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죽기 전엔 못 놔줘
죽기 전엔 못 놔줘
작가: 윤지

제1화

작가: 윤지
청명,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병원 문 앞에서.

박민정은 가녀린 몸에 수척한 손으로 병원 임신 테스트 보고서를 들고 있었는데 보고서에는 임신이 아니라는 문구가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

“결혼한 지 3년인데 아직도 임신 못 했어? 왜 이렇게 쓸모가 없니? 너 계속 임신 안 되면 유씨 일가에서 쫓겨나는 수가 있어. 그땐 우리 집안더러 어떡하라는 거야?”

한수민은 하이힐을 신고 화려한 옷차림에 실망 가득한 표정으로 박민정에게 삿대질했다.

박민정은 두 눈이 퀭하고 가슴에 꽉 막혔던 그 말들이 결국 한 마디로 함축되었다.

“미안해요.”

“엄마는 미안하단 말을 원하는 게 아니야. 얼른 남준의 아이를 낳으란 말이야. 알겠니?”

박민정은 목이 확 메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혼한 3년 동안 남편 유남준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곁을 안 주는데 어떻게 아이가 생길까?

한수민은 약해빠진 딸의 모습을 바라보며 왜 저를 닮지 않았는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녀는 차가운 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남준이한테 여자 한 명 찾아줘. 걔도 그럼 너한테 고마워할 거 아니야.”

박민정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떠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친엄마란 자가 딸에게 지금 남편을 위해 여자를 찾아주란 말이나 내뱉고 있다니.

그녀의 마음에 순간 찬바람이 휘몰아쳤다.

...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박민정의 머릿속엔 온통 엄마의 마지막 말만 감돌았다.

문득 귓가에 굉음이 한바탕 울렸다.

그녀는 자신의 병이 더 심해진 걸 알고 있다.

이때 문득 휴대폰 문자 벨 소리가 울렸다.

유남준의 3년을 하루 같이 보낸 문자였다.

“오늘 밤 집에 안 가.”

결혼한 이 3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집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없다.

아내인 그녀를 터치한 적은 더더욱 없고.

3년 전 신혼 첫날밤에 유남준이 했던 말을 그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너희 집안에서 감히 사기 결혼을 감행했으니 넌 인제 평생 고독하게 살 각오해.”

평생 고독하게 살라고...

3년 전 박씨 일가와 유씨 일가에서 정략결혼을 맺었다.

분명 양가 집안의 이익을 위한 결혼이라고 약속했건만 결혼식 날 박씨 일가에서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 유남준이 결혼 예물로 박민정에게 준 2천억 원을 포함해 모든 재산을 빼돌렸다.

여기까지 생각한 박민정은 안색이 어두워지고 늘 그랬듯 남편에게 알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손에 쥔 임신 테스트 보고서는 어느새 꾸깃꾸깃한 종이 덩어리가 돼버렸다.

집에 도착한 후 그녀는 보고서를 휴지통에 바로 내던졌다.

매달 이맘때면 그녀는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다.

저녁밥도 준비하지 않고 소파에 기댄 채 스르륵 잠들었는데 귓가엔 늘 우르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또한 유남준이 그녀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박민정은 난청이 있어 재벌가에서는 장애인에 해당한다.

유남준이 이런 그녀와 어떻게 아이를 가질 생각을 할까?

벽에 걸린 유럽식 벽시계가 둔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시계는 어느새 새벽 다섯 시를 가리켰다.

한 시간만 더 있으면 유남준이 돌아온다.

박민정은 소파에 누워 밤을 지새운 걸 알아채고 허둥지둥 일어나 남편의 아침상을 차렸다. 1초라도 늦으면 안 되니까 매우 조심스러웠다.

유남준은 매사에 철두철미하고 시간에 대한 요구도 엄청 까다로운 편이다. 전에 박민정이 아빠 장례식에 갔다가 제시간에 맞춰 집에 돌아와 그의 아침밥을 차리지 못했는데 그 일로 유남준은 한 달이나 그녀에게 문자 한 통 없고 대화조차 하지 않았다.

유남준은 6시 정각에 맞춰 돌아왔다.

훤칠한 키에 이태리 슈트를 차려입은 유남준은 고고한 기품이 저절로 흘러넘쳤으며 잘생긴 외모에 남성미가 뿜어져 나왔다.

다만 박민정의 눈가에 스친 그의 모습은 마냥 차갑고 소외감만 들 뿐이다.

유남준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곧게 의자에 가서 앉으며 말했다.

“앞으론 아침밥 준비 안 해도 돼.”

박민정은 흠칫 놀랐다.

그녀는 본능적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저도 모르게 비천한 말투로 물었다.

“내가 뭐 잘못했나요?”

유남준은 고개 들어 3년 동안 변함없이 잔잔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원하는 건 아내이지 가정부가 아니야.”

3년 내내 박민정은 늘 똑같은 연회색 옷차림이었고 문자 답장도 항상 알겠다는 그 한마디뿐이었다.

솔직히 정략결혼만 아니었다면, 박씨 가문의 사기 결혼만 아니었다면 유남준은 절대 이런 여자와 결혼할 리가 없다!

박민정은 그에게 가당치도 않으니까!

‘내가 원하는 건 아내이지 가정부가 아니야!’

그녀의 귓가에 굉음이 더 크게 울렸다.

박민정은 침을 꼴깍 삼키고는 또다시 유남준이 제일 싫어하는 그 말을 내뱉었다.

“알았어요.”

순간 유남준은 기분이 확 잡쳐 평소 제일 즐겨 먹던 아침밥도 맛없게 느껴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짜증 섞인 얼굴로 의자를 빼고 밖에 나가려 했다.

이때 박민정이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남준 씨는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유남준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무슨 뜻이야?”

박민정은 고개 들어 그를 빤히 쳐다봤다.

