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도 자신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목졸라 죽일가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러기에는 조금 아까웠다.그는 이 고집스러운 표정을 보며 계속 키스를 이어나가려고 했다. 그때, 등 뒤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페니야.”서민규였다.예민한 반승제는 성혜인이 그 소리를 듣자마자 온몸이 굳어버렸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녀는 서둘러 반승제를 밀어냈다.“민규 씨?”성혜인은 서민규를 부르더니 곧장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서민규는 그녀와 반승제를 번갈아 한 번씩 쳐다보았다.“괜찮아?”그는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현재 성혜인의 안색이 매우 좋지 않았고, 조금 전 그의 각도에서 봤을 때 그녀는 분명 반승제에게 강압을 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서민규는 반승제에게 미움을 살 수 없어 그저 한번 인사를 건넸다.“반 대표님.”반승제는 조금 전 성혜인에게 물린 혀가 아파 말을 하는 것도 고통스러웠다.그때, 성혜인이 입을 열었다.“민규 씨, 우리 그만 가자.”그녀는 단지 돌아가 쉬고 싶었다. 요 며칠 계속 자신의 손을 걱정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잤기 때문이다.서민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자리를 뜨려는데 반승제의 말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조금 전 페니와 뭘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남편이 되어서, 자기 아내가 다른 남자와 그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아무런 생각이 없다고?’서민규의 눈빛에 당황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반승제를 마주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는 반승제가 자신에게 적대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았다.그러나 서민규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성혜인은 침착한 말투로 반승제를 뚫어져라 보며 말했다.“방금 반 대표님이랑 네이처 빌리지 일에 대해 말하고 있었어.”그녀는 반승제를 향해 웃었다.“얘기가 끝났으니 반 대표님께서는 협력업체 사람들을 만나러 돌아가 보셔도 됩니다. 윤단미 씨도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반승제는 손으로 입가를 닦았다. 혀에서
성혜인은 그를 보지 못한 채 열심히 그릇에 있는 음식을 먹었다.그녀는 손을 다쳐 오른쪽 손은 잠시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왼손으로 죽을 떠먹는 것 외에, 새우는 모두 서민규가 까고 그녀의 앞에 있는 작은 그릇에 담아주었다. 그런 다음 그녀는 포크로 찍어 먹기만 하면 됐다.반승제가 자리에 앉자 윤단미도 그제야 그를 따라 들어왔다. 성혜인을 발견한 그녀의 눈동자는 움츠러들었고 안색도 순간 보기 안 좋게 구겨졌다. 딱 봐도 페니가 이곳에 있으니 반승제가 이곳 레스토랑에 온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와 같은 소비 수준으로 이런 곳에 올 일이 전혀 없을 테니 말이다!윤단미는 기분이 나빴지만, 뭐라 말할 수 없어 반승제의 맞은편에 가만히 앉았다.그때, 종업원이 걸어오더니 그들에게 메뉴판을 건네주었다.“손님, 어떤 음식을 드시겠습니까?”반승제는 성혜인네 테이블을 힐끗 바라보았다.그들 사이의 거리는 불과 2미터 남짓이었다.“저기랑 같은 거로 해주세요.”이 말을 들은 윤단미는 더는 참을 수 없어 웃는게 웃는게 아닌 얼굴로 입을 열었다.“승제야, 나 다른 거 먹고 싶어.”그녀의 목소리 때문에 성혜인은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발견했고 미간을 찌푸렸다.‘아니 왜 여기에서까지.’메뉴판을 든 반승제는 곁눈질로 성혜인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끼고 몸을 흠칫 떨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성혜인을 바라보지는 않고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위장하려고 했다.윤단미는 그가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한 줄 알고 다시 한번 반복했다.“다른 거 먹자. 나는 그 세트 별로 먹고 싶지 않아.”그러나 반승제는 그저 메뉴판을 내려놓을 뿐이었다. 그는 마치 성혜인 테이블과 경쟁을 하는 것 같았다.겉보기에 무뚝뚝한 그는 윤단미가 뭐라 말했는지는 아예 듣지도 못했다.일 분 후, 종업원이 미안한 표정으로 다시 걸어왔다.“죄송합니다, 손님. 이 테이블이 이미 예약이 된 건데 직원의 실수로 제때 알려드리지 못했네요. 예약한 손님들이 곧 오신답니다. 지금 레스토랑 안에 다른 빈자리가
