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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윤지
last update Last Updated: 2024-01-29 16:28:12
“아직 제대로 된 사랑도 못 해봤죠? 남준 오빠는 나랑 있을 때 밥도 직접 차리고 또 내가 아플 땐 제일 먼저 달려왔어요. 나한테 했던 가장 달콤한 말은 바로 ‘지원아, 난 네가 영원히 행복하길 바라’ 이 말이었어요... 오빠가 민정 씨한테는 사랑한다는 말 한 적 있어요? 전에 나한테 엄청 자주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오빠 유치하다고 항상 틱틱거렸거든요...”

박민정은 묵묵히 들으며 이 3년 동안 유남준과 함께한 나날들을 되새겨보았다.

그는 단 한 번도 음식을 차려본 적이 없다.

그녀가 아플 때 관심의 말 한마디조차 없다.

사랑한다는 말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박민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

“할 얘기 다 했어요?”

이지원은 흠칫 놀랐다. 그녀가 너무 차분해서인지 아니면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사람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볼 것만 같아서인지 이유는 알지 못했다.

그렇게 박민정이 떠난 후에야 정신을 가다듬었다.

왠지 모르게 이지원은 지금 이 순간 꼭 마치 박씨 일가의 후원을 받던 가난한 고아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박씨 일가의 귀한 따님 뒤에서 이지원은 영원히 웃음 팔이 피에로 역할이었다.

...

박민정이라고 그녀의 말을 듣고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을까?

12년이나 좋아했던 남자인데, 한때 그녀도 아이처럼 누군가를 좋아했었는데,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했었는데...

박민정은 문득 또다시 두 귀가 아파서 보청기를 빼내더니 그제야 선홍빛 핏물이 고인 걸 발견했다.

그녀는 습관처럼 보청기에 묻은 핏자국을 깨끗이 닦고는 옆에 내려놓았다.

잠이 오질 않아 휴대폰을 가져와 인스타그램을 열었는데 상단 스토리에 이지원 계정이 보란 듯이 초록색 테두리로 되어 있었다.

클릭해 보니 박민정을 ‘친한 친구 리스트’에 넣어 오직 그녀에게만 보여주는 사진들이었다.

첫 장은 대학교 때 이지원과 유남준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둘은 나란히 서 있었고 유남준의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두 번째 장은 둘의 카톡 대화 내용을 캡처한 사진이었다. 유남준은 너무나도 상냥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지원아, 생일 축하해. 널 꼭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줄게.」

세 번째 장은 유남준과 이지원이 손잡고 나란히 모래사장을 걷는 뒷모습이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진들에 박민정은 숨이 꽉 막힐 지경이었다.

그녀는 감히 더는 뒤로 넘기지 못하고 얼른 휴대폰을 껐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젠 포기해야 해. 놓아줄 때가 됐어.’

이날, 박민정은 일기장에 이런 말을 적었다.

「난 원래 어둠을 견딜 수 있었어. 하지만 그건 빛을 보지 못한 전제하에서야.」

다음날 그녀는 습관적으로 일어나 아침밥을 차렸다.

하지만 6시가 다 돼도 유남준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기억났다. 앞으로 집에 돌아와 아침을 먹지 않겠다고 했던 말.

유남준이 안 돌아올 줄 알고 그녀는 홀로 소파에 누워 스르륵 잠들었다.

“아침 안 차려도 된다고 했잖아.”

짜증 섞인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고 박민정은 화들짝 놀라서 눈을 떴다.

유남준은 시큰둥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얼른 습관처럼 사과했다.

“미안해요, 깜빡했어요.”

또 깜빡했다는 말, 또 미안하다는 말...

유남준은 고개 돌려 싸늘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오늘도 늘 똑같은 그레이 톤의 수수한 옷차림이었다.

마치 그가 돈 없어서 와이프를 막 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왜 집에 돌아오는 건 깜빡 안 해? 왜 나랑 결혼한 건 깜빡 안 해? 이참에 그냥 너 자신도 깜빡하지 그랬어? 아쉽겠지? 우리 집안 재산이 욕심나겠지! 돈 버는 기계인 날 놓치기가 싫겠지!”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운 칼처럼 그녀 마음을 정처 없이 난도질했다.

