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은 오른쪽 귀에서 피가 나는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한수민은 이토록 연약하고 무능한 딸을 보자 자기 자신이 불쌍하게 느껴졌다.그녀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문서를 박민정에게 건네주었다.“잘 살펴봐.”“엄마가 널 위해서 만들어준 배경이니까.”문서를 받아들자 문서에는 혼인계약서 다섯글자만 보였다.박민정은 문서를 열어보았다.「...박민정 양은 최명길 군의 아내가 되여 그의 일생을 책임지고... 최명길 군은 박진정 양의 가족들의 생활을 보장해주고 600억의 자산을 박씨 집안에게 제공해준다...」최명길. 그는 진주시의 오래된 사업가 중 한명으로 올해 일흔에서 여든이었다.박민정은 뇌가 아릿하게 당겨오는 것 같았다.한수민이 이어 말하는 게 들렸다.“최 사장님이 말씀 하셨어. 네가 재혼이어도 불쾌해 하지 않을거고 자기한테 시집만 오면 박씨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겠다고.”한수민은 기대에 찬 눈으로 박민정을 보면서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으면서 말했다.“착한 우리 딸. 너는 엄마랑 동생을 실망 시키지 않을거야. 맞지?”박민정은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녀는 손 안에 든 계약서를 꽉 움켜쥔 채 말했다.“저랑 남준 씨, 아직 완전히 이혼한 게 아니에요.”한수민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말했다.“최 사장님이 말씀하셨어. 먼저 결혼식을 올린 다음에 혼인신고해도 된다고. 어차피 유남준은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닌데 엄마는 네 선택을 존중한단다. 너희 둘 이혼 허락해줄게.”박민정과 유남준의 결혼을 무를 수도 없었다.한수민은 아들의 말대로 딸이 아직 어릴 때 그 가치를 최대한 사용하고 싶었다.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목이 메어왔다.“뭐 하나만 물어도 돼요?”그녀는 잠깐 멈칫하고 말을 이었다.“제가 친딸은 맞는 거예요?”한수민은 흠칫했다.어르고 달래던 한수민은 바로 표정이 바뀌어 책망하듯이 얘기했다.“내가 너만 아니었으면 내 몸매가 이렇게 될 일이 있었겠니? 세계적인 무용가가 진창에 떨어질 일이 있었겠냐고! 너는 정
주위를 둘러보자 그저 낯설게 느껴졌다.그녀는 또 돌아가는 길을 잊었다.핸드폰을 꺼내서 내비게이션을 킬 생각이었지만 또 한참 동안 사는 곳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연지석은 쭉 그녀를 따라오고 있었는데 아까 유남준이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박민정 혼자 제자리에 서 있는 걸 보고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박민정.”박민정은 유남준이 돌아온 줄 알았다.그녀는 기대 어린 눈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결국 실망하고 말았다. 연지석은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나 진짜 기억 안 나? 나 뚱이야. 잊은 거야?”연지석은 그녀를 일깨워줬다.박민정은 그제야 생각이 났다. 어릴 때 은정숙을 따라서 시골에 가 살 때 친해진 절친 뚱이.그때 연지석은 뚱뚱한 데다가 박민정보다도 키가 작았다. 근데 지금은 190센티미터는 훌쩍 넘는 키에 얼굴도 굉장히 잘생겨졌다.“생각났어. 너 많이 변했다. 못 알아봤네.”어릴 때 친구를 우연히 마주치는 건 꽤 기쁜 일이었다.“가자. 데려다줄게.”박민정을 데려다주면서 그는 그녀가 작고 볼품없는 모텔에 묵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유씨 집안 같은 부잣집 가문이 박민정과 이혼한다 해도 그녀를 이런 누추한 곳에 데려다 놓는 건 말도 안 됐다.박민정은 조금 멋쩍게 말했다.“우스운 꼴만 보였네. 나 여기 묵어. 아주머니한테는 말하지 마! 걱정하실라.”연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너무 늦은 시간이었다.그는 계속 여기 있을 수도 없었다.연지석은 그저 내일 다시 박민정을 만나러 오겠다고 하고 떠났다.모텔을 떠나는 연지석은 길 구석에 세워진 검은색 캐딜락 한 대를 발견하지 못했다.박민정에게 있어서 어디에 묵는지는 다 똑같았다.연지석이 떠났다.술을 마셔서인지 위가 불편했고 머리도 어지러웠다.머릿속에서 유남준이 한 말이 맴돌았다.‘화장은 무슨 귀신처럼 해서... 너 같은 사람을 어떤 남자가 좋아하겠어?!’그녀는 힘을 주어 얼굴에 남은 화장과 입술의 립스틱을 문질렀다. 창백했던 얼굴은 그
