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승제는 손을 들어 미간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이것 때문에 나를 부른 거야?”“승우 형이 세상을 뜬 지가 언젠데, 윗분들은 아직도 행적을 조사하고 있어. 네 아버지도 마찬가지야. 생전 저택을 떠나 형에 관해 조사한 적 있다고 하더라. 아무래도 형이 엄청 중요한 자료를 남겨 놓은 모양인데, 그게 여자 친구 손에 있을 가능성이 아주 높아. 게다가 그 여자 친구는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물건을 손에 쥐고 있는지도 모를 거야.”반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그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뿜어냈다.“승제야, 너 혹시 승우 형의 이상형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이상형이라도 알면 찾기 쉬울 것 같은데.”서주혁의 질문에도 반승제는 관심 없는 듯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서주혁은 그를 힐끗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그 자료를 찾으면 승우 형이 죽은 이유를 알 수 있을지도 몰라.”반승제는 우뚝 멈춰서더니 미간을 구겼다. 그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미 조사해 봤어. 형 주변에는 여자가 없었어.”“그래서 내가 이 노트들을 스캔하는 거 아니냐. 만약 10대 시절 연애를 했었다면 어딘가 흔적을 남겨 뒀을 게 분명해.”“결과 나오면 알려줘.”반승제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서주혁은 또다시 직원들에게 단 한 장의 노트도 놓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그는 연구소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반승우의 필체로 남긴 이성의 이름을 찾을 것이다.서주혁이 반승우의 일에 이토록 열정적인 이유는 이게 서씨 집안에서 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반승우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그들이 얼마나 분주해졌는지 모른다.차에 올라탄 반승제는 운전대를 잡고 연구소에서 나섰다. 인적이 드문 시간의 십자로, 그의 곁에는 단 한 대의 차만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었다. 반쯤 열린 창문 속에서는 성혜인의 얼굴이 언뜻 보였다.반승제는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창문을 내리며 경적을 울렸다. 가만히 신호등을 주시하고 있던 성혜인은 갑
성혜인은 저도 모르게 운전대를 꽉 잡았다. 얼굴은 점점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얼마 후 반승제가 천천히 물러나고, 성혜인은 말없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머리를 숙였다.“페니야.”“네?”“너 언제 이혼할래?”반승제의 목소리가 저녁 바람과 함께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반승제의 눈빛은 서서히 식어 갔다.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성혜인은 머리를 돌리며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는 목소리로 물었다.“그런 말은 왜 하는 거예요?”키스의 여운으로 홍조를 띠는 얼굴과 달리 너무나도 차분한 말투였다. 그래서인지 반승제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몰랐다.‘페니가 이혼하면 뭐? 내가 책임질 것도 아니잖아.’반승제는 미간을 구겼다. 자신이 성혜인과 하는 것을 서민규는 3년 전부터 시작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오르자 말 못 할 언짢음이 들기도 했다.“서민규는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대표님, 저희는 완전히 다른 두 세상에서 살고 있어요. 대표님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얻을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죠? 지금 저를 향한 마음도 일시적인 호기심이라는 걸 잘 알아요. 그러니 저는 대표님의 말 한 마디 때문에 지금의 생활을 버릴 수가 없어요. 그거야말로 어리석은 선택이잖아요.”반승제는 조용히 자세를 바로 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또다시 정적이 맴돌기 시작했다.이번에는 반승제가 먼저 예리한 시선을 거두며 느긋하게 물었다.“내가 너한테 호기심이 있다고 생각하나?”“아니라면 다행이에요. 그래야 후에 깔끔하게 헤어지죠.”성혜인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자 반승제의 얼굴은 보기 좋게 굳어 갔다.반승제의 마음을 알기나 하는지 성혜인은 싱긋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저 오늘 진짜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요.”성혜인은 단호하게 멀어져 갔다. 조금 전 키스를 나눈 사이라고는 보아 낼 수 없을 정도의 단호함이었다.반승제는 성혜인이 떠난 다음에도 한참이나 제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그리고 담배 한 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인
