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승제는 익숙한 목소리에 시선을 들어 앞까지 걸어온 성혜인을 마주했다. 그제야 목걸이의 번호를 확인한 그는 번호가 익숙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겨울이는 성혜인을 보고 흥분해서 일어나 미친 듯이 꼬리를 흔들었다. 손에 쥔 돈 봉투가 너무도 눈에 띄었기에 성혜인은 반승제에게 주는 대신 심인우에게 주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겨울이가 집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몰래 나갔더라고요. 귀찮게 해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심인우는 잠깐 망설이다가 덤덤하게 돈 봉투를 건네받았다. 성혜인은 그의 손에서 목줄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그제야 목줄의 손잡이에 쓰여 있는 영문을 발견했다.HERMES“...”개 목줄이 에르메스라니. 10만 원으로는 턱도 없었다. 성혜인은 핸드폰을 꺼내 들고 물었다. “이 목줄 얼마예요? 제가 드릴게요.”그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비난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돈 많은 사람들은 돈을 막 쓰네. 개 목줄까지 명품이라니.’“페니 씨, 괜찮습니다.”성혜인은 자신이 10만 원을 준 것이 반승제를 모욕했을 뿐만 아니라 반승제의 비서까지 모욕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미 준 데다가 더 보태주겠다고 하는 것도 애매했고 다시 빼앗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행히 반승제가 컴퓨터를 끄고 블루투스 이어폰을 뺐다. 성혜인은 목줄을 짧게 잡아 겨울이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막았다. 반승제가 성혜인의 곁으로 지나가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겨울이는 반승제가 맘에 들었다는 듯 혀를 내밀고 반짝이는 눈으로 반승제를 바라보았다. 겨울이는 반승제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의 주인처럼 말이다. 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페니?”성혜인이 대답하기도 전에 겨울이가 '멍' 짖으며 먼저 대답했다. 마치 반승제에게 대답하는 듯했다. 반승제는 가볍게 웃고는 그대로 떠나가 버렸다. 성혜인은 부끄러워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그대로 자리에 굳어있다가 고개를 숙여 겨울이를 쳐다봤다. “널 부른 것도 아닌데 왜 짖은 거야.”성혜인이 손
성혜인이 집에 들어서자 스물여덟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다리를 꼰 채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외숙모인 이소애는 주방에서 요리하고 있었는데 마치 상전을 모시는 듯했다. 소파에 앉아있던 여자는 성혜인을 보더니 먹고 있던 사과를 내려놓았다. “어머, 도시 사람이 왔네? 집은 더러우니까 알아서 앉고 싶은데 앉아.”임동원과 이소애, 두 사람의 얼굴에 다 어색함이 드러났지만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이소애는 성혜인을 끌어다가 걱정하며 물었다. “살 빠졌네, 혜인아. 너희 애비가 혹시 그 여자만 예뻐하느라 너에게 소홀한 것이 아니냐?”“무조건이죠. 어머님이 돌아가신 지 몇 년인데. 남자는 원래 다 그래요. 더 예쁜 걸 보면 정신을 못 차리죠.”얘기하는 것은 그 스물여덟 정도의 여자였다. 성혜인의 사촌 형수이기도 했고 이 집안의 며느리이기도 했다. 그녀는 깐깐한 모습으로 주방을 한 번 쳐다보고는 또 말을 이어갔다. “요리도 아직 다 못했으면서 감성팔이는 무슨.”이소애는 먼저 성혜인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혜인아, 일단 앉아. 두 가지 요리만 더 하면 되니까.”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상대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 “내가 말한 게 틀렸어? 네 집 재산은 지금 모두 그 여자 거잖아. 네 아버지는 제사 지내러 안 오신 지 몇 년이나 됐더라? 지금 너를 곁에 두는 건 네가 아직 쓸모 있기 때문이야.”성혜인은 고개를 살짝 들어 사촌 형수를 쳐다보며 속으로 화를 삼켰다. “우리 집 일은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돼.”하진희는 또 눈을 흘기며 얘기했다. “그러게. 네 집이 도시에서 그렇게 돈도 많고 큰 회사도 운영하고 차도 몇억씩 한다며? 나 같은 일반인과는 다르겠지. 우리가 평생 벌어도 네가 하루에 버는 돈보다 적을 테니.”임동원은 성혜인을 말리며 둘이 싸우지 말기를 바랐다. 성혜인은 그저 심호흡하며 하진희를 시야에서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진희는 흥하고 콧방귀를 뀌고는 자기 침실로 돌아갔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세
