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를 들여다보니 마침 10시 정각이었다.유남준은 그녀에게 전화해 도착했는지 물어보려 했는데 멀지 않은 곳의 나무 아래에 박민정이 어두운 톤의 옷을 입고 서 있었다.주르륵 내리는 가랑비 속에 앙상하게 마른 그녀는 바람이 불면 쓰러질 것 같았다.금방 유남준과 결혼했을 때, 박민정은 밝고 긍정적이었다. 지금처럼 어두운 표정과 뼈만 남은 초라한 모습이 아니라.그는 우산을 들고 박민정에게 걸어갔다.그녀는 뒤늦게 유남준을 발견했다.3년 동안 유남준은 큰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멋있고 카리스마 넘치며 전보다 조금 더 성숙해진 모습이었다.3년이란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또 자신의 일생을 다 써버린 것만 같았다.유남준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어서 사과하길 기다렸다.이젠 그만할 때도 됐지!하지만 정작 그녀의 말은 정반대였다.“남준 씨 일하는 데 방해되겠어요. 얼른 들어가요.”유남준은 안색이 확 어두워지고 표정이 얼어붙었다.“너 후회하지 마.”그는 이 한마디만 내던지고 가정법원으로 들어갔다.박민정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씁쓸했다.후회?그런 건 모르겠고 이젠 지쳐버렸다.한 사람이 떠날 결심을 했을 땐 아마 일말의 희망도 얻지 못하고 마음속에 쌓인 실망이 너무 커 더는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겠지.이혼 절차가 진행되고 직원이 두 사람에게 정말 이혼하기로 결심했냐고 물었을 때 박민정은 아주 단호하게 대답했다.“네.”그녀의 확고한 눈빛에 유남준은 가슴이 움찔거렸다.수속을 마치고 한 달이란 숙려기간이 있어 두 사람은 한 달 뒤에 또 이리로 와야 한다.만약 이 한 달 동안 오지 않으면 이혼 신청도 자동으로 폐지된다.가정법원을 나선 후 박민정이 유독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그럼 다음 달에 봐요. 잘 있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곧게 빗속으로 뛰쳐들어가 택시를 잡고 떠나가 버렸다.유남준은 멀어져가는 차를 바라보며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이건 아마도 해탈이겠지.더는 그녀와 얽힐 필요도 없
기사를 열어보니 유앤케이 그룹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바움 그룹을 성공적으로 인수했다고 발표하는 내용이었다.이 세상에 더는 바움 그룹이 존재하지 않는다...기사에는 유남준의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잘생긴 옆모습과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이 인상적이었다.사진 아래에 댓글도 아주 많이 달렸다.「유남준 완전 잘생겼어, 젊은 나이에 그룹 총수라니.」「아쉽게도 유부남이네. 결혼 상대가 박씨 일가의 따님이랬나?」「정략결혼이지 뭐. 3년 전 그 기사 다 잊었어? 결혼식 때 유남준이 아예 신부 손을 뿌리치고 떠났었잖아...」「...」인터넷은 모든 걸 기록하고 있다.박민정은 3년 전 결혼식 날 유남준이 자신을 버리고 분노하며 자리를 떠난 일을 거의 잊고 있었다.그렇게 쭉 아래로 댓글을 읽어내려갔다.이 3년간 그녀는 바움이 조만간 무너진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빠를 줄은 몰랐다....유남준은 최근 흐뭇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바움을 인수하고 끝내 통쾌하게 복수했으니.김인우가 웃으며 말했다.“3년 전에 박씨 일가에서 사기 결혼을 강행하더니 인제 드디어 벌 받네.”그는 문득 화제를 돌려 옆에서 일하는 유남준에게 물었다.“남준아, 귀머거리 요즘 너한테 찾아와서 사정하지 않았어?”서명하던 유남준의 손이 멈칫 흔들렸다.왠지 모르지만 요즘 그의 주변에서 박민정 얘기가 끊이지 않는다.거의 이혼하는 마당에 왜 아직도 그녀를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응, 없어.”그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김인우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박씨 일가에 이렇게 큰일이 발생했는데 박민정이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니?“걔 설마 진짜 해탈한 거 아니야? 누가 그러는데 걔네 엄마가 걔 찾느라고 사방으로 돌아다닌대. 대체 어디 숨었길래.”김인우가 쉴 새 없이 떠들어대자 유남준은 짜증이 확 밀려와 눈썹을 찌푸렸다.“나가!”김인우는 화들짝 놀라더니 그제야 그의 심기를 건드린 걸 알아채고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한 채 대표이사 사무실을 나섰다.그가 떠난 후 유남준은 무심코 휴대폰을 들여다
