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바람에 달아오른 얼굴이 조금 식혀지기까지 그리 힘들지 않았다.정신이 들고 나니 반승제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닌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일부러 성혜인을 괴롭히고 목적에 도달하고 나서 일 처리를 시작한 건 아닌지 생각이 들었다.조금 전에 일만 하고 있던 성혜인에게 복수하려고 그랬던 것일까?성혜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흘겨보았다.하지만 반승제의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없고 정말로 급한 업무가 있어 보인다.울분이 터지지만, 고개를 떨구고 업무에 집중하려고 노력했으나, 시선은 자꾸만 반승제의 손으로 가게 된다.성혜인은 모델보다도 예쁜 그의 손을 좋아한다.아니 더욱 정확하게 짚어 말하자면, 반승제는 온몸 구석구석 예쁘지 않은 곳이 없다.얼굴도 몸매도 가장 은밀한 곳도 완벽 그 자체이다.여자를 데리고 놀만한 자질은 충분하나 성혜인은 그에게 농락당하는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복잡한 마음을 가다듬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에 차는 어느새 고택 앞에 이르렀다.하인이 문을 열어 주었고 성혜인은 먼저 차에서 내렸으며 반승제는 그 뒤를 따랐다.문이 열리자마자 반태승이 지팡이를 짚고 거실 문 앞에서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할아버지.”반태승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성혜인은 문뜩 빈손으로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게 되었다.다음에 찾아뵙게 하면 선물을 준비해 오겠다고 말하려고 하던 참에, 반승제가 하인에게 트렁크에서 선물을 내리라고 지시하는 모습이 보였다.반승제는 심지어 반태승에게 둘이 준비한 것이라고 말했다.“할아버지, 저하고… 저희가 준비한 선물입니다.”그는 하마터면 혜인이라고 부를 뻔했다.만약 혜인이라고 뱉게 된다면 아마 성혜인의 눈총을 받게 될 것이다.그런 일로 창피함을 당하기 싫어 반승제는 우리라고 했다.미리 선물을 준비해 온 반승제의 모습에 다소 의외였지만, 난처한 상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여 오히려 다행이었다.반태승은 고택 안으로 선물이 끊임없이 옮겨 들어가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만약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
반태승은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심지어 반승제를 쫓아내고 성혜인하고만 저녁을 먹고 싶었다.그러나 가장 원하는 것은 두 사람이 화해하는 것이다.비록 두 사람을 합치려고 애쓰지 않겠다고 성혜인에게 약속한 적은 있지만, 반승제야말로 친손자이니 무엇보다 손자에게 가장 좋은 임자가 생기를 원한다.하여 비아냥거리며 딱 한 마디만 던지고 위층을 가리켰다.“서씨 가문 어르신이 나더러 산수화 한 폭만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혜인아, 승제야, 둘이 같이 그려 봐. 저녁 식사까지 아직 2시간 정도 있으니, 같이 그리면 금방 될 거야.”성혜인은 주영훈의 제자이며, 주영훈이 가장 능한 분야도 바로 한국화이다.둘은 같이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아주 예전에 서천에 있을 때, 성혜인은 반승제가 그림 그리는 데 일가견이 있으며 심지어 자기와 이해하는 점이 같다는 것을 발견했었다.반태승이 이러는 이유도 아마 두 사람을 합치기 위해서 일 것이다.알고 있으면서도 성혜인은 거절하기 힘들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그러자 반태승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서재에 이미 준비해 두었다. 승제가 내 서재 위치를 알고 있으니 같아 가 보거라. 서재에서 그리면 되고 다 그리고 나면 사람을 불러 거두라고 하마.”반승제는 반태승의 정성에 저버리지 않고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성혜인도 하는 수 없이 뒤따라 올라갔다.그녀는 반태승의 서재에 와서 본 적이 있었고 평범한 인테리어의 벽에는 거의 책으로 도배되어 있었다.중간에 테이블은 엄청나게 크며 화지가 세팅되어 있고 그 위에는 낙관도 쓰여 있었다.서씨 가문 어르신에게 줄 선물이 틀림없어 보였다.성혜인은 옆에서 필요할 물감들을 유심히 보았는데, 이번에 그릴 그림은 한국화이고 물감은 거의 다 한색 계열이다.옆에 붓걸이에는 화필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데, 미리 준비해 둔 것이 맞다.하지만 성혜인은 무엇을 그려야 할지 몰라 저도 몰래 반승제를 바라보았는데, 마침 반승제도 성혜인을 보고 있었다.두 사람 주위의 환경은 고풍스럽기 그
