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숫가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박민정과 유남준은 먼저 도착해 작은 정자를 하나 찾아 비를 피하고 있었다.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던 유남준이 입을 열었다.“예전에 너랑 여기 같이 온 적 있어.”“네?” 박민정은 잠깐 멍해졌다.“나랑 여길 같이 왔다고요?”“잊었어?”유남준이 고개를 살짝 기울여 그녀를 바라봤는데 어딘가 씁쓸한 표정이었다.박민정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 아마 잊은 게 아니라 헷갈렸던 것일지도 모른다고.유남준과 유남우는 너무도 닮았다. 어쩌면 그때 자신조차 누구인지 분간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그런 그녀의 눈치를 읽은 듯 유남준이 슬며시 웃었다.“그때 말이야, 네가 반 친구한테 맞고 울면서 오다가 나를 딱 마주쳤지. 네가 내 품에 안겨선 자초지종을 다 말하더라.”“내가 그놈 혼쭐을 내주고 결국 전학까지 시켰잖아.”유남준의 말에 박민정은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그게 남준 씨였네요.”어쩐지 그날따라 유남준이 조금 낯설다고 느꼈던 게 기억났다. 평소엔 늘 다정한 그였는데 그날은 거칠게 이렇게 말했다.“울긴 왜 울어, 한심하게. 맞았으면 맞은 만큼 되갚아야지!”그땐 그저 기분이 안 좋았나 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 사람이 바뀌어 있었던 거다. 그날 자신은 억지로 유남준을 끌고 이곳까지 왔었다. 그는 귀찮다는 듯 나무에 기대 서 있었고 울고 있는 박민정을 바라보며 질색하는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또 울면 나 간다. 이런 한적한 곳에서 추운 바람이나 쐬고 있고 싶진 않거든.”그 말에 박민정은 와락 울음을 터뜨렸지만 유남준은 끝내 떠나지 않았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밤이 깊도록 그녀 곁을 지켜주고 집까지 바래다주었으니까.과거의 기억에서 빠져나온 박민정은 다시 유남준을 바라보았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가만 보면 네가 처음 좋아한 사람이 꼭 유남우였다고는 말 못 하겠는데.”유남준은 질투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설마 두 사람 다 좋아한 거야? 자기도 모르게? 그럼 이건 이중 플레이야, 양다리라고.”박민정은 피식 웃었
청명,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병원 문 앞에서.박민정은 가녀린 몸에 수척한 손으로 병원 임신 테스트 보고서를 들고 있었는데 보고서에는 임신이 아니라는 문구가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결혼한 지 3년인데 아직도 임신 못 했어? 왜 이렇게 쓸모가 없니? 너 계속 임신 안 되면 유씨 일가에서 쫓겨나는 수가 있어. 그땐 우리 집안더러 어떡하라는 거야?”한수민은 하이힐을 신고 화려한 옷차림에 실망 가득한 표정으로 박민정에게 삿대질했다.박민정은 두 눈이 퀭하고 가슴에 꽉 막혔던 그 말들이 결국 한 마디로 함축되었다.“미안해요.”“엄마는 미안하단 말을 원하는 게 아니야. 얼른 남준의 아이를 낳으란 말이야. 알겠니?”박민정은 목이 확 메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결혼한 3년 동안 남편 유남준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곁을 안 주는데 어떻게 아이가 생길까?한수민은 약해빠진 딸의 모습을 바라보며 왜 저를 닮지 않았는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그녀는 차가운 이 한마디를 내뱉었다.“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남준이한테 여자 한 명 찾아줘. 걔도 그럼 너한테 고마워할 거 아니야.”박민정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떠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친엄마란 자가 딸에게 지금 남편을 위해 여자를 찾아주란 말이나 내뱉고 있다니.그녀의 마음에 순간 찬바람이 휘몰아쳤다....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박민정의 머릿속엔 온통 엄마의 마지막 말만 감돌았다.문득 귓가에 굉음이 한바탕 울렸다.그녀는 자신의 병이 더 심해진 걸 알고 있다.이때 문득 휴대폰 문자 벨 소리가 울렸다.유남준의 3년을 하루 같이 보낸 문자였다.“오늘 밤 집에 안 가.”결혼한 이 3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집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없다.아내인 그녀를 터치한 적은 더더욱 없고.3년 전 신혼 첫날밤에 유남준이 했던 말을 그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너희 집안에서 감히 사기 결혼을 감행했으니 넌 인제 평생 고독하게 살 각오해.”평생 고독하게 살라고...3년 전 박씨 일가와
