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반승제의 미간이 좁아졌다. 서류 더미에서 고개를 들었더니 밖에 서서 환하게 웃는 성혜인이 있었다. 서천의 풍경은 확실히 아름다웠다. 그 풍경에 성혜인의 웃는 얼굴이 더해지니 마치 따스한 햇볕과도 같았다. 서류를 든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왜 어디를 가도 성혜인을 만나게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성혜인은 반승제의 미세한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한 번 더 노크했다. “반 대표님?”반승제는 시선을 피하며 얘기했다. “타.”성혜인은 문을 열고 차에 탔다. 밖의 햇빛이 매우 강했다. 게다가 점심이어서 더 따가웠다. 문을 열자마자 더운 공기와 함께 성혜인의 체향이 은은하게 풍겨왔다. 뒤에 서 있던 임동원은 성혜인이 차에 타는 것을 확인하고 이 씨의 차에 올라탔다. 3km정도 타고 나왔을 때 앞에 주차된 BMW가 보였다. 임동원이 오늘 끌고 나온 그 차. 하진희는 서서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고 그녀의 옆에는 질이 좋지 않아 보이는 남자가 오토바이에 앉아있었다. 남자는 반승제의 차를 보더니 눈빛이 달라졌다. “진희야, 너 이게 얼마짜리인지 알아?”하진희는 정말 몰랐다. 하지만 이 차는 그녀가 본 가장 예쁜 차였다. “얼마인데?”남자는 얘기하지 않고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2억?”“20억도 넘어!”하진희는 놀란 나머지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20억이 넘는 차라니. 20억짜리 차는 처음 봤다. 20억이면 집을 몇 채나 살 수 있었다. 놀란 그녀는 문득 그 차 뒤의 차에 앉은 임동원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임동원은 어쩔 수 없이 기사와 얘기하고 차를 세웠다. “아버님, 차에 기름이 다 떨어졌잖아요. 나오면서 주유도 안 해요? 어떻게 운전하라는 거예요.”임동원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진희야, 기다려 봐. 내가 동료를 불러서 주유해달라고 할게.”하진희는 차를 훑어보았는데 성혜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순간 20억이 넘는 차를 떠올린 하진희는 설마 성혜인이 그 차에 탔을까 하는 생
하진희는 눈썹을 찌푸렸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앞에 앉은 이 씨는 못 봐주겠는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임 씨 다리도 안 좋은데 앞으로 두 시간은 족히 걸어야 할 거야. 진희는 친구 오토바이 타고 가도 되잖아?”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진희가 반박했다. “햇빛이 너무 강해서 피부가 아플 지경인데 오토바이에 앉고 싶지 않아요. 제 친구는 늙은이랑 같이 타는 걸 안 좋아해서 그냥 가라고 했어요. 아버님 몸은 항상 좋았어요. 많이 걸으면 운동도 되고 좋죠. 그러니까 아저씨, 운전해 주세요.”이 씨는 화가 났지만 임동원이 이미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니 뭐라고 할지도 몰랐다. 임동원은 뜨거운 햇빛에 따가워서 어지러웠지만 더는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기도 어려웠다. 그냥 걸어갈 셈이었다. 하늘에 리조트에 도착한 성혜인은 차에서 내려 뒤따라 들어오는 차를 보았다. 책임자 몇몇이 차에서 내리고 마지막으로 하진희가 내렸다. 하진희는 반승제를 보고는 놀란 나머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렇게 잘생긴 남자는 그녀의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게다가 기품도 흘러넘쳐 정장을 입은 모습이 묘하게 섹시하면서 도도했다. 이런 사람과 함께한다면 그 어떤 대가도 아깝지 않았다. 하진희는 마음이 급해 반승제의 앞으로 다가갔다. “반 대표님이시죠? 안녕하세요. 서천에 온 걸 환영합니다. 사실 서천에 아름다운 곳이 여러 곳 있는데 괜찮으시다면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그러는 김에 밥도 한 번 사고요.” 하진희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반승제에게 향했다. 숨길 마음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반승제의 표정이 삽시에 어두워졌다. 책임자들이 서로 눈치를 보더니 하진희를 끌어내렸다. 하진희는 발버둥 치며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반 대표님이랑 대화하는 것도 안 돼요? 아까는 반 대표님이 오늘 하루 서천에 있을 거라고 얘기했잖아요. 내가 서천 주민으로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데 왜 막아요!”하진희의 탐욕스러운 시선은 20억이 넘는 차에 머물렀다가 또 반승제의 얼굴에 고정됐다.
