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이 반승제의 키스를 거절하지 않은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더 심한 것도 했으면서 입술을 지키려는 것은 왠지 우스웠기 때문이다. 10번의 거래는 성혜인이 스스로 허락한 것이었다. 거절할 권리는 아마 거래가 끝난 다음에야 생길 것이다.강민지의 반승제 찬양론을 계속 듣다 보니 드디어 세뇌당했는지 성혜인은 슬슬 자신이 손해 볼 건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몸이 상하지 않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반승제의 성스러운 얼굴 덕분에 가까이 있다가 문득 보기만 해도 막연한 느낌이 들고는 했다.어쩐지 신적인 존재와 함께 있는 듯한 것이, 그 짜릿한 기분은 말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림을 배운 적 있는 사람으로서 성혜인은 번마다 당장이라도 붓을 들고 캔버스에 담고 싶은 심정이 들기도 했다.성혜인은 서민규의 차에 타서 미간을 눌렀다. 이때 서민규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고, 전화 건너편의 목소리를 들은 그는 황급히 핸들을 꺾으며 말했다.“꼼짝 말고 있어! 내가 금방 병원으로 데려다줄게!”서민규는 급한 마음에 신호등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성혜인의 존재 또한 잊어버린 듯했다.성혜인이 곁에서 아무리 말해도 서민규는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집 아래에 도착한 다음에야 생각난 듯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죄송해요, 페니 씨. 제 동생한테 문제가 생겨서... 진짜 죄송해요.”서민규는 부랴부랴 차에서 내려 집 안으로 달려갔다. 성혜인은 잠깐 고민하다가 차에서 내려 좁은 골목길에 들어섰다.얼마 후 서민규는 피투성이가 된 여자아이를 안고 차를 향해 달려갔다. 여자아이의 한 쪽 다리는 휠체어나 지팡이를 써야 할 정도로 위축되어 있었다. 그리고 머리에서는 옷을 흠뻑 적실 정도의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당황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는 서민규를 보고 성혜인은 운전석으로 가서 앉았다.“운전은 제가 할게요.”“고마워요, 진짜 고마워요.”서민규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연신 감사 인사를 하면서 여자아이와 함께 차에 올라탔다. 차 안에는 피비린내가 점점 퍼지기 시작했다.성혜인은 가
“예준 씨 동생 어느 병원에 있어?”“하나병원.”드라이기를 내려놓은 신예준은 몸을 숙여 강민지를 끌어안았다.“부모님은 사업이 망한 데다가 교통사고까지 나서 돌아가고, 집안에는 같이 돌아간 운전기사가 남긴 아들과 내 사촌 동생만 남았어. 참 불쌍한 애야. 나라도 돕고 싶기는 하지만 능력이 안 돼서 너무 답답하네.”강민지는 신예준의 시무룩한 모습을 보고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괜찮아. 내가 혜인이한테 물어볼게. 혜인이는 부자니까 무조건 좋은 의사를 예약해 줄 거야. 그리고 4억 원의 치료비도 아무 걱정하지 마. 네 동생 곧 수술 받을 수 있을 거니까 시름 놓고 있어. 우리 같이 병문안도 가자.”신예준은 몸을 흠칫 떨었다. 그리고 강민지를 품에 끌어안더니 그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고마워. 근데 병문안 갈 때 우리 사이를 숨겨 주면 안 돼?”“왜?”강민지는 의아한 표정으로 머리를 들었다. 그러자 신예준은 그녀의 입술에 짧게 뽀뽀하며 말했다.“다른 친척들은 책임을 전가하는 데다가 빚 독촉을 자주 받다 보니까 애가 많이 예민해졌어. 입원하고부터 챙겨 주는 사람이라고는 나밖에 없는데 혹시 여자 친구가 있다는 걸 알면 빼앗겼다고 생각할까 봐... 이런 부탁 해서 미안해, 민지야.”강민지는 신예준의 말을 이해한 듯 활짝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네가 말한 대로 숨겨 줄게.”“그나저나 이번까지 네 친구한테 도움 받는다면 내가 직접 밥이라도 사야겠는데?”강민지는 신예준의 팔을 잡고 침대로 이끌었다.“내가 알아서 잘할 테니까 넌 신경 쓸 필요 없어.”사실 강민지는 이번 일을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 강씨 집안의 힘으로는 어려운 일이 아니기도 했다.신예준은 강민지를 꽉 끌어안더니 침대 위로 눕혔다. 그리고 한 쪽에 놓여 있던 안대를 들어 올렸다. 강민지는 발그레 한 얼굴로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이거 안 하면 안 돼?”신예준은 안대를 내려놓고 방 안의 전등을 껐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알약 한 알을 삼
