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는 순간, 식었던 분노가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성휘의 말투는 이미 불만으로 가득했다. 아내에 대한 죄책감마저 줄어들 정도였다.성혜인은 더 이상 성휘와 언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외삼촌도 잘못한 건 없죠.”성휘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입을 더 꾹 다물었다. 그저 실망한 눈빛으로 성혜인을 바라볼 뿐이었다.성혜인은 그대로 중개인과 차에 오르며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무시했다.중개인은 출발하고 난 뒤 그녀의 낯빛을 살피고는 입을 열었다.“이쪽 동네에 있는 집들이 괜찮아요. 주위 부대시설도 잘되어 있고 도보로 3분 거리에 지하 쇼핑몰도 있어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다 좋은 학교들만 있는 데다 주변도 조용하기는 한데, 저한테 더 좋은 매물들이 있긴 하거든요. 가격이 조금 더 비싸긴 하지만요.”성혜인은 지금 가격 협상을 하고 싶지 않았다.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비싸면 비싼 대로 보지 뭐.’중개인은 성혜인을 데리고 한 부자 동네로 들어갔다.동네도 좀 전에 봤던 곳보다 더 낫고 부대시설도 더욱 잘 갖춰져 있다 보니, 부동산 가격이 확실히 비싼 편이기에 부자동네로 불린다.하지만 사실 이곳은 ‘불륜 동네’라고 더 많이 불린다. 그 이유인즉슨, 이곳에서 2년에 한 번씩은 꼭 불륜녀가 잡히는 사건이 일어나기 때문이다.그래서 사람들은 이 동네 거주자들이 가진 재산은 본인의 것이 아닌 남의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있다. 부자들이 소위 ‘세컨드’를 감춰두는 그런 곳이니까.성혜인은 그런 소문이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저 이 동네 환경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이 집은 28억인데, 집주인이 인테리어에만 14억을 투자했어요. 아이들 때문에 급히 출국하느라 옵션 아예 없는 가격에 내놓은 거예요.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아요.”성혜인은 너무 좋았다. 중개인의 말에 좀 거품이 껴있다는 건 알았지만, 흔쾌히 계약금으로 수억을 지불했다. 나머지 금액은 아파트를 팔고 난
금방 손을 떼고 가려고 했는데 그 허여멀건 그림자가 옆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향해 사납게 짖었다. 지나가는 사람은 한 쌍의 부부였는데 아마 이 근처의 직장인 같았다. 부부의 손을 잡은 아이는 그 소리에 놀라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 여자는 아이를 자기 뒤로 끌어온 후 사납게 반승제를 노려보면서 얘기했다. “개를 산책시키는데 목줄도 안 해요? 시민의식이 이렇게 없어서야, 원. 당신네 개가 우리 애를 물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광견병 사망률은 100퍼센트라는데. 개를 키우는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좀 느껴요!”그녀의 남편은 반승제의 기품과 그 뒤 수억대의 슈퍼카에 시선을 두었다. 그러고는 급히 자기 부인을 끌어당기며 제지했다. “당신, 그만 해.”이런 사람의 기분을 거슬렀다가 큰코다치는 수가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자기 딸이 더욱 중요했다. 반승제가 무슨 신분인지는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한 편으로는 딸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한 편으로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돈만 많으면 다인가? 시민의식의 '시'자도 모르면서. 개 산책 때 목줄을 안 하는 건 개가 사람을 산책시키는 것과 다름없다는 걸 아는지 몰라.”누가 들어도 반승제에게 하는 말이었다. 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얘기했다. “내 개가 아닙니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겨울이는 반승제를 향해 꼬리를 흔들며 반승제를 에워싸고 돌았다. 변명할 방법이 없었다. 반승제는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다가 이내 상황을 깨닫고 낯빛이 바로 어두워졌다. 여자는 딸의 눈물을 닦아주며 얘기했다. “이래도 당신네 개가 아니라고요?”심인우는 꿇어앉아 강아지 몸의 목걸이를 발견했다. “여기 전화번호가 적혀져 있네요. 아마도 집에서 뛰쳐나온 것 같은데 제가 주인에게 연락해 보도록 하겠습니다.”여자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저들의 모습을 보아하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기에 더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저 아직 가슴을 들썩이며 울음을 그치려고 노력하는 딸을 데리고 이곳을 벗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심인우는 다급히 목걸이의 전화
