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굵은 빗줄기가 땅을 적시는 바깥과 달리 조용한 차 안에 성혜인의 목소리가 뚜렷하게 울려 퍼졌다.반승제의 손가락이 순간 허공에서 멈춰 섰다. 이상하다는 눈빛이었다.성혜인에게는 그저 가벼운 칭찬이었을 뿐, 그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잠시 명상의 시간을 가지고자 눈을 감았다. 그때, 차가 순간 덜컹거렸다.그녀의 머리가 의도치 않게 반승제의 어깨에 안착했다. 두 사람의 사이는 순식간에 가까워졌다.쏟아지는 빗물에 도로가 미끄러워져 차가 훨씬 막혔다.그렇게 30분이 지나고 나서야 도로에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성혜인은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함을 피하고자 내내 눈을 감고 얕은 잠을 청했다.요즘 수면의 질이 좋지 않아 피로함이 어깨를 짓누르는 데다 빗소리까지 울려 퍼지니 잠들기 딱 좋았다. 성혜인은 자신도 모르게 잠에 들고 말았다.앞좌석에 앉아있던 심인우는 뒷좌석의 분위기를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바로 그때, 사이드미러로 교통법을 위반한 차가 불쑥 나타났다.그대로 반승제가 타고 있던 차와 부딪혔고, 차체가 앞으로 강하게 휘청이고 말았다.성혜인은 순식간에 한쪽 창문으로 쏠렸지만, 반승제가 재빨리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그의 힘에 성혜인은 그대로 반승제의 팔을 따라 움직였다.깊은 잠이 들었던 성혜인은 마치 독특한 촉감의 ‘베개’를 밴 기분이었다. 게다가 온기까지 느껴지니 무의식적으로 그 ‘베개’를 껴안으면서 편한 자세로 바꾸었고, 이내 다시 잠에 들었다.반승제는 그녀의 팔을 잡았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성혜인이 품에 안기자, 알 수 없는 기운이 때마침 한곳으로 몰렸다.그곳은 바로, 남자에게 가장 부추겨서는 안 될 곳.동공이 커진 반승제는 고개를 숙여 성혜인에게 시선을 돌렸다.기다란 머리카락이 옆으로 흩어지면서 부드럽고 작은 얼굴의 옆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눈가에는 옅은 다크서클이 자리 잡고 있었다.어둑한 차 안으로 비친 옅은 불빛이 마침 성혜인의 얼굴을 비췄다. 주위가 조용하기까지 하니 그녀의 가녀린 모습에 심장 소리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강아지 짖는 소리와 함께 멀리서 새하얀 털 뭉치가 성혜인의 주변을 신나게 돌았다.그녀는 허리를 숙여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겨울아. 요즘 내가 잘 못 와봤지? 말 잘 듣고 있었어?”앞치마를 두른 유경아가 건물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50세 정도 되어 보이는 온화하고 꾸밈없는 여성이다.“사모님 안 계시는 동안 얼마나 말썽을 부리던지. 어제는 연못에서 물고기도 잡았다니까요. 물고기를 전부 물어 놓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잡아서 삶아줬어요.”성혜인은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겨울이의 머리를 힘껏 쓰다듬었다.“식탐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독일의 목양견인 겨울이는 6살 정도 되었는데, 지금까지 줄곧 성혜인과 함께였다.성혜인의 아파트에서는 강아지를 키울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마침 반태승이 이 별장을 선물해 주어 아주머니가 이곳에서 겨울이를 대신 돌봐 주고 있다. 성혜인은 평일에 올 수 있는 날이 극히 드물었다.성혜인은 겨울이와 조금 더 시간을 보내다 캐리어를 끌고 로비 안으로 들어섰다.유경아는 그녀의 모습에 다소 놀란 듯했다.“사모님. 드디어 여기서 살기로 결정하신 거예요?”“아파트에 도둑이 들었어요. 그래서 일단 여기서 며칠 묵으려고요.”유경아의 놀란 눈이 더 커졌다.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경찰에 신고는 했어요? 여자 혼자 밖에 사는 건 원래 위험하잖아요. 앞으로 이곳에서 사는 건 어때요? 회장님께서도 제게 사모님을 잘 돌보라고 하셨었는데, 3년 동안 이곳에 통 안 오시니 제가 회장님께 보고를 드리기가 얼마나 난감한데요.”“새로운 집을 찾을 때까지는 이곳에 있어야 할 것 같아요.”성혜인은 한 손으로 겨울이를 놀아주면서 빙긋 웃었다.바닥에서 꼬리를 미친 듯이 흔드는 겨울이의 눈망울이 반짝반짝 빛났다.한편.반승혜는 성혜인이 떠나고 난 후 곧바로 반태승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승제야. 이미 수속 끝났다. 곧 돌아갈 수 있겠구나.”반승제는 손으로 미간을 주물렀다.“알겠어요. 몸조심하시고요, 할
