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인 씨,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보디가드는 반승제의 못된 말에 그녀가 상처를 받아 아무 말 안 하는 줄 알았다.성혜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럼 아빠 깨시면 집에 모셔다드리세요. 다른 사람들한테 방해 안 받게 조심해주시고요. 특히 할머니 할아버지 같은 분들한테요. 꼭 잘 보살펴주세요, 부탁드립니다.”“알겠습니다.”보디가드의 태도는 매우 공손했다. 소윤에게 일이 생기고 나서 성씨 집안의 실세는 성혜인이 되었기 때문이다.게다가 현재는 SY그룹 지분까지 보유하고 있으니, 상속자로 되기에 전혀 손색이 없었다.성혜인은 그렇게 신신당부하고는 밑에 있는 운전기사와 함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때는 이미 새벽 두 시가 다 되었다.로즈가든에 돌아와서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얼굴은 더러워졌고 머리카락은 건초들을 태운 뒤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와 재들로 가득했다.마대 자루에 오랜 시간 씌어있으면서 정장 역시 못 쓰게 되었다.그녀는 느릿느릿 목욕을 끝마치고 잠옷을 걸치고 나왔다. 기진맥진했는지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들어버렸다.성혜인이 직접 납치범을 조사하지 않은 건, 이 사건에 윤단미도 연루되어있으니 반승제 쪽에서 분명 찾아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아니나 다를까, 그 시각까지 반승제는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울고불고하던 윤단미는 이미 집으로 보낸 상태였다. 다친 곳은 없었고 단지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승제야, 오늘 일 꼭 제대로 조사해내야 해.”호텔로 돌아온 반승제는 심인우와 마주쳤다.“대표님, 알아냈습니다. 그 사람들 계좌를 이미 오래전에 해외로 옮기고 하룻밤 사이에 모두 도망갔습니다. 준비를 어찌나 철저히 했는지, 6억을 주고 전세기를 빌려서 갔더라고요. 아마 평생 돌아오지 않을 작정인가 봅니다.”이런 사람들은 가장 찾아내기 어려운 부류의 사람들이었다.성혜원은 성휘에게 받은 60억에서 무려 40억을 납치법들에게 송금했다. 그 납치범들은 예전부터 전문적으로 이런 일을 도맡아 했고, 문제가 생길 시에는 누구보다도
“여기서 일 한진 얼마나 되셨어요?”“2년이요.”그 말인즉슨 그녀는 성훈, 아니 라정옥보다도 더 일찍이 성휘가 별장에 산다는 것, 또 제원에 회사를 세웠다는 것을 알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녀는 2년 동안 늘 침묵을 지켰다.어젯밤 역시 그녀가 성휘에게 알린 것이었다.성혜인은 여자의 옷소매 아래 있는 파란 멍 자국을 발견했다. 인제 보니 성훈은 아직도 가정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듯했다.한설아는 성혜인이 더는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보자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사장님, 제발 저를 해고하지 말아 주세요.”놀란 혜인은 얼른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뭐 하시는 거예요?”한설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사장님께서 우리 가족을 싫어하시는 거 압니다...”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 한설아에 대한 인상이 깊지 않았다. 하지만 빼빼 마른 몸에, 산전수전 다 겪은 창백한 얼굴, 온몸 곳곳 가죽 벨트에 맞은 흔적을 하고 있는 한설아를 보자 순간 약간의 동정심이 생겨나는 것 같기도 했다.“해고하려던 적 없으니 우선 녹음기부터 경찰 쪽에 넘겨주세요.”한설아는 성혜인이 혹시라도 말을 번복할까 봐 급히 고개를 들어 자리를 떠났다.그녀가 떠나자 혜인은 손으로 미간을 눌렀다.‘이곳에서 2년이나 일했는데도 아빠는 저 사람이 작은아버지 아내라는 걸 몰랐단 말이야?’그러고는 옆에 있던 서류를 열어 확인하려는데 마침 반승제가 메시지를 보내왔다.그것도 혜인의 개인 핸드폰 번호로 말이다.바꿔 말하자면, 이것은 승제가 자신의 아내에게 보낸 메시지였다.메시지는 아주 간결했다.「받아.」이윽고 그녀의 핸드폰에는 계좌이체 알림이 떴다. 무려 80억이었다.이것은 반승제가 밤새 생각해낸 서류상의 아내를 달랠 방법이었다.성혜인은 입술을 물어뜯었다. 그녀 역시 이 돈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첫째는 어젯밤의 사건을 보상해주는 의미였고 둘째는 그녀의 입을 막아, 할아버지에게 고자질 못 하게 하는 것이었다.성혜인의 눈빛은 순식간에 담담해졌다.「이혼하시