하진희의 목청은 아주 컸고 전혀 줄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반승제는 발걸음을 멈칫하며 덤덤한 눈빛으로 피식 비웃었다. 성혜인은 그에게 남편과 아주 사이 좋다고 말한 적 있었다. 하지만 인제 보니 현실은 완전히 딴판이었다.부부 사이가 좋지 못하면 이혼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여태껏 이혼하지 않은 걸 보면...‘남편을 그 정도로 좋아하나?’성혜인은 억지를 부리는 하진희 때문에 약간 짜증이 나서 휴대전화를 꺼내 임동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성혜인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지금의 실외 온도는 36도에 달했고 지나다니는 사람 한 명 찾기 어려웠다. 이런 날씨에 걸어 다니다가 길가에서 쓰러져도 발견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우리 일단 외삼촌부터 찾으러 가자.”하진희는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싫어. 갈려면 나한테 2000만 원을 주고 가.”성혜인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낯짝 두꺼운 것도 도가 있어야지, 도대체 얼마나 멍청해야 이런 말을 한단 말인가. 그녀는 예리한 시선을 물었다.“뭐라고?”하진희는 머리를 쳐들며 다시 한번 말하려다가 성혜인의 싸늘한 시선과 마주치고 금세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몸을 흠칫 떨더니 말을 얼버무렸다.“사, 사람을 왜 그렇게 쳐다봐?”성혜인은 하진희처럼 뻔뻔한 사람은 처음 봤다.“외삼촌이랑 외숙모가 너를 내버려 둔다고 해서 나도 마찬가지인 건 아니야. 경고하는데 앞으로 내 앞에서 알짱거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하진희는 약간 풀이 죽었지만 그래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며 말했다.“날 협박할 생각이라면 그만둬. 네 집안사람 때문에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데? 괜히 네 사촌 오빠한테 시집갔다가 버림받고 평생 책임져 주겠다는 말 하나 믿고 기다렸는데... 퉤, 네 집안사람은 평생 나한테 속죄하며 살아야 해!”성혜인은 더 이상 하진희를 상종하지 않고 차에 타서는 임동원을 찾으러 나섰다. 그녀는 도로를 따라 천천히 운전하며 계속 임동원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반 시간 정도 운
임동원이 더위 먹은 마당에 따져봤자 소용없었기에, 성혜인은 그저 머리를 끄덕이며 답했다.“알겠어요, 외삼촌.”임동원은 미안한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네 외숙모가 얼마 전 소시지를 만들었는데 좀 가져가려무나. 물론 김치도 있다. 네가 가장 좋아하던 것들 말이야.”“네.”성혜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병원으로 향했다. 이때 외숙모 이소애가 왜 아직도 안 돌아오는지 묻기 위해 전화를 걸어왔다.“외삼촌이 더위 먹어서 지금 병원으로 가고 있어요. 아마 좀 늦게 돌아갈 것 같아요.”이소애는 다급한 말투로 물었다.“어느 병원이니? 나도 바로 출발할게.”성혜인은 병원 이름을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여보세요? 성혜인 씨가 내놓으신 매물이 금방 팔렸는데 직접 와서 계약서에 사인해야 해요. 혹시 언제쯤 시간이 되실까요?”‘그 집이 팔렸다고? 다행이네... 그럼 일단 선불로 낼 돈은 생기겠어.’성혜인은 이렇게 생각하며 답했다.“제가 지금 지방에 내려와서요. 돌아가자마자 연락드릴게요.”“네. 저번에 돈이 급하다고 그러셨죠? 계약서에 사인하고 은행 수속도 해야 하니까 시간이 적어도 반 달은 걸릴 거예요. 그러니 최대한 빨리 연락해 주세요.”“네, 알겠습니다.”한 가지 일을 해결하고 난 성혜인은 드디어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덕분에 할아버지가 돌아온 후, 포레스트 펜션에서 반승제와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성혜인은 생각 정리를 끝내고 임동원이 있는 병실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임동원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혜인아, 나 이제 괜찮아진 것 같으니 입원할 필요 없어. 병원에 있어봤자 돈만 낭비하지 않나. 집에서 며칠 쉬는 편이 훨씬 좋으니 집으로 데려다주려무나.”“입원비는 제가 낼 테니 돈 걱정 하지 마세요.”성혜인의 설득에도 임동원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렸기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약을 받고 집까지 데려다줬다.집에서 이소애는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고 초대했다. 하지만 성혜