유남준은 그녀와 결혼한 지 3년 되는 남편일 뿐만 아니라 그녀가 무려 12년이나 쫓아다니며 좋아한 남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박민정은 차오르는 씁쓸함을 꾹 짓누르고 엄마가 했던 말을 되새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 좋아하는 사람 있으면 그분과 함께...”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남준이 가로챘다.

“미친.”

...

인생은 결국 부단히 내려놓는 것이다.

유남준이 떠난 후 박민정은 홀로 베란다에 앉아 처량하게 흘러내리는 빗줄기를 넋 놓고 바라봤다.

그를 12년이나 좋아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에 대해 아는 게 없다.

빗소리는 가끔 또렷하게 또 가끔은 어렴풋이 들렸다.

한 달 전,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박민정 씨는 청신경과 중추에 병변이 생겨 현재 청력이 다시 감퇴했습니다.”

“다른 치료 방법은 없는 건가요 선생님?”

의사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장기간의 신경성 청력 저하로 뚜렷한 약물치료 효과가 없어요. 청력 재활을 위해 보청기를 계속 착용하시길 제안합니다.”

박민정은 의사의 말뜻을 바로 이해했다. 아무런 치료 방법도 없다는 뜻이었다.

보청기를 빼면 그녀의 세상은 온통 고요한 정적이다.

그녀는 이런 조용한 세계가 적응되지 않아 거실로 나와서 TV를 켰다.

볼륨을 최대치로 올리면 겨우 조금 들리는 수준이다.

이런 우연이 또 있을까? TV를 켜자마자 세계적인 발라드 여왕 이지원의 인터뷰 장면이 나왔다.

리모컨을 들고 있던 박민정의 손이 움찔거렸다.

다름이 아니라 이지원은 한때 유남준의 첫사랑이다.

몇 년 만에 보는 데도 그녀는 여전히 예뻤다.

이지원은 이젠 카메라 앞에서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러웠다. 애초에 박씨 일가의 후원을 받으려고 애쓰던 수줍고 열등감 넘치는 신데렐라가 아니었다.

기자가 귀국 이유를 묻자 그녀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대범하게 말했다.

“제 첫사랑을 다시 만나려고요.”

손에 쥐었던 리모컨이 바닥에 떨어졌고 박민정의 마음도 철썩 내려앉았다.

창밖의 빗소리도 점점 더 켜졌다.

그녀는 솔직히 두려웠다. 이지원이 유남준을 뺏어갈까 봐 너무 두려웠다.

그해 박씨 일가의 보배 따님이었을 때도 그녀는 아무 배경 없는 이지원을 제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이지원이 세계적인 발라드 여왕으로 거듭나서 밝고 자신감이 흘러넘치니 더더욱 비할 바가 못 된다.

박민정은 횡설수설 TV를 끄고 수저도 안 댄 아침밥을 치우러 갔다.

주방에 들어가 보니 유남준이 휴대폰을 놓고 나갔다.

그녀는 휴대폰을 챙기다가 부주의로 화면이 열렸는데 마침 읽지 않은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
댓글 (3)
goodnovel comment avatar
Eun Kim
너무궁금궁금 .....
goodnovel comment avatar
이은정
궁금하네요. 이야기가
goodnovel comment avatar
서연
유남준......
댓글 모두 보기

관련 챕터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2화

    「남준 오빠, 그동안 잘 못 지냈죠? 그 여자 안 사랑하는 거 알아요. 우리 오늘 밤 만나요. 오빠 너무 보고 싶어요.」휴대폰 화면이 어두워질 때까지 박민정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택시 타고 유남준의 회사로 가는 길에서 박민정은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봤다. 비는 그칠 새도 없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유남준은 그녀가 회사로 찾아오는 걸 별로 반기지 않는다. 올 때마다 박민정은 뒷문에 있는 화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니까.유남준의 전담 비서 서다희도 그녀를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오셨어요, 민정 씨.”유남준의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사모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그녀는 항상 떳떳하지 못한 존재니까.박민정이 휴대폰 주러 회사까지 찾아오자 유남준은 미간이 확 구겨졌다.그녀는 늘 이런 식이다. 점심 도시락, 서류, 옷, 우산까지 유남준이 놓친 걸 전부 회사로 보내온다.“말했잖아, 일부러 내 물건 주러 회사 안 와도 된다고.”박민정은 흠칫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미안해요, 깜빡했어요.”언제 기억력이 이렇게 나빠졌지?아마도 이지원이 보낸 문자를 보고 덜컥 겁이 나서 그랬나 보다.유남준이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떠나기 전 박민정은 고개 돌려 유남준을 바라보더니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남준 씨, 아직도 이지원 씨 좋아해요?”유남준은 요즘 들어 박민정이 참 이상했다.자꾸 뭘 까먹지 않나, 이상한 질문만 해대질 않나, 그의 아내가 되기엔 턱없이 부족한 모습이었다.유남준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그렇게 심심하면 뭐라도 할 일 좀 찾아.”박민정은 결국 정확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그녀도 전에 일자리를 구해봤지만 유씨 일가 어르신들이 그녀가 얼굴을 내비치면 가문의 체면만 깎는다고 단호하게 차단해 버렸다.유남준의 어머니 고영란은 그녀에게 거리낌 없이 쏘아붙였다.“너 정녕 온 세상에 알릴 생각이니? 우리 남준이가 청력에 문제 있는 장애인 아내를 찾았다고?”장애인 아내라...집에 돌아온 후 박민정은 최대한 바삐 돌아쳤다.먼지 하나 안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3화

