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같으면 보청기를 착용하지 않아도 미세한 소리가 들렸으니까.박민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머리맡에 둔 쓰디쓴 약을 입에 물었다.어제는 3년 동안 지낸 두원 별장에서 나와 먼저 본가로 돌아갔는데 문 앞에서부터 엄마와 동생 박민호의 목소리가 들렸다.“내가 왜 저런 쓸모도 없는 딸을 낳았지? 3년 동안 남준이가 글쎄 걔를 건드리지도 않았대! 온전한 여자도 아닌 주제에 이혼할 생각까지 해?”분노에 찬 한수민의 말이 예리한 칼날처럼 박민정의 심장을 난도질했다.엄마 눈엔 대체 어떤 여자만이 온전한 사람일까? 박민정은 알지 못했다.남편에게 사랑받는 여자? 혹은 아이를 낳아 키우는 여자?동생 박민호의 말이 더 한심했다.“누나는 우리 집안 사람 같지 않다니까요. 다들 그러는데 유남준 첫사랑이 돌아왔대요. 누나가 이혼 안 해도 조만간 그 집에서 내쫓길 거라고요. 그럴 바엔 차라리 뒷일을 고려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얼마 전에 최명길 대표의 아내분이 돌아가셨잖아요. 우리 누나가 비록 청력에 문제 있긴 하지만 80이 넘은 영감탱이에겐 횡재나 다름없죠...”박민정은 그 말들을 되새기며 두 눈이 퀭해졌다.그녀는 애써 단념하려고 휴대폰을 꺼냈는데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유남준인 줄 알았는데 열어보니 장 변호사님이라고 적혀 있었다.「민정아, 양도협의서를 유남준 씨한테 보내줬는데 태도가 썩 친절치 못했어. 앞으로 더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박민정은 장명철에게 답장을 보냈다.「수고하셨어요, 명심할게요.」문자를 보낸 후 그녀는 한참 넋 놓고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얼마 안 되는 재산을 전부 유남준에게 준 건 얼마나 고상해서가 아니다.단지 그에게 너무 많이 신세 지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결혼 전의 계약서대로 거액의 재산을 그에게 돌려주지 못하는 게 참 유감스러웠다. 아마 평생 결혼 사기죄라는 누명을 쓰고 살아가야 할 듯싶다.박민정은 이틀 동안 아무것도 안 먹어도 전혀 배고픈 줄 몰랐다.그저 주위가 너무 조용하니 이런 정적이 두렵게 느껴졌다.보청기도
문 앞에서 은정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민정이 깼어? 아줌마가 우리 민정이 제일 좋아하는 만두 빚었어. 식기 전에 얼른 먹어.”은정숙의 목소리에 박민정은 서서히 기억났다.두원 별장에서 나오고 병원 가서 병 보인 후 마지막으로 아줌마 보러 왔었지.그녀는 머리를 살짝 내리쳤다.‘기억력은 왜 또 이렇게 나빠진 거야?’이제 막 당혹스러워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잔꽃 무늬 침대 시트에 핏자국이 큼지막하게 나 있었다.오른쪽 귀를 만졌더니 끈적끈적한 느낌이 들었고 손을 펼쳐보니 피로 흥건했다.보청기도 빨갛게 물들었다...박민정은 서둘러 티슈로 귀를 닦고 침대 시트도 전부 거둬냈다. 은정숙은 그녀가 내려올 기미가 없자 베란다로 올라갔다가 시트를 씻고 있는 박민정을 보았다.“왜 그래?”“생리 왔어요. 조심하지 않아 시트에 묻혔더라고.”박민정이 웃으며 해명했다.침대 시트를 다 씻고 아줌마와 함께 아침을 먹으며 잠시만의 평온함을 만끽했다.은정숙의 목소리는 때론 똑똑히, 때론 어렴풋이 들렸다.박민정은 너무 두려웠다. 앞으로 이 목소리도 못 들으면 어떡하지?아줌마가 알고 나서 속상해하시면 어떡하지?그녀는 이곳에서 반나절 더 있다가 저축한 돈 일부를 몰래 침대 머리맡에 숨겨두고 나서야 아줌마와 작별 인사를 했다.떠나갈 때 은정숙은 그녀를 정거장까지 배웅하며 아쉬운 눈길로 손 흔들었다.박민정이 떠나간 후에야 은정숙도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문득 앙상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결국 유앤케이의 내선전화에 연락했다.대표이사 사무실의 비서는 박민정 씨 가정부가 대표님을 찾으신다고 그대로 알려주었다.오늘은 그녀가 집 나간 지 3일째 되는 날이고 유남준이 그녀에 관한 전화를 받은 첫날이다.유남준은 사무실 의자에 앉아 기분이 째질 것만 같았다.‘역시 3일을 못 버틴다니까.’은정숙의 늙은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유 대표님, 저는 민정이 어릴 때부터 보살펴온 가정부 은정숙이라고 해요. 제발 부탁드리는데 더는 우리 민정이 다치지 않도록 너그
