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을 쓰고 가는데도 얼마 가지 못해 바짓단이 전부 젖어버렸다.그때, 성혜인 옆으로 차 한 대가 멈춰서더니 경적을 울렸다.신이한일 거라 생각한 성혜인은 성가시다는 눈빛으로 옆을 쳐다봤다.창문이 살짝 내려가고, 차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반승혜였다.“지금 운전하면 차 많이 막힐 거예요. 어서 타요.”성혜인은 차를 세워 뒀던 방향을 쳐다봤다.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비도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차에 몸을 실었다.빗물과 습기가 차단된 차 안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성혜인은 당연히 반승혜를 데리러 온 반씨 가문의 차라고 생각했다. 운전석에 앉아있는 반승제의 운전기사와 눈이 마주치기 전까지.창문에 기댄 반승제는 파일을 손에 쥔 채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어색한 이 자리에 반승혜가 있다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반승혜의 얼굴은 흥분한 듯 옅게 붉어져 있었다.“페니 씨, 지금 학생들 사이에서 얼마나 유명해졌는지 알아요? 서수연 걔가 그렇게 떵떵거리면서 다녔는데, 경찰서에 잡혀가다니! 서씨 집안에서도 지금 서수연 빼낸다고 혼비백산이겠죠?”“총장이랑 학과장도 그래요. 그렇게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뒤에서는 사기 행각이나 벌이고 있다니. 소름 돋아 정말!”반승혜는 반승제를 슬쩍 툭툭 밀었다. 반승제가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자,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오빠. 서수연이 분명 자기 오빠한테 가서 일러바칠 텐데, 이것 때문에 페니 씨 괴롭히면 안 돼. 알겠지?”성혜인은 가슴이 울렁거렸다. 오랫동안 지지고 볶으면서 마냥 순진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자신을 지켜주려는 반승혜의 모습은 처음이었다.반승제는 귀찮다는 듯한 표정으로 무심한 한 마디를 툭 뱉었다.“응.”반승혜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확 좁아졌다. 집에 도착하고 난 후, 운전기사가 건넨 우산을 잡으며 당부하듯 말했다.“페니 씨는 오빠가 데려다주는 걸로 해. 나 그림 그리는
여전히 굵은 빗줄기가 땅을 적시는 바깥과 달리 조용한 차 안에 성혜인의 목소리가 뚜렷하게 울려 퍼졌다.반승제의 손가락이 순간 허공에서 멈춰 섰다. 이상하다는 눈빛이었다.성혜인에게는 그저 가벼운 칭찬이었을 뿐, 그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잠시 명상의 시간을 가지고자 눈을 감았다. 그때, 차가 순간 덜컹거렸다.그녀의 머리가 의도치 않게 반승제의 어깨에 안착했다. 두 사람의 사이는 순식간에 가까워졌다.쏟아지는 빗물에 도로가 미끄러워져 차가 훨씬 막혔다.그렇게 30분이 지나고 나서야 도로에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성혜인은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함을 피하고자 내내 눈을 감고 얕은 잠을 청했다.요즘 수면의 질이 좋지 않아 피로함이 어깨를 짓누르는 데다 빗소리까지 울려 퍼지니 잠들기 딱 좋았다. 성혜인은 자신도 모르게 잠에 들고 말았다.앞좌석에 앉아있던 심인우는 뒷좌석의 분위기를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바로 그때, 사이드미러로 교통법을 위반한 차가 불쑥 나타났다.그대로 반승제가 타고 있던 차와 부딪혔고, 차체가 앞으로 강하게 휘청이고 말았다.성혜인은 순식간에 한쪽 창문으로 쏠렸지만, 반승제가 재빨리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그의 힘에 성혜인은 그대로 반승제의 팔을 따라 움직였다.깊은 잠이 들었던 성혜인은 마치 독특한 촉감의 ‘베개’를 밴 기분이었다. 게다가 온기까지 느껴지니 무의식적으로 그 ‘베개’를 껴안으면서 편한 자세로 바꾸었고, 이내 다시 잠에 들었다.반승제는 그녀의 팔을 잡았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성혜인이 품에 안기자, 알 수 없는 기운이 때마침 한곳으로 몰렸다.그곳은 바로, 남자에게 가장 부추겨서는 안 될 곳.동공이 커진 반승제는 고개를 숙여 성혜인에게 시선을 돌렸다.기다란 머리카락이 옆으로 흩어지면서 부드럽고 작은 얼굴의 옆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눈가에는 옅은 다크서클이 자리 잡고 있었다.어둑한 차 안으로 비친 옅은 불빛이 마침 성혜인의 얼굴을 비췄다. 주위가 조용하기까지 하니 그녀의 가녀린 모습에 심장 소리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강아지 짖는 소리와 함께 멀리서 새하얀 털 뭉치가 성혜인의 주변을 신나게 돌았다.그녀는 허리를 숙여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겨울아. 요즘 내가 잘 못 와봤지? 말 잘 듣고 있었어?”앞치마를 두른 유경아가 건물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50세 정도 되어 보이는 온화하고 꾸밈없는 여성이다.“사모님 안 계시는 동안 얼마나 말썽을 부리던지. 어제는 연못에서 물고기도 잡았다니까요. 물고기를 전부 물어 놓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잡아서 삶아줬어요.”