반승제는 익숙한 목소리에 시선을 들어 앞까지 걸어온 성혜인을 마주했다. 그제야 목걸이의 번호를 확인한 그는 번호가 익숙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겨울이는 성혜인을 보고 흥분해서 일어나 미친 듯이 꼬리를 흔들었다. 손에 쥔 돈 봉투가 너무도 눈에 띄었기에 성혜인은 반승제에게 주는 대신 심인우에게 주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겨울이가 집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몰래 나갔더라고요. 귀찮게 해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심인우는 잠깐 망설이다가 덤덤하게 돈 봉투를 건네받았다. 성혜인은 그의 손에서 목줄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그제야 목줄의 손잡이에 쓰여 있는 영문을 발견했다.HERMES“...”개 목줄이 에르메스라니. 10만 원으로는 턱도 없었다. 성혜인은 핸드폰을 꺼내 들고 물었다. “이 목줄 얼마예요? 제가 드릴게요.”그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비난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돈 많은 사람들은 돈을 막 쓰네. 개 목줄까지 명품이라니.’“페니 씨, 괜찮습니다.”성혜인은 자신이 10만 원을 준 것이 반승제를 모욕했을 뿐만 아니라 반승제의 비서까지 모욕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미 준 데다가 더 보태주겠다고 하는 것도 애매했고 다시 빼앗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행히 반승제가 컴퓨터를 끄고 블루투스 이어폰을 뺐다. 성혜인은 목줄을 짧게 잡아 겨울이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막았다. 반승제가 성혜인의 곁으로 지나가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겨울이는 반승제가 맘에 들었다는 듯 혀를 내밀고 반짝이는 눈으로 반승제를 바라보았다. 겨울이는 반승제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의 주인처럼 말이다. 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페니?”성혜인이 대답하기도 전에 겨울이가 '멍' 짖으며 먼저 대답했다. 마치 반승제에게 대답하는 듯했다. 반승제는 가볍게 웃고는 그대로 떠나가 버렸다. 성혜인은 부끄러워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그대로 자리에 굳어있다가 고개를 숙여 겨울이를 쳐다봤다. “널 부른 것도 아닌데 왜 짖은 거야.”성혜인이 손
성혜인이 집에 들어서자 스물여덟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다리를 꼰 채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외숙모인 이소애는 주방에서 요리하고 있었는데 마치 상전을 모시는 듯했다. 소파에 앉아있던 여자는 성혜인을 보더니 먹고 있던 사과를 내려놓았다. “어머, 도시 사람이 왔네? 집은 더러우니까 알아서 앉고 싶은데 앉아.”임동원과 이소애, 두 사람의 얼굴에 다 어색함이 드러났지만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이소애는 성혜인을 끌어다가 걱정하며 물었다. “살 빠졌네, 혜인아. 너희 애비가 혹시 그 여자만 예뻐하느라 너에게 소홀한 것이 아니냐?”“무조건이죠. 어머님이 돌아가신 지 몇 년인데. 남자는 원래 다 그래요. 더 예쁜 걸 보면 정신을 못 차리죠.”얘기하는 것은 그 스물여덟 정도의 여자였다. 성혜인의 사촌 형수이기도 했고 이 집안의 며느리이기도 했다. 그녀는 깐깐한 모습으로 주방을 한 번 쳐다보고는 또 말을 이어갔다. “요리도 아직 다 못했으면서 감성팔이는 무슨.”이소애는 먼저 성혜인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혜인아, 일단 앉아. 두 가지 요리만 더 하면 되니까.”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상대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 “내가 말한 게 틀렸어? 네 집 재산은 지금 모두 그 여자 거잖아. 네 아버지는 제사 지내러 안 오신 지 몇 년이나 됐더라? 지금 너를 곁에 두는 건 네가 아직 쓸모 있기 때문이야.”성혜인은 고개를 살짝 들어 사촌 형수를 쳐다보며 속으로 화를 삼켰다. “우리 집 일은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돼.”하진희는 또 눈을 흘기며 얘기했다. “그러게. 네 집이 도시에서 그렇게 돈도 많고 큰 회사도 운영하고 차도 몇억씩 한다며? 나 같은 일반인과는 다르겠지. 우리가 평생 벌어도 네가 하루에 버는 돈보다 적을 테니.”임동원은 성혜인을 말리며 둘이 싸우지 말기를 바랐다. 성혜인은 그저 심호흡하며 하진희를 시야에서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진희는 흥하고 콧방귀를 뀌고는 자기 침실로 돌아갔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세
이 씨도 이런 차는 처음 봐서 자랑하고 싶었다. “혜인아, 저 차 봤어? 듣기로는 몇십억씩 한다던데 오늘 중요한 손님이 오셨나 보다. 책임자들이 같이 술 마시러 갔을 때 그분이 벽이 비어 보인다고 해서 네가 생각났다. 이런 분들의 요구가 까다롭긴 하지. 게다가 이런 차를 모는 사람이면 성격도 안 좋을지 몰라. 하지만 부담 갖지 말아.” 성혜인은 그가 부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작게 웃었다. “알겠어요, 아저씨. 먼저 들어가세요.”이곳, 하늘에 리조트는 서촌에서 가장 좋은 호텔이었다. 5성급 호텔의 기준으로 만들어졌는데 일반인한테는 개방하지 않고 주로 서촌에 투자하러 온 기업인을 접대했다. 성혜인도 처음 들어가 보는 것이었다. 들어서니 정원이 엄청 아름다웠다. 곳곳에 정자와 분수가 있었다. 게다가 목재의 선택도 꽤 많은 공을 들인 것이 보였다. 성혜인이 그림을 그리러 온 것이라는 것을 알자 얼른 그녀에게 방을 소개해 주었다. “물감은 다 준비되었는데, 지금 가서 보실 건가요?”