하지만 박민정은 증명해 냈다. 난청이라도 피아노, 춤, 노래 모두 그녀는 정상인보다 모자라지 않았다.이 기사는 마치 빛 같았다. 연지석은 그렇게 천천히 일어설 수 있었다.연지석이 자세하게 말하는 그 빛 났던 순간들은 박민정 본인도 잊기 직전이었다.연지석은 그녀를 묵을 곳으로 데려다주었다.박민정은 웃으면서 그한테 말했다.“고마워. 나도 원래의 날 잊기 직전이었어.”연지석은 그녀와 밥 먹으러 갔다.하루 종일 함께 있으면서도 그는 섬세하게도 박민정이 결혼한 후의 일들은 묻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이 흘렀다.날짜를 확인해보니 이혼이 예정된 5월 15일과는 열흘 좀 넘게 남아 있었다.한수민과의 약속이 문득 생각이 났다.그녀는 어느 아침, 돌아간 아빠를 보러 갔었다.돌아가신 아빠의 묘비 앞에서, 자상한 사진 속의 아빠를 보며 박민정은 목이 메왔다.“아빠. 보고 싶어요.”여린 바람이 가볍게 박민정의 볼을 스쳤다.그녀는 코끝이 시렸다.“아빠. 만약 지금 아빠를 보러 가면 무조건 저한테 화내시겠죠?”그는 묘비에 붙은 나뭇잎을 하나하나 떼여냈다.“저도 제가 조금 더 강해야 한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죄송해요...”묘비 앞에 한참을 서 있고서야 박민정은 발걸음을 옮겼다.그녀는 떠날 때 유골함을 샀다.그러고는 사진관에 가서 일하는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 속에서 흑백사진을 찍었다.이 모든 걸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그녀는 창밖의 풍경을 보면서 넋을 놓았다.이때 핸드폰이 울렸다.은정숙 아줌마였다.“민정아. 요새 어떻게 지내?”박민정은 은정숙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잘 지내요.”은정숙은 한숨을 내쉬고는 잔소리했다.“누가 너더러 나한테 몰래 돈 보내랬니? 그 돈, 나는 필요 없다. 뒀다가 너 써. 나중에 사업 같은 거 할 때나...”지난 몇 년간, 박민정은 몰래 그녀에게 돈을 보내왔다.그녀는 시골 사람이다 보니 그리 많은 돈을 쓸 일도 없었고 모두 저축해 두고 있었다.전화 저편에서 은정숙의 관심 어린
이지원은 인터뷰를 마친 후 한수민을 찾아갔다.그리고 한수민과 박민정 동생이 600억을 위해 박민정을 늙은이에게 시집 보내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유남준이 대답이 없자 이지원은 말을 얹었다.“민정 씨 어머니 말로는 민정 씨가 먼저 600억을 요구했다더라고요. 그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그리고 아직 두 분 숙려기간이 끝나지 않아서 정식으로 결혼하는 대신 식만 올리기로 했다고요.”...박민정은 엄마와 동생이 자기 의견은 모조리 무시한 채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신혼을 준비 중인 건 꿈에도 몰랐다.한수민은 그녀가 절대 죽을 용기도 없고 절대 죽지 못하리라 생각했다.어릴 때부터 많은 괴롭힘을 당했지만 떠나기를 선택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이번에도 같을 것으로 생각했다.동생인 박민호는 진즉에 그 600억을 받아서 새로운 회사를 준비 중이었다. 그는 박민정에게 단 조금의 죄책감도 없었다.그리고 이날, 박민정은 한수민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최 사장님이 좋은 날짜 받아오셨어. 이번 달 15일이야. 나흘 동안 잘 준비해서 시집 가면 돼. 이번에는 꼭 이 남자의 마음을 잡아야 한다. 알았지?”박민정은 이 두 메시지를 보면서 마음이 복잡해졌다.15일. 기쁘고 즐거워야 할 날이었다. 그녀가 유남준과 이혼을 약속한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가 떠나려는 날이기도 했다. 박민정은 자신이 또 잊을까 봐 이날을 노트에 기록해 뒀다.그리고 그녀는 친필로 유서를 써 내렸다.필을 들었지만 뭘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에 그녀는 윤정숙과 연지석에게 말을 남겼다.다 쓴 뒤 그녀는 유서를 자신의 베개 밑에 넣어뒀다.사흘 뒤.14일에는 비가 크게 내렸다.핸드폰을 테이블에 올려놨는데 온종일 벨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모두 한수민이 걸어온 전화였고 그녀가 어디 있는지 묻는 것이었다.내일이면 결혼식이니 그녀더러 집에 들러 최 사장에게 시집갈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박민정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 새로 맞춘 붉은 드레스를 입고 예쁘게 화장도 했다.