성혜인은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겨울이의 머리를 힘껏 쓰다듬었다.“식탐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독일의 목양견인 겨울이는 6살 정도 되었는데, 지금까지 줄곧 성혜인과 함께였다.성혜인의 아파트에서는 강아지를 키울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마침 반태승이 이 별장을 선물해 주어 아주머니가 이곳에서 겨울이를 대신 돌봐 주고 있다. 성혜인은 평일에 올 수 있는 날이 극히 드물었다.성혜인은 겨울이와 조금 더 시간을 보내다 캐리어를 끌고 로비 안으로 들어섰다.유경아는 그녀의 모습에 다소 놀란 듯했다.“사모님. 드디어 여기서 살기로 결정하신 거예요?”“아파트에 도둑이 들었어요. 그래서 일단 여기서 며칠 묵으려고요.”유경아의 놀란 눈이 더 커졌다.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경찰에 신고는 했어요? 여자 혼자 밖에 사는 건 원래 위험하잖아요. 앞으로 이곳에서 사는 건 어때요? 회장님께서도 제게 사모님을 잘 돌보라고 하셨었는데, 3년 동안 이곳에 통 안 오시니 제가 회장님께 보고를 드리기가 얼마나 난감한데요.”“새로운 집을 찾을 때까지는 이곳에 있어야 할 것 같아요.”성혜인은 한 손으로 겨울이를 놀아주면서 빙긋 웃었다.바닥에서 꼬리를 미친 듯이 흔드는 겨울이의 눈망울이 반짝반짝 빛났다.한편.반승혜는 성혜인이 떠나고 난 후 곧바로 반태승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승제야. 이미 수속 끝났다. 곧 돌아갈 수 있겠구나.”반승제는 손으로 미간을 주물렀다.“알겠어요. 몸조심하시고요, 할
한지은은 영악한 여자다. 반승제가 제원에 돌아온 이후 줄곧 호텔에서 묵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와의 사이가 좋지 않아 한 달에 몇 번 만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부잣집 부부가 이렇게까지 소원해진 상황이라면, 한지은이 BH그룹의 며느리와 마치 아는 사이처럼 거짓말을 하더라도 반승제는 그대로 믿을 것이다. 성혜인을 골탕 먹일 수만 있다면 이쯤이야.발걸음을 우뚝 멈춘 반승제의 미간에 미세한 경련이 일어났다.명목상의 ‘아내’라는 그 사람에 대한 반감이 더 생겨났다. BH그룹의 며느리라는 이유로 밖에서 콧대를 세우고 다닌다는 말 아닌가.“페니 씨가 힘들게 하는 일 있으면 언제든지 저희 대표님께 디자이너 변경 요청하세요. 예전에도 고객의 부인이 회사까지 찾아와 페니 씨 대신 다른 사람으로 바꿔 달라고 하는 사건이 있었거든요.”한지은의 말에서 진심이 우러났다.반승제는 그저 무심히 그녀를 한 번 쳐다볼 뿐이었다.“네.”그는 단답으로 한 마디를 남기고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계속 그의 뒤를 쫓아가기 난감해진 한지은은 표정이 굳어버렸다.‘뭐, 어쨌든 이간질은 성공이네.’반승제가 성혜인에게 불만을 갖게 된다면 작업실에서 성혜인을 대신할 자격이 되는 사람은 과연 누구겠는가?한지은은 마음이 울렁거렸다. 자신에게도 기회가 생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반승제 앞에서 얼굴만 몇 번 더 비추면...”이제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사라지는 반승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한지은의 뺨이 붉어졌다.한편, 성혜인은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가 반승제의 귀에 들어갔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그녀는 원반을 집어 하늘 높이 던졌다. 그러자 겨울이가 잽싸게 달려가 입으로 물어 성혜인에게 돌아와서는 그녀의 다리 곁을 맴돌았다.“보채기는.”성혜인은 겨울이의 머리를 툭 쓰다듬어 주고 다시 한번 원반을 던졌다.그때, 원반을 던진 방향에서 누군가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놀란 성혜인이 황급히 소리쳤다.“겨울아. 돌아와!”하지만 이미 질
성혜인은 바닥으로 시선을 떨궜다. 불필요한 언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반승제와의 계약 기간 동안 반씨 집안에서 조용히 하루하루를 보내며 종종 반태승에게 얼굴을 비추는 정도만 하고 싶었다. 반씨 가문의 다른 가족들과의 충돌은 최대한 피하면서 말이다.게다가 반승제에게 신경을 많이 쓰는 백연서는 성혜인과 논쟁을 할 때마다 갈수록 더 물고 늘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다 보니 백연서가 이것저것 따지더라도 성혜인은 어떠한 반박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백연서는 2층으로 향했다. 곧이어 안방에 있는 침대를 발견하고는 눈살을 구겼다.“승제가 들어오면 이 방은 승제가 사용하고 너는 게스트룸에 묵어야겠다. 승제랑 잘해볼 생각 마라. 회장님 병세가 호전되면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 명심해.”온갖 트집을 다 잡고 나서야 백연서는 옆에서 말없이 서 있던 그녀가 눈에 밟혔는지 눈썹을 들썩였다.“듣고 있는 거니?”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어머님. 또 주의할 게 있을까요?”백연서는 또다시 가슴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얘랑 대화를 했다하면 말문이 막히네.’짜증을 풀 곳이 없자 트집을 잡으려던 마음도 사라져 버렸다. 백연서는 유경아에게 당부할 점을 읊었다. 특히 음식 측면에서 각별히 주의해달라는 말을 남겼다.