이 씨도 이런 차는 처음 봐서 자랑하고 싶었다. “혜인아, 저 차 봤어? 듣기로는 몇십억씩 한다던데 오늘 중요한 손님이 오셨나 보다. 책임자들이 같이 술 마시러 갔을 때 그분이 벽이 비어 보인다고 해서 네가 생각났다. 이런 분들의 요구가 까다롭긴 하지. 게다가 이런 차를 모는 사람이면 성격도 안 좋을지 몰라. 하지만 부담 갖지 말아.” 성혜인은 그가 부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작게 웃었다. “알겠어요, 아저씨. 먼저 들어가세요.”이곳, 하늘에 리조트는 서촌에서 가장 좋은 호텔이었다. 5성급 호텔의 기준으로 만들어졌는데 일반인한테는 개방하지 않고 주로 서촌에 투자하러 온 기업인을 접대했다. 성혜인도 처음 들어가 보는 것이었다. 들어서니 정원이 엄청 아름다웠다. 곳곳에 정자와 분수가 있었다. 게다가 목재의 선택도 꽤 많은 공을 들인 것이 보였다. 성혜인이 그림을 그리러 온 것이라는 것을 알자 얼른 그녀에게 방을 소개해 주었다. “물감은 다 준비되었는데, 지금 가서 보실 건가요?”성혜인은 상대가 급해한다는 것을 알고 자기 물건을 빨리 정리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드릴게요.”도착한 후에야 보니 그 벽은 너무도 눈에 띄는 곳에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은 다 볼 수 있었다. 3미터 정도였는데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에 비해 텅 빈 흰 벽은 어딘가 아쉬워 보였다. 성혜인은 준비된 물감을 확인해 보았다. 그녀가 평소에 쓰던 것과 다르지만 나쁘지 않았다. “이따가 시작할게요.”옆의 사람은 성혜인에게 조심하라고 얘기하려고 했다가 그녀가 제원 미술 아카데미 출신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말을 삼켰다. 성혜인은 옆의 의자에 앉아 머릿속으로 구상했다. 여기에는 물감의 농담을 이용한 수묵화가 가장 잘 어울릴 것이다. 터치가 너무 많으면 복잡해 보이기에 최대한 적게 그려야 했다. 속으로 생각을 마친 그녀는 물감을 취하기 시작했다. ...접대받은 방에 돌아온 반승제는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오늘 나온 사람들은 모두 현지 회사의 책임자였다. 다 나이가
반승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마구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어제는 성혜인의 강아지 때문에 안 들어도 되는 욕을 먹었고, 오늘은 저녁에 서촌까지 와서 옷에 물감을 뿌리고. 반승제는 자신이 전생에 성혜인에게 큰 죄를 지었나 싶을 정도였다. 성혜인은 또렷한 남자의 얼굴에 그제야 이게 환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성혜인도 그녀가 사고를 쳤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실수를 무마해 보려 했다. “반 대표님, 여벌옷이 있으세요? 이건 제가 세탁해 드릴게요.”반승제는 그녀의 손에 있는 팔레트를 보고 돌아서서 몇 걸음 걸어 나갔다. 성혜인은 그 자리에 서서 머리를 싸쥐었다. 왜 매번 이런 일이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인지. 반승제는 성혜인이 가만히 서 있는 것을 보고 얘기했다. “세탁해 준다며? 네가 물감을 뿌렸으니 네가 책임져야지.”성혜인은 총총걸음으로 뒤따라갔다. “제가 꼭 책임지겠습니다.”“1600만.”그는 덤덤한 어투로 성혜인을 바라보았다. 성혜인은 무슨 뜻인지 몰라서 황당해하고 있다가 그제야 1600만이 셔츠의 가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렇게 비싼 옷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검은색 물감 때문에 씻겨질지도 미지수였다. 살짝 긴장된 성혜인은 쭈뼛거리며 얘기했다. “닦을 때 살살 문지를게요...”반승제는 성혜인이 풀이 죽은 모습을 보고 갑자기 그녀가 도박장에서 이승주를 크게 골탕 먹인 일이 떠올랐다. 완전히 다른 두 모습을 떠올리며 반승제는 눈을 가늘게 떴다. 본인의 방으로 돌아온 반승제를 본 심인우는 다가가려고 하다가 그 뒤에 성혜인이 뒤따르는 것을 보고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반승제는 방에 들어와 셔츠의 단추를 모두 풀고 그대로 성혜인에게 던져버렸다. 성혜인이 그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셔츠가 성혜인의 머리를 덮었다. 성혜인은 얼굴이 달아올라 옷을 챙겼다. 그리고 시선으로 방안을 둘러보다가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반승제가 셔츠 하나만 입었었는데 지금 벗어서 성혜인에게 던져줬으
방안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관자놀이를 누르던 반승제의 손이 굳어버리고 고개를 들어 성혜인을 쳐다보았다. 말 한 성혜인도 두 남녀가 한 방에서 이런 얘기를 나누는 게 이상한 것 같아 멋쩍게 웃었다. “그냥 해본 말이에요.”반승제는 성혜인을 보며 그녀가 밖에서 다른 남자한테 이렇게 적극적인 것을 과연 집의 그분은 알까 생각했다. 시선을 피한 반승제의 말투는 더욱 딱딱해졌다. “나가.”성혜인은 그저 반승제가 이성과의 접촉을 싫어하거나 혹은 윤씨 가문의 그분 때문에 다른 이성과 접촉하지 않는 줄 알았다. “다른 뜻은 없었어요, 반 대표님. 그럼 쉬세요.”그녀는 진짜 아무런 뜻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취한 고객을 도와주어 호감을 사고 싶었을 뿐이다. 반승제는 아직도 설계 초고에 대해 피드백을 해주지 않았다. 성혜인은 자기 작품에 항상 자신이 있었지만 이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고객은 성혜인의 자신감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방으로 돌아온 성혜인은 옷을 갈아입고 물감이 묻은 셔츠를 대야에 넣어 몇 번 문지르고 또 물로 두어 번 헹궜다. 얼룩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창가에 걸어놓고 말리기 시작했다. 