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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윤지
「남준 오빠, 그동안 잘 못 지냈죠? 그 여자 안 사랑하는 거 알아요. 우리 오늘 밤 만나요. 오빠 너무 보고 싶어요.」

휴대폰 화면이 어두워질 때까지 박민정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택시 타고 유남준의 회사로 가는 길에서 박민정은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봤다. 비는 그칠 새도 없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유남준은 그녀가 회사로 찾아오는 걸 별로 반기지 않는다. 올 때마다 박민정은 뒷문에 있는 화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니까.

유남준의 전담 비서 서다희도 그녀를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

“오셨어요, 민정 씨.”

유남준의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사모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항상 떳떳하지 못한 존재니까.

박민정이 휴대폰 주러 회사까지 찾아오자 유남준은 미간이 확 구겨졌다.

그녀는 늘 이런 식이다. 점심 도시락, 서류, 옷, 우산까지 유남준이 놓친 걸 전부 회사로 보내온다.

“말했잖아, 일부러 내 물건 주러 회사 안 와도 된다고.”

박민정은 흠칫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미안해요, 깜빡했어요.”

언제 기억력이 이렇게 나빠졌지?

아마도 이지원이 보낸 문자를 보고 덜컥 겁이 나서 그랬나 보다.

유남준이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떠나기 전 박민정은 고개 돌려 유남준을 바라보더니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남준 씨, 아직도 이지원 씨 좋아해요?”

유남준은 요즘 들어 박민정이 참 이상했다.

자꾸 뭘 까먹지 않나, 이상한 질문만 해대질 않나, 그의 아내가 되기엔 턱없이 부족한 모습이었다.

유남준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렇게 심심하면 뭐라도 할 일 좀 찾아.”

박민정은 결국 정확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녀도 전에 일자리를 구해봤지만 유씨 일가 어르신들이 그녀가 얼굴을 내비치면 가문의 체면만 깎는다고 단호하게 차단해 버렸다.

유남준의 어머니 고영란은 그녀에게 거리낌 없이 쏘아붙였다.

“너 정녕 온 세상에 알릴 생각이니? 우리 남준이가 청력에 문제 있는 장애인 아내를 찾았다고?”

장애인 아내라...

집에 돌아온 후 박민정은 최대한 바삐 돌아쳤다.

먼지 하나 안 날릴 정도로 집 청소를 깨끗이 해놨지만 여전히 쉬지 않고 구석구석 닦았다.

이렇게 해야만 마지막 남은 일말의 가치라도 느낄 수 있으니까.

오늘 오후엔 유남준의 문자가 없었다.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화났거나 매우 바쁘거나 둘 중 하나이다...

밤이 깊어졌지만 박민정은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 머리맡에 놔두었던 휴대폰이 갑자기 요란스럽게 울려댔다.

그녀는 휴대폰 화면을 쳐다봤는데 낯선 번호로 걸려 온 전화였다.

전화를 받자 달콤하면서도 늘 그녀를 불안감에 떨게 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바로 이지원이다.

“민정 씨? 남준 오빠 취했어요. 지금 데리러 올 수 있나요?”

...

수호 클럽.

유남준은 메인 석에 앉아 넋 놓고 술을 퍼마셨다.

그의 옆엔 이지원이 앉아 있었고 한 무리 재벌가 도련님들이 그녀에게 노래 한 곡 불러 달라며 유난을 떨었다.

“지원 씨 이번에 우리 유 대표님이랑 잘해보려고 돌아온 거잖아요.”

“노래 한 소절로 우리 유 대표님한테 고백해 봐요.”

이지원은 예쁘고 개방적인 데다 유남준의 첫사랑이니 재벌가 도련님들은 모두 그녀와 유남준을 맺어주려고 한다.

이지원도 우물쭈물하지 않고 흔쾌히 넬의 ‘기억을 걷는 시간’을 불렀다.

“아직도... 너의 소리를 듣고 아직도 너의 손길을 느껴...”

그녀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다들 조용히 노래를 감상했다.

박민정이 룸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이지원이 막 한 곡을 다 불렀고 룸 안의 사람들은 유남준을 부추기기 바빴다. 그중에서도 절친 김인우의 목소리가 제일 컸다.