시계를 들여다보니 마침 10시 정각이었다.유남준은 그녀에게 전화해 도착했는지 물어보려 했는데 멀지 않은 곳의 나무 아래에 박민정이 어두운 톤의 옷을 입고 서 있었다.주르륵 내리는 가랑비 속에 앙상하게 마른 그녀는 바람이 불면 쓰러질 것 같았다.금방 유남준과 결혼했을 때, 박민정은 밝고 긍정적이었다. 지금처럼 어두운 표정과 뼈만 남은 초라한 모습이 아니라.그는 우산을 들고 박민정에게 걸어갔다.그녀는 뒤늦게 유남준을 발견했다.3년 동안 유남준은 큰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멋있고 카리스마 넘치며 전보다 조금 더 성숙해진 모습이었다.3년이란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또 자신의 일생을 다 써버린 것만 같았다.유남준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어서 사과하길 기다렸다.이젠 그만할 때도 됐지!하지만 정작 그녀의 말은 정반대였다.“남준 씨 일하는 데 방해되겠어요. 얼른 들어가요.”유남준은 안색이 확 어두워지고 표정이 얼어붙었다.“너 후회하지 마.”그는 이 한마디만 내던지고 가정법원으로 들어갔다.박민정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씁쓸했다.후회?그런 건 모르겠고 이젠 지쳐버렸다.한 사람이 떠날 결심을 했을 땐 아마 일말의 희망도 얻지 못하고 마음속에 쌓인 실망이 너무 커 더는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겠지.이혼 절차가 진행되고 직원이 두 사람에게 정말 이혼하기로 결심했냐고 물었을 때 박민정은 아주 단호하게 대답했다.“네.”그녀의 확고한 눈빛에 유남준은 가슴이 움찔거렸다.수속을 마치고 한 달이란 숙려기간이 있어 두 사람은 한 달 뒤에 또 이리로 와야 한다.만약 이 한 달 동안 오지 않으면 이혼 신청도 자동으로 폐지된다.가정법원을 나선 후 박민정이 유독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그럼 다음 달에 봐요. 잘 있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곧게 빗속으로 뛰쳐들어가 택시를 잡고 떠나가 버렸다.유남준은 멀어져가는 차를 바라보며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이건 아마도 해탈이겠지.더는 그녀와 얽힐 필요도 없
기사를 열어보니 유앤케이 그룹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바움 그룹을 성공적으로 인수했다고 발표하는 내용이었다.이 세상에 더는 바움 그룹이 존재하지 않는다...기사에는 유남준의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잘생긴 옆모습과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이 인상적이었다.사진 아래에 댓글도 아주 많이 달렸다.「유남준 완전 잘생겼어, 젊은 나이에 그룹 총수라니.」「아쉽게도 유부남이네. 결혼 상대가 박씨 일가의 따님이랬나?」「정략결혼이지 뭐. 3년 전 그 기사 다 잊었어? 결혼식 때 유남준이 아예 신부 손을 뿌리치고 떠났었잖아...」「...」인터넷은 모든 걸 기록하고 있다.박민정은 3년 전 결혼식 날 유남준이 자신을 버리고 분노하며 자리를 떠난 일을 거의 잊고 있었다.그렇게 쭉 아래로 댓글을 읽어내려갔다.이 3년간 그녀는 바움이 조만간 무너진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빠를 줄은 몰랐다....유남준은 최근 흐뭇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바움을 인수하고 끝내 통쾌하게 복수했으니.김인우가 웃으며 말했다.“3년 전에 박씨 일가에서 사기 결혼을 강행하더니 인제 드디어 벌 받네.”그는 문득 화제를 돌려 옆에서 일하는 유남준에게 물었다.“남준아, 귀머거리 요즘 너한테 찾아와서 사정하지 않았어?”서명하던 유남준의 손이 멈칫 흔들렸다.왠지 모르지만 요즘 그의 주변에서 박민정 얘기가 끊이지 않는다.거의 이혼하는 마당에 왜 아직도 그녀를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응, 없어.”그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김인우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박씨 일가에 이렇게 큰일이 발생했는데 박민정이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니?“걔 설마 진짜 해탈한 거 아니야? 누가 그러는데 걔네 엄마가 걔 찾느라고 사방으로 돌아다닌대. 대체 어디 숨었길래.”김인우가 쉴 새 없이 떠들어대자 유남준은 짜증이 확 밀려와 눈썹을 찌푸렸다.“나가!”김인우는 화들짝 놀라더니 그제야 그의 심기를 건드린 걸 알아채고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한 채 대표이사 사무실을 나섰다.그가 떠난 후 유남준은 무심코 휴대폰을 들여다