「남준 오빠, 그동안 잘 못 지냈죠? 그 여자 안 사랑하는 거 알아요. 우리 오늘 밤 만나요. 오빠 너무 보고 싶어요.」휴대폰 화면이 어두워질 때까지 박민정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택시 타고 유남준의 회사로 가는 길에서 박민정은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봤다. 비는 그칠 새도 없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유남준은 그녀가 회사로 찾아오는 걸 별로 반기지 않는다. 올 때마다 박민정은 뒷문에 있는 화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니까.유남준의 전담 비서 서다희도 그녀를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오셨어요, 민정 씨.”유남준의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사모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그녀는 항상 떳떳하지 못한 존재니까.박민정이 휴대폰 주러 회사까지 찾아오자 유남준은 미간이 확 구겨졌다.그녀는 늘 이런 식이다. 점심 도시락, 서류, 옷, 우산까지 유남준이 놓친 걸 전부 회사로 보내온다.“말했잖아, 일부러 내 물건 주러 회사 안 와도 된다고.”박민정은 흠칫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미안해요, 깜빡했어요.”언제 기억력이 이렇게 나빠졌지?아마도 이지원이 보낸 문자를 보고 덜컥 겁이 나서 그랬나 보다.유남준이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떠나기 전 박민정은 고개 돌려 유남준을 바라보더니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남준 씨, 아직도 이지원 씨 좋아해요?”유남준은 요즘 들어 박민정이 참 이상했다.자꾸 뭘 까먹지 않나, 이상한 질문만 해대질 않나, 그의 아내가 되기엔 턱없이 부족한 모습이었다.유남준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그렇게 심심하면 뭐라도 할 일 좀 찾아.”박민정은 결국 정확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그녀도 전에 일자리를 구해봤지만 유씨 일가 어르신들이 그녀가 얼굴을 내비치면 가문의 체면만 깎는다고 단호하게 차단해 버렸다.유남준의 어머니 고영란은 그녀에게 거리낌 없이 쏘아붙였다.“너 정녕 온 세상에 알릴 생각이니? 우리 남준이가 청력에 문제 있는 장애인 아내를 찾았다고?”장애인 아내라...집에 돌아온 후 박민정은 최대한 바삐 돌아쳤다.먼지 하나 안
“아직 제대로 된 사랑도 못 해봤죠? 남준 오빠는 나랑 있을 때 밥도 직접 차리고 또 내가 아플 땐 제일 먼저 달려왔어요. 나한테 했던 가장 달콤한 말은 바로 ‘지원아, 난 네가 영원히 행복하길 바라’ 이 말이었어요... 오빠가 민정 씨한테는 사랑한다는 말 한 적 있어요? 전에 나한테 엄청 자주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오빠 유치하다고 항상 틱틱거렸거든요...”박민정은 묵묵히 들으며 이 3년 동안 유남준과 함께한 나날들을 되새겨보았다.그는 단 한 번도 음식을 차려본 적이 없다.그녀가 아플 때 관심의 말 한마디조차 없다.사랑한다는 말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박민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할 얘기 다 했어요?”이지원은 흠칫 놀랐다. 그녀가 너무 차분해서인지 아니면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사람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볼 것만 같아서인지 이유는 알지 못했다.그렇게 박민정이 떠난 후에야 정신을 가다듬었다.왠지 모르게 이지원은 지금 이 순간 꼭 마치 박씨 일가의 후원을 받던 가난한 고아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박씨 일가의 귀한 따님 뒤에서 이지원은 영원히 웃음 팔이 피에로 역할이었다....박민정이라고 그녀의 말을 듣고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을까?12년이나 좋아했던 남자인데, 한때 그녀도 아이처럼 누군가를 좋아했었는데,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했었는데...박민정은 문득 또다시 두 귀가 아파서 보청기를 빼내더니 그제야 선홍빛 핏물이 고인 걸 발견했다.그녀는 습관처럼 보청기에 묻은 핏자국을 깨끗이 닦고는 옆에 내려놓았다.잠이 오질 않아 휴대폰을 가져와 인스타그램을 열었는데 상단 스토리에 이지원 계정이 보란 듯이 초록색 테두리로 되어 있었다.클릭해 보니 박민정을 ‘친한 친구 리스트’에 넣어 오직 그녀에게만 보여주는 사진들이었다.첫 장은 대학교 때 이지원과 유남준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둘은 나란히 서 있었고 유남준의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다.두 번째 장은 둘의 카톡 대화 내용을 캡처한 사진이었다. 유남준은 너무나도 상냥한 말투로 이