문자를 받았을 때 반승제는 이미 호텔에서 쉬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전화를 걸어 봤지만 받는 사람은 없었다.반승제가 보디가드라도 보내려고 하는 순간 윤단미에게서 또 하나의 문자가 왔다.「나 이상해...」반승제는 곧바로 옷을 입고 윤단미가 문자로 알려준 호텔로 찾아갔다. 노크하려고 손을 들자, 문이 비스듬히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문을 열어보니 스위트룸의 거실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반승제는 목소리를 높여 윤단미를 찾았다.“단미야.”이때 침실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반승제는 윤단미가 험한 일이라도 당했을까 봐 성큼성큼 침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문을 연 순간 이상한 냄새를 맡고 인상을 구겼다.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눈을 뜨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성혜원은 투명한 레이스 잠옷을 입은 채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승제 씨~”반승제는 말없이 침실을 훑어봤다. 어두운 침실 안에는 성혜원 혼자밖에 없었다. 누가 봐도 오늘 일은 그녀가 꾸민 저급한 수단이었던 것이다.성혜원은 몸을 배배 꼬며 레이스 잠옷을 벗어 던지더니 제 딴에는 요염한 여러 동작을 했다. 반승제가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고서는 천천히 다가가려고 하기까지 했다.반승제는 몸을 피해 창가의 테이블 앞으로 가서 앉았다. 호텔 안에는 그의 분위기가 무겁게 깔려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하지만 성혜원은 느껴지지도 않는지 낯 뜨거운 움직임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분위기를 뒤늦게 알아차리고 우뚝 멈춰 섰다.“계속해 봐.”반승제는 오늘 성혜원이 언제까지 뻔뻔하게 굴 수 있을지 지켜볼 작정이었다.성혜원은 어색한 표정으로 어쩔 바를 몰라 했다. 이는 마치 나체로 스포트라이트라도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동시에 반승제가 왜 아직도 멀쩡히 앉아 있는지도 의문이었다.반승제도 약간의 열기를 느끼기는 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약 기운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담배 한 대를 꺼냈다. 머릿속에는 이혼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이토록 어처구니없는 여자가 자
성혜원은 그대로 반승제를 향해 덮치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여보!”성혜원은 큰 소리로 외쳤다. 눈빛에는 악독함으로 가득했다.‘하하, 하늘이 다 날 돕는구나!’“여보, 같이 가요!”성혜원은 평소라면 못했을 말을 일부러 반승제의 심기를 건드리기 위해 더 거침없이 퍼부었다. 그러자 반승제는 우뚝 멈춰 서서 몸을 돌리더니 또박또박 말했다.“사람 한 명 없애 버리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인지, 너도 알지?”성혜원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반승제는 호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마침 로비로 들어오는 윤단미와 마주쳤다.윤단미는 위치 추적을 통해 핸드폰이 있는 곳을 어렵지 않게 알아냈다. 로비에서 반승제와 마주치고는 환한 얼굴로 쪼르르 달려가 팔짱을 꼈다.“승제야, 나 핸드폰 잃어버렸어. 난 도둑이 이곳에 있다고 해서 찾아왔는데 넌 어떻게 왔어?”반승제는 윤단미를 힐끗 보더니 덤덤하게 말했다.“돌아가자.”“설마 누가 내 핸드폰으로 나쁜 짓을 한 거야?”“응.”반승제는 정말이지 성혜원을 지금 당장이라도 죽여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비슷하게 생긴 사람으로는 반태승을 속이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당분간은 SY그룹을 노리는 것으로 대리만족할 수밖에 없었다.반승제가 성큼성큼 차에 올라타는 것을 보고 윤단미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가 자신을 위해 찾아온 것도, 다른 여자를 거절하고 나온 것도 너무 만족스러웠다.“승제야, 너 먼저 가. 나는 핸드폰을 찾으러 가야 해.”“그래, 빨리 돌아가.”반승제는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하더니 천천히 멀어져 갔다.윤단미는 호텔을 힐끗 보더니 차에서 대기하고 있던 두 명의 보디가드를 불러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혜원의 사진을 건네면서 말했다.“이 여자예요.”보디가드들은 금방 성혜원이 있는 방을 알아냈다. 그리고 윤단미도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반승제를 보내고 난 성혜원은 주섬주섬 옷을 입다 말고 노크 소리를 듣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반승제가 다시
