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준 씨 동생 어느 병원에 있어?”“하나병원.”드라이기를 내려놓은 신예준은 몸을 숙여 강민지를 끌어안았다.“부모님은 사업이 망한 데다가 교통사고까지 나서 돌아가고, 집안에는 같이 돌아간 운전기사가 남긴 아들과 내 사촌 동생만 남았어. 참 불쌍한 애야. 나라도 돕고 싶기는 하지만 능력이 안 돼서 너무 답답하네.”강민지는 신예준의 시무룩한 모습을 보고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괜찮아. 내가 혜인이한테 물어볼게. 혜인이는 부자니까 무조건 좋은 의사를 예약해 줄 거야. 그리고 4억 원의 치료비도 아무 걱정하지 마. 네 동생 곧 수술 받을 수 있을 거니까 시름 놓고 있어. 우리 같이 병문안도 가자.”신예준은 몸을 흠칫 떨었다. 그리고 강민지를 품에 끌어안더니 그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고마워. 근데 병문안 갈 때 우리 사이를 숨겨 주면 안 돼?”“왜?”강민지는 의아한 표정으로 머리를 들었다. 그러자 신예준은 그녀의 입술에 짧게 뽀뽀하며 말했다.“다른 친척들은 책임을 전가하는 데다가 빚 독촉을 자주 받다 보니까 애가 많이 예민해졌어. 입원하고부터 챙겨 주는 사람이라고는 나밖에 없는데 혹시 여자 친구가 있다는 걸 알면 빼앗겼다고 생각할까 봐... 이런 부탁 해서 미안해, 민지야.”강민지는 신예준의 말을 이해한 듯 활짝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네가 말한 대로 숨겨 줄게.”“그나저나 이번까지 네 친구한테 도움 받는다면 내가 직접 밥이라도 사야겠는데?”강민지는 신예준의 팔을 잡고 침대로 이끌었다.“내가 알아서 잘할 테니까 넌 신경 쓸 필요 없어.”사실 강민지는 이번 일을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 강씨 집안의 힘으로는 어려운 일이 아니기도 했다.신예준은 강민지를 꽉 끌어안더니 침대 위로 눕혔다. 그리고 한 쪽에 놓여 있던 안대를 들어 올렸다. 강민지는 발그레 한 얼굴로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이거 안 하면 안 돼?”신예준은 안대를 내려놓고 방 안의 전등을 껐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알약 한 알을 삼
문자를 받았을 때 반승제는 이미 호텔에서 쉬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전화를 걸어 봤지만 받는 사람은 없었다.반승제가 보디가드라도 보내려고 하는 순간 윤단미에게서 또 하나의 문자가 왔다.「나 이상해...」반승제는 곧바로 옷을 입고 윤단미가 문자로 알려준 호텔로 찾아갔다. 노크하려고 손을 들자, 문이 비스듬히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문을 열어보니 스위트룸의 거실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반승제는 목소리를 높여 윤단미를 찾았다.“단미야.”이때 침실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반승제는 윤단미가 험한 일이라도 당했을까 봐 성큼성큼 침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문을 연 순간 이상한 냄새를 맡고 인상을 구겼다.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눈을 뜨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성혜원은 투명한 레이스 잠옷을 입은 채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승제 씨~”반승제는 말없이 침실을 훑어봤다. 어두운 침실 안에는 성혜원 혼자밖에 없었다. 누가 봐도 오늘 일은 그녀가 꾸민 저급한 수단이었던 것이다.성혜원은 몸을 배배 꼬며 레이스 잠옷을 벗어 던지더니 제 딴에는 요염한 여러 동작을 했다. 반승제가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고서는 천천히 다가가려고 하기까지 했다.반승제는 몸을 피해 창가의 테이블 앞으로 가서 앉았다. 호텔 안에는 그의 분위기가 무겁게 깔려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하지만 성혜원은 느껴지지도 않는지 낯 뜨거운 움직임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분위기를 뒤늦게 알아차리고 우뚝 멈춰 섰다.“계속해 봐.”반승제는 오늘 성혜원이 언제까지 뻔뻔하게 굴 수 있을지 지켜볼 작정이었다.성혜원은 어색한 표정으로 어쩔 바를 몰라 했다. 이는 마치 나체로 스포트라이트라도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동시에 반승제가 왜 아직도 멀쩡히 앉아 있는지도 의문이었다.반승제도 약간의 열기를 느끼기는 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약 기운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담배 한 대를 꺼냈다. 머릿속에는 이혼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이토록 어처구니없는 여자가 자