핸드폰이 박민정 손에서 떨어졌다.빗방울이 핸드폰을 적셨고 스크린도 검게 변했다.박민정은 아빠의 묘에 기대서 품 안의 나무 인형을 끌어안았다. 차가운 비를 맞으면서 아빠가 자상한 얼굴로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걸 보는 것만 같았다.깊은 사랑은 낭만적이고, 가벼운 사랑은 현실적이다. 하지만 둘 중 어느 쪽이든, 미련이 남는 것은 같았다. ...두원 별장.유남준은 끊겨버린 핸드폰을 보며 불안해졌다.다시 걸어보자, 핸드폰에서 들리는 건 차가운 기계음이었다.“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되며 삐 소리 후 통화료가 부과됩니다...”유남준은 몸을 일으켜 외투를 입은 후 밖으로 나갔다.그러고는 문에서 발걸음을 멈췄다.박민정이 밀당을 하는 것이다!곧 이혼인데 그녀가 못할 게 뭐가 있겠는가?침실로 돌아왔지만 왜인지 모르게 그는 잠들 수가 없었다.박민정이 한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만약 엄마랑 동생이 한 일을 알았다면, 전 절대... 절대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에요. 만약에 제가 당신이 이지원을 좋아한 걸 알았다면...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에요. 만약에 아빠가 결혼식 당일 교통사고가 날 걸 알았다면...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예요.”유남준은 몸을 일으켜 자기도 모르게 박민정의 방문 앞에 섰다.박민정이 그곳을 떠난 지 이미 한 달이 훌쩍 넘었다.그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두컴컴한 것이 무척 답답했다.불을 켜자, 박민정의 아무 물건도 남아 있지 않아 휑해 보였다.유남준이 침대맡 테이블을 열어보자 작은 노트가 있었다.노트에는 딱 한 마디만 적혀 있었다.「떠나기로 결심한 사람이 가장 고통스럽겠지. 마음속으로 이미 수도 없이 발버둥 치고서야 그 결심을 내렸을 테니까.」유남준은 수려한 글씨를 보고 차갑게 웃었다.“고통? 너랑 그 몇 년을 보낸 나는 안 고통스러워?”그는 노트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방을 떠날 때 노트는 다시 깨끗하게 머리맡 테이블에 되돌려졌다.방을 떠난 그는 다시는 잠들지 못했다....한편.연
또 하나는 은정숙에게 남긴 것이었다.그가 열어보자 마지막 줄에 은정숙의 주소가 적혀있었다.연지석은 그대로 뛰쳐나갔다.여기서 교외까지 멀지 않았다. 기껏해서 차로 이십여 분 정도 되는 거리였다.하지만 연지석은 이상하게도 한없이 멀게 느껴졌다.그는 이해가 안 됐다. 자기 눈에 그렇게 찬란하게 반짝이던 사람이 왜 이런 길을 선택했는지.그 동시에 그와 같게 교외로 향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는데 한수민이었다.한수민은 600억을 위해 박민정을 데려다 결혼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교외 묘지.비가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박민정은 묘지에 쓰러져 있었다. 빗줄기는 사정없이 그녀의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의 드레스는 진작 흠뻑 젖었고 피골이 상접해서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았다.연지석은 비를 뚫고 박민정을 향해 달려갔다.“박민정!!”돌아오는 건 바람 소리와 빗소리밖에 없었다. 연지석은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그는 달려가 박민정을 안으며 그녀의 옆에 있는 빈 약병을 발견했다.연지석은 떨리는 손으로 박민정을 안아 올렸다.왜 이렇게 가벼울까.“박민정, 정신 차려! 절대 잠들면 안 돼!”말하면서 그는 산 밑으로 뛰여내려갔다....“사모님, 도착했습니다.”운전기사가 말했다.한수민은 창밖에서 낯선 남자가 뛰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의 품 안에 안긴 건... 박민정이였다.“박민정 이 년이!”그녀는 얼굴을 찌푸리고 우산을 들고 내렸다.오늘 한수민은 한복을 쫙 빼입었는데 빗물이 그의 치맛자락을 적셨다.한수민은 짜증 난다는 듯이 다가가서 박민정을 윽박질렀다.화를 내려는 찰나 그는 연지석 품속에 축 늘어진 박민정을 살폈다. 얼굴은 창백하고 눈은 감겨 있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박민정...”한수민이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는 찰나, 바람에 굴러온 약병을 발견했다.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약병을 주웠는데 약병에는 수면제라는 세글자가 크게 적혀있었다.그 순간, 한수민은 그날 박민정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만약 제가 이 목숨