한지은은 영악한 여자다. 반승제가 제원에 돌아온 이후 줄곧 호텔에서 묵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와의 사이가 좋지 않아 한 달에 몇 번 만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부잣집 부부가 이렇게까지 소원해진 상황이라면, 한지은이 BH그룹의 며느리와 마치 아는 사이처럼 거짓말을 하더라도 반승제는 그대로 믿을 것이다. 성혜인을 골탕 먹일 수만 있다면 이쯤이야.발걸음을 우뚝 멈춘 반승제의 미간에 미세한 경련이 일어났다.명목상의 ‘아내’라는 그 사람에 대한 반감이 더 생겨났다. BH그룹의 며느리라는 이유로 밖에서 콧대를 세우고 다닌다는 말 아닌가.“페니 씨가 힘들게 하는 일 있으면 언제든지 저희 대표님께 디자이너 변경 요청하세요. 예전에도 고객의 부인이 회사까지 찾아와 페니 씨 대신 다른 사람으로 바꿔 달라고 하는 사건이 있었거든요.”한지은의 말에서 진심이 우러났다.반승제는 그저 무심히 그녀를 한 번 쳐다볼 뿐이었다.“네.”그는 단답으로 한 마디를 남기고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계속 그의 뒤를 쫓아가기 난감해진 한지은은 표정이 굳어버렸다.‘뭐, 어쨌든 이간질은 성공이네.’반승제가 성혜인에게 불만을 갖게 된다면 작업실에서 성혜인을 대신할 자격이 되는 사람은 과연 누구겠는가?한지은은 마음이 울렁거렸다. 자신에게도 기회가 생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반승제 앞에서 얼굴만 몇 번 더 비추면...”이제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사라지는 반승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한지은의 뺨이 붉어졌다.한편, 성혜인은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가 반승제의 귀에 들어갔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그녀는 원반을 집어 하늘 높이 던졌다. 그러자 겨울이가 잽싸게 달려가 입으로 물어 성혜인에게 돌아와서는 그녀의 다리 곁을 맴돌았다.“보채기는.”성혜인은 겨울이의 머리를 툭 쓰다듬어 주고 다시 한번 원반을 던졌다.그때, 원반을 던진 방향에서 누군가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놀란 성혜인이 황급히 소리쳤다.“겨울아. 돌아와!”하지만 이미 질
성혜인은 바닥으로 시선을 떨궜다. 불필요한 언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반승제와의 계약 기간 동안 반씨 집안에서 조용히 하루하루를 보내며 종종 반태승에게 얼굴을 비추는 정도만 하고 싶었다. 반씨 가문의 다른 가족들과의 충돌은 최대한 피하면서 말이다.게다가 반승제에게 신경을 많이 쓰는 백연서는 성혜인과 논쟁을 할 때마다 갈수록 더 물고 늘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다 보니 백연서가 이것저것 따지더라도 성혜인은 어떠한 반박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백연서는 2층으로 향했다. 곧이어 안방에 있는 침대를 발견하고는 눈살을 구겼다.“승제가 들어오면 이 방은 승제가 사용하고 너는 게스트룸에 묵어야겠다. 승제랑 잘해볼 생각 마라. 회장님 병세가 호전되면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 명심해.”온갖 트집을 다 잡고 나서야 백연서는 옆에서 말없이 서 있던 그녀가 눈에 밟혔는지 눈썹을 들썩였다.“듣고 있는 거니?”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어머님. 또 주의할 게 있을까요?”백연서는 또다시 가슴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얘랑 대화를 했다하면 말문이 막히네.’짜증을 풀 곳이 없자 트집을 잡으려던 마음도 사라져 버렸다. 백연서는 유경아에게 당부할 점을 읊었다. 특히 음식 측면에서 각별히 주의해달라는 말을 남겼다.유경아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백연서가 떠나고, 유경아는 그제야 지친 얼굴로 성혜인을 바라봤다.“사모님. 겨울이를 정말 보내시게요?”“아주머니. 별장 뒤편에 큰 집 하나 비어 있지 않았나요? 승제 씨 오면 일단 겨울이를 그 안에 두는 게 좋겠어요. 겨울이는 너무 활발해서 친구에게 맡기면 피해만 주게 될 거예요.”겨울이를 좋아하던 유경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랫동안 겨울이를 돌보면서 정이 많이 들었었다.“좋아요. 우선 겨울이 장난감을 그 방에 갖다 둬야겠어요.”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연서의 잔소리에 이미 기분이 언짢아진 상태였다. 게다가 반승제와 한집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새