박민정은 오른쪽 귀에서 피가 나는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한수민은 이토록 연약하고 무능한 딸을 보자 자기 자신이 불쌍하게 느껴졌다.그녀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문서를 박민정에게 건네주었다.“잘 살펴봐.”“엄마가 널 위해서 만들어준 배경이니까.”문서를 받아들자 문서에는 혼인계약서 다섯글자만 보였다.박민정은 문서를 열어보았다.「...박민정 양은 최명길 군의 아내가 되여 그의 일생을 책임지고... 최명길 군은 박진정 양의 가족들의 생활을 보장해주고 600억의 자산을 박씨 집안에게 제공해준다...」최명길. 그는 진주시의 오래된 사업가 중 한명으로 올해 일흔에서 여든이었다.박민정은 뇌가 아릿하게 당겨오는 것 같았다.한수민이 이어 말하는 게 들렸다.“최 사장님이 말씀 하셨어. 네가 재혼이어도 불쾌해 하지 않을거고 자기한테 시집만 오면 박씨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겠다고.”한수민은 기대에 찬 눈으로 박민정을 보면서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으면서 말했다.“착한 우리 딸. 너는 엄마랑 동생을 실망 시키지 않을거야. 맞지?”박민정은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녀는 손 안에 든 계약서를 꽉 움켜쥔 채 말했다.“저랑 남준 씨, 아직 완전히 이혼한 게 아니에요.”한수민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말했다.“최 사장님이 말씀하셨어. 먼저 결혼식을 올린 다음에 혼인신고해도 된다고. 어차피 유남준은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닌데 엄마는 네 선택을 존중한단다. 너희 둘 이혼 허락해줄게.”박민정과 유남준의 결혼을 무를 수도 없었다.한수민은 아들의 말대로 딸이 아직 어릴 때 그 가치를 최대한 사용하고 싶었다.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목이 메어왔다.“뭐 하나만 물어도 돼요?”그녀는 잠깐 멈칫하고 말을 이었다.“제가 친딸은 맞는 거예요?”한수민은 흠칫했다.어르고 달래던 한수민은 바로 표정이 바뀌어 책망하듯이 얘기했다.“내가 너만 아니었으면 내 몸매가 이렇게 될 일이 있었겠니? 세계적인 무용가가 진창에 떨어질 일이 있었겠냐고! 너는 정
주위를 둘러보자 그저 낯설게 느껴졌다.그녀는 또 돌아가는 길을 잊었다.핸드폰을 꺼내서 내비게이션을 킬 생각이었지만 또 한참 동안 사는 곳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연지석은 쭉 그녀를 따라오고 있었는데 아까 유남준이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박민정 혼자 제자리에 서 있는 걸 보고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박민정.”박민정은 유남준이 돌아온 줄 알았다.그녀는 기대 어린 눈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결국 실망하고 말았다. 연지석은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나 진짜 기억 안 나? 나 뚱이야. 잊은 거야?”연지석은 그녀를 일깨워줬다.박민정은 그제야 생각이 났다. 어릴 때 은정숙을 따라서 시골에 가 살 때 친해진 절친 뚱이.그때 연지석은 뚱뚱한 데다가 박민정보다도 키가 작았다. 근데 지금은 190센티미터는 훌쩍 넘는 키에 얼굴도 굉장히 잘생겨졌다.“생각났어. 너 많이 변했다. 못 알아봤네.”어릴 때 친구를 우연히 마주치는 건 꽤 기쁜 일이었다.“가자. 데려다줄게.”박민정을 데려다주면서 그는 그녀가 작고 볼품없는 모텔에 묵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유씨 집안 같은 부잣집 가문이 박민정과 이혼한다 해도 그녀를 이런 누추한 곳에 데려다 놓는 건 말도 안 됐다.박민정은 조금 멋쩍게 말했다.“우스운 꼴만 보였네. 나 여기 묵어. 아주머니한테는 말하지 마! 걱정하실라.”연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너무 늦은 시간이었다.그는 계속 여기 있을 수도 없었다.연지석은 그저 내일 다시 박민정을 만나러 오겠다고 하고 떠났다.모텔을 떠나는 연지석은 길 구석에 세워진 검은색 캐딜락 한 대를 발견하지 못했다.박민정에게 있어서 어디에 묵는지는 다 똑같았다.연지석이 떠났다.술을 마셔서인지 위가 불편했고 머리도 어지러웠다.머릿속에서 유남준이 한 말이 맴돌았다.‘화장은 무슨 귀신처럼 해서... 너 같은 사람을 어떤 남자가 좋아하겠어?!’그녀는 힘을 주어 얼굴에 남은 화장과 입술의 립스틱을 문질렀다. 창백했던 얼굴은 그