유경아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백연서가 떠나고, 유경아는 그제야 지친 얼굴로 성혜인을 바라봤다.“사모님. 겨울이를 정말 보내시게요?”“아주머니. 별장 뒤편에 큰 집 하나 비어 있지 않았나요? 승제 씨 오면 일단 겨울이를 그 안에 두는 게 좋겠어요. 겨울이는 너무 활발해서 친구에게 맡기면 피해만 주게 될 거예요.”겨울이를 좋아하던 유경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랫동안 겨울이를 돌보면서 정이 많이 들었었다.“좋아요. 우선 겨울이 장난감을 그 방에 갖다 둬야겠어요.”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연서의 잔소리에 이미 기분이 언짢아진 상태였다. 게다가 반승제와 한집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새
성혜인은 자리에 우뚝 서 무표정으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성휘의 마음이 저쪽으로 기운 게 아니라고 끝없이 자신을 설득하려 했다. 그녀의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줄곧 성휘는 성혜인에게 충분히 잘해줬으니까. 하지만 결국 소윤의 자녀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성혜인은 지금도 머리를 짜내며 계약금 합의를 보고 있는데, 성휘는 성한에게 몇십억짜리 별장을 호탕하게 사주겠다니. 성혜인은 이 상황이 웃겼다.성휘와 소윤은 금방 성혜인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소윤의 미간이 순간 좁아졌다.“네가 왜 여기에 있니?”성혜인 역시 마찬가지로 양복을 입은 중개인과 함께라는 것을 알아차린 성휘는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난감해졌다.“혜인아. 집 사려고?”성혜인의 마음속은 이미 ‘실망’이라는 단어로 지배되었다. 성혜인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일관했다.“네. 살던 집에 도둑이 들어서 보안이 좀 더 철저한 집으로 옮기려고요.”성휘는 입술을 망설이듯 우물거렸다. 몇 년 동안 홀로 밖에 나가 살고 있는 성혜인을 생각하니 죄책감이 밀려들었다.“그럼...”말을 채 다 꺼내기도 전에 소윤이 성휘의 옷깃을 잡아당겼다.“네 아빠 앞이라고 불쌍한 척하지 마. 회장님이 네게 몇백억짜리 신혼집을 선물했다는 소문 들었다. 정 지낼 곳이 없으면 그 집에 가면 되는 거 아니니? 하물며 반승제와 사이도 가까워질 수 있고 말이야. 너희는 부부잖니. 남편한테 잘하렴. 네 아빠도 훨씬 잘 지낼 테니까.”“이모.”소윤을 바라보는 성혜인은 눈가에 힘이 들어갔다.“제가 진짜 불쌍한 척을 하든 말든 이모랑 상관없는 일이에요. 다른 남자의 아들에게는 몇십억이나 되는 별장도 사주는데, 친딸 집 장만해 주는 게 배 아플 일인가요? 게다가 아빠는 저한테 사준다는 말도 아직 안 했는데 뭐가 그렇게 급해요?”성혜인의 말에 소윤은 귀가 벌겋게 날아올랐다.성휘는 중간에서 어쩔 줄 몰라 했지만, 한편으로 성혜인이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개인들도 앞에 있는 상황인데다 그래도 소윤이 어른이지 않은가
성휘는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하얗게 보였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들썩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화가 난 소윤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그래, 성혜인. 우리 가족을 그동안 그렇게 생각했던 거구나! 그때 너만 아니었으면 네 아빠가 나와 혜원이에게 미안해할 일도 없었을 거야! 혜원이의 병세도 그때 더 나빠진 거라고! 이 배은망덕한 년.”“네게 집 사주는 것도 내 허락이 있어야 해! 넌 모르겠구나. 네 아빠가 나에게 지분 10%를 양도했거든. 회사에서 나도 발언권이 있다 이 말이야.”그 말을 듣는 순간, 성혜인은 귀를 의심했다.‘지분 10%? 그건 엄마가 나한테 남겨줬던 거잖아?’그녀의 시선이 성휘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성휘는 최대한 시선을 피하려 애썼다.“아빠. 이모한테 준 지분 10%는 아빠 지분을 양도한 거예요, 아니면 엄마가 저한테 남긴 걸 준 거예요?”성혜인은 성휘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으려 아버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딸에게 또 한 번 들켜버린 성휘는 표정으로라도 미안한 기색을 보여야 할 것 같았다.“넌 아직 어리고... 아이를 낳고 나면 당연히 아이에게 이 지분도 돌려줄 게다. 내 지분 양도 말고도 네 엄마가 너에게 남긴 것까지 전부 다.”그의 해명에도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성혜인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그래서, 소윤 손에 있는 지분이 정말 엄마 거라는 소리예요?”“맞아. 그때는 지분 전환이 번거롭기도 했고, 주주들도 말썽을 부릴 때라 내 지분을 준다면 회사 지배권도 순순히 내놓아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어. 내가 지분 40%를 갖고 있고 네 엄마가 10%였으니 지분이 외부로 유출만 되지 않는다면 다 똑같지. 우린 가족이잖아.”성혜인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코끝에서 시큰한 느낌이 났다. 또 나왔다. 이야기를 나눠보자는 저 따뜻한 말투. 성휘가 자신을 막 대하기라도 했다면 그를 마음 편히 미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냥 좋다고만 할 수 없는 그의 태도에 성혜인은 마음이 더