인제 보니 아빠는 유남준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걸 진작 알아챘나 보다.하지만 딸의 행복을 위해 유씨 일가와 계약을 체결했고 박민정도 소원대로 유남준에게 시집갈 수 있었다.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두 사람이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아빠가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를 당하셨다.만약 아빠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남동생과 엄마도 계약을 위반하지 않을 텐데...박민정은 재산 양도 수속을 전부 장 변호사에게 건넨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길옆에서 이지원의 홍보 포스터들을 보게 됐다.포스터 속 그녀는 더없이 눈부시고 아름답고 해맑은 모습이었다.‘이젠 놓아줄 때가 됐어. 남준 씨도 나도 자유를 되찾아야지.’두원 별장에 도착한 그녀는 짐 정리를 마쳤다.결혼한 3년 동안 그녀의 짐이라곤 고작 캐리어 하나에 다 들어갔다.이혼합의서는 작년에 이미 장 변호사에게 부탁해 작성해달라고 했다.유남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고 자괴감이 들고 마음이 약해진다.그녀는 진작 알아챘다. 둘 사이의 감정은 조만간 끝이 닿는다는 걸, 그래서 일찌감치 떠날 채비를 했다...저녁 시간, 유남준의 문자는 없었다.박민정은 용기 내어 그에게 먼저 문자를 보냈다.「오늘 밤 시간 돼요? 당신한테 할 얘기 있어요.」상대는 한참 동안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박민정은 어두운 얼굴로 생각했다.‘이젠 문자로 답장하는 것조차 싫은가 보네. 내일 아침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어쩌겠어.’그 시각 유앤케이 그룹 대표이사 사무실 안.유남준은 문자를 확인하곤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았다.절친 김인우가 소파에 앉아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끝내 못 참고 물었다.“민정 씨 문자야?”유남준이 묵인했고 김인우는 거리낌 없이 비난해 댔다.“이 귀머거리가 진짜! 제가 정말 유씨 가문의 사모님이라도 된 줄 아나? 어딜 감히 남편을 감시해? 남준아, 너 설마 걔랑 평생 시간 끌려는 건 아니지? 박씨 일가는 인제 아무것도 아니야. 걔 남동생 박민호는 회사도 운영할 줄 모르는 바보 멍청이라고. 얼마 안
박민정은 제 방으로 돌아가 약을 한 움큼씩 퍼먹었다.귓등을 만져보니 손끝에 피가 잔뜩 묻어나왔다.순간 의사의 당부가 뇌리를 스쳤다.“박민정 씨, 사실 많은 질병의 악화는 환자의 기분과 관련이 있어요. 반드시 정서적 안정을 유지하고 낙관적인 태도로 치료에 적극 협조해야 합니다.”낙관적이라, 말이 쉽지.박민정은 최대한 유남준의 말을 되새기지 않으려고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두 눈도 질끈 감았다.날이 어렴풋이 밝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잠들지 못했다.약이 작용했는지 청력도 조금은 회복됐다.그녀는 창밖에 쏟아지는 햇빛을 넋 놓고 한참 바라봤다.“비 그쳤네.”한 사람을 포기하게 만드는 원인은 단 한 가지만이 아니다.날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이 쌓이다가 결국 사소한 일로 폭발하게 된다. 그건 차가운 말 한마디가 될 수도 있고 아주 사소한 일이 될 수도 있다.오늘 유남준은 외출하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소파에 앉아 박민정이 사과하고 후회하길 기다렸다.결혼생활 3년 동안 그녀도 종종 화낼 때가 있었다.하지만 매번 울고 난 후 얼마 가지 않아 바로 사과했다.이번에도 별다를 것 없다고 굳게 믿는 유남준이다.박민정은 세안을 마치고 평소처럼 어두운 톤의 옷을 입고 나왔는데 캐리어와 서류도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가 서류를 건넨 순간 유남준은 이혼합의서라는 몇 글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남준 씨 시간 될 때 연락해요.”그녀는 담담하게 이 한마디만 내뱉고는 캐리어를 끌고 문밖을 나섰다.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갰다.박민정은 그 순간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유남준은 이혼합의서를 손에 쥐고 소파에 앉은 채 온몸이 돌처럼 굳었다.그는 한참 넋 놓고 있었다.박민정의 뒷모습까지 눈앞에서 사라진 후에야 그녀가 떠났다는 걸 알아챘다.다만 그 답답함도 한순간일 뿐, 그는 곧장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집 나간 걸 아예 신경 쓰지 않는 듯싶다.어차피 그의 전화 한 통, 말 한마디이면 박민정은 얌전히 옆에 돌아와 여느 때보다 살갑게 대할
업무상의 문자 말곤 지금까지 꼬박 하루가 지났는데 박민정은 그에게 사과의 전화나 문자 한 통도 없다.“언제까지 참는지 두고 봐!”유남준은 휴대폰을 옆에 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갔다.냉장고 문을 연 순간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음식 외에 갖가지 한약들이 들어 있었는데 대충 하나 꺼내 보니 ‘불임 치료, 1일 5팩’이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불임 치료...유남준은 고약한 한약 냄새를 맡으며 전에 박민정의 몸에서 났던 약 냄새가 이 한약이란 걸 깨달았다.그는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제아무리 약을 먹는다고 임신이 될까?