그 후에는 아까 넘어진 곳에 와서 붓과 팔레트를 한 번 씻고 다시 물감을 묻혔다. 그리고 다시 벽 앞에 와서 남은 부분을 그렸다.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빨리 그려야지, 아니면 이튿날 아침에는 감을 잃어서 원하는 대로 그려내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성혜인은 계속해서 열심히 그려나갔다. 오른쪽에 있는 가로등이 나방 몇 마리를 불러온 것을 빼고는 모든 것이 고요했다. 새벽 3시쯤, 피곤한 성혜인은 눈을 비비다가 몸을 일으켜 찬물 세수를 하려고 했다. 세면대 옆에 있는 아치형 문을 지날 때, 저 멀리 정원 안의 복도에서 수려한 몸매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는 기둥에 기댄 채 잠이 오지 않는지 손에는 담배를 들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는 나른함이 가득했지만 사람들이 두려워하게 만드는 거리감을 가지고 있었다. 성혜인은 반승제가 담배를 핀다는 것을
그날 밤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가 기억하기로는 성혜인 등 뒤에 있던 움푹 들어간 두 보조개를 떠올렸다. 엉덩이와 허리를 이어주는 부분에 있는 보조개는 비너스 보조개라고도 불리는데 인체의 섹시한 눈이기도 했다. 지금 성혜인은 반승제를 등지고 있었다. 등과 허리의 곡선을 보니 그날 밤 그녀의 허리를 잡고 끝까지 괴롭혔던 것이 떠올랐다. 반승제의 속눈썹이 살짝 떨리더니 마른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분위기가 오묘해지기 시작했다. 성혜인은 그림을 그리며 몸이 점점 뜨거워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성혜인은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들었다. 어느새 그녀의 뒤에서 사람의 온기가 느껴졌다. 순간 얼어붙은 그녀 옆으로 반승제가 스윽 지나가 다른 붓을 집어 들었다. 반승제의 가슴과 성혜인의 등이 가볍게 닿았다가 바로 떨어졌다. . 하지만 그 온기가 옷깃을 넘어 피부까지 전해졌다. 성혜인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반승제는 붓을 들고 팔레트에서 물감을 묻히더니 벽에 몇 번 터치했다. 반승제는 그림의 분위기를 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성혜인의 생각과 똑같았다. 성혜인도 그렇게 그려 넣으려고 생각했었으니까. 머릿속의 잡생각을 날려버린 성혜인이 이성을 붙잡고 그림을 그려나갔다. 반승제는 그저 조금 그려보고 싶은 것이었는지 그만 붓을 내려놓았다. “반 대표님, 늦었는데 쉬지 않으세요?”“머리 아파서.”성혜인은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다. 홀로 복잡한 심정을 가라앉히며 열심히 그림을 그려나갔다. 한 시간 후, 성혜인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반승제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녀의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길게 숨을 내쉰 성혜인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반승제가 없으니 더 집중해서 그릴 수 있었다. 7시가 되어서야 그림을 완성한 성혜인은 걷는 게 걷는 것 같지 않을 정도로 피곤했다. 물감과 도구들을 간단히 정리해서 구석에 놓으면 이따가 사람이 와서 처리할 것이다. 성혜인은 간단히 정리한 후 겨우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재빨리 샤
성혜인은 그대로 오후까지 자버렸다. 일어나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미친 듯이 울리는 핸드폰을 급히 집어 든 성혜인은 통화버튼을 눌렀다. 외숙모 이소애가 건 전화였다. 이소애이 다급하게 물었다. “혜인아,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는데 안 받아서 걱정했어.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니? 외삼촌더러 널 찾으러 가라고 하려던 참이었어.”성혜인은 부재중 통화를 확인했다. 다섯 통이나 걸었으니 이소애가 걱정할 만도 했다. “전 괜찮아요. 어제 너무 늦게 잤더니 피곤해서 못 들었나 봐요.”이소애는 그제야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럼 오늘 어머니 제사는 갈 거니?”“네, 이미 일어나서 씻었어요. 이따가 향만 사가면 돼요.”“향은 이미 외삼촌이 샀어. 외삼촌보고 네가 머무는 곳에서 기다리라고 할게. 일어나면 외삼촌이랑 같이 와.”성혜인은 전화를 끊은 지 5분도 되지 않아서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나가서 임동원과 만났다. 임동원은 산 물건을 성혜인에게 건네주면서 얘기했다. “외숙모가 그러는데 네가 어제 늦게 자서 피곤하다며. 내가 운전할 테니 조수석에 앉아서 조금이라도 자.”“고마워요, 외삼촌.”조수석에 탄 성혜인은 짙은 휘발유 냄새를 맡았다. 임동원은 이 차를 오랫동안 운전하면서 깨끗하게 관리했다고 해도 휘발유와 가죽의 냄새는 빠지기 어려웠다. 목적지에 도착 한 그들은 산 물건들을 가지고 차에서 내려 무덤을 찾아냈다. 성혜인은 해마다 꼭 오곤 했다. 가끔 일이 있을 때는 며칠 전이나 후에 오기도 했다. 하지만 성혜인은 그녀의 어머니가 이 이유로 그녀를 탓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최근 성씨 가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해 보면 기분이 좋지 않아 엄마한테 꼭 얘기하고 싶었다. 