전에는 성혜인에 대한 감정을 제대로 보고 싶지 않았고 조사하기도 귀찮아 그로 인해 잘못을 많이 했다.최근 들어 성혜인 사촌 오빠의 일로 두 사람 사이는 한 걸음 더 멀어졌으니, 지금 반승제를 상대하지 않는 것도 마땅하다.갑작스러운 그의 동작과 말에 성혜인은 온몸이 굳었지만, 곧장 반승제의 손을 밀었다.들고 있는 붓에 먹물이 화지에 튈까 봐 힘껏 밀지는 못했다.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은 섬세함이 생명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림 전체를 망칠 수 있다.“반승제 씨, 심심하면 저 좀 방해하지 말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든지 해요.”반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성혜인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아무리 말해도 듣지를 않자, 아예 신경 쓰지 않고 남은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똑똑.”노크 소리가 들려왔는데, 아마 하인이 마실 물을 갖다 주러 왔을 것이다.성혜인은 얼른 반승제를 밀어 버렸지만, 반승제는 껌딱지처럼 다시 달라붙었다.예전부터 그녀는 반승제에게 아이다운 심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고집이 세고 기분이 오락가락하며 외부 사람에게 더없이 차갑다.“놔요.”반승제는 뒤에서 성혜인을 안고 있었는데, 아쉬워하며 손을 떼고 옆에 있는 의자로 갔다.그러고 나서 성혜인이 하인에게 소리를 냈다.“들어 오세요.”역시나 하인이 맞았고 쟁반에 차 두 잔을 들고 있다.“승제 도련님, 혜인 아가씨, 고생이 많으십니다. 회장님께서 가져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차 두 잔이 테이블에 가지런히 놓이고 하인은 인사를 마치고 물러났다.성혜인은 손에 들고 있던 붓을 깨끗이 씻고 좀 큰 붓으로 바꾸고 싶었는데, 반승제가 또다시 다가왔다.“도와줄게.”반승제는 이미 사용한 붓을 빼앗아 옆에 있는 맑은 물로 씻기 시작했다.성혜인도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아 다른 붓으로 그림을 그렸다.그러다가 옆에 인기척이 있는 걸 느끼게 되었는데, 곧 그림자도 시선으로 들어왔다.반승제가 다시 다른 붓으로 옆에서 돕기 시작한 것이다.다른 부분을 떠나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은
“아니에요.”성혜인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거절했다.“여기서 할아버지와 이야기도 나누고 그래요.”말을 마치고 성혜인은 주저 없이 대문으로 향해 걸어갔다.그러자 반승제는 양복 외투를 들고 빠르게 따라갔다.성혜인은 정말로 돌아갈 때도 그와 한 차로 가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대문 밖으로 나가고 보니 자기 차를 몰고 온 것이 아니기에 지금 눈앞에는 반승제의 차와 고택의 차밖에 없다.둘 다 싫다면 성혜인은 걸어서 돌아가야만 한다.이 구역에는 택시가 단 한대도 없기 때문이다.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반승제는 외투를 성혜인의 어깨에 걸쳐주었다.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는 참이어서 밖은 좀 쌀쌀했다.“그냥 입고 있어. 바래다줄게.”거절을 용납하지 않는 말투였다.성혜인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수석에 앉았다.반승제가 직접 운전을 했는데, 엑셀을 밟자마자 전화가 울렸다.차를 몰아야 하기에 그는 발신자 번호도 체크하지 않고 스피커를 눌렀다.“여보세요.”그러자 여전히 애교가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승제 오빠, 나 안 보고 싶어? 왜 전화 한 통이 없어? 난 오빠 보고 싶단 말이야.”처음으로 걸려 오는 전화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반승제는 전화를 단번에 끊어버리고 곁눈질로 성혜인을 바라보았다.성혜인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조금 전에 걸려온 전화에 대해서 할 말이 없었다.하지만 반승제는 해석하느라 바빴다.“아마 스팸 전화일 거야. 모르는 사람이야.”성혜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고 한참이 지나서야 대답만 하고 말았다.“네.”반승제는 양손으로 핸들을 꼭 잡고 조용하고 외지고 조용한 곳에 정차했는데, 주위에는 그들 말고 아무것도 없었다성혜인은 순간 경계심을 불러일으켰으나, 차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뭐 하자는 거예요?”반승제는 좌석을 뒤로 당겼고 앞자리에 공간이 제법 많이 생기게 되었다.그는 단번에 성혜인을 확 끌어당겨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네? 그게 다야? 너 진짜
거대한 좌절감에 숨까지 막혀왔다.“몰라요.”성혜인의 대답에 반승제는 또다시 문득 차분해졌다.그는 성혜인을 지그시 바라보며 다른 남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그제야 숨이 쉬어지면서 성혜인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그럼, 나랑 해보자.”긴장이 풀리자, 목소리까지 한껏 부드러워졌다.“대표님은 사실 저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요.”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성혜인은 반승제가 콧방귀를 뀌는 것을 들었다.밤거리의 등불은 그리 밝지 않지만, 하얀 피부로 타고나서 어두운 거리에서도 빛이 났다.반승제는 고개를 떨구고 주위에 행인이 있든 없든 아랑곳하지 않고 지그시 성혜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부드럽기 짝이 없다.“성혜인, 내가 널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는데, 그 사실을 너 스스로가 부정하고 싶은 거야. 내가 널 아무리 좋아한다고 말해도 넌 가장 끝에서 날 부정하고 있어. 나를 대면하고 싶어 하지 않고 우리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을 외면하고 싶은 거야. 나를 뿌리치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래서 조금 전에 성혜인이 했던 말은 자기에게 하는 말이라고 간주하면 된다.반승제는 우습기도 하고 다소 아이러니하기도 했다.“내가 널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거야.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 거였어.”성혜인은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보더니 핑계를 찾았다.“많이 늦었어요. 그럼, 먼저 들어가 볼게요.”몸을 돌렸지만, 반승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덧붙였다.“너한테 반지 준 남자 누구야? 그 남자 좋아하는 거지? 사실 좋아하는 사람 있으면서도 알려주고 싶지 않았던 거 아니야? 나하고 결혼한 이유도 단지 너희 가문 위기를 넘기기 위해서잖아. 나하고 자는 것도 내가 널 만족시킬 수 있어서 자는 거잖아.”“성혜인, 너 생각보다 무서울 정도로 차분해. 내가 널 찾아가지 않으면 넌 절대 날 찾아올리가 없어. 내가 좋아한다고 수천 번이나 말해도 넌 항상 생각도 하지 않고 거절