성혜인은 순간 얼어붙었다. 반승제가 무슨 속셈으로 그런 소리를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그녀는 로즈가든으로 돌아가 자신이 가장 아끼는 미술 도구들을 갖고 익숙하게 호텔로 향했다.반승제의 호텔 방에 도착하자, 창문 앞 캔버스에 놓인 한 폭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그 그림을 보자마자 성혜인은 단번에 이것이 스승님이 그린 것이라는 걸 알았다.“반 대표님?”그녀는 욕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얼마 안 가, 반승제가 문을 열고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왔다.“시환이가 나한테 준 그림이야. 주영훈 선생님께서 절반만 그리고 가셨다지 뭐야, 마저 채워 넣을 수 있겠어?”성혜인은 그림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산수화였는데 스승님 특유의 자유분방한 붓질을 모방하면 채워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올려 반승제를 조용히 바라보며 물었다.“얼마나 주실 생각이신데요?”그녀의 말에는 아무런 감정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흡사 반승제가 돈을 주지 않으면 바로 자리를 뜰 것처럼 말이다.반승제는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휙 던지고는 그녀를 바라보며 다가갔다.“이런 기회는 잡고 싶어도 못 잡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맞는 말이었다. 그가 이 그림을 세상에 내놓는다면 수많은 화가는 물론이고 업계에서 이름을 떨친 유명한 사람들도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지원할 테니까 말이다.반승제에게 신세를 지게 하는 건 절대 돈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성혜인은 곧바로 다리를 들어 밖으로 나갈 자세를 취했다.“대표님, 죄송하지만 오늘 밤 일이 있는 걸 깜빡했습니다.”조금도 망설이지 않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반승제의 표정은 순간 차가워졌다. 그는 소파에 앉으면서 그녀를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안았다.“왜? 오늘 밤 기분이 안 좋아?”그가 성혜인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성혜인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어제의 일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그의 얼굴에 손을 날리고 싶을 정도로 확실히 그녀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이내 이성
성혜인의 눈매는 매우 아름다웠는데 특히나 빨갛게 번질 때 가련하면서도 불쌍한 그 모습이 어쩐지 보기 좋았다.그녀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이를 꽉 깨물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이런 표정은 정말이지 키스를 부르는 얼굴이었다.하지만 반승제가 80억을 송금한 일이 생각나 그녀는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80억으로 그녀의 억울함을 맞바꾼다면 손해 볼 게 없었기 때문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였다.“죄송합니다, 대표님.”아직 두 사람은 협력상태에 있다. 고객은 혜인에게 있어서 왕 같은 존재였다.그러므로 자신의 ‘왕’에게 다짜고짜 화를 내는 건 정말이지 안될 일이었다.반승제는 자라오면서 처음으로 반태승이 아닌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 것을 겪어봤다.그러나 그는 전혀 화는 나지 않았고 오히려 조금은 신기했다.그녀가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볼 때, 그의 피도 함께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굳어버린 반승제는 침을 두 번 꿀꺽 삼키더니 곧장 그녀의 뒤통수를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었다.성혜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살짝 비켰다.“네 번째는 오늘 밤인가요?”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보자 반승제는 어딘가 마음이 답답해 나는 것 같았다.방에 있는 창문을 열지 않아서인지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성혜인은 천천히 그를 밀어내더니 창문 앞에 놓인 그림을 보며 말했다.“60억이면 반 대표님을 도와 마저 완성하겠습니다.”반승제는 침묵했다.성혜인의 생각은 간단했다. 반승제 같은 사람은 돈이 부족한 사람이 아닌 걸 알기 때문에 이왕 가질 수 있으면 많이 가져놓자는 게 그녀의 속셈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도 돈이 부족한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하물며 몇십억은 반승제에게 있어서 큰돈이 아니었다.반승제 역시 오늘 밤 성혜인의 태도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고 네 번째 관계를 갖기에는 안된다고 생각했다.“그래, 60억으로 하자.”그제야 성혜인은 자신이 갖고 온 물감을 하나하나 펼쳐놓더니 욕실에 가서 물을 담아왔다.반승제는 소파에 앉아 그녀가 바쁘게 욕실
