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자리에 우뚝 서 무표정으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성휘의 마음이 저쪽으로 기운 게 아니라고 끝없이 자신을 설득하려 했다. 그녀의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줄곧 성휘는 성혜인에게 충분히 잘해줬으니까. 하지만 결국 소윤의 자녀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성혜인은 지금도 머리를 짜내며 계약금 합의를 보고 있는데, 성휘는 성한에게 몇십억짜리 별장을 호탕하게 사주겠다니. 성혜인은 이 상황이 웃겼다.성휘와 소윤은 금방 성혜인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소윤의 미간이 순간 좁아졌다.“네가 왜 여기에 있니?”성혜인 역시 마찬가지로 양복을 입은 중개인과 함께라는 것을 알아차린 성휘는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난감해졌다.“혜인아. 집 사려고?”성혜인의 마음속은 이미 ‘실망’이라는 단어로 지배되었다. 성혜인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일관했다.“네. 살던 집에 도둑이 들어서 보안이 좀 더 철저한 집으로 옮기려고요.”성휘는 입술을 망설이듯 우물거렸다. 몇 년 동안 홀로 밖에 나가 살고 있는 성혜인을 생각하니 죄책감이 밀려들었다.“그럼...”말을 채 다 꺼내기도 전에 소윤이 성휘의 옷깃을 잡아당겼다.“네 아빠 앞이라고 불쌍한 척하지 마. 회장님이 네게 몇백억짜리 신혼집을 선물했다는 소문 들었다. 정 지낼 곳이 없으면 그 집에 가면 되는 거 아니니? 하물며 반승제와 사이도 가까워질 수 있고 말이야. 너희는 부부잖니. 남편한테 잘하렴. 네 아빠도 훨씬 잘 지낼 테니까.”“이모.”소윤을 바라보는 성혜인은 눈가에 힘이 들어갔다.“제가 진짜 불쌍한 척을 하든 말든 이모랑 상관없는 일이에요. 다른 남자의 아들에게는 몇십억이나 되는 별장도 사주는데, 친딸 집 장만해 주는 게 배 아플 일인가요? 게다가 아빠는 저한테 사준다는 말도 아직 안 했는데 뭐가 그렇게 급해요?”성혜인의 말에 소윤은 귀가 벌겋게 날아올랐다.성휘는 중간에서 어쩔 줄 몰라 했지만, 한편으로 성혜인이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개인들도 앞에 있는 상황인데다 그래도 소윤이 어른이지 않은가
성휘는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하얗게 보였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들썩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화가 난 소윤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그래, 성혜인. 우리 가족을 그동안 그렇게 생각했던 거구나! 그때 너만 아니었으면 네 아빠가 나와 혜원이에게 미안해할 일도 없었을 거야! 혜원이의 병세도 그때 더 나빠진 거라고! 이 배은망덕한 년.”“네게 집 사주는 것도 내 허락이 있어야 해! 넌 모르겠구나. 네 아빠가 나에게 지분 10%를 양도했거든. 회사에서 나도 발언권이 있다 이 말이야.”그 말을 듣는 순간, 성혜인은 귀를 의심했다.‘지분 10%? 그건 엄마가 나한테 남겨줬던 거잖아?’그녀의 시선이 성휘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성휘는 최대한 시선을 피하려 애썼다.“아빠. 이모한테 준 지분 10%는 아빠 지분을 양도한 거예요, 아니면 엄마가 저한테 남긴 걸 준 거예요?”성혜인은 성휘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으려 아버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딸에게 또 한 번 들켜버린 성휘는 표정으로라도 미안한 기색을 보여야 할 것 같았다.“넌 아직 어리고... 아이를 낳고 나면 당연히 아이에게 이 지분도 돌려줄 게다. 내 지분 양도 말고도 네 엄마가 너에게 남긴 것까지 전부 다.”그의 해명에도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성혜인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그래서, 소윤 손에 있는 지분이 정말 엄마 거라는 소리예요?”“맞아. 그때는 지분 전환이 번거롭기도 했고, 주주들도 말썽을 부릴 때라 내 지분을 준다면 회사 지배권도 순순히 내놓아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어. 내가 지분 40%를 갖고 있고 네 엄마가 10%였으니 지분이 외부로 유출만 되지 않는다면 다 똑같지. 우린 가족이잖아.”성혜인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코끝에서 시큰한 느낌이 났다. 또 나왔다. 이야기를 나눠보자는 저 따뜻한 말투. 성휘가 자신을 막 대하기라도 했다면 그를 마음 편히 미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냥 좋다고만 할 수 없는 그의 태도에 성혜인은 마음이 더
