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원은 완전히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핸드폰을 꺼내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아직 잠들지 않았던 성혜인은 비몽사몽 전화를 받았다. 전화 건너편에서는 다짜고짜 성혜원의 울음 섞인 폭언이 들려왔다.“나 복수할 거야! 복수할 거라고! 너 딱 기다려!”‘미친년 아니야 이거...’성혜인은 말없이 전화를 끊어 버리고 잠을 계속 청했다.“아아악!!!”성혜원은 성씨 저택에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돌연 2층으로 올라가 성휘를 만나려고 했다. 하지만 보디가드가 지키고 있는 이상 성휘를 만나는 건 절대 불가능했다.“죄송합니다만 사장님은 지금 안정이 필요합니다.”“아빠! 아빠! 제가 친딸이에요! 근데 어떻게 저한테 이럴 수가 있어요! 어떻게!”실핏줄이 터진 성혜원의 눈은 빨갛게 되었다. 마치 이성을 잃은 광인처럼 말이다. 하지만 2층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녀의 절규에 대답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성혜원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몸을 덜덜 떨었다. 그리고 휘청거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몸 상태가 계속해서 발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비록 성휘는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성혜원은 점차 안정되었다. 그리고 다시 몸을 일으키더니 변호사가 들고 있던 은행 카드를 받아 들며 피식 웃었다.“제원을 떠나는 티켓은 이미 샀으니 카드 비밀번호를 알려줘요.”성혜원은 조금 전 핸드폰으로 구매한 비행기 티켓을 변호사에게 보여줬다. 그러자 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비밀번호를 알려줬다.“이 카드는 사장님의 명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성혜원 씨가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한 순간 언제든지 정지할 겁니다.”성혜원은 피식 웃었다. 힘껏 쥔 주먹 사이로는 피가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그녀는 절대 이렇게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앞으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혜인에게 복수할 것이다.‘이게 다 성혜인 때문이야. 성씨 집안에서도 반씨 집안에서도 왜 나의 것을 빼앗지 못해서 안달 난 거야! 하지
SY그룹의 35% 지분이라면 적어도 몇 백억 원은 했다. 성휘는 앓아눕고, 소윤은 감옥에 갔으니, 성혜인만 죽어 준다면 SY그룹은 임원진의 것이 될 수 있었다.하영진은 당당하게 머리를 쳐들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오늘에 쓴 약도 제가 아는 사람을 통해 힘들게 얻은 거예요.”어떤 임원은 두려워하는 게 눈에 뻔히 보였다. 어찌 됐든 이는 범죄 행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혜인의 태도가 떠오르자 모험도 더 이상 두렵지만은 않았다. 더구나 지금은 35%의 지분도 걸려 있었다.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공건태가 돌연 입을 열었다.“성씨 집안과 반씨 집안 사이에 혼약이 있다는 걸 몰라요? 안 그러면 BH그룹에서 왜 SY그룹의 융자를 돕겠어요? 성혜인한테 문제가 생겼다고 반씨 집안에서 조사하면 어떡해요?”하영진은 피식 웃으며 덤덤하게 되물었다.“제가 이 약을 누구한테서 얻었는지 알아요?”“누군데요?”“성혜원.”소윤은 한때 SY그룹에서 꽤 큰 존재감을 자랑했다. 그래서 하영진도 자연스럽게 성혜원과 알게 되었다.“여러분은 아직 모르겠지만 성혜인은 성휘의 친딸이 아니에요. 어디에서 굴러왔는지도 모를 애를 반씨 집안에서 신경이나 쓰겠어요? 그것도 오만한 반승제가?”제원의 상업계를 통틀어서 반승제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해외에서도 미래 상업계를 제패할 최고의 유망주로 꼽혔으니 말이다.반승제와 같은 용모와 능력은 흔히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이토록 귀한 손자가 어떤 피가 섞였을지 모를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을 반태승이 발견한다면 노발대발 화를 낼 게 분명하기도 했다.“그 약은 성혜원이 저한테 준 거예요. 반씨 집안에서 성혜인의 출신 때문에 많이 화났다고 몰래 암시하면서 말이에요. 성혜인이 죽어 주는 것은 반씨 집안에도 좋은 일일 거예요.”임원들은 이제야 안도한 듯 표정을 풀었다. 그러자 하영진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성혜원은 성휘의 유일한 자식이에요. 성혜인을 대신해 반씨 집안으로 시집갈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이기도 하고요. 가장