    “아직 제대로 된 사랑도 못 해봤죠? 남준 오빠는 나랑 있을 때 밥도 직접 차리고 또 내가 아플 땐 제일 먼저 달려왔어요. 나한테 했던 가장 달콤한 말은 바로 ‘지원아, 난 네가 영원히 행복하길 바라’ 이 말이었어요... 오빠가 민정 씨한테는 사랑한다는 말 한 적 있어요? 전에 나한테 엄청 자주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오빠 유치하다고 항상 틱틱거렸거든요...”박민정은 묵묵히 들으며 이 3년 동안 유남준과 함께한 나날들을 되새겨보았다.그는 단 한 번도 음식을 차려본 적이 없다.그녀가 아플 때 관심의 말 한마디조차 없다.사랑한다는 말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박민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할 얘기 다 했어요?”이지원은 흠칫 놀랐다. 그녀가 너무 차분해서인지 아니면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사람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볼 것만 같아서인지 이유는 알지 못했다.그렇게 박민정이 떠난 후에야 정신을 가다듬었다.왠지 모르게 이지원은 지금 이 순간 꼭 마치 박씨 일가의 후원을 받던 가난한 고아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박씨 일가의 귀한 따님 뒤에서 이지원은 영원히 웃음 팔이 피에로 역할이었다....박민정이라고 그녀의 말을 듣고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을까?12년이나 좋아했던 남자인데, 한때 그녀도 아이처럼 누군가를 좋아했었는데,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했었는데...박민정은 문득 또다시 두 귀가 아파서 보청기를 빼내더니 그제야 선홍빛 핏물이 고인 걸 발견했다.그녀는 습관처럼 보청기에 묻은 핏자국을 깨끗이 닦고는 옆에 내려놓았다.잠이 오질 않아 휴대폰을 가져와 인스타그램을 열었는데 상단 스토리에 이지원 계정이 보란 듯이 초록색 테두리로 되어 있었다.클릭해 보니 박민정을 ‘친한 친구 리스트’에 넣어 오직 그녀에게만 보여주는 사진들이었다.첫 장은 대학교 때 이지원과 유남준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둘은 나란히 서 있었고 유남준의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다.두 번째 장은 둘의 카톡 대화 내용을 캡처한 사진이었다. 유남준은 너무나도 상냥한 말투로 이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4화

    인제 보니 아빠는 유남준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걸 진작 알아챘나 보다.하지만 딸의 행복을 위해 유씨 일가와 계약을 체결했고 박민정도 소원대로 유남준에게 시집갈 수 있었다.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두 사람이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아빠가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를 당하셨다.만약 아빠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남동생과 엄마도 계약을 위반하지 않을 텐데...박민정은 재산 양도 수속을 전부 장 변호사에게 건넨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길옆에서 이지원의 홍보 포스터들을 보게 됐다.포스터 속 그녀는 더없이 눈부시고 아름답고 해맑은 모습이었다.‘이젠 놓아줄 때가 됐어. 남준 씨도 나도 자유를 되찾아야지.’두원 별장에 도착한 그녀는 짐 정리를 마쳤다.결혼한 3년 동안 그녀의 짐이라곤 고작 캐리어 하나에 다 들어갔다.이혼합의서는 작년에 이미 장 변호사에게 부탁해 작성해달라고 했다.유남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고 자괴감이 들고 마음이 약해진다.그녀는 진작 알아챘다. 둘 사이의 감정은 조만간 끝이 닿는다는 걸, 그래서 일찌감치 떠날 채비를 했다...저녁 시간, 유남준의 문자는 없었다.박민정은 용기 내어 그에게 먼저 문자를 보냈다.「오늘 밤 시간 돼요? 당신한테 할 얘기 있어요.」상대는 한참 동안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박민정은 어두운 얼굴로 생각했다.‘이젠 문자로 답장하는 것조차 싫은가 보네. 내일 아침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어쩌겠어.’그 시각 유앤케이 그룹 대표이사 사무실 안.유남준은 문자를 확인하곤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았다.절친 김인우가 소파에 앉아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끝내 못 참고 물었다.“민정 씨 문자야?”유남준이 묵인했고 김인우는 거리낌 없이 비난해 댔다.“이 귀머거리가 진짜! 제가 정말 유씨 가문의 사모님이라도 된 줄 아나? 어딜 감히 남편을 감시해? 남준아, 너 설마 걔랑 평생 시간 끌려는 건 아니지? 박씨 일가는 인제 아무것도 아니야. 걔 남동생 박민호는 회사도 운영할 줄 모르는 바보 멍청이라고. 얼마 안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5화

    박민정은 제 방으로 돌아가 약을 한 움큼씩 퍼먹었다.귓등을 만져보니 손끝에 피가 잔뜩 묻어나왔다.순간 의사의 당부가 뇌리를 스쳤다.“박민정 씨, 사실 많은 질병의 악화는 환자의 기분과 관련이 있어요. 반드시 정서적 안정을 유지하고 낙관적인 태도로 치료에 적극 협조해야 합니다.”낙관적이라, 말이 쉽지.박민정은 최대한 유남준의 말을 되새기지 않으려고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두 눈도 질끈 감았다.날이 어렴풋이 밝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잠들지 못했다.약이 작용했는지 청력도 조금은 회복됐다.그녀는 창밖에 쏟아지는 햇빛을 넋 놓고 한참 바라봤다.“비 그쳤네.”한 사람을 포기하게 만드는 원인은 단 한 가지만이 아니다.날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이 쌓이다가 결국 사소한 일로 폭발하게 된다. 그건 차가운 말 한마디가 될 수도 있고 아주 사소한 일이 될 수도 있다.오늘 유남준은 외출하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소파에 앉아 박민정이 사과하고 후회하길 기다렸다.결혼생활 3년 동안 그녀도 종종 화낼 때가 있었다.하지만 매번 울고 난 후 얼마 가지 않아 바로 사과했다.이번에도 별다를 것 없다고 굳게 믿는 유남준이다.박민정은 세안을 마치고 평소처럼 어두운 톤의 옷을 입고 나왔는데 캐리어와 서류도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가 서류를 건넨 순간 유남준은 이혼합의서라는 몇 글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남준 씨 시간 될 때 연락해요.”그녀는 담담하게 이 한마디만 내뱉고는 캐리어를 끌고 문밖을 나섰다.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갰다.박민정은 그 순간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유남준은 이혼합의서를 손에 쥐고 소파에 앉은 채 온몸이 돌처럼 굳었다.그는 한참 넋 놓고 있었다.박민정의 뒷모습까지 눈앞에서 사라진 후에야 그녀가 떠났다는 걸 알아챘다.다만 그 답답함도 한순간일 뿐, 그는 곧장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집 나간 걸 아예 신경 쓰지 않는 듯싶다.어차피 그의 전화 한 통, 말 한마디이면 박민정은 얌전히 옆에 돌아와 여느 때보다 살갑게 대할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6화