“남준아, 너 지원이 3년이나 기다렸잖아. 인제 드디어 돌아왔는데 무슨 말이라도 해야지. 여자인 지원이가 먼저 고백까지 했잖아.”

박민정은 멍하니 제자리에 서서 주먹을 꽉 쥐었다.

이때 마침 화장실로 가려던 한 남자가 룸 문을 열어젖혔다.

박민정이 넋 놓고 서 있는 모습에 그 남자도 화들짝 놀랐다.

“민정 씨.”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이 전부 문 앞으로 시선이 쏠렸다.

순간 룸 안에 이상하리만큼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박민정은 메인 석에 앉은 유남준을 쳐다봤는데 맑은 눈빛은 전혀 취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지원에게 농락당한 걸 알아챘다.

유남준은 박민정을 보자 눈동자가 살짝 떨렸고 한창 유남준과 이지원을 엮어주려던 김인우를 비롯해 룸 안의 모든 이가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자리는 박민정이 찾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민정 씨, 오해하지 말아요. 인우 씨가 장난 좀 친 거예요. 저랑 남준 오빠는 그냥 친구 사이에요.”

이지원이 정적을 깨고 그녀에게 해명했다.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유남준이 짜증 섞인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명할 거 없어.”

그는 곧게 박민정 앞으로 다가왔다.

“여긴 왜 왔어?”

“취한 줄 알고 데리러 왔어요.”

그녀는 솔직하게 대답했고 이에 유남준은 차갑게 쏘아붙였다.

“오늘 내가 한 말은 한마디도 귀에 안 들어갔나 보네.”

그는 목소리를 내리깔고 오직 둘만 들을 수 있게 나지막이 되물었다.

“3년 전에 내가 감쪽같이 속은 걸 이 사람들이 모를까 봐 일부러 찾아와서 되새겨주는 거야?”

박민정은 흠칫 놀랐다.

유남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실없이 존재감 드러내지 마. 너 이러는 거 점점 더 가증스러울 뿐이야!”

말을 마친 유남준은 그녀에게 등 돌리고 자리를 떠났다.

박민정은 그의 커다란 뒷모습을 한참 동안 넋 놓고 바라봤다.

오늘은 어쩌면 유남준이 그녀에게 말을 제일 많이 한 날이고 또한 그녀를 제일 아프게 한 날이기도 하다.

룸 안의 재벌가 도련님들은 버림받은 박민정을 전혀 안쓰러워하지 않았다.

김인우도 거리낌 없이 저쪽에서 불쌍한 표정을 짓는 이지원에게 말했다.

“지원아, 너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뭘 더 해명할 게 있다고... 박민정이 사기 결혼만 강행하지 않았어도 남준이는 너랑 결혼했어. 그럼 너도 굳이 머나먼 해외로 가서 그 고생을 하지 않았을 거고.”

박민정은 귓속이 윙윙거렸지만 그들이 한 말은 또박또박 다 들렸다.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안다.

유남준이 자신과 결혼하든 안 하든, 그는 절대 아무런 집안 배경도 없는 이지원과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 점은 이지원도 잘 알고 있기에 단호하게 이별을 택하고 머나먼 해외로 떠나갔다.

그런데 왜 인제 와서 모든 게 박민정의 잘못으로 전락한 걸까?

그녀는 두원 별장으로 돌아갔다.

늘 그렇듯 칠흑 같은 어둠이 드리워지고 그녀가 외출할 때 모습과 돌아왔을 때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유남준은 아직이다.

박민정은 우산을 들고 문 앞에 서 있었는데 마치 암흑 속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문득 영원히 홀로 있는 이 집안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바깥 정자에 앉아서 찬바람과 스산한 빗줄기를 맞이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름다운 실루엣이 그녀 앞에 나타났는데 바로 이지원이었다!

그녀는 화려하게 차려입고 하이힐 소리를 내며 박민정 옆에 와서 앉았다.

“밤이 참 춥네요. 한밤중에 남준 오빠 찾아갔다가 한바탕 농락당한 기분이 어때요?”

박민정은 묵묵히 들을 뿐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지원은 신경 쓰지 않은 채 계속 제 말만 했다.

