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이른 아침 누군가 곤히 잠든 하현의 어깨를 흔들었다.최문성은 거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하현이 모습을 드러내자 순간 벌떡 일어났다.“대표님, 큰일 났어요.”하현이 영문을 모른 채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야?”“어젯밤 일에 무슨 잘못된 거라도 있어?”최문성이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30분 전에 도성 부두에 정박해 있던 희망호에 방금 도성 경찰이 들이닥쳤다고 합니다.”“현장에 있던 수천억대 칩도 모두 압수했을 뿐만 아니라 화태강, 최규문의 일행들도 모두 잡아갔다고 해요.”“현재 도성 전체 카지노 업계에서 엄청난 반발이 일고 있어요!”“이 두 사람의 신분이 너무 특별하기 때문이죠.”하현은 얼굴을 찌푸리며 무거운 투로 말했다.“압수수색한 이유는 뭐야?”“도성 내에서는 등록하지 않은 카지노에서 도박을 벌이는 것은 불법이에요.”“하지만 과거에 카지노가 있는 유람선이 도성에 잠시 접안을 했을 때는 도성 경찰서에서 눈감아줬어요.”“그런데 이번에는 누군가가 찌른 모양이에요...”최문성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하현도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그는 어젯밤 일을 통해 미국 최 씨 집안에 따끔한 가르침을 줬다고 생각했다.그런데 하현이 좀 더 손을 쓸까 말까 고민을 하는 중에 누군가가 먼저 선수를 친 것이었다.그 누군가는 희망호를 압수수색했을 뿐만 아니라 화태강과 최규문을 사람들의 이목 속으로 끌어올린 것이다.“재미있구만...”하현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누군가 나에게 뒤집어씌우려 한 거야. 분명히 최규문은 이 일을 내가 한 짓이라고 생각할 테니 말이야.”“아주 귀찮아졌는데요, 대표님.”최문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어젯밤 우리와 그들의 충돌이 컸었고 일이 막 해결되었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그들은 압수수색당했어요.”“누구나 우리가 한 짓이라고 생각할 거예요.”“그리고 희망호를 공격할 수 있는 것은 보통 권력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요.”“도
하현의 말에 최문성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표면상의 여러 증거로 볼 때 그쪽을 건드릴 사람은 하현 외에는 도성 최 씨 집안이었다.그렇지 않으면 누가 도성에서 경찰을 쥐락펴락할 수 있었겠는가?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큰일을 벌이다니!“그 소대장에 대해서는 알아봤어?”하현이 말했다.“조사해 보니 도성 토박이에 삼대째 경찰에 종사하고 있고 집안이 아주 청렴결백해서 경찰 내에서도 평판이 아주 좋다고 합니다.”최문성이 말했다.“완벽한 캐릭터군. 완벽할수록 우리에겐 문제가 더 커지는데 말이야.”하현은 말을 마치며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냈다.“팅!”잠시 후 하현의 핸드폰에 누군가의 메시지가 도착했다.“방금 공해원이 이 소대장을 파헤치기 시작했어.”“소대장은 학창 시절에 항성 쪽에 있는 기숙학교에서 반년 공부한 적이 있대. 이력서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지만 공해원이 찾아낸 거야.”“공해원이 그 동기생들을 수소문하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어.”“동기생들 이름 사이에 흥미로운 인물이 있다는군.”최문성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설마 하구천은 아니죠?”“물론 아니야.”하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동기생 중 화태강이라는 이름이 있었대.”최문성은 어리둥절했다.“어떻게 화태강이 거기에? 만약 두 사람이 동기생이라면 왜 그 소대장은 희망호를 압수수색했을까요?”“화태강은 희망호의 지분 30%를 차지하고 있어!”하현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만약 이 사건이 화태강이 벌인 자작극이라면 뭔가 말이 되지 않아?”“도성에서 당신 최 씨 집안 빼고 가장 힘이 센 가문이 화 씨 집안이잖아.”“화 씨 집안이 유람선을 압수수색하는 자작극을 벌이는 데는 전화 한 통이면 돼.”“그러나 화 씨 집안 화태강이 피해자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하잖아, 안 그래?”최문성의 눈동자가 번뜩였다.“대표님, 정말 화 씨 집안이 이런 자작극을 벌였다면 그들의 목적은 남의 칼을 이용해서 사람을 죽이