성혜인은 짜증이나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일이야 이게 대체? 대표님이 이렇게 뻔뻔하게 구는 건 본적 없는것 같은데. 뻔뻔한 게 아니라, 멘탈이 강한 건가?’이런 레스토랑의 젓가락은 옆에 있는 상자를 열어 그 안에 있는 일회용 젓가락 머리를 꺼내 속이 빈 젓가락을 끼워 넣어야 했다. 보통 포차 같은 데에서 이런 일회용 젓가락을 자주 사용하곤 했는데, 일반 일회용 젓가락보다 많이 친환경적이었다.반승제도, 윤단미도 사용할 줄 몰랐다.윤단미는 젓가락을 “팍”하고 테이블 위에 던지며 혐오의 눈빛을 조금도 거리낌 없이 여실히 드러냈다.반승제는 곁에 있는 성혜인의 젓가락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손을 다쳐 줄곧 숟가락과 포크를 사용했기에 젓가락은 옆에 두고 사용하지 않았다.그는 그 젓가락을 갖고 오더니 자연스럽게 사용하기 시작했다.성혜인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고 화가 난 어깨는 세게 들썩거렸다.맞은편에 앉아있는 서민규는 난처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성혜인의 서류상 남편으로서 반승제의 이런 모습을 보고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도저히 갈피를 잡지 못했다.화를 내자니 반승제에게 미움을 살 용기가 없고, 안내자니 이 가짜 신분이 머리 위에 있어 이렇게 침묵을 지키는 것 도리에 어긋나는 것 같았다.그는 이 미묘한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곁에 있는 윤단미를 도와 젓가락을 끼워 주었다.그러나 윤단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당신은 여기에 참견할 필요 없어요.”서민규는 윤단미가 반승제의 파트너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윤단미에게도 미움을 보일 수 없어 감히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그러자 이윽고 성혜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윤단미의 앞에 있는 젓가락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그럼 단미 씨는 손으로 드세요.”윤단미는 성혜인이 이런 짓을 하리라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얼굴이 굳어서는 입을 꽉 깨물고 있어 피가 나고 있었다.‘빌어먹을 년! 죽여버릴 년!’그녀는 무섭게 성혜인을 째려보며 바로 손을 들어 성혜인의 뺨을 내리치고 싶어 했다.‘도대체 어떻게 승제를 꼬신
식탁보에 가려서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성혜인은 몹시 수치스러웠다.그러나 한 손은 다쳤지, 한 손으로는 국을 마시고 있지 해서 도무지 그를 막을 수 없었다.게다가 성혜인이 조금 전 술까지 뿌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반승제의 체면을 구겼으니 절대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이건 분명 복수하려는 걸 거야.’성혜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테이블 아래의 광경을 들킬까 봐 두려워 숟가락을 꽉 쥐고 국을 마시지도 못했다.맞은 편에 있는 서민규는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보고는 서둘러 물었다.“페니야, 열나는 거 아니야? 얼굴이 다 빨개졌어.”성혜인은 입술을 꽉 깨물어 고개를 저었다.반승제는 그녀의 오른편에 앉아 오른손으로는 국을 마시고, 왼손은 성혜인의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밖에서 보기에 두 사람은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였다. 성혜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만 빼면 말이다.국을 한입 떠 마신 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혀가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조금 전 성혜인이 깨문 건 절대 장난으로 한 게 아니었다. 국을 마시니 혀는 마치 무언가에 찔린 듯 아파져 왔다.그는 무심코 왼손으로 그녀의 다리를 움켜잡더니 뒤로 기댔다.그러고는 가볍게 물었다.“서천에서의 일은 다 해결됐나요, 민규 씨?”서민규는 반승제가 직접 먼저 물어봐 올 줄을 예상치 못했다.“아니요, 최근에는 저를 필요로 하는 일이 없어서, 모레쯤이면 다시 돌아갈 것 같습니다.”“그쪽 공사장 사람들하고 지내는 게 많이 힘드시죠?”반승제는 담담한 말투로 말하면서 성혜인의 다리에 있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상사의 물음에 서민규는 자세를 바로 고쳐잡으며 대답했다.“괜찮습니다. 진짜 공사장에 있는 사람들은 사실 다들 너무 바빠서 교류할 시간이 별로 없거든요.”반승제는 눈썹을 추켜올리며 더욱 깊숙한 곳으로 손을 뻗어 넣었다.“제가 듣기로 공사장에 일하는 많은 분들이 사생활이 깨끗하지 못하다고 하던데, 장기간 밖에 있다 보니 바람피울 확률이 높다고 하더라고요. 심지
