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상의 문자 말곤 지금까지 꼬박 하루가 지났는데 박민정은 그에게 사과의 전화나 문자 한 통도 없다.“언제까지 참는지 두고 봐!”유남준은 휴대폰을 옆에 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갔다.냉장고 문을 연 순간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음식 외에 갖가지 한약들이 들어 있었는데 대충 하나 꺼내 보니 ‘불임 치료, 1일 5팩’이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불임 치료...유남준은 고약한 한약 냄새를 맡으며 전에 박민정의 몸에서 났던 약 냄새가 이 한약이란 걸 깨달았다.그는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제아무리 약을 먹는다고 임신이 될까?유남준은 가차 없이 약을 내던지고 인제야 그녀가 화난 연유를 알 것만 같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침실로 들어간 그는 푹 휴식을 취했다.박민정이 없으니 앞으론 돌아오고 싶을 때 마음껏 돌아와도 된다, 일부러 그녀를 피하지 않아도 된다.그날 밤 유남준은 아주 잘 잤다.오늘은 절친 김인우와 함께 골프 치러 가는 날이다.하여 아침 댓바람부터 옷방에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거실에 나왔는데 습관처럼 오늘 집에 안 온다는 말이 튀어나왔다.“나 오늘...”박민정은 이젠 집에 없다. 앞으론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다.골프장.유남준은 한껏 들뜬 마음으로 흰색 운동복을 입고 있었는데 잘생긴 얼굴이 오늘따라 더 자상해 보였다.훤칠한 체구에 골프장에 서 있으니 영화배우를 방불케 했다.스윙 한 번에 홀인원이다.절친 인우가 옆에서 칭찬을 남발했다.“남준이 오늘 컨디션 좋은데. 너 무슨 좋은 일 있어?”박민정이 유남준과 이혼하려는 일은 어제에 걸쳐 주변 사람들이 거의 다 아는데 김인우가 모를 리 있을까?그저 유남준의 입으로 한 말을 직접 들어야 진작 밖에서 기다린 이지원을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으니 슬쩍 떠본 것이다.유남준은 물 한 모금 마시고 넌지시 대답했다.“별거 없어. 그냥 민정이랑 이혼하려고.”두 귀로 직접 들었지만 김인우는 여전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유남준의 절친으로서
이전 같으면 보청기를 착용하지 않아도 미세한 소리가 들렸으니까.박민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머리맡에 둔 쓰디쓴 약을 입에 물었다.어제는 3년 동안 지낸 두원 별장에서 나와 먼저 본가로 돌아갔는데 문 앞에서부터 엄마와 동생 박민호의 목소리가 들렸다.“내가 왜 저런 쓸모도 없는 딸을 낳았지? 3년 동안 남준이가 글쎄 걔를 건드리지도 않았대! 온전한 여자도 아닌 주제에 이혼할 생각까지 해?”분노에 찬 한수민의 말이 예리한 칼날처럼 박민정의 심장을 난도질했다.엄마 눈엔 대체 어떤 여자만이 온전한 사람일까? 박민정은 알지 못했다.남편에게 사랑받는 여자? 혹은 아이를 낳아 키우는 여자?동생 박민호의 말이 더 한심했다.“누나는 우리 집안 사람 같지 않다니까요. 다들 그러는데 유남준 첫사랑이 돌아왔대요. 누나가 이혼 안 해도 조만간 그 집에서 내쫓길 거라고요. 그럴 바엔 차라리 뒷일을 고려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얼마 전에 최명길 대표의 아내분이 돌아가셨잖아요. 우리 누나가 비록 청력에 문제 있긴 하지만 80이 넘은 영감탱이에겐 횡재나 다름없죠...”박민정은 그 말들을 되새기며 두 눈이 퀭해졌다.그녀는 애써 단념하려고 휴대폰을 꺼냈는데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유남준인 줄 알았는데 열어보니 장 변호사님이라고 적혀 있었다.「민정아, 양도협의서를 유남준 씨한테 보내줬는데 태도가 썩 친절치 못했어. 앞으로 더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박민정은 장명철에게 답장을 보냈다.「수고하셨어요, 명심할게요.」문자를 보낸 후 그녀는 한참 넋 놓고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얼마 안 되는 재산을 전부 유남준에게 준 건 얼마나 고상해서가 아니다.단지 그에게 너무 많이 신세 지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결혼 전의 계약서대로 거액의 재산을 그에게 돌려주지 못하는 게 참 유감스러웠다. 아마 평생 결혼 사기죄라는 누명을 쓰고 살아가야 할 듯싶다.박민정은 이틀 동안 아무것도 안 먹어도 전혀 배고픈 줄 몰랐다.그저 주위가 너무 조용하니 이런 정적이 두렵게 느껴졌다.보청기도