반승제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져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들어와.”성혜인은 혹시라도 반승제가 말을 바꿀까 봐 후다닥 그의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반 안에는 커다란 테이블이 있었는데 열려 있는 노트북과 서류 더미가 한눈에 들어왔다.성혜인은 문득 반승제가 BH그룹 후계자로 선택받은 이유가 어쩌면 재능이 아닌 노력 덕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커다란 책임을 짊어질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나지는 않는다.성혜인은 일부러 테이블 근처로 가지 않고 의자를 찾아 앉았다. 반승제는 테이블 앞으로 가서 펜과 서류를 들더니 결재를 시작했다. 일에 집중한 반승제의 모습은 아주 차가웠고 함부로 가까이하지 못할 기운을 갖고 있었다. 그의 등 뒤로 창밖의 가로등이 비췄고 바닥에 희미한 그림자를 남겼다. 그의 머리카락은 웜톤 불빛에 의해 금빛으로 물들었다.손이 근질근질했던 성혜인은 펜과 종이를 찾아와서 반승제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데 어우러진 그의 선, 빛, 기운, 그림자는 통증을 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게 바로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다는 말인가 싶기도 했다.성혜인이 관찰을 넘어 감상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노크하고 반승제가 짧게 답했다.“들어와요.”심인우는 포장된 음식을 잔뜩 들고 들어왔다. 그는 성혜인도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대표님, 일단 저녁부터 드세요. 8시부터 한 시간 동안 회의를 하고, 9시 반부터 또 해외 회의를 해야 하잖아요.”반승제는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수저 세트를 하나 더 챙겨줘요.”심인우는 반찬을 내려놓다 말고 전화를 걸어 수저 세트를 갖고 오라고 지시하고는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배가 너무 고팠던 성혜인은 반승제가 말하기도 전에 먼저 음식 앞으로 왔다. 그녀는 냄새만 맡아도 벌써 군침이 돌았고 배에서 우렁찬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녀는 순간 얼굴이 빨개졌고 반승제는 그저 피식 웃기만 했다. 비록 반승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음
성혜인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심인우가 밖에서 걸어들어오더니 반승제의 곁으로 와서 말했다.“대표님, 성씨 집안에서 함께 식사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습니다.”‘식사?’반승제는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반태승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을 더 꽉 붙잡기 위해 얕을 수를 쓰는 성씨 가문을 그는 미움을 넘어 증오했다.“거절해요.” 심인우는 머리를 끄덕이다가 한 마디 보탰다.“성휘 씨는 성혜인 씨가 대표님과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대요. 대표님을 위해 요리 연습도 하고 계신답니다.”이 대화의 주인공인 성혜인은 반승제의 앞에 앉아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딸을 이용해 반승제의 환심을 사려는 아버지가 너무나도 실망스러웠다. 그리고 그의 방식은 반승제의 혐오만 일으킬 뿐이었다.역시 반승제는 성혜인의 예상대로 단호하게 답했다.“계약서에 적힌 조항 외에는 꿈도 꾸지 말라고 전해줘요.”심인우는 머리를 끄덕이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반승제는 성혜인을 바라보며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어?”성혜인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는 배가 불렀다고 말하려고 했어요. 대표님은 계속 드실래요?”반태승에 성씨 집안까지 더 해져 방승제는 완전히 입맛을 잃었다. 성혜인은 그가 대답 없는 것을 보고 말없이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성혜인은 반승제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상관없었다. 두 사람은 어차피 일 적으로만 연결된 낯선 사람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반승제와 한 번 만나보겠다고 성묘를 위해 지방으로 내려온 딸을 이용해 먹으려는 아버지의 방식이 너무 우스웠다.예전의 성혜인은 단 한 번도 아버지가 누군가를 편애한다는 생각을 한 적 없었다. 예전에는 또 그녀를 위해 소윤 일가를 집에 들이지 않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은 변하기 시작했다.이때 반승제의 목소리가 성혜인의 생각을 끊었다.“정리할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넌 이만 돌아가.”성혜인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대표님은 모레 제원으로 돌아가요?”“내일.”반승제는
이소애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고, 임동원은 곁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성혜인은 하진희를 보는 체도 하지 않았다.“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임동원과 이소애는 그녀를 큰길까지 데려다주려고 나섰다.성혜인은 잠깐 고민하다가 임동원에게 물었다.“외삼촌, 서천이 재개발한다는 소식이 있다면서요? 만약 인화동을 철거한다면 그 돈은 어떻게 쓸 거예요?”작은 도시는 집값이 쌌기에 2억 원쯤만 있으면 세 사람이 살기에도 넓은 집을 살 수 있었다.철거 얘기가 나오자 임동원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네 사촌 오빠가 빌린 사채 2000만 원을 갚고 더 좋은 집을 사야지. 혜인아, 혹시 무슨 소식을 들은 게냐?”임동현은 성혜인이 재개발을 하는 사람과 같은 차에 올라탄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아직 확실하지는 않아요. 