늘 체력단련을 했던 반승제의 힘은 어마어마했다. 그는 성혜인을 공중으로 붕 뜨게 안은 뒤 차가운 벽에 밀어붙였다.“대표님, 네 번째예요.”그녀는 비교적 온순한 태도로 시선을 아래도 내렸다.반승제는 그자세로 그녀에게 키스했다. 쏟아지는 뜨거운 물 속에서도 그의 얼굴은 유난히 빛났다.성혜인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그녀가 여태껏 봐온 얼굴 중에 반승제는 제일 잘생긴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생김새는 날카로우면서도 입술은 얇은 게 감정이 격해질 때면 M자 모양이 더욱 선명해져 자신을 절제하려는 듯한 모습이 눈에 확 보였다.늘 시크하고 고고한 그에게 이런 표정을 짓게 하는 것은 정말이지 은밀한 만족감을 느끼게 했다. 이건 인간의 나쁜 근성이다.성혜인은 그제야 왜 민지가 늘 반승제와 자서 손해 볼게 없다고 얘기했는지 알 것 같았다.그녀가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아지자 반승제도 더는 사양하지 않았다.욕실 안은 뜨거운 열기로 자욱했고 그들의 소리는 오랫동안 지속 되었다.한참 뒤, 반승제에게 안겨 욕실에서 나온 성혜인은 마치 면발처럼 축 늘어져 있는 상태였다.이불에 눕혀졌을 때 그녀는 반승제가 계속하려는 것을 눈치채고 미간을 구기며 몸을 돌렸다.“아파요.”밤이 기므로 반승제는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하지만 앞에서 포효하고 있는 남성의 몸이 그녀의 눈에는 아무런 매력이 느껴지지 않았는지, 성혜인은 어느새 깊은 잠이 들고 말았다.그녀에게 있어 열 번은 단지 완수해야 할 임무에 그치지 않았다.반승제는 어려서부터 많은 여자가 그를 쫓아다녔다. 이성을 거절하다 못해 거절하는 게 귀찮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웬일인지 혜인이 자신에게 조금도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는 살짝 불쾌해졌다.“페니야?”그는 혜인의 얼굴을 붙잡으며 말했다.그러자 그녀는 잠결에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홱 뿌리쳤다.그래서 반승제는 하는 수없이 침대에 누웠다.성혜인에 대한 반승제의 느낌은 많이 이상했다. 긁고 싶어도 긁을 수 없는 마치 뼈가 간지러운 느낌
반승제가 침대로 돌아오자 성혜인은 몽롱해서 그에게 다가갔다.그러고는 한 손으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그러자 그는 돌아누워 자세히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높은 콧대에 좋은 피부, 또 속눈썹은 길지 않았지만, 숱이 촘촘했다.머리를 잘라서인지 잘 때의 모습도 어딘지 귀여웠다.그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꽉 껴안았다. 그러고는 머리를 숙여 숨을 크게 들이쉬었는데 마치 하얀 고양이가 품에 안겨있는 것 같았다.그 바람에 성혜인은 잠깐 깨어났는데 그의 얼굴을 보자 갑자기 웃는 것이었다.“가짜임이 틀림없어.”그녀는 그날 본 편지를 두고 하는 얘기였다. 반승제는 자신의 옆에 누워있으니까 말이다.꿈을 꾸며 잠꼬대를 한 성혜인은 이 말을 끝으로 다시 잠에 빠졌다.그녀의 미소진 얼굴을 본 반승제는 마치 누군가에게 심장을 두들겨 맞은 듯 얼얼해진 느낌이 들었다.“뭐가 가짜라는 거야?”그는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싶었다.성혜인은 또 몽롱하게 눈을 뜬 채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달콤한 말끝이 약간 길게 늘어져서 마치 반승제의 뼛속으로 퍼져가는 것 같았다.그는 혜인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거기다 온시환이 해준 얘기들이 생각나며 곰곰이 돌이켜보니 확실히 그녀는 말이 안 되는 행동들을 많이 한 것 같았다.결혼한 여자가 남자에게 약을 발라주고 그에게 깔렸을 때 얼굴이 발그레해지며 또 몰래 그를 그리고 전에는 자주 그를 바라보며 멍을 때리고...‘이게 좋아하는 게 아니면 도대체 뭐야? 입으로 절대 인정하지 않는 걸 보면, 무슨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가?’반승제가 남녀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많이 생각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는 윤단미에게서도 이런 감정을 느껴보지 못했다.단지 늘 이성적으로 그녀에게 잘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어려서부터 삶이 순조로웠던 그는 타고난 총명함으로 뭘 하든 성공해냈다.그건 그의 형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반승제는 집안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한때는 금융을 배우고