성혜원은 그대로 반승제를 향해 덮치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여보!”성혜원은 큰 소리로 외쳤다. 눈빛에는 악독함으로 가득했다.‘하하, 하늘이 다 날 돕는구나!’“여보, 같이 가요!”성혜원은 평소라면 못했을 말을 일부러 반승제의 심기를 건드리기 위해 더 거침없이 퍼부었다. 그러자 반승제는 우뚝 멈춰 서서 몸을 돌리더니 또박또박 말했다.“사람 한 명 없애 버리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인지, 너도 알지?”성혜원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반승제는 호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마침 로비로 들어오는 윤단미와 마주쳤다.윤단미는 위치 추적을 통해 핸드폰이 있는 곳을 어렵지 않게 알아냈다. 로비에서 반승제와 마주치고는 환한 얼굴로 쪼르르 달려가 팔짱을 꼈다.“승제야, 나 핸드폰 잃어버렸어. 난 도둑이 이곳에 있다고 해서 찾아왔는데 넌 어떻게 왔어?”반승제는 윤단미를 힐끗 보더니 덤덤하게 말했다.“돌아가자.”“설마 누가 내 핸드폰으로 나쁜 짓을 한 거야?”“응.”반승제는 정말이지 성혜원을 지금 당장이라도 죽여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비슷하게 생긴 사람으로는 반태승을 속이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당분간은 SY그룹을 노리는 것으로 대리만족할 수밖에 없었다.반승제가 성큼성큼 차에 올라타는 것을 보고 윤단미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가 자신을 위해 찾아온 것도, 다른 여자를 거절하고 나온 것도 너무 만족스러웠다.“승제야, 너 먼저 가. 나는 핸드폰을 찾으러 가야 해.”“그래, 빨리 돌아가.”반승제는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하더니 천천히 멀어져 갔다.윤단미는 호텔을 힐끗 보더니 차에서 대기하고 있던 두 명의 보디가드를 불러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혜원의 사진을 건네면서 말했다.“이 여자예요.”보디가드들은 금방 성혜원이 있는 방을 알아냈다. 그리고 윤단미도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반승제를 보내고 난 성혜원은 주섬주섬 옷을 입다 말고 노크 소리를 듣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반승제가 다시
성혜원은 완전히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핸드폰을 꺼내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아직 잠들지 않았던 성혜인은 비몽사몽 전화를 받았다. 전화 건너편에서는 다짜고짜 성혜원의 울음 섞인 폭언이 들려왔다.“나 복수할 거야! 복수할 거라고! 너 딱 기다려!”‘미친년 아니야 이거...’성혜인은 말없이 전화를 끊어 버리고 잠을 계속 청했다.“아아악!!!”성혜원은 성씨 저택에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돌연 2층으로 올라가 성휘를 만나려고 했다. 하지만 보디가드가 지키고 있는 이상 성휘를 만나는 건 절대 불가능했다.“죄송합니다만 사장님은 지금 안정이 필요합니다.”“아빠! 아빠! 제가 친딸이에요! 근데 어떻게 저한테 이럴 수가 있어요! 어떻게!”실핏줄이 터진 성혜원의 눈은 빨갛게 되었다. 마치 이성을 잃은 광인처럼 말이다. 하지만 2층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녀의 절규에 대답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성혜원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몸을 덜덜 떨었다. 그리고 휘청거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몸 상태가 계속해서 발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비록 성휘는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성혜원은 점차 안정되었다. 그리고 다시 몸을 일으키더니 변호사가 들고 있던 은행 카드를 받아 들며 피식 웃었다.“제원을 떠나는 티켓은 이미 샀으니 카드 비밀번호를 알려줘요.”성혜원은 조금 전 핸드폰으로 구매한 비행기 티켓을 변호사에게 보여줬다. 그러자 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비밀번호를 알려줬다.“이 카드는 사장님의 명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성혜원 씨가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한 순간 언제든지 정지할 겁니다.”성혜원은 피식 웃었다. 힘껏 쥔 주먹 사이로는 피가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그녀는 절대 이렇게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앞으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혜인에게 복수할 것이다.‘이게 다 성혜인 때문이야. 성씨 집안에서도 반씨 집안에서도 왜 나의 것을 빼앗지 못해서 안달 난 거야! 하지