박민정은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남준 씨, 난 한 번도 남준 씨 돈을 노린 적 없어요.”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건 오직 유남준이란 사람 그 자체이다.

유남준은 야유 섞인 미소를 날렸다.

“그런데 너희 엄마가 오늘 아침 회사로 찾아와서 나한테 애 낳아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앞뒤가 안 맞잖아.”

박민정은 어안이 벙벙했다.

한없이 싸늘하고 어두운 그의 두 눈을 마주한 순간 그제야 알아챘다. 유남준은 어젯밤 일로 그녀에게 화낸 게 아니었다.

유남준은 그녀와 쓸데없는 말을 떠벌리지 않았다.

“박민정, 너 우리 집에 무사히 있고 싶거든, 너희 집안 무너지지 않게 하고 싶거든! 너희 어머니더러 분수 지키라고 해.”

말을 마친 유남준은 서재로 가서 물건을 챙기고 옷을 갈아입고는 바로 집을 나섰다.

...

박민정이 한수민을 찾아가기도 전에 그녀가 불쑥 집으로 오더니 쌀쌀맞았던 이전 모습과는 달리 딸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말했다.

“민정아, 남준이 찾아가서 아이 낳자고 빌어! 의학적인 수단을 빌려서라도 꼭 낳자고 해, 응?”

의학적인 수단이라!

박민정은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며 말을 계속 들었다.

“지원이가 이미 알려줬어. 이 3년 동안 남준인 널 단 한 번도 다친 적 없다며.”

참고 또 참았던 분노가 이 한마디에 전부 폭발해 버렸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공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각자의 이익뿐!

유남준은 대체 왜 이런 말을 이지원에게 한 걸까?

그녀를 정말 너무 사랑해서?

여기까지 생각한 박민정은 해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엄마, 인제 그만 해요.”

한수민은 흠칫 놀라더니 미간을 구기고 그녀에게 물었다.

“뭐라고?”

“나 너무 지쳤어요. 남준 씨랑 이혼하고 싶어요...”

“찰싹!”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한수민이 그녀의 뺨을 가차 없이 내리쳤다.

자애로운 어머니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두 눈을 부릅뜨며 딸에게 쏘아붙였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이혼을 논해? 유씨 가문을 떠나면 너같이 온전하지 못한 이혼녀가 재혼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너같이 쓸모없는 딸을 낳은 거야?! 넌 정말 하나도 나 안 닮았어. 이럴 줄 알았으면 널 데려오는 게 아닌데!”

박민정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어려서부터 한수민은 그녀를 싫어했다.

한수민은 유명한 무용가인데 난청인 딸 박민정을 낳은 게 평생의 한이 되었다.

그녀는 모질게 딸아이를 가정부에게 맡겼다가 학교 갈 나이가 돼서야 박씨 일가로 데려왔다.

박민정은 전에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이 세상에 제 자식을 싫어하는 엄마는 없다는 그 말.

그때부터 그녀는 더 우수해지려고 노력했고 엄마에게도 최대한 잘 보이려고 애썼다.

난청이지만 무용, 음악, 서예, 언어 등 장르마다 손꼽히는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다 결국 이제야 알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엄마의 마음속엔 영원히 좋은 딸이 못 된다는 걸.

엄마 말대로 그녀는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다.

몸뿐만 아니라 가족도 사랑도 전부 다...

한수민이 떠난 후.

박민정은 파운데이션으로 얼굴에 난 선명한 손자국을 커버한 후 홀로 차 타고 로펌으로 갔다.

사무실 안.

박민정의 아버지가 생전에 고용했던 법무 장명철은 그녀가 건네준 위임장을 다 훑어본 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너희 아빠가 몰래 네게 남겨주신 일부 유산을 정말 유남준에게 다 줄 거야? 잘 생각해 봐, 그 사람은 이까짓 돈이 부족하지 않아.”

박민정은 머리를 끄덕였다.

“알아요, 하지만 이건 내가 빚진 거니까 갚아야죠 무조건.”