성혜인은 상대가 급해한다는 것을 알고 자기 물건을 빨리 정리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드릴게요.”도착한 후에야 보니 그 벽은 너무도 눈에 띄는 곳에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은 다 볼 수 있었다. 3미터 정도였는데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에 비해 텅 빈 흰 벽은 어딘가 아쉬워 보였다. 성혜인은 준비된 물감을 확인해 보았다. 그녀가 평소에 쓰던 것과 다르지만 나쁘지 않았다. “이따가 시작할게요.”옆의 사람은 성혜인에게 조심하라고 얘기하려고 했다가 그녀가 제원 미술 아카데미 출신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말을 삼켰다. 성혜인은 옆의 의자에 앉아 머릿속으로 구상했다. 여기에는 물감의 농담을 이용한 수묵화가 가장 잘 어울릴 것이다. 터치가 너무 많으면 복잡해 보이기에 최대한 적게 그려야 했다. 속으로 생각을 마친 그녀는 물감을 취하기 시작했다. ...접대받은 방에 돌아온 반승제는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오늘 나온 사람들은 모두 현지 회사의 책임자였다. 다 나이가
반승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마구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어제는 성혜인의 강아지 때문에 안 들어도 되는 욕을 먹었고, 오늘은 저녁에 서촌까지 와서 옷에 물감을 뿌리고. 반승제는 자신이 전생에 성혜인에게 큰 죄를 지었나 싶을 정도였다. 성혜인은 또렷한 남자의 얼굴에 그제야 이게 환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성혜인도 그녀가 사고를 쳤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실수를 무마해 보려 했다. “반 대표님, 여벌옷이 있으세요? 이건 제가 세탁해 드릴게요.”반승제는 그녀의 손에 있는 팔레트를 보고 돌아서서 몇 걸음 걸어 나갔다. 성혜인은 그 자리에 서서 머리를 싸쥐었다. 왜 매번 이런 일이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인지. 반승제는 성혜인이 가만히 서 있는 것을 보고 얘기했다. “세탁해 준다며? 네가 물감을 뿌렸으니 네가 책임져야지.”성혜인은 총총걸음으로 뒤따라갔다. “제가 꼭 책임지겠습니다.”“1600만.”그는 덤덤한 어투로 성혜인을 바라보았다. 성혜인은 무슨 뜻인지 몰라서 황당해하고 있다가 그제야 1600만이 셔츠의 가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렇게 비싼 옷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검은색 물감 때문에 씻겨질지도 미지수였다. 살짝 긴장된 성혜인은 쭈뼛거리며 얘기했다. “닦을 때 살살 문지를게요...”반승제는 성혜인이 풀이 죽은 모습을 보고 갑자기 그녀가 도박장에서 이승주를 크게 골탕 먹인 일이 떠올랐다. 완전히 다른 두 모습을 떠올리며 반승제는 눈을 가늘게 떴다. 본인의 방으로 돌아온 반승제를 본 심인우는 다가가려고 하다가 그 뒤에 성혜인이 뒤따르는 것을 보고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반승제는 방에 들어와 셔츠의 단추를 모두 풀고 그대로 성혜인에게 던져버렸다. 성혜인이 그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셔츠가 성혜인의 머리를 덮었다. 성혜인은 얼굴이 달아올라 옷을 챙겼다. 그리고 시선으로 방안을 둘러보다가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반승제가 셔츠 하나만 입었었는데 지금 벗어서 성혜인에게 던져줬으
방안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관자놀이를 누르던 반승제의 손이 굳어버리고 고개를 들어 성혜인을 쳐다보았다. 말 한 성혜인도 두 남녀가 한 방에서 이런 얘기를 나누는 게 이상한 것 같아 멋쩍게 웃었다. “그냥 해본 말이에요.”반승제는 성혜인을 보며 그녀가 밖에서 다른 남자한테 이렇게 적극적인 것을 과연 집의 그분은 알까 생각했다. 시선을 피한 반승제의 말투는 더욱 딱딱해졌다. “나가.”성혜인은 그저 반승제가 이성과의 접촉을 싫어하거나 혹은 윤씨 가문의 그분 때문에 다른 이성과 접촉하지 않는 줄 알았다. “다른 뜻은 없었어요, 반 대표님. 그럼 쉬세요.”그녀는 진짜 아무런 뜻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취한 고객을 도와주어 호감을 사고 싶었을 뿐이다. 반승제는 아직도 설계 초고에 대해 피드백을 해주지 않았다. 성혜인은 자기 작품에 항상 자신이 있었지만 이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고객은 성혜인의 자신감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방으로 돌아온 성혜인은 옷을 갈아입고 물감이 묻은 셔츠를 대야에 넣어 몇 번 문지르고 또 물로 두어 번 헹궜다. 얼룩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창가에 걸어놓고 말리기 시작했다. 그 후에는 아까 넘어진 곳에 와서 붓과 팔레트를 한 번 씻고 다시 물감을 묻혔다. 그리고 다시 벽 앞에 와서 남은 부분을 그렸다.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빨리 그려야지, 아니면 이튿날 아침에는 감을 잃어서 원하는 대로 그려내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성혜인은 계속해서 열심히 그려나갔다. 오른쪽에 있는 가로등이 나방 몇 마리를 불러온 것을 빼고는 모든 것이 고요했다. 새벽 3시쯤, 피곤한 성혜인은 눈을 비비다가 몸을 일으켜 찬물 세수를 하려고 했다. 세면대 옆에 있는 아치형 문을 지날 때, 저 멀리 정원 안의 복도에서 수려한 몸매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는 기둥에 기댄 채 잠이 오지 않는지 손에는 담배를 들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는 나른함이 가득했지만 사람들이 두려워하게 만드는 거리감을 가지고 있었다. 성혜인은 반승제가 담배를 핀다는 것을