성혜인은 두 개의 핸드폰을 갖고 있었는데 어떨 때는 각각의 핸드폰에 카드를 하나씩 넣었고 가끔은 두 장의 카드를 한 핸드폰에 넣기도 했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까치발을 들어 가져오려고 했다.그러자 반승제는 일부러 손을 높게 들며 어두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진짜 일할 때만 쓰는 번호야?”“아뇨.”말을 끝마치자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성혜인은 몸을 흠칫 떨었다. 화면에는 SIM1 카드로 걸려온 전화가 보였는데 그 위에는 신이한이라고 쓰여 있었다.SIM1은 그녀의 개인 전화번호였다. 신이한은 그녀의 신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숨길 필요가 없어 두 전화번호를 다 알고 알려주었다.반승제는 신이한이 걸어온 전화임을 발견하고는 바로 끊어버렸다.그러고는 자신의 번호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화면에는 SIM2 카드로, 반 대표님 전화가 왔다고 알림이 떴다.한 명은 신이한, 다른 한 명은 반승제, 그녀가 누구와 더 친한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다 알렸다.반승제는 화가 나 웃음을 터뜨렸다. 이 순간만큼은 그도 정말 수치스럽기 짝이 없었다.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입술을 꽉 깨문 채 성혜인을 바라보았다. 꼭 다문 입은 마치 날카로운 칼과 같아 보였다.“개인 전화번호는 뭐야?”‘신이한도 아는데, 나는 안돼?’성혜인은 어두운 얼굴로 왼손을 벌렸다.“핸드폰 돌려주세요, 반 대표님.”어째서인지 반승제는 자신의 심장이 누군가에게 찔린 것처럼, 혀에 난 상처보다도 더 아파 났다.이런 기분은 정말 겪어보지 못한 것이었다.그는 핸드폰을 휙휙 넘겨보며 나머지 카드의 전화번호를 알아내려고 했다. 그때, 성혜인이 힘껏 그의 발등을 짓밟았다.그는 아파 몸을 흠칫 떨었고 얼굴도 조금 구겨졌다.그렇게 핸드폰은 그녀의 손에 되돌아가고 말았다.성혜인은 좋지 않은 안색으로 빠르게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 반승제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가죽구두를 봤고 거기에는 선명한 발자국이 남아있었다.‘술 뿌리고, 내 신발을 짓밟고, 내 앞에서 단미 젓가락도 버리고 했는데
윤단미는 전례 없는 위기감을 느꼈다. 반승제의 아내에게서도 못 느꼈던 위기감을 말이다. 반승제가 일부러 이 레스토랑을 선택한 것도, 일부러 페니의 곁에 앉은 것도 전부 위기감을 불러일으킨 이유였다.그녀는 반승제가 페니를 좋아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기엔 현실이 너무나도 매정했다. 그래도 다행히 반승제 본인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윤단미는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지난날 연애할 때 반승제의 호감 표시는 비싼 선물을 보내주는 것밖에 없었다. 먼저 손잡은 적도 키스한 적도 없기에 그녀는 반승제가 플라토닉 러브를 지향하는 줄 알았다.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페니를 삼켜버릴 듯 탐하는 남자가 플라토닉 러브를 지향한다는 건 한낱 정신 승리에 불과했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페니가 손가락을 다치게 하는 것으로는 모자라니 당장 어떻게든 죽여버려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반대로 성혜인의 태도에 기분이 좋아진 반승제는 말투도 부드러워졌다.“일단 차에 타.”“윤단미 씨는요?”반승제는 말없이 성혜인의 다치지 않은 손을 잡아 차의 뒷좌석에 태웠다. 조수석에 타면 다친 손이 안전벨트에 닿기 때문이다. 그다음에야 그는 윤단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단미가 멀지 않은 곳에 서서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말이다.“단미야, 넌 알아서 돌아가. 난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윤단미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지금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미친 듯이 따져 물어봤자 반승제의 불쾌감만 살 뿐이기 때문이다.마음의 저울은 이미 기울어졌다. 윤단미의 발악은 반승제의 마음이 더욱 기울어지게만 할 것이다. 그러니 급해하지 말고 한 발짝 한 발짝 걷는 것이 그녀에게는 상책이었다.“알았어.”전화를 끊은 다음 윤단미는 다시 레스토랑으로 돌아갔다. 레스토랑에는 서민규 한 사람밖에 없었다.서민규는 반승제와 성혜인의 은밀한 사이에 관해 약간이나마 알 것 같았다. 반승제가 그에게 적
“대답해.”성혜인이 대답을 주지 않자, 반승제는 더욱 힘을 더했다. 그 와중에도 손은 건드리지 않도록 한 손으로 받쳐주고 있었다.“페니 넌 다 좋은데 안목이 나쁜 것이 문제야.”성혜인은 아예 눈을 꼭 감았다. 반승제가 빨리 끝낼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다쳤다고 봐주는 것인지 오래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끝난 다음 땀을 닦아주기도 했다.상처를 건드리는 것은 큰일이었기 때문에 반승제는 크게 움직이지도 못했다. 비록 반승제는 만족하지 못했지만, 성혜인은 한 번을 쉽게 덜어냈으니 이득인 셈이다. 이렇게 8번째를 끝내고 그녀는 핸드폰을 힐끗 봤다. 시간은 아직 새벽 두 시였다.“네 개인 번호 진짜 안 알려줄 거야?”반승제가 또다시 손을 뻗어 자신의 핸드폰을 잡으려고 하자 성혜인은 아예 핸드폰을 가방 속으로 넣어버렸다.