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의 말을 듣고 난 고영란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필경 먼저 이혼하자고 제기한 사람도 자기 아들 유남준이니 말이다.박윤우와 박세찬 그리고 배 속에 있는 아이까지 모두 싫다고 한 유남준인데, 직접 가서 돌봐주겠다고 하니 믿어지지 않기도 했다.고영란은 폭력 경향이 있는 현재의 유남준의 떠올리면서 걱정했다.“민정아, 지금 우리 남준이 지적으로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폭력 경향까지 있어. 저택의 도우미도 집사도 남준이한테 안 맞아 본 사람이 없을 정도야. 네가 가서 남준이가 또다시 때리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박민정의 배 속에 있는 아이를 걱정하고 있는 고영란이다.“어머님, 저 남준 씨랑 부부로 살아온 세월도 있잖아요. 그런 건 전혀 두렵지 않아요. 만약 깨어나서 그런 기미가 보인다면 다른 사람들한테 돌보라고 할게요. 이렇게 하면 걱정이 좀 줄어드시겠어요?”박민정은 간절하게 부탁했다.하도 진심이 느껴져서 고영란은 더 이상 거절할 이유도 찾아낼 수 없었다.“근데 네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어. 할아버님께서 경은이한테 남준이 돌보라고 보냈거든. 한 달 뒤에 두 사람 식도 올려주겠다고 이미 약속까지 하셨어.”박민정은 그제야 이틀 전 추경은이 득의양양했던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그러나 추경은이 좋아했던 모습과 전혀 다른 유남준인데, 순순히 결혼할까?얼굴에 상처까지 있는 걸 보아 유남준에게 맞은 게 분명한데, 순순히 결혼할까?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하겠다고 하면 그건 정말로 사랑하는 것으로 인정해 줄 수밖에 없다.“어머님, 만약 남준 씨에 대한 경은 씨의 마음이 진짜라면 두 사람 결혼하는데 저 아무런 의견도 없어요.”“하지만 아직 결혼한 건 아니잖아요. 남준 씨 전처로서도 아이들의 엄마로서도 제가 가서 돌보는 게 마땅하다고 봐요.”‘역시나 민정이는 너그러운 여자야.’박민정은 지금 단지 유남준이 보고 싶고 직접 가서 챙겨주고 싶은 마음뿐이다.자기에 대한 유남준의 사랑이 얼마나 짙었는지 점점 더 깊게 느껴지고 있으니 말이다.그리고
정민기는 사람을 미행하는 것을 잘한다. 박민정은 차를 타고 앞으로 가고 있었는데 누가 쫓아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박민정이 저택에 도착해서야 정민기는 비로소 그녀가 유남준을 만나러 왔다는 것을 알았다.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는 박윤우는 불안했다. “엄마한테 다른 가정이라도 생긴 건가?”그는 엄마에게 이런 저택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옆자리에 앉은 정민기가 말했다. “무슨 오해가 있을 거야.”그는 어린 윤우한테 사실대로 말해도 되는지 몰랐다. “돌아가자.”“안 돼요. 저는 안 갈 거예요.”박윤우는 정민기의 팔을 덥석 껴안았다. “아저씨, 우리 엄마한테 저 말고 다른 아기가 생긴 거 아니에요?”정민기가 말했다.“그럴 리가. 허튼 생각 하지 마.”박윤우는 불안한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다. “그럼 엄마한테 새로운 남자친구가 생겼나요?”그는 지금 박민정을 매우 걱정하고 있다.박윤우는 말없이 이곳의 주소를 박예찬한테 보냈다.박민정이 저택에 들어간 후, 박윤우는 박민정을 볼 수가 없었다. “윤우야, 먼저 돌아가자. 시간이 늦었어. 내일 학교도 가야 하잖아.”정민기는 그에게 물었다.박윤우는 박민정이 나쁜 사람한테 속을까 봐 두려운 것이었다. 그녀가 남자친구를 사귀는 것이 싫은 건 아니다. “네.”먼저 돌아가서 형이랑 물어봐 여기가 도대체 누구의 저택인지 알려고 했다. 집에 돌아온 박윤우는 서둘러 박예찬에게 전화를 걸었다.박예찬도 즉시 조사하기 시작했다. …박민정이 저택에 들어오자 집사가 바로 방을 마련해 주었다. 유남우가 박민정이 임신했으니 절대 다치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집사는 그녀를 유남준과 가장 멀게 떨어져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그러자 추경은이 위층에서 내려오면서 싸늘한 눈빛으로 박민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긴 어떻게 왔어요?”박민정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녀 얼굴의 상처는 더 많아졌고 머리도 헝클어져 있었다.“제가 오면 안 돼요?”박민정이 되물었다.“할아버님과 이모님께서는 이미 저보고 사촌 오빠
