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가 기억하기로는 성혜인 등 뒤에 있던 움푹 들어간 두 보조개를 떠올렸다. 엉덩이와 허리를 이어주는 부분에 있는 보조개는 비너스 보조개라고도 불리는데 인체의 섹시한 눈이기도 했다. 지금 성혜인은 반승제를 등지고 있었다. 등과 허리의 곡선을 보니 그날 밤 그녀의 허리를 잡고 끝까지 괴롭혔던 것이 떠올랐다. 반승제의 속눈썹이 살짝 떨리더니 마른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분위기가 오묘해지기 시작했다. 성혜인은 그림을 그리며 몸이 점점 뜨거워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성혜인은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들었다. 어느새 그녀의 뒤에서 사람의 온기가 느껴졌다. 순간 얼어붙은 그녀 옆으로 반승제가 스윽 지나가 다른 붓을 집어 들었다. 반승제의 가슴과 성혜인의 등이 가볍게 닿았다가 바로 떨어졌다. . 하지만 그 온기가 옷깃을 넘어 피부까지 전해졌다. 성혜인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반승제는 붓을 들고 팔레트에서 물감을 묻히더니 벽에 몇 번 터치했다. 반승제는 그림의 분위기를 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성혜인의 생각과 똑같았다. 성혜인도 그렇게 그려 넣으려고 생각했었으니까. 머릿속의 잡생각을 날려버린 성혜인이 이성을 붙잡고 그림을 그려나갔다. 반승제는 그저 조금 그려보고 싶은 것이었는지 그만 붓을 내려놓았다. “반 대표님, 늦었는데 쉬지 않으세요?”“머리 아파서.”성혜인은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다. 홀로 복잡한 심정을 가라앉히며 열심히 그림을 그려나갔다. 한 시간 후, 성혜인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반승제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녀의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길게 숨을 내쉰 성혜인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반승제가 없으니 더 집중해서 그릴 수 있었다. 7시가 되어서야 그림을 완성한 성혜인은 걷는 게 걷는 것 같지 않을 정도로 피곤했다. 물감과 도구들을 간단히 정리해서 구석에 놓으면 이따가 사람이 와서 처리할 것이다. 성혜인은 간단히 정리한 후 겨우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재빨리 샤
성혜인은 그대로 오후까지 자버렸다. 일어나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미친 듯이 울리는 핸드폰을 급히 집어 든 성혜인은 통화버튼을 눌렀다. 외숙모 이소애가 건 전화였다. 이소애이 다급하게 물었다. “혜인아,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는데 안 받아서 걱정했어.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니? 외삼촌더러 널 찾으러 가라고 하려던 참이었어.”성혜인은 부재중 통화를 확인했다. 다섯 통이나 걸었으니 이소애가 걱정할 만도 했다. “전 괜찮아요. 어제 너무 늦게 잤더니 피곤해서 못 들었나 봐요.”이소애는 그제야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럼 오늘 어머니 제사는 갈 거니?”“네, 이미 일어나서 씻었어요. 이따가 향만 사가면 돼요.”“향은 이미 외삼촌이 샀어. 외삼촌보고 네가 머무는 곳에서 기다리라고 할게. 일어나면 외삼촌이랑 같이 와.”성혜인은 전화를 끊은 지 5분도 되지 않아서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나가서 임동원과 만났다. 임동원은 산 물건을 성혜인에게 건네주면서 얘기했다. “외숙모가 그러는데 네가 어제 늦게 자서 피곤하다며. 내가 운전할 테니 조수석에 앉아서 조금이라도 자.”“고마워요, 외삼촌.”조수석에 탄 성혜인은 짙은 휘발유 냄새를 맡았다. 임동원은 이 차를 오랫동안 운전하면서 깨끗하게 관리했다고 해도 휘발유와 가죽의 냄새는 빠지기 어려웠다. 목적지에 도착 한 그들은 산 물건들을 가지고 차에서 내려 무덤을 찾아냈다. 성혜인은 해마다 꼭 오곤 했다. 가끔 일이 있을 때는 며칠 전이나 후에 오기도 했다. 하지만 성혜인은 그녀의 어머니가 이 이유로 그녀를 탓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최근 성씨 가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해 보면 기분이 좋지 않아 엄마한테 꼭 얘기하고 싶었다. 외삼촌은 멀지 않은 곳에서 성혜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덤 주위는 깔끔하게 정리된 흔적이 있었다. 성혜인은 쪼그려 앉아서 열심히 향을 태웠다. 향을 다 태운 성혜인은 눈을 가볍게 비비고 임동원의 곁으로 왔다. “외삼촌, 이제 가요.”담배를 피던 임동원은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반승제의 미간이 좁아졌다. 