성혜인은 반승제의 손을 뿌리쳤다.전에 똑같은 말을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혜인아, 앞으로 너에게만 잘해줄게.”그 사람은 성혜인에게 이렇게 말했었는데, 결말은 그렇지 않았다.태어나서 처음으로 반항했었고 그 사람과 연애하고 싶었었다.그 사람은 성혜인의 반골이며 소리 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살며시 성혜인의 꽃다운 청춘에 스며들었다.지금 반승제에게서 똑같은 말을 들으면서 순간 착각이 들어 저도 몰래 주위를 훑어보았다.“대표님, 많이 늦었네요. 어서 돌아가 보세요.”반승제는 또 한 번 거절당했다.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지폈다.“응. 담배 한 대만 피우고.”성혜인은 더는 말하지 않고 서둘러 병원으로 들어갔다.대문으로 들어가려던 참에 고개를 돌려 반승제를 한 번 바라보았다.그는 지금 차에 기대어 있는데, 서 있는 위치도 기가 막히다.절반은 밝고 다른 절반은 어두우며 손가락 사이에 희미한 담배 불빛이 번쩍이고 있다.반승제도 고개를 돌려 성혜인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혜인은 그에게 들킬까 봐 얼른 고개를 돌려 안으로 걸음을 재촉했다.…한서진의 병실 안에서 송아현은 이미 두 시간이나 울었다.“아저씨, 제가 잘못했어요. 미안해요.”한서진은 지금 팔에 깁스를 했고 실려 왔을 때는 손이 부러진 상태였다.송아현은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울부짖었고 한서진은 머리가 지끈거렸다.“괜찮아.”“이게 어떻게 괜찮아요? 모두 제 잘못이에요. 그 여자만 때리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을 텐데, 그 여자 배경이 엄청 나다고 들었어요.”송아현은 침대에 앉아 있었는데, 그만 참지 못하고 한서진의 품으로 뛰어들었다.한서진은 그만 온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부드러운 한 곳이 자꾸 한서진의 팔에 닿았기 때문이다.하지만 아직도 울고 있는 송아현이라 일부러 그런 거 같지는 않다.송아현은 인제 의젓한 성인이고 두 사람은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하여 한서진은 단호하게 송아현을 밀쳐버리며 눈살을 찌푸렸다.“아현아, 이 일은
한서진은 송아현 일가의 일에 관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송아현 엄마의 성격이 어떠한지 그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그러나 송아현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한서진은 저도 몰래 짜증이 피어오르며 심지어 시간을 돌려 그때의 송아현 엄마를 말리고 싶었다.이렇게 하면 아이에게 상처를 줄 것인데, 왜 잘못을 거듭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부모 중의 어느 한쪽이 바람을 피우던 아이에게 돌아가는 상처가 가장 크다.만약 혼인에 충성을 할 수 없다면, 쉽게 혼인 서약을 맺어서는 안 된다.한서진은 이 부분에 대해서 일찍이 꿰뚫고 있어 혼인은 한낱 부질없는 것으로 생각했었다.“아저씨도 그 사람이 하는 말 믿는 거예요?”송아현은 그의 옷자락을 잡으며 두 눈을 부릅떴다.한서진은 덤덤하게 송아현의 손을 떼어 버렸다.“좋은 엄마셨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중요하지 않아. 가장 중요한 건 너에게 잘해 주셨다는 거야.”성혜인은 옆에서 이 말을 듣고 있을 때, 한서진이 사건이 내막에 대해서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다만 그 사실은 가시덤불이라 선뜻 뱉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성혜인은 손을 들어 송아현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했다.“아현 씨, 일단 돌아가서 좀 쉬세요. 촬영도 계속해야 해요. 한 매니저님하고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의논해 볼게요.”송아현은 고개를 떨군 상태로 일어서서 재빠르게 한서진의 볼에 뽀뽀했다.한서진은 순간 온몸이 굳어지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정신을 차리고 나니 화가 치밀어 가슴이 펄떡펄떡 뛰고 농락당한 것만 같았다.“송아현!”하지만 송아현은 눈 깜짝할 새에 멀리 도망쳤다.한서진은 온몸을 파르르 떨며 힘껏 얼굴을 문질렀고 주먹을 꽉 잡아당겼다.얼굴은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졌으며 험상궂기 그지없었다.성혜인은 줄곧 그를 이성을 잃지 않은 침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그도 이성을 잃는 순간이 있을 줄은 몰랐다.“성 대표님, 추한 모습 보여서 죄송합니다. 저도 아현이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요.