“이미 너무 늦었으니 안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집사가 박민정을 막았다.박민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요?”“그냥 민정 씨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입니다.”집사가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유남준의 방을 향해 갔다.집사는 유남준이 아직 깨어나지 않았을 거로 생각하고 신경 쓰지 않았다. 널찍한 침실 안에서 유남준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조용하게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러나 자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박민정은 문을 닫고 나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유남준.”그의 이름을 불렀다.그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박민정은 옆 침대에 앉아 그의 이불을 조금 아래로 당기고 유남준을 보았다. 그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몽둥이로 때린 것 같았는데 멍이 파래서 보기만 해도 아팠다. 박민정은 주위를 둘러보며 의약 상자를 찾고는 유남준의 몸을 닦아주었다. 그녀가 모르는 것은 다른 방에 카메라가 있고 유남준이 있는 방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남준의 몸은 너무 더러웠다. 박민정은 가까스로 그를 깨끗하게 닦아주었다.그녀는 저택의 도우미가 일부러 유남준을 씻겨주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그가 사람을 다치게 할까 봐 씻겨주지 못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유남준의 몸을 깨끗이 닦은 후, 박민정은 깨끗한 옷을 찾아 갈아입혀 주었고 깨끗한 이불 커버를 씌워주었다.추경은이 나와서 박민정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런 걸 해도 소용없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더러워질 거예요.”추경은은 불쾌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박민정은 추경은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유남준을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아마도 그녀는 단순히 강한 자를 우러러보는 사람이어서 강한 유남준만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사고가 난 후의 유남준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경은 씨, 얘기 좀 해요.”박민정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추경은은 뭔가 이상해했다. 박민정은 나가서 문을 살짝 닫았다.“난 당신이
박민정은 살며시 문틈 안을 들여다보았다. 유남준은 아직 침대에 누워 눈을 뜨지 못했다.그가 깨어나지 않은 걸 보아 방금은 악몽을 꾼 것일 것이다.박민정은 그제야 안심하고 들어가 이불을 다시 덮어주며 그를 놀려댔다. “당신이 지금 이 꼴이 되었는데도 예쁜 여자가 앞다투어 당신한테 시집가려고 하네요? 참 좋은 팔자네요.”그리고 그녀는 시간이 늦은 것을 보고 방으로 돌아가 쉬려고 했다.갑자기 유남준이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박민정은 깜짝 놀랐다. 유남준이 잠에서 깬 줄 알고 대뜸 그를 불렀다. “남준 씨.”하지만 유남준은 다시 손을 놓았다.박민정은 실망해서 그의 손을 이불속으로 놓아주었다. “내일 또 보러올게요.”박민정은 방에 돌아가서 잤다.유난히 어두컴컴한 새벽녘이었다. 박민정은 잠귀가 밝아서 누군가 방에 들어온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그녀는 눈을 뜨려고 했지만 너무 피곤해서 눈을 뜨지 못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이미 아무도 없었다.“꿈인가?”박민정이 혼잣말을 하고 있을 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추경은의 방에서 비명이 들려왔다.“남준 오빠, 날 죽이지 마! 난 아직 죽고 싶지 않아.”늘 죽음을 입에 달고 사는 추경은도 죽고 싶지 않을 때가 있는 모양이다. 이 소리에 놀란 박민정은 벌떡 일어나 나갔는데 유남준이 추경은의 문을 힘껏 걷어차고 있는 것을 보았다.추경은은 안에서 펑펑 울고 있었다.“여기요.”저택에는 24시간 감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시간이고 유남준이 나가지 않았으니 그들은 더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방문을 걷어차는 소리가 엄청 났다. 유남준이 몸이 허약하지 않았더라면 이 문은 이미 깨졌을 것이다.박민정도 이런 유남준을 보고 놀라 했다.쿵!문이 깨졌다.추경은은 물건을 집어 들고 유남준한테 내던졌다. 지난번에 꼬집힌 일 때문에 이번에 그녀는 칼을 들었다.그녀의 손에 든 칼을 보고 박민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경은 씨, 뭐 하려는 거예요?”“보면 몰라요? 이건 정당방위에요!”추경