서류 더미에서 고개를 들었더니 밖에 서서 환하게 웃는 성혜인이 있었다. 서천의 풍경은 확실히 아름다웠다. 그 풍경에 성혜인의 웃는 얼굴이 더해지니 마치 따스한 햇볕과도 같았다. 서류를 든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왜 어디를 가도 성혜인을 만나게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성혜인은 반승제의 미세한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한 번 더 노크했다. “반 대표님?”반승제는 시선을 피하며 얘기했다. “타.”성혜인은 문을 열고 차에 탔다. 밖의 햇빛이 매우 강했다. 게다가 점심이어서 더 따가웠다. 문을 열자마자 더운 공기와 함께 성혜인의 체향이 은은하게 풍겨왔다. 뒤에 서 있던 임동원은 성혜인이 차에 타는 것을 확인하고 이 씨의 차에 올라탔다. 3km정도 타고 나왔을 때 앞에 주차된 BMW가 보였다. 임동원이 오늘 끌고 나온 그 차. 하진희는 서서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고 그녀의 옆에는 질이 좋지 않아 보이는 남자가 오토바이에 앉아있었다. 남자는 반승제의 차를 보더니 눈빛이 달라졌다. “진희야, 너 이게 얼마짜리인지 알아?”하진희는 정말 몰랐다. 하지만 이 차는 그녀가 본 가장 예쁜 차였다. “얼마인데?”남자는 얘기하지 않고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2억?”“20억도 넘어!”하진희는 놀란 나머지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20억이 넘는 차라니. 20억짜리 차는 처음 봤다. 20억이면 집을 몇 채나 살 수 있었다. 놀란 그녀는 문득 그 차 뒤의 차에 앉은 임동원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임동원은 어쩔 수 없이 기사와 얘기하고 차를 세웠다. “아버님, 차에 기름이 다 떨어졌잖아요. 나오면서 주유도 안 해요? 어떻게 운전하라는 거예요.”임동원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진희야, 기다려 봐. 내가 동료를 불러서 주유해달라고 할게.”하진희는 차를 훑어보았는데 성혜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순간 20억이 넘는 차를 떠올린 하진희는 설마 성혜인이 그 차에 탔을까 하는 생
하진희는 눈썹을 찌푸렸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앞에 앉은 이 씨는 못 봐주겠는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임 씨 다리도 안 좋은데 앞으로 두 시간은 족히 걸어야 할 거야. 진희는 친구 오토바이 타고 가도 되잖아?”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진희가 반박했다. “햇빛이 너무 강해서 피부가 아플 지경인데 오토바이에 앉고 싶지 않아요. 제 친구는 늙은이랑 같이 타는 걸 안 좋아해서 그냥 가라고 했어요. 아버님 몸은 항상 좋았어요. 많이 걸으면 운동도 되고 좋죠. 그러니까 아저씨, 운전해 주세요.”이 씨는 화가 났지만 임동원이 이미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니 뭐라고 할지도 몰랐다. 임동원은 뜨거운 햇빛에 따가워서 어지러웠지만 더는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기도 어려웠다. 그냥 걸어갈 셈이었다. 하늘에 리조트에 도착한 성혜인은 차에서 내려 뒤따라 들어오는 차를 보았다. 책임자 몇몇이 차에서 내리고 마지막으로 하진희가 내렸다. 하진희는 반승제를 보고는 놀란 나머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렇게 잘생긴 남자는 그녀의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게다가 기품도 흘러넘쳐 정장을 입은 모습이 묘하게 섹시하면서 도도했다. 이런 사람과 함께한다면 그 어떤 대가도 아깝지 않았다. 하진희는 마음이 급해 반승제의 앞으로 다가갔다. “반 대표님이시죠? 안녕하세요. 서천에 온 걸 환영합니다. 사실 서천에 아름다운 곳이 여러 곳 있는데 괜찮으시다면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그러는 김에 밥도 한 번 사고요.” 하진희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반승제에게 향했다. 숨길 마음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반승제의 표정이 삽시에 어두워졌다. 책임자들이 서로 눈치를 보더니 하진희를 끌어내렸다. 하진희는 발버둥 치며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반 대표님이랑 대화하는 것도 안 돼요? 아까는 반 대표님이 오늘 하루 서천에 있을 거라고 얘기했잖아요. 내가 서천 주민으로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데 왜 막아요!”하진희의 탐욕스러운 시선은 20억이 넘는 차에 머물렀다가 또 반승제의 얼굴에 고정됐다.