하지만 박민정은 증명해 냈다. 난청이라도 피아노, 춤, 노래 모두 그녀는 정상인보다 모자라지 않았다.이 기사는 마치 빛 같았다. 연지석은 그렇게 천천히 일어설 수 있었다.연지석이 자세하게 말하는 그 빛 났던 순간들은 박민정 본인도 잊기 직전이었다.연지석은 그녀를 묵을 곳으로 데려다주었다.박민정은 웃으면서 그한테 말했다.“고마워. 나도 원래의 날 잊기 직전이었어.”연지석은 그녀와 밥 먹으러 갔다.하루 종일 함께 있으면서도 그는 섬세하게도 박민정이 결혼한 후의 일들은 묻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이 흘렀다.날짜를 확인해보니 이혼이 예정된 5월 15일과는 열흘 좀 넘게 남아 있었다.한수민과의 약속이 문득 생각이 났다.그녀는 어느 아침, 돌아간 아빠를 보러 갔었다.돌아가신 아빠의 묘비 앞에서, 자상한 사진 속의 아빠를 보며 박민정은 목이 메왔다.“아빠. 보고 싶어요.”여린 바람이 가볍게 박민정의 볼을 스쳤다.그녀는 코끝이 시렸다.“아빠. 만약 지금 아빠를 보러 가면 무조건 저한테 화내시겠죠?”그는 묘비에 붙은 나뭇잎을 하나하나 떼여냈다.“저도 제가 조금 더 강해야 한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죄송해요...”묘비 앞에 한참을 서 있고서야 박민정은 발걸음을 옮겼다.그녀는 떠날 때 유골함을 샀다.그러고는 사진관에 가서 일하는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 속에서 흑백사진을 찍었다.이 모든 걸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그녀는 창밖의 풍경을 보면서 넋을 놓았다.이때 핸드폰이 울렸다.은정숙 아줌마였다.“민정아. 요새 어떻게 지내?”박민정은 은정숙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잘 지내요.”은정숙은 한숨을 내쉬고는 잔소리했다.“누가 너더러 나한테 몰래 돈 보내랬니? 그 돈, 나는 필요 없다. 뒀다가 너 써. 나중에 사업 같은 거 할 때나...”지난 몇 년간, 박민정은 몰래 그녀에게 돈을 보내왔다.그녀는 시골 사람이다 보니 그리 많은 돈을 쓸 일도 없었고 모두 저축해 두고 있었다.전화 저편에서 은정숙의 관심 어린
이지원은 인터뷰를 마친 후 한수민을 찾아갔다.그리고 한수민과 박민정 동생이 600억을 위해 박민정을 늙은이에게 시집 보내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유남준이 대답이 없자 이지원은 말을 얹었다.“민정 씨 어머니 말로는 민정 씨가 먼저 600억을 요구했다더라고요. 그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그리고 아직 두 분 숙려기간이 끝나지 않아서 정식으로 결혼하는 대신 식만 올리기로 했다고요.”...박민정은 엄마와 동생이 자기 의견은 모조리 무시한 채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신혼을 준비 중인 건 꿈에도 몰랐다.한수민은 그녀가 절대 죽을 용기도 없고 절대 죽지 못하리라 생각했다.어릴 때부터 많은 괴롭힘을 당했지만 떠나기를 선택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이번에도 같을 것으로 생각했다.동생인 박민호는 진즉에 그 600억을 받아서 새로운 회사를 준비 중이었다. 그는 박민정에게 단 조금의 죄책감도 없었다.그리고 이날, 박민정은 한수민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최 사장님이 좋은 날짜 받아오셨어. 이번 달 15일이야. 나흘 동안 잘 준비해서 시집 가면 돼. 이번에는 꼭 이 남자의 마음을 잡아야 한다. 알았지?”박민정은 이 두 메시지를 보면서 마음이 복잡해졌다.15일. 기쁘고 즐거워야 할 날이었다. 그녀가 유남준과 이혼을 약속한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가 떠나려는 날이기도 했다. 박민정은 자신이 또 잊을까 봐 이날을 노트에 기록해 뒀다.그리고 그녀는 친필로 유서를 써 내렸다.필을 들었지만 뭘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에 그녀는 윤정숙과 연지석에게 말을 남겼다.다 쓴 뒤 그녀는 유서를 자신의 베개 밑에 넣어뒀다.사흘 뒤.14일에는 비가 크게 내렸다.핸드폰을 테이블에 올려놨는데 온종일 벨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모두 한수민이 걸어온 전화였고 그녀가 어디 있는지 묻는 것이었다.내일이면 결혼식이니 그녀더러 집에 들러 최 사장에게 시집갈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박민정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 새로 맞춘 붉은 드레스를 입고 예쁘게 화장도 했다.
