에게 개인적으로 주의 사항을 보냈다.[동서, 이모님께 들으니 동서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하더라. 예찬이를 데리고 가려면 조심해야 할 거야. 여기 필요한 물품 리스트가 있어. 소풍뿐만 아니라 캠핑도 할 거니까 모기 기피제나 감기약 같은 것도 꼭 챙겨가도록 해.]박민정은 메시지를 확인하고 간단히 답장을 보냈다.[고마워요.]그 무렵,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지원이 엄마였다.[예전엔 이런 소풍이나 캠핑 같은 걸 한 적이 없었는데 올해는 어쩐 일로 최현아가 나서서 추진하는 걸까요?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이제 완전히 박민정의 편이 된 지원이 엄마였다.박민정도 신중한 태도로 답장을 보냈다.[어떻게 돌아가는지 좀 더 지켜봐요.][네, 알겠어요.]박민정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유남준에게 박예찬과 함께 교외로 소풍을 가야 한다고 말했다.이 말에 유남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너 혼자?”박민정은 가볍게 끄덕였다.“네, 학교에서 부모 한 명만 동행하면 된다고 했어요.”유남준의 대답은 단호했다.“안 돼. 나도 같이 갈 거야.”그녀와 박예찬을 단둘이 외부에 내보내는 건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박민정은 그를 올려다보며 망설였다.“근데 남준 씨는 회사에 나가야 하잖아요?”“일은 언제든 할 수 있지만 소풍은 1년에 몇 번 있지도 않아. 그런데 날짜는 언제야?”“모레예요.”“좋아. 내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09화

    정호철은 박예찬이 다니는 유치원을 알아낸 후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그 앞에서 기다렸다.멀리서 유치원으로 들어가는 아이의 모습을 보자마자 그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아이는 단순히 잘생긴 것뿐만이 아니었다. 머리도 비상해 아이들 무리 속에서도 단연 돋보였다.한편, 박예찬도 누군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최근 들어 유지훈은 박예찬이 곤경에 빠지길 기다렸다. 자신의 부모가 다시금 세력을 되찾기를 기대하며 버텼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예찬아.”그가 서둘러 박예찬의 곁으로 다가가자 박예찬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무슨 일이야?”“우리 다시 친해지자.”“친해지자고?”박예찬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너, 얼마 전에 나랑 안 놀겠다고 하지 않았어? 앞으로 난 네 졸개고 넌 유씨 가문의 후계자라고도 했지?”유지훈의 얼굴이 금세 새빨개졌다.“그건... 그냥 농담이었어!”“아, 농담이었어?”하지만 박예찬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최근 그는 김훈에게 부탁해 자신의 주변 경호를 한층 더 강화했다. 혹시라도 유지훈의 부모가 또 무슨 수를 쓸지 몰랐기 때문이다.“예찬아, 나 정말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우리 친구로 지내자, 응?”“난 친구 같은 거 필요 없어.”박예찬은 그의 손을 툭 뿌리치고 그대로 교실로 들어가 버렸고 유지훈은 제자리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표정에는 깊은 상실감이 묻어났다.“너도 거절당했구나?”그때 조동민이 다가왔다.“유지훈, 너 예찬이한테 퇴짜 맞았구나? 하하하!”유지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뭐가 그렇게 웃기냐? 조씨 가문의 자식이라고 나를 비웃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그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위협했다.“원장님한테 한 마디만 하면 널 유치원에서 내쫓는 건 일도 아니야.”조동민은 움찔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면서도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쪼잔하기는.”조동민이 떠난 뒤 유지훈의 기분은 더욱 나빠졌다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08화

