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태승은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심지어 반승제를 쫓아내고 성혜인하고만 저녁을 먹고 싶었다.그러나 가장 원하는 것은 두 사람이 화해하는 것이다.비록 두 사람을 합치려고 애쓰지 않겠다고 성혜인에게 약속한 적은 있지만, 반승제야말로 친손자이니 무엇보다 손자에게 가장 좋은 임자가 생기를 원한다.하여 비아냥거리며 딱 한 마디만 던지고 위층을 가리켰다.“서씨 가문 어르신이 나더러 산수화 한 폭만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혜인아, 승제야, 둘이 같이 그려 봐. 저녁 식사까지 아직 2시간 정도 있으니, 같이 그리면 금방 될 거야.”성혜인은 주영훈의 제자이며, 주영훈이 가장 능한 분야도 바로 한국화이다.둘은 같이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아주 예전에 서천에 있을 때, 성혜인은 반승제가 그림 그리는 데 일가견이 있으며 심지어 자기와 이해하는 점이 같다는 것을 발견했었다.반태승이 이러는 이유도 아마 두 사람을 합치기 위해서 일 것이다.알고 있으면서도 성혜인은 거절하기 힘들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그러자 반태승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서재에 이미 준비해 두었다. 승제가 내 서재 위치를 알고 있으니 같아 가 보거라. 서재에서 그리면 되고 다 그리고 나면 사람을 불러 거두라고 하마.”반승제는 반태승의 정성에 저버리지 않고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성혜인도 하는 수 없이 뒤따라 올라갔다.그녀는 반태승의 서재에 와서 본 적이 있었고 평범한 인테리어의 벽에는 거의 책으로 도배되어 있었다.중간에 테이블은 엄청나게 크며 화지가 세팅되어 있고 그 위에는 낙관도 쓰여 있었다.서씨 가문 어르신에게 줄 선물이 틀림없어 보였다.성혜인은 옆에서 필요할 물감들을 유심히 보았는데, 이번에 그릴 그림은 한국화이고 물감은 거의 다 한색 계열이다.옆에 붓걸이에는 화필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데, 미리 준비해 둔 것이 맞다.하지만 성혜인은 무엇을 그려야 할지 몰라 저도 몰래 반승제를 바라보았는데, 마침 반승제도 성혜인을 보고 있었다.두 사람 주위의 환경은 고풍스럽기 그
전에는 성혜인에 대한 감정을 제대로 보고 싶지 않았고 조사하기도 귀찮아 그로 인해 잘못을 많이 했다.최근 들어 성혜인 사촌 오빠의 일로 두 사람 사이는 한 걸음 더 멀어졌으니, 지금 반승제를 상대하지 않는 것도 마땅하다.갑작스러운 그의 동작과 말에 성혜인은 온몸이 굳었지만, 곧장 반승제의 손을 밀었다.들고 있는 붓에 먹물이 화지에 튈까 봐 힘껏 밀지는 못했다.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은 섬세함이 생명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림 전체를 망칠 수 있다.“반승제 씨, 심심하면 저 좀 방해하지 말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든지 해요.”반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성혜인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아무리 말해도 듣지를 않자, 아예 신경 쓰지 않고 남은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똑똑.”노크 소리가 들려왔는데, 아마 하인이 마실 물을 갖다 주러 왔을 것이다.성혜인은 얼른 반승제를 밀어 버렸지만, 반승제는 껌딱지처럼 다시 달라붙었다.예전부터 그녀는 반승제에게 아이다운 심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고집이 세고 기분이 오락가락하며 외부 사람에게 더없이 차갑다.“놔요.”반승제는 뒤에서 성혜인을 안고 있었는데, 아쉬워하며 손을 떼고 옆에 있는 의자로 갔다.그러고 나서 성혜인이 하인에게 소리를 냈다.“들어 오세요.”역시나 하인이 맞았고 쟁반에 차 두 잔을 들고 있다.“승제 도련님, 혜인 아가씨, 고생이 많으십니다. 회장님께서 가져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차 두 잔이 테이블에 가지런히 놓이고 하인은 인사를 마치고 물러났다.성혜인은 손에 들고 있던 붓을 깨끗이 씻고 좀 큰 붓으로 바꾸고 싶었는데, 반승제가 또다시 다가왔다.“도와줄게.”반승제는 이미 사용한 붓을 빼앗아 옆에 있는 맑은 물로 씻기 시작했다.성혜인도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아 다른 붓으로 그림을 그렸다.그러다가 옆에 인기척이 있는 걸 느끼게 되었는데, 곧 그림자도 시선으로 들어왔다.반승제가 다시 다른 붓으로 옆에서 돕기 시작한 것이다.다른 부분을 떠나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은