    업무상의 문자 말곤 지금까지 꼬박 하루가 지났는데 박민정은 그에게 사과의 전화나 문자 한 통도 없다.“언제까지 참는지 두고 봐!”유남준은 휴대폰을 옆에 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갔다.냉장고 문을 연 순간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음식 외에 갖가지 한약들이 들어 있었는데 대충 하나 꺼내 보니 ‘불임 치료, 1일 5팩’이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불임 치료...유남준은 고약한 한약 냄새를 맡으며 전에 박민정의 몸에서 났던 약 냄새가 이 한약이란 걸 깨달았다.그는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제아무리 약을 먹는다고 임신이 될까?유남준은 가차 없이 약을 내던지고 인제야 그녀가 화난 연유를 알 것만 같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침실로 들어간 그는 푹 휴식을 취했다.박민정이 없으니 앞으론 돌아오고 싶을 때 마음껏 돌아와도 된다, 일부러 그녀를 피하지 않아도 된다.그날 밤 유남준은 아주 잘 잤다.오늘은 절친 김인우와 함께 골프 치러 가는 날이다.하여 아침 댓바람부터 옷방에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거실에 나왔는데 습관처럼 오늘 집에 안 온다는 말이 튀어나왔다.“나 오늘...”박민정은 이젠 집에 없다. 앞으론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다.골프장.유남준은 한껏 들뜬 마음으로 흰색 운동복을 입고 있었는데 잘생긴 얼굴이 오늘따라 더 자상해 보였다.훤칠한 체구에 골프장에 서 있으니 영화배우를 방불케 했다.스윙 한 번에 홀인원이다.절친 인우가 옆에서 칭찬을 남발했다.“남준이 오늘 컨디션 좋은데. 너 무슨 좋은 일 있어?”박민정이 유남준과 이혼하려는 일은 어제에 걸쳐 주변 사람들이 거의 다 아는데 김인우가 모를 리 있을까?그저 유남준의 입으로 한 말을 직접 들어야 진작 밖에서 기다린 이지원을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으니 슬쩍 떠본 것이다.유남준은 물 한 모금 마시고 넌지시 대답했다.“별거 없어. 그냥 민정이랑 이혼하려고.”두 귀로 직접 들었지만 김인우는 여전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유남준의 절친으로서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7화

    이전 같으면 보청기를 착용하지 않아도 미세한 소리가 들렸으니까.박민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머리맡에 둔 쓰디쓴 약을 입에 물었다.어제는 3년 동안 지낸 두원 별장에서 나와 먼저 본가로 돌아갔는데 문 앞에서부터 엄마와 동생 박민호의 목소리가 들렸다.“내가 왜 저런 쓸모도 없는 딸을 낳았지? 3년 동안 남준이가 글쎄 걔를 건드리지도 않았대! 온전한 여자도 아닌 주제에 이혼할 생각까지 해?”분노에 찬 한수민의 말이 예리한 칼날처럼 박민정의 심장을 난도질했다.엄마 눈엔 대체 어떤 여자만이 온전한 사람일까? 박민정은 알지 못했다.남편에게 사랑받는 여자? 혹은 아이를 낳아 키우는 여자?동생 박민호의 말이 더 한심했다.“누나는 우리 집안 사람 같지 않다니까요. 다들 그러는데 유남준 첫사랑이 돌아왔대요. 누나가 이혼 안 해도 조만간 그 집에서 내쫓길 거라고요. 그럴 바엔 차라리 뒷일을 고려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얼마 전에 최명길 대표의 아내분이 돌아가셨잖아요. 우리 누나가 비록 청력에 문제 있긴 하지만 80이 넘은 영감탱이에겐 횡재나 다름없죠...”박민정은 그 말들을 되새기며 두 눈이 퀭해졌다.그녀는 애써 단념하려고 휴대폰을 꺼냈는데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유남준인 줄 알았는데 열어보니 장 변호사님이라고 적혀 있었다.「민정아, 양도협의서를 유남준 씨한테 보내줬는데 태도가 썩 친절치 못했어. 앞으로 더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박민정은 장명철에게 답장을 보냈다.「수고하셨어요, 명심할게요.」문자를 보낸 후 그녀는 한참 넋 놓고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얼마 안 되는 재산을 전부 유남준에게 준 건 얼마나 고상해서가 아니다.단지 그에게 너무 많이 신세 지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결혼 전의 계약서대로 거액의 재산을 그에게 돌려주지 못하는 게 참 유감스러웠다. 아마 평생 결혼 사기죄라는 누명을 쓰고 살아가야 할 듯싶다.박민정은 이틀 동안 아무것도 안 먹어도 전혀 배고픈 줄 몰랐다.그저 주위가 너무 조용하니 이런 정적이 두렵게 느껴졌다.보청기도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8화