그날 밤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가 기억하기로는 성혜인 등 뒤에 있던 움푹 들어간 두 보조개를 떠올렸다. 엉덩이와 허리를 이어주는 부분에 있는 보조개는 비너스 보조개라고도 불리는데 인체의 섹시한 눈이기도 했다. 지금 성혜인은 반승제를 등지고 있었다. 등과 허리의 곡선을 보니 그날 밤 그녀의 허리를 잡고 끝까지 괴롭혔던 것이 떠올랐다. 반승제의 속눈썹이 살짝 떨리더니 마른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분위기가 오묘해지기 시작했다. 성혜인은 그림을 그리며 몸이 점점 뜨거워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성혜인은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들었다. 어느새 그녀의 뒤에서 사람의 온기가 느껴졌다. 순간 얼어붙은 그녀 옆으로 반승제가 스윽 지나가 다른 붓을 집어 들었다. 반승제의 가슴과 성혜인의 등이 가볍게 닿았다가 바로 떨어졌다. . 하지만 그 온기가 옷깃을 넘어 피부까지 전해졌다. 성혜인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반승제는 붓을 들고 팔레트에서 물감을 묻히더니 벽에 몇 번 터치했다. 반승제는 그림의 분위기를 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성혜인의 생각과 똑같았다. 성혜인도 그렇게 그려 넣으려고 생각했었으니까. 머릿속의 잡생각을 날려버린 성혜인이 이성을 붙잡고 그림을 그려나갔다. 반승제는 그저 조금 그려보고 싶은 것이었는지 그만 붓을 내려놓았다. “반 대표님, 늦었는데 쉬지 않으세요?”“머리 아파서.”성혜인은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다. 홀로 복잡한 심정을 가라앉히며 열심히 그림을 그려나갔다. 한 시간 후, 성혜인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반승제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녀의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길게 숨을 내쉰 성혜인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반승제가 없으니 더 집중해서 그릴 수 있었다. 7시가 되어서야 그림을 완성한 성혜인은 걷는 게 걷는 것 같지 않을 정도로 피곤했다. 물감과 도구들을 간단히 정리해서 구석에 놓으면 이따가 사람이 와서 처리할 것이다. 성혜인은 간단히 정리한 후 겨우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재빨리 샤
온시환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걸려 있던 재킷을 집어 들고 바로 문을 나섰다.공지민은 식탁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너무 피곤했다.한편 온시환은 집을 나서자마자 추지성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 문을 열자마자 거실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온시환은 침착하게 옷을 발로 밀어내고 소파에 앉았다.거실 한가운데에서 추지성은 한 여인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는 온시환을 보자마자 놀란 나머지 금세 흥미를 잃고 입맞춤을 멈췄다.“시환아?”추지성의 품에 안겨 있던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당황한 듯 몸을 움츠렸다.온시환은 담배를 피우며 그들을 무시했다.추지성은 이마를 문지르며 품에 안은 여인을 부드럽게 달랬다.“이만 가봐.”여인은 옷이 주워 입으며 서둘러 방을 나가자 추지성은 타올 하나만 걸친 채 태연하게 소파로 와서 앉았다.“야, 너 다음부터 올 때는 전화 좀 하고 와라.”온시환은 담배를 쥔 손이 축 늘어진 채 지쳐 보였다.추지성은 의아했다. 분명 어젯밤에는 공지민과 화해한 것처럼 보였는데 어째서 오늘은 이 모양인가 싶었다.“무슨 일이야? 아침에 전화로 자랑질하더니만. 아, 맞다. 너 점 다시 찍었더라? 확실히 점 있는 네가 낫다. 예전에 다른 여자들도 그 점이 좋아서 너한테 홀렸잖아.”온시환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지민이가 태도를 바꾼 이유는 구은우의 죽음을 조사하려는 거였어.”추지성은 옆에 놓인 주스를 집어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죽은 사람의 일을 왜 조사해? 이게 몇 년 전 일이냐. 다 끝난 거잖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난 가끔 여자들이 이해가 안 돼. 남자라면 이미 새로운 연애 몇 번은 했을 텐데.”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봐봐. 주변에 아내 잃은 남자들 있지? 그놈들 지금 얼마나 잘 놀고 다니는지 알잖아. 근데 남편 잃은 여자들은? 평생 못 벗어나.”추지성의 가족 이야기도 이어졌다. 그의 친누나는 난