문 앞에서 은정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민정이 깼어? 아줌마가 우리 민정이 제일 좋아하는 만두 빚었어. 식기 전에 얼른 먹어.”은정숙의 목소리에 박민정은 서서히 기억났다.두원 별장에서 나오고 병원 가서 병 보인 후 마지막으로 아줌마 보러 왔었지.그녀는 머리를 살짝 내리쳤다.‘기억력은 왜 또 이렇게 나빠진 거야?’이제 막 당혹스러워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잔꽃 무늬 침대 시트에 핏자국이 큼지막하게 나 있었다.오른쪽 귀를 만졌더니 끈적끈적한 느낌이 들었고 손을 펼쳐보니 피로 흥건했다.보청기도 빨갛게 물들었다...박민정은 서둘러 티슈로 귀를 닦고 침대 시트도 전부 거둬냈다. 은정숙은 그녀가 내려올 기미가 없자 베란다로 올라갔다가 시트를 씻고 있는 박민정을 보았다.“왜 그래?”“생리 왔어요. 조심하지 않아 시트에 묻혔더라고.”박민정이 웃으며 해명했다.침대 시트를 다 씻고 아줌마와 함께 아침을 먹으며 잠시만의 평온함을 만끽했다.은정숙의 목소리는 때론 똑똑히, 때론 어렴풋이 들렸다.박민정은 너무 두려웠다. 앞으로 이 목소리도 못 들으면 어떡하지?아줌마가 알고 나서 속상해하시면 어떡하지?그녀는 이곳에서 반나절 더 있다가 저축한 돈 일부를 몰래 침대 머리맡에 숨겨두고 나서야 아줌마와 작별 인사를 했다.떠나갈 때 은정숙은 그녀를 정거장까지 배웅하며 아쉬운 눈길로 손 흔들었다.박민정이 떠나간 후에야 은정숙도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문득 앙상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결국 유앤케이의 내선전화에 연락했다.대표이사 사무실의 비서는 박민정 씨 가정부가 대표님을 찾으신다고 그대로 알려주었다.오늘은 그녀가 집 나간 지 3일째 되는 날이고 유남준이 그녀에 관한 전화를 받은 첫날이다.유남준은 사무실 의자에 앉아 기분이 째질 것만 같았다.‘역시 3일을 못 버틴다니까.’은정숙의 늙은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유 대표님, 저는 민정이 어릴 때부터 보살펴온 가정부 은정숙이라고 해요. 제발 부탁드리는데 더는 우리 민정이 다치지 않도록 너그
시계를 들여다보니 마침 10시 정각이었다.유남준은 그녀에게 전화해 도착했는지 물어보려 했는데 멀지 않은 곳의 나무 아래에 박민정이 어두운 톤의 옷을 입고 서 있었다.주르륵 내리는 가랑비 속에 앙상하게 마른 그녀는 바람이 불면 쓰러질 것 같았다.금방 유남준과 결혼했을 때, 박민정은 밝고 긍정적이었다. 지금처럼 어두운 표정과 뼈만 남은 초라한 모습이 아니라.그는 우산을 들고 박민정에게 걸어갔다.그녀는 뒤늦게 유남준을 발견했다.3년 동안 유남준은 큰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멋있고 카리스마 넘치며 전보다 조금 더 성숙해진 모습이었다.3년이란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또 자신의 일생을 다 써버린 것만 같았다.유남준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어서 사과하길 기다렸다.이젠 그만할 때도 됐지!하지만 정작 그녀의 말은 정반대였다.“남준 씨 일하는 데 방해되겠어요. 얼른 들어가요.”유남준은 안색이 확 어두워지고 표정이 얼어붙었다.“너 후회하지 마.”그는 이 한마디만 내던지고 가정법원으로 들어갔다.박민정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씁쓸했다.후회?그런 건 모르겠고 이젠 지쳐버렸다.한 사람이 떠날 결심을 했을 땐 아마 일말의 희망도 얻지 못하고 마음속에 쌓인 실망이 너무 커 더는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겠지.이혼 절차가 진행되고 직원이 두 사람에게 정말 이혼하기로 결심했냐고 물었을 때 박민정은 아주 단호하게 대답했다.“네.”그녀의 확고한 눈빛에 유남준은 가슴이 움찔거렸다.수속을 마치고 한 달이란 숙려기간이 있어 두 사람은 한 달 뒤에 또 이리로 와야 한다.만약 이 한 달 동안 오지 않으면 이혼 신청도 자동으로 폐지된다.가정법원을 나선 후 박민정이 유독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그럼 다음 달에 봐요. 잘 있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곧게 빗속으로 뛰쳐들어가 택시를 잡고 떠나가 버렸다.유남준은 멀어져가는 차를 바라보며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이건 아마도 해탈이겠지.더는 그녀와 얽힐 필요도 없
기사를 열어보니 유앤케이 그룹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바움 그룹을 성공적으로 인수했다고 발표하는 내용이었다.이 세상에 더는 바움 그룹이 존재하지 않는다...기사에는 유남준의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잘생긴 옆모습과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이 인상적이었다.사진 아래에 댓글도 아주 많이 달렸다.「유남준 완전 잘생겼어, 젊은 나이에 그룹 총수라니.」「아쉽게도 유부남이네. 결혼 상대가 박씨 일가의 따님이랬나?」「정략결혼이지 뭐. 3년 전 그 기사 다 잊었어? 결혼식 때 유남준이 아예 신부 손을 뿌리치고 떠났었잖아...」「...」인터넷은 모든 걸 기록하고 있다.박민정은 3년 전 결혼식 날 유남준이 자신을 버리고 분노하며 자리를 떠난 일을 거의 잊고 있었다.그렇게 쭉 아래로 댓글을 읽어내려갔다.이 3년간 그녀는 바움이 조만간 무너진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빠를 줄은 몰랐다....