성혜인은 자기최면을 거는데 소질이 있었다.‘이 수표를 가져가서 현금으로 바꿔 통장에 넣으면 카드에 순식간에 140억이 생기는 거네!’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걷는 것도 더 힘이 나는 것 같았다.그러나 목에 난 붉은 자국들을 보자 그녀는 또 미간을 찌푸렸다.‘다음부터는 조금만 살살 물라고 말해야 하나, 매번 스카프를 두르고 다니는 것도 이상하잖아.’호텔을 갓 빠져나오는데 경찰서에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영진이 성혜원의 이름을 고발했다는 소리였다.그 시각 성혜원은 이미 해외에 도착해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증거가 확실했기 때문에 다국적으로 수배를 내릴 수 있었고 일단 그녀가 해외에서 발견되기만 하면 바로 국내로 송환할 수 있었다.그녀가 자신의 진짜 이름을 숨기지만 않는다면 말이다.하영진을 비롯해 잡혀 온 몇몇 임원들은 이미 SY그룹에 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현재 SY그룹은 이 사람들의 사직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에 부닥쳐있다.그 와중에 다행히 성혜인이 BK사와의 협력 건을 추진해왔고 BK사에서는 서민규에게 파견을 보냈다.사람을 잘 다루는 이선은 서민규와 성혜인의 관계가 괜찮은 것을 파악하고 일부러 서민규를 보냈다. 또 그건 간접적으로 성혜인에게 정을 판다는 소리이기도 했다.성혜인은 곧바로 이선에게 전화를 걸어 거듭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고 서민규와의 거래도 성공적으로 체결했다.“여동생은 어떻게 됐어요?”“그냥 조금 놀랐나 봐요. 상처 꿰매고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서민규는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성혜인과의 거래에서는 확실히 분명히 하는 게 있었다. 그건 바로 묻지 말아야 할 것은 묻지 않는 것과 지켜야 할 말은 절대 지키는 것.예를 들어 지난번 장석호에게 납치당했을 때와 같이 말이다.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라는 말에 그는 두들겨 맞아 거의 정신을 잃어가고 있음에도 절대 전화를 걸지 않았다.그리고 현재, 분명히 성혜인이 평범한 실내 디자이너라고 알고 있을 텐데 어떻게 내화를 대표로 계약을 체결하는지, 서민규는 궁금할 법도
오늘도 역시 잘 노는 귀공자 차림을 한 신이한이 뻔쩍뻔쩍한 스포츠카를 몰고 와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페니 씨, 우선 사장의 자리를 갖게 된 걸 축하해요. 근데 BK사와는 협력하자 했으면 왜 저는 안 찾아와요?”성혜인도 신이한을 찾아가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단지 매번 신이한을 찾으러 갈 때면 늘 그가 엄청난 일을 만들었기 때문에 꺼렸던 것이었다.신이한은 차 문을 열며 그녀에게 차에 타라 손짓했다.“페니 씨가 저를 찾아오지 않으니 제가 찾아와야죠. 이렇게 적극적으로 협력 건을 제시하는데, 어때요?”그제야 성혜인은 거절하지 않고 차에 올라탔다.신이한은 단발머리를 한 성혜인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했다.‘미친! 너무 예쁘잖아!’모두가 반승제의 아내는 못난이라고 말했는데, 만약 성혜인이 못난 거면 감히 자신이 예쁘다고 말할 사람은 누구도 없을 것 같았다.“일 때문에 그 아름다운 머리를 자른 거예요?”그는 계속해서 농담을 하다가 문득 그녀의 목에 둘려있는 스카프를 발견했다. 비록 그 모습도 예쁘긴 했지만, 눈치 빠른 신이한은 뭔가 이상함을 감지해냈다.성혜인은 신이한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는지도 모른 채 단 한마디만을 건넸다.“반승제 씨가 있는 곳에는 가고 싶지 않아요.”신이한은 핸들을 꽉 잡으며 피식 웃었다.“남편을 그렇게 보기 싫어요? 윤단미 씨한테 한 수 배워야겠네요. 듣기로는 요 며칠 어디 다쳤다나? 그래서 반 대표님한테 하루에도 10통 가까이 전화를 건다고 하던데요.”성혜인은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신 대표님은 많이 한가하신가 보네요? 여자들 사이의 가십거리도 이렇게 잘 알고 있는걸 보면요.”“한가한 게 아니에요. 페니 씨랑 관련된 일에 관심이 있을 뿐이지.”신이한의 말이 끝나자 차 안에는 갑자기 침묵이 돌았다.성혜인도 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미간만 구길 뿐이었다.그때, 신이한이 몇 마디 덧붙이며 말했다.“반 대표가 진짜로 윤단미 씨랑 결혼하겠다 하면 어쩔거예요?”그러자 성혜인이 의심
연승혁을 마주했을 때 원아정의 눈가에 잠시 상처받은 기색이 스쳤다.“오빠...”하지만 연승혁은 등을 기대며 차갑게 말했다.“할 말 있으면 똑바로 해. 쓸데없는 감성팔이를 하려는 거라면, 당장 사람 불러서 쫓아낼 테니까.”원아정은 그가 얼마나 냉정한지 잘 알고 있었기에 애써 꾸며낸 애잔함도 순식간에 거둬들였다.연승혁이 옆 소파를 가리키며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조용히 자리에 앉은 원아정은 이내 평소의 얼굴빛을 되찾았다.그때 안정숙이 입을 열었다.“마침 승혁이도 있으니, 구은우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해보거라.”애초에 원아정은 이 일을 말하려고 온 터였다. 그녀는 냉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좋아요. 