성혜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는 순간, 식었던 분노가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성휘의 말투는 이미 불만으로 가득했다. 아내에 대한 죄책감마저 줄어들 정도였다.성혜인은 더 이상 성휘와 언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외삼촌도 잘못한 건 없죠.”성휘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입을 더 꾹 다물었다. 그저 실망한 눈빛으로 성혜인을 바라볼 뿐이었다.성혜인은 그대로 중개인과 차에 오르며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무시했다.중개인은 출발하고 난 뒤 그녀의 낯빛을 살피고는 입을 열었다.“이쪽 동네에 있는 집들이 괜찮아요. 주위 부대시설도 잘되어 있고 도보로 3분 거리에 지하 쇼핑몰도 있어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다 좋은 학교들만 있는 데다 주변도 조용하기는 한데, 저한테 더 좋은 매물들이 있긴 하거든요. 가격이 조금 더 비싸긴 하지만요.”성혜인은 지금 가격 협상을 하고 싶지 않았다.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비싸면 비싼 대로 보지 뭐.’중개인은 성혜인을 데리고 한 부자 동네로 들어갔다.동네도 좀 전에 봤던 곳보다 더 낫고 부대시설도 더욱 잘 갖춰져 있다 보니, 부동산 가격이 확실히 비싼 편이기에 부자동네로 불린다.하지만 사실 이곳은 ‘불륜 동네’라고 더 많이 불린다. 그 이유인즉슨, 이곳에서 2년에 한 번씩은 꼭 불륜녀가 잡히는 사건이 일어나기 때문이다.그래서 사람들은 이 동네 거주자들이 가진 재산은 본인의 것이 아닌 남의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있다. 부자들이 소위 ‘세컨드’를 감춰두는 그런 곳이니까.성혜인은 그런 소문이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저 이 동네 환경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이 집은 28억인데, 집주인이 인테리어에만 14억을 투자했어요. 아이들 때문에 급히 출국하느라 옵션 아예 없는 가격에 내놓은 거예요.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아요.”성혜인은 너무 좋았다. 중개인의 말에 좀 거품이 껴있다는 건 알았지만, 흔쾌히 계약금으로 수억을 지불했다. 나머지 금액은 아파트를 팔고 난
금방 손을 떼고 가려고 했는데 그 허여멀건 그림자가 옆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향해 사납게 짖었다. 지나가는 사람은 한 쌍의 부부였는데 아마 이 근처의 직장인 같았다. 부부의 손을 잡은 아이는 그 소리에 놀라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 여자는 아이를 자기 뒤로 끌어온 후 사납게 반승제를 노려보면서 얘기했다. “개를 산책시키는데 목줄도 안 해요? 시민의식이 이렇게 없어서야, 원. 당신네 개가 우리 애를 물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광견병 사망률은 100퍼센트라는데. 개를 키우는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좀 느껴요!”그녀의 남편은 반승제의 기품과 그 뒤 수억대의 슈퍼카에 시선을 두었다. 그러고는 급히 자기 부인을 끌어당기며 제지했다. “당신, 그만 해.”이런 사람의 기분을 거슬렀다가 큰코다치는 수가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자기 딸이 더욱 중요했다. 반승제가 무슨 신분인지는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한 편으로는 딸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한 편으로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돈만 많으면 다인가? 시민의식의 '시'자도 모르면서. 개 산책 때 목줄을 안 하는 건 개가 사람을 산책시키는 것과 다름없다는 걸 아는지 몰라.”누가 들어도 반승제에게 하는 말이었다. 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얘기했다. “내 개가 아닙니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겨울이는 반승제를 향해 꼬리를 흔들며 반승제를 에워싸고 돌았다. 변명할 방법이 없었다. 반승제는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다가 이내 상황을 깨닫고 낯빛이 바로 어두워졌다. 여자는 딸의 눈물을 닦아주며 얘기했다. “이래도 당신네 개가 아니라고요?”심인우는 꿇어앉아 강아지 몸의 목걸이를 발견했다. “여기 전화번호가 적혀져 있네요. 아마도 집에서 뛰쳐나온 것 같은데 제가 주인에게 연락해 보도록 하겠습니다.”여자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저들의 모습을 보아하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기에 더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저 아직 가슴을 들썩이며 울음을 그치려고 노력하는 딸을 데리고 이곳을 벗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심인우는 다급히 목걸이의 전화