유남준은 최근 흐뭇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바움을 인수하고 끝내 통쾌하게 복수했으니.김인우가 웃으며 말했다.“3년 전에 박씨 일가에서 사기 결혼을 강행하더니 인제 드디어 벌 받네.”그는 문득 화제를 돌려 옆에서 일하는 유남준에게 물었다.“남준아, 귀머거리 요즘 너한테 찾아와서 사정하지 않았어?”서명하던 유남준의 손이 멈칫 흔들렸다.왠지 모르지만 요즘 그의 주변에서 박민정 얘기가 끊이지 않는다.거의 이혼하는 마당에 왜 아직도 그녀를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응, 없어.”그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김인우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박씨 일가에 이렇게 큰일이 발생했는데 박민정이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니?“걔 설마 진짜 해탈한 거 아니야? 누가 그러는데 걔네 엄마가 걔 찾느라고 사방으로 돌아다닌대. 대체 어디 숨었길래.”김인우가 쉴 새 없이 떠들어대자 유남준은 짜증이 확 밀려와 눈썹을 찌푸렸다.“나가!”김인우는 화들짝 놀라더니 그제야 그의 심기를 건드린 걸 알아채고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한 채 대표이사 사무실을 나섰다.그가 떠난 후 유남준은 무심코 휴대폰을 들여다
박민정은 오른쪽 귀에서 피가 나는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한수민은 이토록 연약하고 무능한 딸을 보자 자기 자신이 불쌍하게 느껴졌다.그녀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문서를 박민정에게 건네주었다.“잘 살펴봐.”“엄마가 널 위해서 만들어준 배경이니까.”문서를 받아들자 문서에는 혼인계약서 다섯글자만 보였다.박민정은 문서를 열어보았다.「...박민정 양은 최명길 군의 아내가 되여 그의 일생을 책임지고... 최명길 군은 박진정 양의 가족들의 생활을 보장해주고 600억의 자산을 박씨 집안에게 제공해준다...」최명길. 그는 진주시의 오래된 사업가 중 한명으로 올해 일흔에서 여든이었다.박민정은 뇌가 아릿하게 당겨오는 것 같았다.한수민이 이어 말하는 게 들렸다.“최 사장님이 말씀 하셨어. 네가 재혼이어도 불쾌해 하지 않을거고 자기한테 시집만 오면 박씨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겠다고.”한수민은 기대에 찬 눈으로 박민정을 보면서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으면서 말했다.“착한 우리 딸. 너는 엄마랑 동생을 실망 시키지 않을거야. 맞지?”박민정은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녀는 손 안에 든 계약서를 꽉 움켜쥔 채 말했다.“저랑 남준 씨, 아직 완전히 이혼한 게 아니에요.”한수민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말했다.“최 사장님이 말씀하셨어. 먼저 결혼식을 올린 다음에 혼인신고해도 된다고. 어차피 유남준은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닌데 엄마는 네 선택을 존중한단다. 너희 둘 이혼 허락해줄게.”박민정과 유남준의 결혼을 무를 수도 없었다.한수민은 아들의 말대로 딸이 아직 어릴 때 그 가치를 최대한 사용하고 싶었다.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목이 메어왔다.“뭐 하나만 물어도 돼요?”그녀는 잠깐 멈칫하고 말을 이었다.“제가 친딸은 맞는 거예요?”한수민은 흠칫했다.어르고 달래던 한수민은 바로 표정이 바뀌어 책망하듯이 얘기했다.“내가 너만 아니었으면 내 몸매가 이렇게 될 일이 있었겠니? 세계적인 무용가가 진창에 떨어질 일이 있었겠냐고! 너는 정
주위를 둘러보자 그저 낯설게 느껴졌다.그녀는 또 돌아가는 길을 잊었다.핸드폰을 꺼내서 내비게이션을 킬 생각이었지만 또 한참 동안 사는 곳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연지석은 쭉 그녀를 따라오고 있었는데 아까 유남준이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박민정 혼자 제자리에 서 있는 걸 보고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박민정.”박민정은 유남준이 돌아온 줄 알았다.그녀는 기대 어린 눈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결국 실망하고 말았다. 연지석은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나 진짜 기억 안 나? 나 뚱이야. 잊은 거야?”연지석은 그녀를 일깨워줬다.박민정은 그제야 생각이 났다. 어릴 때 은정숙을 따라서 시골에 가 살 때 친해진 절친 뚱이.그때 연지석은 뚱뚱한 데다가 박민정보다도 키가 작았다. 근데 지금은 190센티미터는 훌쩍 넘는 키에 얼굴도 굉장히 잘생겨졌다.“생각났어. 너 많이 변했다. 못 알아봤네.”어릴 때 친구를 우연히 마주치는 건 꽤 기쁜 일이었다.“가자. 데려다줄게.”