“그거 알아요? 처음에 나 민정 씨 엄청 부러워했어요. 집안 좋지, 자상하고 딸 아껴주는 아빠가 있어서 평생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지. 근데 이젠 민정 씨가 너무 가엽네요. 남준 오빠 10여 년간 묵묵히 좋아했는데 정작 오빠는 민정 씨한테 곁을 아예 안 주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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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goodnovel comment avatar
복은하
재미있게 읽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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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계를 들여다보니 마침 10시 정각이었다.유남준은 그녀에게 전화해 도착했는지 물어보려 했는데 멀지 않은 곳의 나무 아래에 박민정이 어두운 톤의 옷을 입고 서 있었다.주르륵 내리는 가랑비 속에 앙상하게 마른 그녀는 바람이 불면 쓰러질 것 같았다.금방 유남준과 결혼했을 때, 박민정은 밝고 긍정적이었다. 지금처럼 어두운 표정과 뼈만 남은 초라한 모습이 아니라.그는 우산을 들고 박민정에게 걸어갔다.그녀는 뒤늦게 유남준을 발견했다.3년 동안 유남준은 큰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멋있고 카리스마 넘치며 전보다 조금 더 성숙해진 모습이었다.3년이란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또 자신의 일생을 다 써버린 것만 같았다.유남준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어서 사과하길 기다렸다.이젠 그만할 때도 됐지!하지만 정작 그녀의 말은 정반대였다.“남준 씨 일하는 데 방해되겠어요. 얼른 들어가요.”유남준은 안색이 확 어두워지고 표정이 얼어붙었다.“너 후회하지 마.”그는 이 한마디만 내던지고 가정법원으로 들어갔다.박민정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씁쓸했다.후회?그런 건 모르겠고 이젠 지쳐버렸다.한 사람이 떠날 결심을 했을 땐 아마 일말의 희망도 얻지 못하고 마음속에 쌓인 실망이 너무 커 더는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겠지.이혼 절차가 진행되고 직원이 두 사람에게 정말 이혼하기로 결심했냐고 물었을 때 박민정은 아주 단호하게 대답했다.“네.”그녀의 확고한 눈빛에 유남준은 가슴이 움찔거렸다.수속을 마치고 한 달이란 숙려기간이 있어 두 사람은 한 달 뒤에 또 이리로 와야 한다.만약 이 한 달 동안 오지 않으면 이혼 신청도 자동으로 폐지된다.가정법원을 나선 후 박민정이 유독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그럼 다음 달에 봐요. 잘 있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곧게 빗속으로 뛰쳐들어가 택시를 잡고 떠나가 버렸다.유남준은 멀어져가는 차를 바라보며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이건 아마도 해탈이겠지.더는 그녀와 얽힐 필요도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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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를 열어보니 유앤케이 그룹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바움 그룹을 성공적으로 인수했다고 발표하는 내용이었다.이 세상에 더는 바움 그룹이 존재하지 않는다...기사에는 유남준의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잘생긴 옆모습과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이 인상적이었다.사진 아래에 댓글도 아주 많이 달렸다.「유남준 완전 잘생겼어, 젊은 나이에 그룹 총수라니.」「아쉽게도 유부남이네. 결혼 상대가 박씨 일가의 따님이랬나?」「정략결혼이지 뭐. 3년 전 그 기사 다 잊었어? 결혼식 때 유남준이 아예 신부 손을 뿌리치고 떠났었잖아...」「...」인터넷은 모든 걸 기록하고 있다.박민정은 3년 전 결혼식 날 유남준이 자신을 버리고 분노하며 자리를 떠난 일을 거의 잊고 있었다.그렇게 쭉 아래로 댓글을 읽어내려갔다.이 3년간 그녀는 바움이 조만간 무너진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빠를 줄은 몰랐다....유남준은 최근 흐뭇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바움을 인수하고 끝내 통쾌하게 복수했으니.김인우가 웃으며 말했다.“3년 전에 박씨 일가에서 사기 결혼을 강행하더니 인제 드디어 벌 받네.”그는 문득 화제를 돌려 옆에서 일하는 유남준에게 물었다.“남준아, 귀머거리 요즘 너한테 찾아와서 사정하지 않았어?”서명하던 유남준의 손이 멈칫 흔들렸다.왠지 모르지만 요즘 그의 주변에서 박민정 얘기가 끊이지 않는다.거의 이혼하는 마당에 왜 아직도 그녀를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응, 없어.”그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김인우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박씨 일가에 이렇게 큰일이 발생했는데 박민정이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니?“걔 설마 진짜 해탈한 거 아니야? 누가 그러는데 걔네 엄마가 걔 찾느라고 사방으로 돌아다닌대. 대체 어디 숨었길래.”김인우가 쉴 새 없이 떠들어대자 유남준은 짜증이 확 밀려와 눈썹을 찌푸렸다.“나가!”김인우는 화들짝 놀라더니 그제야 그의 심기를 건드린 걸 알아채고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한 채 대표이사 사무실을 나섰다.그가 떠난 후 유남준은 무심코 휴대폰을 들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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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774화