하진희의 목청은 아주 컸고 전혀 줄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반승제는 발걸음을 멈칫하며 덤덤한 눈빛으로 피식 비웃었다. 성혜인은 그에게 남편과 아주 사이 좋다고 말한 적 있었다. 하지만 인제 보니 현실은 완전히 딴판이었다.부부 사이가 좋지 못하면 이혼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여태껏 이혼하지 않은 걸 보면...‘남편을 그 정도로 좋아하나?’성혜인은 억지를 부리는 하진희 때문에 약간 짜증이 나서 휴대전화를 꺼내 임동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성혜인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지금의 실외 온도는 36도에 달했고 지나다니는 사람 한 명 찾기 어려웠다. 이런 날씨에 걸어 다니다가 길가에서 쓰러져도 발견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우리 일단 외삼촌부터 찾으러 가자.”하진희는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싫어. 갈려면 나한테 2000만 원을 주고 가.”성혜인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낯짝 두꺼운 것도 도가 있어야지, 도대체 얼마나 멍청해야 이런 말을 한단 말인가. 그녀는 예리한 시선을 물었다.“뭐라고?”하진희는 머리를 쳐들며 다시 한번 말하려다가 성혜인의 싸늘한 시선과 마주치고 금세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몸을 흠칫 떨더니 말을 얼버무렸다.“사, 사람을 왜 그렇게 쳐다봐?”성혜인은 하진희처럼 뻔뻔한 사람은 처음 봤다.“외삼촌이랑 외숙모가 너를 내버려 둔다고 해서 나도 마찬가지인 건 아니야. 경고하는데 앞으로 내 앞에서 알짱거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하진희는 약간 풀이 죽었지만 그래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며 말했다.“날 협박할 생각이라면 그만둬. 네 집안사람 때문에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데? 괜히 네 사촌 오빠한테 시집갔다가 버림받고 평생 책임져 주겠다는 말 하나 믿고 기다렸는데... 퉤, 네 집안사람은 평생 나한테 속죄하며 살아야 해!”성혜인은 더 이상 하진희를 상종하지 않고 차에 타서는 임동원을 찾으러 나섰다. 그녀는 도로를 따라 천천히 운전하며 계속 임동원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반 시간 정도 운
임동원이 더위 먹은 마당에 따져봤자 소용없었기에, 성혜인은 그저 머리를 끄덕이며 답했다.“알겠어요, 외삼촌.”임동원은 미안한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네 외숙모가 얼마 전 소시지를 만들었는데 좀 가져가려무나. 물론 김치도 있다. 네가 가장 좋아하던 것들 말이야.”“네.”성혜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병원으로 향했다. 이때 외숙모 이소애가 왜 아직도 안 돌아오는지 묻기 위해 전화를 걸어왔다.“외삼촌이 더위 먹어서 지금 병원으로 가고 있어요. 아마 좀 늦게 돌아갈 것 같아요.”이소애는 다급한 말투로 물었다.“어느 병원이니? 나도 바로 출발할게.”성혜인은 병원 이름을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여보세요? 성혜인 씨가 내놓으신 매물이 금방 팔렸는데 직접 와서 계약서에 사인해야 해요. 혹시 언제쯤 시간이 되실까요?”‘그 집이 팔렸다고? 다행이네... 그럼 일단 선불로 낼 돈은 생기겠어.’성혜인은 이렇게 생각하며 답했다.“제가 지금 지방에 내려와서요. 돌아가자마자 연락드릴게요.”“네. 저번에 돈이 급하다고 그러셨죠? 계약서에 사인하고 은행 수속도 해야 하니까 시간이 적어도 반 달은 걸릴 거예요. 그러니 최대한 빨리 연락해 주세요.”“네, 알겠습니다.”한 가지 일을 해결하고 난 성혜인은 드디어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덕분에 할아버지가 돌아온 후, 포레스트 펜션에서 반승제와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성혜인은 생각 정리를 끝내고 임동원이 있는 병실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임동원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혜인아, 나 이제 괜찮아진 것 같으니 입원할 필요 없어. 병원에 있어봤자 돈만 낭비하지 않나. 집에서 며칠 쉬는 편이 훨씬 좋으니 집으로 데려다주려무나.”“입원비는 제가 낼 테니 돈 걱정 하지 마세요.”성혜인의 설득에도 임동원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렸기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약을 받고 집까지 데려다줬다.집에서 이소애는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고 초대했다. 하지만 성혜