공지민은 정말 지쳤다. 밤새 몇 번이나 잠들 뻔했지만 온시환이 계속 그녀를 깨웠다. 그녀는 자신의 위에 엎드린 온시환을 바라봤다. 그의 볼은 붉게 달아올랐고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이 끊임없이 떨어졌다.온시환이라는 이 나쁜 남자 몸매 하나는 참 잘 관리했다.공지민은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문득 생각했다. 그녀는 코끝에 점이 있는 온시환이 더 좋았다. 만약 점이 없었다면 그와 대화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을 것이다.한편 온시환은 그녀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자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빌어먹을.’공지민이 이 점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다행히 다시 그 점을 되돌려 놨다.온시환은 그녀의 뒤통수를 붙잡고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부었다. 마치 그녀를 자신의 몸속으로 흡수해 버리고 싶어 하는 듯했다.그날 공지민은 하루 종일 잠들어 있었다.원래 아침에 일어나 사골국을 끓이려고 했지만 전날 밤 온시환의 끈질긴 괴롭힘에 결국 일어날 힘조차 없었다.깨어났을 땐 창밖에 저녁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돌리며 온시환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다.“그래, 점 다시 찍었어. 신경 꺼. 쪽팔려도 내가 쪽팔려. 너랑 무슨 상관인데. 자꾸 그딴 소리하면 화낼 거야.”지난번 온시환이 점을 제거했을 때 많은 사람이 물었다. 그는 그냥 없애고 싶어서 없애는 거라며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말해 왔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점을 다시 찍자 많은 사람들이 이유를 궁금해했다.온시환은 아무에게도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추지성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온시환은 그에게 심한 말을 퍼부었다.사실 추지성이 온시환을 부추기지만 않았더라도 그와 공지민이 이렇게까지 어긋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추지성은 여전히 냉철했다.“지난번에 너희가 금방 헤어지고 네가 병원에 실려 갔을 때도 지민 씨는 한 번도 널 보러 오지 않았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돌아온 걸 보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나는 너희가 다시 잘되길 반
하지만 택시 기사는 여전히 믿지 않는 눈치였다. 공지민이 내리려 할 때까지도 계속 말했다.“내가 보니까 그 남자 친구 참 괜찮아 보이던데. 뒤따라오는 저 차도 그 사람 거죠? 아무리 싸웠어도 아가씨 혼자 차 타고 가는 거 걱정돼서 저렇게 따라오는 거 아니겠어요?”공지민은 시선을 돌려 멀리 있는 차를 바라보았다.온시환의 차가 틀림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과거의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시급했다.집에 도착한 공지민은 곧장 인터넷에서 그 남자 배우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하지만 검색 결과는 이름 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그의 가족에 대한 부분은 아예 생략돼 있었다.하는 수 없이 그녀는 예전에 알던 몇몇 기자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혹시라도 남자 배우의 어머니와 동생에 대한 정보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묻기 위해서였다.공지민은 연예계에서 활동한 지 꽤 오래되었지만 인맥을 쌓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사교를 좋아하지 않는 그녀로서는 이번 조사가 더욱 쉽지 않았다.소파에 앉아 돈을 송금하며 기자들에게 의뢰했지만 돌아온 정보는 여전히 부족했다.남자 배우의 어머니와 동생의 연락처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마음이 초조해진 공지민은 한숨을 내쉬며 창가로 다가갔다. 분명 실마리를 찾았지만 어떻게 조사해야 할지 막막했다.그때 공지민의 시야에 여전히 아래에 서 있는 온시환의 차가 들어왔다.만약 온시환이의 능력이라면 이런 조사는 금세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공지민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결국 결정을 내리고 집 문을 열었다.아래로 내려온 그녀는 온시환의 차 앞으로 걸어갔다.운전석에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던 온시환은 공지민을 보자 깜짝 놀란 듯했다.공지민이 창문을 두드리자 그가 곧바로 창문을 내렸다.“시환 씨.”온시환은 그녀가 자신을 쫓아내려는 말이라 생각했지만 공지민은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코끝에는 예전과 똑같은 점이 다시 자리 잡고 있었다.순간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공지민은 남자의 말을 들으며 그를 부축했다. 남자는 술이 정말 많이 취했는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녀가 무슨 질문을 해도 다 대답했다.10억...엘리베이터가 한 층에서 멈췄을 때 공지민은 그를 문 앞까지 데려다주었다.남자는 자신의 방 카드를 꺼냈고 공지민을 향한 시선은 이미 노골적인 의도를 담고 있었다.