박민정은 오른쪽 귀에서 피가 나는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한수민은 이토록 연약하고 무능한 딸을 보자 자기 자신이 불쌍하게 느껴졌다.그녀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문서를 박민정에게 건네주었다.“잘 살펴봐.”“엄마가 널 위해서 만들어준 배경이니까.”문서를 받아들자 문서에는 혼인계약서 다섯글자만 보였다.박민정은 문서를 열어보았다.「...박민정 양은 최명길 군의 아내가 되여 그의 일생을 책임지고... 최명길 군은 박진정 양의 가족들의 생활을 보장해주고 600억의 자산을 박씨 집안에게 제공해준다...」최명길. 그는 진주시의 오래된 사업가 중 한명으로 올해 일흔에서 여든이었다.박민정은 뇌가 아릿하게 당겨오는 것 같았다.한수민이 이어 말하는 게 들렸다.“최 사장님이 말씀 하셨어. 네가 재혼이어도 불쾌해 하지 않을거고 자기한테 시집만 오면 박씨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겠다고.”한수민은 기대에 찬 눈으로 박민정을 보면서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으면서 말했다.“착한 우리 딸. 너는 엄마랑 동생을 실망 시키지 않을거야. 맞지?”박민정은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녀는 손 안에 든 계약서를 꽉 움켜쥔 채 말했다.“저랑 남준 씨, 아직 완전히 이혼한 게 아니에요.”한수민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말했다.“최 사장님이 말씀하셨어. 먼저 결혼식을 올린 다음에 혼인신고해도 된다고. 어차피 유남준은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닌데 엄마는 네 선택을 존중한단다. 너희 둘 이혼 허락해줄게.”박민정과 유남준의 결혼을 무를 수도 없었다.한수민은 아들의 말대로 딸이 아직 어릴 때 그 가치를 최대한 사용하고 싶었다.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목이 메어왔다.“뭐 하나만 물어도 돼요?”그녀는 잠깐 멈칫하고 말을 이었다.“제가 친딸은 맞는 거예요?”한수민은 흠칫했다.어르고 달래던 한수민은 바로 표정이 바뀌어 책망하듯이 얘기했다.“내가 너만 아니었으면 내 몸매가 이렇게 될 일이 있었겠니? 세계적인 무용가가 진창에 떨어질 일이 있었겠냐고! 너는 정
주위를 둘러보자 그저 낯설게 느껴졌다.그녀는 또 돌아가는 길을 잊었다.핸드폰을 꺼내서 내비게이션을 킬 생각이었지만 또 한참 동안 사는 곳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연지석은 쭉 그녀를 따라오고 있었는데 아까 유남준이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박민정 혼자 제자리에 서 있는 걸 보고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박민정.”박민정은 유남준이 돌아온 줄 알았다.그녀는 기대 어린 눈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결국 실망하고 말았다. 연지석은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나 진짜 기억 안 나? 나 뚱이야. 잊은 거야?”연지석은 그녀를 일깨워줬다.박민정은 그제야 생각이 났다. 어릴 때 은정숙을 따라서 시골에 가 살 때 친해진 절친 뚱이.그때 연지석은 뚱뚱한 데다가 박민정보다도 키가 작았다. 근데 지금은 190센티미터는 훌쩍 넘는 키에 얼굴도 굉장히 잘생겨졌다.“생각났어. 너 많이 변했다. 못 알아봤네.”어릴 때 친구를 우연히 마주치는 건 꽤 기쁜 일이었다.“가자. 데려다줄게.”박민정을 데려다주면서 그는 그녀가 작고 볼품없는 모텔에 묵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유씨 집안 같은 부잣집 가문이 박민정과 이혼한다 해도 그녀를 이런 누추한 곳에 데려다 놓는 건 말도 안 됐다.박민정은 조금 멋쩍게 말했다.“우스운 꼴만 보였네. 나 여기 묵어. 아주머니한테는 말하지 마! 걱정하실라.”연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너무 늦은 시간이었다.그는 계속 여기 있을 수도 없었다.연지석은 그저 내일 다시 박민정을 만나러 오겠다고 하고 떠났다.모텔을 떠나는 연지석은 길 구석에 세워진 검은색 캐딜락 한 대를 발견하지 못했다.박민정에게 있어서 어디에 묵는지는 다 똑같았다.연지석이 떠났다.술을 마셔서인지 위가 불편했고 머리도 어지러웠다.머릿속에서 유남준이 한 말이 맴돌았다.‘화장은 무슨 귀신처럼 해서... 너 같은 사람을 어떤 남자가 좋아하겠어?!’그녀는 힘을 주어 얼굴에 남은 화장과 입술의 립스틱을 문질렀다. 창백했던 얼굴은 그