반승제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져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들어와.”성혜인은 혹시라도 반승제가 말을 바꿀까 봐 후다닥 그의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반 안에는 커다란 테이블이 있었는데 열려 있는 노트북과 서류 더미가 한눈에 들어왔다.성혜인은 문득 반승제가 BH그룹 후계자로 선택받은 이유가 어쩌면 재능이 아닌 노력 덕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커다란 책임을 짊어질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나지는 않는다.성혜인은 일부러 테이블 근처로 가지 않고 의자를 찾아 앉았다. 반승제는 테이블 앞으로 가서 펜과 서류를 들더니 결재를 시작했다. 일에 집중한 반승제의 모습은 아주 차가웠고 함부로 가까이하지 못할 기운을 갖고 있었다. 그의 등 뒤로 창밖의 가로등이 비췄고 바닥에 희미한 그림자를 남겼다. 그의 머리카락은 웜톤 불빛에 의해 금빛으로 물들었다.손이 근질근질했던 성혜인은 펜과 종이를 찾아와서 반승제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데 어우러진 그의 선, 빛, 기운, 그림자는 통증을 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게 바로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다는 말인가 싶기도 했다.성혜인이 관찰을 넘어 감상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노크하고 반승제가 짧게 답했다.“들어와요.”심인우는 포장된 음식을 잔뜩 들고 들어왔다. 그는 성혜인도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대표님, 일단 저녁부터 드세요. 8시부터 한 시간 동안 회의를 하고, 9시 반부터 또 해외 회의를 해야 하잖아요.”반승제는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수저 세트를 하나 더 챙겨줘요.”심인우는 반찬을 내려놓다 말고 전화를 걸어 수저 세트를 갖고 오라고 지시하고는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배가 너무 고팠던 성혜인은 반승제가 말하기도 전에 먼저 음식 앞으로 왔다. 그녀는 냄새만 맡아도 벌써 군침이 돌았고 배에서 우렁찬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녀는 순간 얼굴이 빨개졌고 반승제는 그저 피식 웃기만 했다. 비록 반승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음
성혜인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심인우가 밖에서 걸어들어오더니 반승제의 곁으로 와서 말했다.“대표님, 성씨 집안에서 함께 식사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습니다.”‘식사?’반승제는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반태승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을 더 꽉 붙잡기 위해 얕을 수를 쓰는 성씨 가문을 그는 미움을 넘어 증오했다.“거절해요.” 심인우는 머리를 끄덕이다가 한 마디 보탰다.“성휘 씨는 성혜인 씨가 대표님과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대요. 대표님을 위해 요리 연습도 하고 계신답니다.”이 대화의 주인공인 성혜인은 반승제의 앞에 앉아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딸을 이용해 반승제의 환심을 사려는 아버지가 너무나도 실망스러웠다. 그리고 그의 방식은 반승제의 혐오만 일으킬 뿐이었다.역시 반승제는 성혜인의 예상대로 단호하게 답했다.“계약서에 적힌 조항 외에는 꿈도 꾸지 말라고 전해줘요.”심인우는 머리를 끄덕이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반승제는 성혜인을 바라보며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어?”성혜인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는 배가 불렀다고 말하려고 했어요. 대표님은 계속 드실래요?”반태승에 성씨 집안까지 더 해져 방승제는 완전히 입맛을 잃었다. 성혜인은 그가 대답 없는 것을 보고 말없이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성혜인은 반승제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상관없었다. 두 사람은 어차피 일 적으로만 연결된 낯선 사람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반승제와 한 번 만나보겠다고 성묘를 위해 지방으로 내려온 딸을 이용해 먹으려는 아버지의 방식이 너무 우스웠다.예전의 성혜인은 단 한 번도 아버지가 누군가를 편애한다는 생각을 한 적 없었다. 예전에는 또 그녀를 위해 소윤 일가를 집에 들이지 않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은 변하기 시작했다.이때 반승제의 목소리가 성혜인의 생각을 끊었다.“정리할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넌 이만 돌아가.”성혜인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대표님은 모레 제원으로 돌아가요?”“내일.”반승제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 보니 온몸이 오싹해졌다. 설강민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낭패한 모습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평소 물 쓰듯 돈을 쓰던 술집에서 쫓겨나는 날이 있다니.그 순간, 설강민은 문득 설준석이 이 술집의 지분을 일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강민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건 분명 그의 체면을 짓밟기 위해 아버지가 지시한 것이 틀림없었다. 원래 설준석에게 가서 사실대로 털어 넣고 돈을 갚아달라며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막상 이 지경이 되니 왠지 모를 오기가 생기며 더더욱 설준석과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설강민은 갑자기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조금 전 또 20억 원을 빌렸으니 차라리 이 20억 원으로 죽을 때까지 먹고 사는 게 나았다.