“네.”박민호는 연지석에게 다가가서 박민정을 뺏으려 했다.하지만 손을 뻗자마자 연지석 때문에 그대로 땅에 고꾸라졌다.“퍽!”소리와 함께 박민호는 1미터 넘게 날아가서 심장을 움켜쥐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한수민은 상황을 보고 급하게 아들을 부축했다. 그리고 연지석을 노려보면서 말했다.“감히 내 아들한테 손을 대!”연지석은 여전히 박민정을 안고 있었다. 도화살 가득한 그 눈에는 차가움이 흘렀다.빗물은 그의 머리카락을 따라 방울방울 떨어졌다.그는 모자 앞에서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그는 귀신 같은 얼굴로 한 글자씩 뱉었다.“죽고 싶어요?”한수민과 박민호는 눈앞의 이 남자에게 놀라서 한순간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연지석은 박민정을 안고 떠나면서 한수민에게 당부하는 걸 잊지 않았다.“민정이 유서에 적혀 있더라고요. 녹음도 있고. 그 녹음에 그쪽이 더 이상 민정이랑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약속했다던데, 잊으셨어요?”박민정은 그 녹음이 법적인 효력이 없다는 건 알았고 그 녹음만으로 모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다는 것도 알았다.하지만 그녀는 한수민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한수민에게 체면은 아주 중요했다.만약 이 녹음이 공개되면 한수민은 자기 딸을 해쳤다는 꼬리표를 평생 달고 다녀야 했다.연지석의 협박에 한수민은 다친 박민호를 데리고 초라하게 떠날 수밖에 없었다.차에 앉아서 한수민은 연지석 품에 안긴, 생사를 알 수 없는 딸을 보며 손바닥을 세게 꼬집었다. “엄마가 모질다고 비난하지 말고 쓸데없는 너 자신을 탓하렴. 유남준 마음 하나 못 사로잡은 널. 지금 이건 전부 네가 초래한 거야.”그 순간 한수민은 엄청난 고통을 느꼈지만 빠르게 냉정해졌다.딸이 죽는 것보다 최 사장과의 거래가 더 중요한 일이었다.연지석은 박민정을 데리고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그리고 박민정이 수술방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았다.수술 중이라는 선명한 세 글자를 보면서 그는 단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수술이 한 시간가량 이어지다가 의
조용히 듣고 있던 유남준은 얼굴이 어두워졌지만, 반박은 하지 않았다.그리고 이런 그의 태도 때문에 그의 친구인 김인우도, 그의 엄마인 고영란도, 더불어 그의 비서인 서다희도, 심지어 집에서 도우미 일을 하는 사람들도 박민정을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김인우는 전화를 한 통 받고 급하게 떠났다.그가 떠난 뒤 유남준은 습관처럼 핸드폰을 꺼내 들었지만, 박민정으로부터 온 전화는 없었다.유남준이 전화를 걸자 여전히 차가운 기계음만 들렸다.“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되며 삐 소리 후 통화료가 부과됩니다.”유남준은 짜증이 나서 핸드폰을 옆에 버렸다.그는 몸을 일으켜 창가에 가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박민정이 새벽에 했던 말이 귀가를 맴돌았다. 그녀는 후회한다고 했다.유남준은 입안이 썼다. 크게 기침을 두 번 하자 등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빠, 담배 좀 적게 피워요. 몸에 안 좋아요.”유남준은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무의식적으로 박민정이 돌아온 줄 알았다.하지만 돌아보니 그 자리에 서 있는 건 단아하게 꾸민 이지원이었다.그는 눈에서 빛이 사라지면서 어색하게 물었다.“무슨 일로 왔어?”이지원은 그를 보는 눈빛이 제법 다정했다.“이모가 가보라고 하셔서요. 민정 씨가 그렇게 빠르게 다른 사람을 찾은 걸 알고 오빠보고 깊이 생각하지 말래요.”그녀의 입에서 말하는 이모는 유남준의 엄마였다.4년 전.유남준의 엄마와 김인우는 같은 차를 타고 적대하고 있던 회사로부터 암살 시도를 당했었다.유남준 엄마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렸고 그때 병원에 O형 피가 부족했는데 마침 박민정이 O형이었다.박민정은 김인우를 안정시키고 수혈하러 갔다.수혈한 후 박민정은 체력이 모자라서 그대로 쓰러졌다.그때 박씨 집안이 이지원의 투자자여서 이지원은 박민정과 사이가 꽤 좋았다. 그래서 박민정이 병원에 있는 걸 알고 가타부타 덧붙이지 않고 병원에 가서 박민정을 살폈고 그렇게 박민정이 사람을 구한 일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이 박민정이 입원한 틈
유지훈이 자신에게 한 말을 박예찬은 유남준에게 전했을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유남준이 한동안 침묵하다가 말을 꺼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 없을 거야.”“엄마를 잘 지켜줄 거죠?”박예찬은 박민정이 걱정되었다.“당연하지.”유남준이 한마디 덧붙였다.“예찬아, 언제면 나를 받아줄래?”그 말에 박예찬은 잠시 멈칫했다.“그건 나중에 얘기해요.”말을 마치고 박예찬은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유남준과 사이가 좋더라도 그를 아빠로 대하는 것은 조금 불편했다.입꼬리를 치켜올린 유남준은 바로 부하 직원들에게 전화했다.“민정에 대한 안전을 더욱 강화해야 할 것이야.”‘이 세상에는 막지 못하는 일들이 수두룩하지. 사람을 공격하는 것은 쉽지만 막는 입장에서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공격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 없다고 유남준은 생각했다.“그리고 유석진도 잘 감시하도록 해.”약점을 잡는다면 그들을 대적할 명분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시간이 흐르면서 박민정은 과거의 일들을 조금씩 기억났지만 그렇다고 너무 또렷하지는 않았다.박민정을 진찰하고 나서 김인우가 말했다.“과거의 일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몸이 회복되고 있다는 증거야. 몸이 더 회복된다면 아마 기억도 많이 되찾게 될 거야.”“고마워요.”