반승제의 얼굴에 피어올랐던 만족스러운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쩐지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속상하기도 했다. 만약 그가 원한다면 손쉽게 성혜인의 번호를 얻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성혜인이 먼저 알려주기를 바라고 있었다.‘기분 좋게 끝내 놓고 왜 갑자기 차갑게 구는 건데?’반승제는 짜증 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성혜인은 그의 마음을 알기나 하는지 무책임한 바람둥이처럼 침대에서 내리더니 바지를 입기 시작했다.바지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입었다. 하지만 속옷 후크는 어떻게 해도 잠기지 않았다. 한 손으로 풀 수 있는 속옷 후크를 한 손으로 잠글 수 없다는 것이 처음으로 슬픈 순간이었다.성혜인은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한쪽에서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는 반승제에게 부탁하고 싶지는 않았다.반승제는 성혜인이 먼저 부탁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원래 구경만 하려 했던 반승제도 결국 상처만 받고 말았다.성혜인이 여섯 번째 시도에도 실패했을 때 차가운 손가락이 등에 닿고 후크가 잠겼다. 그녀는 말없이 옷을 마저 입으려고 했
잠에서 깨어난 다음 성혜인은 장하리의 연락을 받았다. HS그룹과의 계약서가 체결되었다는 연락이었다.BK과 HS와의 계약이 있으니 SY그룹은 전보다 훨씬 걱정을 덜었다. 지금은 그저 임원진을 결정하는 것이 문제였다. 젊은이들로 만들어진 후보 명단이 있기는 하지만 얇은 한 장의 이력서 외에는 그들에 대해 알아갈 방법이 없었다.“사장님, 곧 있으면 경매가 열릴 거예요. 전 사장님이 계획한 사업 확장 프로젝트를 이행하기 위해 강동 땅을 입찰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경매예요. 경매 날짜는 내일인데 여러 기업이 참석할 것이기에 제대로 준비해야 할 거예요. 사장님이 잊으셨을까 봐 말씀드려요.”성휘가 아직 사장이었던 시절 확실히 사업 확장을 계획하고 있었다. 비록 성혜인은 계획을 이어갈 생각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최 측과의 약속을 어길 수는 없었기에 경매에 참석은 해야 할 것이다.“경쟁사는 메일로 보내드릴게요.”성혜인은 컴퓨터를 열자마자 윤씨 가문의 세한그룹을 발견했다. 세한은 부동산 사업을 위주로 하니 경매에 참여하는 것도 당연했다.장하리는 또 메일에서 지난번 SY그룹과 세한그룹이 일으킨 소동으로 인해 이번 경매에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는 사람이 많으니 조심하라는 말도 보탰다. 혹시라도 윤단미와 성혜인 사이에 트러블이 일어날까봐 말이다.“경매는 장 비서가 대신 가줘요.”장하리는 물론 알겠다고 답장했다.성혜인은 아침을 먹고 나서 BK사의 전화를 받았다. 설계도를 바꿔야 하는지 원래대로 진행해야 하는지 묻는 전화였다.네이처 빌리지의 공사는 큰 문제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성혜인은 지난번 2층에 화실을 만들어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을 한 적 있었다. 하지만 반승제가 명백한 답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은 기다리는 중이었다.성혜인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리면서 또다시 걸어보자 통화 연결음이 잠깐 들리다가 뚝 하고 끊겨버렸다. 누가 봐도 일부러 받지 않는 것이었다.그녀는 화를 내면 지는
공지민은 며칠 동안 별장에서 먹는 것 빼고는 드라마를 시청하거나 별장 주변 화원을 구경하며 조용하게 있었다.고용인 아줌마는 거의 그림자처럼 공지민을 따라다녔고 매일 있었던 일들을 연승혁에게 보고했다.연승혁은 이틀이면 돌아갈 수 있을거로 생각했었는데 이번 일은 좀 까다로워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다.연승혁은 운 좋게 살아남았던 시한폭탄 같은 그 사람을 빨리 찾아 죽여야만 했지만, 부하들의 추적에 의하면 이 사람은 동쪽에서 신호가 잡혔다가 얼마 안돼서 다시 서쪽에서 신호가 잡히고 있었다.부하들이 전문적인 기술자가 아니었더라면 연승혁은 자신이 지금 그 사람에게 농락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한 사람이 그토록 짧은 시간에 동쪽에서 서쪽까지 그 먼거 리를 움직일 수 있었을가.이것은 분명 그를 제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시간 끌려는 작전인 듯했다.연승혁은 원수가 너무 많아 누가 저지른 일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초조해 지기 시작했지만, 공지민의 일거일동을 보고 받을 때마다 비로소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저녁 무렵, 공지민은 직접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어 원망의 말투로 말했다.“오빠, 왜 아직도 안 와요? 나 정말 심심해 미칠 것 같은데 사람 시켜 나 좀 데리고 놀라고 하면 안 돼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줄곧 별장에서 연승혁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연승혁은 하루면 일이 해결될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며칠을 지체하게 되어 공지민 홀로 집에서 기다리게 되었다.공지민은 이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예전에 난 직업도 없이 오빠가 날 먹여 살린 거예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아무런 의욕이 없이 먹기만 했었고 누구도 먼저 연락해 찾은 일도 없어서 자신이 직업도 없었을 거로 생각했다.만약 출근하던 사람이 었으면 며칠 동안이나 사라졌는데 사장님이 직원들더러 연락해보라고 하지 않았을까.연승혁은 사람을 시켜 공지민을 데리고 밖에 나가 바람도 씌우게 하고 싶었지만 온시환이랑 부딪치는 일이 생길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온시환은 거의 매일 열 몇