하현은 자신의 찻잔에 차를 따르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내가 도성에 온 지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화 씨 집안을 참 많이도 두들겨 팼군.”“화 씨 집안을 쳤으니 나한테 따끔한 가르침을 주려는 건 정상이야.”화태강은 두 손을 버렸고 화소붕은 두 다리를 버렸다.화옥현은 어떤가?그는 큰 손해를 입었다.하현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도박왕 화풍성이 아마도 오래전부터 자신을 죽이려고 여러 궁리를 한 것 같았다.계속 이렇게 자신을 건드린다면 결국 화 씨 집안 네 아들 모두 자신에게 밟혀야 끝날지도 모른다.당당한 도박왕이 체면을 깎이고도 어떻게 가만히 있겠는가?최문성도 이를 알아차리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대표님, 만약 손을 쓴 사람이 도박왕이라면 아마도 이 일은 간단히 끝날 것 같지 않습니다.”“도박왕은 대표님을 처단하는 목적 이외에도 우리 최 씨 집안을 도성 바닥에서 쫓아내려는 목적도 있는 것 같습니다.”“아버지께서는 몇 년 동안 여러 방법을 동원해 화 씨 집안이 가진 네 개의 카지노 중 두 개를 가져오려고 했어요.”“이는 화 씨 집안의 이익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죠.”“최 어르신이 카지노를 가져오려고 했다고?”하현의 눈동자에 놀란 빛이 스쳐 지나갔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말했다.“도박왕의 행동 스타일로 봤을 때 아무리 당신 최 씨 집안을 노리고 싶더라도 이런 타이밍에 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내가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이미 당신 최 씨 집안을 노렸을 거라고 생각해.”“차용증이 갑자기 날아온 거며 희망호가 이쪽으로 온 거며 모두 하루 이틀에 맞춰질 수는 없는 일이잖아...”최문성은 온몸이 오싹해지며 정신이 멍해졌다.“대표님, 화 씨 집안은 일찍부터 우리 최 씨 집안을 치려고 계략을 짰을 거란 말씀이시죠.”“그럴 가능성이 꽤 높아.”하현은 지난 며칠 동안 일어난 일들을 복기해 보았다.“난 어쩌다가 화 씨 집안이 노란 일타쌍피의 과녁에 맞았지만 당신 최 씨 집
최양주는 익숙한 복도를 지나 꽃들이 하나둘 펴 있는 정원에 도착했다.이곳은 그가 도성 일인지가 되기 전에 자주 와 보던 곳이었다.나중에 일인자 자리에 오른 후 십여 년 동안은 오지 못했다.최양주가 정원으로 들어서려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다가왔다.호리호리한 몸매의 여자가 최양주를 보며 말했다.“최 선생님, 선생님이 지금 통화 중이시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네, 그러죠.”최양주는 덤덤하게 대답했다.그는 분명 화풍성이 자신에게 기선제압할 목적으로 일부러 기다리게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오늘 그는 방문자이기 때문에 잠자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만약 여기서 그가 뿌리치고 간다면 도박왕 화풍성은 오히려 쾌재를 부를 것이다.최양주가 막 시가에 불을 붙였을 때 옆에 있던 비서가 귀에 꽂혀 있던 이어폰을 살짝 만지다가 최양주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최 선생님, 이리 들어오세요. 선생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비서는 최양주를 뒤뜰 정자 안으로 안내했다.“허허, 무슨 바람이 불어 도성 일인자께서 이곳을 다 찾으셨습니까?”“한낮에 이렇게 찾아오셨는데 설마 밥이나 먹자고 찾아오신 건 아닐 테고.”최양주가 정자로 들어서자 맞은편에서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화풍성이 말했다.최양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맞은편에는 당나라 풍의 옷을 입고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고 있는 도박왕 화풍성의 모습이 보였다.눈에 띄지 않는 아주 평범한 차림에 심지어 남다른 데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는 모습이 오히려 최양주를 살짝 움츠러들게 만들었다.오랜만에 만난 화풍성의 보이지 않는 아우라가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었다.화풍성에 관해 외부에 떠도는 소문은 그저 소문일 뿐이었다.최양주가 서 있는 것을 본 화풍성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최 선생, 어서 들어오세요. 우리 한식구나 마찬가지인데 뭘 그렇게 낯설어 하시오. 앉으세요.”최양주는 앉지도 않은 채 바로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에 들어갔다.“화 선생님, 제가 이번에