외삼촌은 멀지 않은 곳에서 성혜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덤 주위는 깔끔하게 정리된 흔적이 있었다. 성혜인은 쪼그려 앉아서 열심히 향을 태웠다. 향을 다 태운 성혜인은 눈을 가볍게 비비고 임동원의 곁으로 왔다. “외삼촌, 이제 가요.”담배를 피던 임동원은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반승제의 미간이 좁아졌다. 서류 더미에서 고개를 들었더니 밖에 서서 환하게 웃는 성혜인이 있었다. 서천의 풍경은 확실히 아름다웠다. 그 풍경에 성혜인의 웃는 얼굴이 더해지니 마치 따스한 햇볕과도 같았다. 서류를 든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왜 어디를 가도 성혜인을 만나게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성혜인은 반승제의 미세한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한 번 더 노크했다. “반 대표님?”반승제는 시선을 피하며 얘기했다. “타.”성혜인은 문을 열고 차에 탔다. 밖의 햇빛이 매우 강했다. 게다가 점심이어서 더 따가웠다. 문을 열자마자 더운 공기와 함께 성혜인의 체향이 은은하게 풍겨왔다. 뒤에 서 있던 임동원은 성혜인이 차에 타는 것을 확인하고 이 씨의 차에 올라탔다. 3km정도 타고 나왔을 때 앞에 주차된 BMW가 보였다. 임동원이 오늘 끌고 나온 그 차. 하진희는 서서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고 그녀의 옆에는 질이 좋지 않아 보이는 남자가 오토바이에 앉아있었다. 남자는 반승제의 차를 보더니 눈빛이 달라졌다. “진희야, 너 이게 얼마짜리인지 알아?”하진희는 정말 몰랐다. 하지만 이 차는 그녀가 본 가장 예쁜 차였다. “얼마인데?”남자는 얘기하지 않고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2억?”“20억도 넘어!”하진희는 놀란 나머지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20억이 넘는 차라니. 20억짜리 차는 처음 봤다. 20억이면 집을 몇 채나 살 수 있었다. 놀란 그녀는 문득 그 차 뒤의 차에 앉은 임동원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임동원은 어쩔 수 없이 기사와 얘기하고 차를 세웠다. “아버님, 차에 기름이 다 떨어졌잖아요. 나오면서 주유도 안 해요? 어떻게 운전하라는 거예요.”임동원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진희야, 기다려 봐. 내가 동료를 불러서 주유해달라고 할게.”하진희는 차를 훑어보았는데 성혜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순간 20억이 넘는 차를 떠올린 하진희는 설마 성혜인이 그 차에 탔을까 하는 생
말을 마치자마자 설우현은 설연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설연주의 얼굴에는 마지막 남은 핏기마저 사라졌다. 그녀는 설우현의 얼굴을 확인한 뒤에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오빠... 오빠였구나. 깜짝 놀랐잖아요.”설우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가 생각만큼 강하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오늘 밤의 일이 그녀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이 분명했다.설연주가 아무런 소란을 피우지 않아서 그냥 넘어갔다고 생각했지만 생각해 보니 설강민은 그녀의 친오빠였다. 친오빠가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 어떻게 멀쩡할 수 있겠는가.조금 전 겉으로 강한 척했던 건 전부 꾸며낸 모습이었다.설우현의 마음 한구석이 약간 부드러워지며 그는 도우미에게 수면제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약 먹고 자.”“역시 오빠는 좋은 사람이에요.”그 말에 설우현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그는 그 말이 별로 칭찬처럼 들리진 않았다.화가 난 그는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방을 나갔다.설연주는 수면제를 삼켰다.원래는 이런 약을 함부로 먹지 않았다. 너무 깊이 잠들면 혹시 누가 방에 들어오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쉬고 침대에 몸을 기대었지만 곧 속이 다시 울렁거리기 시작했다.이건 생리적인 반응이었다. 설강민을 어떻게든 처리하지 않으면 이 공포심은 평생 그녀의 삶을 따라다닐 게 분명했다.설연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듣고 화장실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전화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대방은 그녀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물었다.설연주는 오늘 밤 있었던 일을 다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대신 되물었다.“김현서는 아직 정승후 옆에 있어?”“그래, 게다가 요즘 정승후는 김현서를 아주 애지중지하고 있어.”‘애지중지?’설연주는 피식 웃었다. 아마 김현서가 또 어떤 달콤한 말을 늘어놓았겠지.가끔 의아했다. 왜 이렇게 뻔하고 저급한 거짓말에 남자들이 넘어가는 걸까?하지만 곧 깨달았다. 아마 남자들도 김현서가 사람에 따라 다른 말을 한다는