추경은은 역시 입을 다물었다.고영란이 자기가 유남준을 다치게 하는 것을 보면 결혼은커녕 집에서 쫓겨날 게 뻔하다.박민정도 그녀와 쓸데없는 얘기를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조심하세요. 다음에는 뺨 한 대로 끝나지 않을 거예요.”박민정은 방으로 돌아가 쉬었다.다음 날 아침, 박민정이 일어났을 때 유남준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의사가 와서 그의 몸 상태를 체크했다.“도련님의 외상은 거의 다 나았습니다. 다만 손상된 뇌 신경은 평생 고치기 힘들 것입니다. 의사가 말했다.이 말을 들은 박민정은 걱정이 가득해 보였다.전에는 눈만 안 보였는데 지금은 바보로 됐다.비록 그는 한때 하늘이 내려주신 아이인 것처럼 운이 좋았지만 지금의 그의 삶은 너무 고달팠다.집사가 의사를 배웅하러 가고 방 안에는 박민정과 유남준 두 사람만 남았다. 박민정이 출근하려고 하는데 유남준이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녀가 미처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유남준은 갑자기 힘을 주어 그녀를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너한테서 좋은 냄새가 나. 안아줘.”그는 어린 애처럼 말했다.박민정은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 “남준 씨, 나 기억해요? 나 민정이에요.”유남준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는 듯 그냥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집에 가고 싶은데 데려다줄 수 있어?”박민정은 코끝이 찡했다. “집이요? 어디요?”그녀는 유남준이 생각하는 집이 유씨 가문의 저택인지 아니면 그들이 함께 사는 두원 별장인지 몰랐다.유남준은 그녀를 꼭 껴안고 말했다. “아파.”박민정은 그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어디가 아픈데요? 내가 약 발라줄까요?”박민정이 너무 다정해서인지 유남준은 모처럼 그녀의 말을 잘 들었다. 그는 조용히 있으면서 박민정보고 약을 발라 달라고 했다.그의 몸에 난 새로운 상처는 모두 별장의 보디가드가 한 짓이다.박민정은 그것이 보디가드의 뜻인지 유남우의 뜻인지 몰랐다.저택의 도우미들은 유남준이 순순히 약을 바르라고 하는 것을 보고 모두 놀랐다.그들은 사석
상황을 알게 된 유남우는 집사들에게 유남준을 잘 감시하라고 당부했다. 특히 유남준이 박민정과 같이 있을 때 말이다. “민정 씨는 큰 도련님이 산책하러 나가게 하라고 했어요.”집사가 말했다.유남우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저택의 문을 나서지 않는 한 산책하러 나가게 해.”지금은 박민정이 수시로 유남준을 돌봐서 허락하는 것이다. 유남우는 박민정한테 좋게 보이고 싶었다.“네.”...곧 월말이 다가온다. 이번 달 호산 그룹에서 매출이 제일 낮은 팀은 해고될 것이다. 마케팅 5팀의 실적은 좋았지만 아쉽게도 장부에 문제가 좀 생겼다. 고위층이나 주주들에게 알려지면 상황이 꽤 복잡해질 것이다.그때가 돼서 해고당하는 건 당연히 장부에 문제가 있는 5팀일 것이다. 박민정은 이미 사람을 시켜 이 일을 조사하라고 했다. 최근에 누가 최현아 혹은 마케팅 1팀과 다녔는지 찾아내는 것이다.하지만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박민정도 그 사람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하필이면 이때 어린이집 엄마 단톡방에서 회식하자는 메시지가 떴다. “회장님, 오랜만에 회식할까요? 아이들 얘기 좀 해요.”학부모 위원회의 회장인 박민정은 다른 엄마들과 수시로 연락해야 했다.박민정이 답장했다. “그러죠.”그녀는 일찍 퇴근해서 학부모 위원회의 엄마들과 회식을 했다.최현아도 왔다.위원회의 엄마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유씨 가문의 며느리이기 때문에 그녀의 비위를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도한 엄마와 손연서는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원 엄마는 박민정의 라인에 붙겠다고 마음먹었다. 박민정이 자신을 의심하지 않게 하려고 그녀한테 최현아에 대한 추잡한 사연도 몰래 전했다.그런 일까지 박민정에게 알렸으니 지원 엄마는 평생 최현아와 화해할 수 없을 것이다.“지훈 엄마, 우리 애가 요즘에 맨날 지훈이랑 놀고 있대요.”그중 한 사람이 박민정과 유남준이 이혼한 것을 알고 최현아의 편을 들었다.최현아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 지훈이는 친구가 많아요. 공