성혜원은 완전히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핸드폰을 꺼내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아직 잠들지 않았던 성혜인은 비몽사몽 전화를 받았다. 전화 건너편에서는 다짜고짜 성혜원의 울음 섞인 폭언이 들려왔다.“나 복수할 거야! 복수할 거라고! 너 딱 기다려!”‘미친년 아니야 이거...’성혜인은 말없이 전화를 끊어 버리고 잠을 계속 청했다.“아아악!!!”성혜원은 성씨 저택에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돌연 2층으로 올라가 성휘를 만나려고 했다. 하지만 보디가드가 지키고 있는 이상 성휘를 만나는 건 절대 불가능했다.“죄송합니다만 사장님은 지금 안정이 필요합니다.”“아빠! 아빠! 제가 친딸이에요! 근데 어떻게 저한테 이럴 수가 있어요! 어떻게!”실핏줄이 터진 성혜원의 눈은 빨갛게 되었다. 마치 이성을 잃은 광인처럼 말이다. 하지만 2층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녀의 절규에 대답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성혜원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몸을 덜덜 떨었다. 그리고 휘청거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몸 상태가 계속해서 발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비록 성휘는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성혜원은 점차 안정되었다. 그리고 다시 몸을 일으키더니 변호사가 들고 있던 은행 카드를 받아 들며 피식 웃었다.“제원을 떠나는 티켓은 이미 샀으니 카드 비밀번호를 알려줘요.”성혜원은 조금 전 핸드폰으로 구매한 비행기 티켓을 변호사에게 보여줬다. 그러자 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비밀번호를 알려줬다.“이 카드는 사장님의 명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성혜원 씨가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한 순간 언제든지 정지할 겁니다.”성혜원은 피식 웃었다. 힘껏 쥔 주먹 사이로는 피가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그녀는 절대 이렇게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앞으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혜인에게 복수할 것이다.‘이게 다 성혜인 때문이야. 성씨 집안에서도 반씨 집안에서도 왜 나의 것을 빼앗지 못해서 안달 난 거야! 하지
SY그룹의 35% 지분이라면 적어도 몇 백억 원은 했다. 성휘는 앓아눕고, 소윤은 감옥에 갔으니, 성혜인만 죽어 준다면 SY그룹은 임원진의 것이 될 수 있었다.하영진은 당당하게 머리를 쳐들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오늘에 쓴 약도 제가 아는 사람을 통해 힘들게 얻은 거예요.”어떤 임원은 두려워하는 게 눈에 뻔히 보였다. 어찌 됐든 이는 범죄 행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혜인의 태도가 떠오르자 모험도 더 이상 두렵지만은 않았다. 더구나 지금은 35%의 지분도 걸려 있었다.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공건태가 돌연 입을 열었다.“성씨 집안과 반씨 집안 사이에 혼약이 있다는 걸 몰라요? 안 그러면 BH그룹에서 왜 SY그룹의 융자를 돕겠어요? 성혜인한테 문제가 생겼다고 반씨 집안에서 조사하면 어떡해요?”하영진은 피식 웃으며 덤덤하게 되물었다.“제가 이 약을 누구한테서 얻었는지 알아요?”“누군데요?”“성혜원.”소윤은 한때 SY그룹에서 꽤 큰 존재감을 자랑했다. 그래서 하영진도 자연스럽게 성혜원과 알게 되었다.“여러분은 아직 모르겠지만 성혜인은 성휘의 친딸이 아니에요. 어디에서 굴러왔는지도 모를 애를 반씨 집안에서 신경이나 쓰겠어요? 그것도 오만한 반승제가?”제원의 상업계를 통틀어서 반승제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해외에서도 미래 상업계를 제패할 최고의 유망주로 꼽혔으니 말이다.반승제와 같은 용모와 능력은 흔히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이토록 귀한 손자가 어떤 피가 섞였을지 모를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을 반태승이 발견한다면 노발대발 화를 낼 게 분명하기도 했다.“그 약은 성혜원이 저한테 준 거예요. 반씨 집안에서 성혜인의 출신 때문에 많이 화났다고 몰래 암시하면서 말이에요. 성혜인이 죽어 주는 것은 반씨 집안에도 좋은 일일 거예요.”임원들은 이제야 안도한 듯 표정을 풀었다. 그러자 하영진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성혜원은 성휘의 유일한 자식이에요. 성혜인을 대신해 반씨 집안으로 시집갈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이기도 하고요. 가장