유남준은 가차 없이 약을 내던지고 인제야 그녀가 화난 연유를 알 것만 같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침실로 들어간 그는 푹 휴식을 취했다.박민정이 없으니 앞으론 돌아오고 싶을 때 마음껏 돌아와도 된다, 일부러 그녀를 피하지 않아도 된다.그날 밤 유남준은 아주 잘 잤다.오늘은 절친 김인우와 함께 골프 치러 가는 날이다.하여 아침 댓바람부터 옷방에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거실에 나왔는데 습관처럼 오늘 집에 안 온다는 말이 튀어나왔다.“나 오늘...”박민정은 이젠 집에 없다. 앞으론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다.골프장.유남준은 한껏 들뜬 마음으로 흰색 운동복을 입고 있었는데 잘생긴 얼굴이 오늘따라 더 자상해 보였다.훤칠한 체구에 골프장에 서 있으니 영화배우를 방불케 했다.스윙 한 번에 홀인원이다.절친 인우가 옆에서 칭찬을 남발했다.“남준이 오늘 컨디션 좋은데. 너 무슨 좋은 일 있어?”박민정이 유남준과 이혼하려는 일은 어제에 걸쳐 주변 사람들이 거의 다 아는데 김인우가 모를 리 있을까?그저 유남준의 입으로 한 말을 직접 들어야 진작 밖에서 기다린 이지원을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으니 슬쩍 떠본 것이다.유남준은 물 한 모금 마시고 넌지시 대답했다.“별거 없어. 그냥 민정이랑 이혼하려고.”두 귀로 직접 들었지만 김인우는 여전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유남준의 절친으로서
이전 같으면 보청기를 착용하지 않아도 미세한 소리가 들렸으니까.박민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머리맡에 둔 쓰디쓴 약을 입에 물었다.어제는 3년 동안 지낸 두원 별장에서 나와 먼저 본가로 돌아갔는데 문 앞에서부터 엄마와 동생 박민호의 목소리가 들렸다.“내가 왜 저런 쓸모도 없는 딸을 낳았지? 3년 동안 남준이가 글쎄 걔를 건드리지도 않았대! 온전한 여자도 아닌 주제에 이혼할 생각까지 해?”분노에 찬 한수민의 말이 예리한 칼날처럼 박민정의 심장을 난도질했다.엄마 눈엔 대체 어떤 여자만이 온전한 사람일까? 박민정은 알지 못했다.남편에게 사랑받는 여자? 혹은 아이를 낳아 키우는 여자?동생 박민호의 말이 더 한심했다.“누나는 우리 집안 사람 같지 않다니까요. 다들 그러는데 유남준 첫사랑이 돌아왔대요. 누나가 이혼 안 해도 조만간 그 집에서 내쫓길 거라고요. 그럴 바엔 차라리 뒷일을 고려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얼마 전에 최명길 대표의 아내분이 돌아가셨잖아요. 우리 누나가 비록 청력에 문제 있긴 하지만 80이 넘은 영감탱이에겐 횡재나 다름없죠...”박민정은 그 말들을 되새기며 두 눈이 퀭해졌다.그녀는 애써 단념하려고 휴대폰을 꺼냈는데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유남준인 줄 알았는데 열어보니 장 변호사님이라고 적혀 있었다.「민정아, 양도협의서를 유남준 씨한테 보내줬는데 태도가 썩 친절치 못했어. 앞으로 더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박민정은 장명철에게 답장을 보냈다.「수고하셨어요, 명심할게요.」문자를 보낸 후 그녀는 한참 넋 놓고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얼마 안 되는 재산을 전부 유남준에게 준 건 얼마나 고상해서가 아니다.단지 그에게 너무 많이 신세 지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결혼 전의 계약서대로 거액의 재산을 그에게 돌려주지 못하는 게 참 유감스러웠다. 아마 평생 결혼 사기죄라는 누명을 쓰고 살아가야 할 듯싶다.박민정은 이틀 동안 아무것도 안 먹어도 전혀 배고픈 줄 몰랐다.그저 주위가 너무 조용하니 이런 정적이 두렵게 느껴졌다.보청기도
호숫가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박민정과 유남준은 먼저 도착해 작은 정자를 하나 찾아 비를 피하고 있었다.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던 유남준이 입을 열었다.“예전에 너랑 여기 같이 온 적 있어.”“네?” 박민정은 잠깐 멍해졌다.“나랑 여길 같이 왔다고요?”“잊었어?”유남준이 고개를 살짝 기울여 그녀를 바라봤는데 어딘가 씁쓸한 표정이었다.박민정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 아마 잊은 게 아니라 헷갈렸던 것일지도 모른다고.유남준과 유남우는 너무도 닮았다. 어쩌면 그때 자신조차 누구인지 분간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그런 그녀의 눈치를 읽은 듯 유남준이 슬며시 웃었다.“그때 말이야, 네가 반 친구한테 맞고 울면서 오다가 나를 딱 마주쳤지. 네가 내 품에 안겨선 자초지종을 다 말하더라.”“내가 그놈 혼쭐을 내주고 결국 전학까지 시켰잖아.”유남준의 말에 박민정은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그게 남준 씨였네요.”어쩐지 그날따라 유남준이 조금 낯설다고 느꼈던 게 기억났다. 평소엔 늘 다정한 그였는데 그날은 거칠게 이렇게 말했다.“울긴 왜 울어, 한심하게. 맞았으면 맞은 만큼 되갚아야지!”그땐 그저 기분이 안 좋았나 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 사람이 바뀌어 있었던 거다. 그날 자신은 억지로 유남준을 끌고 이곳까지 왔었다. 그는 귀찮다는 듯 나무에 기대 서 있었고 울고 있는 박민정을 바라보며 질색하는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또 울면 나 간다. 