”명령을 내린 사람이 나였냐구요?”화풍성은 최양주의 말을 듣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최 선생이 날 많이 오해하신 모양입니다.”“나 화풍성이 비록 도박왕이지만 십 년 전 최 선생이 그 자리에 올랐을 때 이미 난 뒷방으로 물러났어요.”“나 같은 뒷방 늙은이가 무슨 힘이 있어서 경찰을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최 선생이 날 너무 과대평가한 거 아니오?”최양주는 담담하게 대답했다.“화 선생님, 우리 둘 다 알 만한 사람인데 왜 그러십니까?”“화 선생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뭘 망설이시겠습니까? 선생님은 단순한 도박왕이 아니잖습니까?”“눈빛 하나, 손짓 하나에도 화 선생님을 위해 달려나갈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화풍성은 짐짓 의아해하는 기색을 띠며 말했다.“희망호에 손을 댄 사람이 정말 우리 화 씨 집안과 연관이 있다는 말입니까?”여기까지 말하며 화풍성은 찻잔을 집어 천천히 한 모금 마신 뒤 의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최 선생, 걱정 마시오. 이 일은 반드시 내가 직접 처리할 테니.”“만약 내 사람이 이런 짓을 했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겠소!”“높은 자리에 있는 최 선생을 누군가 노리고 있다는데 어찌 내가 용납할 수 있겠소?”“최 선생 집안이 우리 집안의 카지노 업장 두 개를 가져가려 해서 우리 두 집안의 관계가 깨졌다는 소문을 나도 들어서 알고 있소.”“그런데 오늘 내가 최 선생에게 그 내막을 말씀드리겠소!”“만약 최 씨 집안이 우리 화 씨 집안의 카지노를 탐한다면 말씀만 하시오. 내 두말하지 않고 드릴 테니!”“하지만 난 최 선생의 사람됨을 너무도 잘 아는 사람이오. 최 선생은 은혜를 알고 보답하는 사람이지요. 그런 사람이 어떻게 우리 카지노를 탐할 수 있겠소, 안 그렇소?”“나중에 또 밖에서 그런 소문이 들리면 내 직접 그 입을 찢어버리겠소!”“그렇게 해 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최양주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평온한 얼굴을 보였다.오늘 최양주는
”아버지, 전 잘 모르겠습니다.”화천강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우리 화 씨 집안이 여러 해 동안 이 여섯 개의 카지노를 위해 뭉쳤어요. 지금 기회가 왔는데 왜...”화풍성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일단 여섯 개의 카지노가 다 우리 차지가 되면 우리 화 씨 집안은 항성과 도성에서의 지위가 항성 4대 가문을 능가할 것이고 심지어 항도 하 씨 집안에 견줄 만한 지위가 되는 것이야...”“생각해 보거라. 항도 하 씨 집안이 항성과 도성에서 자신들과 이익을 다투는 가문이 생기는 걸 허락할 것 같으냐?”말을 마친 뒤 화풍성은 천천히 찻잔을 쥐고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화천강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문득 크게 깨달았다.“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만약 여섯 개의 카지노가 모두 우리 차지가 된다면 아버지는 몇 년 안에 처단될 수도 있을 거예요.”“나머지 두 카지노를 가지지 않는 것은 남에게 일종의 약점을 보이는 거군요.”“그런데, 아버지. 그렇다면 오늘 왜 이 일에 끼어드셨어요? 왜 희망호에 있는 사람들을 잡아두셨어요?”“내가 언제 사람을 시켜 희망호를 압수수색했더냐?”화풍성이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덤덤하게 말했다.“내가 늙어서 세상에 잘 밝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한테 도청당할 수도 있는데 뭐하러 그런 일을 하겠느냐? 그저 어디서 좀 주워들은 것뿐이야. 누군가 희망호를 이용해 미국 최 씨 일가의 뒤통수를 친들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구!”“어쨌든 내 둘째 아들까지 이 일로 들어갔어.”“어떻게 보면 내도 피해자야.”화천강이 입을 앙다물며 분노를 터뜨렸다.“그럼 이제 태강이를 빼 올까요?”“뭐하러 빼 와?”화풍성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도성에서 사설 도박장을 차리지 못하는 것은 내가 정한 규칙이 아니라 도성이 정한 법규야.”“우리 집안 둘째가 규칙을 어겼어. 그들이 알아서 처리하겠지.”“너 일단 기자회견을 열어서 우리 화 씨 집안은 태강이가 이런 불법적인 일을 한 줄 몰랐다고 밝혀.”