그래도 두 분 잘 상의해 보세요. 두 분도 나이가 많은데 모든 돈을 다 하진희한테 주면 안 되죠.”임동원이 마른기침을 하며 말했다.“진희가... 사람은 참 좋아. 조금 게을러서 그렇지.”“그래, 너무 신경 쓰지 마.”더 이상 말해 봤자 그들이 들을 것 같지 않았기에 성혜인은 인사치레 말만 하다가 차에 올라탔다.임동원은 상기된 표정으로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혜인이 말을 들어보니 무조건 철거가 될 것 같군. 여보, 우리 돈 좀 빌려서 집을 사는 건 어떻겠소? 만약 철거된다면 하루아침에 부자가 될 거요!”이소애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인화동에는 나이 많은 어르신이 아주 많았다. 대부분 자식을 큰 도시로 보내고 따로 사는 노인이 아니면, 한 식구가 전부 한 집에 모여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만약 지금 집을 샀다가 철거 소식이 퍼지면 전 집주인과 원수를 지을 게 뻔했다.“아무래도 진희랑 얘기를 해봐야겠소. 내가 어제 혜인이 비싼 차에 타는 걸 봤는데, 그 사장이 분명 알려준 게 있을 거요. 이건 틀림없이 돈을 벌 중요한 기회니까 일단 차랑 땅을 팔고 돈을 좀 빌려서 집 두 채 정도 사면 몇억 원이 몇십억으로 불어날 거요!”고민하고 있던 이소
성혜인은 심호흡하며 반승제를 바라봤다.“대표님, 만약 제원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제 차를 타세요.”하진희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초조해졌다. 그녀는 성혜인을 라이벌로 인식했다.“네년이 감히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를 유혹해? 어쩐지 인사까지 다 하고 다시 돌아왔다 했네. 이 차도 네가 부순 거지? 곁에서 쭉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지?! 너처럼 뻔뻔한 사람은 처음 봤어! 대학도 나왔다는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낯짝이 두꺼워?”고요한 하늘에 리조트에는 하진희의 목소리만 들렸다. 그녀의 고함에 구경꾼은 점점 더 많이 모였다.성혜인은 화를 참기 위해 입술을 꼭 깨물었다. 만약 하진희가 사촌 형수가 아니었더라면 진작에 뺨을 후려갈기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임동원과 이소애를 봐서라도 꾹 참고 하진희가 행패를 부리도록 내버려 뒀다.성혜인이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 하진희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계속 떠들어댔다.“학력이 높으면 뭐 해. 남편 몰래 다른 남자한테 꼬리 흔드는 건 똑같은데. 네 남편은 자기 몰래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기나 해? 왜 대답이 없어? 내가 정곡을 찔렀지?”하진희는 또 미소를 지으며 반승제를 바라봤다.“대표님~ 이 년이 이런 사람이에요~ 이번에도 대표님을 미행해 서천까지 왔을 거예요.”성혜인은 어이가 없었다. 누구보다 그녀가 성묘하러 왔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 입만 열면 헛소리를 지껄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과는 말해 봤자 통하지 않을 것이다.하진희가 또 뭐라 말하려고 할 때, 반승제가 옆 사람에게 말했다.“CCTV를 확인하죠.”이번 사달 때문에 일정이 지연되어서 심인우는 잔뜩 화난 표정으로 서 있다가 말했다.“이 차는 가격이 30억쯤 됩니다. 사고를 낸 분은 감옥에 가고도 남겠죠. BH그룹 변호사가 제원에서 오고 있으니 다들 떠나지 말고 기다려 주시길 바랍니다. 피해 배상은 적어도 15억 원이 될 것이고 협상은 없습니다.”심인우의 말이 바로 반승제의 뜻이었다.반승제는
온시환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걸려 있던 재킷을 집어 들고 바로 문을 나섰다.공지민은 식탁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너무 피곤했다.한편 온시환은 집을 나서자마자 추지성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 문을 열자마자 거실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온시환은 침착하게 옷을 발로 밀어내고 소파에 앉았다.거실 한가운데에서 추지성은 한 여인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는 온시환을 보자마자 놀란 나머지 금세 흥미를 잃고 입맞춤을 멈췄다.“시환아?”추지성의 품에 안겨 있던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당황한 듯 몸을 움츠렸다.온시환은 담배를 피우며 그들을 무시했다.추지성은 이마를 문지르며 품에 안은 여인을 부드럽게 달랬다.“이만 가봐.”여인은 옷이 주워 입으며 서둘러 방을 나가자 추지성은 타올 하나만 걸친 채 태연하게 소파로 와서 앉았다.“야, 너 다음부터 올 때는 전화 좀 하고 와라.”온시환은 담배를 쥔 손이 축 늘어진 채 지쳐 보였다.추지성은 의아했다. 분명 어젯밤에는 공지민과 화해한 것처럼 보였는데 어째서 오늘은 이 모양인가 싶었다.“무슨 일이야? 아침에 전화로 자랑질하더니만. 아, 맞다. 너 점 다시 찍었더라? 확실히 점 있는 네가 낫다. 예전에 다른 여자들도 그 점이 좋아서 너한테 홀렸잖아.”온시환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지민이가 태도를 바꾼 이유는 구은우의 죽음을 조사하려는 거였어.”추지성은 옆에 놓인 주스를 집어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죽은 사람의 일을 왜 조사해? 이게 몇 년 전 일이냐. 다 끝난 거잖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난 가끔 여자들이 이해가 안 돼. 남자라면 이미 새로운 연애 몇 번은 했을 텐데.”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봐봐. 주변에 아내 잃은 남자들 있지? 그놈들 지금 얼마나 잘 놀고 다니는지 알잖아. 근데 남편 잃은 여자들은? 평생 못 벗어나.”추지성의 가족 이야기도 이어졌다. 그의 친누나는 난