성혜인은 침묵을 유지하며 한서진이 스스로 아픈 상처들을 일일이 파헤치는 것을 듣고 있었다.그리고 마침내 비혼주의를 강조하는 한서진의 주장을 이해하게 되었다.그가 생각하는 혼인에는 배신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서진 씨, 아현 씨는 지금 연예인이고 앞으로 다른 연예인과 스캔들도 많이 낼 것인데, 괜찮아요?”“연예인이라면 모두 겪어야 하는 과정입니다.”한서진의 말투는 덤덤하기 그지없었다.“그것마저 감당할 수 없다면, 이쪽 바닥을 일찌감치 떠나는 것이 좋을 거예요.”마침 병실로 돌아온 송아현은 덤덤하게 뱉은 한서진의 말 두 마디 듣게 되었다.송아현은 손끝으로 문손잡이를 잡고 있었는데, 온몸이 굳어버렸다.그들에게 들킬까 봐 옆으로 몸을 숨기고 들끓는 감정을 추스르고 나서야 웃으며 문을 밀었다.“아저씨, 사장님, 얘기 다 하셨어요? 깜빡 놔두고 간 게 있어서요.”송아현은 휴대 전화를 가리키고 빠르게 가지고 나가며 손을 흔들었다.“지금 당장 촬영하러 갈게요. 그리고 그 일은 두 분께 잘 부탁하겠습니다. 참, 미안하게 됐어요. 그 사람이 저를 아무리 때려도 절대 되받아치지 않을게요.”말을 마치고 병실 안에 있는 두 사람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자리를 황급히 떠났다.두 사람은 송아현이 둘 사이의 대화를 들었다는 것을 모른다.송아현이 핸드폰을 놓고 간 것도 한서진에게 뽀뽀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당황해하며 로비까지 달려 나오고 나서야 휴대 전화를 놓고 나온 것을 발견했다.한서진은 결코 틀린 말을 한 것이 아니다.다른 사람과 스캔들이 나면서 이슈를 내는 것도 연예인이라면 반드시 겪어야 하는 일이다.한서진은 송아현의 남자 친구가 아니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용기 내여 건넨 뽀뽀도 한서진의 마음을 흔들리게 할 수 없었다.역시 짝사랑은 혼자만의 난리 통이다.지금은 짝사랑이라고 할 수도 없다.전에 한서진에게 고백했었지만, 술에 취해 함부로 뱉은 말로 간주했을 따름이다.송아현은 깊이 숨을 내쉬며 눈을 닦고 다시 얼굴에 미소를 띠
경찰서에서 나온 온시환은 마침내 밖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사실 그는 공지민을 다시 찾아가 그녀한테 복수를 그만두라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고, 계속 복수에 집착했다가 염정아와 염정아 동생처럼 될지도 모른다고 말해주고 싶었다.하지만 공지민이 건드린 건 연씨 가문이기에 그녀의 미래 운명은 염정아보다 훨씬 더 비참할 것이었다.온시환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고 너무 오랫동안 경찰서 앞에 서 있다 보니 허벅지가 마비될 정도였다.과거의 그는 상류층에 속해 있어서 인간성의 복잡성과 인정의 차고 따뜻함을 깊이 느낀 적이 없었다. 염정아의 일을 통해 그는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꼭 설명이 필요한 건 아니고 당사자가 후회하지 않는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느꼈다.다만 온시환은 이제 정말 지쳤고 그는 그저 공지민이랑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공지민은 마음속에 너무 많은 것들을 품고 있었고 오랫동안 원한으로 가득 차 있었다.공지민도 TV 뉴스를 통해 교통사고가 난 사람이 염정아의 동생이란 걸 알았다. 그녀는 매우 걱정스러웠고 염정아의 동생이 왜 제국에 있는지 혼란스러웠다.그녀는 서둘러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었고 바람 쐬러 나가겠다고 전했다.연승혁은 그녀가 나가면 온시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봐 걱정됐고 그로 인해 지금 진행 중인 게임도 끝나버려서 그한테 불리할까 봐 단박에 거절했다.하지만 몇 시간 후 공지민은 울먹이면서 또다시 연승혁한테 전화를 걸었다.“고등학교 때 친구가 방금 뉴스에 나왔어요. 기억이 조금 돌아온 것 같아요. 흑흑, 걔가 사람을 죽였대요. 오빠, 걔 만나러 가야 돼요. 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걔가 어떻게 사람을 죽여요?”염정아의 동생이 죽은 다음 염정아가 원아정을 죽인 걸 봐서 염정아 동생의 죽음이 원아정과 관련이 있는 게 분명했고 염정아가 원아정한테 복수하려고 그녀를 죽였을 가능성이 높았다.공지민의 울음소리를 들은 연승혁은 마음이 아팠지만 그는 바로 동의하지 않고 사람을 시켜서 오늘의 뉴스를 조사해