성혜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는 순간, 식었던 분노가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성휘의 말투는 이미 불만으로 가득했다. 아내에 대한 죄책감마저 줄어들 정도였다.성혜인은 더 이상 성휘와 언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외삼촌도 잘못한 건 없죠.”성휘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입을 더 꾹 다물었다. 그저 실망한 눈빛으로 성혜인을 바라볼 뿐이었다.성혜인은 그대로 중개인과 차에 오르며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무시했다.중개인은 출발하고 난 뒤 그녀의 낯빛을 살피고는 입을 열었다.“이쪽 동네에 있는 집들이 괜찮아요. 주위 부대시설도 잘되어 있고 도보로 3분 거리에 지하 쇼핑몰도 있어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다 좋은 학교들만 있는 데다 주변도 조용하기는 한데, 저한테 더 좋은 매물들이 있긴 하거든요. 가격이 조금 더 비싸긴 하지만요.”성혜인은 지금 가격 협상을 하고 싶지 않았다.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비싸면 비싼 대로 보지 뭐.’중개인은 성혜인을 데리고 한 부자 동네로 들어갔다.동네도 좀 전에 봤던 곳보다 더 낫고 부대시설도 더욱 잘 갖춰져 있다 보니, 부동산 가격이 확실히 비싼 편이기에 부자동네로 불린다.하지만 사실 이곳은 ‘불륜 동네’라고 더 많이 불린다. 그 이유인즉슨, 이곳에서 2년에 한 번씩은 꼭 불륜녀가 잡히는 사건이 일어나기 때문이다.그래서 사람들은 이 동네 거주자들이 가진 재산은 본인의 것이 아닌 남의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있다. 부자들이 소위 ‘세컨드’를 감춰두는 그런 곳이니까.성혜인은 그런 소문이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저 이 동네 환경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이 집은 28억인데, 집주인이 인테리어에만 14억을 투자했어요. 아이들 때문에 급히 출국하느라 옵션 아예 없는 가격에 내놓은 거예요.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아요.”성혜인은 너무 좋았다. 중개인의 말에 좀 거품이 껴있다는 건 알았지만, 흔쾌히 계약금으로 수억을 지불했다. 나머지 금액은 아파트를 팔고 난
말을 마치자마자 설우현은 설연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설연주의 얼굴에는 마지막 남은 핏기마저 사라졌다. 그녀는 설우현의 얼굴을 확인한 뒤에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오빠... 오빠였구나. 깜짝 놀랐잖아요.”설우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가 생각만큼 강하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오늘 밤의 일이 그녀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이 분명했다.설연주가 아무런 소란을 피우지 않아서 그냥 넘어갔다고 생각했지만 생각해 보니 설강민은 그녀의 친오빠였다. 친오빠가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 어떻게 멀쩡할 수 있겠는가.조금 전 겉으로 강한 척했던 건 전부 꾸며낸 모습이었다.설우현의 마음 한구석이 약간 부드러워지며 그는 도우미에게 수면제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약 먹고 자.”“역시 오빠는 좋은 사람이에요.”그 말에 설우현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그는 그 말이 별로 칭찬처럼 들리진 않았다.화가 난 그는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방을 나갔다.설연주는 수면제를 삼켰다.원래는 이런 약을 함부로 먹지 않았다. 너무 깊이 잠들면 혹시 누가 방에 들어오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쉬고 침대에 몸을 기대었지만 곧 속이 다시 울렁거리기 시작했다.이건 생리적인 반응이었다. 설강민을 어떻게든 처리하지 않으면 이 공포심은 평생 그녀의 삶을 따라다닐 게 분명했다.설연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듣고 화장실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전화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대방은 그녀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물었다.설연주는 오늘 밤 있었던 일을 다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대신 되물었다.“김현서는 아직 정승후 옆에 있어?”“그래, 게다가 요즘 정승후는 김현서를 아주 애지중지하고 있어.”‘애지중지?’설연주는 피식 웃었다. 아마 김현서가 또 어떤 달콤한 말을 늘어놓았겠지.가끔 의아했다. 왜 이렇게 뻔하고 저급한 거짓말에 남자들이 넘어가는 걸까?하지만 곧 깨달았다. 아마 남자들도 김현서가 사람에 따라 다른 말을 한다는