박민정의 말에 김인우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형수가 나한테 고마워할 필요가 없어.”박민정이 의아해하자, 김인우가 눈을 내리깔며 덧붙였다.“형수는 내 은인이잖아. 난 과거에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렀어. 아마 생전에 지은 죄를 다 갚지 못할 것 같아.”여전히 마음속에 죄책감이 남아 있던 그는 박민정의 건강이 좋지 않은 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그의 이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해도 박민정은 위로의 말을 건넸다.“쓸데없는 생각은 그만 하세요. 저는 인우 씨가 나쁜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아요.”김인우는 쓴웃음을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기억을 잃었으니 이렇게 말하는 거지. 만약 내가 저
밤에 증조할아버지와 유씨 가문의 모든 사람이 자신을 따르는 꿈을 유지훈은 꾸었다.박윤우와 박예찬 형제가 자신의 부하가 되어있었다.“지훈 대장님, 저희를 버리지 마세요.”“불쌍한 저희를 거두어 주세요.”박예찬의 두 동생도 거지가 되어 있었다.유지훈이 웃으며 말했다.“흥! 이제부터 너희들은 모두 내 부하들이야.”“네. 네. 맞아요. 저희는 대장님의 부하니 제발 버리지 마세요.”유지훈은 웃으면서 잠에서 깼다.심지어 유치원에 갈 때도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유치원 상급반 아이들이 그의 밝은 모습을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지만, 유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하여튼 좋은 일이니까 묻지 마.”그렇게 말한 후 그는 우쭐대며 아이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 박예찬 옆에 앉았다.지난밤에 꾸었던 꿈을 여전히 마음에 간직하고 있어서인지 유지훈은 자신이 박예찬의 졸개라는 사실을 잊은 듯했다.“예찬아, 이제부터는 내 말을 따르도록 해.”이 말에 컴퓨터 앞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던 박예찬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왜 갑자기?”“뭔 말이 그렇게 많아.”유지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어쨌든 내 말에 따르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 거야.”유지훈이 갑자기 변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박예찬은 슬쩍 떠보기로 했다.“만약 내가 네 말을 듣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데?”그러자 유지훈의 입가에는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너와 네 동생은 거지가 돼서 내게 구걸할 거야.”이 말을 들은 박예찬은 마음속으로 유지훈을 비웃었다.‘내가 설령 유남준의 아들이 아니더라도 이 정도 능력이면 거지로 전락하는 일은 없을 텐데.’“왜 그렇게 확신해? 혹시 점이라도 볼 줄 아는 거야?”유지훈의 얼굴에는 오만함이 묻어났다.“어찌 됐든 전처럼 나를 어린애 취급하지 않는 게 좋아.”“오.”말 섞기 귀찮았던 박예찬이 짧게 대답하자, 유지훈은 그런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예찬아, 왜 더 묻지 않는 거야?”“물어보기 귀찮아. 물어볼 필요도 없고. 네가 무슨 말도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지만, 윤소현은 일할 기분이 아니었다.‘어떡하면 될까? 민정 옆에는 유남준이 24시간 붙어있으니 손 쓰기가 어려울 것 같고.’이때 그녀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윤소현이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오랫동안 연락 없던 최현아에게 온 것이었다.호산 그룹이 유남준에게 넘어간 이후 최현아의 가족들은 한동안 잠잠했다.이 사람들이 유남준을 대적하기 위해 뒤에서 꿍꿍이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윤소현은 잘 알고 있었다.윤소현이 수신 버튼을 눌렀다.“형님, 오랜만이에요.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최현아는 일부러 안쓰러운 척했다.“인터넷 뉴스를 보고 괜찮은지 해서 전화했어.”윤소현은 다른 사람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괜찮고 말고요. 까짓거 이혼하면 되죠.”“어휴. 남우도 참. 민정이 돌아오자마자 동서를 쫓아내려 하다니. 염치도 없어.”“이런 얘기 하려고 전화한 거예요?”윤소현이 차갑게 말하자, 최현아는 그제야 본론을 얘기했다.“동서, 요즘 시아버지와 유남우가 IM 그룹을 물리칠 준비를 하고 있어. 정씨 가문도 동참하지 않을래?”“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민정이 정수미의 친딸인데 어떻게 정수미와 대적한다고요?”윤소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최현아는 그녀의 말을 끊으며 웃었다.“동서는 너무 부정적이야. 난 동서의 도움이 필요해.”윤소현이 침묵을 지키며 계속 말하라는 신호를 보내자, 최현아는 말을 이어갔다.“동서가 정씨 가문으로 돌아왔으니 정씨 가문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면 돼. 