성혜인은 자리에 우뚝 서 무표정으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성휘의 마음이 저쪽으로 기운 게 아니라고 끝없이 자신을 설득하려 했다. 그녀의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줄곧 성휘는 성혜인에게 충분히 잘해줬으니까. 하지만 결국 소윤의 자녀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성혜인은 지금도 머리를 짜내며 계약금 합의를 보고 있는데, 성휘는 성한에게 몇십억짜리 별장을 호탕하게 사주겠다니. 성혜인은 이 상황이 웃겼다.성휘와 소윤은 금방 성혜인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소윤의 미간이 순간 좁아졌다.“네가 왜 여기에 있니?”성혜인 역시 마찬가지로 양복을 입은 중개인과 함께라는 것을 알아차린 성휘는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난감해졌다.“혜인아. 집 사려고?”성혜인의 마음속은 이미 ‘실망’이라는 단어로 지배되었다. 성혜인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일관했다.“네. 살던 집에 도둑이 들어서 보안이 좀 더 철저한 집으로 옮기려고요.”성휘는 입술을 망설이듯 우물거렸다. 몇 년 동안 홀로 밖에 나가 살고 있는 성혜인을 생각하니 죄책감이 밀려들었다.“그럼...”말을 채 다 꺼내기도 전에 소윤이 성휘의 옷깃을 잡아당겼다.“네 아빠 앞이라고 불쌍한 척하지 마. 회장님이 네게 몇백억짜리 신혼집을 선물했다는 소문 들었다. 정 지낼 곳이 없으면 그 집에 가면 되는 거 아니니? 하물며 반승제와 사이도 가까워질 수 있고 말이야. 너희는 부부잖니. 남편한테 잘하렴. 네 아빠도 훨씬 잘 지낼 테니까.”“이모.”소윤을 바라보는 성혜인은 눈가에 힘이 들어갔다.“제가 진짜 불쌍한 척을 하든 말든 이모랑 상관없는 일이에요. 다른 남자의 아들에게는 몇십억이나 되는 별장도 사주는데, 친딸 집 장만해 주는 게 배 아플 일인가요? 게다가 아빠는 저한테 사준다는 말도 아직 안 했는데 뭐가 그렇게 급해요?”성혜인의 말에 소윤은 귀가 벌겋게 날아올랐다.성휘는 중간에서 어쩔 줄 몰라 했지만, 한편으로 성혜인이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개인들도 앞에 있는 상황인데다 그래도 소윤이 어른이지 않은가
성휘는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하얗게 보였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들썩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화가 난 소윤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그래, 성혜인. 우리 가족을 그동안 그렇게 생각했던 거구나! 그때 너만 아니었으면 네 아빠가 나와 혜원이에게 미안해할 일도 없었을 거야! 혜원이의 병세도 그때 더 나빠진 거라고! 이 배은망덕한 년.”“네게 집 사주는 것도 내 허락이 있어야 해! 넌 모르겠구나. 네 아빠가 나에게 지분 10%를 양도했거든. 회사에서 나도 발언권이 있다 이 말이야.”그 말을 듣는 순간, 성혜인은 귀를 의심했다.‘지분 10%? 그건 엄마가 나한테 남겨줬던 거잖아?’그녀의 시선이 성휘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성휘는 최대한 시선을 피하려 애썼다.“아빠. 이모한테 준 지분 10%는 아빠 지분을 양도한 거예요, 아니면 엄마가 저한테 남긴 걸 준 거예요?”성혜인은 성휘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으려 아버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딸에게 또 한 번 들켜버린 성휘는 표정으로라도 미안한 기색을 보여야 할 것 같았다.“넌 아직 어리고... 아이를 낳고 나면 당연히 아이에게 이 지분도 돌려줄 게다. 내 지분 양도 말고도 네 엄마가 너에게 남긴 것까지 전부 다.”그의 해명에도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성혜인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그래서, 소윤 손에 있는 지분이 정말 엄마 거라는 소리예요?”“맞아. 그때는 지분 전환이 번거롭기도 했고, 주주들도 말썽을 부릴 때라 내 지분을 준다면 회사 지배권도 순순히 내놓아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어. 내가 지분 40%를 갖고 있고 네 엄마가 10%였으니 지분이 외부로 유출만 되지 않는다면 다 똑같지. 우린 가족이잖아.”성혜인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코끝에서 시큰한 느낌이 났다. 또 나왔다. 이야기를 나눠보자는 저 따뜻한 말투. 성휘가 자신을 막 대하기라도 했다면 그를 마음 편히 미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냥 좋다고만 할 수 없는 그의 태도에 성혜인은 마음이 더