설연주는 안으로 몇 걸음 들어가다가 설우현이 따라오지 않는 걸 깨닫고 뒤돌아 그를 한 번 바라보았다.설우현은 제자리에 서서 그녀의 몸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차린 듯했다.설연주는 억지로 버티고 있었다. 거짓말쟁이는 평소 말투도 거슬리더니 마음속에도 한 고집을 품고 있는 듯했다.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 그녀를 앞질렀다.설연주는 그가 왜 갑자기 성난 것처럼 행동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기운조차 없었다.그녀는 거실로 들어와서도 여전히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겉으로는 침착해 보였지만 사실은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설우현에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잠시 멈춰 서 있던 그녀는 점점 온몸이 싸늘해지는 걸 느꼈다.“오빠, 저 오늘 밤 어디서 자요?”이 집에 그녀가 머물 방이 없었기에 설우현이 준비해 주어야 했다.설우현은 사람을 시켜 객실을 정리해 그녀가 쓸 수 있도록 해주었다.설연주는 감사한 마음에 눈물이 고일까 봐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시울이 이미 살짝 붉어져 있었다.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고 도우미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향했다.방 문을 닫자마자 그녀는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 앞에서 토하기 시작했다.밖에 있던 도우미는 소리를 듣고 문을 두드렸다.“설연주 씨, 혹시 어디 불편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집 안에 약상자가 있어요. 속이 불편하신가요?”설연주는 입가를 닦으며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고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으며 볼은 전보다 핼쑥해 보였다.요즘 김현서와 설강민을 견제하느라 3킬로나 빠진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도우미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오자 그녀는 얼른 입을 헹구고 서둘러 문을 열었다.“괜찮아요. 별일 아니에요.”“하지만 방금 전 분명히 토하시는 소리가...”“아니에요.”그녀는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물며 이곳 사람들은 모두 설우현의 사람들이었다.설연주는 바보가 아니었다. 설우현이 그녀를 싫
설우현이 찾아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설강민은 놀라서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떨어뜨렸다.지금은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인데 설우현이 이 중요한 순간에 여기에 나타날 줄이야.설우현은 침대 쪽을 잠시 바라보더니 갑자기 설강민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너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쟤는 네 여동생이야!”설강민은 주먹을 맞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얼굴은 순식간에 부어올랐다. 그제야 설강민은 울먹이며 말했다.“난 이런 여동생 없다고요!”침대 주위에 둘러서 있던 남자들도 잠시 눈치를 보며 망설였다. 설우현은 깊은숨을 내쉬었다.“다 꺼져! 당장!”남자들은 설강민이 서럽게 울고 있는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설우현의 눈치를 보며 서둘러 방을 나갔다.침대 위에서 설연주는 손이 뒤로 묶인 채 멍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설우현은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의 손목에 묶인 끈을 풀어주려고 했다. 하지만 피가 묻어 있는 끈을 보자 그의 손이 멈칫했다. 차마 그 끈을 풀 수가 없었다.“조금만 참아.”그때 설연주는 힘겹게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현 오빠, 진짜 와줄 줄은 몰랐어요. 순간 눈앞에 천사가 나타난 줄 알았어요.”설우현은 이 상황에서도 농담을 하는 그녀를 보며 잠시 할 말을 잃었다.그는 가위를 찾아 곧장 끈을 잘라냈다. 설연주의 손목은 이미 피가 나고 살이 벗겨져 끔찍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보이는 오래된 상처들까지 발견했다.설우현은 그 상처들이 무엇 때문에 생긴 건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설연주가 그동안 어떤 비밀을 숨겨왔는지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설연주는 끈이 풀리자마자 피곤한 듯 침대에 몸을 기댔다.“저 좀 데려가 줘요. 너무 졸려요. 우현 오빠가 있는 곳이 저한테는 가장 안전한 곳이에요.”설우현은 거절하지 않고 그녀를 품에 안아 들었다.