박민정을 데려다주면서 그는 그녀가 작고 볼품없는 모텔에 묵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유씨 집안 같은 부잣집 가문이 박민정과 이혼한다 해도 그녀를 이런 누추한 곳에 데려다 놓는 건 말도 안 됐다.박민정은 조금 멋쩍게 말했다.“우스운 꼴만 보였네. 나 여기 묵어. 아주머니한테는 말하지 마! 걱정하실라.”연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너무 늦은 시간이었다.그는 계속 여기 있을 수도 없었다.연지석은 그저 내일 다시 박민정을 만나러 오겠다고 하고 떠났다.모텔을 떠나는 연지석은 길 구석에 세워진 검은색 캐딜락 한 대를 발견하지 못했다.박민정에게 있어서 어디에 묵는지는 다 똑같았다.연지석이 떠났다.술을 마셔서인지 위가 불편했고 머리도 어지러웠다.머릿속에서 유남준이 한 말이 맴돌았다.‘화장은 무슨 귀신처럼 해서... 너 같은 사람을 어떤 남자가 좋아하겠어?!’그녀는 힘을 주어 얼굴에 남은 화장과 입술의 립스틱을 문질렀다. 창백했던 얼굴은 그
하지만 박민정은 증명해 냈다. 난청이라도 피아노, 춤, 노래 모두 그녀는 정상인보다 모자라지 않았다.이 기사는 마치 빛 같았다. 연지석은 그렇게 천천히 일어설 수 있었다.연지석이 자세하게 말하는 그 빛 났던 순간들은 박민정 본인도 잊기 직전이었다.연지석은 그녀를 묵을 곳으로 데려다주었다.박민정은 웃으면서 그한테 말했다.“고마워. 나도 원래의 날 잊기 직전이었어.”연지석은 그녀와 밥 먹으러 갔다.하루 종일 함께 있으면서도 그는 섬세하게도 박민정이 결혼한 후의 일들은 묻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이 흘렀다.날짜를 확인해보니 이혼이 예정된 5월 15일과는 열흘 좀 넘게 남아 있었다.한수민과의 약속이 문득 생각이 났다.그녀는 어느 아침, 돌아간 아빠를 보러 갔었다.돌아가신 아빠의 묘비 앞에서, 자상한 사진 속의 아빠를 보며 박민정은 목이 메왔다.“아빠. 보고 싶어요.”여린 바람이 가볍게 박민정의 볼을 스쳤다.그녀는 코끝이 시렸다.“아빠. 만약 지금 아빠를 보러 가면 무조건 저한테 화내시겠죠?”그는 묘비에 붙은 나뭇잎을 하나하나 떼여냈다.“저도 제가 조금 더 강해야 한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죄송해요...”묘비 앞에 한참을 서 있고서야 박민정은 발걸음을 옮겼다.그녀는 떠날 때 유골함을 샀다.그러고는 사진관에 가서 일하는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 속에서 흑백사진을 찍었다.이 모든 걸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그녀는 창밖의 풍경을 보면서 넋을 놓았다.이때 핸드폰이 울렸다.은정숙 아줌마였다.“민정아. 요새 어떻게 지내?”박민정은 은정숙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잘 지내요.”은정숙은 한숨을 내쉬고는 잔소리했다.“누가 너더러 나한테 몰래 돈 보내랬니? 그 돈, 나는 필요 없다. 뒀다가 너 써. 나중에 사업 같은 거 할 때나...”지난 몇 년간, 박민정은 몰래 그녀에게 돈을 보내왔다.그녀는 시골 사람이다 보니 그리 많은 돈을 쓸 일도 없었고 모두 저축해 두고 있었다.전화 저편에서 은정숙의 관심 어린
여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결코 유남우가 저지른 일들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박민정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이런저런 사정이 있었겠죠. 아마도 스트레스가 너무 컸던 걸 거예요.”홍주영이 애써 변호하듯 말했다. 어쨌든 두 형제 가운데 무엇이든 유남준이 앞서는 상황이었으니까.박민정은 그가 유남우를 두둔하는 걸 보곤 더는 논쟁을 벌이지 않기로 했다. 마침 유남우가 커피숍에서 나오는 것이 보이자 그녀는 짧게 말했다.“그럼, 난 이만 가볼게요.”“네.”홍주영은 그녀가 멀어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고 그때 유남우가 다가왔다.“방금 민정이랑 무슨 얘길 했어?”홍주영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별 얘기 아니었어요.”그러나 유남우의 눈빛에는 묘한 기색이 스쳤다.“가자, 회사로.”“네.”차 안에서 홍주영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도련님, 이번 주말에 고향에 좀 다녀오려고요.”유남우가 의아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무슨 일 있어?”“...약혼하려고요. 가족들이 서두르네요.”순간 차 안이 고요해졌다. 늘 홍주영에게 빨리 결혼하라고 등을 떠밀던 유남우였는데 이번만큼은 의외로 망설이는 기색이었다.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요즘 고씨 가문과의 협력이 중요한 시기인데, 좀 미룰 수는 없겠어?”홍주영은 깜짝 놀랐다.그는 항상 자기 뜻을 존중해 주었는데 이번엔 은근히 만류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연로한 할머니, 그리고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이 떠올랐다.“...이미 다 정해졌어요. 미루기 힘들 것 같아요.”잠시 침묵하던 유남우의 시선이 깊어졌다.홍주영은 그가 늘 하던 말처럼 ‘잘됐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이번엔 묘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곧 담담하게 말했다.“그래, 널 붙잡아 둘 순 없지.”“감사합니다.”홍주영은 차분히 인사했다.“대신, 재정팀에 말해 놓을게. 약혼 선물로 두둑이 챙겨 줄 테니.”홍주영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그