“맛있어, 먹고 싶으면 이따 저녁에 나가서 먹자.”동생은 순간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그런 염정아가 걱정되어 소매를 잡으며 위로하려 했지만, 옷을 더럽힐까 봐 그러지도 못하고 낮은 소리로 물었다.“누나, 일하는 거 힘들지?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돈을 벌어 우리한테 햄버거도 사주고 저녁에도 좋은 거 먹으러 가자고 하겠어.”염정아는 손을 들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이번에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사장도 엄청 좋은 사람이고 월급도 많이 줘.”동생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햄버거를 계속해서 허겁지겁 먹어댔다.염정아는 공지민의 계획에 피해라도 줄까 봐 내일 돌아가야 해서 오늘 저녁밖에 시간이 없었다.아이들은 모두 배가 불룩하게 나와서야 밥상에서 일어섰고 동생은 배가 부름에도 토할 정도로 그냥 먹고 있었다.염정아는 동생의 손에 남은 햄버거를 뺏으며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배부르면 먹지 말라고, 왜 아직도 그 습관 못 버려?”“오늘 안 먹으면 다음엔 없을가봐...”“이젠 그런 걱정 하지 마. 내 말만 잘 들으면 앞으로 쭉 있을 거야.”“그래, 누나 말 잘 들을게.”염정아는 웃으면서 남은 햄버거를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집에 있던 냉장고는 전에 중고로 샀던 거라 너무 작았고 티비도 화면이 매우 작아 아이들이 한데 모여야만 볼 수 있어서 염정아는 집에 온 틈을 타 냉장고랑 티비를 모두 새것으로 바꾸었다.새 티비는 백 인치라서 화면이 큰 소파에 앉아서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아이들은 너무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췄고 젤 작은 막내 둘까지 신이 나서 소파 위로 기어 올라갔다.염정아는 집 안에 있는 모든것 들을 교환하고 정리 한 다음 몇 시간이 지나 아이들을 데리고 랍스타 먹으러 나섰다.식당에 도착하자 동생은 낯선 환경이라 염정아 곁에 꼭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아이들도 처음 보는 주변의 분위기에 큰 소리로 말도 못 하고 있자 염정아는 바로 조용한 방으로 예약해 메뉴판에 있는 음식을 하나씩 전부 주문했
동생의 연락을 받은 염정아는 아이들 생각에 먼저 공지민한테 연락하고 싶었지만, 둘 사이의 약속 때문에 연락도 못하고 결국 온시환에게 연락하게 된 것이였다.염정아가 할 말이 있는 듯한데 뜸들이며 못하고 있자 온시환은 그녀가 집을 그리워하는 눈치를 채고 말했다.“이틀 정도 지연되여도 괜찮을 거예요. 제가 사람 시켜 집에 데려다줄게요.”염정아는 그 순간 얼굴색이 밝아지며 눈시울을 붉혔다.“네, 고마워요 시환씨.”온시환은 말한 대로 그날 바로 사람 시켜 헬기로 염정아를 집에 데려다주었다.집에 도착한 염정아는 방문을 열고 동생이 아이들을 달래고 있는 것을 보았다.동생의 행동은 아주 서툴렀고 정상적인 사람들하고는 비교가 되지만 아이들이 그의 보살핌에 잘 커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염정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문 여는 소리를 듣고 동생은 바로 뒤돌아보더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누나!”염정아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더니 능숙하게 아이들한테 분유를 타 주고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동생은 염정아의 주변만 맴돌면서 금방 통화한 지 얼아도 되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눈앞에 있다는 것을 보며 꿈만 같게 생각했다.주방을 보던 염정아는 초라하게 놓인 반찬 몇 가지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너희 요즘 이렇게만 먹은 거야?”동생은 눈빛이 조금 흔들리더니 1분 만에 잘못을 인정하고 아이들에게 햄버거를 시켜줬다고 자백했다.“미안해 누나, 아이들이 아니라 내가 먹고 싶어서 시켰어.”두 남매는 부모님들이 살아 계실 때만 햄버거를 먹어봤었고 지금의 그들에겐 이런 음식들은 사치품이였다.그때 염정아는 집을 나서면서 아래층 마트 아줌마한테 돈을 맡겨뒀는데 동생의 요구에 아줌마가 배달을 시켜준 듯 하였다.염정아는 이 상황이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먹고 싶으면 우리 오늘도 시켜 먹자.”4억, 그들은 지금 돈이 전혀 부족하지 않았고 공지민이 후에 또 몇천만을 주었다.동생은 또 햄버거를 먹을 수 있다는 말에 너무 기쁜 나머지 바닥까지 밀고 닦기 시작했다.염정아는 빨