공지민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지만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그녀는 그가 건넨 카드를 받아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손목을 잡아 막았다.뒤를 돌아보니 온시환이었다.온시환은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그렇게 공지민은 그의 가슴팍에 부딪혔고 옆에 있던 남자 배우는 누군가 자신을 막으리라 예상하지 못했는지 멍하니 있다가 온시환의 얼굴을 보곤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온 작가님?”온시환은 공지민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엘리베이터 쪽으로 데려갔다.공지민은 원래부터 이 남자와 뭔가 할 생각이 없었기에 저항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차가운 얼굴로 버튼을 눌렀다.하지만 그의 감정은 몹시 불안정해 보였다.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을 때 그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공지민, 너 그렇게 절박해?”‘절박해’라는 말이 그의 목에서 걸리는 듯했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려 했지만 너무 떨려 담배는 그의 손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굴러갔다.공지민은 온시환이 오해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남자 배우와 관련된 조사에 쏠려 있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반드시 구은우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고 결심했다.큰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나가자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온시환이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아래층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모임 장소는 고급스러워서 촬영을 마친 여러 제작팀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오늘 밤에도 몇몇 팀이 이곳에 모여 회식을 하고 있었다.연예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온시
아니나 다를까 공지민은 무언가에 찔린 듯 온시환을 올려다보며 매섭게 노려보았다.온시환은 어깨를 으쓱하며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몇 장만 훑어봐도 이것이 전형적인 불평등 계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공지민은 자리를 뜨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공지민, 난 저 남자가 왜 너랑 자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안 가. 너 침대에서 꼭 통나무 같은데, 누가 통나무에 흥미를 느낄 수 있겠어?”공지민은 순간 발걸음이 멈칫했지만 그런 말은 전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온시환은 자리에 앉아 입꼬리를 비틀며 웃음을 흘렸다.말로 그녀를 상처 주는 건 소용없었다.하지만 구은우를 건드리는 말은 달랐다.대체 얼마나 좋아했기에 이미 세상을 떠난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도 여전히 잊지 못한단 말인가.그 이후로 공지민은 어디를 가든 온시환과 마주쳤다.한두 번은 우연이라 여길 수도 있었지만 일곱 번, 여덟 번이 되니 명백히 의도적인 것이었다.온시환은 예전처럼 가벼운 태도로 사람들과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시선은 항상 공지민을 따라다녔다.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그의 곁에는 여자들이 없다는 것이다.공지민이 그 모임에 참석한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맡았던 배역의 촬영이 끝났기 때문이다. 원래 짧게 등장하다 사라지는 조연이라 비중도 크지 않았다. 오늘의 자리는 남자 주인공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고 모두가 남자 주인공을 둘러싸고 아부 섞인 말을 건네고 있었다.그런 남자 주인공은 또 온시환에게 다가가 비위를 맞추려 애썼지만 온시환은 겉으로는 부드럽게 대해주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공지민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취해 옆 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때 우리 엄마가 내 동생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어. 어디로 갔는지 몰라. 그 대신 한 생명이 대신 희생됐지. 내 동생은 원래 수영할 줄 알았는데, 일부러 못 하는 척했던 거야.