    방성원도 방은정의 작은 손을 꼭 잡아주고 나서야 그녀는 안심하고 다시 잠에 들었다.그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설인하는 왠지 모르게 씁쓸한 감정이 몰려왔다.그러다가 문득 이혼도 먼저 제안하고 거기에 아이 양육권까지 달라고 한 자신이 너무 이기적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아이도 아빠를 너무 잘 따랐고 방성원도 아이를 많이 예뻐했다.이때, 차가 갑자기 급정거하게 되었는데 설인하가 채 반응도 하기 전에 방성원은 그녀와 방은정을 자기 품에 꼭 안았다.그리고 살벌한 얼굴로 운전 기사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에요?”“대표님, 죄송합니다. 갑자기 앞에 차가 급정거하는 바람에...”연신 사과하는 운전기사를 보고 방성원이 다시 차분하게 답했다.“천천히 몰아요.”“네.”이 시각 설인하는 여전히 딸과 함께 방성원의 품에 안겨 있었는데 또다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그러다가 문득 그의 두 눈과 마주하게 되었고 두 사람은 한동안 그 상태로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이때, 방은정이 방성원의 옷자락을 잡고 그를 불렀다.“아빠...”방성원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면서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그 뒤로 차는 도로 위를 아주 천천히 달리게 되었는데 이상하게 설인하는 아까부터 심장이 계속 두근거려 창밖을 바라보면서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집에 도착하자마자 방성원은 방은정을 안은 채 앞에서 걸었고 설인하는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도우미는 세 사람이 같이 돌아온 모습을 보고 살짝 긴장한 얼굴로 다가와 물었다.“은정이는 괜찮나요?” “그저 보통 감기래요.”방성원은 아이를 그녀에게 넘기며 말했다.“너무 다행이네요.”여태껏 도우미가 방은정을 계속 돌보고 있었는데 이렇게 예쁜 아이가 아프다고 하니 자신도 걱정되었다.그렇게 도우미는 방은정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이때, 방성원은 한창 출근 준비 중인 설인하를 불러세웠다. “얘기 좀 해.”“뭐?”두 사람은 나란히 집을 나섰고 방성원이 대뜸 그녀에게 물었다.“정말 나랑 이혼하고 싶어?”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773화

    “괜찮아. 할아버지께서 건강검진 받으셨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했대.”조하랑도 병원 의사한테서 들은 얘기였지만 김훈이 미리 시켰단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박예찬은 당장에라도 조하랑에게 모든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게 너무 답답해서 그저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저는 그래도 이모가 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순간 조하랑은 깜짝 놀라 단번에 박예찬의 입을 막았다.“예찬아, 이 일은 이모랑도 약속했지? 절대로 할아버지랑 인우 삼촌한테 말하면 안 돼. 알겠지?”그러자 박예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말하려면 진작에 말했어요.”‘하긴.’조하랑은 이미 어른이랑 별다를 게 없는 박예찬이 너무 든든했다.“그러면 다행이고. 어른들의 일은 어른이 해결할 테니까 넌 빨리 학교 가.” 박예찬은 자신의 설득에도 조하랑이 고집을 부리니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다른 한편, 김인우는 그제야 박민정의 난청 수술에 관한 일이 떠올라 수술 시간을 확인차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자 박민정은 서주에 갔다 와서 다시 수술 날짜를 잡겠다고 말했다.순간 오늘 갑자기 서주로 가겠다던 조하랑이 떠올랐는데 사실 지금 그녀가 하는 업무는 온라인 마케팅 부분이라 굳이 출장 갈 필요가 없었다.설령 필요하다고 해도 이렇게나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아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요 며칠 하랑 씨가 뭐 하고 다니는지 잘 지켜봐 봐.”김인우는 모든 일을 안배한 뒤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그러나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방성원, 설인하 부부와 딸 방은정의 모습이 보였다.“성원아, 병원엔 웬일이야?”“아기가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아서 검사하러 왔어.”“그래.”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더 얘기를 나눈 뒤 헤어졌다.그러다가 김인우는 다시 뒤돌아 방성원네 세 식구의 모습을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은 언제쯤 아이가 있을지, 언제쯤 조하랑과 아이와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772화

