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해.”성혜인이 대답을 주지 않자, 반승제는 더욱 힘을 더했다. 그 와중에도 손은 건드리지 않도록 한 손으로 받쳐주고 있었다.“페니 넌 다 좋은데 안목이 나쁜 것이 문제야.”성혜인은 아예 눈을 꼭 감았다. 반승제가 빨리 끝낼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다쳤다고 봐주는 것인지 오래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끝난 다음 땀을 닦아주기도 했다.상처를 건드리는 것은 큰일이었기 때문에 반승제는 크게 움직이지도 못했다. 비록 반승제는 만족하지 못했지만, 성혜인은 한 번을 쉽게 덜어냈으니 이득인 셈이다. 이렇게 8번째를 끝내고 그녀는 핸드폰을 힐끗 봤다. 시간은 아직 새벽 두 시였다.“네 개인 번호 진짜 안 알려줄 거야?”반승제가 또다시 손을 뻗어 자신의 핸드폰을 잡으려고 하자 성혜인은 아예 핸드폰을 가방 속으로 넣어버렸다.반승제의 얼굴에 피어올랐던 만족스러운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쩐지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속상하기도 했다. 만약 그가 원한다면 손쉽게 성혜인의 번호를 얻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성혜인이 먼저 알려주기를 바라고 있었다.‘기분 좋게 끝내 놓고 왜 갑자기 차갑게 구는 건데?’반승제는 짜증 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성혜인은 그의 마음을 알기나 하는지 무책임한 바람둥이처럼 침대에서 내리더니 바지를 입기 시작했다.바지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입었다. 하지만 속옷 후크는 어떻게 해도 잠기지 않았다. 한 손으로 풀 수 있는 속옷 후크를 한 손으로 잠글 수 없다는 것이 처음으로 슬픈 순간이었다.성혜인은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한쪽에서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는 반승제에게 부탁하고 싶지는 않았다.반승제는 성혜인이 먼저 부탁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원래 구경만 하려 했던 반승제도 결국 상처만 받고 말았다.성혜인이 여섯 번째 시도에도 실패했을 때 차가운 손가락이 등에 닿고 후크가 잠겼다. 그녀는 말없이 옷을 마저 입으려고 했
잠에서 깨어난 다음 성혜인은 장하리의 연락을 받았다. HS그룹과의 계약서가 체결되었다는 연락이었다.BK과 HS와의 계약이 있으니 SY그룹은 전보다 훨씬 걱정을 덜었다. 지금은 그저 임원진을 결정하는 것이 문제였다. 젊은이들로 만들어진 후보 명단이 있기는 하지만 얇은 한 장의 이력서 외에는 그들에 대해 알아갈 방법이 없었다.“사장님, 곧 있으면 경매가 열릴 거예요. 전 사장님이 계획한 사업 확장 프로젝트를 이행하기 위해 강동 땅을 입찰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경매예요. 경매 날짜는 내일인데 여러 기업이 참석할 것이기에 제대로 준비해야 할 거예요. 사장님이 잊으셨을까 봐 말씀드려요.”성휘가 아직 사장이었던 시절 확실히 사업 확장을 계획하고 있었다. 비록 성혜인은 계획을 이어갈 생각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최 측과의 약속을 어길 수는 없었기에 경매에 참석은 해야 할 것이다.“경쟁사는 메일로 보내드릴게요.”성혜인은 컴퓨터를 열자마자 윤씨 가문의 세한그룹을 발견했다. 세한은 부동산 사업을 위주로 하니 경매에 참여하는 것도 당연했다.장하리는 또 메일에서 지난번 SY그룹과 세한그룹이 일으킨 소동으로 인해 이번 경매에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는 사람이 많으니 조심하라는 말도 보탰다. 혹시라도 윤단미와 성혜인 사이에 트러블이 일어날까봐 말이다.“경매는 장 비서가 대신 가줘요.”장하리는 물론 알겠다고 답장했다.성혜인은 아침을 먹고 나서 BK사의 전화를 받았다. 설계도를 바꿔야 하는지 원래대로 진행해야 하는지 묻는 전화였다.네이처 빌리지의 공사는 큰 문제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성혜인은 지난번 2층에 화실을 만들어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을 한 적 있었다. 하지만 반승제가 명백한 답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은 기다리는 중이었다.성혜인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리면서 또다시 걸어보자 통화 연결음이 잠깐 들리다가 뚝 하고 끊겨버렸다. 누가 봐도 일부러 받지 않는 것이었다.그녀는 화를 내면 지는