하지만 박민정은 증명해 냈다. 난청이라도 피아노, 춤, 노래 모두 그녀는 정상인보다 모자라지 않았다.이 기사는 마치 빛 같았다. 연지석은 그렇게 천천히 일어설 수 있었다.연지석이 자세하게 말하는 그 빛 났던 순간들은 박민정 본인도 잊기 직전이었다.연지석은 그녀를 묵을 곳으로 데려다주었다.박민정은 웃으면서 그한테 말했다.“고마워. 나도 원래의 날 잊기 직전이었어.”연지석은 그녀와 밥 먹으러 갔다.하루 종일 함께 있으면서도 그는 섬세하게도 박민정이 결혼한 후의 일들은 묻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이 흘렀다.날짜를 확인해보니 이혼이 예정된 5월 15일과는 열흘 좀 넘게 남아 있었다.한수민과의 약속이 문득 생각이 났다.그녀는 어느 아침, 돌아간 아빠를 보러 갔었다.돌아가신 아빠의 묘비 앞에서, 자상한 사진 속의 아빠를 보며 박민정은 목이 메왔다.“아빠. 보고 싶어요.”여린 바람이 가볍게 박민정의 볼을 스쳤다.그녀는 코끝이 시렸다.“아빠. 만약 지금 아빠를 보러 가면 무조건 저한테 화내시겠죠?”그는 묘비에 붙은 나뭇잎을 하나하나 떼여냈다.“저도 제가 조금 더 강해야 한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죄송해요...”묘비 앞에 한참을 서 있고서야 박민정은 발걸음을 옮겼다.그녀는 떠날 때 유골함을 샀다.그러고는 사진관에 가서 일하는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 속에서 흑백사진을 찍었다.이 모든 걸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그녀는 창밖의 풍경을 보면서 넋을 놓았다.이때 핸드폰이 울렸다.은정숙 아줌마였다.“민정아. 요새 어떻게 지내?”박민정은 은정숙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잘 지내요.”은정숙은 한숨을 내쉬고는 잔소리했다.“누가 너더러 나한테 몰래 돈 보내랬니? 그 돈, 나는 필요 없다. 뒀다가 너 써. 나중에 사업 같은 거 할 때나...”지난 몇 년간, 박민정은 몰래 그녀에게 돈을 보내왔다.그녀는 시골 사람이다 보니 그리 많은 돈을 쓸 일도 없었고 모두 저축해 두고 있었다.전화 저편에서 은정숙의 관심 어린
이지원은 인터뷰를 마친 후 한수민을 찾아갔다.그리고 한수민과 박민정 동생이 600억을 위해 박민정을 늙은이에게 시집 보내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유남준이 대답이 없자 이지원은 말을 얹었다.“민정 씨 어머니 말로는 민정 씨가 먼저 600억을 요구했다더라고요. 그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그리고 아직 두 분 숙려기간이 끝나지 않아서 정식으로 결혼하는 대신 식만 올리기로 했다고요.”...박민정은 엄마와 동생이 자기 의견은 모조리 무시한 채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신혼을 준비 중인 건 꿈에도 몰랐다.한수민은 그녀가 절대 죽을 용기도 없고 절대 죽지 못하리라 생각했다.어릴 때부터 많은 괴롭힘을 당했지만 떠나기를 선택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이번에도 같을 것으로 생각했다.동생인 박민호는 진즉에 그 600억을 받아서 새로운 회사를 준비 중이었다. 그는 박민정에게 단 조금의 죄책감도 없었다.그리고 이날, 박민정은 한수민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최 사장님이 좋은 날짜 받아오셨어. 이번 달 15일이야. 나흘 동안 잘 준비해서 시집 가면 돼. 이번에는 꼭 이 남자의 마음을 잡아야 한다. 알았지?”박민정은 이 두 메시지를 보면서 마음이 복잡해졌다.15일. 기쁘고 즐거워야 할 날이었다. 그녀가 유남준과 이혼을 약속한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가 떠나려는 날이기도 했다. 박민정은 자신이 또 잊을까 봐 이날을 노트에 기록해 뒀다.그리고 그녀는 친필로 유서를 써 내렸다.필을 들었지만 뭘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에 그녀는 윤정숙과 연지석에게 말을 남겼다.다 쓴 뒤 그녀는 유서를 자신의 베개 밑에 넣어뒀다.사흘 뒤.14일에는 비가 크게 내렸다.핸드폰을 테이블에 올려놨는데 온종일 벨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모두 한수민이 걸어온 전화였고 그녀가 어디 있는지 묻는 것이었다.내일이면 결혼식이니 그녀더러 집에 들러 최 사장에게 시집갈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박민정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 새로 맞춘 붉은 드레스를 입고 예쁘게 화장도 했다.