3년 전 박민정의 아빠 박형식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생전에 이미 세 개의 유언장을 작성했는데 한수민이 딸 민정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지 이 마지막 유언장은 사석에서 딸에게 전해주라고 장 변호사에게 당부했다.

마지막 유언장엔 박민정이 결혼한 3년 후, 만약 불행하다고 느껴지거나 본인만의 사업을 차려 남에게 의지하고 싶지 않을 때 이 유언장을 쓸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Comments (2)
goodnovel comment avatar
jy020112
재밌어요~ 좋아요 GOOD 입니다
goodnovel comment avatar
지은
굿굿굿굿good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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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st Updated : 2024-01-29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0화

    기사를 열어보니 유앤케이 그룹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바움 그룹을 성공적으로 인수했다고 발표하는 내용이었다.이 세상에 더는 바움 그룹이 존재하지 않는다...기사에는 유남준의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잘생긴 옆모습과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이 인상적이었다.사진 아래에 댓글도 아주 많이 달렸다.「유남준 완전 잘생겼어, 젊은 나이에 그룹 총수라니.」「아쉽게도 유부남이네. 결혼 상대가 박씨 일가의 따님이랬나?」「정략결혼이지 뭐. 3년 전 그 기사 다 잊었어? 결혼식 때 유남준이 아예 신부 손을 뿌리치고 떠났었잖아...」「...」인터넷은 모든 걸 기록하고 있다.박민정은 3년 전 결혼식 날 유남준이 자신을 버리고 분노하며 자리를 떠난 일을 거의 잊고 있었다.그렇게 쭉 아래로 댓글을 읽어내려갔다.이 3년간 그녀는 바움이 조만간 무너진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빠를 줄은 몰랐다....유남준은 최근 흐뭇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바움을 인수하고 끝내 통쾌하게 복수했으니.김인우가 웃으며 말했다.“3년 전에 박씨 일가에서 사기 결혼을 강행하더니 인제 드디어 벌 받네.”그는 문득 화제를 돌려 옆에서 일하는 유남준에게 물었다.“남준아, 귀머거리 요즘 너한테 찾아와서 사정하지 않았어?”서명하던 유남준의 손이 멈칫 흔들렸다.왠지 모르지만 요즘 그의 주변에서 박민정 얘기가 끊이지 않는다.거의 이혼하는 마당에 왜 아직도 그녀를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응, 없어.”그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김인우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박씨 일가에 이렇게 큰일이 발생했는데 박민정이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니?“걔 설마 진짜 해탈한 거 아니야? 누가 그러는데 걔네 엄마가 걔 찾느라고 사방으로 돌아다닌대. 대체 어디 숨었길래.”김인우가 쉴 새 없이 떠들어대자 유남준은 짜증이 확 밀려와 눈썹을 찌푸렸다.“나가!”김인우는 화들짝 놀라더니 그제야 그의 심기를 건드린 걸 알아채고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한 채 대표이사 사무실을 나섰다.그가 떠난 후 유남준은 무심코 휴대폰을 들여다