“아니에요.”성혜인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거절했다.“여기서 할아버지와 이야기도 나누고 그래요.”말을 마치고 성혜인은 주저 없이 대문으로 향해 걸어갔다.그러자 반승제는 양복 외투를 들고 빠르게 따라갔다.성혜인은 정말로 돌아갈 때도 그와 한 차로 가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대문 밖으로 나가고 보니 자기 차를 몰고 온 것이 아니기에 지금 눈앞에는 반승제의 차와 고택의 차밖에 없다.둘 다 싫다면 성혜인은 걸어서 돌아가야만 한다.이 구역에는 택시가 단 한대도 없기 때문이다.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반승제는 외투를 성혜인의 어깨에 걸쳐주었다.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는 참이어서 밖은 좀 쌀쌀했다.“그냥 입고 있어. 바래다줄게.”거절을 용납하지 않는 말투였다.성혜인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수석에 앉았다.반승제가 직접 운전을 했는데, 엑셀을 밟자마자 전화가 울렸다.차를 몰아야 하기에 그는 발신자 번호도 체크하지 않고 스피커를 눌렀다.“여보세요.”그러자 여전히 애교가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승제 오빠, 나 안 보고 싶어? 왜 전화 한 통이 없어? 난 오빠 보고 싶단 말이야.”처음으로 걸려 오는 전화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반승제는 전화를 단번에 끊어버리고 곁눈질로 성혜인을 바라보았다.성혜인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조금 전에 걸려온 전화에 대해서 할 말이 없었다.하지만 반승제는 해석하느라 바빴다.“아마 스팸 전화일 거야. 모르는 사람이야.”성혜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고 한참이 지나서야 대답만 하고 말았다.“네.”반승제는 양손으로 핸들을 꼭 잡고 조용하고 외지고 조용한 곳에 정차했는데, 주위에는 그들 말고 아무것도 없었다성혜인은 순간 경계심을 불러일으켰으나, 차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뭐 하자는 거예요?”반승제는 좌석을 뒤로 당겼고 앞자리에 공간이 제법 많이 생기게 되었다.그는 단번에 성혜인을 확 끌어당겨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네? 그게 다야? 너 진짜
거대한 좌절감에 숨까지 막혀왔다.“몰라요.”성혜인의 대답에 반승제는 또다시 문득 차분해졌다.그는 성혜인을 지그시 바라보며 다른 남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그제야 숨이 쉬어지면서 성혜인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그럼, 나랑 해보자.”긴장이 풀리자, 목소리까지 한껏 부드러워졌다.“대표님은 사실 저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요.”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성혜인은 반승제가 콧방귀를 뀌는 것을 들었다.밤거리의 등불은 그리 밝지 않지만, 하얀 피부로 타고나서 어두운 거리에서도 빛이 났다.반승제는 고개를 떨구고 주위에 행인이 있든 없든 아랑곳하지 않고 지그시 성혜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부드럽기 짝이 없다.“성혜인, 내가 널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는데, 그 사실을 너 스스로가 부정하고 싶은 거야. 내가 널 아무리 좋아한다고 말해도 넌 가장 끝에서 날 부정하고 있어. 나를 대면하고 싶어 하지 않고 우리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을 외면하고 싶은 거야. 나를 뿌리치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래서 조금 전에 성혜인이 했던 말은 자기에게 하는 말이라고 간주하면 된다.반승제는 우습기도 하고 다소 아이러니하기도 했다.“내가 널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거야.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 거였어.”성혜인은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보더니 핑계를 찾았다.“많이 늦었어요. 그럼, 먼저 들어가 볼게요.”몸을 돌렸지만, 반승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덧붙였다.“너한테 반지 준 남자 누구야? 그 남자 좋아하는 거지? 사실 좋아하는 사람 있으면서도 알려주고 싶지 않았던 거 아니야? 나하고 결혼한 이유도 단지 너희 가문 위기를 넘기기 위해서잖아. 나하고 자는 것도 내가 널 만족시킬 수 있어서 자는 거잖아.”“성혜인, 너 생각보다 무서울 정도로 차분해. 내가 널 찾아가지 않으면 넌 절대 날 찾아올리가 없어. 내가 좋아한다고 수천 번이나 말해도 넌 항상 생각도 하지 않고 거절