”한마디로 말하면 이번 일은 공정하게 처리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처리한 것 같지 않아.”“화 씨 집안의 그 기자회견 때문에 재조사할 시간도 없었고 말이야.”“국제 여론이 너무 부담스럽기도 했지!”“특히 미국 최 씨 집안을 상대로 하는 일이라 다들 원망의 화살을 받고 싶지 않았겠지. 내가 오늘 얼마나 많은 원로들한테 전화를 받은 줄 알아?”“그래도 미국 최 씨 집안의 손해는 어쩔 수 없는 일인 거야.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지.”“그리고 가장 성가신 일은...”최양주는 여기까지 말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 일은 아마도 도박왕 화풍성이 계획했을 거야. 뒤따라올 결과를 떠안을 사람은 아마도 하 대표가 될 거고.”“남들이 보기에 우리 최 씨 집안은 결국 하나의 가문에 불과해. 남을 대신해 일을 하는 입장일 뿐이니까.”“그래서 하 대표, 더욱더 조심해야 해.”하현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이미 낮에 다 파악했습니다. 모든 얼개가 다 연결되어 있고 걸음걸이마다 그들은 진을 치고 있어요. 결국 저에게 손을 뻗으려고 하는 거죠.”“그러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는 법이에요.”“어르신, 도움을 청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최양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안해하는 얼굴로 말했다.“이번 일은 솔직히 내 자식이 연루된 일이기도 하니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돕지. 말해 보게.”“내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하겠네.”“큰일은 아닙니다.”하현은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경찰에서 체포한 사람 중 소윤비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녀를 만날 수 있는지 여쭤보고 싶었습니다.”“소윤비?”어리둥절해하던 최양주는 핸드폰을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고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잡힌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은 없다는데.”“하지만 그 여자는 희망호의 접객부에 있었대. 일한 지 사흘밖에 되지 않았다는데.”“어제 이 유람선에 오르자마자 그만두고 떠났다는군.”“그래서 이 일에서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고 보고 체포 선상에
”팅!”한 시간 후 하현이 송산 빌리지로 돌아왔을 때 이은지에게서 전화가 왔다.전화기 너머의 이은지가 말했다.“하 대표님, 찾으시는 사람, 찾았어요.”“그 여자는 성형수술뿐만 아니라 많은 돈을 들여 신분 세탁까지 했어요.”“그래도 중국은 우리 상성 재벌의 텃밭이어서 단서를 좀 찾을 수 있었어요.”“그 여자의 신분을 알면 깜짝 놀랄 거예요.”하현은 침착한 표정으로 물었다.“누군데?”“항성 사교계는 모두가 두려워할 베일에 블랙위도우, 서희진, 서 공주님이요.”...오후 4시, 도성 국제 공항 VIP룸.하현은 문을 열고 사방의 적막함을 느끼며 시선을 한 바퀴 돌린 뒤 구석진 자리로 가서 앉았다.맞은편에 있는 소파에는 세련되게 화장을 한 여자가 선글라스를 낀 채 앉아 있었다.그녀는 중국행 비행기표와 핸드폰을 들었고 가끔 손목에 찬 까르띠에 시계를 보며 시간을 체크하고 있었다.“얼굴도 몸매도 다 바뀌었지. 하지만 기질은 똑같아.”하현은 맞은편에 앉아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난 여전히 예전의 블랙위도우 모습이 좋아. 거만하고 콧대 높은.”“지금 소윤비가 되었지. 옛날에 매력적이었던 서희진의 모습이 다 사라졌어.”“아쉬워! 너무 아쉬워!”하현은 말을 하면서 웨이터가 방금 가져다준 홍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그는 한껏 시크한 손님처럼 거드름을 피웠다.세밀하게 화장을 곱게 한 여자는 온몸을 살짝 흔드는 듯하더니 잠시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하현을 바라보았다.“누구신지? 난 그쪽을 모르겠는데요.”“사람을 잘못 본 것 같네요.”하현은 홍차 잔을 들어 올리며 짐짓 진지한 얼굴을 하고는 말했다.“서 공주님, 당신과 나 사이에 비록 원한이 있긴 하지만 뭐 그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잖아.”“내 눈에는 당신이 그리 큰 존재가 아닌데 내가 당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기억할 것 같아?”“당신이 죽든 살았든 혹은 어떤 모습으로 변했든 나한테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야.”“그러나