구은우는 대학교 1학년 때 공지민과 사귀었다. 두 사람은 함께 바다로 놀러 갔다가 구은우가 파도에 휩쓸린 아이를 구하려다 익사하고 말았다. 아이는 무사했지만 구은우는 구조된 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을 거두었다.‘진짜 죽었네.’온시환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내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그는 담배를 다시 피우고 싶었지만 추지성이 그의 손 가까이에 있던 담배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또 피우려고? 오늘 하루에 대체 몇 대나 피운 거야? 게다가 여긴 병원이잖아. 금연 구역이라고.”온시환은 갑자기 흥미를 잃은 듯 창밖을 바라보았다.한편 추지성은 서류를 한 번 살펴본 뒤 감탄을 내뱉었다.“와, 운명도 참 잔인하네. 그렇게 사랑하던 두 사람이 같이 놀러 갔는데, 결국 한 사람이 사고로 떠나버리다니. 남겨진 사람은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지. 아마 끊임없이 생각할 거야. 그날 바다에 가지 않았더라면, 다른 곳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그런데 말이야, 구은우는 공지민이 가장 사랑했던 해에 떠났어. 그리고 그해는 구은우가 공지민을 가장 사랑했던 해이기도 했지.”구은우는 열여덟 살 공지민의 삶에서 서서히 퇴장했다. 이후로 누가 나타나더라도 구은우를 대신할 순 없었다.이게 바로 운명의 장난이었다.추지성은 이제는 공지민에 대해 별다른 비난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온시환 자신도 말하지 않았던가. 공지민에게 그저 장난이었다고. 결국 장난이 과해져 자신은 벗어나지 못하고 그녀는 가볍게 떠난 것뿐이었다.“그런데 시환아, 너 눈치챘어?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해가 네가 수술을 받았던 해랑 딱 겹쳐. 뭔가 운명 같지 않아?”온시환은 그런 운명 따위 믿지 않았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적으로 웃었다.“남을 구하겠다고 여자 친구를 내버려두고 자기희생을 포장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결국 구해줬다는 그 아이는 당일 엄마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가버렸고,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어. 이게 무슨 소용이야? 차라리 짐승을 구하는 게
온시환은 그대로 계단 위에 앉아 있었다. 고급 원단으로 만든 정장에 먼지가 묻어 뿌옇게 됐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일 꼭대기 계단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이 그를 다시 끌어당기려 하자 온시환은 그녀의 손길을 피하며 말했다.“지민아, 오늘 밤의 달 좀 봐.”공지민은 그의 말에 따라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봤다. 오늘 달은 분명 아름다웠고 내일 날씨가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며 신중하게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 네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지민은 발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공지민이 떠나는 것을 본 온시환은 당황해 급히 뒤쫓으려다 그만 술에 취한 상태로 균형을 잃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공지민은 온시환을 오래 알고 지냈지만 이렇게까지 망가진 모습으로 본 적이 없었다.그는 흙투성이가 된 정장차림으로 그녀의 발치에 쓰러져 있었다. 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다리가 심하게 다친 듯 몇 번을 시도해도 실패하고 말았다.강렬한 통증이 그의 정신을 어느 정도 맑게 해주었고 그제야 그는 현실을 자각했다.‘이건 꿈이 아니야. 지민이가 정말 나를 보러 온 거야.’공지민은 그의 모습을 보며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다쳤다면 걱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병원에 가요. 내가 데려다줄게.”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시키는 대로 따라나섰다.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온시환은 공지민의 손목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손을 뿌리치고 떠날까 봐 두려워하는 아이 같았다.공지민은 옆에 있던 의사에게 물었다.“얼마나 쉬어야 하나요?”“2주 정도는 안정이 필요해요. 당분간은 목발을 써야 할 거예요.”공지민은 병원 매점에서 목발을 사서 병실로 돌아왔다. 병실에 들어섰을 때 온시환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모습은 그녀가 알고 있던 온시환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공지민은 목발을
온시환이 집에 돌착했을 때도 서주혁의 팔을 붙잡고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렸다.서주혁이 그를 떼어내면 온시환은 다시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지민아...”“난 정말 모르겠어. 왜 날 대체품으로 삼았어? 그렇게 구은우가 좋으면 그냥 그 사람 찾아가면 되잖아. 왜 나한테 와서 이러는 건데.”“내가 네 장난감이냐, 나는 당해도 싸다 이거야?”서주혁은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창피해서 버리고 가버리고 싶었다.온시환이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한동안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서주혁은 가정부에게 그를 잘 돌봐달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온시환의 집을 나섰다. 