당연히 유남준을 도우면 안 되고. 만약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면 즉시 나에게 보고하면 돼. 동서도 계획 세워 이른 시일 내에 지엔 그룹을 장악해야지.”최현아가 이렇게까지 말하지 않아도 윤소현은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제가 도와주면 뭘 해줄 건데요?”윤소현이 물음에 최현아는 망설임 없이 바로 답했다.“지엔 그룹을 장악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게. 어때?”“알았어요. 그렇게 하죠.”…유씨 가문 옛 저택에서 최현아와 윤소현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정수미의 머릿속에는 온통 박민정의 생각뿐이었다.회사 다니면서 많이 배우라고 정수미가 윤소현에게 말하자, 윤소현은 그렇게 하겠다며 순종적인 태도를 보였다.길연서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소현 씨가 변한 걸까요? 오늘은 말을 너무 잘 따르네요.”정수미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말했다.“수박 겉핥기가 아니어야 할 텐데.”“아닐 거예요. 소현 씨는 대표님이 소현 씨를 어떻게 키우셨는데.”길연서의 위로에 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녀가 물을 마시려고 할 때 갑자기 기침이 심하게 났다.가슴이 마치 커다란 비위에 짓눌린 듯 답답하고 불편했다.“정 대표님, 괜찮으세요? 의사 부를까요?”길연서가 다급히 물었지만, 정수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럴 필요 없어. 고질병이 도진 것뿐이니 좀 지나면 괜찮을 거야.”과거에 정수미는 정씨 가문 사람들의 모함을 받아 많은 고통을 겪었었다.“그나저나 유남우는 어떻게 됐어?”정수미가 또 물었다.유남우가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안타까워 사람까지 보내 그를 찾으려 했었다.어차피 결혼까지 했으니 유남우가 윤소현과 함께 살기를 정수미는 진정으로 바랐다.아이의 일은 단순히 사고였다.길연서가 탄식하며 말했다.“둘째 도련님이 소현 씨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지난번에 저에게 얘기했어요. 심지어 성명까지 내겠다고 했고요.”정수미는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될 줄을 몰랐다.“소현이 잔머리 굴리기 좋아하니 잘 감시해.”“알겠습니다.”이날 오후, 유남우와 윤소현의 이혼 소식이 주요 포털사이트 실검에 오르자, 네티즌들은 의견이 분분했다.[결혼한 지 1년밖에 안 됐는데 왜 이혼하지?][내막을 누가 알겠어. 재벌들의 결혼은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네.][결혼식은 그렇게 성대하게 했으면서 갑자기 이혼이라고? 내 생각에는 여자 쪽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윤소현이 얼마 전에 아이를 낳았다지만 어쩌면 그 아이가 유남우의 아이가 아닐지도 몰라.]다양한 추측들이 난무한 가운데 놀랍게도 일부 사
아이의 말에 박민정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들었다.박민정은 서둘러 박윤우에게 설명했다.“엄마가 널 어떻게 버려. 민기 아저씨와 함께 일을 마치고 나면 금방 돌아올 거야.”역시 피는 물보다 진한가보다.두 아이의 기억이 없다고는 하나 아이의 애교에 박민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박윤우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무슨 일이야? 왜 우리가 가면 안 돼? 아빠와 내가 엄마한테 짐이 되는 것도 아니잖아. 설마 숨겨놓은 자식이라도 있는 거야? 그래서 나를 버리려고?”서럽게 말하는 아이의 모습은 박민정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아니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그래.”“그러면 나와 아빠도 같이 가게 해줘. 한 가족이라면 뭐든 함께 해야지.”박윤우가 계속해서 징징대자, 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그래 그럼. 차에 올라타.”박윤우는 울상이던 얼굴을 거두고 곧바로 웃음을 터뜨렸다.“역시 엄마야. 사랑해.”그 순간 박민정은 왠지 속았다는 기분이 들었다.그렇게 박윤우와 유남준은 차에 올라탔다.박민정에게 쫓겨날까 봐 유남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정민기는 차를 몰고 서교 추모 공원으로 향했다.차에서 내린 박민정은 정민기의 안내를 받으며 박형식과 한수민이 묻혀있는 곳으로 걸어갔다.원래는 박형식과 한수민을 함께 묻히려고 했지만, 한수민이 박형식을 배신한 탓에 박씨 가문은 두 사람의 합장을 반대했다.한수민의 무덤은 박형식의 무덤 옆에 있었다.두 사람을 추모하기 위해 박민정은 두 송이의 데이지를 샀었다.“아빠!”그녀가 외쳤다.박형식이 자신의 아버지란 사실은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다만 다시는 아버지의 응답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이 박민정은 너무 슬펐다.아버지의 묘비 앞에 서 있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옆에 있던 한수민의 흑백사진을 힐끗 쳐다보았다.복잡한 감정이 느껴졌다.박윤우가 다가와 박민정을 위로했다.“엄마, 슬퍼하지 마세요”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리워서 이러는 거니까 괜찮아.”박민정의 가족