    문 앞에서 은정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민정이 깼어? 아줌마가 우리 민정이 제일 좋아하는 만두 빚었어. 식기 전에 얼른 먹어.”은정숙의 목소리에 박민정은 서서히 기억났다.두원 별장에서 나오고 병원 가서 병 보인 후 마지막으로 아줌마 보러 왔었지.그녀는 머리를 살짝 내리쳤다.‘기억력은 왜 또 이렇게 나빠진 거야?’이제 막 당혹스러워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잔꽃 무늬 침대 시트에 핏자국이 큼지막하게 나 있었다.오른쪽 귀를 만졌더니 끈적끈적한 느낌이 들었고 손을 펼쳐보니 피로 흥건했다.보청기도 빨갛게 물들었다...박민정은 서둘러 티슈로 귀를 닦고 침대 시트도 전부 거둬냈다. 은정숙은 그녀가 내려올 기미가 없자 베란다로 올라갔다가 시트를 씻고 있는 박민정을 보았다.“왜 그래?”“생리 왔어요. 조심하지 않아 시트에 묻혔더라고.”박민정이 웃으며 해명했다.침대 시트를 다 씻고 아줌마와 함께 아침을 먹으며 잠시만의 평온함을 만끽했다.은정숙의 목소리는 때론 똑똑히, 때론 어렴풋이 들렸다.박민정은 너무 두려웠다. 앞으로 이 목소리도 못 들으면 어떡하지?아줌마가 알고 나서 속상해하시면 어떡하지?그녀는 이곳에서 반나절 더 있다가 저축한 돈 일부를 몰래 침대 머리맡에 숨겨두고 나서야 아줌마와 작별 인사를 했다.떠나갈 때 은정숙은 그녀를 정거장까지 배웅하며 아쉬운 눈길로 손 흔들었다.박민정이 떠나간 후에야 은정숙도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문득 앙상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결국 유앤케이의 내선전화에 연락했다.대표이사 사무실의 비서는 박민정 씨 가정부가 대표님을 찾으신다고 그대로 알려주었다.오늘은 그녀가 집 나간 지 3일째 되는 날이고 유남준이 그녀에 관한 전화를 받은 첫날이다.유남준은 사무실 의자에 앉아 기분이 째질 것만 같았다.‘역시 3일을 못 버틴다니까.’은정숙의 늙은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유 대표님, 저는 민정이 어릴 때부터 보살펴온 가정부 은정숙이라고 해요. 제발 부탁드리는데 더는 우리 민정이 다치지 않도록 너그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9화

    시계를 들여다보니 마침 10시 정각이었다.유남준은 그녀에게 전화해 도착했는지 물어보려 했는데 멀지 않은 곳의 나무 아래에 박민정이 어두운 톤의 옷을 입고 서 있었다.주르륵 내리는 가랑비 속에 앙상하게 마른 그녀는 바람이 불면 쓰러질 것 같았다.금방 유남준과 결혼했을 때, 박민정은 밝고 긍정적이었다. 지금처럼 어두운 표정과 뼈만 남은 초라한 모습이 아니라.그는 우산을 들고 박민정에게 걸어갔다.그녀는 뒤늦게 유남준을 발견했다.3년 동안 유남준은 큰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멋있고 카리스마 넘치며 전보다 조금 더 성숙해진 모습이었다.3년이란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또 자신의 일생을 다 써버린 것만 같았다.유남준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어서 사과하길 기다렸다.이젠 그만할 때도 됐지!하지만 정작 그녀의 말은 정반대였다.“남준 씨 일하는 데 방해되겠어요. 얼른 들어가요.”유남준은 안색이 확 어두워지고 표정이 얼어붙었다.“너 후회하지 마.”그는 이 한마디만 내던지고 가정법원으로 들어갔다.박민정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씁쓸했다.후회?그런 건 모르겠고 이젠 지쳐버렸다.한 사람이 떠날 결심을 했을 땐 아마 일말의 희망도 얻지 못하고 마음속에 쌓인 실망이 너무 커 더는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겠지.이혼 절차가 진행되고 직원이 두 사람에게 정말 이혼하기로 결심했냐고 물었을 때 박민정은 아주 단호하게 대답했다.“네.”그녀의 확고한 눈빛에 유남준은 가슴이 움찔거렸다.수속을 마치고 한 달이란 숙려기간이 있어 두 사람은 한 달 뒤에 또 이리로 와야 한다.만약 이 한 달 동안 오지 않으면 이혼 신청도 자동으로 폐지된다.가정법원을 나선 후 박민정이 유독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그럼 다음 달에 봐요. 잘 있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곧게 빗속으로 뛰쳐들어가 택시를 잡고 떠나가 버렸다.유남준은 멀어져가는 차를 바라보며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이건 아마도 해탈이겠지.더는 그녀와 얽힐 필요도 없

최신 챕터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74화

    유남우는 오늘따라 이상하게 윤소현을 밀어내지도 않고 오히려 위로해 줬는데 이런 모습을 일부러 박민정에게 보여주려는 건지 아니면 홍주영에게 보여주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그러나 홍주영과 박민정 두 사람은 그저 한쪽에 가만히 서서 바라보고만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이때, 의사가 수술실 문을 열고 나오더니 그들에게 말했다.“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거부 반응은 없는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감사합니다.”의사가 떠나간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박민정과 조하랑도 그곳에 한참 동안 머물다가 병원을 빠져나왔다.돌아오는 길에 조하랑은 이상하게 마음이 착잡했다.그녀는 원래 뱃속의 아이를 지우려 했지만 오늘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유다혜를 본 뒤로는 이상하게 망설여지기 시작했다.모든 아이한테 이 세상에 태어날 기회가 주어지는데 괜히 그 기회를 마음대로 저버리는 게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런데 김인우 씨가 혹시나 아이를 원치 않으면 어떡하지?’“민정아, 내가 임신한 사실은 일단 비밀로 해줘. 특히 인우 씨한테.”박민정은 왜 그래야 하는지 여전히 이해가 안 갔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먼저 조하랑을 데려다준 뒤 박민정은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에리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민정아, 아까 급하게 나가더니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박민정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별일 아니야. 그저 하랑이 만나고 왔어.”“그럼 됐어.”그렇게 사람들이 다 떠나갔지만 에리만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민정아, 저번에 그 뉴스 기사 봤어?”‘기사?’순간 저번에 최현아가 에리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에리가 다급하게 해명하기 시작했다.“민정아, 난 극히 정상적인 남자야. 절대 게이가 아니니까 믿어줘.”그의 말에 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그래. 믿을게.”박민정이 웃자 에리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73화