성휘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꼽자면 단연 임지연이었다. 그녀는 성휘가 아는 여자 중에서 가장 지혜롭고 강인한 여자였다. 그래서 그녀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망치기에 급급했다.성휘는 도망치면 도망칠수록 더욱 깊은 외로움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소윤과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는 임지연에 대한 모든 죄책감을 소윤에게 풀었다.오늘 밤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짧은 수면의 꿈속에서 성휘는 임지연과 만났다. 너무나도 그리웠던 모습이었다. 다정한 성격의 임지연은 꿈속에서도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여보, 혜인이한테 왜 그랬어요? 제가 키웠으면 제 딸이에요.”성휘는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해 내며 번쩍 눈을 떴다. 제아무리 남자라고 해도 임지연과 같은 지혜는 없는 것 같았다.만약 임지연이 살아 있었다면 절대로 성혜인을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삼지 않을 것이다. 병원에서 아이가 바뀐 것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녀는 단 한 번도 성씨 집안에 해를 가한 적이 없었다.성휘는 떨리는 손으로 숨을 헐떡이며 핸드폰을 잡았다. 그리고 변호사에게 지금 당장 만나자고 얘기했다. 시간이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호사는 곧바로 출발한다고 했다.아직도 성휘의 방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성혜원은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오자 포기하지 않고 또다시 말했다.“아빠는 회장님이랑 연락한 적도 있잖아요. 아빠만 말을 꺼내면 저는 승제 씨랑 결혼할 수 있어요. 저 진짜 그 사람 좋아한다고요. 성혜인은 더 이상 부귀영화를 누릴 자격이 없어요.”성휘는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억지로 대답을 짜냈다.“알았다, 내가 생각해 보마.”성혜원은 신바람이 나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성휘의 건강 상태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반시간 후, 변호사가 성씨 저택에 도착했다. 성혜원 때문에 단단히 열 받은 성휘는 한참 진정하고 나서야 입가에 흐른 피를 닦아내며 겨우 말을 꺼냈다.“유서를 만들어야겠어요. 제 앞으로 있는 지분 35%를 전부... 첫째 딸 성혜인에게
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변호사가 떠나고 출입문이 닫힌 다음에야 그녀는 시큰거리는 눈을 깜빡였다. 극한에 다다른 슬픔은 생리적인 통증을 동반한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이는 마치 누군가가 목을 조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어젯밤 성휘가 말했던 요구들은 확실히 듣기 좋지 않았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성혜인은 성휘의 마음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그래서 그를 탓하거나 미워하지도 않았다.한 집안에 남은 게 남보다도 못한 부모, 세상을 떠난 아내가 남긴 피 안 섞인 딸, 그리고 욕망에 찌든 친딸이라니... 도무지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을 리가 없는 상황이었다.성혜인은 성휘가 자신에게 욕설을 퍼붓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고마웠다. 하지만 자신이 힘들게 가꾼 SY그룹을 결국 성혜원에게 넘기지는 않을까, 그녀는 또 성혜원의 득의양양한 얼굴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지는 않을까 걱정되기는 했다.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성휘는 자신의 회사를 갉아먹는 임원들도 해고하지 못할 정도로 우유부단한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그 착한 마음씨를 성혜인에게 줬다. 덕분에 그녀는 SY그룹을 위해 최선을 다할 마음이 생겼다.성혜인은 핸드폰을 꺼내 성휘에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다.「아빠, 저 무조건 SY그룹을 성공시킬게요.」같은 시각, 성휘는 침실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간암 말기의 몸으로는 잠도 편히 잘 수 없었다.성혜인에게서 문자가 온 것을 보고 성휘는 기침을 했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휴지를 뽑아 입가에 흐른 피를 닦아냈다. 답장을 하고 싶기는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그저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성혜인은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했다. 실핏줄이 터진 눈은 누가 봐도 하룻밤을 꼬박 새운 눈이었다. 잠깐 눈 찜질을 하고 나니 시간은 어느덧 점심이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지분 양도 준비를 끝낸 변호사와 다시 잠깐 만나고 나서 모든 자료를 들고 SY그룹으로 출발했다.지난번 잠깐 만난 적 있기 때문에 SY그룹의 임원진은 모두