설연주는 안으로 몇 걸음 들어가다가 설우현이 따라오지 않는 걸 깨닫고 뒤돌아 그를 한 번 바라보았다.설우현은 제자리에 서서 그녀의 몸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차린 듯했다.설연주는 억지로 버티고 있었다. 거짓말쟁이는 평소 말투도 거슬리더니 마음속에도 한 고집을 품고 있는 듯했다.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 그녀를 앞질렀다.설연주는 그가 왜 갑자기 성난 것처럼 행동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기운조차 없었다.그녀는 거실로 들어와서도 여전히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겉으로는 침착해 보였지만 사실은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설우현에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잠시 멈춰 서 있던 그녀는 점점 온몸이 싸늘해지는 걸 느꼈다.“오빠, 저 오늘 밤 어디서 자요?”이 집에 그녀가 머물 방이 없었기에 설우현이 준비해 주어야 했다.설우현은 사람을 시켜 객실을 정리해 그녀가 쓸 수 있도록 해주었다.설연주는 감사한 마음에 눈물이 고일까 봐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시울이 이미 살짝 붉어져 있었다.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고 도우미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향했다.방 문을 닫자마자 그녀는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 앞에서 토하기 시작했다.밖에 있던 도우미는 소리를 듣고 문을 두드렸다.“설연주 씨, 혹시 어디 불편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집 안에 약상자가 있어요. 속이 불편하신가요?”설연주는 입가를 닦으며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고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으며 볼은 전보다 핼쑥해 보였다.요즘 김현서와 설강민을 견제하느라 3킬로나 빠진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도우미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오자 그녀는 얼른 입을 헹구고 서둘러 문을 열었다.“괜찮아요. 별일 아니에요.”“하지만 방금 전 분명히 토하시는 소리가...”“아니에요.”그녀는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물며 이곳 사람들은 모두 설우현의 사람들이었다.설연주는 바보가 아니었다. 설우현이 그녀를 싫
설우현이 찾아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설강민은 놀라서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떨어뜨렸다.지금은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인데 설우현이 이 중요한 순간에 여기에 나타날 줄이야.설우현은 침대 쪽을 잠시 바라보더니 갑자기 설강민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너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쟤는 네 여동생이야!”설강민은 주먹을 맞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얼굴은 순식간에 부어올랐다. 그제야 설강민은 울먹이며 말했다.“난 이런 여동생 없다고요!”침대 주위에 둘러서 있던 남자들도 잠시 눈치를 보며 망설였다. 설우현은 깊은숨을 내쉬었다.“다 꺼져! 당장!”남자들은 설강민이 서럽게 울고 있는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설우현의 눈치를 보며 서둘러 방을 나갔다.침대 위에서 설연주는 손이 뒤로 묶인 채 멍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설우현은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의 손목에 묶인 끈을 풀어주려고 했다. 하지만 피가 묻어 있는 끈을 보자 그의 손이 멈칫했다. 차마 그 끈을 풀 수가 없었다.“조금만 참아.”그때 설연주는 힘겹게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현 오빠, 진짜 와줄 줄은 몰랐어요. 순간 눈앞에 천사가 나타난 줄 알았어요.”설우현은 이 상황에서도 농담을 하는 그녀를 보며 잠시 할 말을 잃었다.그는 가위를 찾아 곧장 끈을 잘라냈다. 설연주의 손목은 이미 피가 나고 살이 벗겨져 끔찍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보이는 오래된 상처들까지 발견했다.설우현은 그 상처들이 무엇 때문에 생긴 건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설연주가 그동안 어떤 비밀을 숨겨왔는지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설연주는 끈이 풀리자마자 피곤한 듯 침대에 몸을 기댔다.“저 좀 데려가 줘요. 너무 졸려요. 우현 오빠가 있는 곳이 저한테는 가장 안전한 곳이에요.”설우현은 거절하지 않고 그녀를 품에 안아 들었다.계단을 내려가던 중 그는 가슴께가 습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고개를 내려보니 설연주가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그녀는 마치 깨진 인형처럼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설우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이 여자가 대체 왜 이러는 걸까?’