오늘 저도 그 얘기를 하려고 왔으니까요.”그녀는 가방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 속 남자의 눈매는 연승혁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안정숙과 연승혁 모두 한눈에 알아챘다. 이 남자는 분명 연씨 가문의 핏줄이었다.이미 벼랑 끝에 선 원아정은 더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만약 공지민을 끌어내리지 못한다면 자신이 해외로 쫓겨날 것은 불 보듯 뻔했으니 더 이상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었다.“승혁 오빠, 이 얼굴 잘 보세요. 연씨 가문이 큰 혼란에 휩싸였던 그때, 제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하시죠? 아버님께서 밖에 아들을 하나 두셨다고요. 물론 그건 아버님 잘못이 아니었어요. 그 모든 게 누군가가 꾸민 계략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어머님이 그 일을 평생 떨쳐내지 못하신 이유가 뭔지 아세요? 언니가 실종된 것도 큰 상처였지만 아버님이 다른 여자를 품었다는 사실은 어머님께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이었어요. 그 상처가 결국 평생 지워지지 않는 한으로 남은 거죠. 그리고 어머님께서는 그 여자가 임신한 걸 알고도 가만두지 않으셨어요. 그 여자는 목숨을 건져 간신히 도망쳤고, 결국 아이를 낳았어요. 그 아이가 바로 구은우예요. 그러니까 구은우는 승혁 오빠의 이복동생이라는 말이에요.”연승혁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그는 담배를 꺼내려다 안정숙의 시선을 의식하고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진 원아정은 불안감에 휩싸여 안절부절못했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만약 안정숙이 원진과 상의한다면 그녀는 반드시 해외로 쫓겨날 것이다. 원진은 절대 그녀 편에 서지 않을 터였다.원아정은 서둘러 자신을 위해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공지민 그년 때문에 내 인생은 완전히 끝장났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녀는 곧장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래는 공지민이 숨겨둔 그 사람의 정체를 밝혀내라고 시켰건만 돌아온 보고는 실수로 그 사람을 놓쳤다는 것이었다.“뭐? 놓쳤다고?”원아정은 분노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이렇게 계속 끌려다니면 모든 걸 잃고 말 것이다.그녀는 차를 몰고 공지민이 사는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원아정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지금이라도 공지민을 보기만 하면 망설임 없이 액셀을 밟아 그대로 들이받아 죽여버리겠다고.하지만 공지민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원아정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매일 공지민의 집 근처를 돌며 기회를 엿보았다.차를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숨겨두고 혹시라도 온시환의 사람들이 눈치챌까 멀리서 관찰했다.하지만 사흘이 지나도록 공지민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고 대신 안정숙이 공지민을 만나러 오는 모습이 목격되었다.그 광경을 보자 원아정의 얼굴에는 질투가 가득 차올랐다.‘고등학교 때 그렇게 짓밟아 놓았던 공지민이 나를 밟고 올라가다니... 이게 말이 돼?’분노를 삭이며 핸들을 꽉 움켜쥔 그녀의 시야에 드디어 공지민이 나타났다.공지민은 안정숙과 함께 나와 있었다. 안정숙은 공지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무언가를 이야기했고 두 사람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그 평온한 광경을 바라보는 원아정은 질투에 사로잡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이를 악문 원아정은 다시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사람 정체 아직도 못 밝혀냈어? 공지민이 숨겨둔 그 사람 말이야!”“그 집에 배달을 다녀온 사람에게 물어보니 그곳에 사는 사람은 여자