연승혁은 의자를 찾아 앉아 묵묵히 짙푸른 바다를 바라보았고 그의 부하들은 그들을 공격해 온 해커의 추적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시간이 오래 걸리자 연승혁은 귀찮은 어조로 물었다.“얼마나 더 걸려야 되는 거니?”“형님, 이틀은 걸려야 될 듯 해요. 그쪽에서 언제 다시 움직일지 몰라 아직은 추적하기 어려워요. 일단 움직임이 있을 때 추적해 봐야 할것 같네요. 현재 상황에서 보아 신호는 100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에서 잡히고 있으니 아마 해역 부근에 있는 것 같아요.”연승혁은 귀찮다는 듯 눈을 감으며 짧게 대답했다.“그래.”연승혁은 제원의 별장에서 나오면서 고용인 아줌마한테 공지민을 잘 돌보라고 지시했다.공지민은 휴대전화를 연승혁에게 빼앗겨 당분간 외부와 연락할 수 없었고 별장에 있는 아줌마는 매일 그녀의 건강 상태를 관찰하며 잘 돌봐주었다.이것 또한 연승혁이 지시한 일이었고 그는 이렇게 감시하며 공지민의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 지켜보고 있었다.별장에서 하루 종일 자고 일어난 공지민은 아줌마가 연승혁에게 회보하며 온시환이 정문 밖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회장님, 저 사람 들여보낼까요?”연승혁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모르지만 아줌마는 알았다는 대답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시간은 벌써 저녁 무렵이 되었고 공지민은 온 하루 별장 안에만 있었다.온시환은 며칠 동안 공지민의 소식이 끊기자 걱정되어 그녀의 집에 찾아갔지만 할머님의 말에 의하면 공지민은 요 며칠 사람도 보이지 않고 통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다.많이 불안해진 온시환은 공지민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지만 역시 받는 사람이 없었다.당연히 온시환은 공지민의 휴대전화가 연승혁의 손에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연승혁은 공지민의 휴대전화에 뜬 온시환의 부재중 전화를 보고 왠지 모를 불편한 마음이 또다시 생기게 되었다.그러고는 휴대전화를 옆에 두고 더 이상 상대하지 않았다.연씨 가문은 외래인 출입 금지라서 들어가지도 못한 온시환은 차에 앉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그 시각 염정
날은 이미 저물었고 조용한 공간엔 선남선녀 둘뿐이라 음침한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승혁은 이건 자신이 시작한 게임일 뿐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공지민이 단순하게 행동 할수록 그녀를 덮치고 싶은 사악한 마음은 점점 더 강해졌고 누나라 해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있는 한 아무나 그의 여자로 만들 수 있었다.연승혁의 시선은 공지민으로 향했고 쇄골로 부터 아래로 내리 훑어보며 얇은 슬리퍼 한 켤레만 신어 은은한 분홍빛을 드러낸 발등을 바라보더니 당황한 듯 시선을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겼다.“일이 생긴 거 맞아. 나가서 해결해 봐야 할것 같아.”연승혁은 마음속으로 며칠 후에 돌아와서도 공지민이 이대로 사람을 유혹하면 아무 생각 없이 일단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나중에 할머니께 천천히 설명하기로 생각했다.“오빠, 저도 따라가면 안 돼요?”연승혁은 공지민이 이렇게 자신에게 달라붙을 줄은 몰라 입꼬리를 실룩거리면서 말했다.“어딜 따라오겠다는 거야?”“오빠랑 떨어져서 있고 싶지 않아요. 잊고 지낸 것이 너무 많다 보니 오빠가 곁에 있어야 마음이 좀 놓일 것 같아요. 오빠한테 혹시 다른 여자라도 있나요?”“아니, 같이 가도 돼. 근데 내가 어떤 일을 하던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줘.”필경 해결해야 할 일은 피를 보는 일이라서 걱정되는 듯하였다.“괜찮아요. 저 안 무서워요.”연승혁은 밑도 끝도 없는 사람이라 공지민이 이 정도로 말하니 바로 데리고 집에서 나섰다.헬기에 탑승한 후 공지민은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연승혁은 계속 통화만 하고 있었고 전화기 너머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나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야?”회답이 없자 연승혁은 바로 헬기를 먼저 착륙하게 하고 단번에 공지민을 안아 헬기에서 내렸다.“어떤 상황인지 내가 먼저 가서 상황을 좀 볼 테니 일단 집에 가만히 있어.”“오빠,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공지민의 말에 연승혁은 심장이 무언가에 꽉 잡혀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제야 자신이