SY그룹의 35% 지분이라면 적어도 몇 백억 원은 했다. 성휘는 앓아눕고, 소윤은 감옥에 갔으니, 성혜인만 죽어 준다면 SY그룹은 임원진의 것이 될 수 있었다.하영진은 당당하게 머리를 쳐들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오늘에 쓴 약도 제가 아는 사람을 통해 힘들게 얻은 거예요.”어떤 임원은 두려워하는 게 눈에 뻔히 보였다. 어찌 됐든 이는 범죄 행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혜인의 태도가 떠오르자 모험도 더 이상 두렵지만은 않았다. 더구나 지금은 35%의 지분도 걸려 있었다.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공건태가 돌연 입을 열었다.“성씨 집안과 반씨 집안 사이에 혼약이 있다는 걸 몰라요? 안 그러면 BH그룹에서 왜 SY그룹의 융자를 돕겠어요? 성혜인한테 문제가 생겼다고 반씨 집안에서 조사하면 어떡해요?”하영진은 피식 웃으며 덤덤하게 되물었다.“제가 이 약을 누구한테서 얻었는지 알아요?”“누군데요?”“성혜원.”소윤은 한때 SY그룹에서 꽤 큰 존재감을 자랑했다. 그래서 하영진도 자연스럽게 성혜원과 알게 되었다.“여러분은 아직 모르겠지만 성혜인은 성휘의 친딸이 아니에요. 어디에서 굴러왔는지도 모를 애를 반씨 집안에서 신경이나 쓰겠어요? 그것도 오만한 반승제가?”제원의 상업계를 통틀어서 반승제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해외에서도 미래 상업계를 제패할 최고의 유망주로 꼽혔으니 말이다.반승제와 같은 용모와 능력은 흔히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이토록 귀한 손자가 어떤 피가 섞였을지 모를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을 반태승이 발견한다면 노발대발 화를 낼 게 분명하기도 했다.“그 약은 성혜원이 저한테 준 거예요. 반씨 집안에서 성혜인의 출신 때문에 많이 화났다고 몰래 암시하면서 말이에요. 성혜인이 죽어 주는 것은 반씨 집안에도 좋은 일일 거예요.”임원들은 이제야 안도한 듯 표정을 풀었다. 그러자 하영진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성혜원은 성휘의 유일한 자식이에요. 성혜인을 대신해 반씨 집안으로 시집갈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이기도 하고요. 가장
한편, 성혜인은 회사에서 야근을 하고 있었다.그녀가 막 일어나 집에 갈 채비를 하려는데, 하영진이 걸어들어왔다.“성 사장님, 여기는 저희 몇 사람의 사직서입니다. 확인 부탁드려요.”성혜인은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들이 이렇게 주동적으로 사직을 하리라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러자 그녀의 안색이 많이 누그러졌다.“안심하세요. 퇴직 위로금은 넉넉히 드릴 테니까요.”하영진은 성혜인의 곁에 서 있었고, 혜인은 앉아서 조금 전 받아든 사직서들을 집중해 살펴보고 있었다.하지만 가면 갈수록 그녀는 더욱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사직서에 오류가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던 그녀가 머리를 들고 하영진에게 얘기하려는데 순간, 코를 찌르는 듯한 냄새와 함께 머리가 어지러워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하영진은 청소원에게 커다란 쓰레기통을 갖고 오게 하며 위협했다.“오늘 당신이 본 건 기억에서 모조리 지워. 그렇지 않으면 다음은 당신이 될 거야!”회사 내에서 최하층 직원에 불과했던 청소원은 놀라 벌벌 떨며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영진은 그제야 만족하는 듯했다.“이 쓰레기통을 끌고 지하주차장으로 가,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 얼른 나를 따라오고.”얼굴에 온통 불안과 초조함으로 가득 찬 청소원은 하영진의 입에서 교외 폐공장에 관한 얘기가 나오자 입술을 굳게 오므렸다.통화가 종료되고, 하영진은 무뚝뚝하게 우두커니 서 있는 청소원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이곳 SY그룹에서 일한 지 어언 2년이 되었는데 평소에도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직원들의 행패도 개의치 않았다. 또 그녀는 하영진이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우는 장면을 몇 번이나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 입 뻥긋하지 않았다.그 때문에 하영진은 거침없이 행동할 수 있었다.“예전처럼만 침묵을 지켜준다면, 이 일이 끝나는 즉시로 당신 월급을 세배로 올려줄게.”청소원은 알겠다는 듯 급히 고개를 숙였다.쓰레기통을 지하주차장으로 옮기자, 그곳에는 이미 파란색 미니밴이 대기하고 있었다. 차 번호판은 인위적으로 가려진