성혜인은 의자에 기대어 앉으며 눈살을 찌푸렸다.“준비는 되었겠죠?”하영진은 일전에 준비한 자료를 황급히 들어 올리더니 한 글자 한 글자 읽기 시작했다. 그는 올해로 50대에 들어섰다. 하지만 지식수준은 오래전에 멈춰 있었다.회의실에 있는 대부분 임원이 다 그랬다. 그들의 지식수준과 관리 방식은 아직도 SY그룹의 창업 초기와 변함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시대에 적용 안 되는 건 물론이고 반작용까지 일으킬 수 있었다.성혜인은 조용히 발표를 듣고 있다가 머리를 들며 물었다.“그러면 회사에 반년 가까이 새로운 계약이 없었다는 건데... 인맥을 이용해서 고객을 끌어 볼 생각은 안 한 건가요?”회사를 위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임원들은 응당 아무리 작은 계약이라고 해도 따냈어야 했다. 하지만 회의실에 맴도는 것은 정적뿐이었다.성혜인은 덕분에 임원진에 대해 또다시 알게 되었다. 그들은 두 번의 융자를 손쉽게 끝내면서 회사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변해 버렸다. 그러고는 세상만사 다 자기 손바닥 안에 있다는 듯이 젊은이들의 혁신적인 방안을 기각했다.성휘도 임원진과 같은 편에 있었다. 그래서 SY그룹은 줄곧 소극적이고 구시대적인 운영 방식을 고집해 왔다.성혜인은 심호흡하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하 이사님, 공 이사님...”그녀는 차가운 말투로 연이어 여덟 명의 임원을 불렀다. 그러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인사부로 가서 남은 월급을 받고 정리하세요. 여러분이 회사에 대한 공헌을 생각해서 다른 회사보다 두 배 높은 퇴직위로금을 드릴게요.”하영진은 눈을 크게 떴다.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정신 차리고 벌떡 일어났다.“그게 무슨 뜻이에요?”성혜인은 회의실 밖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들어오세요.”곧바로 두 명의 변호사가 회의실 안에 들어섰다.“이 두 분은 제 대리인이에요. 혹시 의견이나 불만이 있으면 이 두 분한테 말하면 돼요. 다시 한번 강조 하지만 퇴직위로금은 섭섭지 않게 드릴게요.”성혜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반승제에게 잘 보여야 했던 이선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도 물론 좋게 보고 있어요. 우리 회사 마케팅부 직원한테 내화의 페인트를 살펴보라고 해야겠네요. 페인트 질만 문제없다면 올해부터 계약을 시작할 수 있어요.”BK사와 같은 큰 회사와 협력한다면 SY그룹은 다른 계약 없이도 적자가 나지 않을 정도의 상황을 유지할 수 있었다.성혜인은 약간 시름 놓은 듯한 표정으로 술잔을 들어 올렸다.“한잔하시죠, 대표님. 저도 반 대표님한테 얘기를 잘 해볼게요.”이신도 싱긋 웃으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페니 씨 덕분에 제가 반 대표님과 함께 서천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어요. 고마워요.”두 사람은 화기애애하게 술잔을 부딪쳤다.식사가 끝난 다음 성혜인은 서민규에게 이선을 집까지 데려다주라고 당부했다. 오늘 밤 기분이 좋았던 이선은 술을 꽤 많이 마셨다.“그러면 페니 씨는요?”서민규는 이선을 부축하며 물었다. 그러자 성혜인은 의자에 앉은 채로 대답했다.“저는 데리러 오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 이 대표님부터 신경 써 줘요.”이선은 SY그룹의 중요한 고객이었기 때문에 성혜인은 그를 먼저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서민규는 이선을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성혜인도 오늘 밤 기분이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평소와 달리 꽤 많이 마셨다. 마신 술에 비해 얼굴이 너무 빨갛게 달아올라서 그녀는 또렷한 정신과 반대로 취객처럼 보이기도 했다.성혜인은 가방을 들고 복도 끝의 화장실로 향했다. 찬물로 세수라도 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출근 첫날부터 엄청난 계약을 성사시켰으니, 그녀는 나름 뿌듯했다. 반승제의 이름을 빌린 덕분에 얻은 계약이기는 하지만 말이다.화장실로 향하는 길에 코너를 돌자 마침 프라이빗 룸에서 걸어 나오는 정장 차림의 남자가 성혜인의 시선에 들어왔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그래서 성혜인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천천히 멈춰 섰다.“반 대표님?”반승제는 프라이빗 룸의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룸 안에는 BH그룹
제원에는 반승제를 원하는 여자가 수두룩했다. 성혜인은 아마 유일하게 그의 왕성한 체력을 귀찮게 여기는 여자일 것이다.반승제는 성혜인이 끝까지 반항하려는 것을 보고 정장 외투를 벗어 세면대에 폈다. 그리고 그녀를 외투 위로 다시 안아 올렸다.이번에 성혜인은 그저 잠자코 있었다. 반승제의 비싼 정장을 깔고 앉았다니 얼떨떨하기도 하고, 조금 전 알게 모르게 도움받은 일 때문에 마음이 약해지기도 했다.성혜인의 심경 변화를 발견한 반승제는 머리를 숙여 키스했다. 그렇게 무아지경으로 한데 어우러지다가 반승제의 핸드폰 벨 소리 때문에 멈추게 되었다. 아무래도 나간 지 한참 된 그를 찾는 전화인 듯했다.반승제가 몸을 일으키자, 성혜인은 그의 어깨에 기대 숨을 돌렸다. 그의 몸에서는 옅은 나무 향이 나고 있었다. 마치 영혼까지 빨리는 듯한 향기였다.반승제는 성혜인과 기대어 있는 채로 수락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통화했다.“네, 금방 돌아갈게요.”전화를 끊은 반승제는 성혜인의 등을 토닥였다. 얇은 천을 사이 두고 맞닿은 살결을 통해 말할 때의 울림이 생생하게 전해졌다.“오늘은 누구랑 왔어?”“혼자 왔어요.”반승제가 다시 가봐야 하는 것 같기에 성혜인은 몸을 바로 하고 세면대 아래로 내려갔다.