핸드폰이 박민정 손에서 떨어졌다.빗방울이 핸드폰을 적셨고 스크린도 검게 변했다.박민정은 아빠의 묘에 기대서 품 안의 나무 인형을 끌어안았다. 차가운 비를 맞으면서 아빠가 자상한 얼굴로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걸 보는 것만 같았다.깊은 사랑은 낭만적이고, 가벼운 사랑은 현실적이다. 하지만 둘 중 어느 쪽이든, 미련이 남는 것은 같았다. ...두원 별장.유남준은 끊겨버린 핸드폰을 보며 불안해졌다.다시 걸어보자, 핸드폰에서 들리는 건 차가운 기계음이었다.“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되며 삐 소리 후 통화료가 부과됩니다...”유남준은 몸을 일으켜 외투를 입은 후 밖으로 나갔다.그러고는 문에서 발걸음을 멈췄다.박민정이 밀당을 하는 것이다!곧 이혼인데 그녀가 못할 게 뭐가 있겠는가?침실로 돌아왔지만 왜인지 모르게 그는 잠들 수가 없었다.박민정이 한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만약 엄마랑 동생이 한 일을 알았다면, 전 절대... 절대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에요. 만약에 제가 당신이 이지원을 좋아한 걸 알았다면...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에요. 만약에 아빠가 결혼식 당일 교통사고가 날 걸 알았다면...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예요.”유남준은 몸을 일으켜 자기도 모르게 박민정의 방문 앞에 섰다.박민정이 그곳을 떠난 지 이미 한 달이 훌쩍 넘었다.그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두컴컴한 것이 무척 답답했다.불을 켜자, 박민정의 아무 물건도 남아 있지 않아 휑해 보였다.유남준이 침대맡 테이블을 열어보자 작은 노트가 있었다.노트에는 딱 한 마디만 적혀 있었다.「떠나기로 결심한 사람이 가장 고통스럽겠지. 마음속으로 이미 수도 없이 발버둥 치고서야 그 결심을 내렸을 테니까.」유남준은 수려한 글씨를 보고 차갑게 웃었다.“고통? 너랑 그 몇 년을 보낸 나는 안 고통스러워?”그는 노트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방을 떠날 때 노트는 다시 깨끗하게 머리맡 테이블에 되돌려졌다.방을 떠난 그는 다시는 잠들지 못했다....한편.연
또 하나는 은정숙에게 남긴 것이었다.그가 열어보자 마지막 줄에 은정숙의 주소가 적혀있었다.연지석은 그대로 뛰쳐나갔다.여기서 교외까지 멀지 않았다. 기껏해서 차로 이십여 분 정도 되는 거리였다.하지만 연지석은 이상하게도 한없이 멀게 느껴졌다.그는 이해가 안 됐다. 자기 눈에 그렇게 찬란하게 반짝이던 사람이 왜 이런 길을 선택했는지.그 동시에 그와 같게 교외로 향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는데 한수민이었다.한수민은 600억을 위해 박민정을 데려다 결혼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교외 묘지.비가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박민정은 묘지에 쓰러져 있었다. 빗줄기는 사정없이 그녀의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의 드레스는 진작 흠뻑 젖었고 피골이 상접해서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았다.연지석은 비를 뚫고 박민정을 향해 달려갔다.“박민정!!”돌아오는 건 바람 소리와 빗소리밖에 없었다. 연지석은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그는 달려가 박민정을 안으며 그녀의 옆에 있는 빈 약병을 발견했다.연지석은 떨리는 손으로 박민정을 안아 올렸다.왜 이렇게 가벼울까.“박민정, 정신 차려! 절대 잠들면 안 돼!”말하면서 그는 산 밑으로 뛰여내려갔다....“사모님, 도착했습니다.”운전기사가 말했다.한수민은 창밖에서 낯선 남자가 뛰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의 품 안에 안긴 건... 박민정이였다.“박민정 이 년이!”그녀는 얼굴을 찌푸리고 우산을 들고 내렸다.오늘 한수민은 한복을 쫙 빼입었는데 빗물이 그의 치맛자락을 적셨다.한수민은 짜증 난다는 듯이 다가가서 박민정을 윽박질렀다.화를 내려는 찰나 그는 연지석 품속에 축 늘어진 박민정을 살폈다. 얼굴은 창백하고 눈은 감겨 있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박민정...”한수민이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는 찰나, 바람에 굴러온 약병을 발견했다.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약병을 주웠는데 약병에는 수면제라는 세글자가 크게 적혀있었다.그 순간, 한수민은 그날 박민정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만약 제가 이 목숨
“이 아이들이 예찬이랑 윤우구나?”외할머니는 정교한 이목구비를 가진 똑같이 생긴 두 아이를 바라보며 눈빛이 반짝였다. 그 눈빛에는 놀라움과 기쁨이 가득했다.박예찬과 박윤우는 얌전하게 인사했다.“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그래, 그래. 어서 와서 우리 곁으로 오너라. 같이 들어가자.”아이들이 자신을 증조할머니라고 부르는 것을 듣자 외할머니는 더욱 기뻐했다.외할아버지 역시 감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그들은 원래 정씨 가문이 대를 이을 후손이 없을까 봐 걱정했는데 이제는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안으로 들어가면서 외할아버지는 문득 물었다.“증손주가 더 있다고 했지?”정수미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두 아이가 더 있어요. 