늘 차갑기만 한 연 사장이 어렸을 때 의외로 다른 면이 있었다는 사실을 설인하는 인제야 알았다.“또 있을까요?”연지석의 과거가 궁금한 듯 그녀가 질문을 이어가자, 박민정은 연지석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설인하에게 들려주었다.당시 고아였던 연지석은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해서 불쌍하기 짝이 없었다.그 이야기를 듣고서야 박민정이 실종된 후에 연지석이 사람들을 보내 박민정을 찾으러 다닌 이유를 설인하는 알 것 같았다.두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여서 박민정은 연지석을 잘 챙겨줬었다.“연 사장이 불쌍한 건 알겠어요. 그런데 그의 부모님은 왜 그를 돌보지 않았나요?”설인하가 연지석의 부모를 언급하자, 기억하지 못하는 숨겨진 아픔이 있는 듯 박민정은 두통이 느껴졌다.두통은 기억 상실 때문일 것으로 그녀는 생각했다.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하나둘씩 일어나 아침 먹으러 내려왔다.유남준이 내려오자, 식당 내부의 분위기가 바로 다운되었다.진서연이 낮은 목소리로 박민정에게 물었다.“보스, 이 얼음장 같은 사람과 오랜 세월 동안 어떻게 살았나요?”박민정이 실종된 후 회사 분위기는 어수선하여 모두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다행히 박민정이 돌아와서 기분이 좋아졌는지 유남준은 전보다 화를 적게 내긴 했었다.하지만 그 대신 성격이 많이 변덕스러워졌다.진서연의 말에 박민정은 조금 의아했다.“무슨 일 있었어?”주위에 이상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박민정은 감지하지 못했다.진서연이 무언가를 말하려고 할 때 날카로운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즉시 입을 다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밥이나 먹어요.”그제야 유남준이 이쪽으로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박민정은 발견했다.그녀는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똑같이 유남준을 쏘아보았다.남들 앞에서 살아있는 염라대왕으로 불렸지만, 이 순간만큼은 불쌍하기 그지없었다.박윤우가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잠깐 볼일이 있어서 이만 일어날게요.”박민정이 큰 소리로 모두에게 말하자, 진서연과
박민정은 꽉 깨물었던 유남준의 팔을 놓아주며 말했다.“남준 씨, 제발 놓아주세요. 과거에 우리의 사이가 좋았다고 해도 이러면 안 되죠.”그녀는 당황하고 혼란스러웠다.“안 놓아주면 화낼 거예요.”자신이 내뱉은 말이 아무 의미 없겠다고 박민정은 생각했다.그녀의 안색이 어두워진 것을 보고 유남준은 마지못해 그녀를 놓아주었다.“알았으니까 화내지 마.”박민정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자리를 뜨려고 재빨리 문 입구로 다가갔다.문을 여는 순간, 문 입구에서 엿듣고 있던 두 아이를 발견했다.“윤우와 예찬이 엿듣고 있었던 거야?”박민정의 얼굴이 빨개진 것을 본 박예찬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엄마, 오해하지 마. 우연히 이 앞을 지나가던 중이었어.”박윤우도 따라 말했다.“맞아. 쓰레기 아빠가 엄마를 껴안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몰라.”“…”그녀는 애들과 승강이하고 싶지 않았다.“둘 다 얌전히 있어야 해.”말을 마친 후 박민정은 거실로 내려갔다.조하랑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왜 이렇게 늦게 내려왔느냐고 묻자, 박민정은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말을 더듬으며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다.“이제 가야 하니 일 있으면 전화해.”조하랑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사람들을 하나둘씩 떠나보낸 후, 박민정과 진서연만 남게 되었다.유남준이 내려올 때 박민정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마음이 착잡한 것을 뒤로 하고 유남준이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박민정의 옆에 앉으려 하자, 박민정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나 졸리니까 먼저 잘 게.”“네. 그러세요.”진서연이 말했다.방으로 돌아온 박민정은 문부터 잠갔다.씻고 침대에 누우니 유남준이 자신을 껴안고 있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잠을 이루지 못했던 박민정은 최근에 있었던 사건들을 보고 싶어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인터넷에는 자신에 관한 뉴스가 많이 올라와 있었다.박민정은 하나하나 확인하며 기억을 떠올리려고 노력했지만, 여전히 가물가물했다.무의식적으로 잠이 든 박민정은 한수민의 꿈을