성혜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는 순간, 식었던 분노가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성휘의 말투는 이미 불만으로 가득했다. 아내에 대한 죄책감마저 줄어들 정도였다.성혜인은 더 이상 성휘와 언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외삼촌도 잘못한 건 없죠.”성휘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입을 더 꾹 다물었다. 그저 실망한 눈빛으로 성혜인을 바라볼 뿐이었다.성혜인은 그대로 중개인과 차에 오르며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무시했다.중개인은 출발하고 난 뒤 그녀의 낯빛을 살피고는 입을 열었다.“이쪽 동네에 있는 집들이 괜찮아요. 주위 부대시설도 잘되어 있고 도보로 3분 거리에 지하 쇼핑몰도 있어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다 좋은 학교들만 있는 데다 주변도 조용하기는 한데, 저한테 더 좋은 매물들이 있긴 하거든요. 가격이 조금 더 비싸긴 하지만요.”성혜인은 지금 가격 협상을 하고 싶지 않았다.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비싸면 비싼 대로 보지 뭐.’중개인은 성혜인을 데리고 한 부자 동네로 들어갔다.동네도 좀 전에 봤던 곳보다 더 낫고 부대시설도 더욱 잘 갖춰져 있다 보니, 부동산 가격이 확실히 비싼 편이기에 부자동네로 불린다.하지만 사실 이곳은 ‘불륜 동네’라고 더 많이 불린다. 그 이유인즉슨, 이곳에서 2년에 한 번씩은 꼭 불륜녀가 잡히는 사건이 일어나기 때문이다.그래서 사람들은 이 동네 거주자들이 가진 재산은 본인의 것이 아닌 남의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있다. 부자들이 소위 ‘세컨드’를 감춰두는 그런 곳이니까.성혜인은 그런 소문이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저 이 동네 환경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이 집은 28억인데, 집주인이 인테리어에만 14억을 투자했어요. 아이들 때문에 급히 출국하느라 옵션 아예 없는 가격에 내놓은 거예요.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아요.”성혜인은 너무 좋았다. 중개인의 말에 좀 거품이 껴있다는 건 알았지만, 흔쾌히 계약금으로 수억을 지불했다. 나머지 금액은 아파트를 팔고 난
금방 손을 떼고 가려고 했는데 그 허여멀건 그림자가 옆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향해 사납게 짖었다. 지나가는 사람은 한 쌍의 부부였는데 아마 이 근처의 직장인 같았다. 부부의 손을 잡은 아이는 그 소리에 놀라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 여자는 아이를 자기 뒤로 끌어온 후 사납게 반승제를 노려보면서 얘기했다. “개를 산책시키는데 목줄도 안 해요? 시민의식이 이렇게 없어서야, 원. 당신네 개가 우리 애를 물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광견병 사망률은 100퍼센트라는데. 개를 키우는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좀 느껴요!”그녀의 남편은 반승제의 기품과 그 뒤 수억대의 슈퍼카에 시선을 두었다. 그러고는 급히 자기 부인을 끌어당기며 제지했다. “당신, 그만 해.”이런 사람의 기분을 거슬렀다가 큰코다치는 수가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자기 딸이 더욱 중요했다. 반승제가 무슨 신분인지는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한 편으로는 딸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한 편으로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돈만 많으면 다인가? 시민의식의 '시'자도 모르면서. 개 산책 때 목줄을 안 하는 건 개가 사람을 산책시키는 것과 다름없다는 걸 아는지 몰라.”누가 들어도 반승제에게 하는 말이었다. 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얘기했다. “내 개가 아닙니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겨울이는 반승제를 향해 꼬리를 흔들며 반승제를 에워싸고 돌았다. 변명할 방법이 없었다. 반승제는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다가 이내 상황을 깨닫고 낯빛이 바로 어두워졌다. 여자는 딸의 눈물을 닦아주며 얘기했다. “이래도 당신네 개가 아니라고요?”심인우는 꿇어앉아 강아지 몸의 목걸이를 발견했다. “여기 전화번호가 적혀져 있네요. 아마도 집에서 뛰쳐나온 것 같은데 제가 주인에게 연락해 보도록 하겠습니다.”여자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저들의 모습을 보아하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기에 더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저 아직 가슴을 들썩이며 울음을 그치려고 노력하는 딸을 데리고 이곳을 벗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심인우는 다급히 목걸이의 전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