최희정은 하현이 어디서 이 명함을 구했는지는 모르지만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맞아. 정말로 형홍익 명함인데?”우다금은 최희정의 말을 듣고 오히려 화를 버럭 내었다.“아휴! 잘난 데릴사위가 형홍익의 명함을 얻었으니 이제는 금정 최고 거물의 명함도 받을 수 있겠군그래!”“설 씨 집안도 대구 정 씨 가문과 연락이 닿아 아홉 번째 집안이 되어 꽤나 번성하고 발전했을 텐데 왜 이렇게 변한 거야?”“도와주고 싶지 않으면 그냥 말로 하면 되지 생색은 한껏 내면서 이런 핑계나 대고 있으니 원!”“정말 실망이야!”“이렇게 우릴 무시할 거면 확실히 말할 것이지! 앞으로 내가 절대 이 집안에 얼씬을 하나 봐! 절대 안 올 거야!’우다금은 노점에서 사 온 선물 꾸러미를 떠올리자 화가 나서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았다.그녀는 자신이 쓴 돈을 만회하기 위해 거실에 있는 찻주전자라도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했다.우다금의 말에 최희정과 설재석은 어이가 없어서 몸을 부르르 떨었고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설은아는 이 광경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하현의 손을 잡아끌었다.“하현, 당신이 좀 도와줘. 그렇지 않으면 우리 부모님이 정말...”이쯤 되니 설은아도 자신의 행동이 무리한 요구라는 생각이 들었다.하현과 최희정은 원래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그런 하현이 최희정을 위해 나서서 우 씨 고모를 도와주려 하겠는가?설은아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듣고 하현은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이런 사소한 일로 형홍익 어르신을 귀찮게 할 필요도 없어. 내 하녀한테... 그러니까 내 친구한테 말 한마디만 꺼내면 돼.”말을 마치며 하현은 핸드폰을 꺼내 형나운에게 전화를 걸어 우소희의 취업 문제를 도와달라고 했다.그는 1분도 되지 않아 전화를 끊었고 우다금 모녀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잘 해결되었습니다.”“거짓말하지 마!”“어디서 계속 장난질이야!”“데릴사위인 주제에 금정 최고 책임자라도 되는 양 허
”허! 제부! 시도도 안 해 보고 노력도 안 했는데 당신들은 처음부터 안 된다고 못 박고 있잖아요!”“그게 도와주겠다는 사람 태도예요?”우다금은 냉소적인 얼굴로 쏘아붙였다.“당신들이 우릴 친척이라고 생각했으면 어떻게 우리 소희를 도와주지 않을 수 있겠어요?”“제부, 난 관청에서 일하는 사람이에요!”“내가 자존심도 다 버리고 도와달라고 이렇게 애원하는데 사람을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만드는 건 좀 아니지 않아요?!”“정말 너무 뻔뻔들 하네!”최희정은 자신보다 더 억지를 부리는 사람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어안이 벙벙해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정신을 다잡고 이를 갈며 말했다.“지금 뭐라는 거야? 우리한테 도와달라고 찾아온 언니를 내가 영광으로 생각하며 대했어야 한다는 거야?”“엄마, 아빠...”설은아는 또 말다툼이 시작되려 하자 걱정스러운 듯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자신도 모르게 하현을 힐끔 쳐다보았다.“하현, 혹시 이모 도와줄 수 있겠어?”설은아는 하현이 금정은행에서 형홍익의 개인 명함을 내놓은 것이 문득 떠올랐다.그렇다면 하현과 형홍익이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는 얘기였다.그래서 하현이 방금 그런 말을 꺼낸 것이었다는 걸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허풍이 아니라 정말로 도와줄 능력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눈앞의 난처한 상황을 보고 설은아는 어쩔 수 없이 하현에게 입을 열었다.“하현, 정말 도와줄 수 있어?”설은아의 말에 우다금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은아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면 안 되겠니?”“네 전 남편이 얼뜨기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어?”“도와주기 싫으면 그냥 싫다고 말하면 되지!”“능력이 없다는 둥 변명만 늘어놓더니 이제는 얼뜨기를 내세워 나한테 헛바람이라도 넣으려고 그래?”“놀리는 거야? 놀리니까 재미있어?”“우린 바보가 아니야!”말을 마치며 우다금은 화가 나서 숨을 헐떡거리며 눈을 부라렸다.그녀는 설은아가 자신을 속이기 위해 이런
”제부, 희정아, 은아야. 이 일은 아무래도 너네들이 해결해 줬으면 좋겠어!”“어쨌든 너네들은 매일 친구 모임에도 다니면서 여러 거물들과 친분도 있고 인맥도 많을 거 아냐?”“너네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나 같은 과부와 내 딸은 어떻게 살아?”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던 최희정의 식구들은 신세한탄과도 같은 말을 내뱉는 우다금을 보고 더욱 어찌할 바를 몰랐다.“너네들, 우리 소희가 일자리도 없이 집에서 폐인이 되어 가는 걸 차마 볼 수 있겠어?”“양심에 찔리지 않겠냐고?”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우소희는 핸드폰 배터리가 얼마 없다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손을 놓은 뒤 못마땅한 듯 코웃음을 쳤다.“엄마, 희정이 이모나 이모부가 별로 능력이 없는 것 같아.”“이 사람들은 이제 돈이 많아서 우리 같은 가난한 친척들은 아예 상대하지 않으려고 하나 봐!”