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각 성혜인은 이미 밖에 도착했다. 멀지 않은 곳에 서민규의 차가 주차되어있었는데 조금 전 그녀가 메시지를 보내 불러온 것이었다.아직 서민규에게 월급을 주고 있으니, 그가 서천에 돌아가지 않은 틈을 타 쓸 수 있을 때 써야 했다.성혜인은 모퉁이를 돌아 서민규의 차로 향하려 했다.그때, 반승제가 그녀의 멀쩡한 손을 확 잡아 끌어당겼다.밖이라 해도 아직 정원을 완전히 떠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주변에는 드문드문 사람들이 서 있었다. 사람들은 반승제를 보자 일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성혜인은 고개를 숙이고 그의 기다란 손가락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대표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반승제는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며 말했다.“요 며칠 계속 메시지 보냈는데, 답장 안 하더라?”“네이처 빌리지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 굳이 답장할 필요가 없는것 같아서요.”“조금 전 너를 대신해 술도 마셔줬는데, 왜 아는 체도 하지 않았지?”“대표님, 대표님은 제 고객이십니다. 고객에게 술을 대신 마시게 하는 도리가 어디 있나요?”고객이라는 한마디로 그녀는 두 사람 사이의 경계를 철저히 그었다.반승제는 순간 무언가에 가슴이 찔린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 밖이라 화는 내지 않았고 무거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손은 어쩌다 다친 거야?”그녀는 조금 짜증 난다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그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반승제는 처음으로 자신이 이렇게 환영받지 못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그는 아래 우로 그녀를 훑어보았는데 여전히 차갑고 흔들림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반승제는 몸을 기울여 자세히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가 물었다.“페니야, 정말 좋고 나쁜 게 뭔지 모르는 거야?”성혜인은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옆에 웨이터가 주는 술을 건네받으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대표님, 혹시 여태 한 번도 여자한테 거절당한 적 없으신 거예요? 호의를 제대로 안 받아줬다고 제가 좋고 나쁨을 모르는
그러나 그도 자신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목졸라 죽일가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러기에는 조금 아까웠다.그는 이 고집스러운 표정을 보며 계속 키스를 이어나가려고 했다. 그때, 등 뒤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페니야.”서민규였다.예민한 반승제는 성혜인이 그 소리를 듣자마자 온몸이 굳어버렸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녀는 서둘러 반승제를 밀어냈다.“민규 씨?”성혜인은 서민규를 부르더니 곧장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서민규는 그녀와 반승제를 번갈아 한 번씩 쳐다보았다.“괜찮아?”그는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현재 성혜인의 안색이 매우 좋지 않았고, 조금 전 그의 각도에서 봤을 때 그녀는 분명 반승제에게 강압을 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서민규는 반승제에게 미움을 살 수 없어 그저 한번 인사를 건넸다.“반 대표님.”반승제는 조금 전 성혜인에게 물린 혀가 아파 말을 하는 것도 고통스러웠다.그때, 성혜인이 입을 열었다.“민규 씨, 우리 그만 가자.”그녀는 단지 돌아가 쉬고 싶었다. 요 며칠 계속 자신의 손을 걱정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잤기 때문이다.서민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자리를 뜨려는데 반승제의 말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조금 전 페니와 뭘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남편이 되어서, 자기 아내가 다른 남자와 그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아무런 생각이 없다고?’서민규의 눈빛에 당황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반승제를 마주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는 반승제가 자신에게 적대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았다.그러나 서민규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성혜인은 침착한 말투로 반승제를 뚫어져라 보며 말했다.“방금 반 대표님이랑 네이처 빌리지 일에 대해 말하고 있었어.”그녀는 반승제를 향해 웃었다.“얘기가 끝났으니 반 대표님께서는 협력업체 사람들을 만나러 돌아가 보셔도 됩니다. 윤단미 씨도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반승제는 손으로 입가를 닦았다. 혀에서