“그럼 됐어. 약속했으니까 꼭 지키는 거야.”박민정의 눈가에 다정한 미소가 어렸다.연지석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응.”비행기가 곧 이륙할 예정이라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연지석은 짧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다음에 보자.”“그래, 잘 가.”박민정은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마음 한구석에 얹혀 있던 돌덩이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지금까지는 늘 자신이 연지석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제는 자신도 어느 정도 힘이 생겨 그를 도울 수 있게 되었다.연지석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유남준이 다정하게 박민정의 어깨를 감쌌다.“가자, 우리도 돌아가야지.”“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공항을 빠져나왔다.밖으로 나오자 언제부터인가 가늘고 부드러운 빗방울이 흩날리고 있었다.운전기사가 다가와 우산을 건넸고 유남준은 조심스럽게 박민정에게 씌워 주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차로 향했다.가는 길에 박민정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다시금 분주한 인파를 둘러보았다.지금 그녀는 보청기를 끼지 않고도 주변의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소리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귀에 들어왔는데 그 순간이 참으로 신기했다.“민정아, 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문득, 유남준이 걸음을 멈추었다.박민정도 따라서 멈춰 서며 그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뭔데요?”유남준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랑해.”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박민정은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참...”사람들이 있는 곳이라 그런지 박민정은 조금 쑥스러워졌다.“갑자기 왜 그래요?”유남준이 미소를 지었다.“그냥, 지금 말하고 싶었어.”“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좋아해.”“좋아하는 게 다야?”유남준이 장난스럽게 되물으니 박민정은 어쩐지 부끄러워졌다.“그럼 뭐라고 해야 해요? 그냥 좋아하는 거예요.”“그래, 좋아한다는 것도 괜찮지.”유남준이 흐뭇하게 웃었다.박민정이 그
옆에서 지켜보던 정수미가 박민정이 병상에서 일어나려 하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민정아, 어디 가려고?”“친구 만나러요.”“지금은 푹 쉬어야 할 때야.”정수미가 걱정스레 만류했다.“며칠 후에 만나면 안 돼?”하지만 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그 친구가 곧 해외로 떠나거든요.”연지석에게 진 빚이 너무 많았다. 이번에도 배웅하지 않는다면 정말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그래. 대신 조심해야 해.”정수미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박민정이 갑자기 이런 결정을 내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네.”박민정은 짧게 대답하고 병실을 나섰다.밖에서는 유남준과 정윤아가 기다리고 있었다.“언니, 어디 가려고요?”정윤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지금은 쉬어야 하는데.”“좀 있다가 설명할게. 지금은 시간이 없어.”박민정이 이렇게 말하며 유남준을 바라보았다.“남준 씨, 지석이가 출국한대요. 지금 공항에 있어요.”그녀는 가장 중요한 신뢰를 지키고 싶었다. 어디를 가는지, 무엇을 하려는지 숨기고 싶지 않았다.유남준은 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차로 데려다줄게.”“정말요?”박민정은 망설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에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다.“당연하지. 별일도 아닌데 뭘.”유남준은 가볍게 대답하며 차 쪽으로 걸어갔다.“가자.”“네.” 박민정이 웃으며 따라갔다.차에 오르자 유남준은 공항으로 향하며 물었다.“갑자기 왜 떠나는 거야?”박민정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원래 진주시에 온 것도 국내 사업 관련 일이 있어서였어요. 그런데 내가 실종되면서 오래 머물렀던 거죠. 아마 이제 가족 쪽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그럼 제대로 인사해야겠네.”유남준이 담담하게 말했다.“네.”박민정은 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기분 나쁘진 않아요?”유남준은 미소를 지었다.“예전이라면 그랬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예전에는 연지석과 박민정 사이에 뭔가 있다고 생각했다.