    “왜요? 혹시 아이 갖고 싶어요?”저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데 과연 조하랑이 뭐라고 할 수 있을까?순간 짜증이 밀려온 조하랑은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저도 싫어요. 애초에 아기를 잘 돌보는 타입도 아니라서 그냥 말해본 거예요.”그녀는 말하면서도 이불자락을 꽉 쥐었다.동시에 김인우도 그녀의 대답에 적잖이 실망감을 느꼈다.여태껏 조하랑이 박예찬과 잘 놀아주는 모습만 봐서 당연히 그녀가 아이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솔직한 마음을 속인 채 불편한 상태로 자야 했다.그러나 조하랑은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고 내일은 무조건 할아버지한테 외지로 떠나겠다고 말할 셈이었다.이튿날 아침.두 사람은 모두 일찍 일어났는데 그중 김인우는 확실히 어제보다 안색이 좋아졌다.“깼어요? 언제 시간 있을 때 우리 또 훠궈 먹으러 가요.”김인우는 이제부터 그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 했지만 조하랑은 왠지 그러기 싫어졌다.“아마 내년까지 기다려야겠네요.”식탁 옆에 앉아 있던 김훈이 그녀의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하랑아, 왜 내년까지 기다려?”“할아버지, 마침 말씀드리려던 참이었는데요. 저 서주시에 가서 일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략 1년 반 정도 뒤에 다시 돌아올게요.”조하랑의 말에 김훈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왜 갑자기 그리 멀리 가는데?”이때 조하랑은 박예찬에게 눈빛을 보내며 자신을 도와 몇 마디라도 해주길 바랐다.그러나 지금 박예찬의 머릿속은 온통 김훈의 건강 때문에 누구를 도와줄 처지가 아닌 것 같아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밥만 먹었다.“할아버지, 저는 아직 나이도 어리고 여러 곳에서 많이 도전해 보고 싶어요. 그러니까 부디 허락해 주세요.”조하랑은 활짝 웃으며 그에게 애교를 부렸다.그녀가 김씨 가문으로 시집오고부터 김훈은 조하랑이 원하는 건 모두 들어줬고 단 한 번도 안 된다고 거절한 적이 없었다.그러나 문득 자기 건강을 생각해 보니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그래. 그럼 인우랑

  • 죽기 전엔 못 놔줘   재1771화

    김인우는 살짝 어리둥절했다.집에 있을 때도 매번 셰프에게 평범한 집밥 요리만 주문했던 그녀였기 때문이다.그러자 조하랑이 매운 닭발 하나를 들고 그에게 말했다.“저는 기분이 다운되거나 우울한 일이 있으면 무조건 매운 음식을 먹어줘야 해요.”“먹으면 좀 나아져요?”“당연하죠. 입 안이 얼얼해지면서 온몸이 개운해지거든요. 믿지 못하겠으면 오늘 한번 도전해 보시든지.”말을 마치자마자 조하랑은 그의 접시에 고기 한 점을 덜어줬다.김인우는 거절하는 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젓가락으로 집어서 입에 넣었는데 순간 너무 뜨겁고 매워 허겁지겁 물로 입을 헹궜다.“너무 매운데요? 이런 음식은 건강에도 안 좋을 것 같은데 적게 먹는 게 좋겠어요.”그러자 조하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저도 아는데 가끔 먹는 건 상관없어요.”그녀는 지금 임신 중이라 매일 집에서 해주는 요리를 거의 못 먹는 상황이었는데 오늘 훠궈를 보자마자 갑자기 집 나갔던 입맛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자, 여기 더 먹어요. 이것도 먹다 보면 습관 되거든요.”김인우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먹기 시작했다.조하랑의 말대로 처음에는 살짝 받아들이기 힘들었는데 먹다 보니 너무 매운 것도 아니었다.그러나 확실히 덥긴 더웠는지 두 사람은 땀도 많이 흘리고 물도 엄청나게 마셨다.어느새 배가 부른 조하랑은 만족스러운 듯 자기 배를 통통 두드렸고 김인우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확실히 이 방법이 효과가 있는 것 같네요.”“당연하죠. 저는 매번 이렇게 스트레스 풀거든요.”말하면서 활짝 웃는 조하랑의 모습을 김인우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이 빤히 바라보았다.어느새 그의 뜨거운 시선을 느낀 조하랑은 뚝딱거리며 그에게 물었다.“왜 그렇게 봐요?”김인우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 몇 번 하더니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너무 배불러서 잠깐 멍때린 거지 일부러 본 거 아니에요.”“아, 네네.”조하랑은 그의 대답에 별생각 없이 또 우유 한 잔을 들이켰다.사실 지금 상태로는 가능한 매운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770화