“돈푼깨나 좀 있다고 잘난 줄 알아?”“능력 있다고 자랑이나 하지 말던가!”하현은 우소희를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머리가 텅텅 빈 데다 당돌하기까지 했다.이 말을 듣고 설은아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이모, 우리 부모님이 도와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은 금정에서 확실한 인맥이 없어요.”“게다가 형 씨 가문 그룹은 금정뿐만 아니라 전국 단위로 미술품과 골동품을 취급하는 굴지의 그룹이에요.”“매년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수천 명이 넘어요.”“그중에는 배경도 대단하고 능력도 뛰어난 사람도 널렸고요.”“그런데 형 씨 가문이 우리가 뭐라고 우리 요구를 들어주겠어요?”“형 씨 가문 고위층과 아는 사이긴 하지만 취업 청탁을 할 만한 위치는 아니에요. 그럴 능력도 없고요.”“물론 우리도 최선을 다해 볼 거예요!”설은아는 냉정하게 말했다.그녀의 성격은 최희정과는 완전히 달랐다.겉으로 매정한 말을 못 한 채 질질 끌려가지 않았다.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었고 실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그녀가 지금 이렇게 말한 것도 한편
”나도 형 씨 가문 그룹에 들어가는 게 어렵다는 건 잘 알고 있죠.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굽신거리며 여기 온 거잖아요!”우다금은 맡겨둔 물건을 찾으러 온 것처럼 아주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희정아, 긴말하지 않겠어.”“너네 아홉 번째 집안은 곧 파산하겠지만 속담에도 그런 말이 있잖아? 부자가 망해도 3대는 먹고산다고.”“은아가 우리를 형 씨 가문에 다리를 좀 놔주면 되지! 잠시 인사한다고 안면을 트고 물 한 모금 마시는 건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우다금은 아주 노골적으로 의도를 드러내며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물론 너네가 혹시라도 그쪽에 신세지는 게 두려워서 우릴 도와주지 않겠다고 한다면...”“솔직하게 말해!”“난 그럼 친척들한테 가서 그대로 전할 테니까!”최희정과 설재석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할 말을 잃었다.특히 최희정은 더욱 눈알이 휘둥그레졌다.재물을 탐하는 것 외에 그녀가 가장 중시하는 것이 바로 체면이었기 때문이다.그녀는 가방 하나를 사도 SNS에 올려 자랑하는 사람이었다.그런데 만약 자신이 우다금을 도와주지 않은 일이 사람들한테 알려진다면 앞으로 그녀는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는가?하지만 이 일은 어떤 방법으로도 도와줄 수가 없는 일이었다.그녀가 돕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능력 밖의 일이라는 말이다.금정처럼 오래된 도시에 토박이들이 깊이 뿌리를 내린 곳의 은둔가 형 씨 가문은 금정 간 씨 가문이나 김 씨 가문과도 비견될 만한 존재였다.대구 정 씨 가문도 확실히 10대 최고 가문 중 하나이긴 했지만 문제는 설은아가 아홉 번째 집안이고 그것도 파산 직전 상태라는 것이다.이 상황에서 그녀가 형 씨 가문과 조금 친분이 있다고 해서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형 씨 가문 그룹에서 이 정도 알량한 친분 때문에 체면을 봐주며 뒷거래를 하겠는가?가능성이 너무나 희박하다는 건 알지만 체면 때문에 최희정은 천천히 설은아의 얼굴에 시선을 돌렸다.최희정은 설은아가 먼저 이 일을 승낙해
설은아와 가벼운 인사를 나눈 우다금의 시선은 계속해서 최희정에게로 향했고 결국 불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저기 말이야. 내가 정말 어쩔 수 없어서 널 찾아왔지 뭐야!”“너도 알다시피 난 체면을 엄청 중시하는 사람이잖아!”“일이 없었으면 나도 이렇게 굽신거리며 찾아오지 않았을 거야!”“우리 소희가 보석 디자인을 배웠는데 아직 마음에 드는 직장을 못 잡았어.”“요즘 기업들은 정말 제대로 된 인재를 못 알아보는 거 같아.”“내가 마음먹고 그들한테 전화해서 우리 딸 진짜 인재다, 그러니 적어도 월급은 오백만 원은 되어야 하고 5성급 호텔에 해당하는 숙소와 전용차도 제공해야 한다고 했어!”“그런데 그 회사에서 우리 딸한테 삼백만 원밖에 못 주고 숙소도 다 함께 사는 기숙사형태로만 제공해 준다고 하잖아!”“아니 사람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우다금은 말을 하면서도 분노가 치미는지 눈물까지 글썽이며 가슴을 쳤다.반면 우소희는 마지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라는 듯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최희정은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언니, 언니 마음은 이해해. 그러면 내가 은아랑 얘기해 볼 테니까 SL그룹에서 몇 달 일해 보는 건 어때?”“SL그룹?”우다금은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너네 SL그룹에 자금줄이 끊겨서 몇 달째 월급이 나오지 않고 있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내 딸이 거기 들어가서 뭐 공짜 일이라도 해 달라는 거야?”“도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지금?”“게다가 내 딸은 주얼리 디자인을 전공했어. 얼마나 고급진 전공인데!”“너네 SL그룹은 지금 파산 직전이나 마찬가지인데 어떻게 내 귀한 딸을 거기에 갖다 붙여?!”우다금은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우소희도 옆에서 끼어들었다.“맞아요. 내가 신분도 이렇게 높은데 어떻게 파산 직전의 회사에 들어갈 수 있겠어요? 절대 못 가요!”“SL그룹에 가면 아무런 공부도 안 되고 그냥저