성혜인은 반승제의 손을 뿌리쳤다.전에 똑같은 말을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혜인아, 앞으로 너에게만 잘해줄게.”그 사람은 성혜인에게 이렇게 말했었는데, 결말은 그렇지 않았다.태어나서 처음으로 반항했었고 그 사람과 연애하고 싶었었다.그 사람은 성혜인의 반골이며 소리 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살며시 성혜인의 꽃다운 청춘에 스며들었다.지금 반승제에게서 똑같은 말을 들으면서 순간 착각이 들어 저도 몰래 주위를 훑어보았다.“대표님, 많이 늦었네요. 어서 돌아가 보세요.”반승제는 또 한 번 거절당했다.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지폈다.“응. 담배 한 대만 피우고.”성혜인은 더는 말하지 않고 서둘러 병원으로 들어갔다.대문으로 들어가려던 참에 고개를 돌려 반승제를 한 번 바라보았다.그는 지금 차에 기대어 있는데, 서 있는 위치도 기가 막히다.절반은 밝고 다른 절반은 어두우며 손가락 사이에 희미한 담배 불빛이 번쩍이고 있다.반승제도 고개를 돌려 성혜인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혜인은 그에게 들킬까 봐 얼른 고개를 돌려 안으로 걸음을 재촉했다.…한서진의 병실 안에서 송아현은 이미 두 시간이나 울었다.“아저씨, 제가 잘못했어요. 미안해요.”한서진은 지금 팔에 깁스를 했고 실려 왔을 때는 손이 부러진 상태였다.송아현은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울부짖었고 한서진은 머리가 지끈거렸다.“괜찮아.”“이게 어떻게 괜찮아요? 모두 제 잘못이에요. 그 여자만 때리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을 텐데, 그 여자 배경이 엄청 나다고 들었어요.”송아현은 침대에 앉아 있었는데, 그만 참지 못하고 한서진의 품으로 뛰어들었다.한서진은 그만 온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부드러운 한 곳이 자꾸 한서진의 팔에 닿았기 때문이다.하지만 아직도 울고 있는 송아현이라 일부러 그런 거 같지는 않다.송아현은 인제 의젓한 성인이고 두 사람은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하여 한서진은 단호하게 송아현을 밀쳐버리며 눈살을 찌푸렸다.“아현아, 이 일은
한서진은 송아현 일가의 일에 관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송아현 엄마의 성격이 어떠한지 그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그러나 송아현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한서진은 저도 몰래 짜증이 피어오르며 심지어 시간을 돌려 그때의 송아현 엄마를 말리고 싶었다.이렇게 하면 아이에게 상처를 줄 것인데, 왜 잘못을 거듭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부모 중의 어느 한쪽이 바람을 피우던 아이에게 돌아가는 상처가 가장 크다.만약 혼인에 충성을 할 수 없다면, 쉽게 혼인 서약을 맺어서는 안 된다.한서진은 이 부분에 대해서 일찍이 꿰뚫고 있어 혼인은 한낱 부질없는 것으로 생각했었다.“아저씨도 그 사람이 하는 말 믿는 거예요?”송아현은 그의 옷자락을 잡으며 두 눈을 부릅떴다.한서진은 덤덤하게 송아현의 손을 떼어 버렸다.“좋은 엄마셨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중요하지 않아. 가장 중요한 건 너에게 잘해 주셨다는 거야.”성혜인은 옆에서 이 말을 듣고 있을 때, 한서진이 사건이 내막에 대해서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다만 그 사실은 가시덤불이라 선뜻 뱉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성혜인은 손을 들어 송아현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했다.“아현 씨, 일단 돌아가서 좀 쉬세요. 촬영도 계속해야 해요. 한 매니저님하고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의논해 볼게요.”송아현은 고개를 떨군 상태로 일어서서 재빠르게 한서진의 볼에 뽀뽀했다.한서진은 순간 온몸이 굳어지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정신을 차리고 나니 화가 치밀어 가슴이 펄떡펄떡 뛰고 농락당한 것만 같았다.“송아현!”하지만 송아현은 눈 깜짝할 새에 멀리 도망쳤다.한서진은 온몸을 파르르 떨며 힘껏 얼굴을 문질렀고 주먹을 꽉 잡아당겼다.얼굴은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졌으며 험상궂기 그지없었다.성혜인은 줄곧 그를 이성을 잃지 않은 침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그도 이성을 잃는 순간이 있을 줄은 몰랐다.“성 대표님, 추한 모습 보여서 죄송합니다. 저도 아현이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요.