그런데 아직 너무 어려서 갑자기 낯선 곳에 오면 적응하기 힘들까 봐 이번에는 데려오지 않았어요. 나중에 데려올게요.”그러자 외할아버지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괜찮아, 우리가 진주로 직접 보러 가면 되지.”“네?”정수미는 순간 당황했다.원래라면 연세도 많으시니, 장거리 이동을 권하지 말아야 했지만, 정보주가 그녀의 팔을 살짝 잡았다. 정보주는 그녀에게 눈짓하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외삼촌과 외숙모께서 정말 기뻐하고 계셔. 괜히 기분 상하게 하지 마.”정수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사실 어르신들이 말만 그렇게 하시는 거지 실제로 움직일 일은 없을 테니 굳이 안 좋은 말을 해서 분위기를 깰 필요는 없었다.“알겠어.”그렇게 온 가족이 기쁜 마음으로 거실로 향했다.넓은 거실 한가운데 커다란 식탁 위에는 각종 서주의 특별 요리가 가득 차려져 있었다.“민정아, 너희 방금 비행기에서 내려서 배고프지? 일단 여기 있는 것 중에서 먹고 싶은 걸 골라봐. 가볍게 먹은 다음에 점심을 따로 차려줄게.”외할머니가 말했다.그녀는 요즘 젊은이들이 식사보다는 간식을 더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어렵게 온 박민정이 조금이라도 더 즐겁게, 맛있게 먹기를 바랐다.“네.”가족들은 함께 간식을 먹
김씨 가문.김훈은 박예찬이 박민정의 외할머니댁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미리 다양한 물건들을 준비해 두었다.“예찬아, 너 거기 가서 증조할아버지한테 영상통화 하는 거 잊으면 안 된다. 안 그러면 증조할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을 거야.”박예찬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증조할아버지.”김훈은 그를 바라보며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다음 날, 김훈은 직접 공항까지 배웅해 주었다.공항에서 정수미와 박민정, 그리고 박윤우까지 모두 도착해 있었다.김훈은 떠나기 전, 정수미와 몇 마디를 나눈 후에야 아쉬운 듯 발걸음을 돌렸다.그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정수미는 문득 감탄했다.“김 회장님께서 정말 우리 예찬이를 많이 아끼는구나.”“맞아요.”박민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김훈은 정말 박예찬을 친 증손주처럼 아꼈다. 이미 예찬이는 김씨 가문의 적지 않은 재산을 갖고 있었다.“회장님께서 이 나이가 되니 진짜 친 증손주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 간절하겠지.”정수미가 한마디 덧붙였다.그녀도 예전에는 박민정을 찾기 전, 주변 또래들이 이미 손주, 외손주를 보며 사는 모습을 보며 부러웠다.때때로 꿈에서도 손주들이 옆에서 재잘대는 모습을 보곤 했다.나이가 들고 인생의 끝이 점점 가까워진다고 느낄수록 피붙이라는 것이 더욱 소중하게 여겨졌다.그때, 비서가 다가와 말했다.“이제 비행기에 탑승하실 수 있습니다.”“그래.”박민정은 정수미를 부축하며 비행기에 올랐다.비행기 안에서 두 아이는 신이 나서 이야기꽃을 피웠지만, 박민정은 점점 긴장되기 시작했다.몇십 년 동안 보지 못한 친척들을 만나게 될 텐데 그들은 어떤 모습일지도 몰랐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그녀는 비행 내내 긴장감을 떨치지 못했다.이를 눈치챈 정수미가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민정아, 걱정하지 마.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그리고 이모들, 다 좋은 분들이야.”박민정은 처음에는 정수미와 같이 있는 것도 어색했지만 이제는 그 손길이 아주 익숙해졌다.그녀는 고
그때 유남준은 단칼에 이지원을 거절했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남준 오빠, 저한테는 이거 하나뿐이에요. 다른 건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유남준은 그녀의 말을 듣고 가볍게 웃었다.“네가 나와 연애한다고 해도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너도 잘 알잖아. 나는 널 좋아하지도 않고 넌 이 기회를 이용해서 내 아내가 될 수도 없어.”그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이지원이 이 말을 듣고 포기할 거로 생각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괜찮아요. 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그저 한 번만 당신과 연애하고 당신의 여자친구가 되어보고 싶어요. 딱 1년만요.”“그러니까 네 말은 그저 연인이라는 이름이 필요하다는 거야?”유남준이 물었다.이지원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그녀의 태도를 보고 유남준은 결국 받아들이기로 했다.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유남준의 연인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이 사실을 알린 사람은 박민정이었다.그녀는 박민정이 유남준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민정 씨, 그거 알아요? 남준 오빠가 저한테 고백했어요. 이제부터 저는 남준 오빠의 여자친구예요. 너무 기뻐요. 민정 씨도 축하해줄 거죠?”그 순간 박민정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이지원은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날, 그녀는 박민정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박민정이 가질 수 없는 것을 손에 넣었다는 우월감이었다.