연승혁은 왜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머릿속으로 수없이 생각했지만, 공지민이 소파로 이끌어 앉고 나서야 그나마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공지민의 휴대전화는 이미 연승혁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는 전부 온시환에게서 걸려 온 것이였다.연승혁은 휴대전화를 다시 공지민 앞에 놓으면서 말했다.“이 번호에 전화 걸어 최근 한 달 동안은 연씨 가문에서 할머님을 보살펴야 한다고 해.”공지민은 부재중으로 적힌 온시환이라는 이름을 보고 물었다.“이건 누구예요?”“네 친구야. 네가 어떻게 된 건지 걱정되어 연락이 온 같으니 내 말대로 문자 한 통 보내줘.”“알겠어요.”공지민은 머리를 끄덕이며 연승혁이 말한 대로 메세지를 작성하여 발송했다.하지만 회답은 바로 오지 않았고 몇분이 지나서야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걱정되니까 전화 좀 받아.”연승혁은 바로 휴대전화를 뺏어가 대충 한 줄로 답장을 보냈다.“걱정하지 말아요.”답장을 받은 온시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공지민이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온시환이 바다에 보낸 사람은 지금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고 오늘 밤 연승혁은 그쪽에서 명령을 받을 것이다.연승혁의 꼬리는 이미 잡혔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도 증인을 찾지 못한 것이다. 증인은 연승혁에 의해 불 속에 버려진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지금은 행방불명이고 이 사람만 찾으면 연승혁을 감옥에 보낼 수 있었다.지금 공지민은 혼자 움직이고 있는 듯 하였으나 그녀의 계획을 들은 적 없는 온시환은 매우 불안했다.온시환은 자신이 막지 않으면 공지민은 죽을 길밖에 없고 그녀 역시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럼 난? 단 일 분이라도 날 생각한 적 있었나?’온시환은 공지민의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 항상 잘해주고 있는 자신을 거절할 방법이 없어서 함께 지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소파에 드러누운 온시환은 문자로 공지민이 어떤 계획을 하고 있는지 다시 묻고 싶었지만, 연승혁한테 들킬까 봐 섣
연승혁은 온시환에게 술을 건네며 말했다.“결혼도 했으니 이제 좀 안심하지 그래? 누나는 연씨 가문의 사람이기도 하고, 요즘 들어 태도도 한결 누그러졌잖아. 할머니를 돌보러 간다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돼? 설마 누가 누나를 괴롭히기라도 할까 봐?”온시환은 술잔을 비우고 몸을 뒤로 기대며 한껏 여유로운 모습으로 물었다.“그래서 원아정은 어떻게 처리할 거야?”“원래 해외로 보낼 계획이었는데, 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도망쳤어. 지금까지도 행방을 못 찾고 있어.”온시환은 이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네 사람들 진짜 무능하네?”이 일은 연승혁 자신도 잘못 처리한 게 분명했기에 그는 드물게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이곳에 공지민이 없으니 흥미를 잃은 듯 지루해졌다.연승혁 역시 마음이 이곳을 떠나 있었다. 그는 이상우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집에 공지민이 있는데...’그 생각이 들자마자 그는 어딘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술자리에 나와 있는 것도 단지 그녀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가 또다시 선을 넘는 행동을 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이 게임은 분명 자신이 시작한 것이었지만 그는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기분은 묘하게 불편하면서도 생소했다.그는 다시 한 잔의 술을 들이켜고는 옆에 앉은 온시환을 흘깃 바라보았다.솔직히 말해, 온시환의 외모는 인정할 만했다. 여자 친구도 여럿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공지민도 그에게 그런 눈빛을 보냈던 적이 있지 않을까?그녀가 두 다리로 이 남자의 허리를 감싸안은 적은 없었을까?그런 생각만으로도 속이 답답해지고 묘한 불쾌감이 밀려왔다.연승혁은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투를 집으며 말없이 나갈 준비를 했다.이상우도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을 때 연승혁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이상우는 담배를 피우지 않기에 조금 떨어져서 걸어가며 말했다.“나