공지민은 정말 지쳤다. 밤새 몇 번이나 잠들 뻔했지만 온시환이 계속 그녀를 깨웠다. 그녀는 자신의 위에 엎드린 온시환을 바라봤다. 그의 볼은 붉게 달아올랐고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이 끊임없이 떨어졌다.온시환이라는 이 나쁜 남자 몸매 하나는 참 잘 관리했다.공지민은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문득 생각했다. 그녀는 코끝에 점이 있는 온시환이 더 좋았다. 만약 점이 없었다면 그와 대화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을 것이다.한편 온시환은 그녀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자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빌어먹을.’공지민이 이 점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다행히 다시 그 점을 되돌려 놨다.온시환은 그녀의 뒤통수를 붙잡고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부었다. 마치 그녀를 자신의 몸속으로 흡수해 버리고 싶어 하는 듯했다.그날 공지민은 하루 종일 잠들어 있었다.원래 아침에 일어나 사골국을 끓이려고 했지만 전날 밤 온시환의 끈질긴 괴롭힘에 결국 일어날 힘조차 없었다.깨어났을 땐 창밖에 저녁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돌리며 온시환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다.“그래, 점 다시 찍었어. 신경 꺼. 쪽팔려도 내가 쪽팔려. 너랑 무슨 상관인데. 자꾸 그딴 소리하면 화낼 거야.”지난번 온시환이 점을 제거했을 때 많은 사람이 물었다. 그는 그냥 없애고 싶어서 없애는 거라며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말해 왔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점을 다시 찍자 많은 사람들이 이유를 궁금해했다.온시환은 아무에게도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추지성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온시환은 그에게 심한 말을 퍼부었다.사실 추지성이 온시환을 부추기지만 않았더라도 그와 공지민이 이렇게까지 어긋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추지성은 여전히 냉철했다.“지난번에 너희가 금방 헤어지고 네가 병원에 실려 갔을 때도 지민 씨는 한 번도 널 보러 오지 않았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돌아온 걸 보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나는 너희가 다시 잘되길 반
하지만 택시 기사는 여전히 믿지 않는 눈치였다. 공지민이 내리려 할 때까지도 계속 말했다.“내가 보니까 그 남자 친구 참 괜찮아 보이던데. 뒤따라오는 저 차도 그 사람 거죠? 아무리 싸웠어도 아가씨 혼자 차 타고 가는 거 걱정돼서 저렇게 따라오는 거 아니겠어요?”공지민은 시선을 돌려 멀리 있는 차를 바라보았다.온시환의 차가 틀림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과거의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시급했다.집에 도착한 공지민은 곧장 인터넷에서 그 남자 배우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하지만 검색 결과는 이름 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그의 가족에 대한 부분은 아예 생략돼 있었다.하는 수 없이 그녀는 예전에 알던 몇몇 기자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혹시라도 남자 배우의 어머니와 동생에 대한 정보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묻기 위해서였다.공지민은 연예계에서 활동한 지 꽤 오래되었지만 인맥을 쌓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사교를 좋아하지 않는 그녀로서는 이번 조사가 더욱 쉽지 않았다.소파에 앉아 돈을 송금하며 기자들에게 의뢰했지만 돌아온 정보는 여전히 부족했다.남자 배우의 어머니와 동생의 연락처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마음이 초조해진 공지민은 한숨을 내쉬며 창가로 다가갔다. 분명 실마리를 찾았지만 어떻게 조사해야 할지 막막했다.그때 공지민의 시야에 여전히 아래에 서 있는 온시환의 차가 들어왔다.만약 온시환이의 능력이라면 이런 조사는 금세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공지민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결국 결정을 내리고 집 문을 열었다.아래로 내려온 그녀는 온시환의 차 앞으로 걸어갔다.운전석에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던 온시환은 공지민을 보자 깜짝 놀란 듯했다.공지민이 창문을 두드리자 그가 곧바로 창문을 내렸다.“시환 씨.”온시환은 그녀가 자신을 쫓아내려는 말이라 생각했지만 공지민은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코끝에는 예전과 똑같은 점이 다시 자리 잡고 있었다.