    “민정아, 하랑 씨.”다름 아닌 정수미와 윤소현이었는데 그중 정수미는 빠르게 두 사람에게 다가와 걱정스레 물었다.“민정아, 병원에는 웬일이야? 어디 아픈 거야?”이때 조하랑이 갑자기 일부러 기침하더니 박민정 대신 답했다.“콜록! 콜록! 제가 감기 걸려서 민정이랑 같이 왔어요.”그러나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의사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보고서를 그녀에게 건네줬다.“조하랑 환자분, 임신 보고서를 두고 가셨어요.”순간 조하랑은 온몸이 굳어버렸다.그녀의 거짓말이 이렇게 빨리 탄로 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박민정은 재빨리 일어나 보고서를 건네받았고 조하랑도 멋쩍게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왔던 김에 산부인과에도 와봤어요.”정수미는 그녀의 말에 활짝 웃었다.“축하해요.”“감사합니다.”그러나 조하랑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옆에 서 있던 윤소현은 김씨 가문의 후계자를 임신했다는 소리에 또다시 질투심이 마구 불타올랐다.이렇게 되면 김씨 가문에서 조하랑의 입지가 더욱 확고해진다고 볼 수 있다.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신분이나 지위, 외모 면에서 조하랑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밀려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멀지 않은 곳에서 유남우와 홍주영 두 사람도 손에 한 무더기 결과서를 갖고 이쪽으로 걸어오다가 문득 박민정 손에 들린 검사 보고서를 본 순간 표정이 변했다.‘임신 보고서인가?’‘또 임신했다고?’유남우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윤소현이 빠르게 다가와 그에게 물었다.“남우 씨, 우리 다혜는 어떻게 됐어요?”“방금 수술이 끝나서 이제 회복 결과를 지켜봐야지.”윤소현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사람들 앞에서 유남우의 품에 안겨 울기 시작했다.“만약 우리 다혜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 그러면 저도 그냥 죽어버릴래요.”유남우는 그녀를 밀쳐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보는 눈이 많아 애써 참고 그녀를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분명 아무 일도 없을 거야.”“너무 무섭지만 남우 씨가 제 옆에 있어서 다행이에요.”윤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72화

    박민정은 왠지 조급하게 들리는 조하랑의 목소리에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하던 일을 멈추고 답했다.“그래.”한 시간 뒤, 어느 작은 내과 병원.박민정은 허름한 병원 외부와 안절부절못해 보이는 조하랑에게 의아해서 물었다.“하랑아, 대체 이런 곳에는 왜 온 거야?”조하랑은 그녀의 말소리에 화들짝 놀라더니 급하게 그녀의 입을 막았다.“조용히 해.”그리고 주머니에서 마스크 두 장을 꺼내더니 하나는 박민정에게 건네며 다시 말을 이었다.“민정아, 나 아무래도 임신한 것 같아서 검사해 봐야겠어.”“뭐?”박민정은 진짜 큰 일인 줄 알고 가슴을 졸였는데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런 건 먼저 테스트기로 확인해 볼 수 있지 않나?’조하랑은 단번에 그녀의 마음을 읽었는지 재빨리 해명했다.“임테기도 다 정확한 건 아니잖아. 무조건 병원에 와서 초음파 검사를 하는 게 제일 확실할 것 같아서.”“그렇지만 꼭 이런 곳에서 검사해야 해?”박민정은 이곳의 위생 상태가 너무 걱정되었다.그러나 진주시의 크고 작은 병원들은 거의 다 김씨 가문 산업이다 보니 조하랑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혹시나 김씨 가문에서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나중에 김인우랑 김훈한테 해명하기조차 어려워질 것이다.“가자. 걱정하지 마.”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들어가서 더러운 의료 기기들을 보고는 기겁하더니 빠르게 뛰쳐나왔다.“그냥 다른 병원으로 가자.”두 사람은 다시 짐을 싸서 결국에는 큰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소변 검사와 초음파 검사까지 마친 조하랑은 검사 보고서에 임신 4주 차라는 글씨를 본 순간 눈앞이 아찔해 났다.“어떻게 4주가 되는 거예요?”“마지막 생리 주기를 계산해 본 결과가 그렇게 나왔습니다.”조하랑은 지금 온몸에 힘이 다 빠지는 것 같았다.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박민정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아줬다.“좋은 일인데 인우 씨한테 빨리 알려줘.”그러나 조하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아니, 절대 안 돼.”자신도 아직 받아 들을 준비가 안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71화