이런 한적한 곳에서 추운 바람이나 쐬고 있고 싶진 않거든.”그 말에 박민정은 와락 울음을 터뜨렸지만 유남준은 끝내 떠나지 않았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밤이 깊도록 그녀 곁을 지켜주고 집까지 바래다주었으니까.과거의 기억에서 빠져나온 박민정은 다시 유남준을 바라보았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가만 보면 네가 처음 좋아한 사람이 꼭 유남우였다고는 말 못 하겠는데.”유남준은 질투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설마 두 사람 다 좋아한 거야? 자기도 모르게? 그럼 이건 이중 플레이야, 양다리라고.”박민정은 피식 웃었
“민정 씨, 정말 고마워요.”손연서는 연신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아니에요. 아직 일이 어떻게 될지 저도 장담하기 어려운데 한번 노력해 볼게요.”박민정은 유남우가 왜 만나서 얘기하자고 하는지 궁금하기만 했다.그리고 전화를 끊자마자 이 일을 유남준에게 알려줬는데 어차피 박민정이 결정한 일이기에 굳이 말리지 않았다.“그러면 나랑 같이 가.”“네.”곧바로 유남우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았고 그는 주소 하나를 보냈다.그러나 박민정은 그 주소를 보자마자 낯빛이 변했다.그곳은 유씨 가문의 옛 저택 근처에 있는 작은 호숫가였는데 어렸을 때 집에서 몰래 나와 그곳에서 유남우와 자주 만나곤 했었다.어쩔 수 없이 곧바로 알겠다고 메시지를 보냈다.다른 한 편.유남우는 사무실 의자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옆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홍주영은 유남우가 왜 손연서의 제안을 거절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분명 아이한테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인데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기회조차 막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묻지도 못했다.유남우는 자기 앞에서 바삐 일하고 있는 홍주영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주영아, 앉아서 좀 쉬어.” 그러자 홍주영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답했다.“괜찮습니다.”“너랑 할 말이 있어.”홍주영은 그제야 유남우와 제일 멀리 떨어진 소파 끝에 앉았다.“네, 말씀하세요.”“내가 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지?”홍주영은 원래부터 솔직한 성격이라 단도직입적으로 답했다.“네, 왜 손서연 씨가 입양하는 걸 반대하시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그분은 진짜로 다혜를 예뻐하고 진심으로 입양하고 싶어 하는 것 같거든요.”“그리고 아무리 윤소현 씨가 친엄마라고 해도 여태껏 다혜한테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사람인데 그와 반대로 손연서 씨는 다혜를 엄청 사랑해 줄 것 같거든요.”유남우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한 마디를 내뱉었다.“나도 알아.”그러자 홍주영이 되물었다.“사랑이 그리도
유남준과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정윤아는 박민정을 발견하자마자 급히 뛰어왔다.“민정 언니, 윤소현 씨가 또 뭐라 하지 않던가요?”이상하게 조급해 보이는 정윤아의 모습에 박민정은 자기 예감이 맞을 거라 생각되었지만 애써 모르는 척 답했다.“아니요. 그저 여기서 나가게 해달라고만 했어요.”정윤아는 윤소현과 사촌 언니 동생 사이로 지내다가 하마터면 그녀도 당할뻔했다.하여 지금 윤소현이 저 모양 저 꼴이 된 것도 어떻게 보면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다.박민정도 당연히 윤소현의 고작 몇 마디 말로 마음 약해질 사람이 아니었다.정윤아는 혹시나 박민정이 눈치채고 자신을 오지랖이 넓고 악독한 사람이라고 오해하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가 그녀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아무 일도 없으면 다행이고요. 그런데 언니는 이제 될수록 이곳에 오지 말아요. 저런 사람은 언제 또 나쁜 마음먹고 언니한테 덤빌지 모르니까.” 그러자 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저도 알아요. 두 번 다시 당할 일은 없을 테니까 너무 걱정 안 해도 돼요.”“그리고 지금은 근무시간인데 빨리 회사로 돌아가요.”그러자 정윤아가 얼굴이 빨개진 채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네, 지금 바로 갈게요. 오늘은 반차 낸 걸로 해줘요.”그렇게 정윤아는 싱글벙글 차에 올라탄 뒤 곧장 회사로 돌아갔다.그녀가 떠나가자마자 유남준이 다가와 박민정에게 물었다.“윤소현 씨가 진짜 뭐라고 했는데?”역시나 정윤아의 눈은 속여도 유남준의 눈은 속이지 못했다.방금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그는 단번에 박민정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하여 어쩔 수 없이 유남우의 모든 과거의 만행에 대해 알려줘야 했다.“진짜 남우 씨가 그런 일들을 했다는 게 아직도 안 믿겨요.”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어떻게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에게 그런 짓을 벌일 수 있을까?더구나 그 당시 두 사람은 이미 약혼도 한 사이였는데 이런 일을 벌여서 자기한테 이로운 점이 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유남준은 맨 처음에 살짝