다시 마음을 먹고 설강민은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한 채 현금 뭉치를 매니저에게 던져주었다.“지금 당장 가장 좋은 술을 가져오고 5명의 계집애를 데려와.”한 푼도 없을 줄 알았던 설강민이 뜻밖에도 600만을 들고 들어오니 조금 당황한 모양이다.그러자 설강민은 오히려 더욱 으스대며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다.“아무리 초라해도 난 설씨 가문 일원인데 그깟 돈 하나 못 꺼내겠어?”돈을 받은 매니저는 바로 계집 몇 명을 설강민에게 보내주었다.아무리 돌이켜봐도 오늘 밤의 일은 생각할수록 더욱 화가 났다. 하여 설강민은 매니저가 보낸 여자들이 도착하자마자 양옆에 여자들을 껴안으며 오늘 밤 겪었던 울분을 풀어냈다.한편, 설연주는 구석에 서서 설강민의 모든 행동을 눈여겨 바라보고 있었다.룸을 떠나고 화장실에 간 설연주는 그제야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최근에 열이 나며 심각하게 살이 많이 빠진 모양이다.그리고 오늘 밤 설강민이 겪은 일을 생각하면 웃기면서도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설연주가 쉰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설연주, 봤어? 저게 바로 네가 목숨을 바쳐서 구한 남자야.
설연주는 입술을 달싹이며 샤워를 마치고 다시 한번 세수를 마치고 나서야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러나 설우현은 이미 떠난 모양이었다. 말을 들어보니 아침 일찍 설기웅에게 불려가 두 아이를 돌보러 갔다고 한다.순식간에 할 일이 없어진 설연주는 그저 별장 안에 앉아 바깥에 활짝 피어있는 꽃을 바라보며 멍을 때렸다.저녁, 방금 해열제를 먹고 다시 바라보니 정원에는 설우현의 차가 멈춰 세워져 있었다.그리고 설우현은 품에 꽃다발을 안은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다정한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순간,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길이 멈칫하고 설연주는 먹고 있던 과일을 천천히 내려놓았다.설연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설우현이 위층으로 가 옷을 갈아입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채 다시 꽃을 안고 외출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잠깐 고민해보던 설연주는 결국 다시 올라가 설우현에게 인사를 건넸다.“오빠, 데이트하러 나가요?”설우현은 그제야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몸은 좀 어때? 괜찮아졌어?”“네, 좀 나아졌어요.”그러자 설우현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액셀을 밟았다.설연주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막상 입을 여니 대체 뭘 물어야 할지도 몰랐다.같은 시각, 설우현은 이미 차를 몰고 떠났고 설연주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그녀조차도 자신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그때, 오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설강민이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지금 어떻게 그 20억을 갚을지 생각 중이라고 한다.“명목상이지만 설연주 씨 친오빠 진짜 너무 멍청한 것 같네요. 이렇게 간단한 사기극에도 속다니... 두팔이 빌려준 20억은 이윤이 이미 30억이 됐어요. 그런데 설준석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은 안 하고 도리어 두팔에게 또 대출을 받았다니까요. 그러니까 또 20억을 빌렸죠.”오번의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웃음이 나왔다. 대체 얼마나 멍청하면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그럼 설강민은 지
설우현은 자신의 잡혀버린 소매와 설연주의 눈빛을 번갈아 보았다.한 치의 빛깔도 없이 캄캄하기만 했다.당황스러울 정도로 낭패한 그녀의 모습에 설우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나 어디 안 가. 물 따라올게.”“물 안 마셔도 돼요. 목 안 말라요.”그러나 그녀의 입술은 핏발이 보일 정도로 갈라져 있었다.잠시 생각에 잠긴 설우현은 이내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설연주의 몸은 여전히 조금씩 떨고 있었고 설우현을 놓아줄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그때, 도우미 아주머니가 문밖에 찾아왔다. 설연주의 목소리가 워낙 날카로워 집 안에 있던 사람들도 전부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러자 설우현은 침대 옆에 앉은 채, 도우미에게 말을 건넸다.“미지근한 물 한 잔과 해열제 한 알 주세요.”설연주의 열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정말 의사의 말대로 너무 긴장한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잠시 후, 도우미는 설우현의 말을 따라 재빨리 물을 가져다 놓고는 약을 설우현의 손바닥 위에 놓아주었다.이윽고 설우현은 설연주의 턱을 치켜들고 약을 먹여주었다.