“안 가. 혼자 미쳐가든 말든 나 찾지 마. 밖에 너한테 매달리는 남자들 많잖아? 그쪽이나 찾아가.”설연주는 전화가 끊기는 소리를 들었지만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라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이불을 더욱 단단히 몸에 두르며 오늘 밤은 이렇게 버텨보려 했다.그러나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곧이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비몽사몽인 상태로 침대에서 일어나보니 설강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바로 얘야.”곁에 있던 남자가 물었다.“정말 괜찮겠어? 이 여자 네 동생이라며. 너희 아버지가 돌아오면 우리 가만두지 않을 텐데.”“괜찮아. 우리 아버지는 얘 인정하지도 않거든.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할게, 할게. 우리도 설씨 가문 여자는 처음이거든. 전에 뉴스에서 본 성혜인 얼굴, 하... 진짜 대박이던데.”설연주는 눈을 번쩍 뜨고 자신 앞에 서 있는 네 명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상의를 벗은 채 야릇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연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문 앞에 서 있는 설강민을 바라봤다.‘설강민은 가출하지 않았나? 왜 이렇게 빨리 돌아왔지?’설강민은 담배를 피우며 그녀의 도움 요청에 일부러 못 본 척하며 말했다.“너희한테 주는 거야. 마음껏 즐겨.”남자들은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설연주는 몸을 한쪽으로 굴렸으나 금세 발목이 붙잡히고 말았다.“설강민, 제정신이야? 아버지한테 혼나는 게 두렵지 않아?”설강민은 오히려 더 화를 내며 소리쳤다.“그래, 당연히 혼내겠지! 이제 너 때문에 아버지가 나까지 쫓아낼 지경이라고. 이런 아버지 나도 필요 없어. 설연주,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어놓고 넌 무사할 줄 알았어?”설연주는 설강민이 이렇게까지 미친 짓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남자들을 집에 불러 그녀를 겁탈하라고 하다니.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진심으로 두려움이 밀려오는 순간이었
설연주는 내내 말없이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 물건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설준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강민이 지나치게 시끄럽다면 이 딸은 가끔 너무 조용했다.“연주야, 올라가서 자.”설연주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네, 아버지. 너무 화내지 마시고 일찍 주무세요.”설준석은 반평생을 살며 아들한테서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자신도 아버지로서의 자각이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가슴이 살짝 저릿했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잠시 생각하더니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돈이 부족하면 말해.”“괜찮아요. 지난번에 주신 4억 원도 아직 안 썼어요.”설준석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자신을 기다리는 애인들을 만나러 간 것이다.설연주는 넓디넓은 거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너무도 넓어 차갑게 느껴졌고 마치 온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고독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런 감정이 낯설지 않았다. 그녀의 세상은 언제나 혼자 남는 것이 당연했다.방으로 가서 쉬려고 할 때 전화벨이 울렸다. 특정한 벨 소리가 울려 퍼지자 설연주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지며 두려움이 스며들었다. 그녀는 얼른 전화를 받아들었다.남성의 쉰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늘 밤 사람 보내서 널 데디러 갈 거야.”이 남자는 오성파의 두목이자 설연주가 기대고 있는 가장 두려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와 엮인 것을 후회했지만 그때는 정승후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그보다 더 강한 사람의 보호가 필요했다. 그때 마주친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 그녀에겐 선택지가 없었다.설연주가 말없이 듣고만 있자 남자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왜? 이제 설연주가 됐다고 나를 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설연주의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 남자는 그녀에게 본능적으로 각인된 공포 그 자체였다. 그의 말이 끝나자 한동안 기다리던 남자는 짜증이 나는 듯 말을 이었다.“내가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할지 알잖아? 예전에 울며 빌면서 영원히 내