계단을 내려가던 중 그는 가슴께가 습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고개를 내려보니 설연주가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그녀는 마치 깨진 인형처럼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설우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이 여자가 대체 왜 이러는 걸까?’“안 가. 혼자 미쳐가든 말든 나 찾지 마. 밖에 너한테 매달리는 남자들 많잖아? 그쪽이나 찾아가.”설연주는 전화가 끊기는 소리를 들었지만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라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이불을 더욱 단단히 몸에 두르며 오늘 밤은 이렇게 버텨보려 했다.그러나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곧이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비몽사몽인 상태로 침대에서 일어나보니 설강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바로 얘야.”곁에 있던 남자가 물었다.“정말 괜찮겠어? 이 여자 네 동생이라며. 너희 아버지가 돌아오면 우리 가만두지 않을 텐데.”“괜찮아. 우리 아버지는 얘 인정하지도 않거든.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할게, 할게. 우리도 설씨 가문 여자는 처음이거든. 전에 뉴스에서 본 성혜인 얼굴, 하... 진짜 대박이던데.”설연주는 눈을 번쩍 뜨고 자신 앞에 서 있는 네 명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상의를 벗은 채 야릇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연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문 앞에 서 있는 설강민을 바라봤다.‘설강민은 가출하지 않았나? 왜 이렇게 빨리 돌아왔지?’설강민은 담배를 피우며 그녀의 도움 요청에 일부러 못 본 척하며 말했다.“너희한테 주는 거야. 마음껏 즐겨.”남자들은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설연주는 몸을 한쪽으로 굴렸으나 금세 발목이 붙잡히고 말았다.“설강민, 제정신이야? 아버지한테 혼나는 게 두렵지 않아?”설강민은 오히려 더 화를 내며 소리쳤다.“그래, 당연히 혼내겠지! 이제 너 때문에 아버지가 나까지 쫓아낼 지경이라고. 이런 아버지 나도 필요 없어. 설연주,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어놓고 넌 무사할 줄 알았어?”설연주는 설강민이 이렇게까지 미친 짓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남자들을 집에 불러 그녀를 겁탈하라고 하다니.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진심으로 두려움이 밀려오는 순간이었
설연주는 내내 말없이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 물건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설준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강민이 지나치게 시끄럽다면 이 딸은 가끔 너무 조용했다.“연주야, 올라가서 자.”설연주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네, 아버지. 너무 화내지 마시고 일찍 주무세요.”설준석은 반평생을 살며 아들한테서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자신도 아버지로서의 자각이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가슴이 살짝 저릿했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잠시 생각하더니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돈이 부족하면 말해.”“괜찮아요. 지난번에 주신 4억 원도 아직 안 썼어요.”설준석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자신을 기다리는 애인들을 만나러 간 것이다.설연주는 넓디넓은 거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너무도 넓어 차갑게 느껴졌고 마치 온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고독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런 감정이 낯설지 않았다. 그녀의 세상은 언제나 혼자 남는 것이 당연했다.방으로 가서 쉬려고 할 때 전화벨이 울렸다. 특정한 벨 소리가 울려 퍼지자 설연주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지며 두려움이 스며들었다. 그녀는 얼른 전화를 받아들었다.남성의 쉰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늘 밤 사람 보내서 널 데디러 갈 거야.”이 남자는 오성파의 두목이자 설연주가 기대고 있는 가장 두려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와 엮인 것을 후회했지만 그때는 정승후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그보다 더 강한 사람의 보호가 필요했다. 그때 마주친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 그녀에겐 선택지가 없었다.설연주가 말없이 듣고만 있자 남자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왜? 이제 설연주가 됐다고 나를 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설연주의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 남자는 그녀에게 본능적으로 각인된 공포 그 자체였다. 그의 말이 끝나자 한동안 기다리던 남자는 짜증이 나는 듯 말을 이었다.“내가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할지 알잖아? 예전에 울며 빌면서 영원히 내