    정수미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의사한테 자신이 사인하겠다고 말하려는데 멀리서부터 유남우가 다가와 그들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윤소현은 유남우의 목소리가 들리자 얼굴이 갑자기 돌변하더니 눈물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다.“남우 씨, 우리 다혜가 혈액암이래요. 그래서 다른 피를 수혈받아야 한다는데 그래도 살 확률이 그리 높지 않대요. 저희 이제 어떡하죠?”유남우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그럼 빨리 수혈부터 진행하자고 해.”윤소현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빨리 사인했다.그러나 정수미는 그녀의 빠른 태세 전환에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분명 이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유남우의 원인이 크다는 걸 윤소현도 알 텐데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이 남자를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그렇게 그들은 밤새 병원에서 지내야 했다.새벽 때쯤, 홍주영도 전문의들을 데리고 달려왔다.그리고 어린아이가 고생하고 있는 게 너무 안쓰러웠다.“도련님, 다혜는 괜찮나요?”홍주영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유남우는 문득 어제 하민재와 그녀가 같이 있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나도 아직 몰라. 지금 수술 중이야.”홍주영은 수술실 쪽을 바라보면서 애써 조급한 마음을 달랬다.그러나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윤소현은 그녀의 모습이 참 가증스럽다고 생각되었다.“홍 비서님, 다혜는 제 딸인데 왜 비서님이 난리예요?”그녀의 날카로운 말투에 홍주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이때 유남우가 고개를 돌리고 윤소현에게 물었다.“다혜가 자기 딸인 걸 아는 사람이 왜 지금 하나도 걱정하고 있는 것 같지 않지?”그는 원래 이 계기로 윤소현에게도 만약 아이한테 사고가 일어나게 되면 어떤 느낌인지 알려주고 싶었다.그러나 이 여자는 전혀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윤소현은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이 일은 점점 크게 번져 어느새 김씨 가문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다.김인우는 유다혜가 병원에서 수술받는다는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70화

    “연애해 본 적 없다면서요?”하민재는 다소 의아했다.도대체 자신이 그 남자보다 부족한 게 뭐란 말인가?홍주영은 그의 말에 씁쓸하게 웃었다. “네, 연애는 해 본 적 없어요. 그냥... 짝사랑이었을 뿐이에요.” 하민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이렇게 솔직한 여자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그럼 왜 고백하지 않았어요?” 그는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홍주영은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그 사람은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은 절 좋아하지 않거든요.”“그럼 둘이 이어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거네요?”하민재가 다시 한번 확인하자 홍주영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 가능성은 없어요.”“그렇다면 굳이 우리가 헤어질 필요도 없잖아요? 난 신경 안 써.”짝사랑이라면 아무 문제없었다.하민재는 자신만만했다. 연애 경험 없는 홍주영쯤이야 얼마든지 자신의 매력으로 사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홍주영이 더 말을 잇기도 전에 하민재가 가로막았다.“하지만은 무슨. 이제 이 얘긴 그만해요. 연애에 공평함 같은 게 어디 있어요? 난 주영 씨 마음속에 누군가 있는 걸 개의치 않으니까 주영 씨도 내 과거에 신경 쓰지 않으면 돼요.”하민재의 단호한 태도에 홍주영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좋아요, 약속할게요.”“네.”그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때, 하민재의 할머니가 다가와 넌지시 물었다.“어떻게 됐어?”“뭐가요?”하민재가 되묻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너랑 주영이 말이다. 주영이 같은 아이, 꼭 소중히 여겨야 한다. 부잣집 딸들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할 것 없는 아이야.”하민재의 할머니는 함부로 연을 맺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홍주영에 대해 충분히 조사했었다. 홍주영은 비록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능력만큼은 인정할 만했다.그녀는 가문 사업에는 별 관심 없는 손자가 이런 여자를 곁에 두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하민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69화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하민재가 아니라 유남우였다.홍주영은 순간 얼어붙었다.“도련님? 어떻게 오셨어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유남우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애써 눌렀다.“별일 아니야. 네가 연락도 없고 전화도 안 받아서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해서 와봤어.”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거짓말을 했다.홍주영은 황급히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제야 유남우가 여러 번 전화와 문자를 보냈다는 걸 확인했다.“죄송해요. 오늘 오후 바빠서 폰을 무음으로 해뒀거든요. 그래서 확인을 못 했어요.”유남우는 말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다 문득 테이블 위에 놓인 낯선 컵이 눈에 들어왔다.“누가 왔었어?”그가 아무렇지 않은 듯 묻자 홍주영은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오늘 남자 친구 가족을 만나고 왔어요.”‘남자 친구 가족...? 벌써 부모님을 만난 건가?’“언제 그렇게 됐어? 상대는 누구야?”유남우는 모르는 척 물었고 이 말에 홍주영은 주먹을 살며시 쥐었다.“...하민재 씨예요.”‘역시, 그놈이었군.’유남우는 얼굴에 떠오르는 감정을 애써 감췄다.“그때는 사귈 생각 없다고 하지 않았나?”“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 많이 생겼어요.”홍주영은 손바닥을 꼭 쥐었다. 어쩐지 유남우 앞에서는 괜스레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마치 잘못이라도 저지른 아이처럼.더 이상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 그녀는 얼른 주방으로 가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라 건넸다.“도련님 오늘 저한테 왜 연락하신 거예요?”“별건 아니고, 전에 고 대표 건 홍 비서가 맡았지? 그 계약서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연락이 안 되더라. 나중에 혼자 찾았어.”“아... 찾으셨군요. 죄송해요. 앞으로는 업무에 지장 없도록 할게요.”유남우는 그녀가 내민 물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물맛이 입안 가득 퍼졌지만 왠지 씁쓸하게 느껴졌다.“괜찮아. 이제는 홍 비서 일도 중요하니까. 홍 비서도 이제 적지 않은 나이니 결혼을 생각할 때가 됐겠지.”그는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68화