    정수미와 정호철이 돌아간 후, 윤소현 역시 박민정의 말을 전해 들었다.“엄마, 아저씨. 두 분은 어른이잖아요. 사과하는 건 그렇다 쳐도, 대체 왜 감옥에 가겠다는 말을 진심으로 하신 거예요?”그녀가 가장 두려운 것은 이 일이 자신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정호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모두 내 탓이야. 그때 악행을 저지르지 말았어야 했는데... 결국 우리 식구들에게까지 화를 미치게 됐구나. 이렇게 된 것도 다 내 업보다.”그의 말을 듣자 정수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네 탓이 아니야. 모든 건 내 불찰이었어.”그녀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과거의 오만함이었다. 권세를 믿고, 남을 업신여겼던 그 시절.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소현은 눈에 노골적인 냉소를 띠었다.“이 일은 누구의 탓도 아니에요. 그때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민정이가 제 동생일 줄은.”정수미는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그게 친족이든 아니든, 우리는 애초에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됐어.”“그래.”정호철은 깊은 한숨을 쉬며 무릎 위를 주먹으로 툭 쳤다.“난 평생 대표님을 따라다니면서 함부로 약한 사람을 건드린 적이 없었어. 하지만 정씨 가문이 점점 커지면서 우리 마음가짐도 변하고 말았지.”그는 윤소현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소현아, 너도 이제 성격을 좀 고쳐야 한다. 더 이상 약한 사람들을 억누르려 해서는 안 돼. 너희 어머니와 나는 이제 나이가 많다. 앞으로는 너 혼자 가야 해.”그러나 윤소현은 그 말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아저씨, 어릴 때는 그렇게 안 말씀하셨잖아요? 전 정씨 가문의 장녀니까 원하는 건 뭐든 가질 수 있다고 하셨죠. 설령 빼앗아서라도 말이에요.”정호철은 말문이 막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정수미도 더 이상 그녀를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윤소현은 두 사람이 침묵하자 다시 물었다.“민정이가 저까지 감옥에 가라고 했어요? 설마 두 분도 그 말을 덥석 받아들이신 건 아니죠?”정호철은 고개를 저었다.“걱정 마라. 예전 일은 내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07화

    정호철이 박민정 앞까지 걸어가더니 말없이 무릎을 꿇자 박민정은 크게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뭐하는 거예요?”그때 정수미가 정호철의 곁으로 다가섰다.“민정아, 예전에 예찬이를 납치하고 목숨까지 위협한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내가 시킨 일이었어.”정호철 역시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작은 아가씨, 죄송합니다. 저는 이번에 죗값을 치르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 제 목숨을 내놓겠습니다.”그 말을 들은 순간, 정수미의 온몸이 떨렸다.정호철은 오랜 세월 자신의 곁을 지켜온 사람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그녀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민정아, 네게 부탁하고 싶구나. 이 사람을 용서해주겠니?”이 말을 꺼내는 데조차 정수미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사실 나야말로 용서를 구할 자격이 없어. 외할머니라는 사람이 정호철보다 더한 죄를 저질렀으니.”박민정은 이제야 그들이 찾아온 이유를 이해했다. 비록 그녀의 기억은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꿈속에서조차 박예찬이 위험에 처하는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그것은 자신의 아들의 목숨이었다. 그런데 쉽게 용서하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박민정은 주먹을 꽉 쥐었다.“제가 용서하지 않으면요?”그때 유남준이 조용히 다가와 그녀의 곁에 섰다.“정 대표님, 지금 이건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민정이는 아직 기억도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렇게 몰아붙이면 안 되죠.”정수미의 눈가가 붉어졌다.“그게 아니라...”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남준아, 민정아, 너희가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 봐. 할 수 있는 건 뭐든 하겠다.”정수미는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남준은 박민정을 바라보았는데 그녀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악문 채 말했다.“죄를 지었다면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죠. 당신과 정호철, 그리고 윤소현. 당시 당신들은 제 아들의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06화