그러나 설연주는 입을 벌리고 있을 뿐 약을 삼키려 하지 않았다.몇 초간 머뭇거리던 설우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손끝을 그녀의 입에 넣고는 목 가장 깊은 곳에 약을 대었다.이에 설연주는 결국 마지못해 약을 삼키게 되었고 설우현은 또다시 물컵을 그녀 앞에 놓아두고 턱을 잡더니 천천히 물을 먹여주었다.물이 목구멍을 따라 흘러내리며 설연주는 저도 모르게 기침을 두 번 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막막하기만 했다.그렇게 물 반 컵을 마신 후에야 설우현은 물컵을 옆에 있는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이제 그만 자.”“오빠, 제발 가지 말아요.”설연주는 마치 가지 말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계속하여 그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하지만 설우현은 그녀의 그런 모습이 그저 웃겼다. 이제 정말 익숙해지기라도 한 걸까. 설우현이 정말 설연주의 오빠인지 아닌지도 아직 확실하
현재 건강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과거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병에 걸린 적이 몇 번 없었는데 이젠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건강은 점점 악화하여가기만 했다.그저 평생 행복할 수 없는 운명이었던가?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연주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한번 남자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덩달아 마음이 약해진 오번도 다시 한번 그녀에게 당부해주었다.“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일 하면 안 돼요. 이번에 설우현이 날 놓아준 건 전부 서주혁의 얼굴을 봐서였다고요. 다음부터는 도와줄 사람도 없으니까 가만히 있자고요. 어차피 지금 김현서는 두팔 쪽에 있고 설강민은 사채업자들한테 걸렸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빚은 졌다는 사실이 설준석의 귀에 들어갈 거예요.”찌릿찌릿 쑤시는듯한 통증에 설연주가 손을 들어 태양혈을 주물렀다.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설연주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오번 씨, 그거 알아요? 요즘 계속 꿈을 꾸는데 꿈만 꾸면 비싼 카펫 위에서 기어 다니는 내 모습이 보여요. 그래서 가끔 생각해요.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생활이 과연 현실일까? 갖은 노력을 다해 설씨 가문에 들어온 게 정말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였을까?”“설연주 씨...”“하지만 이제 알 것 같아요. 전 저를 괴롭혔던 사람들이 모두 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아니, 내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정승후는 이미 무너졌으니 다음은 설강민, 그리고 다음은 김현서, 마지막은 두팔까지...”오번이 미간을 찌푸렸다. 두팔을 상대한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두팔의 세력은 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도 훨씬 강대했으니까.“이번에는 고마웠어요. 끝까지 저 지켜줬잖아요. 앞으로 다시는 설씨 가문에 손을 대지 않을 거니까 오번 씨도 계속 저한테 소식만 전해줘요.”“그래요.”전화가 끊기고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아무리 뒤척여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설우현도 언젠가 성혜인에게 생길뻔한 일이 그녀와 관련
남자가 전화를 한 상대는 오혜수였다. 지금 그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의 보스뿐이니까.전화를 받은 오혜수는 여전히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오번? 너 퇴직한 거 아니니? 왜 아직도 전화해.”오번은 남자의 암호명 순위일 뿐이다. 전에 오혜수의 곁을 따라다닐 때 해킹을 담당하며 얻은 암호명이다.그 후 제원시에서 미움을 사는 바람에 플로리아로 건너와 자신의 기술로 용돈 벌이를 하는 것이다.비록 전에 충분히 많은 돈을 벌어두었지만 돈이란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으니 더 벌면 안될 것도 없었다.“보스, 이번에 저를 구하러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서주혁과 장하리를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 설우현 도련님께 잡혀 왔는데 번거로우시겠지만 도련님께 전화 좀 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오늘 당장 두 다리를 잃을 것 같습니다.”오번이 서주혁의 이름을 내뱉은 순간 설우현이 미간을 찌푸렸다.이번 일이 서주혁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아하니 남자는 그저 서주혁이 대신 나서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한편, 오혜수는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덩달아 미간을 찌푸렸다. 서주혁을 알고 있는 건 맞지만 서주혁도 아직 장하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체면을 세워줄 이유가 없었다.