한편, 성혜인은 회사에서 야근을 하고 있었다.그녀가 막 일어나 집에 갈 채비를 하려는데, 하영진이 걸어들어왔다.“성 사장님, 여기는 저희 몇 사람의 사직서입니다. 확인 부탁드려요.”성혜인은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들이 이렇게 주동적으로 사직을 하리라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러자 그녀의 안색이 많이 누그러졌다.“안심하세요. 퇴직 위로금은 넉넉히 드릴 테니까요.”하영진은 성혜인의 곁에 서 있었고, 혜인은 앉아서 조금 전 받아든 사직서들을 집중해 살펴보고 있었다.하지만 가면 갈수록 그녀는 더욱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사직서에 오류가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던 그녀가 머리를 들고 하영진에게 얘기하려는데 순간, 코를 찌르는 듯한 냄새와 함께 머리가 어지러워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하영진은 청소원에게 커다란 쓰레기통을 갖고 오게 하며 위협했다.“오늘 당신이 본 건 기억에서 모조리 지워. 그렇지 않으면 다음은 당신이 될 거야!”회사 내에서 최하층 직원에 불과했던 청소원은 놀라 벌벌 떨며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영진은 그제야 만족하는 듯했다.“이 쓰레기통을 끌고 지하주차장으로 가,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 얼른 나를 따라오고.”얼굴에 온통 불안과 초조함으로 가득 찬 청소원은 하영진의 입에서 교외 폐공장에 관한 얘기가 나오자 입술을 굳게 오므렸다.통화가 종료되고, 하영진은 무뚝뚝하게 우두커니 서 있는 청소원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이곳 SY그룹에서 일한 지 어언 2년이 되었는데 평소에도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직원들의 행패도 개의치 않았다. 또 그녀는 하영진이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우는 장면을 몇 번이나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 입 뻥긋하지 않았다.그 때문에 하영진은 거침없이 행동할 수 있었다.“예전처럼만 침묵을 지켜준다면, 이 일이 끝나는 즉시로 당신 월급을 세배로 올려줄게.”청소원은 알겠다는 듯 급히 고개를 숙였다.쓰레기통을 지하주차장으로 옮기자, 그곳에는 이미 파란색 미니밴이 대기하고 있었다. 차 번호판은 인위적으로 가려진
‘내가 미움을 안 사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아직도 부족한 건가?’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통화가 종료되자 납치범은 그녀를 발로 한번 걷어찼다.“성혜인 씨, 들었어? 당신은 남편 마음속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이야.”그러더니 한 남자가 성혜인의 머리카락을 잡아 강제로 머리를 들게 했다.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본 남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되게 예쁘게 생겼네? 이렇게 이쁜데 반승제가 좋아하지 않는다고?”그는 성혜인의 머리에는 마대 자루를, 입에는 누더기 천 같은 걸 물리더니 곧장 그녀를 들쳐메고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공장 안에는 윤단미가 있었다. 그녀 역시 머리에는 마대 자루가 씌워져 있었지만, 성혜인과 다르게 입에 천을 물고 있지는 않아 계속 울고 있었다.“풀어줘! 나 좀 풀어달라고!”성혜인을 들쳐멘 남자는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말했다.“뭘 멍하니 서 있어, 빨리 철수하지 않고! 몇 분 있으면 반승제가 올 거야. 여기 남아서 걔 사냥감이 될 작정이야?”조금 전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 때만 해도 남자의 태도는 매우 강했다.왜냐하면, 40억이 걸린 일이니까 말이다.이렇게 많은 돈은 그들이 목숨을 판다 해도 평생 볼 수 없는 돈이었다. 비록 죽을 각오로 이 일에 뛰어든 것 맞지만, 살 수 있다면 살아야지, 세상 어느 누가 죽음을 바라겠는가.성혜인을 씌운 마대 자루 안에는 바람조차 통하지 않았다.그러나 얼마 안 가 그녀는 사람들이 철수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는 윤단미의 울음소리 외에 헬리콥터의 굉음도 뚜렷하게 들렸다.‘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헬리콥터까지 준비했네?’성혜인을 때렸던 그 납치범은 가장 마지막에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본 이상 아무것도 안 하고 가기에는 손해 보는 거로 생각했는지, 그는 곧장 성혜인의 머리에 씌워져 있던 마대 자루를 걷어내고 그녀의 옷을 찢었다.이윽고 성혜인의 눈동자가 움츠러들더니 남자는 몸을 숙여 그녀에게 키스하려 했다.그때, 다른 한 납치법이 돌아