    시간이 흐를수록 차 안에 앉아 있던 유남우는 여전히 홍주영에게서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다.이유를 알 수 없는 답답함이 가슴을 짓눌렀고 그는 무심코 넥타이를 당겼다.또다시 10분이 지나도록 메시지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들려온 건 차가운 자동 응답음뿐이었다.“죄송합니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잠시 후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가슴 한구석이 더 답답해졌다. 그는 짜증스럽게 휴대폰을 한쪽으로 던지며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운전해.”운전기사가 물었다.“어디로 모실까요?”“모르겠어. 그냥 아무 데나 가.”“네.”차는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왔고 창밖으로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한편, 홍주영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하씨 가문의 할머니와 몇 마디 더 나눈 뒤 하민재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하민재는 벌써 그녀를 미래의 아내로 여기고 있었다.“어때요? 불편한 점은 있어요?”홍주영이 고개를 끄덕였다.“없어요. 할머니도 너무 좋으시고 아버님과 어머님도 따뜻하게 대해 주셨어요.”그때 하민재가 갑자기 등 뒤에서 작은 상자를 하나 꺼냈다.“자, 받아요.”“이게 뭐예요?”홍주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하민재는 그녀의 손에 상자를 쥐여 주었다.“열어봐요. 우리 부모님께서 주영 씨에게 주시는 첫 선물이에요.”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고풍스러운 장신구 세트가 들어 있었다.아니, 단순한 ‘고풍'이 아니라 대대로 내려온 가문의 전통 예물이었다.하민재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우리 부모님께서 주영 씨를 인정하신 거예요. 이건 우리 집안의 며느리만 받을 수 있는 거거든요.”홍주영은 너무 놀라 얼른 상자를 다시 그의 손에 돌려주었다.“이건 너무 귀한 거라 받을 수 없어요.”“왜 못 받아요? 어차피 우린 결혼할 사이인데.”‘결혼'이라는 단어에 그녀는 순간적으로 망설였다.“결혼하고 나서 받아도 늦지 않잖아요. 아직은 너무 일러요.”결혼 이야기가 나온 이상, 섣불리 받을 수 없었다. 만약 나중에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67화

    “저는 남준 씨가 동서를 못마땅해하던 시절도 지켜봤어요. 그 삼 년 동안 동서는 정말 처참했죠. 아무도 동서를 사모님으로 대우하지 않았어요.” 최현아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빨리 변하다니. 나는 동서가 영영 남준 씨랑 화해하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동서는 정말 너그럽네요.”유남우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으나 최현아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사실 도련님께서 돌아오기 전에 전 이미 동서한테 사람을 잘못 알아봤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동서는 그때 이미 남준 씨를 좋아하게 된 게 아닐까 싶어요.”유남우는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다. “지나간 일은 이미 지나간 거니 더 이상 말할 필요 없어요.”최현아는 입을 다물었다.유남우는 시선을 거두고 돌아서서 걸어갔고 최현아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유남우는 유남준이 잘되는 꼴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제 두 형제가 어떻게 싸울지 지켜보는 일만 남았다.유남우는 차에 올라탔다.차 안에서는 홍주영이 조수석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그가 타자 그녀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도련님.”“응, 회사로 가자.”“네.”홍주영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의 핸드폰은 계속 진동하고 있었다.그녀는 확인하지 않았고 유남우는 그런 모습을 보고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왜 메시지를 안 봐?”홍주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개인적인 메시지라 굳이 볼 필요 없어요.”그녀에게 계속 메시지를 보내는 건 하민재였다. 둘은 이제 화해하고 교제하기로 했는데 하민재는 예상외로 틈만 나면 연락을 해왔다.“괜찮아. 지금 업무 시간도 아닌데.” 유남우는 부드럽게 말했다.“네.”홍주영은 그제야 핸드폰을 들어 하민재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그는 오늘 오후에 그녀를 하씨 가문에 초대했다. 할머니가 그녀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홍주영은 한참을 고민한 끝에 유남우에게 말했다. “도련님, 오늘 오후에 개인적인 일이 좀 있어요.”유남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66화

    그가 고개를 숙이며 여느 때처럼 자연스럽게 박민정에게 입을 맞추려 했다.박민정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흔들리며 그녀는 반사적으로 입을 손으로 가렸다. 덕분에 그의 입술은 그녀의 손등에 살짝 닿고 말았다.둘의 시선이 엉키며 공기마저 뜨겁게 달아올랐다.유남준이 손을 들어 그녀의 손을 치우려 하자 박민정은 급히 외쳤다.“안 돼요!”그녀의 반응에 유남준의 동작이 멈췄다.“저... 저 갑자기 기억이 난 것 같아요.”유남준이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쥐었다.“정말?”“네! 어제, 아마도 음료에 술이 조금 섞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정말 미안해요.” 박민정은 얼굴이 불타오를 듯이 새빨개졌으나 유남준은 오히려 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당연한 거야. 너도 결국 참지 못한 거잖아.”“뭐라고요?” 박민정은 순간 주먹을 꼭 쥐었다. “내가 뭘 참지 못했다고요?”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자, 이제 그만. 일어나자. 예찬이랑 윤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박민정은 아이들이 밤새 자신을 찾아다니다 놀랐을 걸 생각하니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유남준은 그녀를 놓아주며 말했다.“좋아. 아침 먹고 바로 돌아가자.”그의 기분은 오늘따라 유난히 좋아 보였다. 돌아가는 길 내내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반면, 박민정은 그의 곁에 앉아 잔뜩 긴장한 채 앉아 있었다.두 사람이 부부라는 것, 이미 일어날 일은 일어났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젯밤을 떠올릴 때마다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도대체 왜 참지 못한 거지?'유남준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 채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고 박민정은 깜짝 놀라며 손을 빼려 했다.“괜찮아요. 나 혼자 걸을 수 있어요.”하지만 그는 손을 놓지 않았다.“이건 걷는 문제랑 상관없어.”박민정은 그의 아내였다. 그는 그녀가 항상 그의 시야 안에 머물도록 곁에 두고 싶었다. 그러다 갑자기 유남준이 어제 일을 떠올리며 물었다.“어제, 최현아가 너한테 뭘 하지 않았어?”그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