정장 외투는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몇천만 원짜리 물건을 반승제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버렸다.“단발도 잘 어울려.”반승제는 덤덤하게 한마디 했다. 성혜인은 가방을 챙겨 들다 말고 부끄러운 듯 귀가 빨개지면서 말했다.“고마워요.”반승제는 셔츠만 입은 채로 밖으로 나갔다. 그는 심인우에게 부탁해 성혜인을 집까지 데려다주려고 했지만, 이때 마침 서민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페니 씨.”서민규의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아무래도 성혜인이 걱정되어서 이선을 데려다주자마자 부랴부랴 다시 돌아온 듯했다.반승제도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한 서민규는 공손한 말투로 인사했다.“안녕하세요, 대표님.”반승제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었다. 가슴을 움직이던 작은 떨림
성혜인이 반승제의 키스를 거절하지 않은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더 심한 것도 했으면서 입술을 지키려는 것은 왠지 우스웠기 때문이다. 10번의 거래는 성혜인이 스스로 허락한 것이었다. 거절할 권리는 아마 거래가 끝난 다음에야 생길 것이다.강민지의 반승제 찬양론을 계속 듣다 보니 드디어 세뇌당했는지 성혜인은 슬슬 자신이 손해 볼 건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몸이 상하지 않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반승제의 성스러운 얼굴 덕분에 가까이 있다가 문득 보기만 해도 막연한 느낌이 들고는 했다.어쩐지 신적인 존재와 함께 있는 듯한 것이, 그 짜릿한 기분은 말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림을 배운 적 있는 사람으로서 성혜인은 번마다 당장이라도 붓을 들고 캔버스에 담고 싶은 심정이 들기도 했다.성혜인은 서민규의 차에 타서 미간을 눌렀다. 이때 서민규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고, 전화 건너편의 목소리를 들은 그는 황급히 핸들을 꺾으며 말했다.“꼼짝 말고 있어! 내가 금방 병원으로 데려다줄게!”서민규는 급한 마음에 신호등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성혜인의 존재 또한 잊어버린 듯했다.성혜인이 곁에서 아무리 말해도 서민규는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집 아래에 도착한 다음에야 생각난 듯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죄송해요, 페니 씨. 제 동생한테 문제가 생겨서... 진짜 죄송해요.”서민규는 부랴부랴 차에서 내려 집 안으로 달려갔다. 성혜인은 잠깐 고민하다가 차에서 내려 좁은 골목길에 들어섰다.얼마 후 서민규는 피투성이가 된 여자아이를 안고 차를 향해 달려갔다. 여자아이의 한 쪽 다리는 휠체어나 지팡이를 써야 할 정도로 위축되어 있었다. 그리고 머리에서는 옷을 흠뻑 적실 정도의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당황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는 서민규를 보고 성혜인은 운전석으로 가서 앉았다.“운전은 제가 할게요.”“고마워요, 진짜 고마워요.”서민규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연신 감사 인사를 하면서 여자아이와 함께 차에 올라탔다. 차 안에는 피비린내가 점점 퍼지기 시작했다.성혜인은 가
공지민은 연승혁의 말을 듣고 속으로 당혹스러움을 감추며 차분한 표정을 유지했다. 사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혈육의 정이라 할 만한 것도 없었지만 연승혁은 그와 상관없이 여전히 친근하고 가볍게 말을 이어갔다.온시환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연승혁은 쉬운 상대가 아니야. 항상 경계해야 해.’공지민은 이 순간에도 그의 말에 따라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연승혁은 손에 든 사과를 한입 베어 물며 미소를 지었다.“누나, 마음이 바뀌면 나한테 연락해요. 이건 내 전화번호예요.”그는 카드 한 장을 꺼내 옆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개인 번호예요.”공지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가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테이블 위에 놓인 카드를 바라보았다.카드는 별다른 장식 없이 간단했고 확실히 개인적인 물건처럼 보였다.그녀는 카드를 가방에 넣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연승혁의 의도가 도무지 파악되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상황을 지켜보며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연승혁이 집 밖으로 나가 차에 오르자마자 전화가 걸려 왔다. 상대는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그는 운전석 의자에 등을 기대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최근에 재미있는 걸 발견해서 가끔 들러서 장난 좀 치고 있어.”전화기 너머에서 상대가 흥미로워하며 물었다.“들리는 말로는 누나를 찾았다고 하던데, 그게 진짜야?”“그래, 진짜야.”연승혁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 전화를 받으며 대답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연씨 가문으로 데려올 거야.”상대는 의아한 듯 반문했다.“승혁아, 근데 너 태도가 좀 이상한데? 그동안 네가 누나를 찾은 건 할머니를 위해서였잖아. 설사 누나를 찾았다고 해도 이렇게 적극적일 이유는 없을 텐데, 왜 그렇게 흥미를 보이는 거야?”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정말 흥미로운 여자거든.”상대가 무언가 더 말하자 그는 가볍게 욕을 내뱉고 전화를 끊었다.차를 몰아 연씨 가문 저택에 도착