박민정은 도덕성이 강한 사람이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이지원과 유남준이 사귀게 되자, 그때부터 단 한 번도 유남준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았고 유남준을 향한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았다.1년은 빠르게 지나갔고 이지원과 유남준은 헤어졌다.그날, 이지원은 오만한 표정으로 박민정에게 말했다.“솔직히 말해서 남준 오빠도 그냥 평범한 남자더라고요. 별다른 특별함이 없어요. 우리 서로 맞지 않았던 거예요.”그녀는 자신이 아주 교묘하게 승리한 줄 알았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유씨 가문에서 박형식을 찾아와 유남준과 박민정의 결혼을
“정말 예상도 못 했어요. 지원 씨가 이렇게까지 될 줄은 말이에요”최현아의 목소리에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과거에 이지원이 박민정 앞에서 거만하게 구는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지원 씨, 예전에 기자들 앞에서, 그리고 박민정이랑 유남준의 친구들 앞에서 한 말 기억해요? 유남준을 반드시 되찾겠다고 했었잖아요.”이지원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렸다.“제,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그런 생각도 안 할 거고 그런 말도 안 할 거예요.”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간절한 눈빛으로 최현아를 바라봤다.“현아 씨, 제발 도와줘요. 이제 정말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최현아는 완벽히 실망한 듯 등을 돌렸다.“현아 씨!”이지원이 다급히 따라가려 하자 최현아가 돌아서서 매섭게 쏘아붙였다.“저 따라오지 마요. 안 그러면 후회하게 될 거예요.”그 말에 이지원의 발걸음이 그대로 멈췄다.최현아는 거기를 떠났고 기분이 한층 더 언짢아졌다.만약 이지원이 아직도 싸울 의지가 있었다면 그녀를 도와줄 생각이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이지원은 더 이상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과거에는 갖은 악행을 저지르더니 인제 와서 평범하게 살고 싶다니 그런 말이 어떻게 입에서 나올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이지원은 다시 저택 안으로 돌아왔다.이제는 수도도 끊기고 전기도 끊긴 상태였다.이 저택도 곧 경매에 넘어갈 예정이었다.사실 박민정이 그녀에게 했던 유일한 일은 모든 사업 관계자들에게 이지원과의 계약을 철회하라고 한 것뿐이었다.그 외의 모든 것들은 박민정이 한 것이 아니었다.이지원 스스로 박민정이 언제든지 자신을 해칠 거라며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렸고 김인우와 유남준 역시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전전긍긍했다.그녀는 지금의 김인우와 유남준은 그녀가 어떻든, 뭘 하든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지?”이지원은 소파에 털썩 쓰러져 넋이 나간 눈으로 천장을 멍하니 바라봤다.그러다 문득, 자신의
“현아야, 미안해. 다 내가 무능해서 그래.”유성혁은 휠체어에 앉아 병실을 나왔다.최현아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유성혁은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가장으로서 아내와 아이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무력하게 만들었다.최현아는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그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왜 나왔어요?”그녀는 다가가 물었다.“네가 너무 오래 돌아오지 않길래 걱정돼서 나왔어.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해서.”유성혁은 그렇게 말하며 최현아의 손을 잡았다.“현아야, 그만하자.”“뭐를요?”그만하자는 말을 다시 듣는 순간, 최현아는 미간을 세게 찌푸렸다.“우리 이미 충분히 가졌잖아. 굳이 유남준과 싸울 필요 없어. 게다가 호산 그룹 자체가 원래 유남준이 직접 일궈낸 거잖아. 우리에겐 이미 아버지의 유산이 있어. 그걸로도 이미 충분해.”유씨 가문처럼 대대로 내려오는 재벌가의 재산은 단순히 하나의 기업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유명훈이 남긴 돈과 인맥만 해도 어마어마했다.최현아의 얼굴은 점점 차가워졌다.“당신 왜 그렇게밖에 못 살아?”“그게 아니야. 난 그냥 이제 편하게 살고 싶어. 계속 싸우고 다투고 이러는 게 아니라 정말 제대로 살고 싶어.”유성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처음에는 그 두 꼬마 녀석들에게 당한 게 너무 억울해서 복수할 생각뿐이었다.하지만 차분히 생각해 보니 만약 진짜로 두 아이를 다치게 했더라면 자신이 과연 무사할 수 있었을까?더군다나 아이들은 아직 너무 어린데 그들의 목숨을 직접 빼앗을 정도로 자신이 악랄하지는 않았다.그는 단순한 바람둥이일 뿐 아이들을 해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은 아니었다.“당신 때문에 정말 답답해서 미치겠어요!”최현아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한동안 숨을 가다듬더니 다시 그를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병원에서 푹 쉬고 있어요.”