“보스, 저를 구하지 않으면 오늘 정말 다리가 부러질 겁니다.”“닥쳐. 그러게 멀쩡히 잘 있는 설씨 가문을 왜 건드려?”오혜수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이 부잣집 자제들과 접점이 생기는 것이었다.그러나 오번 역시 상황이 급한지라 또 몇 번이나 거짓 울음을 터뜨리면서 꼭 구해주러 오라고 몇 번이고 당부한 뒤에야 전화를 끊었다.전에 제원에 있을 때 장하리의 행방을 감추는 것을 도운 적이 있기에 지금 오번이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장하리와 서주혁뿐이었다.설우현은 휴대폰을 낚아챈 뒤 바로 그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이 아닌 유심히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았다.겁에 질린 오번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감히 다른 말을 꺼내지 못했다.5분 후, 누군가가 설우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설우현은 싸늘한 말투로 다시 한번 그녀를 밀어냈다.“꺼져. 선 넘지 마.”설연주는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설우현에게 밀려 푹신푹신한 소파에 주저앉으니 순간 지그시 감은 두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혹시 자신의 힘이 너무 셌던 건 아닌지 하는 마음에 설우현이 양미간을 찌푸리며 설연주를 바라보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솔직히 설연주는 이미 너무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게다가 설우현은 소위 말하는 여동생과 그렇게 가까이 지내서는 안 됐다.그녀를 뒤로하고 설우현은 곧바로 옆에 앉아 컴퓨터를 켜 자신이 투자한 프로젝트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모든 프로젝트는 많은 돈을 벌어들이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한 시간이 지나고 그는 소파 변두리에 아슬아슬하게 누워있는 설연주를 발견했다.그러나 설우현의 각도에서는 그녀의 흰 옆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설우현이 천천히 다가가 설연주를 바로 눕혀주었다.정말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약간의 카리스마에 매혹적인 기질을 갖고 있어 설령 가장 무난한 옷을 입더라도 다른 사람들 눈에는 여우로 보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녀의 여우처럼 길게 찢어진 눈은 말로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고 그 눈동자에 서러운 감정이 서리니 자꾸 마음이 약해지는 기분이 들었다.설우현은 마침내 왜 자신이 그녀를 싫어할 수가 없었던 건지 알게 되었다. 솔직히 설우현은 얼빠였던 것이다.바로 눕히고 막 손을 빼려던 참이었다.그런데 그때, 설연주가 그의 큰 손바닥에 뺨을 대고 비비적거리는 것이 아니겠는가.자리에 얼어붙어 있던 찰나 설우현은 자신의 손끝이 촉촉하게 젖어있는 것을 느꼈다. 확인해보니 다름 아닌 설연주의 눈물이었다.꿈속에서는 매일 울고 있으면서 깨어있을 땐 그 누구보다 독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설우현은 이해할 수 없었다.담요를 다시 덮어주고 설우현은 아예 그녀를 안아 들어 위층으로 올라갔다.이곳에 설연주고 살던 방이 있는데 그녀를 침대로 내려놓자 더웠던 모양인지 바로 담요를 걷어버렸다. 옷은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벙어리는 이제 영원히 그녀에게 답을 줄 수 없었다.흐릿한 의식 속, 설연주는 천천히 잠자리에 들었고 투명한 눈물이 볼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그러나 흐리멍덩한 와중에도 후회되진 않으냐는 물음은 꿈속에서 천만 번이고 반복되었다.그런 쓰레기를 구해준 게 후회되진 않냐고, 그딴 쓰레기를 위해 그녀의 창창한 미래를 내바친 것이 후회되진 않냐고...온몸이 불타오르는 듯 뜨거웠다. 머릿속에는 벙어리의 필체와 벙어리와 수화로 대화를 나누던 모습이 아른거렸다.시간도 참 빠르지. 설연주가 여전히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을 때, 벙어리는 지금쯤 두 살이 되었을지도 모른다.한편, 막 차를 멈춰 세웠는데 옆에서부터 설연주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는 설연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설연주는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것처럼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그 모습에 설우현은 손을 뻗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턱을 살짝 꼬집었다.“입 벌려.”그러나 설연주는 여전히 별 반응이 없었다. 입술에 붉은 핏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그 순간, 설우현이 갑자기 힘을 주더니 손가락 하나를 뻗어 그녀의 이가 계속 맞물리지 않도록 입안에 집어넣었다.“설연주, 일어나.”여전히 눈가에 맺혀있는 눈물을 뒤로하고 설연주가 희미하게 두 눈을 떴다.무언가가 자신의 혀끝에 와 닿는 것만 같았다.설연주는 무의식적으로 혀를 말아 그 무언가를 감쌌고 순간 온몸이 굳어진 설우현이 그녀를 밀어냈다.“정신이 들어?”등이 시트 위에 쾅 하고 부딪히며 통증이 살짝 밀려왔지만 이제 정말 정신이 들었다.“오빠.”정신을 차린 설연주는 힘없이 옆에 기대어 안전벨트를 풀기 위해 팔을 허우적거렸다.설우현은 축축이 젖어있는 자신의 손끝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옆에 있던 휴지를 뽑아 손가락을 닦았다.차에서 내린 후 설우현은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지만 시간이 지나도 설연주는 그를 따라오지 않았다.뒤돌아보니 그녀는