설우현의 시선이 설연주에게 머물렀다.목을 감싸 쥔 설연주는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설강민은 여전히 화가 나서 말했다.“두고 봐!”설우현은 동생을 대하는 설강민의 태도에 놀라며 미간을 찌푸렸다.설연주는 기침을 몇 번 하더니 다시 웃으며 설우현을 바라보았다.“오빠, 이제 돌아가세요. 데려다줘서 고마워요.”설우현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며 입을 달싹였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설우현은 설연주의 눈빛에서 어딘가 죽은 듯한 고요함을 느꼈다. 웃고 있는 그녀였지만 마치 생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린 듯 언제까지 살아갈지 자신도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차로 돌아와 한참을 고민하다가 설우현은 창문을 내렸다.“너도 어쨌든 설씨 가문의 사람인데 아무한테나 함부로 당하고 있지 마.”설연주는 목을 감싸고 제자리에 말없이 서 있었다.설우현은 차를 출발시키며 백미러로 설연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설연주는 조금 더 있다가 거실로 들어갔고 거실은 이미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아마도 설강민이 때려 부순 모양이었다.설강민은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혐오 가득한 눈빛으로 차갑게 노려보았다.“설연주, 김현서한테 더 이상 덤비지 마. 아니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상상도 못 할 거야.”설연주는 그의 협박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발걸음을 돌려 방으로 향했다.설강민은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았다. 그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계속할 생각이야? 김현서가 예전에 너를 괴롭힌 건 알지만 다 네가 자초한 일이잖아. 네가 괜히 건드리지 않았으면 걔가 널 괴롭혔겠어? 분명히 말해두는데 김현서는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야. 알아서 잘 처신해.”설연주는 설강민의 손을 뿌리치더니 그를 올려다보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설강민, 너 때문에 네 여동생이 죽어도 넌 아무렇지 않을까?”설강민은 무심하게 대답했다.“너 지금 멀쩡히 잘 살고 있잖아? 진짜 죽기라도 하면 내가 폭죽 터뜨리며 축하해 줄게.”설연
설우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설연주의 눈가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그 표정을 본 설우현은 역시나 자신이 놀림당하고 있음을 깨달았다.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고 정원 바깥으로 끌고 나갔다.설연주는 그가 앞서 걸어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따라갔다. 두 사람만 남은 조용한 곳에 도착하자 설우현은 그녀의 손목을 놓으며 말했다.“네가 원하는 게 설씨 가문의 지분이면 됐지. 굳이 이런 자리에까지 끼어들 필요는 없잖아.”설연주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손끝으로 옆에 핀 꽃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설씨 가문 사람들은 하나같이 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오빠, 내가 설씨 가문의 돈 때문에 여기 있는 게 아니라면 믿겠어요?”설우현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남자들에게 돈을 뜯어내며 그들을 가지고 놀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오늘 같은 자리는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돌아가.”설우현이 냉정한 게 아니라 오랜만에 성혜인과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는 자리에서 설연주 같은 사람이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았을 뿐이었다.더군다나 그녀가 있으면 분위기만 어색해질 게 뻔했다. 아버지가 대체 왜 설연주를 부른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설연주는 속눈썹을 살짝 내리고 앞에 있는 꽃을 만지작거리며 그저 조용히 있었다.설우현은 참지 못하고 다시 다그쳤다.“내가 한 말 못 들었어? 돌아가라고 했잖아.”“오빠, 혹시 혜인 언니를 생각해서 그러는 거예요? 언니가 나 때문에 기분 나빠할까 봐?”설연주가 자신의 의도를 꿰뚫자 설우현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런 건 굳이 말로 안 해도 알 줄 알았는데.”그 말을 들은 설연주는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성혜인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좋은 오빠와 부모가 있으니 말이다.“알았어요. 지금 나갈게요.”설연주는 미련 없이 돌아섰고 설우현은 또 무슨 속셈일지 몰라 잠시 더 지켜보다가 몇 분 뒤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