공지민의 눈빛은 너무 맑았다. 연승혁은 이런 순수함이 싫었다. 그는 예전부터 너무 깨끗한 것을 보면 망가뜨리고 싶어졌다.마치 과거 드라마 속 공지민을 처음 봤을 때의 기분과도 같았다.지금은 상황이 그의 손아귀에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녀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공지민은 그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그 모습은 그날 폐공장에서 보여주었던 농염한 태도와는 전혀 달랐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녹아내리게 했다.“오빠, 저녁은 뭐 먹어요?”“네가 먹고 싶은 걸로. 내가 요리사에게 시킬게.”연승혁은 시선을 피하며 어둑한 눈빛을 감추고 소파로 가 앉았다. 공지민은 그의 꽁무니를 따라가 곁에 앉았다.“아무거나요.”그녀는 어느새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버렸다. 그러고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나 예전에 오빠를 좋아했던 건 오빠 얼굴 때문이 아니었을까요?”공지민은 장난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턱선을 따라 손끝으로 훑더니, 손가락 끝이 그의 목젖을 스치듯 지나갔다.그 순간, 연승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무엇인가 가볍고도 날카로운 것이 그의 마음 한구석을 간지럽혔다. 피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손끝 온기가 은근히 탐이 났다.요리사가 저녁을 가져올 때까지도 두 사람은 여전히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공지민은 연승혁에게 같이 앉아 식사를 하자고 했지만 연승혁은 갑자기 나갈 일이 있다며 혼자서 먹으라고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차에 앉은 연승혁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상황이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그때 친구로부터 술자리에 오라는 연락이 와서 그는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마침 그 자리에는 이상우도 나와 있었다.이상우는 여전히 금테 안경을 쓴 채 그를 보자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연승혁은 평온한 얼굴로 그의 옆 자리에 앉았다. 그때 누군가가 물었다.“원아정이 사라졌다는데, 그거 진짜야?”연승혁은 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마시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응, 진짜야
공지민은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이내 진심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런 거였군요.”그녀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얼굴에는 어딘가 알 수 없는 혼란과 미묘한 행복감이 섞여 있었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를 골려주려던 참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바지를 벗긴 걸 생각하면 그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그날 폐공장에서 그녀가 ‘오빠’라고 불렀던 그 농염한 목소리는 마치 주문처럼 그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두 다리를 꼬아 올리며 보였던 그 요염한 눈빛은 숲속의 교활한 여우처럼 그를 현혹시켰다. 하지만 지금의 공지민은 순수하고 멍한 토끼처럼 덫에 걸린 듯한 모습이었다.처음에는 그저 장난일 뿐이었는데 어느새 심장이 조금씩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이상우는 커튼을 닫고 손목시계를 흘깃 보더니 말했다.“난 이만 가볼게. 다음에 같이 밥이나 한번 먹자. 연락해.”이상우와는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친구였기에 그 정도의 약속은 자연스러웠다.연승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지민의 볼을 꼬집었다.그녀의 피부는 매끄럽고 부드러웠으며 도톰한 볼은 꼬집을 때마다 화난 햄스터를 연상케 했다.방 안에 둘만 남았을 때 공지민은 커다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연승혁은 살짝 힘을 주며 부드럽게 달래듯 말했다.“귀여워서. 다시 한번 오빠라고 불러볼래?”그날 폐공장에서 불렀던 것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인 목소리로 말이다.공지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평소에 제가 그렇게 불렀어요?”연승혁은 그녀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그래.”“정말 오글거리네요.”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그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오빠.”공지민의 목소리는 지난번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이지 않았지만 왠지 이번에는 지켜주고 싶어지는 느낌이 들었다.연승혁은 그 순간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움트는 걸 느꼈다. 손을 내리고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도 가슴이 이상하게 뛰었다.하지만 그는 이 상황이 꽤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