이튿날.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윤소현을 만나러 왔다.그리고 유남준은 밖에서 기다리라고 한 뒤 혼자 들어갔다가 윤소현의 몰골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눈앞의 그녀는 얼굴이 이미 누구한테 맞은 건지 파랗게 멍이 들어 있었고 몸 군데군데 상처투성이인 데다가 머리카락도 헝클어진 채, 두피가 다 보일 정도로 기름져 있었다.그러나 그 와중에도 윤소현은 박민정을 원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박민정은 어리둥절한 상태로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에게 물었다.“저한테 꼭 해야 할 말이 있다고요?”왠지 행복해 보이는 박민정의 모습을 발견한 윤소현은 또다시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참고 어렵게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다혜가 어떻게 생겨난 줄 알아?”순간 박민정의 눈살이 찌푸려졌다.‘엄마라는 사람이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가 있지?’“무슨 뜻이에요?”“사실 유남우 씨가 나한테 복수하기 위해, 또 너를 돕기 위해 일을 벌인 거였어!”윤소현은 악에 받쳐 또박또박 말했다.그녀도 박민정과 유남우의 관계가 특별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게다가 유남우는 아직도 박민정을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아 이런 식으로 유남우의 실체를 밝히고 싶었다.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임신하게 되었는지도 모두 박민정에게 말해줬다.모든 사실을 다 들은 박민정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그러면 남우 씨가 사람을 시켜서...” 박민정은 뒷말을 끝내 내뱉지 못했다.아무리 유남우가 변했다고 해도 이렇게 무섭고 극악무도한 사람일 줄은 몰랐다.더구나 자기 약혼자한테 어떻게 이런 추악한 짓까지 벌일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내가 한 말이 믿기지 않지? 나도 처음에 그랬는데 남우 씨가 직접 자백한 사실이야.”윤소현은 씁쓸하게 미소를 짓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나도 참 멍청했지. 여태껏 나를 해쳤던 범인을 찾고 있었는데 글쎄 그 사람이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자였네?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까지 나를 망쳐놓은 걸까?”다른 사람한테 지은 죄
최근에 윤소현은 정윤아한테서 받은 충격 때문에 매일 밥도 잘 못 먹고, 잠도 잘 자지 못했다.“할 말이 뭔데요?”“민정이한테만 말하고 싶으니까 먼저 데려오기나 해요.”윤소현은 혼자만 이런 곳에 갇힌 게 너무 억울했다.그러자 손연서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답했다.“말은 해볼 텐데 올지 안 올지는 모르겠네요.”말을 마친 뒤 곧바로 자리를 떴다.그리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박민정에게 알렸다.사실 박민정도 윤소현이 순순히 양육권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란 걸 예상하고 있었다.“어쩔 수 없이 유남우 씨한테 가야겠네요.”박민정의 말에 손연서가 고개를 끄떡이면서 답했다.“알겠어요. 그런데 윤소현 씨가 지금 민정 씨한테 꼭 할 말이 있다던데요?”“무슨 할 말요?”“저도 물어봤는데 무조건 민정 씨한테만 말하겠대요.”수화기 너머에서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자 손연서가 다시 말을 이었다.“좋은 일로 오라는 건 아닌 것 같으니까 혹시나 오게 되면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네, 걱정하지 말아요.”손연서와의 전화 통화를 마친 뒤 박민정은 방금 들은 내용을 정수미에게 알려줬다.그러자 정수미도 이상하다는 듯이 되물었다.“왜 갑자기 널 보자고 하는 거지? 고소를 취소해달라고?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그러자 박민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저도 잘 모르겠는데 지금 갇힌 마당에 설마 저한테 해코지하겠어요?”“하긴, 그러면 엄마랑 같이 가자.”그러나 박민정은 단칼에 거절했다.“지금 몸도 안 좋은데 의사 말대로 엄마는 그냥 어디도 가지 말고 병원에만 있어요.”“그래도...”여전히 걱정하는 정수미를 보고 박민정이 활짝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정 걱정되면 제가 남준 씨를 데리고 갈게요, 됐죠?”박민정의 말에 정수미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그래. 그러면 남준이더러 같이 가자고 해. 그래야 내가 마음이 놓여.”“네, 내일 같이 가볼게요.”그러다가 정수미는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다시 박민정의 손을 꼭 잡았다.“민정아, 넌 이제 그