연지석은 한참을 그 자리에서 머물렀다.차를 몰고 떠났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인사도 없이 떠나는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그는 휴대폰을 꺼내 박민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민정아, 나 집에 가려고. 너한테 인사하려고 연락했어. 지금 몇 병동에 있어? 잠깐 보러 갈게.]하지만 메시지를 보낸 후, 한참이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한편, 박민정은 수술을 마친 뒤 처음으로 상태를 점검하는 날이었다. 실을 제거하고 청력을 확인하는 중요한 검사들이 진행됐다. 의사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고 김인우 역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그는 백 퍼센트 확신하지 못했다. 과연 박민정의 청력이 완전히 회복될 수 있을까.박민정은 눈을 감은 채 손을 살짝 떨고 있었다.오랜 세월, 그녀는 늘 이렇게 생각했다.‘만약 내가 정상적인 청력을 되찾는다면 어떤 기분일까?’이제 그 기회가 왔으니 누구보다 떨리고 누구보다 기대됐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모든 장비들이 제거되었고 그녀의 귀에 미세한 소음이 울렸다. 그건 수술 도구들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들려?” 김인우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묻자 박민정은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순간, 눈가가 촉촉해졌다.“네. 들려요.”그녀의 대답에 김인우의 눈빛이 환하게 빛났다.“잘됐어! 정말 잘됐어. 수술이 성공했어.”그는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말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박민정도 고개를 끄덕였다.“당분간 푹 쉬어야 해. 무리하면 안 돼.” 김인우가 급히 덧붙였다.“이제 테스트를 좀 해볼게요.”“네.”김인우는 간단한 청력 검사를 진행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완전히 정상 수준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보청기가 필요 없는 상태였다.“아주 좋아. 앞으로 조심해서 관리하고 정기적으로 검사만 받으면 문제없을 거야.”검사를 마친 뒤, 박민정은 병실 밖으로 나왔고 거기엔 유남준, 정수미, 정윤아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모두가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어때요, 김 선생님?”정수미가 다급히 물
연지석은 잠시 말없이 있었다.“홍 비서가 처음엔 몰랐지만 이제 알고 나서 후회하는 건가?”“그건 아니야. 그냥 우리 두 사람이 약혼한 이후로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나보고 배신하지 말라고. 만약 다른 여자가 생기면 미리 한마디만 해 달래.” 하민재의 말에 연지석은 서류를 넘기면서 무심히 말했다. “괜찮은 여자 같은데?”“형은 이게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하민재가 되묻자 연지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연애 전문가가 아니지만 네가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잊었어? 홍 비서는 너한테 아무 감정도 없다고 했잖아. 너무 기대하지 마. 실망하는 건 결국 너야.”그 한마디가 꿈속에서 허우적거리던 하민재를 깨웠다. 그제야 왜 자신이 불편했는지 깨달았다.“형, 솔직히 말해서... 나, 주영 씨를 좋아하는 것 같아.”홍주영과 함께 지내면서 비로소 알았다. 그동안 자신이 했던 연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좋아한다면 노력해. 먼저 네 자신부터 바로잡고.”“하지만 주영 씨는 유남우를 좋아하잖아...”그 한마디에 연지석도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하민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형, 왜 우리가 좋아하는 여자들은 다 유씨 형제랑 얽히는 걸까?”더 이상 서류를 볼 기분이 없었던 연지석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나는 이미 놓았어. 하지만 너는 다르잖아. 이미 홍 비서와 약혼까지 했으니까 널 선택한 거야.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잠시 말을 멈췄던 연지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난 곧 해외에 가서 일을 처리해야 해. 여긴 네가 좀 맡아줘.”“알았어.”하민재는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었고 반대편에서도 연지석이 전화를 끊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설인하의 자리로 갔다.“인하 씨, 민정이 수술은 어떻게 됐어요?”설인하는 그제야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아마 오늘이면 수술이 성공했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연지석이 묻지 않았다면 그녀는 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늘 퇴근 후 시간이 나면 병원에 가서 박민정