성혜인은 그를 보지 못한 채 열심히 그릇에 있는 음식을 먹었다.그녀는 손을 다쳐 오른쪽 손은 잠시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왼손으로 죽을 떠먹는 것 외에, 새우는 모두 서민규가 까고 그녀의 앞에 있는 작은 그릇에 담아주었다. 그런 다음 그녀는 포크로 찍어 먹기만 하면 됐다.반승제가 자리에 앉자 윤단미도 그제야 그를 따라 들어왔다. 성혜인을 발견한 그녀의 눈동자는 움츠러들었고 안색도 순간 보기 안 좋게 구겨졌다. 딱 봐도 페니가 이곳에 있으니 반승제가 이곳 레스토랑에 온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와 같은 소비 수준으로 이런 곳에 올 일이 전혀 없을 테니 말이다!윤단미는 기분이 나빴지만, 뭐라 말할 수 없어 반승제의 맞은편에 가만히 앉았다.그때, 종업원이 걸어오더니 그들에게 메뉴판을 건네주었다.“손님, 어떤 음식을 드시겠습니까?”반승제는 성혜인네 테이블을 힐끗 바라보았다.그들 사이의 거리는 불과 2미터 남짓이었다.“저기랑 같은 거로 해주세요.”이 말을 들은 윤단미는 더는 참을 수 없어 웃는게 웃는게 아닌 얼굴로 입을 열었다.“승제야, 나 다른 거 먹고 싶어.”그녀의 목소리 때문에 성혜인은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발견했고 미간을 찌푸렸다.‘아니 왜 여기에서까지.’메뉴판을 든 반승제는 곁눈질로 성혜인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끼고 몸을 흠칫 떨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성혜인을 바라보지는 않고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위장하려고 했다.윤단미는 그가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한 줄 알고 다시 한번 반복했다.“다른 거 먹자. 나는 그 세트 별로 먹고 싶지 않아.”그러나 반승제는 그저 메뉴판을 내려놓을 뿐이었다. 그는 마치 성혜인 테이블과 경쟁을 하는 것 같았다.겉보기에 무뚝뚝한 그는 윤단미가 뭐라 말했는지는 아예 듣지도 못했다.일 분 후, 종업원이 미안한 표정으로 다시 걸어왔다.“죄송합니다, 손님. 이 테이블이 이미 예약이 된 건데 직원의 실수로 제때 알려드리지 못했네요. 예약한 손님들이 곧 오신답니다. 지금 레스토랑 안에 다른 빈자리가
성혜인은 짜증이나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일이야 이게 대체? 대표님이 이렇게 뻔뻔하게 구는 건 본적 없는것 같은데. 뻔뻔한 게 아니라, 멘탈이 강한 건가?’이런 레스토랑의 젓가락은 옆에 있는 상자를 열어 그 안에 있는 일회용 젓가락 머리를 꺼내 속이 빈 젓가락을 끼워 넣어야 했다. 보통 포차 같은 데에서 이런 일회용 젓가락을 자주 사용하곤 했는데, 일반 일회용 젓가락보다 많이 친환경적이었다.반승제도, 윤단미도 사용할 줄 몰랐다.윤단미는 젓가락을 “팍”하고 테이블 위에 던지며 혐오의 눈빛을 조금도 거리낌 없이 여실히 드러냈다.반승제는 곁에 있는 성혜인의 젓가락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손을 다쳐 줄곧 숟가락과 포크를 사용했기에 젓가락은 옆에 두고 사용하지 않았다.그는 그 젓가락을 갖고 오더니 자연스럽게 사용하기 시작했다.성혜인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고 화가 난 어깨는 세게 들썩거렸다.맞은편에 앉아있는 서민규는 난처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성혜인의 서류상 남편으로서 반승제의 이런 모습을 보고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도저히 갈피를 잡지 못했다.화를 내자니 반승제에게 미움을 살 용기가 없고, 안내자니 이 가짜 신분이 머리 위에 있어 이렇게 침묵을 지키는 것 도리에 어긋나는 것 같았다.그는 이 미묘한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곁에 있는 윤단미를 도와 젓가락을 끼워 주었다.그러나 윤단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당신은 여기에 참견할 필요 없어요.”서민규는 윤단미가 반승제의 파트너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윤단미에게도 미움을 보일 수 없어 감히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그러자 이윽고 성혜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윤단미의 앞에 있는 젓가락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그럼 단미 씨는 손으로 드세요.”윤단미는 성혜인이 이런 짓을 하리라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얼굴이 굳어서는 입을 꽉 깨물고 있어 피가 나고 있었다.‘빌어먹을 년! 죽여버릴 년!’그녀는 무섭게 성혜인을 째려보며 바로 손을 들어 성혜인의 뺨을 내리치고 싶어 했다.‘도대체 어떻게 승제를 꼬신