온시환은 뒤에서 움직일 만한 세력이 많지 않았기에 드러난 수단만을 써야 했고 그만큼 더 조심해야 했다.무엇보다 이 일에 서주혁이나 반승제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이건 그가 자신의 여자를 위해 스스로 결정한 일이었고 그러기에 자신의 힘만으로 해결해야 했다.물론 만약 상황이 공지민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악화한다면 그때야 비로소 그 둘에게 도움을 청할지도 몰랐다.공지민은 온시환의 이야기를 들으며 연승혁이 얼마나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인지 새삼 깨달았다.온시환은 그동안 자신이 알아낸 연씨 가문의 과거와 연승혁이 회색지대 사업을 정리하며 보여준 철저하고도 잔혹한 수완에 대해 천천히 설명했다.공지민은 그저 듣기만 했을 뿐인데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온시환이 그를 상대하기 어렵다고 했던 이유를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았다.연승혁이 이토록 잔혹하지 않았다면, 아마 먼 옛날에 태어났어도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으로 불렸을지도 모른다.이어 온시환은 연씨 가문에서 안정숙이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겉보기에는 자애로워 보이는 안정숙도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시환의 품에 몸을 완전히 기댄 채 생각했다.온시환의 눈에 그녀는 얼마나 어리석고 무모해 보였을까?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하겠다고 나섰던 그녀가 얼마나 우스웠을까?연씨 가문의 식사 자리에서 온시환의 표정이 단숨에 어두워진 이유도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는 아마도 그녀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려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온시환이 정말 그녀를 좋아한다면, 대체 어떤 마음으로 그녀를 도우려 했을까?공지민은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요즘 들어 온시환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녀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그날 저녁, 연씨 가문에서 또다시 값비싼 선물들이 도착했다. 이번에는 안정숙이 직접 방문하기까지 했다.안정숙은 확고한 의지를 보이며 공지민을 받아들이려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태도는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지민아, 이리 와 보렴. 최근에
그날 밤, 온시환의 사람들이 염정아가 머물던 집 주변을 철저히 조사한 결과 원아정의 사람들이 이미 철수했음을 확인했다. 그 즉시 염정아를 온시환의 별장으로 안전하게 옮겼다.염정아는 전과 다름없이 방에서 나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음식을 먹을 때조차도 방에서만 해결했다.공지민은 염정아를 제원으로 불러오기 전까지 그녀가 이렇게 협조적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특히, 이번에는 염정아가 외부인의 이상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원아정이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공지민은 마음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정아야, 이번에는 네가 그 배달원의 이상함을 눈치챈 덕분이야.”염정아는 그릇 안의 음식을 먹으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너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어.”공지민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말했다.“아니야, 넌 한 번도 내게 폐를 끼친 적이 없어.”염정아는 눈빛이 반짝이며 놀란 듯 공지민을 쳐다보았다. 이내 그녀는 천천히 손에 든 것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지민아, 난 그저 네가 구은우의 복수를 끝낸 뒤엔 평범하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 사실 나도 한때 복수심에 사로잡혀 살았어. 그때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곤 했지. 세상과 부모를 원망하며 미친 사람처럼 살았어. 하지만 어느 순간 생각했어. 이렇게 짧은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나를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는 걸. 그리고 깨달았지. 나는 너무 나약했고, 도망칠 용기도 반항할 용기도 없었어. 괴롭힘을 당해도 그냥 참기만 했고. 사람은 참을수록 더 고통스러워진다는 걸 그땐 왜 몰랐을까?”염정아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공지민은 그녀를 천천히 안으며 말했다.“난 모르겠어. 복수가 끝난 후엔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그때 가봐야 알 것 같아.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염정아는 별장에 들어오면서 온시환을 보았다.그녀의 눈에 온시환은 매우 훌륭한 남자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그가 공지민을 바라보는 눈에는 온통 사랑이 담겨 있었다.