순간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공지민은 남자의 말을 들으며 그를 부축했다. 남자는 술이 정말 많이 취했는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녀가 무슨 질문을 해도 다 대답했다.10억...엘리베이터가 한 층에서 멈췄을 때 공지민은 그를 문 앞까지 데려다주었다.남자는 자신의 방 카드를 꺼냈고 공지민을 향한 시선은 이미 노골적인 의도를 담고 있었다.공지민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지만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그녀는 그가 건넨 카드를 받아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손목을 잡아 막았다.뒤를 돌아보니 온시환이었다.온시환은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그렇게 공지민은 그의 가슴팍에 부딪혔고 옆에 있던 남자 배우는 누군가 자신을 막으리라 예상하지 못했는지 멍하니 있다가 온시환의 얼굴을 보곤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온 작가님?”온시환은 공지민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엘리베이터 쪽으로 데려갔다.공지민은 원래부터 이 남자와 뭔가 할 생각이 없었기에 저항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차가운 얼굴로 버튼을 눌렀다.하지만 그의 감정은 몹시 불안정해 보였다.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을 때 그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공지민, 너 그렇게 절박해?”‘절박해’라는 말이 그의 목에서 걸리는 듯했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려 했지만 너무 떨려 담배는 그의 손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굴러갔다.공지민은 온시환이 오해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남자 배우와 관련된 조사에 쏠려 있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반드시 구은우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고 결심했다.큰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나가자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온시환이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아래층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모임 장소는 고급스러워서 촬영을 마친 여러 제작팀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오늘 밤에도 몇몇 팀이 이곳에 모여 회식을 하고 있었다.연예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온시
아니나 다를까 공지민은 무언가에 찔린 듯 온시환을 올려다보며 매섭게 노려보았다.온시환은 어깨를 으쓱하며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몇 장만 훑어봐도 이것이 전형적인 불평등 계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공지민은 자리를 뜨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공지민, 난 저 남자가 왜 너랑 자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안 가. 너 침대에서 꼭 통나무 같은데, 누가 통나무에 흥미를 느낄 수 있겠어?”공지민은 순간 발걸음이 멈칫했지만 그런 말은 전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온시환은 자리에 앉아 입꼬리를 비틀며 웃음을 흘렸다.말로 그녀를 상처 주는 건 소용없었다.하지만 구은우를 건드리는 말은 달랐다.대체 얼마나 좋아했기에 이미 세상을 떠난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도 여전히 잊지 못한단 말인가.그 이후로 공지민은 어디를 가든 온시환과 마주쳤다.한두 번은 우연이라 여길 수도 있었지만 일곱 번, 여덟 번이 되니 명백히 의도적인 것이었다.온시환은 예전처럼 가벼운 태도로 사람들과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시선은 항상 공지민을 따라다녔다.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그의 곁에는 여자들이 없다는 것이다.공지민이 그 모임에 참석한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맡았던 배역의 촬영이 끝났기 때문이다. 원래 짧게 등장하다 사라지는 조연이라 비중도 크지 않았다. 오늘의 자리는 남자 주인공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고 모두가 남자 주인공을 둘러싸고 아부 섞인 말을 건네고 있었다.그런 남자 주인공은 또 온시환에게 다가가 비위를 맞추려 애썼지만 온시환은 겉으로는 부드럽게 대해주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공지민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취해 옆 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때 우리 엄마가 내 동생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어. 어디로 갔는지 몰라. 그 대신 한 생명이 대신 희생됐지. 내 동생은 원래 수영할 줄 알았는데, 일부러 못 하는 척했던 거야.