보기만 해도 끔찍한 장면이 벌어졌다.담배를 입에 물고 있던 마동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알이 휘둥그레졌다.그의 눈앞에서 마사영이 차 유리에 부딪혀 상처투성이가 된 것이다.이 광경을 본 뒤 마동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눈이 뒤집혔다.“개자식! 감히 내 후배를 이 꼴로 만들어! 그렇게 자신 있어? 뒷감당할 자신 있냐고?”마동수는 포효하며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괴물처럼 커다란 주먹을 움켜쥐었다.순간 하현의 손바닥이 마동수의 얼굴을 덮쳤다.‘퍽’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마동수의 몸이 튕겨나가 트럭 좌석 위에 나가떨어졌다.그의 시야에는 하현의 매서운 표정만이 어른거렸다.“실력도 별로구만. 괜히 쓸데없는 말만 많은 놈이군.”하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티슈를 꺼내 손가락을 하나하나 닦았다.마동수는 눈앞의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자신이 주먹을 휘두르기도 전에 하현한테 먼저 일격을 당하다니!마사영도 이 광경을 보고 눈알이 튀어나올 듯했다.그녀는 헐떡거리며 몸을 일으켜 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하현은 냉담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사장님, 이리 와서 처리 좀 해주시죠.”...고명원이 사람을 데리고 와서 현장을 처리하는 동안 하현은 설은아를 데리고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설은아의 부상은 경미했지만 심적으로 많이 놀란 상태였다.그래서 링거를 맞고 있는 설은아에게 하현은 상대 운전자가 졸음운전을 해서 사고가 난 거라고 둘러댔다.상대 운전자가 전적으로 책임지고 차를 수리해 주기로 했고 수천만 원의 의료비도 배상한다고 덧붙였다.설은아는 하현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고 자신의 몸에 별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병원을 떠났다.다만 가족들에게는 교통사고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하현에게 당부했다.가족들에게 쓸데없는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하현은 아무 말 없이 온화한 미소를 보이며 택시를 잡아타고 그녀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오
”그러니 내가 지금 당신을 찾아와 따지는 게 지나친 일은 아니지, 안 그래?”마동수는 당연한 듯 입을 열었다.하현은 그의 이름을 듣고 어딘가 좀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순간 얼마 전 엄도훈이 자신에게 한 얘기가 떠올랐다.“당신 둘은 무학의 성지인 서남 천문채에서 내쫓긴 그 마동수와 마사영이지?”“내 기억이 맞다면 서남 천문채는 당신들에게 엄청난 현상금을 걸었다던데.”이전에 엄도훈은 이 두 사람이 치명적인 권법을 터득하기 위해 동료 몇 명을 죽이는 극악무도한 행동을 했다고 말했다.그래서 그들은 서남 천문채에서 제명되고 급기야 현상금이 붙은 채 쫓기는 신세가 된 것이다.하현은 고성양에게 이런 배경이 있을 줄은 몰랐다.게다가 고성양과 그의 모친은 곤경에서 벗어나자마자 사람을 시켜 이런 문제를 일으킬 줄은 더더욱 상상하지 못했다.설은아가 아직 차 안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하현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정홍매와 고성양의 일은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지만 내 탓만을 할 수는 없잖아, 안 그래?”“언젠가는 드러날 일이었어.”“그러니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는 게 어때?”“이를테면 내가 위자료의 의미로 당신에게 일억 정도 준다든가 말이지. 어때?”하현은 냉정을 유지하며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미안하지만 내 아내와 아들은 당신이 죽길 원해.”“그들은 당신이 죽어야만 숨을 쉴 수가 있다고 말했어.”마동수의 얼굴에 음산한 웃음이 번졌다.“하지만 걱정하지 마. 당신이 떠나는 길, 외롭지 않게 해줄 테니까.”“난 이미 다 알아봤지.”“당신을 죽인 뒤 장인 장모 일가족을 죽이고 마지막으로 고명원을 죽일 거야!”“당신 여자는 며칠 있다가 죽일 거야.”“내 아들이 관심을 두고 있는 여자거든.”“며칠 편안하게 데리고 있다가 같이 보내줄게.”