    Last Updated : 2024-01-29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1화

    박민정은 오른쪽 귀에서 피가 나는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한수민은 이토록 연약하고 무능한 딸을 보자 자기 자신이 불쌍하게 느껴졌다.그녀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문서를 박민정에게 건네주었다.“잘 살펴봐.”“엄마가 널 위해서 만들어준 배경이니까.”문서를 받아들자 문서에는 혼인계약서 다섯글자만 보였다.박민정은 문서를 열어보았다.「...박민정 양은 최명길 군의 아내가 되여 그의 일생을 책임지고... 최명길 군은 박진정 양의 가족들의 생활을 보장해주고 600억의 자산을 박씨 집안에게 제공해준다...」최명길. 그는 진주시의 오래된 사업가 중 한명으로 올해 일흔에서 여든이었다.박민정은 뇌가 아릿하게 당겨오는 것 같았다.한수민이 이어 말하는 게 들렸다.“최 사장님이 말씀 하셨어. 네가 재혼이어도 불쾌해 하지 않을거고 자기한테 시집만 오면 박씨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겠다고.”한수민은 기대에 찬 눈으로 박민정을 보면서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으면서 말했다.“착한 우리 딸. 너는 엄마랑 동생을 실망 시키지 않을거야. 맞지?”박민정은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녀는 손 안에 든 계약서를 꽉 움켜쥔 채 말했다.“저랑 남준 씨, 아직 완전히 이혼한 게 아니에요.”한수민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말했다.“최 사장님이 말씀하셨어. 먼저 결혼식을 올린 다음에 혼인신고해도 된다고. 어차피 유남준은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닌데 엄마는 네 선택을 존중한단다. 너희 둘 이혼 허락해줄게.”박민정과 유남준의 결혼을 무를 수도 없었다.한수민은 아들의 말대로 딸이 아직 어릴 때 그 가치를 최대한 사용하고 싶었다.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목이 메어왔다.“뭐 하나만 물어도 돼요?”그녀는 잠깐 멈칫하고 말을 이었다.“제가 친딸은 맞는 거예요?”한수민은 흠칫했다.어르고 달래던 한수민은 바로 표정이 바뀌어 책망하듯이 얘기했다.“내가 너만 아니었으면 내 몸매가 이렇게 될 일이 있었겠니? 세계적인 무용가가 진창에 떨어질 일이 있었겠냐고! 너는 정

    Last Updated : 2024-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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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330화

    유남준의 대답에 박민정은 기가 막혔다.“내가 뭘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요? 뭐, 연지석이랑 계약 취소하고 에리도 해고할까요?”유남준은 깊은 눈동자로 박민정을 바라보며 말했다.“할 수만 있다면...”“절대 안 돼요!”박민정이 그의 말을 끊었다.“제 친구인 것도 있긴 하지만, 능력을 봐서라도 절대 남준 씨 말대로 해줄 수는 없어요.”유남준은 박민정의 말에 잠시 혼란스러웠다. 예전이었으면 무슨 일이 있든 박민정은 항상 유남준의 말대로 했을 텐데, 이제는 모든 것이 다 변해버렸다.유남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그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요?”“내가 하려던 말은, 가능하다면 그 두 사람이랑 조금 거리를 뒀으면 좋겠다는 거야. 내가 질투 나니까.”유남준은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마음을 담아 해명했다.그 말은 들은 후에야 박민정은 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달았다.“미안해요. 아까는 내가 너무 성급했네요. 말도 끝까지 못 듣고.”잠시 망설이던 박민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걱정 마요. 난 그 두 사람을 단순한 친구로만 생각할 뿐, 다른 감정은 전혀 없으니까요.”비로소 안심한 유남준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박민정은 그대로 유남준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댄 채 물었다.“오늘 이렇게 온 거, 쉬는 날이어서 온 게 아니죠?”“내 회사야. 내가 쉬는 날이라고 하면 쉬는 날이지.”박민정은 아직도 유남준의 회사가 IM 그룹이라는 것을 모른 채 그 역시 자신과 같은 일반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우린 사업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잖아요. 너무 감정적으로 행동해선 안 돼요. 얼른 회사로 돌아가서 다시 일 봐요.”그녀 역시 회사 운영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리더인 회사 대표부터 게으른 태도로 일한다면 밑에 있는 직원들도 열심히 일할 리 없었다.“알겠어.”유남준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지금의 기분은 조금 전보다 한결 나아졌다.오늘에서야 힘들게 민수아와의 데이트를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329화