불길은 모두 꺼져있는 상태였다. 성혜인은 건물 안 가장 구석진 곳에 웅크리고 있었다. 밧줄은 이미 풀려있고, 입안의 천들도 모두 빠져있었다.조금 전 번진 큰불은 하마터면 그녀를 덮칠 뻔했는데, 마침 누군가가 제때 그녀를 끌어갔다.머리에 씌워져 있던 마대 자루가 벗겨지고 혜인이 바라보니 그 사람은 다름 아닌 SY그룹의 청소원이었다.“괜찮으세요?”청소원은 가냘픈 얼굴에 온통 걱정으로 가득 찬 모습을 해 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해주고 있었다. 성혜인은 이 청소원이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때, 성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여자는 당황하며 황급히 어딘가로 뛰어갔다.성휘는 성혜인이 구석에 혼자 웅크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비록 다친 곳은 없었지만, 그녀의 옷은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졌고 머리카락도 온통 먼지들로 뒤덮여있었다.안에서는 아직도 불에 타는듯한 매캐한 연기가 자욱해 코를 찔렀다.입안이 피비린내로 가득했던 성휘는 사람을 시키며 말했다.“가... 가서 사람 부축해요.”두 보디가드들은 서둘러 성혜인의 앞으로 다가갔지만, 그녀는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일어났다.성휘의 상태가 온전치 못하다는 것을 그녀는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아빠...”그녀가 부르자 성휘는 피를 토해내며 곧바로 뒤로 꼿꼿이 쓰러졌다.사실 조금 전 반승제의 대답에서 이미 쓰러질 뻔했으나, 혜인이의 상태가 어떤지 불확실했기에 정신력으로 버틴 것이었다.그녀가 멀쩡하다는 것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자 성휘는 더는 버티지 못했다.“아빠!”놀란 성혜인은 얼른 그에게 다가갔다.성휘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혼해, 더는... 더는 이런 취급 받지 말고.”시커먼 먼지가 뒤덮인 얼굴을 하고 성혜인은 급히 옆에 있던 보디가드를 불렀다.“빨리!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 주세요!”그러자 보디가드들이 냉큼 달려와 성휘를 부축해 차에 실었다.성휘는 성혜인의 손을 꼭 잡아당기며 놓지 않으려 했다.그 모습을 본 성혜인은 눈시울
“혜인 씨,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보디가드는 반승제의 못된 말에 그녀가 상처를 받아 아무 말 안 하는 줄 알았다.성혜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럼 아빠 깨시면 집에 모셔다드리세요. 다른 사람들한테 방해 안 받게 조심해주시고요. 특히 할머니 할아버지 같은 분들한테요. 꼭 잘 보살펴주세요, 부탁드립니다.”“알겠습니다.”보디가드의 태도는 매우 공손했다. 소윤에게 일이 생기고 나서 성씨 집안의 실세는 성혜인이 되었기 때문이다.게다가 현재는 SY그룹 지분까지 보유하고 있으니, 상속자로 되기에 전혀 손색이 없었다.성혜인은 그렇게 신신당부하고는 밑에 있는 운전기사와 함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때는 이미 새벽 두 시가 다 되었다.로즈가든에 돌아와서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얼굴은 더러워졌고 머리카락은 건초들을 태운 뒤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와 재들로 가득했다.마대 자루에 오랜 시간 씌어있으면서 정장 역시 못 쓰게 되었다.그녀는 느릿느릿 목욕을 끝마치고 잠옷을 걸치고 나왔다. 기진맥진했는지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들어버렸다.성혜인이 직접 납치범을 조사하지 않은 건, 이 사건에 윤단미도 연루되어있으니 반승제 쪽에서 분명 찾아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아니나 다를까, 그 시각까지 반승제는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울고불고하던 윤단미는 이미 집으로 보낸 상태였다. 다친 곳은 없었고 단지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승제야, 오늘 일 꼭 제대로 조사해내야 해.”호텔로 돌아온 반승제는 심인우와 마주쳤다.“대표님, 알아냈습니다. 그 사람들 계좌를 이미 오래전에 해외로 옮기고 하룻밤 사이에 모두 도망갔습니다. 준비를 어찌나 철저히 했는지, 6억을 주고 전세기를 빌려서 갔더라고요. 아마 평생 돌아오지 않을 작정인가 봅니다.”이런 사람들은 가장 찾아내기 어려운 부류의 사람들이었다.성혜원은 성휘에게 받은 60억에서 무려 40억을 납치법들에게 송금했다. 그 납치범들은 예전부터 전문적으로 이런 일을 도맡아 했고, 문제가 생길 시에는 누구보다도