구은우는 대학교 1학년 때 공지민과 사귀었다. 두 사람은 함께 바다로 놀러 갔다가 구은우가 파도에 휩쓸린 아이를 구하려다 익사하고 말았다. 아이는 무사했지만 구은우는 구조된 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을 거두었다.‘진짜 죽었네.’온시환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내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그는 담배를 다시 피우고 싶었지만 추지성이 그의 손 가까이에 있던 담배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또 피우려고? 오늘 하루에 대체 몇 대나 피운 거야? 게다가 여긴 병원이잖아. 금연 구역이라고.”온시환은 갑자기 흥미를 잃은 듯 창밖을 바라보았다.한편 추지성은 서류를 한 번 살펴본 뒤 감탄을 내뱉었다.“와, 운명도 참 잔인하네. 그렇게 사랑하던 두 사람이 같이 놀러 갔는데, 결국 한 사람이 사고로 떠나버리다니. 남겨진 사람은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지. 아마 끊임없이 생각할 거야. 그날 바다에 가지 않았더라면, 다른 곳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그런데 말이야, 구은우는 공지민이 가장 사랑했던 해에 떠났어. 그리고 그해는 구은우가 공지민을 가장 사랑했던 해이기도 했지.”구은우는 열여덟 살 공지민의 삶에서 서서히 퇴장했다. 이후로 누가 나타나더라도 구은우를 대신할 순 없었다.이게 바로 운명의 장난이었다.추지성은 이제는 공지민에 대해 별다른 비난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온시환 자신도 말하지 않았던가. 공지민에게 그저 장난이었다고. 결국 장난이 과해져 자신은 벗어나지 못하고 그녀는 가볍게 떠난 것뿐이었다.“그런데 시환아, 너 눈치챘어?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해가 네가 수술을 받았던 해랑 딱 겹쳐. 뭔가 운명 같지 않아?”온시환은 그런 운명 따위 믿지 않았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적으로 웃었다.“남을 구하겠다고 여자 친구를 내버려두고 자기희생을 포장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결국 구해줬다는 그 아이는 당일 엄마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가버렸고,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어. 이게 무슨 소용이야? 차라리 짐승을 구하는 게
온시환은 그대로 계단 위에 앉아 있었다. 고급 원단으로 만든 정장에 먼지가 묻어 뿌옇게 됐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일 꼭대기 계단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이 그를 다시 끌어당기려 하자 온시환은 그녀의 손길을 피하며 말했다.“지민아, 오늘 밤의 달 좀 봐.”공지민은 그의 말에 따라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봤다. 오늘 달은 분명 아름다웠고 내일 날씨가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며 신중하게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 네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지민은 발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공지민이 떠나는 것을 본 온시환은 당황해 급히 뒤쫓으려다 그만 술에 취한 상태로 균형을 잃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공지민은 온시환을 오래 알고 지냈지만 이렇게까지 망가진 모습으로 본 적이 없었다.그는 흙투성이가 된 정장차림으로 그녀의 발치에 쓰러져 있었다. 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다리가 심하게 다친 듯 몇 번을 시도해도 실패하고 말았다.강렬한 통증이 그의 정신을 어느 정도 맑게 해주었고 그제야 그는 현실을 자각했다.‘이건 꿈이 아니야. 지민이가 정말 나를 보러 온 거야.’공지민은 그의 모습을 보며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다쳤다면 걱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병원에 가요. 내가 데려다줄게.”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시키는 대로 따라나섰다.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온시환은 공지민의 손목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손을 뿌리치고 떠날까 봐 두려워하는 아이 같았다.공지민은 옆에 있던 의사에게 물었다.“얼마나 쉬어야 하나요?”“2주 정도는 안정이 필요해요. 당분간은 목발을 써야 할 거예요.”공지민은 병원 매점에서 목발을 사서 병실로 돌아왔다. 병실에 들어섰을 때 온시환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모습은 그녀가 알고 있던 온시환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공지민은 목발을