“면적에 따로 요구가 있을까요?”“너무 작지만 않으면 돼. 붓 씻기 편하게 화장실도 있었으면 좋겠군.”예상 밖의 요구에 성혜인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네.”“벽은 가장 간단한 흰색이면 좋겠어. 또 다른 화가의 작품을 걸어야 하니까 따로 자리를 내줘. 인테리어도 작품이 돋보이게 해주고 국내와 국외 두 가지 파트로 나눠줘.”나라에 따라 화풍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특히 국내 화가들의 화풍이 유독 독특해서 반승제의 요구는 중요한 것이었다.“알겠습니다, 대표님.”“그리고 난 초상화는 싫어.”그 말인즉슨 화방에 걸 작품 중에 초상화는 없어야 한다는 뜻이었다.성혜인은 입술을 약간 깨물었다. 어쩐지 할 일이 많아진 것 같기는 하지만 반승제는 고용주였기 때문에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은 당연했다.“너도 스승님의 제자니까 그림을 고르는 일은 너한테 맡길게. 대략 8점 정도만 있으면 돼.”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물었다.“대표님의 소장품 중에서 고를 생각은 없으신가요?”반승제는 수많은 소장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성혜인이 일을 쉽게 해결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요즘 어떤 작품을 살 수 있는지 주의 깊게 봐줘, 돈은 내가 낼 테니까. 마침 얼마 후 경매가 있다고 들었는데 너도 같이 가자. 경매에 아마 그림도 나올 거야.”성혜인은 당연히 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는 공적인 일이었기에 싫다고 해도 허락해야 했다. 지금껏 쌓아온 명성을 네이처 빌리지에서 망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경매에 나온 그림은 대부분 수백억 원씩 했다. 반승제는 8점 정도를 요구했으니 화방에 걸 그림에만 2000억 원 정도를 쓰게 될 것이다.반승제는 스케줄 표를 확인했다. 경매는 3일 후에 바로 있었는데 주최 측에서는 최소 4점의 미술 작품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원래 경매에 참석할 생각이 없었지만 성혜인과 함께라면 경매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3일 후에 경매가 있네. 너도 따라와.”이는 제안이 아닌 명령이었다
성혜인의 안색은 좋지 못했다. 마치 영혼을 잃은 것처럼 초점이 흐릿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붕대가 뜨거운 물에 닿아 상처가 심해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반승제는 성혜인을 끌어당기면서 그녀가 들고 있던 유리 파편을 빼앗아 던졌다. 다행히 다른 한쪽 손이 유리 파편에 베지는 않은 듯했다.“붕대가 약간 젖었을 뿐이니까 새 걸로 바꾸면 괜찮을 거야.”반승제는 성혜인이 걱정할까 봐 좋은 뜻으로 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르게 이해했는지 피식 웃으면서 반승제를 밀어냈다.“약간 젖었을 뿐이라고요? 대표님이 보기에는 간단한 문제일 수도 있겠죠. 제 한쪽 손 따위가 고귀하신 윤단미 씨의 얼굴보다 중요할 리는 없을 테니까요.”성혜인의 오해에 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몰랐다.반대로 윤단미는 반승제가 성혜인부터 걱정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래서 더욱 서럽게 울면서 말했다.“승제야, 봤지? 저 여자가 내 얼굴을 그어버리려고 했어. 사람이 어떻게 이 정도로 악독할 수가 있어?”윤단미의 말에 성혜인은 속이 다 메슥거렸다.“악독이요? 윤단미 씨, 제를 평가하기 전에 일단 정리해야 할 일이 있는 것 같은데요. 제가 손을 다친 날 왜 윤단미 씨도 마침 손을 다치고, 또 마침 의사를 차지했죠? 저는 윤단미 씨의 얼굴을 다치게 하지 못했지만, 윤단미 씨는 제 손을 다치게 했으니 악독이라는 말은 윤단미 씨에게 더 어울리는 것 같은데요.”성혜인의 눈빛에는 반승제와 윤단미에 대한 증오로 가득했다.“저와 대표님은 그냥 거래하는 사이일 뿐이에요. 그러니 윤단미 씨의 질투는 대표님한테 직접 얘기해요. 뭐든 저를 골탕 먹이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요.”반승제는 어두운 눈빛으로 윤단미를 힐끗 봤다. 그러자 윤단미는 겁먹다 못해 입술이 다 파르르 떨렸다.“나... 나 아니야. 승제야, 믿어줘.”성혜인은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빨리 진세운을 만나 상처를 봐달라고 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가 떠나려고