“여기서 일 한진 얼마나 되셨어요?”“2년이요.”그 말인즉슨 그녀는 성훈, 아니 라정옥보다도 더 일찍이 성휘가 별장에 산다는 것, 또 제원에 회사를 세웠다는 것을 알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녀는 2년 동안 늘 침묵을 지켰다.어젯밤 역시 그녀가 성휘에게 알린 것이었다.성혜인은 여자의 옷소매 아래 있는 파란 멍 자국을 발견했다. 인제 보니 성훈은 아직도 가정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듯했다.한설아는 성혜인이 더는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보자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사장님, 제발 저를 해고하지 말아 주세요.”놀란 혜인은 얼른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뭐 하시는 거예요?”한설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사장님께서 우리 가족을 싫어하시는 거 압니다...”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 한설아에 대한 인상이 깊지 않았다. 하지만 빼빼 마른 몸에, 산전수전 다 겪은 창백한 얼굴, 온몸 곳곳 가죽 벨트에 맞은 흔적을 하고 있는 한설아를 보자 순간 약간의 동정심이 생겨나는 것 같기도 했다.“해고하려던 적 없으니 우선 녹음기부터 경찰 쪽에 넘겨주세요.”한설아는 성혜인이 혹시라도 말을 번복할까 봐 급히 고개를 들어 자리를 떠났다.그녀가 떠나자 혜인은 손으로 미간을 눌렀다.‘이곳에서 2년이나 일했는데도 아빠는 저 사람이 작은아버지 아내라는 걸 몰랐단 말이야?’그러고는 옆에 있던 서류를 열어 확인하려는데 마침 반승제가 메시지를 보내왔다.그것도 혜인의 개인 핸드폰 번호로 말이다.바꿔 말하자면, 이것은 승제가 자신의 아내에게 보낸 메시지였다.메시지는 아주 간결했다.「받아.」이윽고 그녀의 핸드폰에는 계좌이체 알림이 떴다. 무려 80억이었다.이것은 반승제가 밤새 생각해낸 서류상의 아내를 달랠 방법이었다.성혜인은 입술을 물어뜯었다. 그녀 역시 이 돈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첫째는 어젯밤의 사건을 보상해주는 의미였고 둘째는 그녀의 입을 막아, 할아버지에게 고자질 못 하게 하는 것이었다.성혜인의 눈빛은 순식간에 담담해졌다.「이혼하시
성혜인은 순간 얼어붙었다. 반승제가 무슨 속셈으로 그런 소리를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그녀는 로즈가든으로 돌아가 자신이 가장 아끼는 미술 도구들을 갖고 익숙하게 호텔로 향했다.반승제의 호텔 방에 도착하자, 창문 앞 캔버스에 놓인 한 폭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그 그림을 보자마자 성혜인은 단번에 이것이 스승님이 그린 것이라는 걸 알았다.“반 대표님?”그녀는 욕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얼마 안 가, 반승제가 문을 열고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왔다.“시환이가 나한테 준 그림이야. 주영훈 선생님께서 절반만 그리고 가셨다지 뭐야, 마저 채워 넣을 수 있겠어?”성혜인은 그림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산수화였는데 스승님 특유의 자유분방한 붓질을 모방하면 채워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올려 반승제를 조용히 바라보며 물었다.“얼마나 주실 생각이신데요?”그녀의 말에는 아무런 감정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흡사 반승제가 돈을 주지 않으면 바로 자리를 뜰 것처럼 말이다.반승제는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휙 던지고는 그녀를 바라보며 다가갔다.“이런 기회는 잡고 싶어도 못 잡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맞는 말이었다. 그가 이 그림을 세상에 내놓는다면 수많은 화가는 물론이고 업계에서 이름을 떨친 유명한 사람들도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지원할 테니까 말이다.반승제에게 신세를 지게 하는 건 절대 돈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성혜인은 곧바로 다리를 들어 밖으로 나갈 자세를 취했다.“대표님, 죄송하지만 오늘 밤 일이 있는 걸 깜빡했습니다.”조금도 망설이지 않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반승제의 표정은 순간 차가워졌다. 그는 소파에 앉으면서 그녀를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안았다.“왜? 오늘 밤 기분이 안 좋아?”그가 성혜인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성혜인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어제의 일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그의 얼굴에 손을 날리고 싶을 정도로 확실히 그녀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이내 이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