과거, 유남우는 암살당할 뻔한 적이 있었다.그 순간, 박민정은 본능적으로 그의 앞을 막아섰고 등에 남은 깊은 상처를 입었는데 그 흉터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줄곧 자신이 구한 사람이 유남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줄곧 유남준이 자신에게 빚을 졌다고 믿어 왔다.유남우는 그녀의 말을 듣고 목이 텁텁해졌다.“어떻게 나한테 정신과 약을 먹일 수 있어요?”박민정은 다그치듯 물었다.아직도 믿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 그렇게 다정했던 사람이 지금처럼 왜곡된 집착을 품게 될 줄은.유남우는 커피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채 조용히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다른 방법이 없었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을 뿐이야.”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하지만 결국 넌 이미 마음을 돌렸어. 솔직히 말해서 너 처음부터 유남준을 좋아했던 거 아니야?”박민정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이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유남우는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유남준에 대한 기억을 잃었잖아. 그런데 왜 지난 1년 동안 나랑 함께 있으면서도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 처음부터 마음이 떠 있었던 거, 아니야?”그는 잊을 수 없었다. 외국에서 함께했던 1년동안 그녀는 그의 손길을 본능적으로 피했다. 마치 몸이 스스로 거부하는 것처럼.그리고 이제 유남우의 시선이 그녀의 배로 향했다.“몇 개월이나 됐어?”“...네?”박민정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임신 몇 개월이냐고.”유남우의 목소리는 더없이 차가웠다.“얼마 전 조하랑이랑 병원에 갔었잖아.”그제야 박민정은 깨달았다. 그가 조하랑의 임신을 자신의 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해명하기도 전에 유남우가 먼저 말을 던졌다.“정말 실망이야. 형을 기억조차 못 하면서 형 아이를 가졌다고? 형이 강요한 거야? 아니면 네가 원한 거야?”그 순간 유남우의 태도는 더 이상 신사가 아니었고 그의 말
전화를 받자마자 저편에서 박민정의 차분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한 번 만나죠.”그는 휴대폰을 꼭 쥔 채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좋아.”전화를 끊고 나니 박민정이 보낸 주소가 화면에 떠 있었다. 그는 운전기사에게 그곳으로 가라고 지시했다.옆자리에 앉아 있던 홍주영 역시 차가 방향을 바꾸는 것을 알아챘지만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유남우는 먼저 차에서 내렸고 홍주영을 돌아보며 말했다.“홍 비서, 차에서 기다려.”홍주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녀는 유남우가 카페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고는 홀로 한숨을 내쉬었다.그때 운전사인 주범식이 그녀에게 농담조로 물었다.“홍 비서, 왜 그래? 혹시 연애가 잘 안 풀려?”직장에서의 딱딱한 모습과 달리 홍주영은 연장자인 주범식 앞에서는 좀 더 편안한 태도를 보였다.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아뇨, 연애는 할 만해요.”“할 만하다고?”주범식은 젊은이들의 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그럼 언제 결혼할 건데?”결혼...그 한마디에 홍주영은 순간 말을 잃었고 머릿속에는 하민재의 장난기 어린 얼굴이 떠올랐다.그녀는 확신이 없었다.“...글쎄요,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하겠죠.”“그렇지. 하지만 우리 도련님 같은 사람을 옆에서 오래 보면 다른 남자는 눈에 안 들어올 수도 있어. 도련님은 따뜻하고 자상하잖아.”주범식이 말을 이었다.밖에서 본 유남우는 언제나 온화하고 신사적이며 부하 직원들에게도 한없이 친절한 사람이었다.홍주영은 다시 한 번 웃었으나 이번에는 어딘지 씁쓸한 미소였다.“네, 도련님은 정말 좋은 분이에요. 부디 행복해지셨으면 좋겠어요.”“응, 좋은 사람일수록 오히려 상처받는 일이 많다니까. 윤소현 씨는 너무 심했어. 저렇게 완벽한 남자를 두고 배신이라니.”주범식은 혀를 찼다.그는 단순한 외부인의 시선으로만 판단했다. 돈 많고 잘생기고 다정한 남자를 두고도 만