    안내데스크 직원은 순간적으로 공포가 엄습해왔다. 저 사람이 정말 박 대표의 남편이라면 자신은 끝장인 게 뻔했으니 말이다.하지만 회사 직원들에게 기재된 박 대표의 소개 글에는 분명 남편과 이혼한 상태라고 되어 있었다.“그냥 우리 와이프랑 밥이나 한 끼 먹으려고 왔지.”말을 마친 유남준은 안내데스크로 고개를 돌리더니 처음으로 그 여직원을 협박하기 시작했다.“잘리고 싶지 않으면 그 남자들 정보는 순순히 부는 게 좋을 거야!”상황 파악을 마친 서다희가 곧장 데스크 직원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네주었다.그리고 안내데스크 직원은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명함을 받아들었다.“네, 네...”이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몰랐던 박민정이 다가와 물었다.“오늘은 출근 안 해요?”“오는 쉬는 날이야.”유남준은 태연한 얼굴로 거짓말을 했다.“목요일인데 쉬는 날이라고요? 당신 회사 직원들은 참 좋겠다.”박민정이 대답했다.곁에서 유남준과 박민정의 사이에 끼어 애매한 포지션이 되긴 싫었던 진서연이 말했다.“보스, 저는 수아 씨랑 이 근처 좀 돌기로 약속해서요. 먼저 가보겠습니다.”“그래.”박민정은 흔쾌히 그 말에 대답했다.유남준도 고개를 돌려 서다희를 바라보며 말했다.“너도 우리 따라오지 말고 수아 씨 찾으러 가. 회사 직원들 간식거리도 좀 챙겨가고.”그의 의도는 아주 명백했다. 그저 XS 그룹의 직원들에게 박민정의 남편이 왔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것이었다.박민정은 그런 유남준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그럼 밥이나 먹으러 가요. 뭐 먹고 싶은데요?”“나는 다 괜찮아. 네가 먹고 싶은 거로 먹자.”유남준은 정말 식사를 위해 찾아온 게 아니라 박민정의 회사 사람들에게 그녀가 유부녀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온 것이었다.“그래요.”박민정도 예의상 해봤던 말을 더 꺼내지 않았다.그녀는 곧장 유남준을 데리고 자신이 자주 가는 회사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배불리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소화도 시킬 겸 함께 산책했다. 그러던 중 궁금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328화

    듣고 있던 매니저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에리는 아마 본인도 그렇게 정직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됐어, 화 그만 내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하지만 에리는 지금 밥이 넘어갈 기분이 아니었다.“넌 유남준이 연지석의 존재를 알 거라고 생각해?”그 질문에 미간을 찌푸린 매니저가 대답했다.“너 이건 좀 아니지 않아?”“뭐가 아닌데.”휴대폰을 집어 든 에리는 연지석이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 부사장으로 승진했다는 사실을 유남준에게 알려주었다.유남준의 표정이 보기 좋게 험악해졌다.“연지석이 왜 또 거기 있는 겁니까?”그런 유남준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서다희는 어이가 없었다.‘언제는 자기한테 이런 일 하나하나 알려주지 말라더니?’“게다가 부사장이라고요?”유남준의 기분이 점점 심연으로 곤두박질쳤다. 아침에 박민정을 회사까지 데려다줄 때까지만 해도 그는 에리에 대해서만 몇 가지 물어보려 했다.하지만 정신 차려 보니 어느새 그녀의 옆에는 연지석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해 있었다.유남준은 저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켰다.“대표님, 왜 그러십니까?”서다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오늘 휴가 내고 XS 본사 한 번 가봐야겠어.”그쪽 회사로 가서 자신의 권위를 보여주지 않으면 아내가 정말 다른 사람의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서다희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자신의 대표를 따라나섰다.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인 줄 알았더니 이렇게 불안해할 때도 있다는 것이 새로웠다.XS 그룹.1층 로비의 안내데스크 직원은 유남준과 서다희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선생님, 죄송하지만 저희 대표님과 미리 약속이 안 되어 있으셔서 올라가실 수 없습니다.”정중하게 말을 마친 안내 직원은 유남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눈앞의 남자가 너무 잘생긴 탓이었다.연지석 부대표와 견주어도 밀리지 않을 얼굴이었다.그 말에 윤남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이 회사 박 대표의 남편인데, 따로 예약까지 해야 하나?”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327화