염정아는 주삿바늘을 뽑아버리고 병실 문을 나섰다. 밖에는 두 명의 경호원이 서 있었는데 그들은 온시환의 사람들이었고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왔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보호 받을 필요가 없었다.경호원이 그녀에게 물었다.“염정아 씨, 어디 나가시려고요?”“여기가 너무 답답해서 바람 쐬러 내려가려고요.”경호원들은 그녀를 보호하러 온 것이지 감시하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하지만 염정아는 진짜 바람 쐬러 나간 게 아니라 병원에서 나온 후 바로 원아정을 찾아 나섰다. 동생이 죽은 것에 대한 증오와 원아정을 찾아내서 무조건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은 복수의 불꽃이 가슴속에 계속해서 타올랐다.염정아는 30분 동안 거리를 헤매다가 하늘나라에 있는 동생이 도운 건지 정말 원아정을 찾아냈다.오늘의 원아정은 더 이상 부잣집 딸의 옷차림이 아닌 수수한 옷차림에 머리는 부스스하고 지저분한 모습이었지만 염정아는 그녀를 너무 잘 알기에 한눈에 알아봤다. 그녀는 백화점 밖에서 오고 가는 화려한 옷차림의 사람들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원아정을 못 찾을 만했다. 자신의 체면을 그렇게 중히 여기던 원아정이 거지의 모습으로 가장 번화한 상권에 나타날 줄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염정아는 멀지 않은 곳에 서서 그녀를 지켜보다가 칼을 사 들고 원아정을 향해 걸어갔다.원아정은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감지 못했고 마음속으로는 연승혁의 부하들이 평생 자신을 찾지 못할 거라고 기뻐하고 있었다.하지만 곧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외쳤다.“원아정.”아직 반응하지 못한 원아정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려 하자 누군가가 그녀의 목을 향해 칼을 꽂았다.피가 사방으로 튀면서 주변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염정아는 자신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칼을 뽑았다가 분노에 휩싸여 다시 원아정의 몸을 향해 찔렀다.원아정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언제 발각되었고 또 왜 이토록 처참하게 죽어야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도착했고 당시 CCTV를 확인한 결과, 남성 피해자가 소형차에 치인 뒤 뒤따라오던 트럭이 남성을 깔아뭉갰고 남성이 트럭 차대에 끼어서 몇 킬로미터를 끌려가다가 트럭 뒤를 따르던 차량이 핏자국을 발견하고 계속해서 경적을 울려 트럭 운전기사를 멈추게 했다.트럭 운전기사는 너무 놀라서 머리가 멍해졌고 계속 자신이 사람을 쳤다고 여겼는데 CCTV를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주요 책임은 아니었지만 그도 연대 책임을 져야 했다.곧바로 누군가가 사망자의 가족한테 연락하려고 했지만 사망자의 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의 가족이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다.경찰도 난감한 상황에 빠져 사망자의 교통사고 보도를 TV로 방송하고 사망자가 입고 있던 옷을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같은 시각 염정아는 계속해서 동생을 찾고 있었고 흐려진 하늘을 바라보며 그녀는 안 좋은 일이 생길까 봐 불안하고 두려웠다.두 시간 후 온시환의 부하가 마침내 소식을 전해왔는데 바로 차에 치여 사망한 남자의 가족을 찾는 뉴스 보도였다.익숙한 옷을 본 염정아는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옷은 동생의 옷이었고 그녀가 사준 거였다.“어디에 있어요? 동생 만나러 가야 해요! 꼭 가야 해요!”그녀는 심한 충격에 기절할뻔했지만, 동생의 곁으로 갈 때까지 이 악물고 버텼다.시신은 병원 영안실로 옮겼는데 머리 빼고는 온전한 데 하나도 없었고 염정아는 시신을 보자마자 기절해 버렸다.온시환은 깜짝 놀라서 그녀를 급히 응급실로 데려갔다.염정아는 아주 긴 꿈을 꿨다. 그녀가 고등학교 때 괴롭힘을 당하고 부모님께 말씀드리자 부모님은 그저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뿐이었다.그녀가 슬픔에 잠겨 울고 있을 때 바보 동생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서 막대 사탕을 건네줬다.막대 사탕은 동생이 가장 좋아하는 물건이었고 그때 그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불렀다.“누나.”염정아는 동생을 미워했고 항상 동생의 존재가 자신에게 불행을 가져다준다고 생각