식탁보에 가려서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성혜인은 몹시 수치스러웠다.그러나 한 손은 다쳤지, 한 손으로는 국을 마시고 있지 해서 도무지 그를 막을 수 없었다.게다가 성혜인이 조금 전 술까지 뿌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반승제의 체면을 구겼으니 절대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이건 분명 복수하려는 걸 거야.’성혜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테이블 아래의 광경을 들킬까 봐 두려워 숟가락을 꽉 쥐고 국을 마시지도 못했다.맞은 편에 있는 서민규는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보고는 서둘러 물었다.“페니야, 열나는 거 아니야? 얼굴이 다 빨개졌어.”성혜인은 입술을 꽉 깨물어 고개를 저었다.반승제는 그녀의 오른편에 앉아 오른손으로는 국을 마시고, 왼손은 성혜인의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밖에서 보기에 두 사람은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였다. 성혜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만 빼면 말이다.국을 한입 떠 마신 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혀가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조금 전 성혜인이 깨문 건 절대 장난으로 한 게 아니었다. 국을 마시니 혀는 마치 무언가에 찔린 듯 아파져 왔다.그는 무심코 왼손으로 그녀의 다리를 움켜잡더니 뒤로 기댔다.그러고는 가볍게 물었다.“서천에서의 일은 다 해결됐나요, 민규 씨?”서민규는 반승제가 직접 먼저 물어봐 올 줄을 예상치 못했다.“아니요, 최근에는 저를 필요로 하는 일이 없어서, 모레쯤이면 다시 돌아갈 것 같습니다.”“그쪽 공사장 사람들하고 지내는 게 많이 힘드시죠?”반승제는 담담한 말투로 말하면서 성혜인의 다리에 있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상사의 물음에 서민규는 자세를 바로 고쳐잡으며 대답했다.“괜찮습니다. 진짜 공사장에 있는 사람들은 사실 다들 너무 바빠서 교류할 시간이 별로 없거든요.”반승제는 눈썹을 추켜올리며 더욱 깊숙한 곳으로 손을 뻗어 넣었다.“제가 듣기로 공사장에 일하는 많은 분들이 사생활이 깨끗하지 못하다고 하던데, 장기간 밖에 있다 보니 바람피울 확률이 높다고 하더라고요. 심지
성혜인은 두 개의 핸드폰을 갖고 있었는데 어떨 때는 각각의 핸드폰에 카드를 하나씩 넣었고 가끔은 두 장의 카드를 한 핸드폰에 넣기도 했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까치발을 들어 가져오려고 했다.그러자 반승제는 일부러 손을 높게 들며 어두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진짜 일할 때만 쓰는 번호야?”“아뇨.”말을 끝마치자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성혜인은 몸을 흠칫 떨었다. 화면에는 SIM1 카드로 걸려온 전화가 보였는데 그 위에는 신이한이라고 쓰여 있었다.SIM1은 그녀의 개인 전화번호였다. 신이한은 그녀의 신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숨길 필요가 없어 두 전화번호를 다 알고 알려주었다.반승제는 신이한이 걸어온 전화임을 발견하고는 바로 끊어버렸다.그러고는 자신의 번호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화면에는 SIM2 카드로, 반 대표님 전화가 왔다고 알림이 떴다.한 명은 신이한, 다른 한 명은 반승제, 그녀가 누구와 더 친한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다 알렸다.반승제는 화가 나 웃음을 터뜨렸다. 이 순간만큼은 그도 정말 수치스럽기 짝이 없었다.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입술을 꽉 깨문 채 성혜인을 바라보았다. 꼭 다문 입은 마치 날카로운 칼과 같아 보였다.“개인 전화번호는 뭐야?”‘신이한도 아는데, 나는 안돼?’성혜인은 어두운 얼굴로 왼손을 벌렸다.“핸드폰 돌려주세요, 반 대표님.”어째서인지 반승제는 자신의 심장이 누군가에게 찔린 것처럼, 혀에 난 상처보다도 더 아파 났다.이런 기분은 정말 겪어보지 못한 것이었다.그는 핸드폰을 휙휙 넘겨보며 나머지 카드의 전화번호를 알아내려고 했다. 그때, 성혜인이 힘껏 그의 발등을 짓밟았다.그는 아파 몸을 흠칫 떨었고 얼굴도 조금 구겨졌다.그렇게 핸드폰은 그녀의 손에 되돌아가고 말았다.성혜인은 좋지 않은 안색으로 빠르게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 반승제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가죽구두를 봤고 거기에는 선명한 발자국이 남아있었다.‘술 뿌리고, 내 신발을 짓밟고, 내 앞에서 단미 젓가락도 버리고 했는데