홍주영은 그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지 못하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그제야 하민재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정리를 시작했다.혼자 소파에 앉은 홍주영은 침실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연스레 유남우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그녀는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민재가 지금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도 그저 일시적인 신선함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예전 그를 둘러싸고 있던 여자들은 하나같이 자신과는 전혀 다른 부류였으니까.하지만 이제 그녀도 나이가 찼고 결혼해야 할 때가 됐으며 무엇보다 할머니를 안심시켜야 했다.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홍주영은 노트북을 꺼내 업무를 시작했다. 일에 몰두하자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얼마나 지났을까.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드니 하민재가 기대에 찬 얼굴로 걸어나오며 말했다.“주영 씨, 와서 좀 봐요. 내가 잘 정리했는지 확인해줘요.”홍주영은 노트북을 닫으며 사실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아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문을 넘는 순간, 그녀는 깜짝 놀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수선했던 방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바닥에 놓여 있던 여행 가방도 사라져 있었다.“주영 씨 옷도 전부 정리해서 옷장에 넣어뒀어요.”하민재가 옷장 앞에 서서 문을 활짝 열자 안에는 가지런히 개켜진 옷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계절별로 정리된 옷들이 걸려 있었고 색상과 종류에 따라 완벽하게 분류되어 있었다.홍주영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이걸 어떻게 한 거예요?”이런 정리는 능숙한 사람도 쉽지 않다. 그런데 명문가 출신인 하민재가 직접 했다고?“그냥 만족하다고만 해주면 안 돼요?”그가 칭찬을 바라는 듯 바라보자 홍주영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만족해요. 내가 하는 것보다 훨씬 낫네요.”자신도 믿기 힘들 정도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난장판이었던 방이 이렇게 변할 줄이야.“그럼 됐어요.”“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홍주영은 유남우의 말을 들으며 사진을 바라보았다. 사진 속 하민재는 여러 여자와 함께 있었고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여자들은 모두 달랐다.그녀는 사진을 꽉 쥐었다. 마음이 아프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하민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는 지금 그녀의 약혼자였다. 그녀의 약혼자로서 이렇게 많은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찌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겠는가?그러나 약혼 전후로 하민재가 어떤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홍주영은 고개를 들어 유남우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도련님, 제 사적인 문제입니다. 신경 써 주실 필요 없습니다.”그리고 덧붙였다.“또한, 저는 도련님께서 제 약혼자를 조사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게다가 도련님께서 조사하신 것들은 제가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던 내용이에요.”홍주영은 순진한 사람이 아니었다. 할머니의 결정이라고 해서 덥석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그녀는 이미 하민재에 대해 충분히 알아본 후에야 이 결혼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유남우는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잠시 후, 그는 입을 열었다.“홍 비서, 알다시피 그런 남자가 한 여자에게 마음을 정착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믿지 마. 바람둥이가 변하는 건 정말 어렵거든.”홍주영은 손을 꽉 쥐었다.“충고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 제 분수를 잘 알고 있어요. 저는 민재 씨가 저 때문에 변할 거라고 기대한 적 없어요. 저희는 단지 결혼이 필요했고 서로에게 적합했을 뿐입니다.”숨이 막힐 듯한 기분이 들었고 이 공간에 더 머무를 수 없었다.‘도련님이 언제부터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홍주영은 차갑게 말을 이었다.“더 이상 볼일이 없으시면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막 집에 왔는데 아직 정리도 못 했거든요.”말을 마친 그녀는 유남우의 반응을 기다리지도 않고 곧장 나가버렸다.유남우는 텅 빈 사무실에서 홀로 남았고 그녀가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그 순간,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과거 자신만을 바라보던 그 작은 소녀가 점점
두 사람의 모습을 본 회사 직원들은 깜짝 놀랐다. 마침 택배를 가지러 나왔던 비서들이 멀리서 그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홍 비서는 정말 운도 좋네.”“그러게. 대체 어떻게 해서 민재 씨랑 엮이게 된 거야?”“뭐가 어때서? 민재 씨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 다 알잖아. 그리 좋은 평판은 아니지. 여자도 많았고.”“그러게. 아마도 홍 비서가 유 대표님 따라다니면서 술자리에서 만난 거겠지? 다른 사람들은 하나같이 실패했는데 그 와중에 홍 비서는 성공했네.”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으며 말끝마다 시샘이 묻어나왔는데 멀리서 들어도 느껴질 정도였다.하지만 홍주영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부터 무덤덤한 성격이었고 가까운 친구도 거의 없었다. 특히 그런 자리에서 인맥은 더더욱 만들지 않았다.비서들은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아까의 험담은 없던 일처럼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홍 비서님, 약혼 축하드려요!”홍주영은 담담한 얼굴로 답했다.“고마워요.”