취한 사람과 더 이상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서주혁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온시환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가버렸다....공지민이 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 조금 황당했다. 경찰은 온시환이 음주 운전을 하다 적발되었으니 와서 그를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다.“공지민 씨 맞으시죠? 죄송하지만, 친구분을 데려가 주실 수 있을까요? 음주 운전은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다른 사람에게 연락하면 안 될까요?”“그분께서는 당신에게만 연락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와도 따라가지 않을 거라고 했고요.”공지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이 밀려왔지만 결국 경찰서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벽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잠든 그의 모습은 차분해 보였고 평소의 산만한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공지민은 경찰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뒤, 온시환이 다시는 음주 운전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다는 보증을 하고 나서야 그를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그녀는 그의 소매를 잡아 살짝 당겼다.온시환은 희미하게 눈을 뜨더니 그녀를 보고 꿈을 꾸는 줄 알았다.갑자기 꿈속 공지민의 얼굴이 사라질까 봐 눈도 깜빡일 수 없었다.“지민아?”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 안으려고 했다.그러나 공지민은 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차가운 태도로 거리를 두었다.“대체 원하는 게
한편, 반승제는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고 온시환과 공지민 사이의 일을 알아내기 시작했다.하지만 지금 온시환은 공지민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과민 반응을 보이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면서 자꾸 대체품 어쩌고 하는 말을 내뱉었다.반승제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과일주스를 건네주었다.“무슨 대체품이야? 설마 네가 지민 씨한테 대체품으로 이용당했다는 거야?”‘와, 이렇게 자극적인 일이 벌어지다니.’“맞아! 지민이는 정말, 정말 나쁜 여자야.”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온시환이 떠올릴 수 있는 비난은 고작 이 정도였다.정신이 온전할 때는 입에 담기 힘든 독설도 가능했지만 술에 취한 지금은 속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그녀에게 차마 험한 말을 하지 못했다. 공지민이 지금 자신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굴고 있든지 간에.결국 다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예전에 공지민에게 좀 더 잘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어쩌면 그녀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었을지도 모른다.그랬다면 지금처럼 그에게 이 정도로 냉담하지 않았을 것이다.온시환은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반승제는 그의 말을 들으며 꽤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그는 모은 정보를 모두 성혜인에게 보냈다.[시환이가 대체품이었대.]성혜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메시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온시환이 대체품이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더욱 경악했다.한참 후에야 그녀는 단 세 글자로 답장을 보냈다.[꼴좋네.]누구나 알다시피 온시환은 바람둥이였다. 과거 여러 모임에서 그는 여자를 농락하는 말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진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그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여자를 상처 입혔는지 밤마다 잠 못 들게 했는지를 생각하면 이제는 그가 상처받고 잠 못 이루는 날이 오는 것도 당연했다.성혜인은 이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온시환은 술에 취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서주혁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지인이는 대체 무슨 생각이야?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날 좋아하지 않았던 거야?”서주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