사실 원아정은 염정아를 잊고 있었는데 상대방이 먼저 얘기를 꺼내자 그녀에 대한 기억이 조금 떠오르긴 했다.공지민이 나타나기 전에 확실히 다른 사람을 괴롭힌 적 있긴 했는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염정아는 심호흡하고 말했다.“나랑 지민 언니는 동병상련의 관계일뿐이고 내 집안 사정이 어려울 때 지민 언니가 도와주고 돈도 줬어. 내가 제국에서 일하고 싶다고 해서 지민 언니가 날 데려온 거고 날 숨기려고 한 게 아니야. 난 단지 집에서 수공업을 하고 있었을 뿐이야.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대학도 못 가고 하니 학력도 없고 인맥도 없어서 돈을 벌려면 할 수 있는 게 수공업뿐이었으니까.”원아정은 그녀의 말이 믿기지 않았지만 그 외에는 염정아가 또 무슨 쓸모가 있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염정아의 집안은 너무 평범했고 심지어 부모님도 모두 돌아가셔서 그녀의 곁에는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는 다섯 명의 자녀뿐이었다.원아정의 눈에는 혐오감이 감돌았고 특히 길가에 불쌍하게 웅크리고 있는 염정아의동생을 봤을 때 혐오감이 더욱 깊어졌다.하필이면 이때 염정아의 동생이 일어서면서 원아정한테 물었다.“저 언제 집에 갈 수 있죠?”그는 더 이상 제국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재미도 없고 가장 중요한 건 누나를 화나게 했으니 혹시나 누나가 평생 그를 안볼까 봐서 걱정이었다.동생의 얼굴에는 초조함과 억울함이 가득했고 빨리 집에 가서 아이들을 돌보고 싶었다.원아정은 자신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고생했는데 결국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하자 염정아의 동생을 순순히 보내드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끊임없는 차량이 왔다 갔다 하는 도로를 가리키며 말했다.“저기 안으로 들어가서 걸어 다니다 보면 누군가 널 집으로 데려다줄지도 몰라. 저거 봐, 차가 저렇게 많은데 너희 집 방향으로 가는 차가 당연히 있지 않겠어? 널 집까지 데려다줄 사람도 무조건 저기 있을 거야.”염정아 동생의 눈에는 순간 희망의 빛이 반짝였고 그녀의 말을
염정아는 그들의 집에서 제원까지 오려면 거리가 엄청나게 멀었고 동생은 멀리 외출한 적이 없어서 표는 어디서 어떻게 사고 차는 또 어떻게 타야 되는지도 모를 텐테 그냥 애교부리며 농담한다고 생각했다.“내가 말했지. 내가 갈거닉가 그때까지 집에서 애들 잘 돌보라고. 안 그럼 나 화낼거야. 알지? 화내면 널 버릴 수도 있다는걸.”동생이 살면서 제일 무서운 일은 염아정에게 버림받는 일이었고 그 말에 당황한 표정을 하며 대답했다.“아니야, 나 집에서 애들 잘 돌보고 있을 테니까 절대 버리면 안 돼.”염정아는 전화기 너머로 동생의 당황함을 눈치채고 다시 달래기 시작했다.”말만 잘 들으면 안버릴테닉가 걱정하지 마.”“알았어. 나 누나 말 잘 들어. 진짜 잘 들을 거야.”전화를 끊은 후, 화가 치밀어 오른 원아정은 바로 동생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원아정은 동생을 통해 염정아를 불러내여 공지민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얻어 내려 했지만 동생은 그렇게 통화를 끊어버렸다.동생은 뺨을 맞고도 이유를 몰랐고 감히 되받아치지도 못했다.원아정은 힘들게 이 남자를 불러 제원까지 데리고 온 것만 해도 억울함에 미칠것 같았는데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니 더 화가 치밀었다.원아정은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고 계속하여 염정아의 동생을 위협했다.“누나한테 다시 전화 걸어 꼭 나오라고 해요. 안 그러면 나도 당신 상관 안 할 거예요. 이렇게 큰 제원에서 누나한테 연락 안 하면 당신은 먹지도 못하고 길바닥에서 그대로 죽어 버릴 수 도 있어요. 그렇게 되면 사랑하는 누나도 영원히 못 볼 거 아니에요.”동생은 조금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대로 죽는 것보다는 누나한테서 버림받는 것이 더 두려워서 더는 연락 하지 않기로 했다.원아정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바로 저절로 염정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염정아는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아까 물어보지 못한 말부터 했다.“너 누구 휴대전화로 연락한 거야? 왜 번호가 틀려?”원아정은 음험하고 악독한 소리로 말했다.“염정아, 잘 들어. 네