공지민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무슨 일이시죠? 시환 씨를 찾으러 오셨다면 오늘 집에 없어요.”아침 일찍부터 온시환은 외출한 상태였다. 어디로 갔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난 누나를 만나러 온 거예요. 누나, 정말 연씨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에요? 할머니가 오늘 아침 너무 상심하셔서 거의 쓰러질 뻔하셨어요.”연승혁은 부끄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입에 붙은 듯 자연스럽게 누나라고 부르면서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반면 공지민은 그 호칭이 불편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그 호칭 좀 하지 마요.”연승혁은 근처 의자에 털썩 앉아 정원에 활짝 핀 꽃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공지민과 그 꽃들이 묘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문득 과거에 자신이 창피당했던 기억이 떠오르자 약간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그럼 뭐라고 부르죠?”연승혁은 깔끔한 외모와 조각 같은 이목구비를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눈가의 십자 흉터는 그의 인상에 강인하고 냉혹한 분위기를 더했다. 햇볕에 그을린 건강한 피부는 그를 이국적인 매력으로 감싸고 있었다.“그냥 제 이름을 부르면 돼요.”“하지만 할머니가 그러지 말라시던데.”그의 시선은 계속 공지민에게 머물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누나, 원아정 때문이에요? 그래서 연씨 가문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거예요? 오늘 아침에 공식적으로 발표했어요. 앞으로 원아정과는 더 이상 어떤 관계도 없을 거라고.”공지민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담담하게 말했다.“그게 이유 중 하나긴 해요.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어요.”“다른 이유라니? 설마 연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이 누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 문제는 내가 다 처리할게요.”공지민은 앞에 핀 꽃 한 송이를 만지며 차갑게 말했다.“승혁 씨, 당신은 나를 연씨 가문에 진심으로 환영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나를 시험하거나, 관찰
마치 자기기만처럼 느껴졌다.공지민은 이미 온시환에게 약간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는데 그의 말을 듣자 그 감정이 더욱 커졌다.사실 온시환의 말은 맞았다. 두 사람은 진지하게 앉아 서로의 마음을 터놓고 대화해본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그들 사이에는 서로를 속이려는 의도만 가득했다.온시환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차는 두 사람의 집을 향해 달려갔다.집에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그녀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공지민은 그를 바라보더니 양손으로 그의 목을 감쌌다.그는 그 순간 얼어붙었다. 공지민이 먼저 다가온 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예전에는 언제나 자신을 대체품으로 여긴 것이 분명했다.그렇다면 지금은?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진심이 있는 걸까?온시환은 그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이 두려웠다. 대신 그녀를 안아 올려 2층으로 올라갔다.그 뒤의 일들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그는 그녀를 단단히 품에 안았다.모든 것이 끝난 후에는 이미 한밤중이었다.하지만 두 사람 모두 잠들지 않았다. 아마도 오랫동안 말하지 못했던 것들이 풀리면서 묵었던 긴장감이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지민아, 앞으로 무슨 계획이 있어?”“연씨 가문 사람들은 아직 나를 의심하고 있어요. 당장 들뜬 표정으로 연씨 가문에 들어갈 순 없어요. 그 사람들과 조금 더 연극을 해야 해요.”처음으로 공지민은 온시환 앞에서 자신의 이기적이고 냉혹한 면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바라봤고 그의 눈에는 단지 부드러운 미소만이 담겨 있었다.“그래서 너 처음 연예계에 들어간 것도 이걸 준비하기 위해서였어?”공지민은 속눈썹을 살짝 내리깔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차분하게 보냈다.반면 연승혁 앞에서 보이는 모습이야말로 그녀가 연기한 것이었다.“맞아요. 그렇다고 봐도 돼요. 언젠가 연기가 필요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거든요.”