전화를 끊기 전, 조하랑은 잊지 않고 당부했다.“민정아, 아줌마께 꼭 감사 인사 전해 줘.”정수미가 아니었더라면 자신이 겪었을 일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응, 알았어.” 박민정은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한편, 이지원은 집에서 송달된 변호사 서한과 연이어 도착하는 계약 해지 통지서를 바라보며 극도의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그녀는 김인우나 유남준이 곧 자신을 찾아와 추궁할 거라 생각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그러나 시간은 잔인했다. 한 순간 한 순간이 지나갈수록 그녀의 불안은 더욱 깊어졌다.“어떡하지...?”이지원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고 유남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이번에는 이전과 달랐다. 신호가 가더니 뜻밖에도 전화가 연결되었다.“무슨 일이에요?”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유남우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차가웠으나 이지원의 목소리는 이미 갈라질 대로 갈라져 있었다.“남우 씨... 박민정이 전부 기억해 낸 것 같아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저 그때 당신을 도우려고 했던 거잖아요! 당신도 그때 절 보호해 주겠다고 했고요!”유남우는 병실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그의 시선은 곤히 잠든 작은 아이, 유다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그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이지원 씨가 착각한 것 같군요. 난 당신이 다시 스타로 복귀할 기회를 주겠다고 했지, 평생 지켜주겠다고 약속한 적은 없어요.”“뭐라고요?”이지원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아직 남은 이성이 그녀를 붙잡았다.“제발요. 한 번만 저를 도와주세요.”유남우는 잠시 말을 아꼈다.“...나도 지금 내 앞가림하기 바뻐요.”그는 짧게 덧붙였다.“스스로 잘 살아남아 봐요.”그렇게 말한 그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고 휴대폰을 옆으로 던진 후 깊은 생각에 잠긴 채 다시 아이를 바라보았다.그때 간호사가 다가왔다.“어휴, 이 아이 엄마는 도대체 언제쯤 보러 오려는 걸까요? 가족이라고는 한 명도 없고...”그녀는 유남우를 힐끔 보며 물었다.“혹시 이 아이와
정수미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때 이지원이 널 사칭하고 있었잖니?”“하지만 난 처음부터 이지원이 네가 아니라는 걸 느꼈어. 그래서 사람을 붙여 몰래 이지원의 뒤를 밟게 했고 그 과정에서 이지원이 저지른 추악한 짓들을 알게 되었지.”“그날 밤 이지원이 고용한 불량배들은 이미 내가 처리했어. 덕분에 하랑이는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단다.”모든 이야기를 들은 박민정은 가슴을 쓸어내렸다.“엄마, 저 하랑이한테 전화 좀 해야겠어요.”“그래, 다녀오렴.”박민정이 밖으로 나가 조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조하랑은 임신한 이후로 입덧이 심해 아무것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늘어지게 소파에 기대어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머릿속도 텅 빈 것 같았다.예전 같았으면 온라인 쇼핑몰 운영으로 바쁘게 지냈겠지만 이제는 그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과거의 박예찬이라면 벌써 그녀를 채근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그녀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난 후, 더욱 세심하게 그녀를 챙겼다.과일을 씻어 가져다주는 것은 기본이고 밤마다 이불을 잘 덮고 자라고 신신당부했다.이런 다정한 모습에 조하랑은 마음 깊이 감동했고 아이를 반드시 낳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하랑 아줌마, 엄마가 전화하셨어요.”전화벨은 한참이나 울렸지만 조하랑은 깊이 잠든 채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박예찬은 박민정에게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싶어 그녀를 조심스레 흔들었다.조하랑이 힘겹게 눈을 떴다.“예찬아, 무슨 일이야?”“전화 왔어요.”박예찬이 그녀의 손에 핸드폰을 쥐여주자 조하랑은 하품을 하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민정아, 무슨 일 있어?”박민정은 방금 전 정수미에게 들은 이야기를 차분히 전했고 조하랑은 깜짝 놀랐다.“...아 그래서...”그녀의 목소리에 미묘한 어색함이 묻어났는데 박민정은 이를 금방 눈치를 챘다.“하랑아, 혹시... 너 이미 알고 있었어?”조하랑은 잠시 망설였다.그녀는 방 안에 아직 박예찬이 있다는 걸 깨닫고 그를