설우현의 시선이 설연주에게 머물렀다.목을 감싸 쥔 설연주는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설강민은 여전히 화가 나서 말했다.“두고 봐!”설우현은 동생을 대하는 설강민의 태도에 놀라며 미간을 찌푸렸다.설연주는 기침을 몇 번 하더니 다시 웃으며 설우현을 바라보았다.“오빠, 이제 돌아가세요. 데려다줘서 고마워요.”설우현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며 입을 달싹였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설우현은 설연주의 눈빛에서 어딘가 죽은 듯한 고요함을 느꼈다. 웃고 있는 그녀였지만 마치 생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린 듯 언제까지 살아갈지 자신도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차로 돌아와 한참을 고민하다가 설우현은 창문을 내렸다.“너도 어쨌든 설씨 가문의 사람인데 아무한테나 함부로 당하고 있지 마.”설연주는 목을 감싸고 제자리에 말없이 서 있었다.설우현은 차를 출발시키며 백미러로 설연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설연주는 조금 더 있다가 거실로 들어갔고 거실은 이미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아마도 설강민이 때려 부순 모양이었다.설강민은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혐오 가득한 눈빛으로 차갑게 노려보았다.“설연주, 김현서한테 더 이상 덤비지 마. 아니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상상도 못 할 거야.”설연주는 그의 협박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발걸음을 돌려 방으로 향했다.설강민은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았다. 그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계속할 생각이야? 김현서가 예전에 너를 괴롭힌 건 알지만 다 네가 자초한 일이잖아. 네가 괜히 건드리지 않았으면 걔가 널 괴롭혔겠어? 분명히 말해두는데 김현서는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야. 알아서 잘 처신해.”설연주는 설강민의 손을 뿌리치더니 그를 올려다보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설강민, 너 때문에 네 여동생이 죽어도 넌 아무렇지 않을까?”설강민은 무심하게 대답했다.“너 지금 멀쩡히 잘 살고 있잖아? 진짜 죽기라도 하면 내가 폭죽 터뜨리며 축하해 줄게.”설연
설우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설연주의 눈가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그 표정을 본 설우현은 역시나 자신이 놀림당하고 있음을 깨달았다.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고 정원 바깥으로 끌고 나갔다.설연주는 그가 앞서 걸어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따라갔다. 두 사람만 남은 조용한 곳에 도착하자 설우현은 그녀의 손목을 놓으며 말했다.“네가 원하는 게 설씨 가문의 지분이면 됐지. 굳이 이런 자리에까지 끼어들 필요는 없잖아.”설연주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손끝으로 옆에 핀 꽃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설씨 가문 사람들은 하나같이 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오빠, 내가 설씨 가문의 돈 때문에 여기 있는 게 아니라면 믿겠어요?”설우현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남자들에게 돈을 뜯어내며 그들을 가지고 놀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오늘 같은 자리는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돌아가.”설우현이 냉정한 게 아니라 오랜만에 성혜인과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는 자리에서 설연주 같은 사람이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았을 뿐이었다.더군다나 그녀가 있으면 분위기만 어색해질 게 뻔했다. 아버지가 대체 왜 설연주를 부른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설연주는 속눈썹을 살짝 내리고 앞에 있는 꽃을 만지작거리며 그저 조용히 있었다.설우현은 참지 못하고 다시 다그쳤다.“내가 한 말 못 들었어? 돌아가라고 했잖아.”“오빠, 혹시 혜인 언니를 생각해서 그러는 거예요? 언니가 나 때문에 기분 나빠할까 봐?”설연주가 자신의 의도를 꿰뚫자 설우현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런 건 굳이 말로 안 해도 알 줄 알았는데.”그 말을 들은 설연주는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성혜인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좋은 오빠와 부모가 있으니 말이다.“알았어요. 지금 나갈게요.”설연주는 미련 없이 돌아섰고 설우현은 또 무슨 속셈일지 몰라 잠시 더 지켜보다가 몇 분 뒤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