도한 엄마도 집에 있는 아이가 생각나서 일어났다. “저도 돌아가서 아이를 봐야겠어요.”셋이 함께 떠나려 하는 것을 본 지원 엄마는 잠시 망설였는데 자리를 뜨지 않았다.세 사람이 자리를 떠나자 또 몇 명의 엄마들이 떠났다.나머지는 대부분 최현아한테 아첨하려는 사람들이다.이것을 최현아도 알고 있었다. “우리 성혁 씨도 곧 호산 그룹 본사로 들어갈 거예요.”“정말요? 무슨 일을 하는데요?”한 사람이 물었다.최현아는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낮은 자리는 아닐 거예요.”“그럼 정말 축하할 일이네요. 도련님께서 본사로 돌아가면…”한 엄마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한편 지원 엄마는 여기서 일어난 일을 하나씩 적어서 박민정한테 말했다. 지원 엄마는 박민정이 유남준과 이혼했다 하더라도 최현아보다 못하지는 않을 거로 생각했다.그녀는 다시 박민정과 친구가 되려고 마음먹었다. 이번엔 자신의 안목이 절대 틀림없을 거라고 믿었다. 박민정과 손연서는 밖으로 나가서 먼저 도한 엄마를 배웅했다.그리고 박민정은 손연서와 함께 택시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민정 씨, 제가 최근에 이상한 소문을 들었어요. 우씨 가문 큰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거 사실이에요?”박민정은 숨김없이 말했다. “네, 이혼했어요.”“어떻게 된 거예요? 예찬이랑 윤우가 있잖아요? 게다가 임신 중이잖아요?”손연서는 믿기지 않는 듯했다.손연서는 박민정이 왜 임신했는데도 일을 하는지 의아해했었는데 이제야 이유를 알았다. 그녀는 유남준도 그리 좋은 남자가 아니라고, 세상에는 애초부터 좋은 남자가 없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너무 길어요. 나중에 시간 될 때 천천히 얘기해요.”유남준이 지금 그렇게 됐다는 것을 손연서에게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두 사람은 지금 꽤 친하지만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말하지 않았다.“그래요.”손연서는 별생각 없이 말했다. “사업하면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날 찾아요. 나도 그렇게 잘하지는 못하지만 손씨 가문의 사업 중 대부분을 도맡아 하고 있어요.”손연서
박민정은 손연서의 뜻을 알아차렸다. “고마워요. 손실을 본 것은 내가 꼭 메워줄게요.”“괜찮아요, 나중에 힘이 더 세지게 되면 나와 계속 협력하자고요.”손연서는 박민정이 참 후하다고 생각했다. 두 가문의 합작으로 그녀는 조금도 손해를 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가문과 합작할 때보다 돈을 더 번다.“좋아요.”박민정도 그녀에게 인사치레를 많이 하지 않았다.오늘 학부모 모임이 박민정을 도와 큰 문제를 해결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녀는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잘 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먼저 돌아가서 윤우를 돌보고 다시 저택에 가서 유남준을 보려 했다.박윤우는 이미 박예찬이 한 조사를 통해 그 저택은 유남우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형, 엄마가 이러는 거 말이야, 안 좋은 것 같아. 하지만 엄마가 남우 아저씨와 같이 있고 싶다 하면 나는 응원해줄 거야.”박예찬은 손에 머리를 괸 채 말했다. “그런데 남우 아저씨는 윤소현이랑 약혼했는데 과연 엄마에게 명분을 줄까? 윤소현 뱃속에 아저씨의 친아들이 있어서 우리를 친아들로 여기지 않을 거야. 하지만 엄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난 참을 수 있어.”박예찬은 박윤우가 참 이랬다저랬다 한다고 생각했다.앞에서는 쓰레기 아빠가 불쌍하다고 하더니 지금은 유남우를 의붓아버지로 인정하려 하다니 말이다. 동생이 도대체 누구를 닮았는지 몰랐다.“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엄마는 남우 아저씨랑 있을 리가 없어.”박예찬은 박윤우가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다.“왜 그럴 리가 없는데?”박윤우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는 유남우와 유남준은 똑같이 생긴 데다 능력도 비슷하고 다 자상하다고 생각했다.여자들은 보통 자상한 남자를 좋아한다. “엄마보고 우리랑 남우 아저씨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 하면 누구를 고를까?”“당연히 우리지.”“그럼 됐지, 엄마는 새아빠를 찾지 않을 거야. 찾으면 분명 우리한테 엄청나게 잘해주는 사람일 거야.”박예찬이 말했다. 박윤우도 그의 말이 바르다고 생각했다. “하긴,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