공지민이 수년간 연기를 했음에도 여전히 조연 배우에 머무른 것도 바로 이 이유였다. 그녀는 스타가 되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이 한마디의 여파는 매우 컸다. 온시환은 순간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공지민은 이미 오래전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지금껏 그녀를 버티게 한 것은 오직 구은우를 위한 복수라는 목적뿐이었다. 그녀는 그 복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목숨조차도 예외는 아니었다.그럼 온시환은 대체 뭘까?그가 한 모든 일은 결국 그녀의 눈에 광대짓에 불과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공지민 역시 침묵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또다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온시환은 마침내 자신이 최근 느꼈던 불안의 근원을 깨달았다. 그는 공지민이 절대로 평범하게 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고 언젠가 그녀가 폭발할 것임을 예감했었다. 단지 그녀가 이런 방식으로 행동에 나설 줄은 몰랐을 뿐이다.그는 웃음이 나올 것 같으면서도 웃을 수 없었다.이제 공지민의 계획은 이미 시작되었고 중간에 멈출 수는 없었다. 만약 그녀의 속임수가 들통난다면 연승혁과 안정숙은 이 모든 것이 그녀의 계략임을 알아챌 것이고 그녀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공지민은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상태였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그 두 사람을 무사히 속여 넘기길 기도하는 것뿐이었다.핸들을 꽉 쥐고 있던 온시환은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았다.이번에는 공지민이 저항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의 질문이 들려왔다.“구은우를 위해 어떻게 복수할 생각인데? 연승혁을 죽일 거야?”공지민은 단호하게 대답했다.“가능하다면 죽이는 게 제일 좋겠지.”온시환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금 네가 연승혁의 명목상 누나가 됐다고 해서, 연승혁이 너를 경계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공지민, 넌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어.”공지민은 그의 품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적어도 지금은 기회가 있어.”온시환은 그녀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마치 내일이면 더는 그녀를 안을 수 없을 것처럼.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했었다. 더는 그녀에게 화내지 않겠다고. 그런
공지민은 온시환이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의견도 내비치지 않을 줄은 몰랐다.안정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지민을 따라가며 외쳤다.“지민아, 정말 의논할 여지가 조금도 없는 거니? 우리 다 같은 가족인데, 대화를 통해 풀 수 있잖아.”연승혁이 안정숙을 부축하며 부드럽게 웃었다.“맞아요, 누나. 그냥 남아서 얘기 좀 해요. 할머니께서 누나 일로 오랫동안 신경을 많이 쓰셨어요. 연씨 가문이 마음에 안 든다 해도, 할머니 생각해서라도 우리랑 잘 얘기해 보는 게 좋잖아요.”공지민의 걸음이 멈췄다. 그 순간 온시환이 그녀의 손을 세게 잡아챘다.그의 힘은 너무 강해서 손가락뼈가 부서질 것만 같았다.공지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의 손아귀는 풀리지 않았다.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온시환은 위험했다.안정숙이 계속 말을 이었다.“지민아, 우리가 잘못했어. 네 정체만 밝히면 서로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어. 네가 겪은 일이 많아서 이미 마음이 많이 변했을 거란 걸 잊었어. 하지만 우리에게 만회할 기회를 줘. 앞으로는 승혁이가 널 잘 보호하게 할게. 너희 남매가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대화 좀 해봐.”공지민은 돌아서지 않은 채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할머니, 죄송하지만 오늘 들은 이야기가 너무 충격적이라 조금 쉬고 싶어요.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그래, 그래. 아직 상처도 채 회복되지 않았으니 얼른 돌아가서 쉬어.”온시환은 그녀를 끌고 자리를 떠났다. 차에 오르자마자 온시환이 갑자기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공지민은 얼굴이 붉어지며 숨이 막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온시환은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그녀가 고통스러워한다는 걸 알면서도 손을 풀지 않았다.공지민은 알고 있었다. 온시환은 이미 이 모든 것이 그녀의 계획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그녀는 연승혁에게 접근하여 구은우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이 모든 위험을 감수했다.“공지민! 너 정말 미쳤어? 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나를 이렇게