점점 멀어져가는 설우현의 자동차를 바라보며 설연주는 또다시 천천히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갔다.그러나 몇 분 후, 멀어져 가던 자동차가 다시 돌아오고 설우현은 끝내 참지 못한 듯 설연주를 향해 외쳤다.“차에 타. 네가 병에 걸려 죽어버리면 아버지가 또 나한테 뭐라 하실 거 아냐.”곧 설연주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로 조수석에 올라탔다.차에 올라타고 안전벨트를 매고 싶었지만 오랜 고열로 인해 설연주는 이미 모든 힘이 빠져버리고 말았다.몇 번을 시도해도 안전벨트 하나 매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에 설우현은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별다른 생각 없이 바로 몸을 기울여 그녀를 대신하여 안전벨트를 잡아당겨 매어 주었다.그 순간, 설연주는 설우현의 몸에서 은은한 향을 맡게 되었는데 그건 남성용 향수로 대나무의 향기와 매우 흡사했다.설연주가 고개를 돌려 설우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설우현은 여전히 차가운 얼굴을 한 채 안전벨트를 매어준 뒤 말없이 액셀을 밟았다.이리저리 흔들리는 와중에 설연주는 갑자기 잊고 있던 옛일을 떠올렸다.설연주 역시 줄곧 외로웠던 건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좋은 친구 한 명이 있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벙어리었고 매일 간단한 수화 몇 개만 그릴 줄 알았다.하지만 주위에는 수화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이에 설연주는 특별히 수화를 배우러 가 그와 대화를 나누곤 했었다.벙어리는 매우 똑똑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같은 전공은 아니었고 컴퓨터 전공이었다.컴퓨터 전공은 당시 학교 최고의 전공으로 졸업한 뒤 연봉 1억은 시작에 불과했다.그때 설연주는 항상 벙어리에게 컴퓨터 학과가 점점 더 인기를 얻고 있다며, 나중에 졸업하면 돈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겠다며 놀려주곤 했었다.그러나 벙어리는 끝내 졸업을 하지 못했다.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물에 빠진 설강민을 구해주다가 벙어리는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그러나 의식을 되찾은 설강민은 김현서가 그를 구해주었다가 착각하며 그녀에게 단념하게 된 것이다.물론 김현서도 이 모든 것을 자연스레 받
앞으로 성혜인에게 또 이런 일이 생기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이참에 근원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알겠습니다, 도련님.”전화가 끊기고 설우현은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그 후, 10분도 채 되지 않아 상대로부터 답장이 왔다.“도련님, 저희가 류소영 씨 휴대폰을 뒤져 발견한 문자 메시지가 있는데 아마 이 문자 메시지를 보고 자극을 받아 성혜인 아가씨에게 손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는 경호원에게 막혔고 두 번째에 어쩔 수 없이 정승후에게 찾아간 것 같습니다.”“그 발신 번호... 누구야?”“해커로 추정됩니다. 아주 깊게 숨었더군요.”“아무리 깊게 숨어도 찾아내. 대체 어떤 놈이 배후에 숨어있는지 난 반드시 알아내야겠어.”“알겠습니다. 하루만 시간을 더 주시면 바로 그 해커를 눈앞에 가져다드리겠습니다.”이 일만 확실히 밝혀진다면... 적어도 설씨 가문 현재의 세력이 성혜인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있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설우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대화를 마치고 설우현은 또 침대에 누워있는 설연주를 바라보았다.오랜 시간의 고열로 인해 설연주의 이마는 이미 땀범벅이 되었고 손은 여전히 설우현의 소매를 잡고 있었다.아무리 힘을 주어 떼어놓으려고 해도 쉽사리 떨어지지 않으니 결국 설우현도 그녀를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잠에서 깬 설연주는 옆에 앉아 눈을 감고 안정을 취하고 있는 설우현을 바라보았다.잘생긴 얼굴에 다정다감하기까지 하니 설우현은 수없이 많은 전 여자친구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설우현을 쓰레기라고 욕하는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연애할 때만큼은 모든 이에게 마음을 다했던 좋은 남자친구였던 모양이다.열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지만 왠지 이제 설우현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오빠.”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설우현을 부르자 언제 잠자리에 들었냐는 듯 설우현은 바로 눈을 뜨고 죽을 들여오라며 다른 사람에게 당부했다.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