    정수미에게 붙여둔 미행인이 박민정과 유남준에게 상황을 전달해 주었다.모든 것을 전해 들은 박민정이 혀를 찼다.“정말 한 편의 드라마가 따로 없네. 그래도 이제 함미현이 걱정하고 있는 게 뭔지는 잘 알겠네요.”유남준 역시 대략적인 상황을 짐작한 듯했다.“윤소현이 이미 함미현의 정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어쩐지 정수미 친딸이라는 함미현 씨가 윤소현 말에 너무 고분고분 따르더라고요. 이제 모든 게 다 이해가 되네요.”박민정인 이제 정수미가 안쓰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곁에 딸이라고 남아 있는 사람 중에 그녀를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말이다.그렇게 힘들게 찾아낸 친딸도 가짜였다니.이제는 염혜란까지 사라졌다. 박민정은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해 추모를 마치고 유남준과 함께 돌아갔다.운전기사는 박민정을 회사 정문에 내려주었다.박민정이 차에서 내리려 하던 그때, 유남준이 그녀를 불러세웠다.“잠시만.”“왜요?”박민정이 고개를 돌려 유남준을 바라보며 물었다.잠시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던 유남준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아니야. 저녁에 데리러 올게.”“알겠어요.”박민정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최근 들어 회사에서는 꽤 많은 신입 직원들을 채용했고, 그중에는 호산 그룹에서 건너온 사람들도 꽤 많았다.회사로 들어선 박민정은 오늘따라 유난히 떠들썩한 회사 분위기를 눈치챘다. 자세히 보니 여직원들 여럿이 스튜디오와 고층을 오가며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서연아, 무슨 일이야?”진서연이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이게 다 우리 회사 요물들 때문이잖아요.”“요물들이라니?”서류 뭉치를 들고 지나가던 설인하가 말했다.“연지석이랑 에리잖아요.”설인하의 말을 들은 박민정도 뒤늦게 상황을 이해했다.그럴 만도 한 것이 그 두 명은 정말 요물이 다름없었다. 생김새부터 비현실적으로 잘생긴 탓에 회사 여직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보스, 요즘에 그 능력 있는 홍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326화

    10분 후.어느 정도 마음의 위안을 얻어 진정된 함미현은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사람은 이제 윤소현으로 바뀌었다.방 안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고 윤소현은 차오르는 눈물에 목소리도 똑바로 낼 수 없었다.“엄마, 제가 잘못했어요. 저는 다 엄마를 위해서 그랬던 거예요.”“날 위해서였다고?”윤소현의 말을 듣는 순간, 정수미는 분노 섞인 헛웃음을 터뜨렸다.“날 위해서 사람을 죽이고, 남을 해쳤단 말이니? 어디 한번 말해봐. 염혜란 씨를 죽인 게 어떻게 날 위해서였다는 건지.”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몸을 덜덜 떨고 있던 윤소현이 입을 열었다.“염혜란만 사라지면, 미현이한테는 엄마만 남잖아요. 그러면 미현이도 굳이 다른 사람들 신경 안 써도 될 거고.”“고작 그 이유라는 거니?”정수미는 윤소현의 입에서 나온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윤소현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다.“엄마, 저는 그냥 엄마가 행복하시길 바랐던 거예요.”“저는 엄마를 위해서 제 친엄마인 한수민이랑 천륜까지 끊었는데 미현이가 양엄마를 끊어내지 못할 건 또 뭔데요? 걔가 못 끊겠다고 하니까 제가 대신 나서서 직접 끊어준 거예요. 덕분에 미현이한테는 지금 한 명의 엄마만 남게 됐잖아요!”윤소현의 태도는 아주 당당했다.정수미는 말을 마친 윤소현의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더니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이런 못된 것!”정수미의 손바닥이 거쳐 간 윤소현의 뺨은 이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정수미가 살면서 처음으로 윤소현에게 손찌검을 한 것이다.“엄마, 어떻게 저를 때리실 수가 있어요? 저는 항상 엄마를 친엄마라고 생각해왔는데, 미현이 오니까 이젠 저한테 손찌검도 하시네요.”윤소현은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정수미를 올려다보았다.“그러니까 너는 지금, 이게 다 내 잘못이라는 거니? 내가 너랑 한수민을 끊어낸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어? 내 가정을 파탄 낸 사람이 바로 한수민이었으니까! 그리고 너는 그 여자랑 윤석후의 딸이었고. 내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325화