윤단미는 전례 없는 위기감을 느꼈다. 반승제의 아내에게서도 못 느꼈던 위기감을 말이다. 반승제가 일부러 이 레스토랑을 선택한 것도, 일부러 페니의 곁에 앉은 것도 전부 위기감을 불러일으킨 이유였다.그녀는 반승제가 페니를 좋아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기엔 현실이 너무나도 매정했다. 그래도 다행히 반승제 본인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윤단미는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지난날 연애할 때 반승제의 호감 표시는 비싼 선물을 보내주는 것밖에 없었다. 먼저 손잡은 적도 키스한 적도 없기에 그녀는 반승제가 플라토닉 러브를 지향하는 줄 알았다.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페니를 삼켜버릴 듯 탐하는 남자가 플라토닉 러브를 지향한다는 건 한낱 정신 승리에 불과했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페니가 손가락을 다치게 하는 것으로는 모자라니 당장 어떻게든 죽여버려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반대로 성혜인의 태도에 기분이 좋아진 반승제는 말투도 부드러워졌다.“일단 차에 타.”“윤단미 씨는요?”반승제는 말없이 성혜인의 다치지 않은 손을 잡아 차의 뒷좌석에 태웠다. 조수석에 타면 다친 손이 안전벨트에 닿기 때문이다. 그다음에야 그는 윤단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단미가 멀지 않은 곳에 서서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말이다.“단미야, 넌 알아서 돌아가. 난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윤단미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지금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미친 듯이 따져 물어봤자 반승제의 불쾌감만 살 뿐이기 때문이다.마음의 저울은 이미 기울어졌다. 윤단미의 발악은 반승제의 마음이 더욱 기울어지게만 할 것이다. 그러니 급해하지 말고 한 발짝 한 발짝 걷는 것이 그녀에게는 상책이었다.“알았어.”전화를 끊은 다음 윤단미는 다시 레스토랑으로 돌아갔다. 레스토랑에는 서민규 한 사람밖에 없었다.서민규는 반승제와 성혜인의 은밀한 사이에 관해 약간이나마 알 것 같았다. 반승제가 그에게 적
“대답해.”성혜인이 대답을 주지 않자, 반승제는 더욱 힘을 더했다. 그 와중에도 손은 건드리지 않도록 한 손으로 받쳐주고 있었다.“페니 넌 다 좋은데 안목이 나쁜 것이 문제야.”성혜인은 아예 눈을 꼭 감았다. 반승제가 빨리 끝낼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다쳤다고 봐주는 것인지 오래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끝난 다음 땀을 닦아주기도 했다.상처를 건드리는 것은 큰일이었기 때문에 반승제는 크게 움직이지도 못했다. 비록 반승제는 만족하지 못했지만, 성혜인은 한 번을 쉽게 덜어냈으니 이득인 셈이다. 이렇게 8번째를 끝내고 그녀는 핸드폰을 힐끗 봤다. 시간은 아직 새벽 두 시였다.“네 개인 번호 진짜 안 알려줄 거야?”반승제가 또다시 손을 뻗어 자신의 핸드폰을 잡으려고 하자 성혜인은 아예 핸드폰을 가방 속으로 넣어버렸다.반승제의 얼굴에 피어올랐던 만족스러운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쩐지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속상하기도 했다. 만약 그가 원한다면 손쉽게 성혜인의 번호를 얻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성혜인이 먼저 알려주기를 바라고 있었다.‘기분 좋게 끝내 놓고 왜 갑자기 차갑게 구는 건데?’반승제는 짜증 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성혜인은 그의 마음을 알기나 하는지 무책임한 바람둥이처럼 침대에서 내리더니 바지를 입기 시작했다.바지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입었다. 하지만 속옷 후크는 어떻게 해도 잠기지 않았다. 한 손으로 풀 수 있는 속옷 후크를 한 손으로 잠글 수 없다는 것이 처음으로 슬픈 순간이었다.성혜인은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한쪽에서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는 반승제에게 부탁하고 싶지는 않았다.반승제는 성혜인이 먼저 부탁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원래 구경만 하려 했던 반승제도 결국 상처만 받고 말았다.성혜인이 여섯 번째 시도에도 실패했을 때 차가운 손가락이 등에 닿고 후크가 잠겼다. 그녀는 말없이 옷을 마저 입으려고 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