최현아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며 답답한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유성혁은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박윤우는 형이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혹시나 유남준이 화를 낼까 봐 재빨리 변명을 늘어놓았다.“아빠, 죄송해요. 우리 앞으로는 절대 나쁜 짓 안 할게요. 그러니까 형한테 화내지 마요.”그러나 유남준은 두 아이를 바라보며 아무런 감정 변화도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너희는 나한테 사과할 필요가 없어.”두 아이는 순간 당황했다.“너희가 잘한 거야. 누군가 너희를 해치려 하면 당연히 반격해야지. 다만,”유남준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덧붙였다.“첫째, 너희는 아직 어려. 다음부터 이런 일이 있으면 나한테 먼저 알려야 해. 둘째, 너희 방식이 너무 허술해. 이렇게 하면 쉽게 들킬 수 있어.”박예찬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아까는 저희가 깊이 생각하지 못했어요.”“앞으로는 조심해.”유남준이 말했다.두 아이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들은 지금 유남준에 대한 신뢰가 한층 더 깊어졌다.유남준은 마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보는 듯한 두 아이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큰아버지가 너희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했어?”박예찬은 고개를 저었다.“사실 정확히 뭘 하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우리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아이스크림을 먹이겠다고 했어요. 그 말부터가 수상했어요.”“맞아요. 제가 증명할 수 있어요. 그거 그냥 어린애들 속이려고 한 얘기예요.”박윤우도 덧붙였다.‘아이스크림을 준다고?’유남준은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유치한 수를 쓴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아이가 별일 없이 무사해서 다행이었다.“이 일은 엄마한테 말하지 마. 괜히 걱정하실 거야.”“알겠어요.”...한편, 병원에서는 유성혁의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최현아가 급히 병실로 들어왔지만,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당신한테 애들을 처리해 달라고 했더니 당신이 왜 이렇게 돼 있는 거냐고요?”유성혁은 이제야 모든 상황이 정리되어 이를 갈며 분노했다.“다 그 빌어먹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유성혁은 그대로 도로 옆 배수로로 굴러떨어졌다. 그는 완전히 겁에 질려 얼이 빠졌다.다행히 차는 고급 모델이라 충격을 흡수해주어 박예찬과 박윤우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하지만 유성혁은 완전히 망가졌다. 어렴풋이 보이는 그의 바지 아래로 뭔가 축축한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큰아버지, 괜찮으세요?”박예찬은 걱정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갔지만, 눈빛 속에는 짓궂은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유성혁은 단순히 겁만 먹은 게 아니었다. 방금 사고의 충격으로 간신히 치료했던 다리가 다시 부러진 것 같았다.큰 소란에 저택 안의 하인들과 경비원들도 소리를 듣고 곧바로 몰려왔다.제일 먼저 도착한 경비원들은 한눈에 유성혁의 처참한 모습을 확인했다.‘유성혁 도련님이 겁을 먹어 오줌을 싸다니, 세상에!’경비원들은 직업정신으로 간신히 웃음을 참고 달려와 물었다.“성혁 도련님, 괜찮으십니까?”한 경비원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유성혁은 느껴지는 고통에 얼굴을 잔뜩 찌푸렸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그는 달려오는 경호원들을 보고는 소리쳤다.“눈멀었어? 내가 지금 괜찮아 보여?”경비원들은 속으로 유성혁을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어 그가 소리를 지르자 기분이 불쾌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모른 척하고 오지 않았을 것이다.“얼른 구급차 안 부르고 거기 서서 뭐 해?”유성혁은 한 번 더 소리를 질렀다.“네, 네!”경비원들은 겉으로는 공손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꼴 좋다고 비웃고 있었다.한편,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박윤우와 박예찬은 이 장면을 지켜보며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박민정과 유남준도 소식을 듣고 현장에 도착해서 들것에 실려 구급차로 옮겨지는 유성혁의 처참한 모습을 보았다.박민정은 어리둥절해 있다가 두 아이를 발견하고 다급하게 뛰어왔다.“윤우야, 예찬아, 너희 괜찮아?”두 아이는 박민정이 오는 것을 보고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우리 괜찮아, 엄마.”박민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다가와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야?