    함미현은 한동안 지나고 나서야 겨우 진정했다.“이제 어떡하죠? 어떻게 이렇게 악랄할 수 있죠? 정수미에게 말해도 될까요?”함미현은 더 이상 정수미를 엄마라고 부르기 싫었다.박민정은 정수미가 함미현을 도와줄지 확신할 수 없었다.“영상은 줄게요. 정수미에게 얘기해서 도와달라고 해도 되지만 저는 정수미가 정말 윤소현에게 손을 댈 거로 생각하진 않아요.”윤소현은 정수미가 어릴 적부터 키우던 딸이었으니 말이다.박민정은 정수미가 혈연을 우선시하는 성격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지금은 오히려 정수미가 두 딸 중 누굴 선택할지 궁금해졌다.함미현은 바로 결심했다.“지금 바로 가야겠어요.”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자기 멈춘 그녀는 치명적인 문제를 떠올렸다.‘윤소현이 내 약점을 잡고 있는데...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문다고 내가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정수미에게 얘기하면 어떡하지? 그러면 정수미는 나랑 동하를 가만두지 않을 텐데...’“왜 그래요?”박민정은 함미현이 망설이는 모습에 의아했다.함미현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정씨 가문에서 제 위치는 정말 낮아요. 제가 영상을 보여준다고 해도 도와주지 않을 것 같아요. 그냥 포기할래요. 민정 씨,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함미현은 급히 호텔을 떠났다.박민정은 미간을 좁히며 그녀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다.‘조금 전까지 정수미에게 따지려고 하더니 이제 와서 왜 저러는 거지?’호텔을 나선 함미현은 윤소현이 염혜란을 해친 영상을 손에 쥐고 무거운 마음을 억눌렀다.그녀는 너무나도 우울했다.“엄마,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정수미를 찾아가야 할까?”함미현은 앉아서 고민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윤소현이 왜 갑자기 염혜란을 해친 건지 궁금해졌다.‘엄마가 죽는다고 윤소현에게 무슨 좋은 점이 있지?’함미현은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한참을 앉아 천천히 생각한 그녀는 중요한 결론을 내렸다.‘내 신분이 드러난다면 정수미가 복수를 하겠지만 친딸이 어디 있는지 무조건 물을 거야. 근데 정씨 가문의 친딸은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324화

    애초 그녀가 함미현에게 박민정의 자리를 대체하라고 하지 않았다면 자신도 이렇게 큰 변화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동하의 병은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염혜란은 후회하지 않았지만 죄책감을 느꼈다.그녀는 박민정을 바라보았다.박민정은 그녀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 같아 앞으로 다가갔다.윤소현은 염혜란이 박민정에게 진실을 말할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염혜란은 마지막 힘을 다해 한마디 했다.“미... 안... 해요.”그녀의 손이 침대에서 떨어지며 그녀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함미현은 완전히 무너져 내리며 오열하기 시작했다.“엄마!”윤소현은 염혜란이 숨을 거두는 것을 보고 한숨을 돌렸다.‘늙은 년이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아서 다행이네.’박민정은 염혜란이 자신에게 왜 미안하다고 했는지 계속 생각했다.‘왜 나한테 사과하는 거지?’박민정은 이해할 수 없었다.그때 정수미가 밖에서 들어오며 염혜란이 그렇게 세상을 떠난 것을 보고 안타까워했다.그녀는 함미현 곁으로 다가가 말했다.“미현아, 너무 슬퍼하지 마. 그렇게 울다가 몸 상한다.”함미현은 정수미의 목소리를 듣고 염혜란이 그녀 때문에 죽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고 정수미를 노려보았다.그 시선에 정수미는 가슴이 내려앉았다.함미현은 주먹을 꽉 쥐고 억눌린 분노를 참으며 말했다.“엄마랑 단둘이 있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정수미는 잠시 망설였지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그녀와 윤소현, 박민정은 수술실을 나섰다.밖은 이미 밝아져 있었다.수술실 안에서는 함미현의 통곡 소리가 들렸고 밖에서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정수미는 걱정스러운 한편 괴로운 마음도 들었다.‘미현이가 왜 나를 그런 눈으로 본 걸까? 마치 내가 염혜란을 죽였다는 듯이 봤는데...’윤소현이 혼란스러워하는 정수미에게 다가갔다.“엄마, 어제 밤새 쉬지 못하셨죠? 제가 바래다 드릴게요.”그녀의 눈빛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정수미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미현이 기다려야지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323화