    이 시각, 조하랑은 무작정 핸들은 잡았는데 어디로 가면 좋을지 몰랐다.김인우도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 없는 것 같아 그저 도로를 따라 앞으로 계속 직진했다.평소 재잘거리기 좋아하던 김인우는 오늘 유난히 조용했고 그저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조하랑은 가는 도중에도 사실 몇 번이고 그를 위로해 보고 싶었지만 끝내 내뱉지 못하고 말을 다시 삼켰다.딱히 위로할 줄 아는 사람도 아니었기에 김인우가 스스로 이 우울함을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앞으로 조금만 가다가 오른쪽으로 가요.”이때, 김인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네.”그리고 그의 말대로 옆 골목으로 빠지니 어느새 인적이 없는 작은 길이 나왔다.얼마쯤 더 가보니 조하랑은 산 중턱에 있는 묘원을 발견했다.“여기서 세워줘요.”“네.”차가 멈추자마자 김인우가 먼저 내렸고 조하랑은 빠르게 그의 옆으로 다가가 물었다.“여긴 어디예요?”“김씨 가문의 묘지에요.”조하랑은 말없이 그를 따라갔다.그렇게 수많은 묘비를 지나 김인우는 어느 부부의 합장 묘비 앞에 멈춰 섰다.조하랑은 묘비에 걸려있는 왼쪽과 오른쪽 두 장의 흑백 영정사진을 번갈아 보다가 그제야 두 부부의 모습이 김인우와 많이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외모상으로 봤을 때는 겨우 20~30대밖에 안 돼보이는데 생각해 보면 너무 일찍 고인이 된 것 같았다.김인우는 묘비 위의 부모님 사진을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그들을 불렀다.“아빠, 엄마.”조하랑은 가만히 서 있다가 앞으로 한 발짝 내딛으며 인사를 건넸다.“아버님, 어머님, 제 이름은 조하랑이고 인우 씨 아내입니다.”두 사람은 결혼한 후에도 김씨 가문의 묘원에는 와본 적이 없었다.김훈은 그녀가 사람이 많은 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에 추석이나 설 때에도 될수록 친정집에서 가족들과 명절을 쇨 수 있게 배려해 줬다.김인우는 뜬금없는 조하랑의 행동에 어리둥절해서 그녀에게 되물었다.“왜 갑자기...”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하랑이 먼저 말했다.“뭐가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769화