류소영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가 붉어지기를 반복하며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성혜인은 다소 귀찮은 표정으로 설계도를 정리하며 말했다.“천 달러면 되겠네요. 그런데 오늘 설씨 가문에 가서 식사하지 않으세요? 우리 같이 갈까요?”설연주는 깜짝 놀라며 성혜인을 바라보았다.“혜인 언니?”“맞아.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 가자.”성혜인은 설연주를 도와 작은 판매대를 정리했다. 반면 류소영은 그 자리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두고 봐! 너희 가만두지 않을 거야!”설연주는 류소영의 말에 웃음만 나왔다. 그녀는 설씨 가문에서 존재감 없는 인물이지만 성혜인은 설의종의 친딸이다. 류소영이 성혜인을 상대로 어찌해 보겠다는 게 어이없을 따름이었다.그러나 설연주는 아무 말 없이 그냥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어차피 성혜인은 겉모습은 부드러워 보여도 능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류소영이 괜히 건드렸다가 큰코다칠 게 뻔했다.설연주와 성혜인이 설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마침 설우현이 설서율을 안고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어구구, 우리 서율이. 외삼촌이 안아 줄게요. 우리 아가 정말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어.”반승제는 옆에서 인상을 잔뜩 쓰며 그 모습을 보았다.“안으려면 그냥 안든지, 그런 애정 표현은 좀 적당히 하시죠. 징그러우니까.”설우현은 뿌듯한 듯 눈썹을 치켜올리고 반승제를 보며 비웃듯이 말했다.“서율이가 안아주지 않으니까 질투하는 거 다 보이거든요.”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우현은 문가에 서 있는 설연주를 발견하고 표정이 굳어졌다. “누가 쟤 불렀어?”설연주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그의 옆에 다가가 앉으며 말했다.“오빠, 그 말 너무 섭섭하네요.”설우현은 한마디 더 하려다 마침 위층에서 내려오는 설의종을 보고는 꾹 참았다. 설의종에게 또 벌받는 건 피하고 싶었다.설연주의 시선은 설서율에게로 향했다. 귀엽고 얌전한 아기는 큰 눈과 긴 속눈썹을 가진 인형 같았다. 설서율의 부모를 보니 왜 이렇게 사랑스럽게 생겼는지 쉽게 이해
성혜인은 설계도를 한 장 집어 들며 흡족한 눈빛을 보냈다.“이 디자인에 저작권 있나요? 제가 사고 싶어요. 직접 디자인한 거죠?”갓 돌이 지난 쌍둥이를 데리고 성혜인은 플로리아로 부모님을 뵈러 왔다.이번에 반승제도 함께 동행했지만 설씨 가문에서 설서율과 반진율을 돌보고 있어서 함께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설연주가 대답하려는 찰나 주변에서 날카로운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어머나, 이게 누구야? 우리 재주꾼 진연주 아니야?”설연주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때 단발머리를 하고 자신만만하게 걸어오는 김현서의 절친, 류소영이 눈에 들어왔다.류소영은 다가오자마자 옆에 있던 선반을 발로 툭 차며 거들먹거렸다.“너 여기서 매일 재주를 팔아가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속이는 거야?”성혜인은 류소영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눈살을 찌푸렸다.류소영은 허리에 손을 얹고 성혜인을 향해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얘가 전에 표절한 거 모르세요? 우리 학교에 소문이 다 퍼져서 아무도 얘 디자인 같은 건 안 사요. 학교 이미지에도 먹칠했으니 말 다 했죠. 그쪽이 돈 없어서 이런 데 온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차라리 제대로 된 디자이너 찾아보세요.”설연주는 이미 일어서서 류소영의 오만한 표정을 보며 손에 있던 물건을 던져버렸다.류소영은 순간 당황했다. 예전에는 늘 김현서의 뒤를 따라다니며 설연주를 괴롭혀 왔기에 겁이 많고 나약한 설연주가 반항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설연주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다시 말하지만 난 표절하지 않았어.”그러자 류소영이 냉소를 흘렸다.“표절도 모자라 교수님과 부적절한 관계까지 맺었잖아. 학교에서 네가 한 짓을 다들 알고 있을걸? 정말 역겨워!”성혜인은 이제야 눈앞의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바로 그 소문 많던 설연주였다. 이 또한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지.성혜인은 설연주를 다시 한번 바라보며 디자인을 살펴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꽤 잘 만든 작품이었다.“이거 당신이 직접 디자인한 거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