    박민정은 영상을 들여다보며 충격을 받았다.영상 속에는 윤소현이 저지른 죄행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는데 박민정은 윤소현이 이토록 잔인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영상이 아니었다면 박민정은 윤소현이 한 일이라고 확신하지 못했을 것이다.유남준 역시 영상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충격에 빠졌다.박민정이 핸드폰을 꺼내며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지만 유남준이 그녀를 막아섰다.“잠깐만.”“왜요?”명확한 증거가 있으니 윤소현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를 것이다.“이 영상만으로 윤소현을 확실하게 몰아세울 수 없어. 지금 아주머니에게 수술해 주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 사람인지 생각해 봐.”박민정이 순간 깨달았다.“이해했어요. 저 사람들이 윤소현이 아주머니를 해친 게 아니라, 주입한 약물이 해로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거죠?”“그래.”유남준은 박민정이 자신의 의도를 이해한 것에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박민정은 그제야 조금 전까지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유남준이 막아서 다행이었다.그녀는 경호원에게 핸드폰을 건네며 말했다.“영상은 저한테 보내주세요.”“네.”경호원은 빠르게 영상을 박민정의 이메일로 보내주었다.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수술실 문이 드디어 열렸다.의사가 문을 열고 나오자 함미현이 급히 달려가며 물었다.“선생님, 어머니는 어떻게 됐나요?”의사가 깊은숨을 내쉬며 답했다.“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가세요.”그 말에 함미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왜 이렇게 됐죠? 어젯밤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어떻게 갑자기 돌아가실 수 있어요?”의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정수미를 바라보았다.정수미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앞으로 다가갔다.“미현아, 너무 괴로워하지 말고 먼저 어머니께 가서 마지막 인사라도 드려.”함미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수술실로 뛰어갔다.정수미는 의사를 한쪽으로 불러내며 조용히 말했다.윤소현도 그 모습을 보고 뒤따르려 했지만 정수미가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322화

    정수미는 박민정의 시선을 마주하고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다.낯설지 않은 눈이었다. 오히려 친숙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박민정은 정수미와 마주치자 예의 있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정 대표님. 오랜만입니다.”정수미는 그녀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두 딸 때문에 정수미는 박민정에게 호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그래. 오랜만이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야?”그녀는 먼저 말을 꺼냈다.“병원에 당연히 친구 보러 왔죠. 정 대표님도 그렇지 않으세요?”박민정은 정수미가 염혜란을 보러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지.”“그럼 같이 갈까요?”박민정이 제안하자 정수미는 거절하지 않고 대답했다.“좋지.”박민정은 앞서 걸었고 유남준은 그녀의 옆에서 따라갔다.정수미는 그 둘을 보며 윤소현이 항상 말하던 박민정과 유남우의 관계를 떠올렸다.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뒤따르던 정수미가 유남준에게 말했다.“유 대표님, 이렇게 이른 시간에 함께 오시는 걸 보니 아내를 정말 아끼시는군요. 앞으로도 아내를 잘 지켜주세요.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주지 마시고요.”정수미의 말에 유남준과 박민정은 모두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박민정은 정수미가 자신의 딸인 윤소현을 위해 가시 돋친 말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까지 그녀는 유남우에게 관심을 둔 적도 부적절한 행동을 한 적도 없었다.유남준은 정수미의 말을 알아차리고 돌아서며 말했다.“저는 제 아내를 믿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른 사람의 가정사에는 신경 쓰지 마시고 딸이나 잘 보살펴 주시죠.”정수미는 그의 말에 순간적으로 얼어붙으며 말문이 막혔다.옆에서 걷고 있던 비서가 정수미에게 다가서며 말했다.“유남준이 정말 박민정과 유남우 사이의 일을 모르는 걸까요?”“글쎄. 모른 척하는 사람에게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지.”정수미는 딸인 윤소현의 말이 맞다고 믿으며 유남준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두 일행은 동시에 수술실 앞에 도착했다.함미현과 윤소현은 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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