반승제는 익숙한 목소리에 시선을 들어 앞까지 걸어온 성혜인을 마주했다. 그제야 목걸이의 번호를 확인한 그는 번호가 익숙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겨울이는 성혜인을 보고 흥분해서 일어나 미친 듯이 꼬리를 흔들었다. 손에 쥔 돈 봉투가 너무도 눈에 띄었기에 성혜인은 반승제에게 주는 대신 심인우에게 주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겨울이가 집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몰래 나갔더라고요. 귀찮게 해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심인우는 잠깐 망설이다가 덤덤하게 돈 봉투를 건네받았다. 성혜인은 그의 손에서 목줄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그제야 목줄의 손잡이에 쓰여 있는 영문을 발견했다.HERMES“...”개 목줄이 에르메스라니. 10만 원으로는 턱도 없었다. 성혜인은 핸드폰을 꺼내 들고 물었다. “이 목줄 얼마예요? 제가 드릴게요.”그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비난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돈 많은 사람들은 돈을 막 쓰네. 개 목줄까지 명품이라니.’“페니 씨, 괜찮습니다.”성혜인은 자신이 10만 원을 준 것이 반승제를 모욕했을 뿐만 아니라 반승제의 비서까지 모욕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미 준 데다가 더 보태주겠다고 하는 것도 애매했고 다시 빼앗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행히 반승제가 컴퓨터를 끄고 블루투스 이어폰을 뺐다. 성혜인은 목줄을 짧게 잡아 겨울이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막았다. 반승제가 성혜인의 곁으로 지나가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겨울이는 반승제가 맘에 들었다는 듯 혀를 내밀고 반짝이는 눈으로 반승제를 바라보았다. 겨울이는 반승제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의 주인처럼 말이다. 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페니?”성혜인이 대답하기도 전에 겨울이가 '멍' 짖으며 먼저 대답했다. 마치 반승제에게 대답하는 듯했다. 반승제는 가볍게 웃고는 그대로 떠나가 버렸다. 성혜인은 부끄러워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그대로 자리에 굳어있다가 고개를 숙여 겨울이를 쳐다봤다. “널 부른 것도 아닌데 왜 짖은 거야.”성혜인이 손
성혜인이 집에 들어서자 스물여덟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다리를 꼰 채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외숙모인 이소애는 주방에서 요리하고 있었는데 마치 상전을 모시는 듯했다. 소파에 앉아있던 여자는 성혜인을 보더니 먹고 있던 사과를 내려놓았다. “어머, 도시 사람이 왔네? 집은 더러우니까 알아서 앉고 싶은데 앉아.”임동원과 이소애, 두 사람의 얼굴에 다 어색함이 드러났지만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이소애는 성혜인을 끌어다가 걱정하며 물었다. “살 빠졌네, 혜인아. 너희 애비가 혹시 그 여자만 예뻐하느라 너에게 소홀한 것이 아니냐?”“무조건이죠. 어머님이 돌아가신 지 몇 년인데. 남자는 원래 다 그래요. 더 예쁜 걸 보면 정신을 못 차리죠.”얘기하는 것은 그 스물여덟 정도의 여자였다. 성혜인의 사촌 형수이기도 했고 이 집안의 며느리이기도 했다. 그녀는 깐깐한 모습으로 주방을 한 번 쳐다보고는 또 말을 이어갔다. “요리도 아직 다 못했으면서 감성팔이는 무슨.”이소애는 먼저 성혜인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혜인아, 일단 앉아. 두 가지 요리만 더 하면 되니까.”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상대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 “내가 말한 게 틀렸어? 네 집 재산은 지금 모두 그 여자 거잖아. 네 아버지는 제사 지내러 안 오신 지 몇 년이나 됐더라? 지금 너를 곁에 두는 건 네가 아직 쓸모 있기 때문이야.”성혜인은 고개를 살짝 들어 사촌 형수를 쳐다보며 속으로 화를 삼켰다. “우리 집 일은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돼.”하진희는 또 눈을 흘기며 얘기했다. “그러게. 네 집이 도시에서 그렇게 돈도 많고 큰 회사도 운영하고 차도 몇억씩 한다며? 나 같은 일반인과는 다르겠지. 우리가 평생 벌어도 네가 하루에 버는 돈보다 적을 테니.”임동원은 성혜인을 말리며 둘이 싸우지 말기를 바랐다. 성혜인은 그저 심호흡하며 하진희를 시야에서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진희는 흥하고 콧방귀를 뀌고는 자기 침실로 돌아갔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세