유성혁이 서둘러 돌아와 짜증 난 표정으로 한 움큼의 휴지를 건넸다.“자, 휴지. 빨리 해결하고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네...”박예찬은 힘을 주는 듯한 표정을 지은 뒤 말했다.“알겠어요.”그러면서 박예찬이 휴지를 받으려고 손을 뻗었는데 유성혁은 자기 손에 닿는 이상한 촉감을 느꼈다.그러자 이윽고 박예찬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어이구, 큰아버지, 죄송해요. 실수로 제 똥을 큰아버지 손에 묻혔어요.”유성혁은 심각한 결벽증까진 아니었지만, 평생 이런 더러운 걸 직접 만져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그는 순간 펄쩍 뛰어올라 손을 막 털면서 손에 묻은 것을 털어내려고 애를 썼다.“으악!”비명이 울려 퍼졌다.그 모습이 너무 웃겨서 박예찬은 간신히 웃음을 참았고 박윤우는 아예 입을 틀어막았다.“큰아버지, 혹시 저한테 화난 거 아니시죠? 죄송해요, 정말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박예찬은 일부러 불쌍한 모습으로 사과를 건넸다.유성혁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아이들 앞이라 억지로 화를 참았다.“하, 다음부터 조심해, 알겠지? 얼른 닦아.”그는 손을 치켜든 채 황급히 차로 돌아갔다. 차 안에 물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하지만 한참을 찾아도 물이 보이지 않자 결국 다시 돌아와 아이들에게 말했다.“예찬아, 윤우야,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큰아버지가 손 씻고 올게.”“네!”두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대답했다.“큰아버지, 빨리 다녀오세요. 우리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야죠.”“그래.”유성혁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급히 자리를 떠났다.그가 사라지자마자 두 형제는 더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렸다.“형, 이 방법은 진짜 대박이야!”박윤우가 배를 잡고 웃었다.박예찬도 풀밭에서 걸어 나오며 말했다.“이건 그냥 소소하게 골탕을 먹인 것뿐이야. 엄마를 괴롭힌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그냥 이렇게 넘어갈 수는 없어.”박윤우도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박예
박윤우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박예찬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그러자 박예찬은 그에게 안심하라는 눈빛을 보냈다.쌍둥이끼리 무언가 통하는 게 있는 듯 박윤우는 형의 눈빛에서 무언가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이며 유성혁을 바라봤다.“큰아버지, 저도 같이 갈래요.”뜻밖의 전개에 유성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얼굴에는 숨길 생각도 없이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그래! 그럼 너희 동생들도 같이 데려가자. 다 함께 가는 게 더 재미있잖아.”“안 돼요. 동생들은 아직 어려서 차가운 걸 먹으면 안 돼요.”박예찬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유성혁은 미간을 찌푸렸다.“괜찮지 않아? 이제 한 살이 넘었으니까 괜찮을 텐데.”“그래도 안 돼요.”박예찬은 한층 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동생들을 데려갔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엄마가 우리를 혼낼 거예요.”박예찬은 유성혁의 속셈을 알기에 일부러 튕기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꼭 동생들을 데려가야 한다면 엄마한테 먼저 물어볼게요. 엄마가 허락하면 같이 가요.”“아, 아니야!”유성혁은 당황한 나머지 순간 본색을 드러낼 뻔했지만, 급히 입을 닫고 웃음으로 얼버무렸다.“너희만 오면 될 것 같아. 그래, 나도 생각해 보니까 애들이 너무 어려서 아이스크림은 안 좋을 것 같네.”“알겠어요.”두 형제는 동시에 대답했다.그렇게 해서 박예찬과 박윤우는 유성혁을 따라나섰다. 출발하기 전, 박예찬이 일부러 물었다.“큰아버지, 우리 가정부 이모님한테 말하고 가야 하지 않아요?”“그럴 필요 없어. 너희는 큰아버지 집에 가는 거잖아. 위험한 일도 아닌데 굳이 말할 필요 없어.”“네, 알겠어요.”유성혁은 비록 동생들까지 데려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두 형제를 데려가는 것만으로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나머지 둘은 나중에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그는 최대한 CCTV에 띄지 않도록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이동했다.박예찬과 박윤우는 그를 따라가면서 손목에 찬 전화 시계를 이용해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형, 큰아버지가 아무래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