“이지원 씨, 오랜만이네요.”박민정의 입꼬리는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차가웠다.이지원은 박민정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 말투에 본능적으로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퍼져나감을 느꼈다.“박민정...”“그렇게 부르지 않는 게 좋겠네요.” 박민정은 가볍게 끊어 말했다. “우리 그 정도로 친한 사이 아니잖아요? 오히려 적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걸요.”이지원의 손이 서서히 주먹을 쥐었다.“...그때 일은 나 혼자 결정한 게 아니었어요. 전부 유남우가 날 몰아세웠다고요.”“시키면 뭐든 다 해야 했다는 거예요?” 박민정이 서늘하게 되물었다.“이게 나한테 하고 싶은 변명이라는 거예요? 내 아이를 빼앗아가고 날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것에 대한?”이지원의 몸이 공포에 휩싸였다. 날씨는 선선했지만 그녀의 이마에는 이미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줘요.”박민정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이미 한 번 용서했어요. 이번에도 용서한다면 그건 내가 어리석은 거죠.”한 마디 한 마디가 단호하게 박혔다. 이지원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몸을 돌려 촬영장으로 도망치듯 뛰어갔고 박민정은 그녀의 초라한 뒷모습을 줄곧 지켜보았다. 쫓아갈 필요도 없었으니까.결국 그녀는 상반부 촬영을 마치자마자 강제로 촬영장에서 내쫓겼다.박민정이 차 안에 앉아 눈썹을 찡그린 채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을 때 정민기가 보고를 해왔다.“이제 어떻게 할까요?”박민정이 짧게 대답했다.“일단 높은 자리에서 끌어내려요.”지난 1년 그녀는 깨달았다. 착하게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때로는 단호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대가를 치루어야죠.”정민기는 그녀의 의도를 즉시 이해했다.“알겠습니다.”몇 시간 후, 각종 포털과 미디어 사이트에는 ‘이지원 은퇴’ 소식이 도배되었다.그녀가 맡았던 광고 계약들은 일제히 해지되었고 일부 브랜드에서는 손해 배상을 요구했다.순식간에
박민정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두 아이를 당분간 이곳에 머물게 하고 우리가 틈날 때마다 와서 함께 돌보는 건 어때요? 아이들이 우리와 충분히 친해진 후에 데려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유남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그러나 박민정은 여전히 걱정이 남았다.“하지만 이렇게 하면 어머니께서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실까요? 혹시라도 힘드시면 내가 직접 돌보는 게 낫겠어요.”유남준은 미소를 지었다.“전혀. 어머니께서는 오히려 두 아이를 더 오래 돌볼 수 있길 바라고 계셔. 아까도 만약 우리가 아이들을 데려가게 되면 언제든 찾아와 볼 수 있냐고 물으시더라.”“그렇다면 이렇게 하기로 해요.”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계를 흘끗 본 그녀는 어느새 시간이 늦었음을 깨달았다.“벌써 이렇게 늦었네요. 우리 이제 자요.”그녀는 피곤한 듯 하품을 하며 몸을 기울였으나 유남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너... 뭐 잊은 일은 없어?”“뭔데요?”박민정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지만 그 의미를 깨닫는 순간 얼굴이 불타오르듯 붉어졌다.그 순간, 방 안의 불이 꺼졌고 어둠 속에서 조용히 숨결이 섞여 들었다.다음 날 아침 10시가 지나서야 박민정은 밤새 쌓인 피로에 휩싸인 채 눈을 떴다. 씻고 난 후 그녀는 박윤우가 이미 학교에 간 것을 알았다.이때 하인이 아침 식사를 가져왔다.“남준 씨는요?”박민정이 물었다.“대표님께서는 아침 일찍 회사로 출근하셨습니다. 오늘 하루는 푹 쉬시라고 하셨고 퇴근 후 일찍 돌아오실 예정이라고 하셨어요.”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을 마친 후 그녀는 두 아이를 찾으러 나섰다. 정원에서는 두 아이가 작은 나비를 쫓으며 깔깔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고영란의 눈길에는 애정이 가득했다.박민정이 다가가자 고영란은 기쁜 얼굴로 손짓했다.“민정아, 어서 와서 앉아.”“네.”박민정은 고영란 옆에 앉았다.고영란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유남