    윤소현은 정수미와 정보주를 바라보며 속으로 차가운 결심을 내렸다. 정보주가 떠나는 순간부터 그녀의 계획이 시작될 것이었다.그날 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정수미는 직접 정보주를 공항까지 배웅했다.집으로 돌아오자, 윤소현은 여전히 깨어 있었다. 그녀는 다가와 따뜻한 우유 한 잔을 건넸다.“엄마, 우유 드세요.”“그래, 고맙구나.”정수미는 별다른 의심 없이 우유를 받아 들이켰다. 모두 마신 후, 그녀는 윤소현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오늘 너희 이모랑 함께 민정이를 만나고 왔어.”윤소현은 대범한 척 웃어 보였다.“이제 민정이가 엄마를 용서했나요?”정수미는 고개를 저었다.“아직도 나를 멀리해. 어떻게 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윤소현을 바라보았다.“소현아, 엄마가 유언장을 수정했어. 유산의 절반을 민정이에게 주기로 했다. 네가 너무 마음 쓰진 않았으면 좋겠구나.”유산의 절반!윤소현의 속에서는 거대한 파도가 일렁였다.대체 무슨 이유로 엄마라고조차 부르지 않는 그 애한테 재산의 절반을 넘겨야 한단 말인가? 왜 하필 박민정이에게?윤소현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엄마, 저는 오히려 모든 유산을 동생에게 주실 줄 알았어요.”“말도 안 되는 소리. 너도 내 딸인데.”정수미는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감쌌다. 그러나 윤소현은 그 손길이 너무나 역겨웠다.하지만 얼마 남지 않았다. 곧, 이 세상에서 정수미는 사라질 것이고 더는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엄마, 정말 고마워요. 저 같은 양녀까지 친딸처럼 대해 주시다니요.”겉으로는 감격한 듯 말했지만 그녀의 속눈썹 아래로는 차가운 빛이 스쳤다.정수미는 무언가 더 이야기하려 했으나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답답해졌다.“됐어, 이제 그만 자야겠다.”“네, 편히 쉬세요.”윤소현은 그녀가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그녀가 사라지자 윤소현은 들고 있던 우유 잔을 깨끗이 씻어냈다.“엄마, 날 원망하지 마세요. 애초에 엄마가 쓸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05화

    아침 식사를 하면서 정수미는 옆에서 몰래 정보주에게 비법을 전수받고 있었다.“넌 대체 어떻게 해서 민정이랑 그 친구들을 데리고 나온 거야?”“이건 가르쳐서 되는 일이 아니야, 언니.” 정보주는 여유롭게 말했다.“기억해야 할 건 단 하나,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가는 거야.”정수미도 급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이 그 시간을 견뎌낼 수 있을지 걱정될 뿐이었다.정보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독였다.“민정이는 착한 아이야. 언젠가는 스스로 깨닫게 될 거야. 우리한테 중요한 건 그 아이와 좋은 관계를 쌓는 거지, 어떤 신분으로 다가갈지는 중요하지 않아.”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고마워.”“우리 사이에 그런 말이 어딨어?”정보주는 정수미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관자놀이에 늘어난 흰 머리카락을 보니 괜히 마음이 아렸다.“언니, 제발 자기 몸 좀 더 신경 써.”갑작스러운 포옹에 정수미는 어색한 듯 몸을 살짝 빼면서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알았어, 근데 넌 왜 이래? 별일도 아닌데 자꾸 끌어안고.”“이렇게 해야 더 친밀한 느낌이 나잖아.”정보주는 장난스럽게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자, 가자. 민정이랑 그 친구들하고 같이 앉아서 먹자고.”“좋아.”정수미는 선뜻 동의했다.젊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니 왠지 자신도 한층 젊어진 기분이었다.다만, 그녀는 가끔씩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가빠졌다. 그녀는 자신의 몸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때, 진서연이 문득 떠오른 듯 말했다.“정 대표님, 저희 회사에 투자해 주신 거 정말 감사합니다.”정수미는 미소를 지었다.“별거 아니에요. 앞으로도 열심히 해요. 회사는 분명 더 성장할 거예요.”진서연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박민정 역시 놀라운 눈길로 정수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의 회사에 투자할 줄은 예상도 못 했던 것이다.식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졌다.한편, 오늘 윤소현은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제 정수미와 정보주가 변호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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