“계속 조사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요즘은 다들 섣부른 행동 하지 말라고.”잠시 후 그는 한마디를 덧붙였다.“항상 하는 말이지만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라. 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목숨을 잃으면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옆에 서 있던 부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받들었다.연승혁은 옆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음은 공허했다.과거 연씨 가문이 회색지대 사업을 했을 때는 항상 목숨이 위태로웠다. 하지만 사업을 정리하고 모든 것을 합법적으로 전환한 이후 몇 년 동안 연씨 가문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그의 뒤를 캐고 있다는 사실에 불쾌하면서도 묘한 흥미를 느꼈다. 연승혁은 타고난 모험가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그래, 누군지 한번 보자고.’연승혁은 문득 조금 전 할머니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떠올렸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며 한 이름을 언급했었다.‘구은우?’하지만 연승혁은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람을 죽여왔기에 그 이름조차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저 하찮고 눈에 띄지 않는 존재일 뿐이었다.그는 다시 담배를 피우며 옆 사람에게 말했다.“뭔가 소식이 들어오면 바로 알려.”“알겠습니다, 형님.”배는 여전히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한편, 제원에서 원아정은 연씨 가문을 떠난 뒤 복잡한 생각에 빠졌다.그녀는 공지민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했다. 공지민이 더 이상 제원에서 발붙일 수 없게 만들 작정이었다.차에 올라탄 그녀는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집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냈어?”“아가씨, 우리가 10시간 동안 지켜봤지만 안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밖에서 음식을 배달한 것 같습니다.”원아정은 화를 내며 버럭 소리쳤다.“밖에서 배달 음식이 들어갔다고? 너희들 머리는 장식이야? 배달원으로 위장해서 안을 확인할 생각도 못 해? 도대체 내가 왜 너희들을 고용한 거야!”전화를 끊은 뒤 그들은 그제야 원아정의 말에 따라 배달원으로 위장해 염정아가 머무
안정숙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그게 무슨 뜻이니?”원아정은 얼굴에 떠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차분히 말했다.“아, 할머니. 정말 모르신다면 승혁 오빠를 불러보세요. 저도 그냥 한 번 해본 소리니까요. 어차피 지금은 공지민이라는 친손녀를 얻으셨으니 제 말은 믿지도 않으실 테고요. 제가 할 말은 다 했으니, 이만 가볼게요.”“아정아, 너 나를 원망하는 거니?”원아정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갔다.안정숙은 지팡이를 꽉 쥐며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어르신, 아정 씨는 아마 결혼식 사건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너무 무례했습니다.”안정숙은 옆에 있던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차분히 말했다.“아정이가 뭘 원망할 자격이 있나. 그날 일을 문제 삼지 않은 것만으로도 내가 충분히 관대했던 거야. 저 아이는 단지 체면만 구긴 거지. 하지만 지민이는 그날 목숨을 잃을 뻔하지 않았나. 역시나 반성할 줄 모르고, 저 아이를 집안에 들이지 않길 정말 잘했어.”가정부는 그녀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위로했다.“어르신, 보시는 눈이 정확하십니다. 아정 씨는 확실히 그런 그릇이 아니죠.”설령 공지민과 관련된 일이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원아정이 연씨 가문에 들어오면 결국 문제만 일으키게 될 것이다.최근 공지민과 관련된 일로 안절부절못하던 안정숙은 원아정의 말이 떠올라 머리가 다시 지끈거렸다. 혹시 그 당시 그녀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던 건 아닐까?그녀는 즉시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이미 바다에 나가 있었다. 최근 거래에 문제가 생겼고 돌아오려면 사흘이 걸릴 거라고 했다.“할머니, 사흘 후에 찾아뵙겠습니다.”안정숙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었다.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안했다.그녀는 결국 직접 공지민을 만나러 가기로 결심했다. 직접 그녀를 만나야만 마음의 불안을 가라앉힐 수 있을 것 같았다.한편, 연승혁은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원아정은 마치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그녀는 황급히 액셀을 밟아 한적한 도로 위에 차를 멈췄고 주변 교통경찰이 다가왔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확실한 정보야?”“확실해. 연씨 가문에서 이미 공식적으로 발표했어. 혹시 연승혁이 너를 차단해서 SNS에 올린 글을 못 본 거 아니야?”이 말은 원아정의 정곡을 저대로 찔렀다. 연승혁은 정말 그녀를 차단했다.원아정은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전화를 끊고 바로 안정숙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안정숙도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쯤 되니, 이 소문이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고 그녀는 직감했다.그래서 안정숙이 그렇게 공지민을 신경 쓴 거였다. 심지어 내 결혼식도 취소하면서까지...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그래서 그랬던 거구나!’원아정은 마치 하늘이 자신에게 터무니없는 장난을 치는 것만 같았다.설마 결혼식장에서 안정숙이 공지민을 알아본 걸까?‘망할!’