박윤우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엄마 최고예요.”박민정은 그가 눈물을 거두고 웃음을 되찾자 꼭 끌어안으며 쉽사리 손을 놓지 못했다.저택에 도착한 후에도 그녀는 박윤우의 손을 꼭 잡고 차에서 내렸다.저택의 하인들은 박민정과 유남준이 오는 것을 보고 한결같이 공손하게 맞이했다.“두 분, 도련님들을 보러 오신 거지요?”“네.” 박민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곧바로 사모님께 알려드리겠습니다!”하인 중 한 명이 서둘러 고영란에게 알리러 갔다.박민정과 유남준이 함께 왔다는 소식을 들은 고영란은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민정아, 왔구나. 어서 들어와서 앉아. 마침 저녁 먹으려던 참이야.”박민정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이제 겨우 한 살 된 아이 둘이 눈에 들어왔고 가슴 한쪽이 저릿했다. 박민정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로 향했는데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었다.아이들도 그녀를 보고는 전혀 낯설어 하지 않고 한걸음에 달려와 그녀의 품에 안기려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윤우는 괜히 심통이 났다.박민정이 두 아이를 품에 안고서 좀처럼 놓지 못하는 걸 본 고영란은 그녀의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감지했다.곧 그녀는 유남준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민정이 오늘 이상하지 않니?”유남준은 담담하게 대답했다.“기억을 되찾았어요.”이 말을 들은 고영란은 놀라면서도 기뻤다.“그래? 정말 다행이구나!”하지만 이내 걱정이 스며들었다. 박민정이 모든 기억을 되찾았다면 아이들을 데려가려 하지 않을까?이제까지 1년 넘게 정성껏 키워온 손주들이었기에 쉽사리 떠나보낼 수 있을 리 없었다.하지만 박민정은 아이들의 친모였고 그 누구보다도 아이들을 데려갈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저녁이 되자 온 가족이 모여 식사를 했다. 박민정은 직접 먹는 것보다도 두 아이에게 밥을 떠먹이는 데 더 신경을 썼다. 아무래도 피는 속일 수 없는지 아이들도 박민정을 특히 좋아하는 눈치였다.고영란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고 식사
박민정은 유남준에게 다가가 속삭였다.“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어요?”그녀가 너무 가까이 다가오자 유남준은 그녀의 은은한 향기를 어렴풋이 맡을 수 있었다. 그는 곁눈질로 그녀의 맑은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응, 있어.”박민정도 그 말을 듣고는 나름 진지하게 자세를 바로 잡았다.하지만 몇 시간 뒤, 그녀는 그가 말한 ‘중요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정말이지 온몸이 마치 부서질 듯한 기분이었다.그녀는 유남준의 품에 안긴 채 이마에 닿는 입맞춤을 느꼈다. 유남준의 목소리는 아직도 욕망에 젖어 있었다.“한 번 더.”“아, 안 돼요. 나 못 하겠어요.”박민정이 급히 손을 내저으며 거절했고 그녀가 정말 지쳐버린 모습을 보자 유남준도 더는 무리하지 않았다.“좋아. 천천히 하면 돼. 오늘 밤에 계속하면 되니까.”“...네?”박민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안 돼요. 오늘 밤엔 본가에 가서 애들을 봐야 해요. 예찬이랑 윤우도 있잖아요.”그녀는 네 명의 아이들을 기억하지 못했던 시간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졌다.윤우랑 예찬이, 그 아이들은 엄마를 잃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갓 태어난 두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엄마 품을 잃었으니까.“그럼 본가에서 자면 되겠네.”유남준의 목소리는 유혹에 가득 차 있었다.“잘 때 이야기하자.”박민정은 어이없다는 듯 유남준을 바라보았다.‘이 남자 머릿속엔 대체 뭐가 들었지?’그녀는 더 이상 그 품에 기대어 있을 수 없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어서 씻고 가요. 엄마도 걱정하셨을 텐데 어서 전화해야죠.”박민정과 유남준은 그렇게 서둘러 집을 나섰고 정수미 역시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응.”유남준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민정아, 넌 내가 이 시간을 얼마나 힘들게 견뎌왔는지 알아?”박민정은 그의 손을 가볍게 쓸어내렸다.“알죠. 방금 전까지도 절실히 깨달았어요.”유남준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그럼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