서다희도 속수무책이었다.“이건 다 돈으로 만든 거니까 돈에 현혹되면 안 돼.”“흥!”민수아는 콧방귀를 뀌더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솔직히 서다희는 사장과 함께 일하기 싫었다.박민정과 친구가 된 후, 서다희가 사장처럼 돈을 많이 쓰기를 민수아는 바랐지만, 그것은 허황한 꿈에 불과했다.비록 유남준의 전담 비서였던 서다희가 돈이 부족하지 않다지만 그렇다고 돈을 물 쓰듯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조하랑이 김인우에게 말했다.“전 개인적으로 꽃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 꽃은 그래도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하네요. 김씨 가문에 이 꽃을 좀 심어줄 수 있나요?”그러자 김인우가 말했다.“저는 그럴 시간이 없으니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세요.”“알았어요. 제가 직접 심을게요.”조하랑은 불쾌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녀가 모르게 김인우는 사람들을 보내 꽃을 심게 했다.하지만 김인우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유남준이 꽃을 거의 다 꺾어 박씨 가문의 별장에 심은 탓에 꽃이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한쪽에서 설인하가 딸을 안고 꽃을 꺾고 있었다.방성원이 그 모습을 보고 집에다 꽃을 심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아내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는 시간과 돈을 아낄 필요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꽃 감상을 마친 후, 하나둘씩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유남준은 박민정에게 조용히 말했다.“우리 방에도 뭐가 있으니 들어가서 볼래?”“뭐가 있는데요?”박민정은 의아해했다.“가보면 알아.”유남준의 말에 홀려 박민정은 위층으로 올라갔다.방에 들어가자, 온갖 종류의 선물이 쌓여 있는 것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박민정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이게 다 뭐예요?”“널 위해 산 것이니 어서 열어 봐.”평소 박민정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어서 유남준이 사람 시켜 선물을 준비하게 했던 것이었다.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란 사실을 박민정은 그제야 깨달았다.하지만 그녀는 선물을 열어보지 않았다.“고맙긴 한데 이렇게 많은 선물을 받을 수 없어요.”아무
역시 맞아보지 않으니 고통이 뭔지 모르는 법이다.세 명의 남자들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에리를 노려보고 있었다.에리는 늘 사람들에게 떠받들리며 살아왔고 남자들의 질투 어린 시선에도 익숙했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눈길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도대체 누가 저 녀석을 초대한 거야?” 방성원이 묻자 서다희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에리 씨가 꼭 와야 한다고 수아가 거듭 강조를 하면서 주소도 줬어요.”김인우는 그 말을 듣고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그건 집에 늑대를 들인 거나 마찬가지예요. 다음번에도 이런 일이 생기면 서 비서 아내랑만 놀게 해요. 우리까지 끌어들이지 말고.”방성원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자 서다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에리가 이번에 온 이유는 분명했다. 바로 박민정을 보기 위해서였다.그는 틈만 나면 박민정에게 물을 건네주고 음식을 가져다주며 그녀를 극진히 챙겼다.유남준도 박민정을 잘 챙겨주고 싶었지만 매번 에리보다 한발 늦었다.이를 지켜보던 박윤우가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아빠, 이렇게 해서 엄마 마음을 얻을 순 없어요.”유남준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박윤우는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여자들은 꽃과 예쁜 장신구, 옷 같은 선물을 좋아해요. 그런 걸 많이 준비해 보세요.”사실 박민정의 집에는 이미 꽃이 가득했고 장신구나 옷도 놓을 데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유남준은 망설임 없이 전화를 들어 준비를 지시했다.그날 모임은 늦게까지 이어졌고 끝날 무렵 에리는 박민정과 함께 집으로 가겠다며 따라가려고 했지만 유남준은 강제로 그를 차에서 내리게 했다.에리는 개의치 않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민정아, 다음 주에 봐.”“응, 다음 주에 봐.” 박민정은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에리를 보내고 나서야 유남준의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그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부하에게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물었다.잠시 후 부하에게서 답변이 왔다.“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유남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