‘내가 미움을 안 사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아직도 부족한 건가?’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통화가 종료되자 납치범은 그녀를 발로 한번 걷어찼다.“성혜인 씨, 들었어? 당신은 남편 마음속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이야.”그러더니 한 남자가 성혜인의 머리카락을 잡아 강제로 머리를 들게 했다.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본 남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되게 예쁘게 생겼네? 이렇게 이쁜데 반승제가 좋아하지 않는다고?”그는 성혜인의 머리에는 마대 자루를, 입에는 누더기 천 같은 걸 물리더니 곧장 그녀를 들쳐메고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공장 안에는 윤단미가 있었다. 그녀 역시 머리에는 마대 자루가 씌워져 있었지만, 성혜인과 다르게 입에 천을 물고 있지는 않아 계속 울고 있었다.“풀어줘! 나 좀 풀어달라고!”성혜인을 들쳐멘 남자는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말했다.“뭘 멍하니 서 있어, 빨리 철수하지 않고! 몇 분 있으면 반승제가 올 거야. 여기 남아서 걔 사냥감이 될 작정이야?”조금 전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 때만 해도 남자의 태도는 매우 강했다.왜냐하면, 40억이 걸린 일이니까 말이다.이렇게 많은 돈은 그들이 목숨을 판다 해도 평생 볼 수 없는 돈이었다. 비록 죽을 각오로 이 일에 뛰어든 것 맞지만, 살 수 있다면 살아야지, 세상 어느 누가 죽음을 바라겠는가.성혜인을 씌운 마대 자루 안에는 바람조차 통하지 않았다.그러나 얼마 안 가 그녀는 사람들이 철수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는 윤단미의 울음소리 외에 헬리콥터의 굉음도 뚜렷하게 들렸다.‘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헬리콥터까지 준비했네?’성혜인을 때렸던 그 납치범은 가장 마지막에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본 이상 아무것도 안 하고 가기에는 손해 보는 거로 생각했는지, 그는 곧장 성혜인의 머리에 씌워져 있던 마대 자루를 걷어내고 그녀의 옷을 찢었다.이윽고 성혜인의 눈동자가 움츠러들더니 남자는 몸을 숙여 그녀에게 키스하려 했다.그때, 다른 한 납치법이 돌아
불길은 모두 꺼져있는 상태였다. 성혜인은 건물 안 가장 구석진 곳에 웅크리고 있었다. 밧줄은 이미 풀려있고, 입안의 천들도 모두 빠져있었다.조금 전 번진 큰불은 하마터면 그녀를 덮칠 뻔했는데, 마침 누군가가 제때 그녀를 끌어갔다.머리에 씌워져 있던 마대 자루가 벗겨지고 혜인이 바라보니 그 사람은 다름 아닌 SY그룹의 청소원이었다.“괜찮으세요?”청소원은 가냘픈 얼굴에 온통 걱정으로 가득 찬 모습을 해 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해주고 있었다. 성혜인은 이 청소원이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때, 성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여자는 당황하며 황급히 어딘가로 뛰어갔다.성휘는 성혜인이 구석에 혼자 웅크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비록 다친 곳은 없었지만, 그녀의 옷은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졌고 머리카락도 온통 먼지들로 뒤덮여있었다.안에서는 아직도 불에 타는듯한 매캐한 연기가 자욱해 코를 찔렀다.입안이 피비린내로 가득했던 성휘는 사람을 시키며 말했다.“가... 가서 사람 부축해요.”두 보디가드들은 서둘러 성혜인의 앞으로 다가갔지만, 그녀는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일어났다.성휘의 상태가 온전치 못하다는 것을 그녀는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아빠...”그녀가 부르자 성휘는 피를 토해내며 곧바로 뒤로 꼿꼿이 쓰러졌다.사실 조금 전 반승제의 대답에서 이미 쓰러질 뻔했으나, 혜인이의 상태가 어떤지 불확실했기에 정신력으로 버틴 것이었다.그녀가 멀쩡하다는 것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자 성휘는 더는 버티지 못했다.“아빠!”놀란 성혜인은 얼른 그에게 다가갔다.성휘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혼해, 더는... 더는 이런 취급 받지 말고.”시커먼 먼지가 뒤덮인 얼굴을 하고 성혜인은 급히 옆에 있던 보디가드를 불렀다.“빨리!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 주세요!”그러자 보디가드들이 냉큼 달려와 성휘를 부축해 차에 실었다.성휘는 성혜인의 손을 꼭 잡아당기며 놓지 않으려 했다.그 모습을 본 성혜인은 눈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