아래층 마트 이모는 몇 년 동안 줄곧 그들 남매를 돌봐 주었고 염정아가 사람을 시켜 동생을 데리고 제원에 오라고 한다니 살짝 의심은 생겨 걱정 되었지만 원아정의 깔끔한 옷차림을 보더니 돈이 모자랄 같지는 않았고 게다가 지적장애인 사람을 데려다 할 수 있는 것도 없을 테고 하물며 염정아의 친구이기도 하여 안심되었다.“이모, 이건 우리 집 열쇠에요. 제가 없는 동안 우리 집에 들러 애들 밥해줄 수 있어요?”마트 이모는 염정아가 좀 전에 집에 돌와왔을 때 물건도 많이 사들였고 돈 씀씀이가 큰 것으로 보아 제원에서 많은 돈을 벌어 동생을 데려다 이틀 정도 놀아 주려고 하는 거로 생각하여 이 상황이 잘못되진 않은 것 같았다.“그래, 알았어. 근데 갔다 일찍 돌아와야 해.”“네, 고마워요 이모.”동생은 조금 모자라지만 항상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그는 인사를 마치고 옷 두 벌을 챙겨 원아정을 따라 떠났다.그들은 자가용으로 움직였고 동생은 처음 길을 떠나 보는 거라 물음이 끊기질 않았다.원아정의 인내심은 한계에 도달했고 그런 동생을 차갑게 대하기 시작했다.“누나가 왜 갑자기 그렇게 큰돈을 벌어 올 수 있는지 생각 안 해요? 당신을 집에 두고 밖에서 다른 남자랑 있는 거잖아요. 당신은 바보라서 침대에서 만족하게 해줄 수 없으니 나가서 다른 정상적인 남자를 찾은 거 아니에요? 그 남자랑 있으면서 당신을 바보라고 비아냥거렸을지도 모르잖아요.”동생은 원아정의 말뜻은 전혀 몰랐지만, 염정아는 절대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찾을 사람은 아니라는 것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원아정의 말을 듣고 동생은 더 이상 물음을 던지지 않고 창가에 기대어 빠르게 움직이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입가엔 미소를 짓고 있었다.원아정은 누나가 바람 피고 있다는 말까지 하며 그렇게 자극했는데도 웃고 있는 동생을 보니 바보인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이튿날 밤이 되자 그들이 앉은 차는 드디어 제원에 도착했다.원아정은 다시 거지로 위장해야 하기에 동생더러 같이 거지 옷차림을 하게 하고 여
온시환이 완벽하게 변장한 탓에 누구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고 그렇게 쉽게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공지민은 계속 별장에 머물러 있었고 매일 연승혁의 안부를 물으면서 기다리고 있었다.통화 너머로 공지민은 연승혁이 지금 많이 초조해진 것을 느꼈으나 그 정도로는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했다.공지민은 항상 자신의 계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해 왔지만, 그것이 그렇게 빨리 찾아왔고 무정하게 무너뜨리게 할 줄은 몰랐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줄곧 원아정을 찾고 있었고 그와 원진이 원아정을 해외로 보내겠다고 한 후 원진의 부하들도 그녀를 찾고 있었다.하지만 원진은 원아정이 죽든 살든 별다른 관계가 없었기에 큰 신경을 써서 찾은 것은 아니였다.원아정은 항상 거지들 속에 숨어 지냈고 그동안 훔친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있어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원아정은 기억 속에 있는 몇 개의 번호에 연락하여 일일이 도움을 청했고 다행히 정보도 얻어 냈다.그것은 당시 공지민에 의해 숨겨져 있던 사람이 발견되었고 그 별장으로 배달하던 배달원이 또 다른 곳에서 염정아를 보았다는 것이다.소식을 들은 원아정은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염정아의 집으로 향했다.그 배달원은 제원에서 배달하다가 며칠 전에 돌아왔는데 마침 식당에서 또다시 염정아가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전했다.원아정의 거지 차림에 배달원은 약간 꺼림칙했지만 그래도 손 크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있는 그대로 말해 주었다.“그 별장에 몇 번이나 배달해서 얼굴을 다 기억하고 있어요. 그때 그녀가 일부러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매일 집에만 있는 것 같아 보여 부잣집 도련님의 내연녀일 거로 생각했어요.”배달원의 말을 듣고 원아정은 바로 돈 주고 사람 찾아 염정아의 정보를 알아봤다.알아본 데 의하면 염정아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고 심지어 아주 가난한 사람이었다.그런데 왜 공지민은 제원에서 염정아를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자, 원아정은 자신이 찾아낸 정보 자료들을 정리해 보다가 다