    김훈은 박예찬이 일찍 철이 들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생각이 깊은 아이일 줄은 몰랐다.“할아버지가 사실대로 말해주면 절대로 하랑 이모랑 우리 인우한테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알겠지?”박예찬은 머뭇거리다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네.”김훈은 그제야 오늘 병원에서 들은 결과를 말해줬는데 지금 상황이 매우 안 좋다고 했다. 계속 시도 때도 없이 심장이 두근거려서 검사해 보니 심장병이 맞았고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고 했다.그러나 김훈은 여태껏 사람들 앞에서 줄곧 꾀병을 부리는 듯한 행동을 보여줬다.“증조할아버지, 그런데 왜 하랑 이모랑 은우 삼촌한테 비밀로 하나요?”박예찬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김인우가 자기 앞에서 김훈이 얼마나 고집불통인지 불만을 토로하던 모습이 떠올랐다.만약 자기 할아버지가 진짜로 병에 걸렸다는 걸 알면 그런 소리도 못 할 텐데 말이다.그리고 조하랑도 마찬가지다.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김훈에게 알려주면 엄청 기뻐할 텐데 애석하게도 그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바보야, 사람이 늙으면 죽는 게 자연스러운 거야. 그걸 뭣 하러 말해? 말해봤자 괜히 걱정만 시키겠지. 남은 사람이라도 즐겁게 살아야 하지 않겠어?”박예찬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렸다.그러자 김훈이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말했다.“예찬아, 방금 한 약속은 꼭 지켜야 해. 절대로 두 사람에게 말하면 안 된다. 아니면 이 할아버지가 진짜로 화낼 거야.”“네.”박예찬은 자꾸만 목이 메어와 겨우 답했다....다른 한편.조하랑은 김훈의 부탁대로 김인우의 방문 앞까지는 왔지만 뭐라고 문을 두드려야 할지 막막했다.바로 이때, 방문이 갑자기 열리면서 김인우는 또다시 자기 눈앞에 서 있는 조하랑과 마주하게 되었다.“왜요? 또 무슨 일 있어요?”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가 다시 끄덕였다.“네, 아, 아니요.”혼란스러운 그녀의 대답에 김인우가 미간을 찌푸리고 되물었다.“맞다는 거예요, 아니라는 거예요?”“그, 그게 혹시 지금 어디로 가요?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768화

    “하랑아, 할아버지가 잊어버리고 너한테 말해주지 않았는데 오늘이 인우 부모님 기일이야.”김훈의 말에 조하랑은 그제야 김인우가 오늘 왜 저리도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는지 이해가 갔다.“지금 생각해 보니 작년 이맘때쯤에도 그랬던 것 같네요.”작년에는 김인우한테 별로 관심이 없었을 때라 물어보지도 않았다.김훈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때 인우가 어리기도 했고 또 부모님의 죽음이 커서도 큰 트라우마로 남았나 봐.”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하랑아, 혹시 우리 인우 좀 도와줄 수 있을까?”“나는 인우가 그래도 널 좋아한다고 생각하거든. 가서 그냥 옆에 있어 주기만 해도 돼. 저렇게 방안에 자신을 가두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서 그래. 아무리 평소에는 까불거리고 말하기 좋아한다고 해도 마음이 아주 여린 아이라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거야.”조하랑은 점점 김인우가 안쓰럽게 느껴졌다.사실 그의 어머니는 어릴 적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그러나 아버지는 항상 엄마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도록 그에게 최선을 다해 아낌없는 사랑을 줬다.“네, 제가 노력해 볼게요.”조하랑의 대답에 김훈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그리고 박예찬의 방에 가서 문을 두드렸다.“예찬아.”“증조할아버지, 들어오세요.”김훈은 박예찬의 말에 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가 활짝 웃으며 물었다.“예찬아, 할아버지가 오늘 무슨 선물을 가져왔게?”김훈은 손을 뒤로 감췄으나 박예찬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바로 답했다.“또 어디서 간식 사 왔어요?”“아이고, 먹는 게 아닌데?”김훈이 장난스레 답했다.“그럼 바둑인가요?”김훈은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 네 연령대에 어울리는 물건이라고 생각해 줄래?”그러나 박예찬은 끝까지 알아맞히지 못했다.김훈은 그제야 싱글벙글해서 손에 감췄던 물건을 내놓았는데 그건 바로 다이아몬드 게임이었다.“우리 보드게임 한판 하자.”박예찬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너처럼 매일 컴퓨터만 보고 있으면 시력 건강에 아주 안 좋아.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767화