온시환은 연씨 가문으로 가는 길 내내 불편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안정숙의 공지민에 대한 태도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하지만 연씨 가문 내부의 사정을 뚜렷이 알 방법이 없었고 오늘 밤 직접 들어봐야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안정숙이 이유를 밝힐 것이다.차가 연씨 가문 저택 앞에 멈췄다. 한때 치열했던 상속권 싸움의 흔적이 떠올랐다. 연씨 가문의 다툼은 유독 잔혹했고 연승혁의 사촌 형제들 역시 만만치 않았다. 몇 년 전 연씨 가문의 사건은 거의 ‘피바다’로 묘사될 정도였다.그 이야기를 다른 이의 입을 통해 들었을 때 온시환은 연승혁이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잔혹함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연승혁이 현재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무수한 사람들의 시체 위를 딛고 올라섰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공지민을 부축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이날 연씨 가문에 모인 사람은 많지 않았다. 어차피 가장 가까운 혈족은 이미 연승혁에 의해 정리된 상태였다.안정숙은 주석 자리에 앉아 있었고 몇몇 남은 연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긴 테이블 양옆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연승혁은 안정숙 옆에 앉아 있었는데, 공지민이 들어서자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안정숙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지민아, 온시환, 둘 다 왔구나. 어서 앉아. 오늘은 그냥 가족끼리의 식사 자리야.”‘가족끼리의 식사?’온시환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 없이 참고 있었다.그 대신 공지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할머니, 전부터 궁금했어요. 왜 저한테 이렇게 잘해주시는 거죠?”안정숙은 잠시 연승혁을 쳐다보고 나서 방 안의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20여 년 전, 연씨 가문에서 아이 하나를 잃어버렸어. 그 아이는 내 손녀이자, 승혁이의 친누나였단다. 그 사건 이후 승혁이의 어머니는 깊은 상심에 빠져 세상을 떠났어. 내 남은 평생의 소원은 그 아이를 다시 찾는 것이었단다.”그 말이 떨어지자 온시환은
공지민은 온시환의 변화를 눈치챘다. 예전 같았으면 조금이라도 온시환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그는 억울한 듯 내가 너한테 빚진 거라도 있냐고 따져 물었을 텐데, 오늘 하루는 놀랍도록 순순히 그녀를 받아들이고 있었다.이러니 공지민도 일부러 심한 말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예상외로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이틀 뒤, 공지민은 퇴원했고 다친 다리는 이제 집에서 요양하면 되는 상태였다. 온시환은 완전히 그녀의 전담 간호사가 되어 온종일 그녀를 보살폈다.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하며 다른 사람 손 하나 빌리지 않았다.심지어 공지민이 목욕할 때조차 온시환이 직접 그녀를 안아 욕조에 옮겼다.처음에는 이런 극진한 보살핌이 익숙지 않아 공지민도 어색해했지만 온시환이 마치 그 일을 즐기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자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었다.다만 온시환이 그녀를 씻기다 말고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하자 공지민은 그의 손을 가볍게 치우며 미간을 찌푸렸다.“나 아직 다쳤거든요.”온시환은 고개를 갸웃하며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래서 다친 네 근육을 풀어주려고 마사지해 주는 거잖아.”“근데 시환 씨 손이 지금 내 가슴 위에 있잖아요.”“가슴도 마사지해야지.”온시환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말투는 전혀 자신의 행동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결국 공지민은 그와 실랑이를 벌이는 것도 지쳐, 그냥 내버려두었다. 어차피 이런 상황이 처음도 아니었으니까.결국 온시환은 자신의 바람대로 그녀를 품에 안고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일을 끝냈다. 공지민이 다쳤다는 걸 의식해서인지 그는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히지도 않았다.온시환은 살며시 키스를 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속삭였다.“우리 아이 하나 낳을까?”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욕실은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온시환은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본능적으로 알았다. 두 사람은 곧 또다시 다툴 것이다.그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지난번에 너한테 사준 선물들,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더라.