한편, 성혜인은 회사에서 야근을 하고 있었다.그녀가 막 일어나 집에 갈 채비를 하려는데, 하영진이 걸어들어왔다.“성 사장님, 여기는 저희 몇 사람의 사직서입니다. 확인 부탁드려요.”성혜인은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들이 이렇게 주동적으로 사직을 하리라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러자 그녀의 안색이 많이 누그러졌다.“안심하세요. 퇴직 위로금은 넉넉히 드릴 테니까요.”하영진은 성혜인의 곁에 서 있었고, 혜인은 앉아서 조금 전 받아든 사직서들을 집중해 살펴보고 있었다.하지만 가면 갈수록 그녀는 더욱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사직서에 오류가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던 그녀가 머리를 들고 하영진에게 얘기하려는데 순간, 코를 찌르는 듯한 냄새와 함께 머리가 어지러워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하영진은 청소원에게 커다란 쓰레기통을 갖고 오게 하며 위협했다.“오늘 당신이 본 건 기억에서 모조리 지워. 그렇지 않으면 다음은 당신이 될 거야!”회사 내에서 최하층 직원에 불과했던 청소원은 놀라 벌벌 떨며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영진은 그제야 만족하는 듯했다.“이 쓰레기통을 끌고 지하주차장으로 가,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 얼른 나를 따라오고.”얼굴에 온통 불안과 초조함으로 가득 찬 청소원은 하영진의 입에서 교외 폐공장에 관한 얘기가 나오자 입술을 굳게 오므렸다.통화가 종료되고, 하영진은 무뚝뚝하게 우두커니 서 있는 청소원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이곳 SY그룹에서 일한 지 어언 2년이 되었는데 평소에도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직원들의 행패도 개의치 않았다. 또 그녀는 하영진이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우는 장면을 몇 번이나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 입 뻥긋하지 않았다.그 때문에 하영진은 거침없이 행동할 수 있었다.“예전처럼만 침묵을 지켜준다면, 이 일이 끝나는 즉시로 당신 월급을 세배로 올려줄게.”청소원은 알겠다는 듯 급히 고개를 숙였다.쓰레기통을 지하주차장으로 옮기자, 그곳에는 이미 파란색 미니밴이 대기하고 있었다. 차 번호판은 인위적으로 가려진
‘내가 미움을 안 사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아직도 부족한 건가?’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통화가 종료되자 납치범은 그녀를 발로 한번 걷어찼다.“성혜인 씨, 들었어? 당신은 남편 마음속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이야.”그러더니 한 남자가 성혜인의 머리카락을 잡아 강제로 머리를 들게 했다.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본 남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되게 예쁘게 생겼네? 이렇게 이쁜데 반승제가 좋아하지 않는다고?”그는 성혜인의 머리에는 마대 자루를, 입에는 누더기 천 같은 걸 물리더니 곧장 그녀를 들쳐메고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공장 안에는 윤단미가 있었다. 그녀 역시 머리에는 마대 자루가 씌워져 있었지만, 성혜인과 다르게 입에 천을 물고 있지는 않아 계속 울고 있었다.“풀어줘! 나 좀 풀어달라고!”성혜인을 들쳐멘 남자는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말했다.“뭘 멍하니 서 있어, 빨리 철수하지 않고! 몇 분 있으면 반승제가 올 거야. 여기 남아서 걔 사냥감이 될 작정이야?”조금 전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 때만 해도 남자의 태도는 매우 강했다.왜냐하면, 40억이 걸린 일이니까 말이다.이렇게 많은 돈은 그들이 목숨을 판다 해도 평생 볼 수 없는 돈이었다. 비록 죽을 각오로 이 일에 뛰어든 것 맞지만, 살 수 있다면 살아야지, 세상 어느 누가 죽음을 바라겠는가.성혜인을 씌운 마대 자루 안에는 바람조차 통하지 않았다.그러나 얼마 안 가 그녀는 사람들이 철수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는 윤단미의 울음소리 외에 헬리콥터의 굉음도 뚜렷하게 들렸다.‘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헬리콥터까지 준비했네?’성혜인을 때렸던 그 납치범은 가장 마지막에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본 이상 아무것도 안 하고 가기에는 손해 보는 거로 생각했는지, 그는 곧장 성혜인의 머리에 씌워져 있던 마대 자루를 걷어내고 그녀의 옷을 찢었다.이윽고 성혜인의 눈동자가 움츠러들더니 남자는 몸을 숙여 그녀에게 키스하려 했다.그때, 다른 한 납치법이 돌아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