성혜인은 침묵을 유지하며 한서진이 스스로 아픈 상처들을 일일이 파헤치는 것을 듣고 있었다.그리고 마침내 비혼주의를 강조하는 한서진의 주장을 이해하게 되었다.그가 생각하는 혼인에는 배신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서진 씨, 아현 씨는 지금 연예인이고 앞으로 다른 연예인과 스캔들도 많이 낼 것인데, 괜찮아요?”“연예인이라면 모두 겪어야 하는 과정입니다.”한서진의 말투는 덤덤하기 그지없었다.“그것마저 감당할 수 없다면, 이쪽 바닥을 일찌감치 떠나는 것이 좋을 거예요.”마침 병실로 돌아온 송아현은 덤덤하게 뱉은 한서진의 말 두 마디 듣게 되었다.송아현은 손끝으로 문손잡이를 잡고 있었는데, 온몸이 굳어버렸다.그들에게 들킬까 봐 옆으로 몸을 숨기고 들끓는 감정을 추스르고 나서야 웃으며 문을 밀었다.“아저씨, 사장님, 얘기 다 하셨어요? 깜빡 놔두고 간 게 있어서요.”송아현은 휴대 전화를 가리키고 빠르게 가지고 나가며 손을 흔들었다.“지금 당장 촬영하러 갈게요. 그리고 그 일은 두 분께 잘 부탁하겠습니다. 참, 미안하게 됐어요. 그 사람이 저를 아무리 때려도 절대 되받아치지 않을게요.”말을 마치고 병실 안에 있는 두 사람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자리를 황급히 떠났다.두 사람은 송아현이 둘 사이의 대화를 들었다는 것을 모른다.송아현이 핸드폰을 놓고 간 것도 한서진에게 뽀뽀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당황해하며 로비까지 달려 나오고 나서야 휴대 전화를 놓고 나온 것을 발견했다.한서진은 결코 틀린 말을 한 것이 아니다.다른 사람과 스캔들이 나면서 이슈를 내는 것도 연예인이라면 반드시 겪어야 하는 일이다.한서진은 송아현의 남자 친구가 아니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용기 내여 건넨 뽀뽀도 한서진의 마음을 흔들리게 할 수 없었다.역시 짝사랑은 혼자만의 난리 통이다.지금은 짝사랑이라고 할 수도 없다.전에 한서진에게 고백했었지만, 술에 취해 함부로 뱉은 말로 간주했을 따름이다.송아현은 깊이 숨을 내쉬며 눈을 닦고 다시 얼굴에 미소를 띠
그 누구라도 자기에 관한 이러한 막말을 보게 되면 기분이 나쁘다.하지만 성혜인은 그냥 흘겨보며 다른 소식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편안하게 침대에 누웠다.…한편, 어느 한 술집.반승제 앞에는 빈 술병이 여러 개나 놓여 있으며 취기가 올라와 얼굴이 약간 벌겋다.온시환은 지금 마이크를 잡고 열창하고 있다.노래가 끝나고 마이크를 내려놓을 때, 반승제는 이미 혼자서 보드카 한 병을 다 마셔버렸다.“좀 같이 노래하면서 놀라고 부른 거야. 혼자 청승맞게 술만 마시라고 부른 거 아니라고.”온시환은 반승제의 손에 있는 잔을 확 빼앗아 테이블에 놓았다.“왜 그래? 너네 혜인이 때문에 속상해?”그 말에 서주혁과 진세운도 반승제에게로 눈길을 돌렸다.이들 중에서 진세운이 가장 바쁘며 대다수 시간은 병원에 몸을 박히고 있다.오늘 어렵게 시간이 되어 자리를 함께하게 된 것이다.반승제는 옷깃의 단추를 풀며 두 눈 사이로 짜증이 지나갔다.“고백했는데, 차였어.”온시환은 자기 잔을 들고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그게 정상 아니야? 네가 했던 일을 생각해 봐. 만약 네 고백에 승낙한다면, 그건 병원으로 가봐야 할 정도야.”진세운은 양복이 아닌 하얀색으로 된 캐주얼한 코트를 입고 있다.온시환의 말을 들으면서 문득 아주 예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전에 JM에서 손을 좀 봐달라고 하면서 나를 부른 적이 있어. 그때 성혜인 씨가 손을 다쳤는데, 승제가 윤단미 씨부터 치료하라며 그랬어. 내가 그때 조금만 늦게 갔으면, 성혜인 씨 다시는 손 못쓰게 됐을 거야. 그림 그린다고 하지 않았어?”순간 쓰나미가 밀려오는 듯했다.반승제는 손끝까지 움켜쥐더니, 손을 들어 미간을 풀었다.그리고 온시환은 깊이 숨을 내쉬었다.“윤단미 씨는 페니가 성혜인 씨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거야. 일부러 이런 일을 펼치면서 승제를 미워하게 한 것이라고. 아주 제법이지 않아? 성혜인 씨 지금 쓰레기처럼 널 보고 있잖아.”“쓰레기?”반승제는 말투가 다소 차가웠지만, 온시환의 말이 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