덤덤한 표정으로 일관했던 하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이곳은 금정이라 그는 가능한 한 몸을 낮추려고 했다.하지만 상대는 그에게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김나나가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하현은 설은아의 손을 잡고 그 자리를 떠났다.도중에 설은아는 하현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일이 이렇게 정리되었으니 더 이상 만류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입을 다물었다.차가 교외로 빠져나왔을 때 하현의 핸드폰이 갑자기 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언뜻 눈을 들어보니 엄도훈이었다.전화를 받자마자 건너편에서 다급한 엄도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현 형님! 큰일 났습니다!”하현은 눈꼬리를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큰일 날 게 뭐가 있어?”엄도훈은 못마땅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고명원 그놈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습니다.”“그는 고성양이 자신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그 모자를 죽이려고 했습니다!”“아주 날을 잡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셈이었던가 봐요!”“그런데 오늘 아침에 정홍매와 고성양을 가두어 놓은 곳에 가 보니 이미 아무도 없었다는군요.”“정홍매와 고성양이 아주 사라졌어요!”“이 일은 형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어쨌든 폭로가 된다면...”점점 어조가 무거워진 엄도훈은 결국 말을 끝맺지 못했다.“정홍매 모자가 형님한테 폐를 끼칠까 봐 걱정스럽습니다.”하현은 엄도훈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내뱉었다.“정말 쓸모없는 인간들이군!”정홍매와 고성양이 누군가에게 구출되었다면 그들의 실력이 아주 범상치 않다는 것을 뜻한다.자신을 찾아와 복수할 확률도 크다는 얘기다.자신에게 복수하는 것은 아무 상관없지만 문제는 설은아에게 손을 댄다면 조금 상황이 복잡해진다는 것이다.설은아는 옆에서 지켜보며 하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닌지 의아해하며 살짝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쾅!”바로 그때 뒤에서 갑자기 트럭 한 대가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 왔다.설은아는 놀라서 제대로 반응도 하지 못했는데 순간 그녀가 몰던 차의 속도가 증가하기는커녕 오히려 느려졌다.“조심해!”하현은 순간적으로 설은아의 몸을 덮친 뒤 핸
하현은 펄쩍펄쩍 뛰는 김나나를 보고 빙긋이 웃었다.“그런 말을 하면 체면이 덜 깎일 것 같아서 그래?”하현의 말을 들은 설은아는 가슴이 철렁해서 급하게 그의 곁으로 다가와 손을 잡아당겼다.“하현, 그만하면 됐어. 그 정도로 해. 나나는 어쨌든 내 친구야.”“김나나, 너도 내 말 좀 들어봐. 이제 그만 하현에게 사과하고 이 일은 그냥 넘어가면 안 돼?”그녀는 하현이 이런 식으로 김나나를 몰아붙이는 건 결국 문제를 더 크게 만든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호의가 김나나의 눈에는 하현을 비호하려는 의도로 보였다.김나나는 콧대를 한껏 치켜세우며 차갑게 말했다.“설은아, 이 쓰레기한테 사과하라고? 너 머리에 물 들어갔어?”“사과를 하라니?”“그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야!”김나나의 말에 주위에 있던 예쁜 여직원들이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다들 하현을 무시하는 기색이 역력했다.하현이 너무 잘난 척한다고 생각한 것임이 틀림없다.하현은 김나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조 행장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보였다.“조 행장님은 끝까지 내 말을 무시할 생각인가 봅니다.”“강남에 있는 천일그룹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금정까지 손을 뻗칠 수 없는 건 사실이죠.”“영향력이 부족할 수 있죠.”조 행장도 이에 맞장구를 쳤다.“확실히 영향력은 떨어지죠.”“그럼 이러면 어떻습니까? 이래도 부족합니까?”하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명함 한 장을 꺼내 조 행장 앞에 툭 내던졌다.금정 제일 풍수지리사, 장천중.조 행장의 얼굴빛에 살짝 균열이 생겼다.“이래도 부족하냐고 물었습니다.”“조 행장님, 뒷배가 아주 든든한가 봅니다.”하현은 마지막 명함을 꺼내 조 행장의 눈앞에 철썩 내리쳤다.보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할 그 이름, 간민효라는 석 자가 명함에 박혀 있었다.이를 본 순간 조 행장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휘청거리기까지 했다.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