    그리고 곧바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어차피 조하랑과 엄마의 비밀은 어느 정도 다 알고 있었다.겨우 거실에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조하랑은 더는 못 참고 입을 열었다.“민정아, 나 인우 씨랑 할아버지한테 아직 임신 사실을 말하지 않았어.”“왜?”박민정은 조하랑의 몸을 보더니 이제 어느 정도 임산부인 티가 난다고 생각했다.그러자 조하랑이 머뭇거리며 답했다.“인우 씨 태도가 계속 애매하더라고. 그리고 이런 부잣집 도련님에 대해 솔직히 믿음이 안가.”지금까지 딱 한번 연애를 해봤는데 그때 호되게 당한 뒤로는 아무리 결혼했다고 해도 여전히 남자에 대한 경계심이 높았다.“그런데 이런 일은 숨긴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잖아.”“그러니까.”조하랑은 깊은 한숨을 쉬더니 박민정을 보며 물었다.“민정아, 예찬이가 그러던데 너희 가족 모두 서주에 간다면서? 나도 따라가면 안 될까?”“뭐?”박민정이 깜짝 놀라 그녀에게 되물었다.“서주에 가서 뭐 하려고?”“일단 서주로 일하러 간다고 하고 1년 반 정도 있다가 다시 돌아오려고.”조하랑은 여전히 김인우가 아이를 빼앗아 갈까 봐 두려워했다.그녀의 말에 박민정은 그제야 조하랑이 홀로 아이를 낳은 뒤 다시 돌아올 계획이란 걸 알아챘다.“과연 할아버지께서 널 보내줄까?”“걱정하지 마. 할아버지쯤이야 가볍게 구슬릴 수 있어. 나를 제일 아끼는 분이라 반드시 허락할 거야.”“그래. 결정되면 알려줘.”조하랑은 둘도 없는 친구이기에 박민정도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돕고 싶었다.“민정아, 고마워.”말을 마치자마자 조하랑은 박민정을 꼭 안아줬는데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 박민정은 그녀의 등을 토닥여줬다.“아무리 그래도 태어날 아이의 미래도 잘 생각해 봐야 해. 혹시나 아빠가 필요할 수도 있잖아...”박민정은 여태껏 겪었던 자기 경험담을 모두 말해줬다.그러자 그녀는 박민정을 더욱 꽉 끌어안으며 답했다.“응, 그럴게.”두 사람은 얼마간 이야기를 더 나누다가 박민정이 그만 집에 가려는데 마침 김훈이 돌아왔다.그리고 박민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766화

    얼마 지나지 않아 고급 차 한 대가 그들 앞에 세워지더니 고영란이 두 동생을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어머님.”고영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민정아.”이때, 정수미가 말소리를 듣고 눈을 뜨자 고영란은 빠르게 그녀에게 다가왔다.“사돈.”마침 두 사람은 나이도 비슷했고 같은 또래다 보니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박민정도 옆에서 네 명의 아이와 놀아줬다.“어, 어마마...”두 동생은 아직 말이 서툴렀지만 박민정은 오히려 그게 듣기 좋았다.이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려 확인해 보니 조하랑이었다.“민정아.”“무슨 일이야?”“혹시 지금 우리 집으로 좀 와 줄 수 있어?”떨리는 소리로 묻는 조하랑의 모습에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든 박민정은 빠르게 답했다.“응. 바로 갈게.”그리고 고영란과 정수미에게도 김씨 가문으로 간다고 말하자 박예찬이 냉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엄마,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그래.”그렇게 박민정은 박예찬을 데리고 김씨 가문으로 가는 차에 올라탔다.도착해보니 조하랑은 진작에 대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고 두 사람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무슨 일인지 인우 씨가 하루 종일 혼자 방안에서 꼼짝도 안 하고 있어. 불러도 대답 없고.”“할아버지는?”“오늘 병원에 검사받으러 가셨는데 괜히 할아버지까지 걱정 끼쳐드리고 싶지 않아.”박민정은 일단 조하랑과 같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그리고 김인우의 방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조하랑은 다시 조심스레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인우 씨, 문 좀 열어봐요. 민정이랑 예찬이가 놀러 왔어요.”박민정이 왔다는 말에 방안에서 의자를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그제야 방안의 인기척을 느낀 조하랑은 다시 그에게 물었다.“혹시 무슨 일 있어요?”“한번 나와봐요.”지금까지 김인우와 같이 살면서도 이런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오래 기다린 끝에 마침내 방문이 열리면서 김인우의 모습이 보였는데 다크써클이 턱까지 내려온 얼굴에 수염까지 덥수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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