온시환이 집에 돌착했을 때도 서주혁의 팔을 붙잡고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렸다.서주혁이 그를 떼어내면 온시환은 다시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지민아...”“난 정말 모르겠어. 왜 날 대체품으로 삼았어? 그렇게 구은우가 좋으면 그냥 그 사람 찾아가면 되잖아. 왜 나한테 와서 이러는 건데.”“내가 네 장난감이냐, 나는 당해도 싸다 이거야?”서주혁은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창피해서 버리고 가버리고 싶었다.온시환이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한동안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서주혁은 가정부에게 그를 잘 돌봐달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온시환의 집을 나섰다. 취한 사람과 더 이상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서주혁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온시환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가버렸다....공지민이 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 조금 황당했다. 경찰은 온시환이 음주 운전을 하다 적발되었으니 와서 그를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다.“공지민 씨 맞으시죠? 죄송하지만, 친구분을 데려가 주실 수 있을까요? 음주 운전은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다른 사람에게 연락하면 안 될까요?”“그분께서는 당신에게만 연락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와도 따라가지 않을 거라고 했고요.”공지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이 밀려왔지만 결국 경찰서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벽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잠든 그의 모습은 차분해 보였고 평소의 산만한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공지민은 경찰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뒤, 온시환이 다시는 음주 운전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다는 보증을 하고 나서야 그를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그녀는 그의 소매를 잡아 살짝 당겼다.온시환은 희미하게 눈을 뜨더니 그녀를 보고 꿈을 꾸는 줄 알았다.갑자기 꿈속 공지민의 얼굴이 사라질까 봐 눈도 깜빡일 수 없었다.“지민아?”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 안으려고 했다.그러나 공지민은 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차가운 태도로 거리를 두었다.“대체 원하는 게
한편, 반승제는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고 온시환과 공지민 사이의 일을 알아내기 시작했다.하지만 지금 온시환은 공지민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과민 반응을 보이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면서 자꾸 대체품 어쩌고 하는 말을 내뱉었다.반승제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과일주스를 건네주었다.“무슨 대체품이야? 설마 네가 지민 씨한테 대체품으로 이용당했다는 거야?”‘와, 이렇게 자극적인 일이 벌어지다니.’“맞아! 지민이는 정말, 정말 나쁜 여자야.”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온시환이 떠올릴 수 있는 비난은 고작 이 정도였다.정신이 온전할 때는 입에 담기 힘든 독설도 가능했지만 술에 취한 지금은 속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그녀에게 차마 험한 말을 하지 못했다. 공지민이 지금 자신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굴고 있든지 간에.결국 다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예전에 공지민에게 좀 더 잘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어쩌면 그녀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었을지도 모른다.그랬다면 지금처럼 그에게 이 정도로 냉담하지 않았을 것이다.온시환은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반승제는 그의 말을 들으며 꽤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그는 모은 정보를 모두 성혜인에게 보냈다.[시환이가 대체품이었대.]성혜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메시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온시환이 대체품이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더욱 경악했다.한참 후에야 그녀는 단 세 글자로 답장을 보냈다.[꼴좋네.]누구나 알다시피 온시환은 바람둥이였다. 과거 여러 모임에서 그는 여자를 농락하는 말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진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그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여자를 상처 입혔는지 밤마다 잠 못 들게 했는지를 생각하면 이제는 그가 상처받고 잠 못 이루는 날이 오는 것도 당연했다.성혜인은 이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온시환은 술에 취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서주혁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지인이는 대체 무슨 생각이야?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날 좋아하지 않았던 거야?”서주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