그러자 정수미는 다혜를 대신해서 너무 기뻐했다.“연서 씨가 입양해 주면 아이한테는 큰 복이지.”사실 유씨 가문에서도 다혜가 필요 없다고 하면 정수미가 데려오려 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오래 살지 못한다.하여 손연서가 먼저 입양하겠다고 나서니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저한테도 복인걸요.” 손연서는 마치 자기 친자식인 것처럼 애틋하게 다혜를 바라보았다.정수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그렇게 생각하면 다행이고요. 그런데 입양 절차는 어떤지, 어렵지는 않은지 걱정되네요.”윤소현이 만약 판결을 받게 되면 자동으로 양육권을 잃게 된다.하여 지금 상황에서는 유남우 쪽이 관건이다.어쨌든 지금 명목상으로는 유다혜의 친아빠이기도 했다.손연서가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오늘 제가 윤소현 씨한테 찾아가서 물어보려고요. 만약 허락받으면 바로 유남우 씨한테도 가볼게요.” “그래요.”정수미가 고개를 끄덕였다.박민정은 지금 퇴원이 가능했기에 손연서를 보며 말했다.“어려운 일이 있으면 바로 말씀 주세요.”왠지 다혜를 입양하는 게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았다.“알겠어요.”손연서는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유다혜를 보고 말을 이었다.“다혜야, 며칠만 병원에서 지내고 있어. 다 나으면 내가 꼭 우리 집으로 데려갈게.”순간 유다혜는 자신을 버리고 가는 줄 알고 안아달라고 양팔을 벌렸다.그 모습을 본 손연서는 단번에 그녀를 안아 올려 살살 달래주기 시작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최대한 빨리 입양 신청을 끝내고 너 데리러 올게. 그리고 나랑 영원히 같이 살자.”다혜는 울지도 보채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그녀의 품에 안겨있었다.아무리 어린아이라고 해도 누가 진심으로 자신을 대하는지 구분할 줄 안다.손연서는 다혜를 다시 병실로 데려다준 뒤 그길로 윤소현을 찾아갔다.그러나 그녀를 보자마자 놀랐던 게 예전의 그 한 마리의 백조처럼 아름답게 춤을 추던 윤소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지금은 온몸이 상처투성이로 변해있었다.이미 익히 윤소현의 만행을 들었기에 손연서
한편, 손연서는 유다혜 병실로 오게 되었다.다혜는 현재 상황이 호전되어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그러나 그녀의 병실에는 오직 간호사뿐이었다.일찍 철이 든 유다혜는 아빠 엄마가 아무리 자신을 보러 오지 않아도 울거나 떼쓰지 않고 그저 침대에 가만히 누워 창밖에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이때 길연서가 말했다.“다혜는 참 용감한 아이예요. 간호사가 와서 주사를 놔줘도 아프다고 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거든요.”손연서는 고개를 끄덕인 뒤 한 발짝 다가가 낮은 소리로 유다혜를 불러보았다.“다혜야.”손연서의 목소리에 유다혜의 몸이 살짝 반응하듯 꿈틀거리더니 천천히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는데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을 보자마자 손연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겨우 한 살밖에 안 된 아이의 눈빛이 너무 허망해 보였기 때문이다.순간 손연서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다시 몇 발짝 유다혜에게 다가갔다.“다혜야, 이모랑 같이 살지 않을래?”알아듣지 못하는 걸 당연히 알고 있지만 손연서는 계속 말을 이었다.“이모가 우리 다혜 엄마가 되어줄게, 어때?”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길연서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살짝 놀랐다.아무리 유다혜의 병은 많이 호전되었다고 해도 계속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고 또 친엄마라는 사람도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손연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의 눈빛이 반짝거리더니 알아들은 듯 아닌 듯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이때, 길연서가 다시 아이에게 물었다.“다혜야, 이 이모 어때? 이모랑 이제부터 같이 살까?” 사실 다혜 보러 올 때마다 참 불쌍하다고 생각했기에 아이가 고개를 끄덕여주길 간절히 바랐다.아주 가끔 유남우도 다혜 보러 왔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아이를 안아준 적이 없었고 계속 무뚝뚝한 얼굴로 보고만 있다가 가곤 했었다.이때, 유다혜는 손연서와 눈을 맞추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모습에 손연서는 활짝 웃더니 아이를 조심스레 품에 안았다.“다혜야, 이제부터 너는 내 딸이야.”사막처럼 고요하던