성혜인이 차에 올라탄 다음 반승제는 바로 출발하는 것이 아닌 그녀를 바라보면서 물었다.“손은 좀 어때?”성혜인은 이미 스스로 젖은 붕대를 풀고 상처를 드러냈다. 반승제는 뒷좌석에 있던 약품 상자에서 붕대를 꺼내더니 그녀의 손을 잡고 한층 한층 감아줬다. 지금도 이렇게 심각한 상처가 다쳤을 때는 얼마나 아팠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반승제는 비수에 심장이 찔린 것만 같았다. 요즘 들어 이런 기분이 더욱 자주 느껴지는 것 같았다. 반대로 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의 감정에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붕대를 제대로 감고 난 반승제는 머리를 들어 성혜인을 바라봤다.“이번 일이 단미가 주도한 것이라고 해도 나는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성혜인은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그녀의 반응에 반승제는 또다시 열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붕대를 뒷좌석으로 휙 던지고는 빠르게 출발했다.잠시 후 한 별장 앞에 도착해서 안으로 들어가니 밧줄에 칭칭 묶인 남자가 보였다. 그가 바로 자기 손을 다치게 한 사람이라는 것을 성혜인은 한눈에 알아봤다. 비록 얼굴을 본 시간은 짧았지만 그 정도로 큰 고통을 준 사람을 쉽게 잊을 수는 없었다.오늘 다시 남자와 마주하게 되자 상대가 아무리 밧줄에 묶여 있다고 해도 성혜인은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녀의 어두운 안색에 반승제는 바로 사람을 제대로 찾아왔음을 직감했다.“저 사람 맞아?”“네.”성혜인이 대답하자마자 남자는 방안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곧바로 문을 사이 두고 처참한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반승제는 담배 한 대를 꺼냈다. 고귀한 귀공자가 동네 양아치와 어울리는 듯한 불편한 조합이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난 그는 성혜인은 물끄러미 바라봤다.“저 사람은 반재인이라고 해. 내 사촌 형이야. 혹시 둘이 아는 사이인가?”‘만약 둘이 모르는 사이라면 이런 일이 일어날 리도 없었겠지. 아니면 혹시 나한테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발견하고 가문에서 손을 쓴 건가? 그렇다면...
반재인은 또다시 피를 토해냈다. 이번에는 너무 겁을 먹어서였다. 반승제의 표정은 아주 진지했다. 그러니 그가 한 말도 거짓은 아닐 것이다.‘그냥 천한 여자일 뿐이잖아? 이렇게 진지할 건 또 뭔데?’이때 반재인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반승제, 너 설마...?”반재인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반승제가 그의 얼굴을 꽉 짓밟았다. 마치 그가 보잘것없는 쓰레기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거기 가서 열심히 일해. 내가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면 돌아오게 할 테니까.”굴욕을 견딜 수 없던 반재인은 눈가가 빨개졌다.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기는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그는 원래 윤단미를 만나러 가는 길에 있어야 했다. 하필이면 반평생을 좋아해 온 여자와 저녁 약속을 잡은 날에 반승제에게 끌려왔으니 불만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이... 이거 놔...”반재인의 입가에는 여전히 피가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이를 꽉 악물면서 반항하려 들었다.반승제가 마침 반재인을 끌어내려고 했을 때 핸드폰이 눈치 없이 울렸다. 반희월이 건 전화였다.“여보세요.”반승제는 반재인의 얼굴을 밟고 있는 채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 건너편에서 반희월은 잠깐 침묵하다가 물었다.“너 재인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니?”반승제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되물었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모르는 척하는 건 소용없다. 재인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네 사촌 형이 아니니. 만약 오늘 내로 내 앞에 데려다 놓지 않는다면 바로 네 할아버지께 말씀드릴 거다. 네 형이 사고를 당했을 때 이미 집안사람끼리 싸우는 건 절대 안 된다고 당부했잖니.”반승제는 짜증이 밀려와서 반재인을 툭 차버렸다. 그러자 그는 피를 토해내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반희월도 당연히 반재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그의 참상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래서 싸늘한 눈빛으로 경고를 계속했다.“네가 페니를 위해 이런 짓을 벌였다지?