공지민은 속눈썹을 내리깔며 연승혁 앞에서 자신의 연기가 통했을지 고민했다. 그녀가 그 당시 연예계를 선택한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앞으로 연기를 해야 할 상황이 많을 테니까.적어도 자신이 연기 중이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아야 했다.그 후로 온시환은 공지민을 정성껏 돌봐주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연씨 가문의 안정숙 어르신이 병문안을 왔다.온시환조차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안정숙이 병상 옆에 앉아 공지민의 안부를 묻고 다정한 말투로 챙기는 모습을 보자 온시환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공지민은 어색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물었다.“할머니, 왜 저한테 이렇게 잘해주시는 거예요?”그녀는 이유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물어보았다.안정숙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냥 너와 특별히 인연이 깊은 것 같아서 그래. 지민아, 네가 몸이 좀 회복되면 우리 집에도 자주 놀러 오면 좋겠어.”온시환의 눈매가 순간 날카로워졌다. 그의 마음속에 위기감이 엄습했다.“어르신, 설마 승혁이가 지금 여자가 없다고 제 아내를 노리려는 건 아니죠? 참고로 저랑 지민이는 이미 혼인신고까지 한 사이랍니다. 승혁이가 저한테 전화했을 때부터 좀 이상하더라니까요. 언제부터 제 아내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거죠?”안정숙은 살짝 입꼬리를 떨며 공지민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하지만 그녀는 연승혁과 약속한 대로 아직 진실을 밝히지 않기로 했다. 연승혁은 이번 주 동안 좀 더 조사하겠다고 했는데,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할 뿐이었다.“자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내가 그런 사람이겠어? 난 그저 지민이가 순수한 아이 같아서 자네가 더 잘 대해줬으면 해서 그러는 거야.”온시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건 굳이 말 안 해도 알죠. 제 아내는 제가 알아서 잘 챙깁니다.”그는 공지민 옆으로 가서 물 한 잔을 따라주며 말했다.“자, 여보. 물 좀 마셔.”온시환이 처음으로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그는 얼굴이 잔뜩 붉어졌지만, 안정숙이 진짜 공지민과 연승혁을 이어주려는 건 아닌
남자는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갑작스러운 수치심과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공지민이 냉큼 2층 난간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뭐 하는 거야?!”공지민은 난간에서 몸을 날리며 도발하듯 한마디를 던졌다.“오빠 바지 내가 벗겨버렸네. 근데 정말 별로다.”남자는 멍하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공지민은 1층으로 떨어지며 다리에 피가 맺힐 정도로 다쳤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부리나케 폐공장을 빠져나갔다. 근처에 도로가 보이자 지나가던 차를 세워 타고 그 자리를 떠났다.폐공장 2층. 연승혁은 머리에 쓰고 있던 가발을 벗어 던졌다. 천천히 얼굴에 바른 까무잡잡한 분장을 휴지로 닦아내고 붙였던 눈썹과 수염도 떼어냈다. 그러고 나서 벗겨진 바지를 내려다보았다.‘좋아, 공지민. 제대로 기억해 두겠어.’연승혁은 바지를 올리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주변에 몸을 숨기고 있던 경호원은 그 모습을 보자 속이 서늘해졌다.방금 그의 바지가 벗겨지는 것을 봤을 때 경호원은 심장이 내려앉을 뻔했다. 그 여자가 정말 무사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녀는 연승혁이 멍해진 틈을 타 2층에서 뛰어내렸다.경호원은 이 여자가 대담한 건지, 아니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건지 알 수 없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형님...”연승혁은 가발을 휙 던지며 말했다.“돌아가자.”그는 공지민의 허벅지에 있는 꽃 모양 반점을 자세히 확인했다. 문신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도 할머니의 말이 맞을 터였다. 그녀는 연씨 가문에서 잃어버린 딸, 그의 친누나일 가능성이 높았다.연승혁은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공지민의 피부에서 느껴졌던 부드러운 감촉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운전 중인 남자가 백미러로 그를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형님, 어떻게 보십니까? 정말 누님이 맞을까요?”연승혁은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내려놓았다.“그럴 가능성이 높지.”그런데 그녀의 성격이 꽤 거칠다고 생각했다.그는 공지민의 과거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연예계에 들어온 후로는 아주 조용히 지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