그러나 정수미는 길연서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런데 행복하지 않잖아. 엄마라는 사람은 지금 보살펴주지도 않지, 친아버지는 누구인지도 모르지.”“그렇네요...”길연서도 어느새 정수미 따라 한숨을 내쉬었다.그 어린아이는 지금 병실 침대에 혼자 외롭게 누워있는데 윤소현은 아이를 이용하고 싶을 때만 입 밖에 꺼냈다.정수미는 얼마 전, 윤소현이 동정표를 얻어 석방되기 위해 아이가 아픈 사실을 공개했다고 들었다.이때, 손연서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더니 호기심에 물었다.“누구네 집 아이예요?”박민정이 유다혜의 일을 간단하게 말해주자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그러면 다혜는 유씨 가문의 아이가 아닌 건가요?”윤소현이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고 해도 유씨 가문에서는 아이를 계속 돌봐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러자 박민정이 고개를 저었다.“유남우 씨의 친딸이 아니랬어요.”박민정조차 아이의 친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랐고 애초에 이런 일을 버린 사람이 유남우라는 사실은 더욱 알지 못했다.“아이만 불쌍하네요.”손연서는 안타까워하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대뜸 정수미에게 물었다.“정 대표님, 혹시 제가 그 아이를 만나볼 수 있을까요?”그러자 정수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왜요?”손연서는 어쩔 수 없이 솔직하게 말했다.“제가 올해 서른이 되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최근 들어 계속 딸아이 하나 입양하고 싶었습니다.”정수미는 그제야 그녀의 말뜻을 깨닫고는 재빨리 길연서에게 말했다.“길 비서, 지금 바로 다혜한테 데려다줘.”만약 손연서가 유다혜를 입양하게 되면 이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그러자 손연서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가보겠습니다.”마침 유다혜도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기에 만나보는 데 얼마 걸리지 않는다.“그래요.”그렇게 두 사람이 자리를 뜨자마자 정수미가 박민정에게 말했다.“네 친구 사람도 괜찮은 것 같은데 만약 다혜도 따라가겠다고 하면 애한테는 너무 잘된 일이야.”“그러게요.”박민정도 손
이튿날, 오준수는 아침 일찍 차현영을 깨워 그 장신구들을 달라고 했다.그러나 두 사람이 보석함을 열어보니 안은 이미 텅텅 비어 있었다.“다, 다 어디 갔지?”차현영은 순간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한껏 기대했던 오준수도 실망감에 그녀에게 되물었다.“엄마, 혹시 다른 곳에 보관해 두고 잊어버리신 거 아니에요?” “그럴 리 없어.”차현영은 다급하게 다른 곳도 뒤져보았지만 끝내 찾지 못했고 온 집안을 다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문득 차현영이 고개를 돌리고 오준수에게 물었다.“천애는? 아직도 자고 있어?”그러자 오준수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몰라요. 저더러 편하게 자라고 어제는 성훈이랑 둘이 잤거든요.”순간 차현영은 뭐가 생각났는지 급히 이천애의 방으로 달려갔다.그러나 방안에는 오성훈만 곤히 자고 있을 뿐, 이천애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준수야, 천애가 내 보석을 갖고 도망갔어!”오준수도 달려와서 확인해 보더니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그리고 곧바로 이천애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핸드폰은 꺼져있었다.“어떻게 이런 식으로 내 뒤통수를 쳐?”오준수는 여태껏 이천애가 자기 직업이나 모든 명예마저 버릴 만큼 자신만 바라볼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의 곁에 붙어 있었던 이유가 오직 돈 때문이었다.그리고 지금은 자기 친아들도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차현영은 이 상황을 보고 그를 나무라지 않을 수 없었다.“네가 데려온 여자가 어떤지 똑똑히 봐. 그 애는 우리 집 돈만 보고 들어온 여자라고 내가 말했는데도 넌 믿지 않았잖아. 이제 어떡할래? 그건 내가 평생 모아온 재산이란 말이야!”오준수는 대답 대신 빠르게 경찰서에 도난신고부터 했다.그러나 이천애는 이미 멀리 도망간 상태라 한동안 찾아내기는 힘들어 보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은행 쪽 사람들은 또다시 차현영 집으로 찾아와 빚 독촉을 했고 불과 며칠 만에 오준수는 빈털터리가 되어버렸다.한편.손연서는 박민정과 정수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