그러자 한 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결혼식은 언제쯤 하실 건가요?”“아마 설 즈음이 될 것 같아요.”양가 할머니들이 설날이 가장 흥겹다며 날짜를 그렇게 정하자고 했다.정말 결혼을 한다는 말에 비서들의 시선이 미묘하게 변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단순한 비서가 아니라 명문가의 사모님이 될 사람이었다.“홍 비서님, 결혼식 때 저희도 초대받을 수 있을까요?”하씨 가문에서 열리는 결혼식이라면 하객으로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인맥을 쌓을 기회였다. 비서들은 당연히 그녀가 승낙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대놓고 거절할 수 있겠는가.그러나 홍주영은 단호했다.“죄송해요. 저는 가족과 친한 친구들만 초대할 생각이에요.”그 한마디에 비서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렇게까지 깔끔하게 거절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홍주영은 더 이상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곧장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그녀가 사라지자 비서들은 다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별
이튿날 아침, 홍주영은 할머니께 작별을 고하고 도주로 돌아갔다.집 앞에서는 하민재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날 밤 술을 마신 탓에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그래도 기분만큼은 한껏 들떠 있었다.홍주영이 밖으로 나오자 그는 곧장 다가가 그녀의 여행 가방을 받아들었다.“내가 들게요.”“고...”고맙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뻔했지만 그녀는 어제 하민재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곧바로 말을 바꿨다.“네, 좋아요.”그 말에 하민재는 활짝 웃으며 그녀의 짐을 트렁크에 실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그녀와 함께 차에 올랐다.운전기사가 도와주려 했지만 하민재가 눈짓 한 번 주자 곧바로 손을 거뒀다. 이건 분명 자기 아내 될 사람 앞에서 점수를 따려는 사장님의 의도일 터였다. 그러니 굳이 끼어들어 방해할 필요는 없었다.차에 오르자마자 홍주영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녀가 화면을 열어보니 유남우였다.[언제 도착해?]답장을 하려던 찰나,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하민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주영 씨, 먼저 말해 두지만 주영 씨 핸드폰을 일부러 본 건 아니에요.”홍주영이 그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네, 상관없어요.”사실 그는 억울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그녀가 하민재에게 휴대폰 메시지를 보여준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었으니까.그러자 하민재는 슬쩍 말을 돌렸다.“근데 주영 씨 이번에 휴가 다섯 날이나 썼잖아요?”“네, 연차 쓴 거예요.”홍주영은 평소에 휴가를 거의 쓰지 않았고 이번이 유일하게 길게 쉰 경우였다.“내 기억이 맞다면 오늘이 딱 다섯 번째 날인데요? 근데 벌써 출근한다고요?”하민재는 뭔가 수상쩍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남자의 직감이란 게 가끔은 무서울 만큼 정확할 때가 있다.홍주영은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회사에 무슨 일이 생겼나 봐요.”그러나 하민재는 곧바로 반박했다.“주영 씨는 그냥 비서예요. 주영 씨가 없다고 회사가 굴러가지도 않는 것도 아니고.”그는 말하고 나서야 자신이 너무 직설적으로 말해
하민재는 홍주영이 왜 그렇게까지 거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우리 약혼한 사이잖아요. 뭐가 문제에요? 게다가 걱정 마여, 나는 절대 신사적인 사람이니까.”신사적인 사람... 스스로를 신사라고 말하는 사람이 과연 진짜 신사일까?홍주영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래도 안 돼요. 결혼하고 나서 여기서 지낼게요.”그녀는 평생 할머니와 함께 살아왔고 자연스럽게 할머니의 영향을 받았다.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남자 집에서 머무르는 걸 달가워할 리 없었다.하민재는 한참 후에야 그녀의 뜻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럼 내가 잠시 후에 주영 씨랑 할머니를 모셔다드릴게요.”“네, 고마워요.”그녀는 예의 바르고도 사무적인 태도였다. 하지만 그 말에 하민재는 다시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다시 꼭 잡으며 불만을 토로했다.“난 주영 씨 약혼자예요. 이제 고맙다는 말 좀 하지 마요. 그냥 나한테 막 시켜요, 데려다 달라고. 부탁이 아니라, 명령하라고요. 알겠죠?”홍주영은 그가 술에 취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딘가 투정 부리는 아이 같기도 했고 그 모습에 심장이 쿵쿵 울렸다. 그녀는 그를 다시 쳐다보다가 결국 눈길을 피하고 말았다.“알겠어요.”“그래야죠.”하민재는 다시 그녀에게 몸을 기울였다. 홍주영은 그가 또다시 뺨에 입을 맞추려는 줄 알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그런데 아니었다. 그는 단순히 피곤했을 뿐 그대로 그녀의 어깨에 기댔다.그 순간, 마침 할머니 두 분이 나왔고 그들은 그렇게 다정한 모습으로 함께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아이고, 저 녀석. 저렇게 커서도 주영이한테 기대서 자네.”하민재의 할머니는 휴대전화를 꺼내 두 사람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사진 속에서 홍주영은 얼굴이 새빨갛고 하민재는 마치 아이처럼 편안한 표정이었다.그 모습을 본 홍주영의 할머니도 웃음을 터뜨렸다.“주영이는 맨날 결혼 안 한다고 하더니, 내가 보기엔 제대로 된 사람을 못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