류소영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가 붉어지기를 반복하며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성혜인은 다소 귀찮은 표정으로 설계도를 정리하며 말했다.“천 달러면 되겠네요. 그런데 오늘 설씨 가문에 가서 식사하지 않으세요? 우리 같이 갈까요?”설연주는 깜짝 놀라며 성혜인을 바라보았다.“혜인 언니?”“맞아.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 가자.”성혜인은 설연주를 도와 작은 판매대를 정리했다. 반면 류소영은 그 자리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두고 봐! 너희 가만두지 않을 거야!”설연주는 류소영의 말에 웃음만 나왔다. 그녀는 설씨 가문에서 존재감 없는 인물이지만 성혜인은 설의종의 친딸이다. 류소영이 성혜인을 상대로 어찌해 보겠다는 게 어이없을 따름이었다.그러나 설연주는 아무 말 없이 그냥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어차피 성혜인은 겉모습은 부드러워 보여도 능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류소영이 괜히 건드렸다가 큰코다칠 게 뻔했다.설연주와 성혜인이 설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마침 설우현이 설서율을 안고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어구구, 우리 서율이. 외삼촌이 안아 줄게요. 우리 아가 정말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어.”반승제는 옆에서 인상을 잔뜩 쓰며 그 모습을 보았다.“안으려면 그냥 안든지, 그런 애정 표현은 좀 적당히 하시죠. 징그러우니까.”설우현은 뿌듯한 듯 눈썹을 치켜올리고 반승제를 보며 비웃듯이 말했다.“서율이가 안아주지 않으니까 질투하는 거 다 보이거든요.”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우현은 문가에 서 있는 설연주를 발견하고 표정이 굳어졌다. “누가 쟤 불렀어?”설연주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그의 옆에 다가가 앉으며 말했다.“오빠, 그 말 너무 섭섭하네요.”설우현은 한마디 더 하려다 마침 위층에서 내려오는 설의종을 보고는 꾹 참았다. 설의종에게 또 벌받는 건 피하고 싶었다.설연주의 시선은 설서율에게로 향했다. 귀엽고 얌전한 아기는 큰 눈과 긴 속눈썹을 가진 인형 같았다. 설서율의 부모를 보니 왜 이렇게 사랑스럽게 생겼는지 쉽게 이해
성혜인은 설계도를 한 장 집어 들며 흡족한 눈빛을 보냈다.“이 디자인에 저작권 있나요? 제가 사고 싶어요. 직접 디자인한 거죠?”갓 돌이 지난 쌍둥이를 데리고 성혜인은 플로리아로 부모님을 뵈러 왔다.이번에 반승제도 함께 동행했지만 설씨 가문에서 설서율과 반진율을 돌보고 있어서 함께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설연주가 대답하려는 찰나 주변에서 날카로운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어머나, 이게 누구야? 우리 재주꾼 진연주 아니야?”설연주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때 단발머리를 하고 자신만만하게 걸어오는 김현서의 절친, 류소영이 눈에 들어왔다.류소영은 다가오자마자 옆에 있던 선반을 발로 툭 차며 거들먹거렸다.“너 여기서 매일 재주를 팔아가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속이는 거야?”성혜인은 류소영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눈살을 찌푸렸다.류소영은 허리에 손을 얹고 성혜인을 향해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얘가 전에 표절한 거 모르세요? 우리 학교에 소문이 다 퍼져서 아무도 얘 디자인 같은 건 안 사요. 학교 이미지에도 먹칠했으니 말 다 했죠. 그쪽이 돈 없어서 이런 데 온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차라리 제대로 된 디자이너 찾아보세요.”설연주는 이미 일어서서 류소영의 오만한 표정을 보며 손에 있던 물건을 던져버렸다.류소영은 순간 당황했다. 예전에는 늘 김현서의 뒤를 따라다니며 설연주를 괴롭혀 왔기에 겁이 많고 나약한 설연주가 반항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설연주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다시 말하지만 난 표절하지 않았어.”그러자 류소영이 냉소를 흘렸다.“표절도 모자라 교수님과 부적절한 관계까지 맺었잖아. 학교에서 네가 한 짓을 다들 알고 있을걸? 정말 역겨워!”성혜인은 이제야 눈앞의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바로 그 소문 많던 설연주였다. 이 또한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지.성혜인은 설연주를 다시 한번 바라보며 디자인을 살펴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꽤 잘 만든 작품이었다.“이거 당신이 직접 디자인한 거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