그녀는 속으로 수없이 욕을 퍼부었지만 상황이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연승혁과의 관계는 이제 완전히 끝났고 그녀는 자신이 공지민에게 했던 말들이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공지민이 나에게 복수한다면 어떡하지?’그녀는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안 돼. 내가 먼저 손을 써야 해.’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구은우라는 이름이 떠올랐다.원아정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더니 이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내가 왜 구은우를 잊고 있었지? 구은우를 죽인 건 연승혁 아니었나? 공지민이 이제 연씨 가문의 사람이 됐다면 당연히 복수를 원하지 않을까?’그녀는 생각을 정리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하기 시작했다.‘하지만 너무 우연 아닌가?’공지민이 정말 연씨 가문의 사람일까?혹시 공지민이 연승혁에게 접근해 구은우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이 모든 걸 계획한 건 아닐까?그녀는 이 모든 상황이 단순히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결론지었다.원아정은 갑자기 연승혁과 공지민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떠올랐다.이 생각이 들자
안정숙은 깊은 한숨을 쉬며 연승혁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자. 네가 지민이를 잘 지켜봐.”연승혁은 안정숙과 함께 밖으로 잠시 산책을 나섰다. 그런데 그때 그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원아정이었다.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내 전화를 차단해 버렸다.원아정은 화가 치밀었다. 최근 연승혁에게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는 한 번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오늘 아침에는 SNS에 올려 자신과 완전히 연을 끊겠다고 공표하기까지 했다.그녀는 자신이 모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것만 같아 분노와 절망에 휩싸였다.‘이게 다 공지민 때문이야!’원아정은 즉시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공지민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고가 들어왔다.“아가씨, 공지민이 오늘 외출해서 쇼핑 중입니다.”“주소를 보내요.”원아정은 바로 차를 몰아 그 장소로 향했다. 그녀는 쇼핑몰에서 공지민을 발견했다.공지민은 아직도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었고 목발을 짚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강민지가 함께 있었다.강민지는 공지민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기분 전환 겸 바람이라도 쐬게 하려고 그녀를 불러냈다.공지민은 목발을 짚고 느린 걸음으로 걸으며 한 시계 매장을 지나던 중 눈길을 멈췄다. 한정판 시계를 보며 염정아에게 선물로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얼마 전 자신이 가진 40억을 전부 염정아에게 넘겨주고 정작 자신에겐 한 푼도 남기지 않았다.하지만 오늘 아침 온시환이 그녀에게 카드를 건넸다. 카드 안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연씨 가문에서 보낸 선물들에 자극받은 탓인지, 공지민은 보상의 의미로 염정아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매장 직원에게 시계를 꺼내 보여달라고 했다.강민지는 옆에서 시계를 보며 감탄을 연발했다.“정말 예쁘다! 피부 톤이랑도 잘 어울려요. 게다가 다이아까지 박혀 있어서 완전 고급스럽네요.”공지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시환 씨가 오늘 아침에
공지민은 연승혁의 말을 듣고 속으로 당혹스러움을 감추며 차분한 표정을 유지했다. 사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혈육의 정이라 할 만한 것도 없었지만 연승혁은 그와 상관없이 여전히 친근하고 가볍게 말을 이어갔다.온시환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연승혁은 쉬운 상대가 아니야. 항상 경계해야 해.’공지민은 이 순간에도 그의 말에 따라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연승혁은 손에 든 사과를 한입 베어 물며 미소를 지었다.“누나, 마음이 바뀌면 나한테 연락해요. 이건 내 전화번호예요.”그는 카드 한 장을 꺼내 옆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개인 번호예요.”공지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가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테이블 위에 놓인 카드를 바라보았다.카드는 별다른 장식 없이 간단했고 확실히 개인적인 물건처럼 보였다.그녀는 카드를 가방에 넣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연승혁의 의도가 도무지 파악되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상황을 지켜보며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연승혁이 집 밖으로 나가 차에 오르자마자 전화가 걸려 왔다. 상대는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그는 운전석 의자에 등을 기대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최근에 재미있는 걸 발견해서 가끔 들러서 장난 좀 치고 있어.”전화기 너머에서 상대가 흥미로워하며 물었다.“들리는 말로는 누나를 찾았다고 하던데, 그게 진짜야?”“그래, 진짜야.”연승혁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 전화를 받으며 대답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연씨 가문으로 데려올 거야.”상대는 의아한 듯 반문했다.“승혁아, 근데 너 태도가 좀 이상한데? 그동안 네가 누나를 찾은 건 할머니를 위해서였잖아. 설사 누나를 찾았다고 해도 이렇게 적극적일 이유는 없을 텐데, 왜 그렇게 흥미를 보이는 거야?”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정말 흥미로운 여자거든.”상대가 무언가 더 말하자 그는 가볍게 욕을 내뱉고 전화를 끊었다.차를 몰아 연씨 가문 저택에 도착