온시환은 바로 인사를 건네지 않고 주방으로 들어가서 요리사의 일을 거들었지만, 눈길은 항상 거실에 있는 공지민 한테로 향했고 채소를 다 씻었을 때 공지민은 혼자 위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온시환은 주방 사람들에게 핑곗거리를 대고 공지민 뒤를 따라 올라갔다.온시환은 변장에 가발까지 쓰고 렌즈 색마저 바꿔버린 자신을 공지민이 알아보지 못하자 그녀의 손목을 잡고 귓가에 대고 낮은 소리로 불렀다.“지민아.”공지민은 멈춰 선 대로 낯선 얼굴을 보며 몇 초 동안 뜸 들이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온시환?”“응, 나야.”온시환은 카메라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말하기 시작했다.“너 연승혁의 별장에서 뭐 하고 있는 거야? 혹시 다른 계획이라도 있는데 나한테 말해주지 않은 거니?”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기억을 잃은 것도 아니었고 온시환을 잊은 것도 아니였다.그녀가 여기 별장에 들어오게 된 것도 이상우에게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공지민은 어떤 대가를 치르던 연승혁을 죽이고 구은우의 복수를 하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었다.애초에 온시환의 얼굴의 점이 구은우를 닮은 것도, 가슴에서 뛰고 있는 심장도 구은우의 심장이 었기에 온시환과 밤을 보낼수 있었고 그에게 잘해 준것도 구은우를 느끼고 싶은 작은 위로의 감정이었을 뿐이었다.이제 공지민은 연승혁에게 복수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자연스레 온시환과의 관계를 잠시 잊고 있었지만 온시환이 먼저 갖은 방법을 다해 찾아 올 줄은 몰랐다.“지민아, 너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야? 무슨 계획이라도 있으면 공유하자고 하지 않았어? 연승혁이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너도 잘 알고 있자나. 니가 지금 어떤 생각으로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랑 함께 돌아가야 해. 내가 보호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마.”온시환이 같이 나가려고 공지민의 손을 끌어당겼지만, 공지민은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그런 공지민의 행동에 온시환은 당황스러웠지만 그녀의 냉정한 눈빛을 보니 더욱 당황스러웠다.“온시환 씨, 이제 돌
공지민은 며칠 동안 별장에서 먹는 것 빼고는 드라마를 시청하거나 별장 주변 화원을 구경하며 조용하게 있었다.고용인 아줌마는 거의 그림자처럼 공지민을 따라다녔고 매일 있었던 일들을 연승혁에게 보고했다.연승혁은 이틀이면 돌아갈 수 있을거로 생각했었는데 이번 일은 좀 까다로워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다.연승혁은 운 좋게 살아남았던 시한폭탄 같은 그 사람을 빨리 찾아 죽여야만 했지만, 부하들의 추적에 의하면 이 사람은 동쪽에서 신호가 잡혔다가 얼마 안돼서 다시 서쪽에서 신호가 잡히고 있었다.부하들이 전문적인 기술자가 아니었더라면 연승혁은 자신이 지금 그 사람에게 농락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한 사람이 그토록 짧은 시간에 동쪽에서 서쪽까지 그 먼거 리를 움직일 수 있었을가.이것은 분명 그를 제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시간 끌려는 작전인 듯했다.연승혁은 원수가 너무 많아 누가 저지른 일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초조해 지기 시작했지만, 공지민의 일거일동을 보고 받을 때마다 비로소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저녁 무렵, 공지민은 직접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어 원망의 말투로 말했다.“오빠, 왜 아직도 안 와요? 나 정말 심심해 미칠 것 같은데 사람 시켜 나 좀 데리고 놀라고 하면 안 돼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줄곧 별장에서 연승혁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연승혁은 하루면 일이 해결될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며칠을 지체하게 되어 공지민 홀로 집에서 기다리게 되었다.공지민은 이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예전에 난 직업도 없이 오빠가 날 먹여 살린 거예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아무런 의욕이 없이 먹기만 했었고 누구도 먼저 연락해 찾은 일도 없어서 자신이 직업도 없었을 거로 생각했다.만약 출근하던 사람이 었으면 며칠 동안이나 사라졌는데 사장님이 직원들더러 연락해보라고 하지 않았을까.연승혁은 사람을 시켜 공지민을 데리고 밖에 나가 바람도 씌우게 하고 싶었지만 온시환이랑 부딪치는 일이 생길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온시환은 거의 매일 열 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