이 씨도 이런 차는 처음 봐서 자랑하고 싶었다. “혜인아, 저 차 봤어? 듣기로는 몇십억씩 한다던데 오늘 중요한 손님이 오셨나 보다. 책임자들이 같이 술 마시러 갔을 때 그분이 벽이 비어 보인다고 해서 네가 생각났다. 이런 분들의 요구가 까다롭긴 하지. 게다가 이런 차를 모는 사람이면 성격도 안 좋을지 몰라. 하지만 부담 갖지 말아.” 성혜인은 그가 부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작게 웃었다. “알겠어요, 아저씨. 먼저 들어가세요.”이곳, 하늘에 리조트는 서촌에서 가장 좋은 호텔이었다. 5성급 호텔의 기준으로 만들어졌는데 일반인한테는 개방하지 않고 주로 서촌에 투자하러 온 기업인을 접대했다. 성혜인도 처음 들어가 보는 것이었다. 들어서니 정원이 엄청 아름다웠다. 곳곳에 정자와 분수가 있었다. 게다가 목재의 선택도 꽤 많은 공을 들인 것이 보였다. 성혜인이 그림을 그리러 온 것이라는 것을 알자 얼른 그녀에게 방을 소개해 주었다. “물감은 다 준비되었는데, 지금 가서 보실 건가요?”성혜인은 상대가 급해한다는 것을 알고 자기 물건을 빨리 정리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드릴게요.”도착한 후에야 보니 그 벽은 너무도 눈에 띄는 곳에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은 다 볼 수 있었다. 3미터 정도였는데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에 비해 텅 빈 흰 벽은 어딘가 아쉬워 보였다. 성혜인은 준비된 물감을 확인해 보았다. 그녀가 평소에 쓰던 것과 다르지만 나쁘지 않았다. “이따가 시작할게요.”옆의 사람은 성혜인에게 조심하라고 얘기하려고 했다가 그녀가 제원 미술 아카데미 출신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말을 삼켰다. 성혜인은 옆의 의자에 앉아 머릿속으로 구상했다. 여기에는 물감의 농담을 이용한 수묵화가 가장 잘 어울릴 것이다. 터치가 너무 많으면 복잡해 보이기에 최대한 적게 그려야 했다. 속으로 생각을 마친 그녀는 물감을 취하기 시작했다. ...접대받은 방에 돌아온 반승제는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오늘 나온 사람들은 모두 현지 회사의 책임자였다. 다 나이가
반승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마구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어제는 성혜인의 강아지 때문에 안 들어도 되는 욕을 먹었고, 오늘은 저녁에 서촌까지 와서 옷에 물감을 뿌리고. 반승제는 자신이 전생에 성혜인에게 큰 죄를 지었나 싶을 정도였다. 성혜인은 또렷한 남자의 얼굴에 그제야 이게 환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성혜인도 그녀가 사고를 쳤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실수를 무마해 보려 했다. “반 대표님, 여벌옷이 있으세요? 이건 제가 세탁해 드릴게요.”반승제는 그녀의 손에 있는 팔레트를 보고 돌아서서 몇 걸음 걸어 나갔다. 성혜인은 그 자리에 서서 머리를 싸쥐었다. 왜 매번 이런 일이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인지. 반승제는 성혜인이 가만히 서 있는 것을 보고 얘기했다. “세탁해 준다며? 네가 물감을 뿌렸으니 네가 책임져야지.”성혜인은 총총걸음으로 뒤따라갔다. “제가 꼭 책임지겠습니다.”“1600만.”그는 덤덤한 어투로 성혜인을 바라보았다. 성혜인은 무슨 뜻인지 몰라서 황당해하고 있다가 그제야 1600만이 셔츠의 가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렇게 비싼 옷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검은색 물감 때문에 씻겨질지도 미지수였다. 살짝 긴장된 성혜인은 쭈뼛거리며 얘기했다. “닦을 때 살살 문지를게요...”반승제는 성혜인이 풀이 죽은 모습을 보고 갑자기 그녀가 도박장에서 이승주를 크게 골탕 먹인 일이 떠올랐다. 완전히 다른 두 모습을 떠올리며 반승제는 눈을 가늘게 떴다. 본인의 방으로 돌아온 반승제를 본 심인우는 다가가려고 하다가 그 뒤에 성혜인이 뒤따르는 것을 보고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반승제는 방에 들어와 셔츠의 단추를 모두 풀고 그대로 성혜인에게 던져버렸다. 성혜인이 그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셔츠가 성혜인의 머리를 덮었다. 성혜인은 얼굴이 달아올라 옷을 챙겼다. 그리고 시선으로 방안을 둘러보다가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반승제가 셔츠 하나만 입었었는데 지금 벗어서 성혜인에게 던져줬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