반승제의 키스는 다정함이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격렬했다. 성혜인은 숨이 막혀 히끅거리다가 무의식적으로 그의 팔을 꽉 잡았다. 근육이 붙어 있는 팔은 한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키스를 끝낸 반승제는 진득한 눈빛으로 성혜인을 바라봤다. 그렇게 그가 아직도 여운에 잠겨 있을 때 성혜인의 냉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반재인 씨랑 윤단미 씨가 혹시 아는 사이인가요? 그것 외에는 반재인 씨가 저를 갑자기 찾아올 이유가 떠오르지 않네요. 그리고 반희월 여사님이 갑자기 전화 온 것도 이상해요. 그 새로 고자질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성혜인은 머리를 들어 반승제를 바라봤다. 그녀의 볼은 조금 전의 키스로 인해 발그레해져 있었다. 하지만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이성적이었다.“대표님, 조사는 이 세 사람의 관계부터 하면 되겠네요. 혹시 윤단미 씨가 임신했다고 마음이 약해진 건 아니시죠?”조금 전 차 안에서만 해도 반승제는 절대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했지만, 정작 반재인 앞에서는 윤단미의 ‘윤’ 자도 꺼내지 않았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반승제가 범인을 찾아준 건 고맙지만, 윤단미가 연루되어 있을 가능성을 일부러 외면하는 것도 사실이었다.반승제는 아직도 한 손으로 벽을 짚은 채로 성혜인을 품에 가두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성혜인의 다치지 않은 쪽 손을 잡고 끈질기게 시선을 마주칠 뿐이었다.이때 성혜인은 갑자기 손을 거두면서 말했다.“만약 윤단미 씨의 책임을 묻지 않을 생각이라면 이번 일은 이쯤에서 끝내죠. 어차피 저는 윤단미 씨를 이길 능력이 없으니까요.”“복수라면 네가 이미 직접 했잖아. 근데 뭘 더 원하는 거야?”성혜인은 고개를 떨궜다. 조금 전 그가 반재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얻은 얄팍한 감동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제가 너무 큰 걸 원했나 보네요. 이만 돌아가시죠.”“화났어?”성혜인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에게는 화를 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승제는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었다. 반승제에게 윤단미보
‘이건 또 무슨 태도야?!’반승제는 운전대를 꽉 잡더니 홧김에 페달을 꽉 밟아버렸다. 그렇게 BH그룹의 사무실에 도착한 다음 윤단미에게 전화를 걸었다.같은 시각, 윤단미는 기다리다 못해 집으로 돌아갔다. 반재인이 지각할 때부터 그녀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반승제가 금방 조사하겠다고 선언했으니 반재인이 잡혀갔을 가능성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곧바로 반희월에게 연락했다.반희월에게 아들이라고는 임경헌 한 명밖에 없었다. 반씨 가문에 관심이 없었던 그는 줄곧 가문과 동떨어져 지냈다. 반희월도 성격이 부드러운 편이라 집안사람들끼리 싸우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윤단미는 초조한 마음으로 반재인이 답장을 주기를 기다렸다. 그가 자신을 팔아버리지는 않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이때 반승제가 전화를 걸어왔다. 윤단미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수락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 승제야...”전화 건너편에서 반승제는 서류를 훑어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반재인은 네가 부려 먹은 거야?”“승제야, 난...”“오늘 일로 다시 페니를 찾아가는 일은 없어야 할 거야. 넌 집에서 형한테 뭘 받았는지나 생각하고 있어.”윤단미는 화가 나서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내가 그 여자 때문에 무슨 일을 당할 뻔했는지 몰라?!”“그 여자가 너 때문에 무슨 일을 당할 뻔했는지는 모르는 거야? 혹시 네가 진짜 대단한 존재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윤단미는 말문이 막혔다. 눈빛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그녀는 알고 있다. 만약 반승제와 싸우게 된다면 두 사람 사이의 거리만 벌어지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분노를 꾹꾹 억누르면서 피비린내가 맴도는 입으로 말했다.“알았어. 페니는 찾아가지 않을게.”반승제는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윤단미는 이를 악물고 핸드폰을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그리고 방안에서 부술 수 있는 모든 물건을 산산이 깨부쉈다. 그렇게 한참 후에야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밖에 있는 사람 아무나 불러왔다.“디자이너 년의 집안 상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